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한국역사의 이해 (독서요약)/2.한국사일반

어쩐지 나만 알 것 같은 역사 (2025)

동방박사님 2025. 6. 2.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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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방방곡곡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비문에서 역사를 캐내다

역사를 읽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의 ‘과거’로 읽기, 치세와 처신의 ‘교훈’으로 읽기, 소설?영화 뺨치는 ‘재미’로 읽기. 이 책은 그중 세 번째,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이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소재로 다양한 이야기를 캐냈는데,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무조건 재미있다.

 ‘교실 안의 역사’에서 만나지 못한 흥미로운 한국사 뒷이야기가 쏟아진다.

목차
· 책을 내며

01 물길의 도시 서울 1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걸음했던 ‘청린동천’ | 안평대군이 노닐던 ‘청계동천’과 ‘무계동’ | 임정 고문 동농 김가진이 새긴 ‘백운동천’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되찾아 준 ‘백석동천’

02 물길의 도시 서울 2

겸재 정선도 반한 ‘수성동’ | 잃은 줄 알았다가 찾은 ‘옥류동’ | 유래를 알 수 없는 ‘일세암’과 ‘청와동’ | 주인이 밝혀진 계곡, ‘삼계동’ | 답사가의 보물창고, 홍제천 북쪽 ‘이요동’

03 한강의 이모저모

행호와 행주수위관측소 | 근대 상수도 역사의 출발점, 수도박물관 | 드물게 남은 민간 통행용 돌다리, 강매석교 | 잠실을 ‘강남’으로 만든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 제사 효과 없었던 송정동 수신비 | 한강에 잠긴 영혼을 위로하는 ‘한강수사자조혼비’

04 아름다운 수락산, 쓸쓸한 이야기

송시열과 폐세자 이지가 얽힌 수락산 ‘옥류동’ |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금류동천’ | 사문난적으로 몰린 박세당의 흔적, ‘수락동천’ | 내시 가문 출신 예술가 이병직의 흔적, ‘벽운동천’

05 내 몸 안의 지도가 찾아낸 양주의 바위 글씨

8곳의 바위 글씨가 모인 ‘문장동천’ | 선유동천 금화동문

06 파주 공릉산의 3인 3색

조선의 채무왕 윤택영의 선산, ‘정승산’ | ‘독립유공자’ 민영달의 영세불망비 | ‘친일파’ 독지가 조병학

07 감사 비석 천지, 제주

속俗과 선仙의 경계, 제주 ‘방선문’ | 고래잡이의 슬픈 기억, 서귀포 ‘조난추도지비’ | 재일교포들에게 감사하는 비석들 | ‘객고풍상’을 견딘 제주 출가 해녀 영세불망비 | 국내 유일의 군의관 충혼비

08 두 차례나 왕위를 놓친 월산대군

숙부와 동생에게 밀린 불우한 왕자의 태비 | 월산대군의 흔적, 망원정과 석어당 | 더럽혀진 이름,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

09 그 밥에 그 나물, 반정 주역들

중종반정의 행동대장, 충렬공 박원종 | 중종반정의 ‘브레인’ 성희안 | 연산의 ‘칼’에서 반정 공신이 된 박건

10 선조의 문제아 아들들

갑질에 살인까지, 맏이 임해군 | 큰어머니 납치도 했던 정원군 | 역대급 사이코패스, 순화군

11 믿을 수 있는 송덕비 두 개, 이안눌과 이건창

연산군의 제사를 지낸 명문 사대부 이안눌의 ‘명월동문’ | 엄청난 미사여구 송덕비의 주인공 | 최연소 과거 급제자 이건창의 영세불망비 | 역사서를 엮어 낸 소론 가문

12 덕흥대원군 집안과 현충원

국립현충원의‘ 원주인, ’창빈 안씨 | 아들 잘 둬 영광을 누린 덕흥대원군 | 창산군 이해창과 사찰 간의 소송 해부

13 명필 글씨, 미수 허목에서 추사 김정희까지

송시열의 최대 라이벌, 미수 허목 | 한반도 1세대 래퍼의 풍자 | 서인이 짓고 남인이 쓴 ‘취선암’ | 미수 허목의 사돈이자 친구, 이진무 묘비 | 척화파에 돌직구 날린 유석

