728x90
책소개
우리 시대에 다시 부르는 ‘삶에 대한 찬가’
삶의 찬란한 기쁨을 잊고 나르시시즘의 창백한 공간으로
숨어버린 이들에게 일깨워주는 놀라운 행복의 기술
또 한 명의 지젝이 나타났다! 끝없는 장광설과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비평으로 “지젝거린다”라는 농담까지 만들어졌지만, 이런 지젝에 못지않은 현란한 지적 유희와 번뜩이는 통찰로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 철학자가 있다. 이 책의 저자 로베르트 팔러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으로 꼽히는 팔러는 철학의 모든 시대, 수많은 지성들의 가르침을 훑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기쁨과 쾌락을 일깨운다. 안전, 건강, 부, 도덕 등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 신자유주의적 바른생활 세계에서는 ‘나쁜 삶’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감각적, 물질적 해방을 노래한다.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는 우리에게 이 살아 숨 쉬는 세상에서 도피해 나르시시즘의 허상에 빠져 있기를 강요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적이다.
팔러가 말하는 ‘나쁜 삶의 기술’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모두 내 삶의 천재가 되는 듯하다. 에피쿠로스, 에픽테토스, 세네카, 몽테뉴, 스피노자, 파스칼, 칸트, 헤겔, 니체, 프로이트, 라캉, 마르크스와 엥겔스, 바슐라르, 하위징아, 바타유, 비트겐슈타인, 알튀세르, 셰익스피어, 브레히트, 드 사드…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빈의 작가와 음유시인까지, 이들이 합심하여 ‘나쁜 삶’을 주장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질식할 것 같은 이 우울하고 무기력한 삶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불현듯 깨닫고, ‘나
삶의 찬란한 기쁨을 잊고 나르시시즘의 창백한 공간으로
숨어버린 이들에게 일깨워주는 놀라운 행복의 기술
또 한 명의 지젝이 나타났다! 끝없는 장광설과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비평으로 “지젝거린다”라는 농담까지 만들어졌지만, 이런 지젝에 못지않은 현란한 지적 유희와 번뜩이는 통찰로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 철학자가 있다. 이 책의 저자 로베르트 팔러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으로 꼽히는 팔러는 철학의 모든 시대, 수많은 지성들의 가르침을 훑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기쁨과 쾌락을 일깨운다. 안전, 건강, 부, 도덕 등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 신자유주의적 바른생활 세계에서는 ‘나쁜 삶’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감각적, 물질적 해방을 노래한다.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는 우리에게 이 살아 숨 쉬는 세상에서 도피해 나르시시즘의 허상에 빠져 있기를 강요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적이다.
팔러가 말하는 ‘나쁜 삶의 기술’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모두 내 삶의 천재가 되는 듯하다. 에피쿠로스, 에픽테토스, 세네카, 몽테뉴, 스피노자, 파스칼, 칸트, 헤겔, 니체, 프로이트, 라캉, 마르크스와 엥겔스, 바슐라르, 하위징아, 바타유, 비트겐슈타인, 알튀세르, 셰익스피어, 브레히트, 드 사드…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빈의 작가와 음유시인까지, 이들이 합심하여 ‘나쁜 삶’을 주장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질식할 것 같은 이 우울하고 무기력한 삶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불현듯 깨닫고, ‘나
목차
머리말
한국어판 머리말
Ⅰ부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 그리고 그것을 잊게 만드는 것들
1.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
2. 사는 것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들
Ⅱ부 행복을 두려워하는 이유
3. 빈약함과 화려함: 점잔빼는 문화에서 포르노물이 하는 일
4. 보이는 것의 질서: 희극의 유물론적 측면
5. 실패자는 항상 실패자인가?: 포스트모던 낭만주의의 결점
Ⅲ부 시기심: 관념론적 악습의 구조
6.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스토아학파와 유물론
7. 시기심에 관하여
8. 시기심의 교훈
Ⅳ부 편집증적 상상의 승리
9. 미신, 신조, 편집증: 삶을 기피하게 하는 상상의 세 가지 형태
10. 이성을 이성적으로 다루기: 이중화의 능력
11. 이상과 역할을 합치시키려면
Ⅴ부 소진으로서의 삶
12. 봄, 더럽지만 성스러운 것: 삶은 탕진해야 하는 선물이다
13. 예술과 사랑의 유사성: 해독이자 독풀기로서의 선물
14. 과잉을 소모하기: 반(反)경제와 반(反)예술에 대해
15. 식인은 숭고하다: 기이한 식사 관행이 지닌 가치들
