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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비극 (2023) - 차라리 공감하지 마라

동방박사님 2023. 7. 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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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신념은 소유물이 아니다
‘감정이입’보다는 ‘역지사지’가 좋다
나는 공감에 반대한다
“공감은 태양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말은 정치적 비방의 용도로 자주 쓰이는데, ‘소시오패스’라는 딱지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한다. 특히 진보가 보수를 향해 퍼붓는 비난 중의 하나가 공감 능력의 결여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의 편 가르기와 그에 따른 국민적 차원의 집단 패싸움은 심각한 문제에 이르렀다. 내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은 우리 편에 대해서는 무한대의 공감을 하지만 반대편에 대해서는 공감은커녕 최소한의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심지어 악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신이 자기편에 대해 이미 쏟은 무한대의 공감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고 한다.

강준만은 『공감의 비극』에서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을 말한다. 선택적 과잉 공감은 자기 성찰의 의지와 능력이 전혀 없는 가운데 내로남불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집단이 자신들은 천사로 여기면서 자신들이 마땅치 않게 여기는 집단은 악마로 몰아가는 것을 말한다. 선택적 과잉 공감을 하는 사람들은 증오와 혐오를 먹고산다. 이들의 속이 후련해지려면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혐오해야만 한다. 이들은 자신은 정의의 편이고, 상대편은 불의나 악의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증오와 혐오의 집단적 갈등은 바람직한가? ‘선택적 과잉 공감’에 브레이크를 걸 수는 없을까? 기존의 맹목적 공감 예찬론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차라리 그 어느 쪽에도 공감하지 않는 게 훨씬 더 나은 게 아닐까?

강준만의 『공감의 비극』은 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는 세워야 한다, 제2장 정치인의 언어와 화법, 제3장 증오를 위한 공감인가?, 제4장 바보야, 문제는 ‘성격’이야!, 제5장 위선과 사기가 난무하는 ‘지방 문제’, 제6장 언론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 이 책을 통해 공감의 그늘 혹은 공감의 두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이 스포트라이트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감은 ‘선택적 과잉 공감’으로 빠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차

머리말 :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 · 5

제1장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는 세워야 한다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는 세워야 한다 · 17
신념은 소유물이 아니다 · 22
‘공무원의 영혼 보호법’이 필요한가? · 26
왜 한국 정치는 4류일까? · 34
다양성에 대한 집단적 위선 · 40

제2장 정치인의 언어와 화법

대통령은 목사가 아니라지만 · 51
‘윤석열 화법’의 비극 · 55
이해찬은 왜 성찰에 인색할까? · 60
안민석의 ‘갈치 정치’ · 68
김의겸, 최악의 ‘폴리널리스트’인가? · 72
‘빈곤 포르노’보다 나쁜 장경태의 ‘PC 포르노’ · 83

제3장 증오를 위한 공감인가?

‘증오의 광기’가 들끓는 대한민국 · 95
증오의 명분으로 이용되는 당파성 · 103
증오의 선동과 유지엔 악마가 필요하다 · 109
‘감정이입’보다는 ‘역지사지’가 좋다 · 114
공감은 태양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다 · 118

제4장 바보야, 문제는 ‘성격’이야!

이준석의 ‘선택적 과잉 공감’ · 127
20대 남성은 정치적 선동에 놀아났나? · 134
이준석을 덮친 ‘성공의 저주’ · 138
이준석을 악한 취급하는 페미니즘 진영에 드리는 제안 · 146
국민의힘을 살렸다 죽이는 이준석의 원맨쇼 · 151
이준석의 ‘순교자 정치’ · 156
이준석의 ‘허망한 승리’ · 160
‘성 상납 의혹’을 ‘권력투쟁 프레임’으로 바꾼 묘기 · 167
바보야, 문제는 ‘성격’이야! · 172

제5장 위선과 사기가 난무하는 ‘지방 문제’

지역균형발전 사기극 · 181
‘지방 소멸’을 막을 최후 카드는 ‘지역정당’이다 · 185
정권 장악을 위해 착취당하는 호남 · 191
‘홀대’·‘소외’·‘낙후’에 집착하는 지방언론의 자해 · 195
‘광장’은 없고 ‘밀실’만 있는 지방 공론장 · 200

제6장 언론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

언론의 문제는 언론만의 문제인가? · 209
언론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 · 214
놀라울 정도로 좁은 엘리트 계급의 세계 · 221
“댓글 쓰레기는 절대 읽지 말아요!” · 226
“나쁜 것은 좋은 것보다 더 강하다” · 230

