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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프랑스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왜 영국이나 미국처럼 순조롭게 시민 혁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피로 얼룩진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를 한 세기나 되풀이해야 했을까? 이 책은 혁명의 전범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프랑스 혁명사 100년의 과정을 명쾌하게 풀어낸 입문서이자 격동의 1980~90년대 한국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했던 혁명사의 고전이다. 혁명과 반혁명을 되풀이한 프랑스 혁명이 21세기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줄까? 1980년 출간 이후 31년 만에 새로 펴낸 노명식 교수의 대표작이다.
목차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제1장 18세기의 프랑스
1. 경제적 변동
2. 사회적 모순
3. 통치 체계의 모순
4. 계몽사상
제2장 대혁명의 원인과 국민의회
1. 귀족의 반동과 왕의 무능
2. 재정 문제와 귀족의 혁명
3. 혁명의 제1막
4. 8월의 성과
5. 혁명의 중심이 파리로
6. 재정과 교회
7. 왕의 도망 실패와 그 전후
8. 1791년 헌법
제3장 입헌의회와 국민공회
1. 전쟁과 왕권 정지
2. 9월 학살과 상퀼로트
3. 공화정의 수립과 왕의 사형
4. 지롱드파의 몰락
5. 에베르와 당통의 몰락
6. 산악파의 혁명 이념
제4장 부르주아 공화국
1. 테르미도르파의 반동
2. 총재정부의 동요
3.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제5장 나폴레옹 시대
1. 통령 정부
2. 전승과 평화와 종교 협약
3. 종신 통령에서 황제로
4. 나폴레옹 제국의 절정
5. 나폴레옹의 몰락
제6장 복고 왕정
1. 1814년의 사회 정황
2. 제1차 왕정복고
3.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4. 제2차 왕정복고
5. 중도 정책의 파탄과 샤를 10세
제7장 7월 왕국
1. 동요의 전반기
2. 기조의 보수 정책
3. 왕국 말기의 위기
제8장 제2공화국과 제2제국
1. 공화정과 그 좌절
2. 샤를 루이 나폴레옹
3. 제2제국
제9장 보불전쟁과 파리코뮌
1. 혁명과 패전
2. 파리의 분노
3. 코뮌 혁명의 발발
4. 코뮌 내란과 그 의의
참고문헌
찾아보기
초판 서문
제1장 18세기의 프랑스
1. 경제적 변동
2. 사회적 모순
3. 통치 체계의 모순
4. 계몽사상
제2장 대혁명의 원인과 국민의회
1. 귀족의 반동과 왕의 무능
2. 재정 문제와 귀족의 혁명
3. 혁명의 제1막
4. 8월의 성과
5. 혁명의 중심이 파리로
6. 재정과 교회
7. 왕의 도망 실패와 그 전후
8. 1791년 헌법
제3장 입헌의회와 국민공회
1. 전쟁과 왕권 정지
2. 9월 학살과 상퀼로트
3. 공화정의 수립과 왕의 사형
4. 지롱드파의 몰락
5. 에베르와 당통의 몰락
6. 산악파의 혁명 이념
제4장 부르주아 공화국
1. 테르미도르파의 반동
2. 총재정부의 동요
3.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제5장 나폴레옹 시대
1. 통령 정부
2. 전승과 평화와 종교 협약
3. 종신 통령에서 황제로
4. 나폴레옹 제국의 절정
5. 나폴레옹의 몰락
제6장 복고 왕정
1. 1814년의 사회 정황
2. 제1차 왕정복고
3.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4. 제2차 왕정복고
5. 중도 정책의 파탄과 샤를 10세
제7장 7월 왕국
1. 동요의 전반기
2. 기조의 보수 정책
3. 왕국 말기의 위기
제8장 제2공화국과 제2제국
1. 공화정과 그 좌절
2. 샤를 루이 나폴레옹
3. 제2제국
제9장 보불전쟁과 파리코뮌
1. 혁명과 패전
2. 파리의 분노
3. 코뮌 혁명의 발발
4. 코뮌 내란과 그 의의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 속으로
제3신분의 혈세로 만들어진 베르사유 궁정