Ⅵ부 삶의 이유
16. 일인가, 놀이인가?: 조르주 바타유를 통해 읽는 요한 하위징아
17. 저급한 것들을 위한 철학
한국어판 머리말
Ⅰ부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 그리고 그것을 잊게 만드는 것들
1.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
2. 사는 것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들
Ⅱ부 행복을 두려워하는 이유
3. 빈약함과 화려함: 점잔빼는 문화에서 포르노물이 하는 일
4. 보이는 것의 질서: 희극의 유물론적 측면
5. 실패자는 항상 실패자인가?: 포스트모던 낭만주의의 결점
Ⅲ부 시기심: 관념론적 악습의 구조
6.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스토아학파와 유물론
7. 시기심에 관하여
8. 시기심의 교훈
Ⅳ부 편집증적 상상의 승리
9. 미신, 신조, 편집증: 삶을 기피하게 하는 상상의 세 가지 형태
10. 이성을 이성적으로 다루기: 이중화의 능력
11. 이상과 역할을 합치시키려면
Ⅴ부 소진으로서의 삶
12. 봄, 더럽지만 성스러운 것: 삶은 탕진해야 하는 선물이다
13. 예술과 사랑의 유사성: 해독이자 독풀기로서의 선물
14. 과잉을 소모하기: 반(反)경제와 반(反)예술에 대해
15. 식인은 숭고하다: 기이한 식사 관행이 지닌 가치들
Ⅵ부 삶의 이유
16. 일인가, 놀이인가?: 조르주 바타유를 통해 읽는 요한 하위징아
17. 저급한 것들을 위한 철학
책 속으로
우리는 더 이상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에 대해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건강, 안전, 지속가능성, 그리고 비용효율성과 같은 절대화된 원칙들에 맞추어 어떻게 하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지만 묻는다. 그러나 고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현자는 결코 가장 큰 빵을 고르지 않는다, 그는 가장 달콤한 빵을 고른다.” 우리는 오늘날 로마의 풍자가이자 스토아사상가였던 유베날리스가 가장 나쁜 윤리적 과오라고 했던 바로 그것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부끄러워하기보다 살아남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악이다. 사는 데 급급하여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 p.22~23
포스트모던한 취향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키우고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며, 다른 사람과 관련된 것을 위해 노력하거나 그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념론적이고 비극적인 세계관은 개인을 먼저 주체로 간주한 다음 개인이 스스로를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종국에는 모든 게 개인의 잘못 때문이라는 식으로 작동한다. 이에 반해 희극은 유물론적으로 내 존재의 의미는 밖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에 있다고 한다. 아무리 내게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으면 그건 재미있는 것이 된다. 희극은 이처럼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그냥 개인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 p.88
이 세계와 객관적인 모든 것이 나쁜 것이라면, 역으로 그와 반대되는 것이나 주관적인 것은 좋은 것이 된다. 달리 말하면 자아와 자아 가까이에 있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실패와 실패자들에 대한 존중은 늘 얼마간은 자아에 대한 과대 환상에 바치는 조용한 찬사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세계관에 대해 나르시시즘이라는 임상적 명칭을 붙인 바 있다.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물질적 세계와 그 구조적 관계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계를 악마화한다. 나르시시즘에서는 자아만이 좋은 것, 즐거운 것, 순수한 것이다. 반면에 질료적인 것, 육체적 현존, 표현형식, 사회제도, 세대 전승, 관습, 지식, 숙련된 능력과 같은 모든 물질적인 것과 구조적인 것은 나르시시즘 관점에서는 더러운 것, 이겨내야 할 외적인 무엇으로 인식될 뿐이다.
--- p.100
오늘날 우리가 왜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의 저 세련된 멋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지는 분명하다. 우리 시대는 삶을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문화가 포스트모던하고 다원적인 쾌락주의 문화라는 우리 시대의 잘못된 자기평가와 달리 우리는 이 문화가 지닌 쾌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적대감을 직시해야 한다. 이에 대해 지젝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예를 제시했다. 무카페인 커피, 무알콜 맥주, 무칼로리 콜라, 무지방 생크림, 욕설이 빠진 축구, 육체적 접촉 없는 섹스… 말하자면 알맹이 빠진 사물들이 판치는 이 문화는 총체적 ‘무-주의’(Non-ism) 문화라 할 수 있다.