14 범상치 않거나 기구했던 왕족들

궁벽한 곳에 잠든 조선 첫 세자 이방석 | 희대의 학습지진아 순평군 이군생 | 말썽쟁이 익녕군 이치와 오리 이원익 | 두 개의 별난 기록을 보유한 예종 | 조선의 초식남 제안대군 |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왕자 복성군 | 아비에게 미움받은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 | 효종이 아꼈던 숙명공주 천장비 | 박복했던 순정효황후와 백운동천

15 비문으로 남은 신하들

은퇴하지 못하는 남자, 조말생 | 부관참시된 연산군의 채홍사 임숭재 | 호란을 대비했던 선각자 최기남 | 공도 많고 과도 많은 귤산 이유원의 ‘가오복지’ | 수장壽藏을 한 귤산 이유원과 ‘필운대’ | 시대착오적인 면암 최익현의 ‘바위 글씨’ | 조선 최초로 폭탄 테러에 당한 민승호

16 드물게 남은 여성의 비문들

조선 유일 여성 신도비 주인공, 남양 홍씨 | 서얼 출신 첫 정경부인 정난정의 묘

17 조선의 수학자들

조선 고유 역법을 마련한 수학자 이순지 | 노론 남병철의 숨길 수 없는 수학 사랑 | 천재 수학자 오일러에 앞서간 최석정의 ‘옥천병’

18 이상한 조합의 친구들, 묘적사 영세기송비

친일파 윤덕영과 ‘등룡동’ | 고종 ‘집사’에서 일제 귀족으로 변신한 이달용 | 두 얼굴의 ‘의로운 남자’ 홍순형

19 친일과 애국의 경계를 넘나든 인물들

‘문제적’ 인물 김홍집 | 사회사업에 진심이었던 김주용 | ‘베푸는 친일파’ 송수천 | 어느 사이비 독립운동가 | 간송 전형필과 보문사 마애불

20 조선 총독이 남긴 바위 글씨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이토 히로부미 |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역의 사이토 마코토 | 마포 선통물의 우가키 가즈시게 | 연세대학교 내 미나미 지로

21 특별한 보통사람들의 자취

오죽헌의 충노忠奴 행적비 |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일본식 묘비 | 한국 고아들의 자부慈父, 소다 가이치 | 무속인을 기리는 유일한 비석, ‘무당 김점례 공덕비’ | 이태원 공동묘지의 유관순 | 진정한 친한파 가나야마 마사히데 대사 | 음성 나환자들의 고마움을 새긴 에틴저 마을 비석

22 명필의 흔적과 한글 비석

피를 찍어 쓴 듯한 ‘최지백 정려비’ | 추사 친필을 새긴 조기복 묘비 | 몇 안 되는 조선 시대 한글 비석, 이윤탁 영비

23 바위 글씨는 말이 없지만

묘 따로 신도비 따로 화산군 이연 | 효자동의 유래가 된 조선 명문가의 흔적, ‘운강대’ | 엉뚱한 곳으로 옮겨진 연령군 신도비 | 살아서 기구했고 죽어서 더 기구한 왕족 은언군| 이상도 하다, 장충단공원의 ‘제일강산 태평세계비’

24 어처구니없는 바위 글씨들

명나라 장수를 기리는 ‘양호거사비’ | 어처구니없는 사대의 흔적, ‘조종암’ | 후손들도 잊고 지내는 동암 이발 |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400년 싸움, 산송

25 어쩐지 나만 알 것 같은 바위 글씨들

태조 왕건과 화가 임득명이 깃든 ‘향림동’ |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바위 글씨 ‘월암동’ | 서울대학교의 원래 ‘주인’ 자하 신위 | 서초동에 ‘정씨 집성촌’을 일군 정역 | 무인이자 명필 최홍희의 흔적, 관음암과 주먹탑 | 권력의 끝 김재규와 차지철, 이기붕의 흔적

저자 소개
저 : 배승호 
부천 역곡역 인근에서 정형외과를 운영한다. 

가톨릭 의대를 졸업했다. 

서울성모병원에서 임상강사를 마치고 10년 넘게 수술하는 의사로 살았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병원에서 일한 덕에 서울 중심부에 남아 있는 바위 글씨의 세계로 입문했다.

 바위에 가지런히 새겨진 글씨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지도앱에 다녀온 곳과 가봐야 하는 곳을 표시했고, 바쁜 일상 중 짬이 나면 여지없이 짐을 꾸려 출발했다.

책 속으로
고종 황제의 사진을 처음 찍은 사람은 뜻밖에도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다. 

