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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제국 이야기 : 유라시아대륙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흉노를 찾아서

동방박사님 2021. 12. 15.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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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흉노의 흥망성쇄

세계 제 8대 불가사의라고 평가되는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흉노의 침입을 두리워하며 축조한 성벽이었다. 중원제국을 호령하던 진시황을 두려움에 떨게 한 흉노족. 하지만 그들의 자취를 현재에 찾기란 쉽지 않다. AD 460년, 흉노의 마지막 정권인 북량정권이 유연족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흉노족은 중국 역사 상에서 사라졌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그로부터 1500년 후, 일부 헝가리인들이 정부를 향해 자신들을 훈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해달라고 했다. 이들의 요구는 기각되었지만, 세계적으로 흉노·훈족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에도 마찬가지인데, 흉노와 신라라는 주제를 놓고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펼쳐졌다. 바로 신라왕족을 이룬 김씨가 북방계, 흉노의 일족이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과연 흉노족에 관한 소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이 책은 흉노족의 흥망성쇄를 흥미롭게 추적하고 있다.

목차

01. 고대민족의 후예를 찾아서
01-1. 고원에 이는 충돌의 물결
중앙아시아 고원/ 속도와 개방/ 영웅을 기대하다
01-2. 몽골고원의 첫 번째 주인
초원의 문화/ 다업형태의 경제/ 신비로운 정신세계

02. 몽골고원을 떠난 북흉노
02-1. 장성 양단의 전투
호복기사와 사이/ 기고만장한 흉노/ 전쟁으로 보낸 40년
02-2. 혼란이 끊이지 않은 왕위쟁탈전
흉노의 전략목표, 서역/ 기이한 권력투쟁의 결말
02-3. 서역, 한?흉의 첫 번째 친밀한 접촉
머리 숙인 늑대의 후예들/ 신비한 여간현의 용병
02-4. 양한의 짧은 소생
소군 출새/ 왕망의 복고개혁/ 북흉노, 낮게 멀리 날다
02-5. 중원의 마지막 흉노
요약/ 유씨의 탈을 쓴 전조 정권/ 혁련발발과 대하 정권/ 틈새 속에서 성장한 북량 정권

03.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로마제국
03-1. 도시국가에서 탄생된 기이한 정치 구도
아펜니노 반도에서 시작된 도시국가/ 군주제와 공화제가 낳은 기형아/ 군심을 잡기 위해 민심을 버리다
03-2. 로마를 향한 게르만의 공격
요약/ 만신창이가 된 갈리아/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도전/ 로마를 통치한 게르만 황제/ 고트족의 독립, 로마제국의 악몽
03-3. 기독교와 로마제국
기독교의 탄생/ 기독교의 은밀한 성장/ 로마제국의 근심

04. 훈, 유럽을 자극하다
04-1. 중앙아시아로 진입한 흉노
요약
04-2. 동유럽 평원에 자취를 드러낸 기마민족
요약/ 수치심에 자살한 동고트족 왕/ 서고트족, 훈족의 훌륭한 대리인
04-3. 울딘이 통치한 훈제국
훈족을 묘사한 로마의 역사가들/ 울딘/ 서고트족의 명쾌한 답안/ 적의 약점을 노린 반달족
04-4. 아틸라의 초기 사적
루아, 울딘의 뛰어난 계승자/ 블레다와 아틸라
04-5. 세계를 지배하려는 아틸라
마르스 검의 첫 번째 희생양/ 동로마 서절단 여행기
04-6. 갈리아를 휩쓸다
동맹 세력에서 적이 되기까지/ 상파뉴에 묻힐 뻔하다
04-7. 로마로 밀려드는 거센 물길
훈 대군을 퇴각시킨 주교/ 영웅의 몰락

05. 에필로그: 아틸라의 후예들-그 후의 이야기

부록1. 훈족은 흉노의 후예인가?/ 부록2. 흉노·훈 동족설/ 부록3. 흉노?훈 관련 연표/ 부록4. 묵돌 선우가 한나라 문제에게 보낸 편지


저자 소개

저 : 장진퀘이 (張金奎)
 
중국인민대학 역사학과 및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역사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역대 대왕들의 왕위 쟁탈전』 『중국사 연구』 등이 있다.
역자 : 남은숙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중국 강소성 소주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현재 번역에이전시 (주)엔터스코리아에서 중국어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역서에 『아버지의 인생노트』 『여유-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지혜』 『달팽이 경영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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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요약
2004년 말, 약 2천5백여 명의 헝가리인들이 정부를 향해 자신들이 ‘훈족’이란 사실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비록 이들의 요구는 의회와 정부에 의해 기각되고 말았지만, 훈족의 후예들이 유럽에 존재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수면 위로 부각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1,500년 전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AD. 460년, 흉노의 마지막 주자인 북량(北凉)정권의 계승자 저거안주(沮渠安周)가 서역에서 16년간 군림한 후 유연족(柔然族)에 의해 모조리 섬멸당하고 말았다. 그때 이후로 몽골초원을 7백년 넘게 호령하던 이들은 중국의 역사문헌에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한족(漢族)에게 완벽하게 융합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희망의 땅을 찾아서 그들만의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일까?