--- p.241~242
오늘날의 문화는 쾌락주의를 자처하면서도 건전한 것들만 앞에 놓고 그것들로만 즐거움을 느끼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렇게 우리를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 문화에서는 즐거움도 소실될 수밖에 없다.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것과 대조되는 불쾌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식습관, 절제된 생활, 검소한 살림 등 평소의 원칙을 잠시 내려놓고 승리감에 고양된 위반 행위를 저지를 때 최고의 즐거움이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어른스럽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즉 잠시 동안이라도 자신이 어른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어른스러울 수 있는 능력, 즉 이중화 덕분에 가능한 능력이다. 이와 달리 일면적으로만 어른스러운 것은 그냥 잘난척하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 p.22~23
포스트모던한 취향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키우고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며, 다른 사람과 관련된 것을 위해 노력하거나 그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념론적이고 비극적인 세계관은 개인을 먼저 주체로 간주한 다음 개인이 스스로를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종국에는 모든 게 개인의 잘못 때문이라는 식으로 작동한다. 이에 반해 희극은 유물론적으로 내 존재의 의미는 밖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에 있다고 한다. 아무리 내게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으면 그건 재미있는 것이 된다. 희극은 이처럼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그냥 개인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 p.88
이 세계와 객관적인 모든 것이 나쁜 것이라면, 역으로 그와 반대되는 것이나 주관적인 것은 좋은 것이 된다. 달리 말하면 자아와 자아 가까이에 있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실패와 실패자들에 대한 존중은 늘 얼마간은 자아에 대한 과대 환상에 바치는 조용한 찬사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세계관에 대해 나르시시즘이라는 임상적 명칭을 붙인 바 있다.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물질적 세계와 그 구조적 관계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계를 악마화한다. 나르시시즘에서는 자아만이 좋은 것, 즐거운 것, 순수한 것이다. 반면에 질료적인 것, 육체적 현존, 표현형식, 사회제도, 세대 전승, 관습, 지식, 숙련된 능력과 같은 모든 물질적인 것과 구조적인 것은 나르시시즘 관점에서는 더러운 것, 이겨내야 할 외적인 무엇으로 인식될 뿐이다.
--- p.100
오늘날 우리가 왜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의 저 세련된 멋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지는 분명하다. 우리 시대는 삶을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문화가 포스트모던하고 다원적인 쾌락주의 문화라는 우리 시대의 잘못된 자기평가와 달리 우리는 이 문화가 지닌 쾌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적대감을 직시해야 한다. 이에 대해 지젝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예를 제시했다. 무카페인 커피, 무알콜 맥주, 무칼로리 콜라, 무지방 생크림, 욕설이 빠진 축구, 육체적 접촉 없는 섹스… 말하자면 알맹이 빠진 사물들이 판치는 이 문화는 총체적 ‘무-주의’(Non-ism) 문화라 할 수 있다.
--- p.241~242
오늘날의 문화는 쾌락주의를 자처하면서도 건전한 것들만 앞에 놓고 그것들로만 즐거움을 느끼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렇게 우리를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 문화에서는 즐거움도 소실될 수밖에 없다.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것과 대조되는 불쾌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식습관, 절제된 생활, 검소한 살림 등 평소의 원칙을 잠시 내려놓고 승리감에 고양된 위반 행위를 저지를 때 최고의 즐거움이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어른스럽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즉 잠시 동안이라도 자신이 어른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어른스러울 수 있는 능력, 즉 이중화 덕분에 가능한 능력이다. 이와 달리 일면적으로만 어른스러운 것은 그냥 잘난척하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 p.309
출판사 리뷰
우리 시대에 다시 부르는 ‘삶에 대한 찬가’
삶의 찬란한 기쁨을 잊고 나르시시즘의 창백한 공간으로
숨어버린 이들에게 일깨워주는 놀라운 행복의 기술
또 한 명의 지젝이 나타났다! 끝없는 장광설과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비평으로 “지젝거린다”라는 농담까지 만들어졌지만, 이런 지젝에 못지않은 현란한 지적 유희와 번뜩이는 통찰로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 철학자가 있다. 이 책의 저자 로베르트 팔러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으로 꼽히는 팔러는 철학의 모든 시대, 수많은 지성들의 가르침을 훑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기쁨과 쾌락을 일깨운다. 안전, 건강, 부, 도덕 등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 신자유주의적 바른생활 세계에서는 ‘나쁜 삶’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감각적, 물질적 해방을 노래한다.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는 우리에게 이 살아 숨 쉬는 세상에서 도피해 나르시시즘의 허상에 빠져 있기를 강요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적이다.