그는 한때 태양계의 아홉 번째 행성으로 알려진 명왕성의 존재를 예견했던 유명한 인물이다.
--- p.16

서촌 통인시장 뒤 작은 광장에서 수성동 계곡 방향 골목으로 오른다.…오르다 보면 윤동주 하숙집도 만나고,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찬성했던 경술국적 중 한 사람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어 준 집(현재는 박노수미술관)도 만난다.
--- p.29

을축년 대홍수로 강북이었던 잠실이 강남이 되었다. 잠실은 잠실도라는 섬이었다.…

한강의 본류가 흘러와 잠실도를 만나면…잠실도의 위아래로 흐르다가 삼성동에서 다시 만나 하나의 물줄기로 바뀌는 구조였다.…

위쪽 지류는 일종의 샛강 같은 느낌이었고 가뭄이 들면 강북에서 걸어서 잠실도로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이는 행정구역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1914년 잠실은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였다. 즉 잠실은 강북이었던 것이다.
--- p.49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한다. 실록 《광해군일기》는 광해가 부인과 아들(폐세자 이지) 내외와 함께 강화에 위리안치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폐세자 이지는…가위와 인두를 이용해…26일 만에 70척(약 21미터)의 땅굴을 완성했다. 

야심한 밤에 땅굴을 나온 세자는 길을 잃고 헤매다 탈출 3일 만에 붙잡혔다. 

이지가 달아날 때 세자빈은 나무 위에 올라가 살펴보다가 떨어져 부상을 입었고 남편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자 자진했다.
--- p.57

윤택영(1876~1935). 조선의 마지막 국구國舅, 순종의 장인. 별명은 채무왕債務王, 차금대왕借金大王. 순종이 황태자 시절, 첫 부인인 황태자비 민씨가 1904년 죽었다. 

그리고 맞이한 순정효황후 윤씨가 윤택영의 딸이다. 이때 순종은 34세. 윤씨는 14세. 윤택영은 32세였다.
--- p.75

조병학은 폐교 위기의 세브란스를 구하기 위해서 전 재산을 기부한 것이다. 

일제는 이 기부를 막기 위해 조건을 건다. 육군·해군에 각기 5만 원을 기부하면 60만 원 기부를 인가해 주겠다고. 이때 조병학은 이미 죽고 없었기에 그의 아들 조중환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기부 절차를 완료한다. 

그런데 그 조병학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왜 그럴까?
--- p.85

1950년대 협재 해녀들은 울릉도·독도로 출가를 나갔다고 한다. 힘들게 번 돈으로 마을을 위해 기부까지 했다. 

이를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울릉도출어부인긔념비/ 단긔四二八九년七월 일협재리/ 대한부인회 근슈/ 객고풍상 성심성의 애향연금 영세불망
--- p.104

연산군의 악행 중 최고로 꼽는 것이 바로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 간통을 했고 그녀를 임신 시켰다는‘ 사건’이다. 월산대군과 박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성종은 아들인 연산군의 양육을 박씨에게 부탁한다.…《실록》이 기록한 두 사람이 통정했다는 시기에 박씨는 50대 초반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연산군의 패륜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엉뚱한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 p.115

박원종은 반정 이후 엄청난 권력과 돈을 쥐게 된다.

 박원종은 조선 시대 무인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최초의 인물인데, 무인 출신 영의정은 조선시대 단 두 명이다. 

《중종실록》의 사관은 박원종 졸기에“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남에게 주는 것도 지나쳤다.…

연산의 궁궐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들을 많이 차지해 여종으로 삼고 별실을 지어 살게 했으며 거처와 음식이 분수에 넘쳐나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었다”고 적었다.
--- p.120

임진왜란 중 정원군은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을 간다.…

정원군은 피난처마다 행패를 부려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왜란 후에는 처남을 슬쩍 과거시험에 부정 합격시켰다 걸리고, 군적 회피자들을 돈을 받고 숨겨 주기도 했다. 

《실록》에 의하면 노비들 간에 싸움이 났다는 이유로 본인의 큰어머니인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는 엽기적 행각도 벌인다.
--- p.132

조선의 최연소 과거 급제자는 만14세에 급제한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다. 

시기는 1866년, 고종 3년이었다.…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강화의 민심은 흉흉했고 이를 달래기 위해 조정은 강화 별시를 시행한다.