지난 2009년 상반기에 인터넷 검색어에 ‘흉노와 신라’가 한동안 수위 자리에 오른 적이 있었다. 신라의 왕관과 왕릉이 북방계통이고, 왕족인 김씨가 흉노 휴도부 출신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KBS 1TV에서도 흉노 관련 다큐멘터리를 『역사스페셜』에서 방송한 적이 있으며, 같은 방송국의 주부 대상 아침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저명한 고고학자가 동서양의 문명 교류를 설명하는 가운데 신라의 내물왕계와 흉노와의 관계를 언급하여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었다.

중원 정부와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수세기 동안 유라시아 북방 세계에 우뚝 선 흉노, 그들의 흥망성쇠를 이 책을 통해 추적해본다.

흉노에 대하여
진시황에 의해 원주지를 빼앗긴 흉노는 묵돌이라는 영웅을 선우(單于. 군장)로 세우고 진나라를 대신한 한나라 유방과 접전을 벌인다. BC. 200년, 백등산에서 묵돌에게 일곱 밤낮을 포위당한 유방은 겨우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한나라는 북방을 쳐다보지 못하고 무제가 등장할 때까지 70여년을 흉노의 눈치를 보며 지낸다. 장건(張騫)의 서역 사행 이후 서역의 정보를 쥔 무제는 본격적으로 40년에 걸친 막북 전쟁(흉노 토벌 전쟁)을 일으키지만 결과는 무승부였다. 한나라는 전쟁에 에너지를 쏟은 나머지 기반이 흔들렸고, 흉노도 세력을 확장하는 데 한계가 닥친 까닭이다.

막북 전쟁(漠北戰爭. 기원전 133년~기원전 90년) 이후 한나라의 위세도 예년만 못하고 흉노 역시 영웅이 나타나지 않아 지리멸렬한 채로 공방전을 펼치다 BC. 48년 흉노가 동흉노와 서흉노로 분열되고(1차 분열), 그로부터 약 1백년 후 동흉노가 다시 남흉노와 북흉노(AD. 50년)로 쪼개지면서(2차 분열) 흉노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먼저 1차 분열하여 한나라에 대항한 서흉노의 수장 질지는 한나라의 공세를 피해 지금의 키르기스 지역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맹주 노릇을 한다. 그러나 질지가 실크로드의 상권을 장악하려 들자 한나라는 더욱 공세를 펼쳐 그를 제거한다.
2차 분열 때의 북흉노는 동한정부의 ‘이이제이 전술’의 대상이 된데다 수년 동안 혹한이 계속되자 살던 곳을 버리고 멀리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 서쪽으로의 이동 와중에 원주민들과의 민족 융합이 이루어지면서 흉노는 점차 세력을 키우고 정치적인 통합을 모색해 나간다.

한편, 중원 혹은 그 변방에 거주지를 둔 남흉노 세력들은 중원왕조가 붕괴되면서 힘을 잃자 다른 이민족들처럼 자신들만의 왕조를 세운다. 이른바 5호16국, 위진 남북조 시기에 흉노에 뿌리를 둔 왕조는 전조, 대하, 북량 등이 있다. 또 이들과 결합된 선비의 각 종족들도 각기 할거정권을 세우며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약 270여 년간 오랑캐들이 지배세력이 되어 중원을 분할, 통치하게 된다.

동서의 교섭 흔적--신비한 여간현 이야기
중국 감숙성(甘肅省) 영창현(永昌縣) 초가장(焦家莊) 향루(鄕樓)마을에 여간촌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자래채(者來寨)였다. 이곳에는 약 30미터의 길이에 높이가 3미터 채 안 되는 성벽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3층 높이에 성벽 윗면으로 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일찍이 이곳에서 한나라 때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묘주는 다름 아닌 유럽인이었다. 현재 이 마을에는 4백여 가구가 살고 있고, 주민 대다수가 유럽인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여간’은 한나라 때 로마제국을 일컫는 말이다.