팔러가 말하는 ‘나쁜 삶의 기술’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모두 내 삶의 천재가 되는 듯하다. 에피쿠로스, 에픽테토스, 세네카, 몽테뉴, 스피노자, 파스칼, 칸트, 헤겔, 니체, 프로이트, 라캉, 마르크스와 엥겔스, 바슐라르, 하위징아, 바타유, 비트겐슈타인, 알튀세르, 셰익스피어, 브레히트, 드 사드…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빈의 작가와 음유시인까지, 이들이 합심하여 ‘나쁜 삶’을 주장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질식할 것 같은 이 우울하고 무기력한 삶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불현듯 깨닫고, ‘나쁜 삶’ 하지만 더없이 기쁘고 찬란한 우리 삶을 되찾는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의 독일어판 원제는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Wofur es sich zu leben lohnt)이다. 저자 로베르트 팔러는 이 책에서 고전적이지만 이제는 모두가 잊어버린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건강, 안전, 효율성 등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는 오늘날 이 질문은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점점 더 일상의 삶에서나 정치적으로 ‘바른생활 시민들’의 사회가 된다. 상상력을 잃은 미적 기준, 사회적 관계의 회피, 해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기피하는 금욕주의적 태도가 칭송되고, 정치적으로는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저자가 이 같은 문화적 상황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바로 이런 태도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 로베르트 팔러는 삶에 대한 과도한 관념론적 이상주의와 도덕주의가 행복을 죄악시하고, 잃어버린 행복 대신 ‘개인 정체성’에 몰두하는 오늘의 문화적 상황을 만들었다고 진단한다. 개인들에게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꼬드기는 나르시시즘 문화에서는 외부로부터 어떤 진정한 쾌감도 얻을 수 없기에 삶의 행복도 느낄 수 없다. 이 책은 이런 문화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규칙에 대한 굴종을 당연시하는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살아남는 데 급급하여 살아가는 기쁨을 잃어버린 우둔함, 미학도 쾌락도 없는 본능적 생존의 삶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쁜 삶, 하지만 더없이 기쁜 해방적 삶
이 책이 말하는 쾌락과 행복은 일견 ‘나쁜 삶’으로 보일 수 있다. 한국어판 제목 『나쁜 삶의 기술』 역시 이런 반어적 의미로 지어졌다. 독자들은 음주, 흡연, 섹스, 블랙유머, 한가로운 멍 때리기를 찬양하고 삶의 낭비와 도취상태를 권하는 저자의 말을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무알코올 맥주, 디카페인 커피, 무지방 생크림, 욕설이 빠진 축구, 신체접촉 없는 섹스야말로 삶의 기쁨을 내주고 ‘빼기’를 구매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적 소비주의 계략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에 맞서 포르노물의 논리, 놀이 이론, 비극과 희극의 구조, 시기심의 메커니즘, 심지어 식인과 배설물 먹기와 같은 식사 관행에 이르기까지 낯설지만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철학과 예술의 역사에서 배우는 ‘나쁜 삶’을 통해 사실은 더없이 기쁜 ‘해방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미학과 윤리의 차원을 되살릴 수 있게 해주는 사상적 바탕으로 고대 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의 시각을 제시한다. 여기서 유물론이란 고대의 삶에 하나의 도덕적 지침을 제공했던 쾌락주의철학과 스토아철학을 말하는데, 이 철학들은 감각과 우리 삶의 외적 표상을 중시함으로써 내면에만 몰두하는 관념론적 허상에 빠지지 않게 해준다. 또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유아적이거나 도착적인 우리 욕망의 잘못된 분출 방식을 직시하게 해주고, 그것을 건강한 쾌락의 향유로 인도함으로써 삶의 균형을 되찾아준다.
이런 탐색을 통해 저자가 도달하는 지점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옥타브 마노니가 말한 ‘잘 알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듯이’ 행동하는 삶의 차원이다. 우리는 현실의 조건에 갇힌 존재로서 이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마치 너무나 즐거운 듯이” 즐기는 삶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의 축제나 오늘날의 파티에서 보듯이, 일상의 금기를 잘 알고 있지만 놀이와 축제 때는 금기를 깨뜨리라는 가상의 명령도 수행할 수 있는 지혜다. 그런데 이것은 서로의 쾌락에서 함께 더 큰 즐거움을 얻는 ‘공모자’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의 쾌락은 사회적 차원에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로베르트 팔러는 결국 개인을 낱낱이 흐트러뜨려서 각자도생의 불행한 자아로 살게 하는 이 시대에 저항하여, ‘함께 즐거움을 향유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나르시시즘 분석에서 놀이 이론까지
이 책 『나쁜 삶의 기술』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매우 다채롭고 흥미롭다. 각 장별로 나열하면 포르노물의 구조, 비극과 희극의 차이, 시기심과 나르시시즘, 편집증적 집착, 선물과 증여의 행위, 식인과 배설물 먹기, 놀이 이론 등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 포르노물의 구조 : 우리가 흔히 접하는 TV의 리얼리티 쇼는 진정한 쾌락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관객의 쾌락을 대신해주는 포르노물의 역할을 한다. 관객은 그 출연자와는 다르다는 안전한 위치에서 관음증적 쾌락을 누리려 하지만, 그 쾌감은 관객과 출연자가 상호수동적 상태로 전락함으로써 얻는 가짜 쾌감일 뿐이다.
