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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안중근. 하얼빈에 역사를 묻다』는 하얼빈의 한국 독립운동가를 총체적으로 소개한 처음 책이다. 하얼빈은 지리적,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삶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다. 그리고 자연히 독립을 열망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활동을 하는 장이 되었다. 특히 안중근의 이토히로부미 저격사건은 우리 독립운동역사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일일뿐 아니라, 중국민족들에게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안중근. 하얼빈에 역사를 묻다』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행적과 선양, 안중근 의사 친척 그리고 유해 부문을 다룬 서적이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조선 침탈이 가일층 본격화되는 시점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 권총으로 척살함으로써 약소국의 주권을 함부로 유린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주에 제동을 걸고, 그 죄상을 만천하에 알린 쾌거를 이루었다. 이에 다급해진 일제는 안중근 의사에게 정치범이 아닌 살인죄를 뒤집어씌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속전속결로 사형시킴으로써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또한 안 의사의 순국이 일제의 침탈에 맞서는 동아시아인들의 성지로 확산되는 것이 두려워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줘야 하는 현행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안 의사의 시신을 유기해 암매장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순국한 지 100년이 넘도록 조국의 품에 안기지도 못한 채 먼 타국의 차가운 지하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우리 역사에 있어 안중근 의사가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지를 하얼빈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이다.
『안중근. 하얼빈에 역사를 묻다』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행적과 선양, 안중근 의사 친척 그리고 유해 부문을 다룬 서적이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조선 침탈이 가일층 본격화되는 시점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 권총으로 척살함으로써 약소국의 주권을 함부로 유린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주에 제동을 걸고, 그 죄상을 만천하에 알린 쾌거를 이루었다. 이에 다급해진 일제는 안중근 의사에게 정치범이 아닌 살인죄를 뒤집어씌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속전속결로 사형시킴으로써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또한 안 의사의 순국이 일제의 침탈에 맞서는 동아시아인들의 성지로 확산되는 것이 두려워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줘야 하는 현행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안 의사의 시신을 유기해 암매장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순국한 지 100년이 넘도록 조국의 품에 안기지도 못한 채 먼 타국의 차가운 지하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우리 역사에 있어 안중근 의사가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지를 하얼빈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이다.
목차
저자의 말
하얼빈에대한 소고
추천사
제1장 동방 모스크바
- 하얼빈 역사, 왜 하얼빈이라고 했을까?
- 얼음 도시 하얼빈, 빙등제와 빙설대세계
- 노래하자 하루빈, 춤추는 하루빈
- 러시아 조차지를 가다
·중앙대가
·다리에바, 거와스, 홍창
·러시아 식당
·하얼빈역과 성·이베론 성당
·성·소피아 성당
·과과리대가와 추림공사
·불가장원과 성·니콜라스 성당
·태양도
제2장 하얼빈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 하얼빈에서 한국 독립운동
-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 안중근 의사 동지, 독립운동가 정대호
- 하얼빈 독립운동가 후손들 집단 거주지 취원창 가는 길
- 독립운동가 정율성과 정율성기념관
제3장 안중근 의사 유적지를 가다
- 안중근 의사와 함께 가는 여행
·김성백의 집
·조린공원
·서 7도가-서 8도가
·도리조선족중심 소학교
·하얼빈역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
·화원 소학교
·채가구역
- 하얼빈에 남겨진 안중근 의사 친척들
- 안중근 오페라 악보가 있다
- [1박 2일] 촬영 체험기, 안중근 의사
젊은이들의 레전드가 되다
- 하얼빈과 나
- 일본 식민시기 지역을 가다
·동북열사기념관과 조선 출신 항일연군
·화원 소학교와 독립운동가
·731 부대 ㅡ 악마의 블랙박스가 열리다
제4장 안중근의 유언
- 평화주의자 안중근 유해 발굴의 당위성
- 안중근 의사 유해는 관동도독부 감옥소 묘지에 묻혔다
- 안중근 유해 위치 확인 및 발굴 방안
·사료및자료방면
- 철도, 안중근 의사 평화의 길
·하얼빈의거철도에서평화를 위해 쏘다
·남북철도, 평화를 위하여 달린다
제5장 하얼빈 아리랑
- 하얼빈 아리랑
- 한중 우의의 상징,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 하얼빈의 역사 인물, 안중근 연구가
서명훈 선생
- 독립정신의 현재적 계승, 김기영 선생
부록
- 안중근 의사 연보
- 안중근 의사하얼빈에서 11일
- 하얼빈 대사기
- 참고문헌
저자 소개
- 김월배
- 김이슬
하얼빈에대한 소고
추천사
제1장 동방 모스크바
- 하얼빈 역사, 왜 하얼빈이라고 했을까?