 강화 별시는 강화도민에 국한된 과거시험이다.…그의 합격에는 이런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었다. 

이건창은 평생 이러한 사실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 p.149

창빈 안씨는 처음엔 경기도 양주 장흥리에 묻혔다. 하지만 이듬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그녀의 아들 덕흥군은 이장을 결심한다. 

덕흥군은 명당자리를 찾았고, 그곳이 바로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 과거의 동작진에 있는 창빈 묘역이다. 

이장한 지 3년 만인 1552년 하성군이 태어났다.

 그리고 1567년에 하성군은 선조 임금이 되었다.…

동작나루에 있는 창빈 안씨의 묘역은 조선 최고의 명당자리로 등극했다.
--- p.157

예송논쟁이 격렬해지던 시기, 남인 영수 허목은…서인 영수 송시열을 만나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송시열이 머물던 괴산 화양구곡을 찾아갔으나 송시열은 만남을 거절한다. 

이에 허탈하게 돌아서며 허목은 시 한 수를 남긴다. “보지화양동步之華陽洞 불알송선생不謁宋先生/ 걸어서 화양계곡까지 왔건만, 송 선생님을 뵙지 못하네.”
--- p.175

세종 11년 왕의 명으로 종친들을 위한 교육기관 ‘종학宗學’이 탄생했다.…

성현이 지은 잡록집 《용재총화》에 의하면 순평군은 40세가 넘도록 한 글자도 몰랐다고 한다. 

종학에서 《효경》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의 일곱 자를 가르치니 그는 그것도 읽지 못하고 말하기를, “내가 지금 늙고 둔하니 ‘개종開宗’ 두 글자만 알아도 족하다” 하고…

죽음에 이르러 유언하길 “종학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 크게 기쁘다”고 했단다.
--- p.190

“세상은 위대한 명나라의 것大明天地/ 명나라의 해와 달이네永曆日月/ 요 임금을 섬기고 공자를 배워서祖堯學孔/ 삼가 온갖 사특함을 이기자敬勝百邪”

하아, 한숨만 나온다. 당시…20년 어간에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나라 안팎이 미친 속도로 돌아갔다. 

그런데 1893년 최익현은 포천 화봉산에서, 이 세상은 정확히 249년 전 멸망한 명나라의 것임을 다시 한번 선포하면서 요 임금과 공자를 배우자고 결의를 다짐했다.
--- p.228

1933년 잡지 《별건곤》에 실린 홍순형 관련 기사 중 한 대목이다. 

“그가 황해 감사로 도임한 지 얼마 안 되어 황해도 백성이 반반한 옷 한 벌 남지 않았고 그가 송도 유수로 있는 동안에 송도 부자들이 다리 펴고 잠을 자지 못하였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모은 돈이 벼 만 석이나 해서 부자로 민영휘 다음으로 쳤다. 

그런 부자가 입양한 아들 홍인표에게는 담배 한 갑 한 푼도 주지 않아 평생 고생을 하다 죽게 되고 8선녀를 꿈이어 형락하든 선물로 얻은 아들 학표에게 사랑을 편벽되이 주다가 미두판, 요리집 도박장으로 다 없애어…….”
--- p.259

송수천이란 인물은 친일파로 추정된다. 

그런데 피병원 건립에도 기부하고 1921년에는 창의학교를 개교하는 데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다. 

이에 너무 감사한 주민들이…자선불망비를 세워 주었다. 

그리고 송수천은 중국 봉천(지금의 선양)으로 이사를 간다.

1923년 본인이 세운 창의학교가 재정난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국하여 추가로 기부해 학교를 살린다.
--- p.275

-25년에 걸쳐 조선인 아동들에 대한 보육 활동을 한 그에게는 이례적으로 문화훈장이 주어졌으며, 그는 ‘고아의 자부慈父’라는 수식어와 함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유일한 일본인이 이들 (소다 가이치) 부부이다. 둘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 p.299

명이 멸망한 지 1주갑(60년)이 되던 해(1704), 우암 송시열이 충청도 화양 계곡에 만동묘를 세운다. 

만동묘는 만절필동의 줄임말이다.