- 나르시시즘의 논리 : 갈수록 사회적 자원의 분배가 불평등해지고 개인화되는 신자유주의 질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르시시즘의 도착적 쾌락에 빠지게 된다.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신을 부정하고 그 행복을 거꾸로 나쁜 것, 강요된 것, 위험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자아만을 좋은 것, 순수한 것으로 바꿔버리는 심리적 병증이 나르시시즘이다. 이것은 니체가 말한 원한감정(‘르상티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패자 정신을 내면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선 물질적 자원, 감각적인 표현, 전승된 것, 숙련된 기능과 지식 등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차원 모두가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될 뿐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자아 정체성’이라는 관념에 집착하는 개인들과, 타인에 대한 혐오 문화가 어떻게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분석이다.
- 시기심의 악습 : 시기심은 특히 우리를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하는 대표적 정조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원용하여 시기심을 ‘자신에게는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원하는’ 가짜 욕망으로 정의한다. 라캉이 말했듯이 자신의 진정한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태도, 다시 말해 타인의 욕망을 시기함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는 실패자의 악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선물과 예술이 지닌 과잉의 정신 : 이 책에서 특히 빛나는 부분은 『증여론』의 저자 마르셀 모스나 라캉 등을 통해 선물의 행위와 예술 창작에 숨은 ‘과잉’과 ‘낭비’의 측면을 재조명한 것이다. 선물은 사랑하는 이에게 그가 필요로 하지 않는 비실용적인 것, 기념물, 따라서 원래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행위이다. 이런 사랑이 표현됨으로써 우리는 나의 결핍을 더 이상 가지지 않아도 된다.(결핍의 결여) 이것은 예술 창작과 동일하다. 예술은 실생활에서 무가치한 잉여의 것을 타인의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삶의 과잉을 소진하는 행위이며, 그로부터 쾌감의 향유가 가능해진다. 실용적인 경제 논리가 지배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선물과 예술의 영역인 것이다.
- 식인과 배설물 먹기 : 저자는 식인과 배설물 먹기라는 기괴한 식사 관행에서도 쾌락의 역설적인 구조를 발견한다. 식인은 축제에서 조상을 대신한 토템 동물을 먹음으로써 더 이상 친족을 해치지 말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를 멸시하는 지배자 앞에서 그들이 혐오하는 배설물을 시식함으로써 그들을 조롱하고 자신을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게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금기의 명령만큼이나 금기를 위반하라는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잃었던 쾌락을 재전유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드의 더러운 쾌락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가장 저항적인 것이기도 했다.
- 놀이인가 일인가 : 팔러는 마지막으로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와 조르주 바타유의 ‘놀이 이론’을 통해서 ‘놀이’와 ‘일’의 양자택일적 상황과는 다른, 놀이의 고유한 의미를 재조명한다. 놀이와 반대되는 노동(일)을 문화 형성의 원천으로 보거나 놀이를 노동의 재생산 과정으로 보는 전통적 좌파 시각과 달리, ‘일상생활에서의 신성함’을 구현하는 놀이는 우리 문화를 형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행위이다. 그것이 신성한 까닭은 놀이가 상상에 기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3의 가상적 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너와 내가 기꺼이 연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고, 거기서 우리는 한없는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업과 관련된 세속적 활동과는 다른 차원의 품격이 지닌 것이고 우리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넣는 의식이기도 하다.
이상의 이야기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누리고 싶지만 누릴 수 없는 상황에 굴복하여 자신을 비극의 영웅처럼 미화하는 관념론적 나르시시즘의 허구(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 미학)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저자의 일차적 메시지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아가 현실에서 만나는 실패의 경험들과 불순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회피하지 말고 또 다른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꾸는 상상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는 주장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려는 메시지이다. 그것은 당장에 주어져 있는 쾌락의 조건들(예컨대 음주, 흡연, 놀이, 낭비, 섹스, 그 밖의 모든 하찮은 것들)을 사회적으로 공유된 자원이자 즐거움의 조건으로 인식하고 쟁취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말한다. 생존에 급급하여 죽기도 전에 즐거움을 포기하는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 삶의 모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드높은 기쁨의 차원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고.