- 얼음 도시 하얼빈, 빙등제와 빙설대세계
- 노래하자 하루빈, 춤추는 하루빈
- 러시아 조차지를 가다
·중앙대가
·다리에바, 거와스, 홍창
·러시아 식당
·하얼빈역과 성·이베론 성당
·성·소피아 성당
·과과리대가와 추림공사
·불가장원과 성·니콜라스 성당
·태양도
제2장 하얼빈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 하얼빈에서 한국 독립운동
-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 안중근 의사 동지, 독립운동가 정대호
- 하얼빈 독립운동가 후손들 집단 거주지 취원창 가는 길
- 독립운동가 정율성과 정율성기념관
제3장 안중근 의사 유적지를 가다
- 안중근 의사와 함께 가는 여행
·김성백의 집
·조린공원
·서 7도가-서 8도가
·도리조선족중심 소학교
·하얼빈역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
·화원 소학교
·채가구역
- 하얼빈에 남겨진 안중근 의사 친척들
- 안중근 오페라 악보가 있다
- [1박 2일] 촬영 체험기, 안중근 의사
젊은이들의 레전드가 되다
- 하얼빈과 나
- 일본 식민시기 지역을 가다
·동북열사기념관과 조선 출신 항일연군
·화원 소학교와 독립운동가
·731 부대 ㅡ 악마의 블랙박스가 열리다
제4장 안중근의 유언
- 평화주의자 안중근 유해 발굴의 당위성
- 안중근 의사 유해는 관동도독부 감옥소 묘지에 묻혔다
- 안중근 유해 위치 확인 및 발굴 방안
·사료및자료방면
- 철도, 안중근 의사 평화의 길
·하얼빈의거철도에서평화를 위해 쏘다
·남북철도, 평화를 위하여 달린다
제5장 하얼빈 아리랑
- 하얼빈 아리랑
- 한중 우의의 상징,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 하얼빈의 역사 인물, 안중근 연구가
서명훈 선생
- 독립정신의 현재적 계승, 김기영 선생
부록
- 안중근 의사 연보
- 안중근 의사하얼빈에서 11일
- 하얼빈 대사기
- 참고문헌
저자 소개
- 김월배
- 김이슬
출판사 리뷰
『안중근. 하얼빈에 역사를 묻다』의 저자인 김월배 교수는 2005년 중국으로 건너가 십 수 년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왔다. 안중근기념관이 있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 감옥으로, 대학 강단으로, 한국에서의 안중근 의사 선양 사업을 위해 불철주야 발로 뛰고 있다. 그야말로 ‘투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안중근 의사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신의병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확보한 안중근 의사의 자료와 즉, 안중근 의사 하얼빈 행적과 선양, 안중근 의사 친척 그리고 유해 부문을 다룬 서적이다.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따라 유해발굴 자료는 물론 하얼빈 지역에 이주해서 살고 있었던 우리 민족들의 삶의 모습과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안중근의 행적은 물론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하얼빈 내 조선족 역사와 동포들의 이야기, 그리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책이라는 것이다.
안중근이 할동한 하얼빈은 조린공원, 안중근 의사의 유목인 정초당,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이 있으며, 저자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1일의 행적을 쫓아 기록한 것은 의미가 있다.
어느덧 광복 70주년이 넘었다.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피의 대가로 되찾은 광복이기에 한국인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벅찬 광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민족적 과제들이 많다. 아직 선열의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에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광복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고착화된 분단문제가 그러하고, 보상은커녕 사과 한마디 제대로 받지 못한 수많은 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물론이고 낯선 타국의 지하에 묻혀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을 수많은 선열들의 유해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특히 순국 110년이 되도록 유해조차 거두지 못한 안중근 의사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안중근. 하얼빈에 역사를 묻다』는 우리의 오랜 염원인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의 시급함과 의미를 우리 모두에게 새로이 인식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이토의 척살 현장과 그 11일간의 기록, 그의 독립의 의지가 묻어 있는 하얼빈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한 오페라 사료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올해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10주년 되는 해이며 다시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라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점점 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의 문화와 기술력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의 원류는 안중근 의사와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확보한 안중근 의사의 자료와 즉, 안중근 의사 하얼빈 행적과 선양, 안중근 의사 친척 그리고 유해 부문을 다룬 서적이다.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따라 유해발굴 자료는 물론 하얼빈 지역에 이주해서 살고 있었던 우리 민족들의 삶의 모습과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안중근의 행적은 물론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하얼빈 내 조선족 역사와 동포들의 이야기, 그리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책이라는 것이다.