주 · 235
 

저자 소개

저 : 강준만 (康俊晩)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책 속으로

문재인 정권은 이상에만 치우쳐 현실 감각이 박약한 정권이었으며, 이 개정안 역시 그런 한계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았다. 명령이 위법한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위법의 경계선상에 놓여 전문가들조차 의견의 일치를 보기 어려운 명령이라면 약자의 위치에 있는 공무원이 무슨 수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명령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받게 될 인사상 불이익이 시차를 두고 우회적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진다면 피해자는 무슨 수로 피해 회복을 꾀할 수 있단 말인가? 개정안은 아마도 이런 의문들에 답하는 게 쉽지 않아서 사라졌겠지만, 동시에 문재인 정권도 공무원의 무조건 복종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정략적 사고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1장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는 세워야 한다」
--- p.31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 탁현민은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한 말이었다고 해명하는데, 그게 격려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어도 그 정도 발언이 문제가 될 거라는 판단을 그 안에서 누구도 하지 않았다면 시스템이 붕괴됐다는 의미”라고 비판했다. 그런가? 시스템이 붕괴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시스템이라고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윤석열 마음대로’라고 보는 게 옳다. 그렇지 않다면 탁현민이 말한 ‘시스템 붕괴’는 이미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붕괴된 시스템이 또다시 붕괴된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윤석열 화법’의 비극은 ‘메타인지(metacognition)’, 즉 자기인식 능력이 박약하다는 데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윤석열은 자신을 전천후형 달변가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2장 정치인의 언어와 화법」
--- pp.58~59

한국의 정당 간 적개심도 미국 이상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통혼 문제에서도 부모 이전에 자신들이 스스로 정치 성향을 결혼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일부 조사에선 미혼 남녀의 57퍼센트가 ‘정치 성향이 다르면 소개팅으로 만나기 싫다’고 답했으며, 이를 반영하듯 남녀를 연결해주는 데이팅 앱들은 가입자들이 필수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기본 정보 문항에 ‘정치 성향’을 묻는 질문을 추가했다. 『조선일보』·케이스탯리서치가 실시한 신년 기획 여론조사에서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과 결혼 관계를 맺는 게 ‘불편하다’는 응답은 여야 지지층 모두 각각 44.5퍼센트와 47.9퍼센트였으며, “정치 성향 다르면 밥도 먹기 싫다”는 사람은 40퍼센트였다. 「제3장 증오를 위한 공감인가?」
--- pp.106~107

지방선거가 끝난 지 며칠 후인 6월 6일부터 20여 일간 우리 국민들은 친윤 정치인들과 말과 글로 싸우는 이준석의 원맨쇼를 질리도록 원 없이 구경해야 했다. 사람들은 싸움 구경을 즐기면서도 내심 “저게 집권 여당의 수준인가?”라는 의아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런 싸움의 와중에서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가 징계 대상으로 삼은 이준석의 ‘성 접대 및 증거인멸’ 의혹 문제가 다시 거론되면서 국민의힘은 갈등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갔다. 이는 윤석열과 국민의힘의 지지율을 떨어트리는 데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가 6월 20~24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이 ‘국정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긍정 평가(46.6퍼센트)가 부정 평가(47.7퍼센트)보다 낮은 이른바 ‘데드크로스’가 발생했다. 「제4장 바보야, 문제는 ‘성격’이야!」
--- pp.141~142

솔루션 저널리즘이 가장 필요한 곳은 지방언론이다. 지방언론은 자주 ‘홀대’, ‘소외’, ‘낙후’를 외치는 ‘나쁜 뉴스’ 생산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 권력자, 고위 관료, 지역 정치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좋은 뜻에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그런 뉴스가 지역 주민들의 무력감을 키워 ‘지방 소멸’을 부추기는 자해는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미 10여 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 김주완은 ‘솔루션 저널리즘’과 비슷한 ‘민원 해결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게 훨씬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사사로운 민원이 아니라, 공적 성격을 갖는 민원 해결에 지역언론이 앞장섬으로써 생활밀착형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동시에 지역민의 신뢰를 얻어 지역 발전의 동력을 스스로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제5장 위선과 사기가 난무하는 ‘지방 문제’」
--- p.199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그런 민생 뉴스를 별로 반기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신도시 땅 투기 의혹’처럼 독자들의 피를 끓게 만들 정도의 분노와 뜨거운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뉴스는 예외적인 것으로 보는 게 옳다. 평소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들은 잘 아실 게다. 정치인이나 유명인사가 누군가를 향해 독하고 자극적인 비난을 퍼부었다고 알리는 기사엔 댓글이 많이 달린다. 반면 각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직접적인 이해관계 당사자가 없는 민생 관련 기사에 댓글이 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제6장 언론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
--- p.223
 

출판사 리뷰

증오를 위한 공감인가?