삼부회 대의원 1,214명이 1789년 5월 초 프랑스 왕국의 방방곡곡 원근 각지에서 베르사유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베르사유는 물론이고 파리도 처음 보는 시골뜨기 유지들이었다. 특히 제3신분 대의원들이 그랬다. 그들은 우선 베르사유 궁정의 호사함에 놀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베르사유 궁정이 넓고 아름답고 호화롭다는 말은 들었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궁정은 실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호사와 장대의 극치였다. …… 베르사유의 장대하고 호사한 궁정과 궁중 생활의 비용은 어디서 나왔던가? 바로 제3신분의 혈세가 아닌가! 국가재정 파탄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그들은 이제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이다. 삼부회의 회의 장소를 파리로 하지 않고 베르사유로 한 것은 왕이 그토록 즐기던 사냥의 편의를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왕의 첫째 실책이었다. --pp.68~69 중에서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등장하는 상퀼로트
8월 10일 사건은 파리 시의회 즉 파리 코뮌을 프랑스의 실권자로 만들었다.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요구대로 왕권의 일시 정지를 선언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 국회인 국민공회의 소집을 가결했다. 왕권은 우선 잠정적으로 정지되었지만 결국 영원히 폐지될 터였다. 왕은 탕플에 유폐되었다. 그는 거기서 다섯 달을 더 살다가 처형되고 만다. 라파예트는 8월 10일 사건에 반격을 시도하여 일선 군대를 파리로 회군시키려다 실패하여 벨기에로 도망했다. 왕정을 수호하여 입헌군주 체제의 테두리에서 혁명을 성취하려던 사람들은 이제 라파예트와 함께 몰락하였다. 8월 10일 사건의 주동 세력은 온건한 부르조아가 아니라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과 영세 상인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혁명을 한결 더 과격하게 만든다. 이들은 귀족이 입는 퀼로트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여 상퀼로트라 불렸는데, 이제 이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 --pp.126~127 중에서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돌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무장 군인이 의사당을 점령하였다. 총검이 500인회 의원들을 쫓아냈다. 저녁 7시경 원로원은 앞서 500인회가 결의한 나폴레옹의 추방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통령정부의 조직을 공포하였다. 총재정부는 폐지되고 새 통령들에게 행정권이 위임되었다. 루시앵은 30~40명의 500인회 의원들을 긁어 모아놓고, 원로원의 결정을 승인하고 62명의 자코뱅파 의원을 제명하고 12월 22일까지 6주일간의 휴회를 결의하였다. 밤 2시, 세 사람의 통령이 의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선서하였다.
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라고 한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 --pp.207 중에서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
한편 전후 처리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던 빈의 열국 회의는 나폴레옹의 탈출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이견을 조정하여 불의의 도발자에게 대비하였다. 3월 25일 4대 연합국은 쇼몽 조약을 재확인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나폴레옹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던 웰링턴 휘하의 영국군 9만 6,000명과 블뤼허 휘하의 프로이센군 12만을 먼저 치기로 하였다. 그는 6월 6일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나폴레옹의 참패였다. 그는 두 빈 손을 내밀며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고 소리 질렀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결국 22일 퇴위하고 29일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10월 15일 남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었다. 그는 거기서 5년 반을 더 살다가 1821년 5월 5일에 죽었다.
