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계국가의 이해 (독서>책소개)/3.프랑스역사문화

프랑스사

동방박사님 2022. 11. 1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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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프랑스 지성 앙드레 모루아가 자국의 역사를 대문호적 통찰과 섬세한 문학적 필치로 풀어낸 역사서술의 완결판
절대 권력의 왕정국가에서 자유와 평등의 국민국가로 발돋움한 프랑스의 고귀한 힘과 정신을 한 권으로 만나다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가 완성한 《백과전서》는 프랑스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로베스피에르는 시민의 편에 선 혁명가인가, 잔인한 독재자인가? 루이 16세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을 때 민중은 왜 눈물을 흘리고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는가? 러시아 원정 등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인(婦人)들이 만든 살롱이 어떻게 유럽대륙의 과학과 철학, 사상의 부흥을 주도하였는가? 최조의 왕조 메로빙거의 등장부터 프랑크 왕국의 성립, 절대왕정 속에서도 문화와 사상이 꽃을 피우고, 프랑스 혁명을 거쳐 현대 공화국 체제가 성립되기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격동의 프랑스 역사를 평론가로서의 해박한 식견과 문학가로서의 유려한 문체, 역사가로서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심도 있게 풀어냈다. 인물과 사건에 문학적 생동감을 부여하며 역사서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 저작!

 

목차

해제
서문

제1장 프랑스의 기원에서 중세기까지
1. 골 지방의 로마화
2. 갈로-로마인과 야만족의 혼합
3.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제국 재건
4. 봉건제도의 발전과 카페 왕조 창건
5. 왕조의 영토 확장과 프랑스 왕국의 건립
6. 루이 9세와 4세 시대의 치적
7. 중세기 프랑스 문명의 형성
8. 백년전쟁 Ⅰ
9. 백년전쟁 II
10.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의 부흥
11. 14~15세기에 이뤄진 중세기에서 근세기로의 이행
12. 중세기에 형성된 프랑스의 항구적 특징

제2장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1. 문예부흥의 시발점
2. 이탈리아 원정의 결과
3. 게르만 세계와의 투쟁
4.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시대의 풍조
5. 정치적 색채를 띤 종교개혁 운동
6. 종교전쟁에 따른 프랑스의 분열과 황폐
7. 앙리 4세의 프랑스 재통일
8. 앙리 4세 이후의 통치
9.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에 따른 프랑스의 변화

제3장 절대왕정의 시대
1. 앙리 4세의 과업을 강화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2. 하나의 혁명이던 프롱드 난
3.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4. 루이 14세 왕정의 번영과 쇠락
5. 섭정으로 약화된 왕정
6. 루이 15세의 국위 손상
7. 18세기의 정계와 계몽주의의 영향
8. 루이 16세의 개혁 실패
9. 혁명을 맞은 1789년의 정세

제4장 프랑스 혁명
1. 혁명의 시작
2. 국민의회의 헌법제정
3. 왕정의 멸망
4. 국민공회와 공안위원회
5. 공포정치에 대한 열월의 반동
6. 총재부의 통령정치와 제정까지
7. 제1통령의 프랑스 재통합
8. 황제의 유럽 정복
9. 유럽제국의 붕괴
10. 황제의 왕정 전복
11. 혁명과 제정을 통한 프랑스의 변모

제5장 체제 동요의 시대에서 혼란의 시대로
1. 단명에 그친 왕정복고
2. 7월 왕정의 몰락
3. 1815~1848년 프랑스의 사상과 의식
4. 단명한 제2공화국
5. 전제주의적 제2제정 시기
6. 자유주의적 제정과 1870년 전쟁
7. 낭만주의의 쇠퇴
8. 결론: 체제 동요 이후의 프랑스

제6장 제3공화국
1. 국방정부
2. 공화국 수립
3. 공화주의자의 공화국
4. 공화국을 흔드는 세 가지 위기
5.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분쟁
6. 1914년까지의 전성기
7.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
8. 1919~1939년에 소멸된 승리
9. 제2차 세계대전 Ⅰ
10.제2차 세계대전 II
11. 해방 후의 프랑스

제7장 제4, 5공화국
1. 제4공화국의 성립과 종말
2. 제5공화국 출범
3. 결론: 프랑스가 나아가야 할 길

부록: 프랑스 역대 왕조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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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앙드레 모루아 (Emile SalomonWilhelm Herzog,Andre Maurois´,에밀 헤르조그)
 
프랑스를 대표하는 평론가이자 전기 작가, 역사가. 본명은 에밀 헤르조그. 1885년 프랑스 엘뵈프에서 태어나 루앙에서 공부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대 프랑스의 가장 창적이고 뛰어난 철학자로 손꼽히는 알랭의 가르침을 받았다.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연합국 사령부 연락 장교로 파견되어 영국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이들의 인간성과 지식, 전통이 프랑스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느끼고 프랑스인의 영국에 대한...