안중근이 할동한 하얼빈은 조린공원, 안중근 의사의 유목인 정초당,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이 있으며, 저자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1일의 행적을 쫓아 기록한 것은 의미가 있다.
어느덧 광복 70주년이 넘었다.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피의 대가로 되찾은 광복이기에 한국인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벅찬 광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민족적 과제들이 많다. 아직 선열의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에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광복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고착화된 분단문제가 그러하고, 보상은커녕 사과 한마디 제대로 받지 못한 수많은 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물론이고 낯선 타국의 지하에 묻혀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을 수많은 선열들의 유해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특히 순국 110년이 되도록 유해조차 거두지 못한 안중근 의사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안중근. 하얼빈에 역사를 묻다』는 우리의 오랜 염원인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의 시급함과 의미를 우리 모두에게 새로이 인식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이토의 척살 현장과 그 11일간의 기록, 그의 독립의 의지가 묻어 있는 하얼빈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한 오페라 사료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올해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10주년 되는 해이며 다시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라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점점 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의 문화와 기술력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의 원류는 안중근 의사와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
하얼빈에는 수많은 역사가 있다. 특히 한민족의 역사가 곳곳에 즐비하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간 동포들의 역사, 하얼빈에서 태어난 동포들의 역사, 또한 하얼빈을 거쳐 간 동포들의 역사가 녹아 있다.
나는 하얼빈과 중국에서 보낸 기억과 역사의 현장을 모아 하얼빈 곳곳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동토의 땅 하얼빈에서 발로 뛰고 나의 두 다리가 기억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지금도 하얼빈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역사의 현장이며 이 글은 내가 15년간 중국에서 보낸 나의 기록이다.
누가 나에게 하얼빈이 어떠한 곳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얼빈이 제2의 고향 이라고 자신 있게 답한다. 하얼빈에는 나의 중년기가 녹아 있다. 나는 2005년 12월 하얼빈에 처음 갔다. 하얼빈은 정말 동토의 땅이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추위와 눈이었다. 그때 나 는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나는 당시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설립해야 했다. 2006년 1월 16일 오 후 15시 역사적 순간이었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국내가 아닌 하얼빈에 동상 컨 셉 제작, 설치 등 모든 순간들이 숨가쁘게 돌아갔다.
5미터가 넘는 안중근 의사 동상을 꼭두새벽 기중기를 동원해 번개처럼 세웠다. 실로 007 작전을 방불케 한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자랑스럽게 세워야 할 안중근 의사의 동상.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바로 그곳 하얼빈에 세우는 일인데도 모든 것이 녹록치 않았다.
긴박한 순간에 동상 제막 프로그램을 점검하였다. 방명록 점검, 시나리오 정 비, 축사, 내빈들의 동선 파악 등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내 차림새는 그야말로 막노동자의 차림이었다.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일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 해 그 와중에 중저가 옷가게로 뛰어가 저렴한 상의를 구입했다.
드디어 한국과 다롄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기리려는 손님들이 차량을 이용해 단체로 오셨다. 오후 세 시, 민족의 성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 (誅殺)한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세워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회를 보았다.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는지 가슴이, 심장 이, 온몸이 떨렸다.
이것이 나의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의 시작이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독립운동의 성지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고 안중근 의사를 사랑하는 행동가들에 의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 동상으로 부활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11일, 열하루 만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하얼빈에 계셨던 그 11일과 동일하게 불 과 11일 만에 숨 막히게 흥분하여 세웠던 안중근 의사 동상을 나는 3년 동안 지하에 모시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동상을 다시 하얼빈 광장에 다시 세우고 싶었지만 그 염원은 하얼빈에서는 다시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안중근 의사 동상이 경기 도 부천의 안중근 공원에 세워져 있다.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유언을 남기셨다.