1940년대 호머 더브스(전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이곳이 로마의 투항자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하였다. 또 오스트레일리아의 데이비드 해리스는 자래채가 옛 여간성의 유적이며, 여간성은 서한 때 로마의 포로들을 모아놓은 곳이라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켜 수많은 학자들이 그곳에 숨은 수수께끼를 풀고자 했다. 중국의 역사학자 천정이[陳正義]는 파르티아가 로마와의 전쟁(BC. 53년 카르하이[카라이] 전투)에서 붙잡은 포로들을 동쪽 변경으로 보내 통상로를 지키고, 한나라와의 교역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 그 시초였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액문(扼門)의 굴욕’을 당한 로마의 포로들이 차마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파르티아의 동쪽 변경으로 갔는데, 파르티아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그들 중 일부가 강거로 도피했고, 강거 왕은 파르티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었다. 그 후 그들의 세력이 조금씩 커져 인구가 2만에 육박하자 사람들은 젊은 사령관을 선출하였는데 모두 그를 ‘로마왕자’라 불렀다.

이 강거를 서흉노의 질지가 접수하고 ‘로마왕자’와 결탁하였다. 『한서 진탕전(漢書陳湯傳)』에 질지가 ‘중목성(重木城)’을 쌓고 ‘어린진(魚鱗陣)’을 펼치는 모습이 등장한다. 원형의 방패를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진을 쳐서 적을 공격하거나, 토성 외부에 중목성을 쌓아 방어를 하는 것은 당시 로마군이 전쟁시 자주 사용하던 전술이었다. 이 성의 몰락과 함께 질지는 한나라군에게 전멸되고 말았다.
여간현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천정이 선생은, 로마왕자가 먼저 한나라군과 교섭하여 사람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오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4천여 명의 로마인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왔다고 주장한다. 한나라는 기련산 기슭의 장액군(張掖郡) 번화현(番和縣), 예전의 흉노 절란왕(折蘭王)의 유목지인 그곳에 성을 쌓아 거주지를 마련하고 여간현을 두었으며, 이 ‘절란’의 음이 변하여 ‘자래채’가 그곳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질지와 로마인과의 첫 번째 접촉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흉노가 서역에서 기세를 떨치던 일은 로마에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로마인이 죽음의 비와도 같은 흉노 화살의 위력을 맛본 것은 그로부터 몇 백 년이 지난 후였다.

아시아를 떠난 흉노가 유럽의 훈족으로 등장하기까지의 여정
서유럽인에게 훈족이란 단어는 극악무도의 대명사이다. 훈족의 대왕 아틸라를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그의 뒤에는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훈족이 일찍부터 통치했던 동유럽에서는 훈족, 특히 아틸라는 용기와 권력의 상징으로 불린다. 지금까지도 아틸라는 헝가리 남자아이에게 즐겨 붙여주는 이름이다. 유럽인에게 이토록 강인한 인상을 남긴 훈족이 어떻게 멀고 먼 유럽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었을까?

서쪽으로 이동한 흉노가 어떤 방법으로 유럽을 뚫었는지는 매우 난해한 문제다. 그들이 장기 체류한 중앙아시아는 여러 세력들이 다투던 곳인데다, 유목민의 문화적 수준이란 매우 낮은 것이었다. 흉노의 일부가 중앙아시아 지대를 활보할 무렵, 유라시아 대륙 동쪽의 중국이 다섯 오랑캐족에 대처하느라 진땀을 빼는 사이, 대륙의 서쪽에서는 로마가 게르만족으로 인해 진퇴양난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두 나라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과 접촉한 이 유랑민족에 대해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겨우 역사적 단서들에 의거해 그들의 흔적의 단편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_(321페이지)