역자 : 신용석

서울대학교 화학과와 동대학원 신문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 7대학 석사 과정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경제사 과정을 수료했다. 〈조선일보〉 프랑스 특파원을 거쳐 국제부장, 사회부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고 프랑스 국가문화훈장과 프랑스 국가공로훈장을 받았으며 관훈클럽 총무, 한국인권재단 이사장, 2014 인천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인천개항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프...
 

책 속으로

프랑스 인종이란 것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 현재 프랑스를 구성하는 지역은 유럽대륙의 서쪽 끝이라 침략을 마무리하거나 침략자가 정착하는 곳이었다. 기원전 10세기경 알프스 산중에는 리구리아인, 피레네 산중에는 바스크인의 선조로 추정되는 이베리아인이 살고 있었다. 지중해를 건넌 페니키아인의 선원들도 와 있었다. 당시 셈족 상인들이 진주, 토기, 화려한 색깔의 직물 및 노예를 교역했다. 그 뒤를 이어 그리스 항해자들이 해안지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동방 문명, 종교사상, 신비주의, 화폐, 올리브 재배법, 비교적 완전한 언어 등을 들여왔다. 그리고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그리스인이 건설한 식민 도시 니스, 아그데, 앙티브 등이 남프랑스 해안지대에 산재했다. 프로방스 지방의 풍물은 그리스인의 풍습으로 바뀌었다. ---「제1장 프랑스의 기원에서 중세까지」중에서

중세기는 고대 문명과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두 시대 사이에 끼어 있었으나 그렇다고 참담한 암흑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중세기 문명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인간에게 도덕적, 사회적 평등을 부여하는 한편 서유럽의 위대한 예술작품을 낳았다. 프랑스 중세기 문명의 독창성은 지중해적 요소와 야만족의 요소를 융합해 새롭게 빚어낸 데 있었다. 프랑스 문명은 주변 문명이다. 인류의 새로운 개화 현상은 여러 가지 영향을 널리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지역에서 성장하는 법이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일찍이 10세기에 태동해 12세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사상과 예술은 전 유럽에 널리 전파될 기세였다. ---「제1장 프랑스의 기원에서 중세까지」중에서

프랑스의 문예부흥은 하나의 정신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 정신혁명이 스스로 고대 철학과 스콜라 철학 간의 사상적 타협점을 찾고 있다고 믿는 동안 사실은 그 속에 국가주의, 프랑스 혁명, 근대 과학, 심지어 세계대전의 싹까지 잉태되고 있었다. (…) 문예부흥에 따르는 지적혁명은 종교개혁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문예부흥의 기본적인 본질은 계시된 진리라는 관념과의 절연이었다. 사실은 신교도 계시를 전혀 부인하지 않았고 단지 계시의 한계를 성서의 권위로 제한하려 했을 뿐이다. (…)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은 실제로는 대립하는 운동이었다. 나중에 프랑스의 신교도는 기타 소수파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이었고 문예부흥의 조류와 사실상 합류했다. ---「제2장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중에서

에베르와 당통이 죽자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의 주인이 되었다. 지나치게 힘을 얻은 그는 자기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간주했고 계속해서 혁명재판소에 보다 많은 사람의 목을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전능했으나 전도가 막연했고 감각조차 상실한 상태였다. 목월 22일에 발표된 법령이 개회 중에도 의원의 불가침권을 박탈해 생명을 위협하자 가장 겁이 많은 의원들도 이제 국가를 위해 행사하지 않던 용기를 발휘했다. (…)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었음을 알게 된 파리 코뮌은 교도소에 명령해 로베스피에르의 수감을 거부하고 시청으로 연행하게 했다. 다음 날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일당과 함께 수많은 군중 앞에서 단두대에 올랐다. 군중은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제4장 프랑스 혁명」중에서

1815~1870년 프랑스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정치체제가 불안정하고 다양했다는 점이다. 권력이란 피통치자 대다수의 지지 없이는 권세를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지지가 없어지는 순간 무정부 상태나 민심 동요가 일어나고 심하면 내란이 발생한다. 대혁명은 국왕에게서 존엄성을 박탈했고 그 후부터 프랑스에서는 정통성의 존재가 모호해졌다. 일부에서는 정통성이 부르봉 가문의 속성이라 믿었고 1870년에도 앙리 5세를 왕위에 추대하려고 완강히 고집하는 왕정주의자가 적지 않았다. 반면 국민의 기억에 남아 있는 샤를 10세의 그림자는 왕가의 존엄성을 흐려놓았다. 파리의 민중은 부르봉 가문의 국왕을 두 번이나 타도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공화주의자들은 이 가문이 반동과 복수를 벼르는 당파의 수령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분가는 상속권뿐 아니라 국민의 지지마저 잃어 아무런 정통성이 없었다. ---「제5장 체제 동요의 시대에서 혼란의 시대로」중에서