삼부회 대의원 1,214명이 1789년 5월 초 프랑스 왕국의 방방곡곡 원근 각지에서 베르사유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베르사유는 물론이고 파리도 처음 보는 시골뜨기 유지들이었다. 특히 제3신분 대의원들이 그랬다. 그들은 우선 베르사유 궁정의 호사함에 놀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베르사유 궁정이 넓고 아름답고 호화롭다는 말은 들었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궁정은 실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호사와 장대의 극치였다. …… 베르사유의 장대하고 호사한 궁정과 궁중 생활의 비용은 어디서 나왔던가? 바로 제3신분의 혈세가 아닌가! 국가재정 파탄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그들은 이제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이다. 삼부회의 회의 장소를 파리로 하지 않고 베르사유로 한 것은 왕이 그토록 즐기던 사냥의 편의를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왕의 첫째 실책이었다. --pp.68~69 중에서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등장하는 상퀼로트
8월 10일 사건은 파리 시의회 즉 파리 코뮌을 프랑스의 실권자로 만들었다.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요구대로 왕권의 일시 정지를 선언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 국회인 국민공회의 소집을 가결했다. 왕권은 우선 잠정적으로 정지되었지만 결국 영원히 폐지될 터였다. 왕은 탕플에 유폐되었다. 그는 거기서 다섯 달을 더 살다가 처형되고 만다. 라파예트는 8월 10일 사건에 반격을 시도하여 일선 군대를 파리로 회군시키려다 실패하여 벨기에로 도망했다. 왕정을 수호하여 입헌군주 체제의 테두리에서 혁명을 성취하려던 사람들은 이제 라파예트와 함께 몰락하였다. 8월 10일 사건의 주동 세력은 온건한 부르조아가 아니라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과 영세 상인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혁명을 한결 더 과격하게 만든다. 이들은 귀족이 입는 퀼로트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여 상퀼로트라 불렸는데, 이제 이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 --pp.126~127 중에서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돌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무장 군인이 의사당을 점령하였다. 총검이 500인회 의원들을 쫓아냈다. 저녁 7시경 원로원은 앞서 500인회가 결의한 나폴레옹의 추방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통령정부의 조직을 공포하였다. 총재정부는 폐지되고 새 통령들에게 행정권이 위임되었다. 루시앵은 30~40명의 500인회 의원들을 긁어 모아놓고, 원로원의 결정을 승인하고 62명의 자코뱅파 의원을 제명하고 12월 22일까지 6주일간의 휴회를 결의하였다. 밤 2시, 세 사람의 통령이 의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선서하였다.
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라고 한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 --pp.207 중에서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
한편 전후 처리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던 빈의 열국 회의는 나폴레옹의 탈출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이견을 조정하여 불의의 도발자에게 대비하였다. 3월 25일 4대 연합국은 쇼몽 조약을 재확인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나폴레옹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던 웰링턴 휘하의 영국군 9만 6,000명과 블뤼허 휘하의 프로이센군 12만을 먼저 치기로 하였다. 그는 6월 6일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나폴레옹의 참패였다. 그는 두 빈 손을 내밀며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고 소리 질렀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결국 22일 퇴위하고 29일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10월 15일 남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었다. 그는 거기서 5년 반을 더 살다가 1821년 5월 5일에 죽었다.
--pp.288~289 중에서
출판사 리뷰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프랑스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왜 영국이나 미국처럼 순조롭게 시민 혁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피로 얼룩진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를 한 세기나 되풀이해야 했을까? 이 책은 혁명의 전범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프랑스 혁명사 100년의 과정을 명쾌하게 풀어낸 입문서이자 격동의 1980~90년대 한국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했던 ‘혁명사의 고전’이다. 혁명과 반혁명을 되풀이한 프랑스 혁명, 21세기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줄까? 1980년 출간 이후 31년 만에 새로 펴낸 노명식 교수의 역작.
혁명의 전범 프랑스 혁명사를 다시 읽는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만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킨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낡은 전제주의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와 평등, 국민주의와 자유주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새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그 자체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입헌 군주주의의 시도도 민주 공화주의의 실험도, 심지어 나폴레옹 제국마저도 다 실패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어째서 영국이나 미국처럼 순조롭게 시민혁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피로 얼룩진 혁명과 반혁명을 되풀이해야 했을까?