삶의 찬란한 기쁨을 잊고 나르시시즘의 창백한 공간으로
숨어버린 이들에게 일깨워주는 놀라운 행복의 기술
또 한 명의 지젝이 나타났다! 끝없는 장광설과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비평으로 “지젝거린다”라는 농담까지 만들어졌지만, 이런 지젝에 못지않은 현란한 지적 유희와 번뜩이는 통찰로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 철학자가 있다. 이 책의 저자 로베르트 팔러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으로 꼽히는 팔러는 철학의 모든 시대, 수많은 지성들의 가르침을 훑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기쁨과 쾌락을 일깨운다. 안전, 건강, 부, 도덕 등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 신자유주의적 바른생활 세계에서는 ‘나쁜 삶’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감각적, 물질적 해방을 노래한다.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는 우리에게 이 살아 숨 쉬는 세상에서 도피해 나르시시즘의 허상에 빠져 있기를 강요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적이다.
팔러가 말하는 ‘나쁜 삶의 기술’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모두 내 삶의 천재가 되는 듯하다. 에피쿠로스, 에픽테토스, 세네카, 몽테뉴, 스피노자, 파스칼, 칸트, 헤겔, 니체, 프로이트, 라캉, 마르크스와 엥겔스, 바슐라르, 하위징아, 바타유, 비트겐슈타인, 알튀세르, 셰익스피어, 브레히트, 드 사드…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빈의 작가와 음유시인까지, 이들이 합심하여 ‘나쁜 삶’을 주장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질식할 것 같은 이 우울하고 무기력한 삶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불현듯 깨닫고, ‘나쁜 삶’ 하지만 더없이 기쁘고 찬란한 우리 삶을 되찾는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의 독일어판 원제는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Wofur es sich zu leben lohnt)이다. 저자 로베르트 팔러는 이 책에서 고전적이지만 이제는 모두가 잊어버린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건강, 안전, 효율성 등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는 오늘날 이 질문은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점점 더 일상의 삶에서나 정치적으로 ‘바른생활 시민들’의 사회가 된다. 상상력을 잃은 미적 기준, 사회적 관계의 회피, 해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기피하는 금욕주의적 태도가 칭송되고, 정치적으로는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저자가 이 같은 문화적 상황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바로 이런 태도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 로베르트 팔러는 삶에 대한 과도한 관념론적 이상주의와 도덕주의가 행복을 죄악시하고, 잃어버린 행복 대신 ‘개인 정체성’에 몰두하는 오늘의 문화적 상황을 만들었다고 진단한다. 개인들에게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꼬드기는 나르시시즘 문화에서는 외부로부터 어떤 진정한 쾌감도 얻을 수 없기에 삶의 행복도 느낄 수 없다. 이 책은 이런 문화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규칙에 대한 굴종을 당연시하는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살아남는 데 급급하여 살아가는 기쁨을 잃어버린 우둔함, 미학도 쾌락도 없는 본능적 생존의 삶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쁜 삶, 하지만 더없이 기쁜 해방적 삶
이 책이 말하는 쾌락과 행복은 일견 ‘나쁜 삶’으로 보일 수 있다. 한국어판 제목 『나쁜 삶의 기술』 역시 이런 반어적 의미로 지어졌다. 독자들은 음주, 흡연, 섹스, 블랙유머, 한가로운 멍 때리기를 찬양하고 삶의 낭비와 도취상태를 권하는 저자의 말을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무알코올 맥주, 디카페인 커피, 무지방 생크림, 욕설이 빠진 축구, 신체접촉 없는 섹스야말로 삶의 기쁨을 내주고 ‘빼기’를 구매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적 소비주의 계략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에 맞서 포르노물의 논리, 놀이 이론, 비극과 희극의 구조, 시기심의 메커니즘, 심지어 식인과 배설물 먹기와 같은 식사 관행에 이르기까지 낯설지만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철학과 예술의 역사에서 배우는 ‘나쁜 삶’을 통해 사실은 더없이 기쁜 ‘해방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미학과 윤리의 차원을 되살릴 수 있게 해주는 사상적 바탕으로 고대 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의 시각을 제시한다. 여기서 유물론이란 고대의 삶에 하나의 도덕적 지침을 제공했던 쾌락주의철학과 스토아철학을 말하는데, 이 철학들은 감각과 우리 삶의 외적 표상을 중시함으로써 내면에만 몰두하는 관념론적 허상에 빠지지 않게 해준다. 또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유아적이거나 도착적인 우리 욕망의 잘못된 분출 방식을 직시하게 해주고, 그것을 건강한 쾌락의 향유로 인도함으로써 삶의 균형을 되찾아준다.