질지 이후 북흉노와 중원정부와의 세력다툼을 시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질지가 한나라군에 섬멸당한 때는 BC. 36년이었다.
약 80년 후인 AD. 48년, 남흉노의 선우가 북흉노를 공격하자 북흉노가 북쪽으로 도망가고 약 10년 후 북흉노가 서역에 진출한다(AD. 59~60년). 73년, 동한정부가 북흉노를 천산 방면에서 대파하고, 87년 선비가 북흉노를 공격하자 북흉노 58부 20여만 명이 남흉노로 투항한다. 89년과 90년에 걸쳐 동한과 남흉노 연합군이 재차 북흉노를 공격하고, 91년 북흉노는 금미산(알타이 산)에서 패한 뒤 서쪽으로 도주한다. 107년, 일시적으로 세력을 회복한 북흉노가 서역 제국을 지배하여 동한과 서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123년 북흉노 호연왕이 천산 동부에 근거지를 설치하였으며, 126년 북선우가 신강 금차곡에서 동한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불리하자 도주하였다. 134년, 동한군이 금차곡 일대에서 북선우의 노모를 포로로 잡았으며 이후 몇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대부분 동한군의 승리로 끝난다. 135년과 151년 북흉노의 호연왕이 차사후국과 이오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150년대부터 선비의 단석괴가 몽골고원을 지배하면서부터 세의 불리를 느낀 북흉노는 옛 오손지역(동투르키스탄)을 버리고 서쪽의 강거 방면으로 이주한다. 181년, 단석괴가 죽자 선비는 사분오열되고 북흉노는 어부지리로 옛 땅을 차지하고 반격할 기회를 엿본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AD. 280년경 북흉노는 강거의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강거는 남방으로 쫓겨난다.
이것이 약 300여년에 걸친 서역에서의 북흉노 시간표이다._(175-195/ 320-325 페이지)

일시나마 세력을 회복한 북흉노가 왜 동투르키스탄을 버리고 탈라스 강 유역의 강거로 이동했는지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역사학자들은 유연족(柔然族. 아바르 족)의 흥기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북흉노의 서천(西遷)은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 300여년 전 자신들의 조상 질지가 한나라군에 의해 패배하고 남은 무리들이 서방으로 옮겨가면서 예방차원에서 병약자들을 남기고 갔는데, 이들이 세력을 회복한 후 정령인과 결합하여 고거정령(高車丁零)으로 한 단계 진화하였다. 이들이 천산 남쪽의 위구르족[回紇族]의 선대이다.

흉노와 훈족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의 형세를 살펴보자.
“강거는 북흉노가 두 번째로 이동한 지역으로 정착하기엔 부적합한 땅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과거의 원수였던 월지(月氏)를 만났다. 대략 서한 초기에 흉노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밀려난 월지는 그곳에서 쿠샨제국을 세웠다. 월지는 북인도와 박트리아의 영토를 점령하면서 규수(?水) 이북의 ‘고향땅’을 포기했다. 강거는 예부터 박트리아와 오손 사이에서 압박을 받아오다가 월지가 남쪽으로 이동하자 재빨리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월지는 그들을 보호국으로 삼아버렸다. 그 후로도 강거는 또 다시 북쪽 알란(엄채[奄蔡])의 구속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하여 중앙아시아에는 기이한 연결체가 형성되었다.”_(324 페이지)

대략 2세기 중반, “월지와 북흉노 사이에는 강거가 자리잡고 있었고, 강거는 월지의 속국이 된 이후로 정착생활을 시작한 터라 전투력이 열세였다. 북흉노군은 비록 패잔병 출신들이었지만 강거와 월지를 상대하기엔 충분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곳에서 북흉노는 승리의 쾌감을 맛보며 장기간 휴식에 돌입했다. 지쓰허([齊思和]. 중국의 역사학자) 선생의 말에 따르면 그들 간의 전투는 공격과 휴식을 반복하며 대략 1백년간 이어졌다고 한다.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소모전의 대가를 혹독히 치른 경험이 있던 흉노는 그렇게 1백년을 버텨낸 후 비축한 힘으로 마침내 서쪽으로 발을 내딛어 알란족을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_(325 페이지)

서양역사에 훈족이 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대략 AD. 290년 전후이다. 아르메니아 왕의 군대에 훈족 병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용병으로서 알란족(알라니족)과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질지가 서역을 지날 당시 알란과 대완 등의 나라들이 질지에게 공물을 바쳤다. 질지가 세력을 잃으면서 강거가 알란의 새 주인이 되었다. 그런데 북흉노가 강거로 진입하자 알란족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흑해 북안으로부터 키르기스 초원까지 족적을 남겼다. 알란군은 고용군의 신분으로 아르메니아 왕국에 자주 나타났고, 또 그들의 왕녀가 아르메니아 왕자와 결혼하면서 그 세력은 더 커져갔다.

알란족에 대한 훈족의 공격은 대략 350년에 시작하여 374년에 끝이 나고, 그 이듬해부터는 동고트족을 침공하였으며, 376년 서고트족이 훈족에게 추방당해 로마제국에 비호를 요청하였다. 이후부터 흩어져 있던 훈족은 점차 정치적으로 통합을 모색해가면서 로마를 위협하고 게르만족들을 압박하여 서쪽으로 이동케 함으로써 ‘짧고 굵은’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453년 아틸라가 죽을 때까지 ‘유럽에서의 게르만 이동’의 진원지를 만들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