“내가 죽거들랑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그러나 이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공원에 묻히면 바로 그곳이 대한독립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서 안중근 의사의 유언까지 묵살해 버렸다. 당시 하얼빈 일본 총 영사 가와카미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전문을 보내 안중근 의사 유해를 하얼빈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안중근 의사를 뤼순 감옥에 가둔 후 일제는 전 세 계인 앞에 자랑스럽게 공판 쇼를 벌이며 마치 일본이 최고의 법을 지키는 문명국인 양 선전을 해댔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이 만든 감옥법 74조를 어겼다. 일본의 감옥법 74조는 사형집행이 끝나면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안중근 의사 두 동생이 유해를 모시기 위해 뤼순에 갔지만 일본은 동생들에게 유해를 인도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감옥법을 어 기면서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는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일본이 감추고 있다. 광복 75주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우리는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 유해를 비밀리 매장한 원죄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많은 사람의 노고가 있었다. 특히 나의 가족이다. 나의 아내 김미애, 나의 사랑하는 아들 김종서 참으로 추운 하얼빈이었지만 가족 간 의 마음은 따듯했던 하얼빈에서 같이 살아온 수많은 시간들의 기록이다. 특히 하얼빈 이공대학 국제교류처 김기영 주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임 관장이신 강월화 관장, 침화 731부대 죄증 진열관 임화주임, 더욱이 하얼빈에서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하던 첼로 사진 예술원 김창 길 사장의 배려와 격려는 이역만리 하얼빈에서 힘든 시간을 지탱해 나갈 수 있 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하얼빈 빈현 검찰청에서 강직하게 살아오신 苑?彬님 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소중한 지면을 섬세하게 다듬어 주신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 문영숙 작가와 글의 품격을 높여 주신 박혜선 작가에게 지면을 빌어 다시금 감사함을 드린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 하얼빈의 여행자들은 더 깊은 하얼빈을 찾아 보시길 권한다. 중앙대가에서 송화강과 만나는 방홍기념탑에 새 겨진 조선족 여인, 동북 열사 기념관에 전시 소개된 경북 의성 출신 한국인, 서 울 구로구청에서 하얼빈에 세운 안중근 의사 동상은 처음 어디에 세웠으며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하얼빈에 가장 큰 한국기업으로 전임 대통령이 방문했던 기업은 어느 기업이며 지금은 어찌되었을까? 하얼빈에 현재 거주하는 로봇 공학 으로 중국에서 가장 저명한 동포 학자는 어느 분일까? 이에 대한 물음을 찾아 가는 하얼빈 여행길은 더욱 풍성하고 알차진다. 본 내용은 책에 일부러 수록하지 않았다. 여행자들이 관심을 갖고, 만나는 하얼빈 시민들과 질문을 통해서 찾아보길 바란다.
이 책이 하얼빈 여행을 하시는 분들을 위한 필독서가 되길 바란다. 또한 하얼 빈을 고향으로 둔 동포들에게 자긍심을 줄 수 있는 책이 된다면 좋겠다.
2020년 10월 26일 김월배
하얼빈에 대한 소고
하얼빈이라 하면 대부분 빙등제나 추운 겨울 혹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 거를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하얼빈에 오기 전까지 마찬가지였다. 약 10년 전 베이징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당시, 겨울 방학에 친구들이 하얼빈으로 빙등제를 보러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추위가 너무 싫었던 나는 절대 겨울에 하얼빈은 가지 않겠다고 하며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갔었다. 그런데 절대 가지 않겠다고 온몸으로 거부하던 하얼빈에서 현재 유학 생활을 하며 추운 겨울을 보내는 나 자신을 돌아보니 그 당시 뱉었던 말이 생각나 우습기도 하고 하얼빈과 인연이 있나 싶기도 하다.
하얼빈으로 박사 과정 공부를 하러 간다고 하니 떠나기 전,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할아버지께서 고향인 경북 의성에 살고 계셨는데 중학교 갈 때가 되자, 집안 어른들께서 하얼빈에 있는 친척 집으로 할아버지를 보내 중학 교 공부를 시키셨다는 것이다. 후에 할아버지께서는 방학을 맞아 하얼빈에서 고향으로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그 길로 계속 고 향으로 가시고 하얼빈이 아닌 고향에서 공부를 마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하얼빈역이나 중앙대가 등 을 걸을 때면 문득 할아버지께서도 이 길을 걸으셨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중국 경험이 오래되거나 많지 않다. 하지만 하얼빈 외의 다른 지역에서 도 살아 보기도 하고 여행으로 다닌 지역 역시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하얼 빈만큼 매력적인 도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얼빈에서 중국 동북의 문화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래된 도시답게 하얼빈만의 고유한 특색도 내뿜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한국과 많은 인연이 있는 도시로 한국 사람들이 관심을 가 질 수밖에 없는 곳인 것도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한의 독립과 동양평화 를 위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의 역사적 현장도 다름 아닌, 하얼 빈에 있다.