10월 5일 헌법이 공포되었고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 선출을 광범위한 선거인단에 위임했다. 이제 국가원수 선출을 의회가 아니라 프랑스의 각 지방을 대표하는 선거인이 담당한 것이다. (…) 프랑스 국민은 그들이 되찾은 자신감이 외국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감지했다. 곧 자본이 프랑스로 쏟아져 들어왔고 과거의 음울하던 정세는 일변했다. 그동안 프랑스 통화는 외국의 불신을 받았으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외화보유고가 20억 달러에 달했고 새로운 차관을 요청하는 대신 과거의 차관을 상환할 정도가 되었다. 경제적 지위가 강화됨에 따라 프랑스는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부는 유럽을 통합하는 구상을 지지했고 경제공동체와 프랑스가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을 강조하는 대서양공동체 등의 결성에도 찬성했다.
---「제7장 제 4,5 공화국」중에서
 

출판사 리뷰

“현대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주는 엄중한 역사의 기록!”

프랑스의 기원에서부터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절대왕정과 제5공화국까지
인간과 권력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치열했던 역사적 순간들을 흥미롭게 풀어낸 역작


1793년 1월 16일, “국민이여, 짐은 죄 없이 죽는다”라는 외침과 함께 루이 16세의 목이 단두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지 4년 만에 벌어진 이 참극을 지켜본 사람들은 사형에 찬동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함과 동시에, 전력을 다해 혁명을 유지ㆍ발전시키지 않으면 자신들도 곧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이는 19세기 유럽 정치 혁명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현재 우리가 당연시하는 자유와 평등, 민족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의 가치관들이 모두 프랑스 혁명을 통해 유럽과 전 세계에 그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이렇듯 절대 권력의 왕정국가에서 자유와 평등의 국민국가로 발돋움하며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해온 프랑스. 유럽대륙 한복판에 자리한 채 수많은 주변국들의 부침을 받으면서도 최강대국의 지위를 놓치지 않은 프랑스의 저력은 과연 무엇이며, 그 힘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러한 프랑스의 실체를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바로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다.
이 책은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격동의 프랑스 역사를 평론가로서의 해박한 식견과 문학가로서의 유려한 문체, 역사가로서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심도 있게 풀어낸 수작이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은 1937년 《영국사》, 1943년 《미국사》를 출간한 이후다. 앞서 두 권의 통사를 출간하며 역사가로서 입지를 다진 그는, 프랑스 역사를 다룬 책도 집필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프랑스인으로서 자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고사를 거듭했지만 끈질긴 설득과 지식인으로서의 책무, 프랑스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집필을 시작했고, 마침내 1947년 모루아 특유의 객관성과 냉철함이 빛나는 《프랑스사》를 출간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영국사》, 《미국사》, 《프랑스사》라는 대표적인 세계3대 자유민주국가의 역사서를 완성하는 대업을 완수하기에 이른다.
최조의 왕조 메로빙거의 등장부터 프랑크 왕국의 성립, 절대왕정 속에서도 문화와 사상이 꽃을 피우고, 프랑스 혁명을 거쳐 나폴레옹 시대의 종식과 현대 공화국 체제가 성립되기까지. 격동의 프랑스 역사 전체가 모두 녹아 있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지금의 프랑스를 있게 한 위대한 힘과 정신을 파헤친다.

인물과 사건에 문학적 생동감을 부여하며 역사서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 저작

앙드레 모루아의 역사서가 전 세계에서 큰 사랑을 받아온 것은 일반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저자 특유의 서술 방식에 있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자 전기작가답게 역사적 사실을 전달함에 있어 객관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건의 핵심을 꿰뚫는 그의 탁월함은 타의 추종의 불허한다. 또한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고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감명을 받게 한다. 역대 왕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부, 당통ㆍ로베스피에르ㆍ라파예트 같은 정치가, 언론인, 심지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일반 민중의 목소리와 실상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나는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단두대에 오르는 편이 좋다. 그리고 이제 나는 사람에게 신물이 난다.” 조르주 자크 당통의 죽음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한 친구가 도망치라고 권하자 그가 반문했다. “사람이 조국을 구두 바닥에 붙이고 다닐 수 있겠는가?” 1794년 3월 31일 체포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혁명재판소를 설립한 때가 지금 이 계절이었다. 신과 인간에게 용서를 바란다.”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더러운 로베스피에르야, 단두대가 너를 부르고 있다! 다음에는 네 차례다!” 마침내 단두대 위에 선 그는 사형집행인에게 명령했다. “내 목을 민중에게 보여주어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느니라.”