 여기서 명나라 신종(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해 준 황제), 의종(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제사를 지냈다.…

같은 해 (1704) 숙종은 창덕궁의 가장 은밀한 곳에 대보단을 세우고 명나라 신종·의 종에 태조(주원장)까지 더해서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그 제사는 고종 때까지 이어졌다. 만절필동은‘ 곡절이 있어도 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의 대명사가 된 말이다.
--- p.345

출판사 리뷰
역사 애호가의 궁극을 보여주다

이 책의 지은이는 역사가가 아니다. 정형외과 의사이니 말 그대로 아마추어 역사 애호가일 따름이다. 

한데 바위글씨에 꽂혀 온갖 곳을 쏘다닌 것을 바탕으로 《실록》을 비롯한 사료는 물론 개인문집, 신문기사를 뒤져내 이야기를 캐내는 열성과 성취는 애호가 수준을 벗어난다. 

이번 첫 책에서는 빠졌지만 그의 답사는 일본까지 걸친다. 여기에 맹견에 쫓기고, 뱀에 놀라고, 잔꾀를 부려 금지된 지역을 가는 등 실감나는 이야기가 버무려져 이 책은 깊이와 재미를 겸비한 수작(秀作)이라기에 손색이 없다.

어쩐지 나만 알 것 같은 이야기

서울 동작동의 국립현충원의 원주인은 중종의 부인인 창빈 안씨였다. 

아들 덕흥군이 그녀의 유택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이 왕위(선조)에 오르면서 조선 최고의 명당자리가 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창빈 묘역에 자리 잡은 한 이유이다. 

서울대 또한 ‘주인’은 추사 김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자하 신위다. 

그의 5대조가 자하동(현 서울대 자리)에 자리를 잡았고, 현 서울대박물관 뒤에는 신위의 고조부 신확의 묘에서 가져온 문인석 한 쌍이 있다. 

오늘날 강남의 요지 잠실이 원래 강북이었음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잠실은 잠실도라는 섬이었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에는 가물면 걸어서 넘어갈 수 있었단다.

 1914년 행정구역 명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였다.

상식을 뒤엎는 기막힌 이야기

중종반정의 ‘브레인’ 성희안의 묘를 찾은 지은이는 그를 ‘타락한 혁명’의 표본으로 든다. 

그를 두고 원대한 꾀에 어둡고 집과 시첩에 사치를 부리는 등 방종하다가 생명을 잃었다고 평한 《실록》에 근거해서다.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은 병사를 모으려 함경도로 가서는 온갖 패악질을 일삼아 오죽했으면 주민들이 감금해 왜장에게 넘겨버렸을까

. 위정척사의 대명사 최익현이 새긴 ‘평양화표’에서 “세상은 위대한 명나라의 것…요 임금을 섬기고 공자를 배워서…”란 구절을 보면 절로 한숨을 나오지 않을까. 나라가 흔들리는데 기껏 사대주의라니.

잊고 지내기엔 안타까운 이야기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지는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자 가위와 인두로 땅굴을 파서 탈출했다가 사흘 만에 붙잡히고 이 소식을 들은 이지의 처는 자진했다.

 폭군의 아들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수락산 ‘옥류동’에서 되짚어본 사연이다. 

조선 2대왕 정종의 둘째 아들 순평군은 40세가 넘도록 한 글자도 모르는 무식꾼이었다. 

그의 유언은 “종학(宗學?왕족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 크게 기쁘다”였단다. 학습지진아의 한이랄까. 

일제강점기의 대지주 조병학은 폐교 위기의 세브란스를 살리기 위해 전 재산을 기부했는데 《친일인명사전》에 실렸다. 

일제에 국방헌금을 냈다는 이유인데 ‘친일파 독지가’는 어떻게 봐야 할까.

돌에 새겨 전해지는 장한 이야기

충북 진천군의 ‘옥천병’이란 바위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이 남긴 것이다. 

천재 수학자 오일러에 60여 년 앞서 9차 직교 라틴방진을 구한 빼어난 수학자의 흔적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펼쳐 충절과 절개의 화신으로 꼽힌 김상헌은 전후에 일신의 안녕만 영위했다. 

이를 두고 “…국가의 명운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산성을 빠져나가 멀리 달아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당시의 일이 대충 안정 되었는데도 끝내 성상을 찾아와 뵙지 않았습니다…

”라 통박하는 상소를 올린 유석의 신도비가 경기도 안산시에 아슬아슬하니 서 있다. 

조선의 최연소(만14세) 과거급제자 이건창의 영세불망비가 강화도에 있다. 

비록 정치적 배려에 힘입어 급제했지만 청렴하고 유능해 조선 후기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불린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5670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