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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20세기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세 명의 대표적인 독재자들을 다루고 있다. 유럽의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중동의 사담 후세인이 그들이다.
독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당연하지만 방법은 독재자에게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처럼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던 시절에는 국민이 뜻이 반영되기 어려웠지만 요즘 쿠데타로 집권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투표 시 선동가나 포퓰리스트 등 독재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판별하여 뽑지 않으면 된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스스로 독재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국민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기 때문이다.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독재자들 특히 악명 높은 독재자들의 행태를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독재자들의 통치 방식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선전과 포장에 능하며 반대파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독재자의 술책이 어떤 것이며 이들이 얼마나 권력에 집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번 권력의 맛에 도취된 독재자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모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이성 마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독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당연하지만 방법은 독재자에게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처럼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던 시절에는 국민이 뜻이 반영되기 어려웠지만 요즘 쿠데타로 집권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투표 시 선동가나 포퓰리스트 등 독재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판별하여 뽑지 않으면 된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스스로 독재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국민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기 때문이다.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독재자들 특히 악명 높은 독재자들의 행태를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독재자들의 통치 방식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선전과 포장에 능하며 반대파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독재자의 술책이 어떤 것이며 이들이 얼마나 권력에 집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번 권력의 맛에 도취된 독재자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모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이성 마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목차
책을 펴내며
1부 독재의 그늘 _
역사를 거스른 희대의 독재자들
히틀러 | 스탈린 | 사담 후세인 | 독재자들의 공통점과 이중성 | 역사는 필연적인가
2부 폭정의 시대 _
히틀러 Adolf Hitler 1889~1945년, 독일-오스트리아 출생
유년 시절 | 비엔나 시절 | 뮌헨으로의 이주와 독일군 입대 | 정치 입문 | 나치스의 권력 장악 | 숭배의 대상 | 독특한 성격의 히틀러 | 유대인 혐오와 살육 | 세계대전의 시작 | 독소 전쟁과 히틀러의 몰락 | 히틀러의 최후 | 전쟁터로 끌려 온 아이들 | 추종자들의 말로
스탈린 Joseph Stalin 1879~1953, 소련-조지아(그루지야)출생
어린 시절 | 혁명가가 되다 |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 | 내부 암투에서 승리하다 | 피도 눈물도 없는 스탈린 | 불운했던 가정사 | 광기 어린 개혁정책 | 공포의 숙청 | 독소 전쟁에서의 승리 | 철의 장막과 우상 정책 | 말년의 스탈린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al-Majid al-Awja 1937~2006, 이라크
어린 시절 | 가족 중심의 사회 | 포악한 우다이| 영광과 오욕의 이라크 역사 |혼란과 폭력 속의 현대 이라크 | 바트당과 후세인 | 바트당의 득세 |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 부패정치 | 이란-이라크 전쟁 |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 전쟁 | 대량파괴무기 개발과 후세인의 최후
1부 독재의 그늘 _
역사를 거스른 희대의 독재자들
히틀러 | 스탈린 | 사담 후세인 | 독재자들의 공통점과 이중성 | 역사는 필연적인가
2부 폭정의 시대 _
히틀러 Adolf Hitler 1889~1945년, 독일-오스트리아 출생
유년 시절 | 비엔나 시절 | 뮌헨으로의 이주와 독일군 입대 | 정치 입문 | 나치스의 권력 장악 | 숭배의 대상 | 독특한 성격의 히틀러 | 유대인 혐오와 살육 | 세계대전의 시작 | 독소 전쟁과 히틀러의 몰락 | 히틀러의 최후 | 전쟁터로 끌려 온 아이들 | 추종자들의 말로
스탈린 Joseph Stalin 1879~1953, 소련-조지아(그루지야)출생
어린 시절 | 혁명가가 되다 |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 | 내부 암투에서 승리하다 | 피도 눈물도 없는 스탈린 | 불운했던 가정사 | 광기 어린 개혁정책 | 공포의 숙청 | 독소 전쟁에서의 승리 | 철의 장막과 우상 정책 | 말년의 스탈린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al-Majid al-Awja 1937~2006, 이라크
어린 시절 | 가족 중심의 사회 | 포악한 우다이| 영광과 오욕의 이라크 역사 |혼란과 폭력 속의 현대 이라크 | 바트당과 후세인 | 바트당의 득세 |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 부패정치 | 이란-이라크 전쟁 |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 전쟁 | 대량파괴무기 개발과 후세인의 최후
책 속으로
히틀러, 스탈린, 사담 후세인은 어떤 의미에서든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다. 이들에 관한 연구서는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를 해도 한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은 명확치 않다. 그것은 “과연 이들이 당 시대 역사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그들이 특이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자질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맞아 떨어졌다는 점에서 공통점은 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그들이 당대에 미친 엄청난 소용돌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특히 히틀러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운명의 여신이 역사를 필연적으로 정해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점이 너무 많다. 히틀러 연구로 유명한 이언 커쇼Ian Kershaw도 이와 같은 의문을 가졌다. 지성, 사교성, 융통성, 리더십은 물론 출신, 학벌, 공직 경험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결코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 한 인물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충격파를 던졌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이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많은 전문가들의 답은 ‘노No’이다. 히틀러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유대인이라는 역병으로부터 독일을 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집스러운 그의 믿음이 문제의 근원이었다. 개인의 믿음 하나에 의해 수 천만 명의 목숨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20세기를 통틀어 히틀러만큼 엄청난 흔적을 남긴 개인은 없는데 이는 모두 그의 광신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희대의 확신범이었다.