어느 순간 한국 정치에서는 우리 편이 잘하도록 애쓰는 게 실종되고 말았다. 우리 편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우리 편은 무조건 옹호하고 반대편은 무조건 공격하는 게 정치와 참여 행위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자기 성찰과 반성은 씨가 말라버렸다. 반면 우리 편이 잘하도록 비판을 하면, 배신·변절·이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다가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배신·변절·이적을 단호하게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다양성은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현실에서는 다양성에 대한 집단적 위선이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 다양성을 저주하거나 ‘다양성 죽이기’로 나아간다.

증오를 위한 공감에는 소통이 눈꼽만큼도 없다. ‘나는 선하지만, 너는 악해. 나는 정의의 편이지만, 너는 불의의 편이야.’ 이런 오만한 자기과시, 반대편에 대한 비난·모욕·혐오가 흘러넘친다. 상대편을 공격할 건수만 생겼다 하면 폭격을 퍼붓는 데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과장과 왜곡은 기본이고 심지어 가짜뉴스까지 만들어낸다. 그러나 책임을 지는 법은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발산하는 것이다. 부도덕하고 기만적인 공격을 할수록 자기 진영에서는 더 큰 박수를 받는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상대편을 공격하는 데에 좀더 자극적이고 독한 언어를 구사할 것인지만 고민한다.

왜 정치인의 언어는 갈등을 조장하는가?

한국의 정치 언어는 정치인들이 자극적 표현을 선호하는 언론의 상업주의를 염두에 둔 자기 홍보의 목적으로 생산된다.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은 갈등 조장형 표현이다. 가장 잘 팔리는 뉴스는 공포, 증오,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뉴스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갈등만 벌어지면, 의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쏟아내는 화려한 신념의 대향연을 보라. 아무리 갈등이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이라고 하지만, 선과 악의 구도가 뚜렷이 형성되어 ‘우리’와 ‘그들’ 간의 반목으로 치닫게 된 갈등으로 인해 한국 사회는 ‘갈등 공화국’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정당들이 스스로 잘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상대편을 비난하는 선전선동에 모든 것을 바치는 배경이자 이유가 되었다. 이들은 상대편에 대한 반감과 증오의 배설 경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다변가이자 달변가 검사로 통했던 윤석열은 공개되지 않는 사랑방 잡담회 수준의 언어를 언론 앞에서도 그대로 구사함으로써 자주 화를 자초한다. 이 화법에 중독된 나머지 공식석상의 발언마저 같은 방식의 화법으로 밀어붙여 큰 손해를 본다. 민주당 안민석의 ‘갈치 정치’나 최고위원 장경태의 ‘아무 말 대잔치’나 김의겸의 ‘묻지 마 윤석열 정권 때리기’는 모두 한국 정치의 저질화를 초래하는 주범이다. 특히 김의겸은 자신을 좋아했던 사람들의 신뢰와 기대를 배신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폴리널리스트라고 할 만하다. 김의겸은 오로지 ‘윤석열 정권 때리기’에 집착한 나머지 잠시 제정신이 외출한 걸까? 아니면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쇼를 위해 ‘지라시 정치인’이라도 되려는 것인가?

이준석을 덮친 ‘성공의 저주’

이준석은 신선한 세대교체 바람을 상징하고 구현한 인물이다. 특히 이준석은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아 2021년 국민의힘 당대표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성질을 부리느라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최악의 선택들을 하고 말았다. 즉, 스스로 ‘선택적 과잉 공감’을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상대가 죽어야만 자신이 사는 그의 ‘치킨 게임 정치’에는 미래가 없다. 이런 못난 경쟁을 통해 이준석의 처지가 살아난다 해도 그것은 자기 성찰이 아닌 반사이익의 결과인지라 또다시 그의 자해는 벌어지게 되어 있다. 2021년 11월 29일을 기억하는가? 그날 밤 이준석은 SNS에 “그렇다면 여기까지”라는 짧은 글을 남기고 잠적했다. 대선을 3개월여 남겨둔 시점에서 그래도 되는 건가? 누구의 담력, 아니 광기가 더 강한지를 겨루는 ‘치킨 게임’이었다.

이준석은 국민의힘에 축복이자 저주였다. 이준석이 국민의힘에 바람직한 혁신의 바람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반면, 이준석의 자기중심적 비타협주의는 ‘저주’였다. 이 비타협주의는 디지털 이진법 논리를 갖고 있다. 이준석은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중심적 권위주의다. 그는 지구가 멸망해도 좋다는 식의 엽기적인 자기애를 가진 인물이다. 이준석은 모든 것을 싸우는 방식으로만 해결하려고 든다. 그의 사전에는 대화와 타협이 없다. 그가 희대의 싸움꾼임은 잘 입증해 보였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통합을 지향하는 지도자의 길이 아닌가? 어쩌면 이준석에게 ‘성공의 저주’가 걸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