이 책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는 1789년 혁명과 복고 왕정, 1848년 2월 혁명과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 그리고 파리 코뮌의 발발과 실패까지 100년에 가까운 프랑스 혁명사를 알기 쉽게 풀어쓴 입문서이자, 프랑스 근세사가 영국이나 미국과 다른 노정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추적한 역작이다. 1980년에 처음 출간된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는 격동의 1980~90년대 당시 한국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했던 ‘혁명사의 고전’이자 한국의 시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었다. 31년의 시간이 흐른 후 개정판으로 다시 선보이는 이 책이 21세기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줄까?
*** 도서출판 책과함께는 2011년 6월 《노명식 전집》을 저자의 자비로 출간했다. 한국의 대표적 서양사학자 노명식 교수의 연구업적을 망라하여 총 12종 분량의 전집으로 묶어낸 것이다. 하지만 연구기관과 연구자, 도서관 등에 증정할 300부만을 비매품으로 제작하다 보니 아쉬움이 컸다. 책과함께는 이 12종 가운데 더 많은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읽으면 좋겠다고 판단한 2종을 선정하여 판매용으로 정식 출간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한 종이 바로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이다.
책속으로 추가
7월혁명과 부르봉 복고 왕정의 몰락
7월 27일부터 파리 시민은 시내 요소요소에 바리케이트를 쌓기 시작했다. 국민 방위대는 1827년에 해산되었으나 대원들은 아직도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섰다.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해야 한다는 과격한 노동자, 학생, 시민이 이제 모두 반정부 운동에 한데 뭉쳤다. 낭만적인 혁명의 물결이 순식간에 전 시가를 휩쓸었다. 당시 파리의 수도 사령관은 마르몽 장군이었는데 그는 나폴레옹을 배신한 군인으로서 파리 시민이 몹시 싫어하였다. 마르몽의 군대는 비좁은 골목에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사상자만 더 냈다. 7월 29일 두 연대가 폭동 쪽에 가담하였다. 그렇잖아도 병력이 모자란 마르몽은 결정타를 맞았다. 완미한 샤를도 이제는 사태의 진상을 깨달았던지 30일 폴리냐크를 파면하고 4개조로 이루어진 칙령을 철회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사냥터에서 왕이 긴급히 파견한 사절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회가 샤를의 퇴위와 루이 필리프의 즉위를 가결한 뒤였다. 이제 샤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군대의 힘으로 의회를 항복시키는 것이었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에게는 그럴 만한 군대가 없었다. 그는 센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왕의 목숨을 노리는 폭도들을 피하여 생애 세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부르봉 복고 왕정은 워털루 이후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_ 311쪽
1871년 파리 코뮌의 시작
3월 28일 정식으로 파리 코뮌이 선포되었다. 약 2만 명의 방위대와 수만 명의 시민이 운집한 시청 광장에서 의원으로 선출된 방위대 중앙위원회의 랑비에가 “인민의 이름으로 코뮌을 선언한다”고 외치자 “공화국 만세! 코뮌 만세!”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방위대의 행렬이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의 주악에 맞추어 의원들의 사열대 앞을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면 민중의 미친 듯한 갈채가 우뢰처럼 터져 나왔다. ……
분명히 파리의 민중은 이제 자신이 자신의 생활과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감동과 의욕에 넘쳐서 코뮌 선포의 날을 축제의 날로 지샜다. 민중의 소박하고 약동하는 해방감이 코뮌의 파리를 뒤덮었다. _ 417~418쪽
1789~1871
프랑스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왜 영국이나 미국처럼 순조롭게 시민 혁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피로 얼룩진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를 한 세기나 되풀이해야 했을까? 이 책은 혁명의 전범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프랑스 혁명사 100년의 과정을 명쾌하게 풀어낸 입문서이자 격동의 1980~90년대 한국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했던 ‘혁명사의 고전’이다. 혁명과 반혁명을 되풀이한 프랑스 혁명, 21세기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줄까? 1980년 출간 이후 31년 만에 새로 펴낸 노명식 교수의 역작.