이런 탐색을 통해 저자가 도달하는 지점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옥타브 마노니가 말한 ‘잘 알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듯이’ 행동하는 삶의 차원이다. 우리는 현실의 조건에 갇힌 존재로서 이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마치 너무나 즐거운 듯이” 즐기는 삶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의 축제나 오늘날의 파티에서 보듯이, 일상의 금기를 잘 알고 있지만 놀이와 축제 때는 금기를 깨뜨리라는 가상의 명령도 수행할 수 있는 지혜다. 그런데 이것은 서로의 쾌락에서 함께 더 큰 즐거움을 얻는 ‘공모자’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의 쾌락은 사회적 차원에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로베르트 팔러는 결국 개인을 낱낱이 흐트러뜨려서 각자도생의 불행한 자아로 살게 하는 이 시대에 저항하여, ‘함께 즐거움을 향유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나르시시즘 분석에서 놀이 이론까지
이 책 『나쁜 삶의 기술』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매우 다채롭고 흥미롭다. 각 장별로 나열하면 포르노물의 구조, 비극과 희극의 차이, 시기심과 나르시시즘, 편집증적 집착, 선물과 증여의 행위, 식인과 배설물 먹기, 놀이 이론 등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 포르노물의 구조 : 우리가 흔히 접하는 TV의 리얼리티 쇼는 진정한 쾌락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관객의 쾌락을 대신해주는 포르노물의 역할을 한다. 관객은 그 출연자와는 다르다는 안전한 위치에서 관음증적 쾌락을 누리려 하지만, 그 쾌감은 관객과 출연자가 상호수동적 상태로 전락함으로써 얻는 가짜 쾌감일 뿐이다.
- 나르시시즘의 논리 : 갈수록 사회적 자원의 분배가 불평등해지고 개인화되는 신자유주의 질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르시시즘의 도착적 쾌락에 빠지게 된다.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신을 부정하고 그 행복을 거꾸로 나쁜 것, 강요된 것, 위험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자아만을 좋은 것, 순수한 것으로 바꿔버리는 심리적 병증이 나르시시즘이다. 이것은 니체가 말한 원한감정(‘르상티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패자 정신을 내면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선 물질적 자원, 감각적인 표현, 전승된 것, 숙련된 기능과 지식 등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차원 모두가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될 뿐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자아 정체성’이라는 관념에 집착하는 개인들과, 타인에 대한 혐오 문화가 어떻게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분석이다.
- 시기심의 악습 : 시기심은 특히 우리를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하는 대표적 정조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원용하여 시기심을 ‘자신에게는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원하는’ 가짜 욕망으로 정의한다. 라캉이 말했듯이 자신의 진정한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태도, 다시 말해 타인의 욕망을 시기함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는 실패자의 악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선물과 예술이 지닌 과잉의 정신 : 이 책에서 특히 빛나는 부분은 『증여론』의 저자 마르셀 모스나 라캉 등을 통해 선물의 행위와 예술 창작에 숨은 ‘과잉’과 ‘낭비’의 측면을 재조명한 것이다. 선물은 사랑하는 이에게 그가 필요로 하지 않는 비실용적인 것, 기념물, 따라서 원래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행위이다. 이런 사랑이 표현됨으로써 우리는 나의 결핍을 더 이상 가지지 않아도 된다.(결핍의 결여) 이것은 예술 창작과 동일하다. 예술은 실생활에서 무가치한 잉여의 것을 타인의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삶의 과잉을 소진하는 행위이며, 그로부터 쾌감의 향유가 가능해진다. 실용적인 경제 논리가 지배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선물과 예술의 영역인 것이다.
- 식인과 배설물 먹기 : 저자는 식인과 배설물 먹기라는 기괴한 식사 관행에서도 쾌락의 역설적인 구조를 발견한다. 식인은 축제에서 조상을 대신한 토템 동물을 먹음으로써 더 이상 친족을 해치지 말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를 멸시하는 지배자 앞에서 그들이 혐오하는 배설물을 시식함으로써 그들을 조롱하고 자신을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게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금기의 명령만큼이나 금기를 위반하라는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잃었던 쾌락을 재전유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드의 더러운 쾌락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가장 저항적인 것이기도 했다.