더불어 경제,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해박한 식견을 갖추었던 모루아는 문학과 사상에 조예가 깊어 이를 역사적인 상황과 적절하게 조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러한 그의 놀라운 통찰력은 역사를 서술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지루함이나 사실의 왜곡을 미연에 방지했으며, 뿐만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 새롭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무훈시와 정반대로 혁명적 에너지가 담긴 프랑스적이고 풍자적인 영웅시 같은 도덕문학이 탄생했다. 아마도 이 두 가지 조류의 혼합이 프랑스라는 나라의 균형을 유지해온 것 같다. 이 관점에서 2부작 《장미 이야기》 만큼 흥미로운 작품도 없다. ‘나(신)는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똑같게 만들었다. 내 덕으로 그들은 똑같이 알몸으로 강하거나 약하게, 살찌거나 마르게 세상에 태어난다. 신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평등한 지위를 주었다.’ 《장미 이야기》 속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이제 귀족의 특권은 사라졌다. 진정한 귀족은 오로지 고귀한 정신에서만 나온다. 개인적인 장점이 없는 사람은 평민에 불과하다. 국왕도 국가를 방위하기 위해 선출된 위대한 평민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앙드레 모루아는 역사가들이 간과하기 쉬운 역사의 주인공들에 대한 인간 탐구를 비롯하여 일반 국민의 감정과 생활상을 특유의 역사관과 원숙한 인간성, 미려한 문장력으로 흥미롭게 풀어냈다.

프랑스 vs. 영국 vs. 미국. 삼대국의 관계를 통해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다

프랑스는 유럽이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독일 등 서유럽 국가와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발전해왔다. 그중 영국은 프랑스의 역사를 설명할 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밀접한 국가라 할 수 있다. 프랑스와 영국은 예로부터 영토분쟁과 왕위계승 문제로 크고 작은 갈등을 반복해왔다. 세계 제패를 꿈꾸었던 영국이 유럽대륙을 장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이 프랑스였고, 프랑스 또한 자신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영국을 무조건 방어해야 했던 것이다. 프랑스 역사는 곧 영국와의 외교 전쟁이라 볼 수 있었다.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루아는 프랑스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영국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모루아는 백년전쟁 발발을 계기로 두 나라가 별개의 국가로서 확연이 분리되었음을 강조하며, 이 참혹한 전쟁이 두 나라의 왕관을 한 몸에 차지하려는 영국 왕의 욕심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것은 비교적 정확한 견해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1337년 백년전쟁 준비를 마친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의 왕위 정통성을 부인하며 왕위 이양을 요구했다. 그는 필요불가결한 플랑드르 지방이 프랑스 수중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런던 시티(금융상업지구)의 적극적인 지원도 이미 확보해두었다. 국왕의 관심사는 프랑스의 왕위계승 문제였다. 하원의원들은 의장석에 모여 자발적으로 전쟁 비용 지출을 가결했다. 이 시대에는 이미 십자군의 순수성은 찾아볼 수 없었고 기사들의 위치도 런던과 겐트 상인들의 외판원 정도로 추락했다.

또한 모루아는 영국의 식민지 국가에 불과했지만 독립을 쟁취하며 자유국가로 등장한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의 역할과 미국의 독립이 프랑스 혁명에 미친 영향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프랑스와 미국의 끈끈한 유대가 식민지 종주국과 식민지로 묶인 영국과 미국의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프랑스와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서 맺어진 독립과 자유라는 가치를 공유하면서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자유정신을 함께 발전시킨 관계라는 것을 역설한다.

1777년 12월 루이 16세는 아메리카합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는 대가 없이 순수한 태도로 참전했고 승리에 대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 로샹보 백작의 육군부대와 그라스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요크타운에서 영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해상의 폭군’으로 전락한 영국과 달리 자유의 수호자로 전 세계의 칭송을 받은 프랑스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강대한 위상을 차지했다. 국가의 채무가 10억 리브르에 달했지만 프랑스는 앞으로 귀중한 재산이 될 미국과의 우호관계의 기초를 구축했다.

이러한 지리적ㆍ외교적 분석과 고찰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가 이웃 나라이면서도 특징과 제도가 왜 그토록 다른가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는 혜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앙드레 모루아가 현대문명과 21세기 민주주의에 보내는 날 선 경고장

프랑스는 오늘날까지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세계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비록 과거의 영광은 아니지만, 문화와 사상의 발전을 주도했던 그들의 고귀한 힘과 정신은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뜨겁게 살아 있다. 우리가 프랑스의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된 민주주의의 의미와 전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프랑스 역사 속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앙드레 모루아는 자국의 역사를 예찬하고 자화자찬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의 프랑스로 자리매김하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눈물의 뼈아픈 고백을 통해 작금의 시대를 성찰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과거를 통찰하는 눈과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자적 안목을 담은 《프랑스사》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스스로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