하얼빈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많은 중국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를 알고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하얼빈역 옆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방문한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들의 흔적도 남아있는 곳이다.
이렇듯 하얼빈은 한국 사람으로서,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제 역사의 현장을 발로 디디며 마음으로 느끼면서 동방의 모스크라 불리는 하얼빈의 문화와 매력에 흠뻑 빠져 볼 시간이다.
2020년 10월 26일 김이슬
하얼빈에는 수많은 역사가 있다. 특히 한민족의 역사가 곳곳에 즐비하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간 동포들의 역사, 하얼빈에서 태어난 동포들의 역사, 또한 하얼빈을 거쳐 간 동포들의 역사가 녹아 있다.
나는 하얼빈과 중국에서 보낸 기억과 역사의 현장을 모아 하얼빈 곳곳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동토의 땅 하얼빈에서 발로 뛰고 나의 두 다리가 기억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지금도 하얼빈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역사의 현장이며 이 글은 내가 15년간 중국에서 보낸 나의 기록이다.
누가 나에게 하얼빈이 어떠한 곳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얼빈이 제2의 고향 이라고 자신 있게 답한다. 하얼빈에는 나의 중년기가 녹아 있다. 나는 2005년 12월 하얼빈에 처음 갔다. 하얼빈은 정말 동토의 땅이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추위와 눈이었다. 그때 나 는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나는 당시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설립해야 했다. 2006년 1월 16일 오 후 15시 역사적 순간이었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국내가 아닌 하얼빈에 동상 컨 셉 제작, 설치 등 모든 순간들이 숨가쁘게 돌아갔다.
5미터가 넘는 안중근 의사 동상을 꼭두새벽 기중기를 동원해 번개처럼 세웠다. 실로 007 작전을 방불케 한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자랑스럽게 세워야 할 안중근 의사의 동상.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바로 그곳 하얼빈에 세우는 일인데도 모든 것이 녹록치 않았다.
긴박한 순간에 동상 제막 프로그램을 점검하였다. 방명록 점검, 시나리오 정 비, 축사, 내빈들의 동선 파악 등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내 차림새는 그야말로 막노동자의 차림이었다.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일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 해 그 와중에 중저가 옷가게로 뛰어가 저렴한 상의를 구입했다.
드디어 한국과 다롄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기리려는 손님들이 차량을 이용해 단체로 오셨다. 오후 세 시, 민족의 성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 (誅殺)한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세워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회를 보았다.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는지 가슴이, 심장 이, 온몸이 떨렸다.
이것이 나의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의 시작이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독립운동의 성지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고 안중근 의사를 사랑하는 행동가들에 의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 동상으로 부활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11일, 열하루 만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하얼빈에 계셨던 그 11일과 동일하게 불 과 11일 만에 숨 막히게 흥분하여 세웠던 안중근 의사 동상을 나는 3년 동안 지하에 모시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동상을 다시 하얼빈 광장에 다시 세우고 싶었지만 그 염원은 하얼빈에서는 다시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안중근 의사 동상이 경기 도 부천의 안중근 공원에 세워져 있다.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유언을 남기셨다.