- 놀이인가 일인가 : 팔러는 마지막으로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와 조르주 바타유의 ‘놀이 이론’을 통해서 ‘놀이’와 ‘일’의 양자택일적 상황과는 다른, 놀이의 고유한 의미를 재조명한다. 놀이와 반대되는 노동(일)을 문화 형성의 원천으로 보거나 놀이를 노동의 재생산 과정으로 보는 전통적 좌파 시각과 달리, ‘일상생활에서의 신성함’을 구현하는 놀이는 우리 문화를 형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행위이다. 그것이 신성한 까닭은 놀이가 상상에 기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3의 가상적 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너와 내가 기꺼이 연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고, 거기서 우리는 한없는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업과 관련된 세속적 활동과는 다른 차원의 품격이 지닌 것이고 우리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넣는 의식이기도 하다.
이상의 이야기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누리고 싶지만 누릴 수 없는 상황에 굴복하여 자신을 비극의 영웅처럼 미화하는 관념론적 나르시시즘의 허구(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 미학)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저자의 일차적 메시지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아가 현실에서 만나는 실패의 경험들과 불순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회피하지 말고 또 다른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꾸는 상상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는 주장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려는 메시지이다. 그것은 당장에 주어져 있는 쾌락의 조건들(예컨대 음주, 흡연, 놀이, 낭비, 섹스, 그 밖의 모든 하찮은 것들)을 사회적으로 공유된 자원이자 즐거움의 조건으로 인식하고 쟁취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말한다. 생존에 급급하여 죽기도 전에 즐거움을 포기하는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 삶의 모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드높은 기쁨의 차원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고.
추천평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지만 혐오와 우울증이 만연한 시대를 휘청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이다. 속물적 유행상품 수집과 허튼 자랑에서도, 열성적 집단 소속감 추구에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살아낼 수 있는 삶의 기법에 대한 고민이다. 단숨에 읽을 책은 아니다. 현학적 난해함으로 가득해서가 아니라, 철학의 모든 시대를 넘나들며 예술비평과 사회비평을 철학에 녹여내어 독자를 사유의 심연으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비판마저 타락하여 미적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투덜거림이 된 시대이지만, 이 책에서는 비판이되 예술적이고, 비판이되 삶의 긍정이며, 비판이되 유머를 포기하지 않는 삶의 기법의 향연이 펼쳐진다. 경박한 삶의 위로와 허세에 상응하는 깊이 있는 철학서가 없는 시대,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외쳤다. 이게 진짜 삶의 철학이다!”
- 노명우 (사회학자, 니은서점 마스터북텐더)
- 노명우 (사회학자, 니은서점 마스터북텐더)
“비행기 탑승객이라면 요즘의 여행이 보안검색대의 공개 스트립쇼와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신발을 벗고 허리띠를 풀어야 한다. 빈의 철학자 로베르트 팔러는 생존을 위해 품위를 내던져버린 현대 문화, 오늘의 문화를 ‘빼기’의 문화로 만들어버린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가차 없이 비판한다. 디카페인 커피, 무알코올 맥주, 욕설이 없어진 축구, 신체접촉 없는 섹스… 지금 우리는 삶의 기쁨을 내주고 이런 빼기를 구매하고 있는 것이다.”
- 다니엘 그린슈테트 (문화비평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서평)
- 다니엘 그린슈테트 (문화비평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서평)
“팔러는 삶의 즐거움을 ‘바로 그것 때문에 삶이 가치 있게 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생존만을 좇는 존재 이상으로 자신을 드높이는 과잉의 순간이 없다면, 우리 삶은 동물적이거나 죽음과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팔러는 우리 사회가 건강, 안전, 효율성을 위해 즐거움을 금지하고 삶의 우아함을 반납했다고 한다. 음주, 흡연, 섹스, 블랙 유머, 한가로운 상념의 즐거움을 잊게 만들었다고 한다. 사는 데 급급하여 살아가는 기쁨을 잃어버린 우리는 얼마나 엄청난 바보들인가?”
- 스벤냐 플라스푈러 (철학자, 독일공영라디오 서평)
- 스벤냐 플라스푈러 (철학자, 독일공영라디오 서평)
'54.인문교양 (독서>책소개) > 4.논문비평문학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를 향한 의지 (2024)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2) | 2024.09.30 |
---|---|
한국 근대 자유시의 원천과 그 실험들 (2024) - 최남선에서 김억까지 (0) | 2024.08.08 |
중역한 영웅 (2023) - 근대전환기 한국의 서구영웅전 수용 (0) | 2024.07.08 |
18~19세기 한국문학, 차이의 근대성 (2022) - 유럽중심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 (0) | 2024.07.08 |
근대지식과 '조선-세계' (2019) - 인식의 전환 (0) | 2024.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