혁명의 전범 프랑스 혁명사를 다시 읽는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만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킨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낡은 전제주의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와 평등, 국민주의와 자유주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새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그 자체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입헌 군주주의의 시도도 민주 공화주의의 실험도, 심지어 나폴레옹 제국마저도 다 실패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어째서 영국이나 미국처럼 순조롭게 시민혁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피로 얼룩진 혁명과 반혁명을 되풀이해야 했을까?
이 책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는 1789년 혁명과 복고 왕정, 1848년 2월 혁명과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 그리고 파리 코뮌의 발발과 실패까지 100년에 가까운 프랑스 혁명사를 알기 쉽게 풀어쓴 입문서이자, 프랑스 근세사가 영국이나 미국과 다른 노정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추적한 역작이다. 1980년에 처음 출간된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는 격동의 1980~90년대 당시 한국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했던 ‘혁명사의 고전’이자 한국의 시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었다. 31년의 시간이 흐른 후 개정판으로 다시 선보이는 이 책이 21세기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줄까?
*** 도서출판 책과함께는 2011년 6월 《노명식 전집》을 저자의 자비로 출간했다. 한국의 대표적 서양사학자 노명식 교수의 연구업적을 망라하여 총 12종 분량의 전집으로 묶어낸 것이다. 하지만 연구기관과 연구자, 도서관 등에 증정할 300부만을 비매품으로 제작하다 보니 아쉬움이 컸다. 책과함께는 이 12종 가운데 더 많은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읽으면 좋겠다고 판단한 2종을 선정하여 판매용으로 정식 출간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한 종이 바로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이다.
책속으로 추가
7월혁명과 부르봉 복고 왕정의 몰락
7월 27일부터 파리 시민은 시내 요소요소에 바리케이트를 쌓기 시작했다. 국민 방위대는 1827년에 해산되었으나 대원들은 아직도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섰다.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해야 한다는 과격한 노동자, 학생, 시민이 이제 모두 반정부 운동에 한데 뭉쳤다. 낭만적인 혁명의 물결이 순식간에 전 시가를 휩쓸었다. 당시 파리의 수도 사령관은 마르몽 장군이었는데 그는 나폴레옹을 배신한 군인으로서 파리 시민이 몹시 싫어하였다. 마르몽의 군대는 비좁은 골목에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사상자만 더 냈다. 7월 29일 두 연대가 폭동 쪽에 가담하였다. 그렇잖아도 병력이 모자란 마르몽은 결정타를 맞았다. 완미한 샤를도 이제는 사태의 진상을 깨달았던지 30일 폴리냐크를 파면하고 4개조로 이루어진 칙령을 철회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사냥터에서 왕이 긴급히 파견한 사절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회가 샤를의 퇴위와 루이 필리프의 즉위를 가결한 뒤였다. 이제 샤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군대의 힘으로 의회를 항복시키는 것이었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에게는 그럴 만한 군대가 없었다. 그는 센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왕의 목숨을 노리는 폭도들을 피하여 생애 세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부르봉 복고 왕정은 워털루 이후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_ 311쪽
1871년 파리 코뮌의 시작
3월 28일 정식으로 파리 코뮌이 선포되었다. 약 2만 명의 방위대와 수만 명의 시민이 운집한 시청 광장에서 의원으로 선출된 방위대 중앙위원회의 랑비에가 “인민의 이름으로 코뮌을 선언한다”고 외치자 “공화국 만세! 코뮌 만세!”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방위대의 행렬이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의 주악에 맞추어 의원들의 사열대 앞을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면 민중의 미친 듯한 갈채가 우뢰처럼 터져 나왔다. ……
분명히 파리의 민중은 이제 자신이 자신의 생활과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감동과 의욕에 넘쳐서 코뮌 선포의 날을 축제의 날로 지샜다. 민중의 소박하고 약동하는 해방감이 코뮌의 파리를 뒤덮었다. _ 417~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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