“내가 죽거들랑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그러나 이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공원에 묻히면 바로 그곳이 대한독립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서 안중근 의사의 유언까지 묵살해 버렸다. 당시 하얼빈 일본 총 영사 가와카미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전문을 보내 안중근 의사 유해를 하얼빈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안중근 의사를 뤼순 감옥에 가둔 후 일제는 전 세 계인 앞에 자랑스럽게 공판 쇼를 벌이며 마치 일본이 최고의 법을 지키는 문명국인 양 선전을 해댔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이 만든 감옥법 74조를 어겼다. 일본의 감옥법 74조는 사형집행이 끝나면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안중근 의사 두 동생이 유해를 모시기 위해 뤼순에 갔지만 일본은 동생들에게 유해를 인도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감옥법을 어 기면서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는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일본이 감추고 있다. 광복 75주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우리는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 유해를 비밀리 매장한 원죄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많은 사람의 노고가 있었다. 특히 나의 가족이다. 나의 아내 김미애, 나의 사랑하는 아들 김종서 참으로 추운 하얼빈이었지만 가족 간 의 마음은 따듯했던 하얼빈에서 같이 살아온 수많은 시간들의 기록이다. 특히 하얼빈 이공대학 국제교류처 김기영 주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임 관장이신 강월화 관장, 침화 731부대 죄증 진열관 임화주임, 더욱이 하얼빈에서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하던 첼로 사진 예술원 김창 길 사장의 배려와 격려는 이역만리 하얼빈에서 힘든 시간을 지탱해 나갈 수 있 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하얼빈 빈현 검찰청에서 강직하게 살아오신 苑?彬님 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소중한 지면을 섬세하게 다듬어 주신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 문영숙 작가와 글의 품격을 높여 주신 박혜선 작가에게 지면을 빌어 다시금 감사함을 드린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 하얼빈의 여행자들은 더 깊은 하얼빈을 찾아 보시길 권한다. 중앙대가에서 송화강과 만나는 방홍기념탑에 새 겨진 조선족 여인, 동북 열사 기념관에 전시 소개된 경북 의성 출신 한국인, 서 울 구로구청에서 하얼빈에 세운 안중근 의사 동상은 처음 어디에 세웠으며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하얼빈에 가장 큰 한국기업으로 전임 대통령이 방문했던 기업은 어느 기업이며 지금은 어찌되었을까? 하얼빈에 현재 거주하는 로봇 공학 으로 중국에서 가장 저명한 동포 학자는 어느 분일까? 이에 대한 물음을 찾아 가는 하얼빈 여행길은 더욱 풍성하고 알차진다. 본 내용은 책에 일부러 수록하지 않았다. 여행자들이 관심을 갖고, 만나는 하얼빈 시민들과 질문을 통해서 찾아보길 바란다.
이 책이 하얼빈 여행을 하시는 분들을 위한 필독서가 되길 바란다. 또한 하얼 빈을 고향으로 둔 동포들에게 자긍심을 줄 수 있는 책이 된다면 좋겠다.
2020년 10월 26일 김월배
하얼빈에 대한 소고
하얼빈이라 하면 대부분 빙등제나 추운 겨울 혹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 거를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하얼빈에 오기 전까지 마찬가지였다. 약 10년 전 베이징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당시, 겨울 방학에 친구들이 하얼빈으로 빙등제를 보러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추위가 너무 싫었던 나는 절대 겨울에 하얼빈은 가지 않겠다고 하며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갔었다. 그런데 절대 가지 않겠다고 온몸으로 거부하던 하얼빈에서 현재 유학 생활을 하며 추운 겨울을 보내는 나 자신을 돌아보니 그 당시 뱉었던 말이 생각나 우습기도 하고 하얼빈과 인연이 있나 싶기도 하다.
하얼빈으로 박사 과정 공부를 하러 간다고 하니 떠나기 전,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할아버지께서 고향인 경북 의성에 살고 계셨는데 중학교 갈 때가 되자, 집안 어른들께서 하얼빈에 있는 친척 집으로 할아버지를 보내 중학 교 공부를 시키셨다는 것이다. 후에 할아버지께서는 방학을 맞아 하얼빈에서 고향으로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그 길로 계속 고 향으로 가시고 하얼빈이 아닌 고향에서 공부를 마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하얼빈역이나 중앙대가 등 을 걸을 때면 문득 할아버지께서도 이 길을 걸으셨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중국 경험이 오래되거나 많지 않다. 하지만 하얼빈 외의 다른 지역에서 도 살아 보기도 하고 여행으로 다닌 지역 역시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하얼 빈만큼 매력적인 도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얼빈에서 중국 동북의 문화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래된 도시답게 하얼빈만의 고유한 특색도 내뿜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한국과 많은 인연이 있는 도시로 한국 사람들이 관심을 가 질 수밖에 없는 곳인 것도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한의 독립과 동양평화 를 위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의 역사적 현장도 다름 아닌, 하얼 빈에 있다.
하얼빈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많은 중국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를 알고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하얼빈역 옆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방문한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들의 흔적도 남아있는 곳이다.
이렇듯 하얼빈은 한국 사람으로서,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제 역사의 현장을 발로 디디며 마음으로 느끼면서 동방의 모스크라 불리는 하얼빈의 문화와 매력에 흠뻑 빠져 볼 시간이다.
2020년 10월 26일 김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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