---「역사를 거스른 희대의 독재자들」중에서
히틀러의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대중연설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0년대 초반까지 히틀러의 연설 메뉴는 주로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바퀴벌레처럼 공격했다. 이후 뮌헨 감옥에서 출감한 20년대 후반이 되면 화두가 생존공간으로 바뀐다. 이번에는 아리안족의 위대함을 외치면서 넓은 세계로 나갈 것을 주문했다. 그러다가 1930년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그 전의 단골 메뉴는 싹 사라졌다. 유대인은 거의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생존공간도 예전처럼 무게감이 없었다. 새로 개발한 메뉴는 오직 나치를 선전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이익 집단들을 겨냥하여 독일의 분열을 막고 계급, 신분, 직업을 초월하여 위대한 독일을 재건할 수 있는 주역으로 나치스를 내세웠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당들은 폐쇄적인 이익만을 대표할 뿐이라고 하면서 나치스만이 전체적인 이익을 대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국민 전체의 이념으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나치당의 정치자금은 어디서 나왔는가? 전국적인 정당이 되기 전까지 나치는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정당이 아니었다. 당원들이 내는 당비와 각종 행사 시 거두는 입장료 정도가 당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러다가 히틀러와 당의 인기가 올라가고 전국적인 정당으로 대두되면서 재정 사정은 일시에 호전되었다. 대기업들이 앞을 다투어 후원금을 내고 당원들의 기여금도 액수가 훨씬 많아졌다. 당의 고위 간부들 중에는 이로 인해 재미 본 사람이 많았다. 특히 귀족적인 성향을 가진 괴링이 물질적으로 혜택을 많이 입었다. 철강업으로 유명한 재벌 티센이 그의 물주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괴링은 베를린의 고급 아파트에서 마치 로마의 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경제장관과 제국은행 총재를 지낸 발터 풍크, ‘장검의 밤’ 사건* 때 살해된 나치 좌파 그레고어 슈트라서 등도 목돈을 챙긴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나치스에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부패가 만연했다. 히틀러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다른 당료처럼 부패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재정적인 풍요를 누렸음은 틀림없다.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 출간으로 받은 인세, 연설로부터 들어오는 사례금, 그리고 국내외 언론 기고로 받는 원고료가 상당했다. 당수인 그에게는 당으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들어오는 돈이 있었으며 독지가들로부터도 끊임없이 후원금이 들어왔다. 이 모든 수입을 합하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도 남을 정도였다.
---「히틀러」중에서
스탈린이 정치국 내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권력의 정상으로 올라간 과정은 그야말로 공작정치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전략적인 합종연횡, 토사구팽, 배신과 음모 등 모든 권모술수가 총동원되었다. 선두주자였던 트로츠키를 제거하기 위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라는 강력한 두 정치국원과 먼저 동맹을 맺었다. 트로츠키가 제거되자 이번에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제거하기 위해 부하린과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제거된 후에는 부하린을 제거할 계책을 꾸몄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정적을 모두 제거했다. 모든 정적들은 레닌이 죽은 후 5년도 되지 않아 권력의 장막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최고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의 높은 명성으로 인해 해외로 나갈 수 있었고 당분간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을 지지한 것은 물론 존경심이나 우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탈린을 필요로 했다. 당 최고 지도자 자리를 놓고 트로츠키와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이들에게 스탈린은 매우 유익한 지원군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스탈린을 단순한 조력자로만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최초에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과 3인 동맹을 맺어 그들에게 대항하는 반대파를 공격했으나 스탈린 자신이 스스로 이 동맹을 깬 후에는 4인의 정치국원에 새로이 부하린, 루이코프, 톰스키 등 3인을 더해 7명으로 동맹을 확대했다. 당시 스탈린을 포함한 이 4인조를 우파라고 부르고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좌파라고 불렀다.
살얼음과 같은 권력투쟁에서는 처음에 높은 지위나 유리한 자리에 있었다고 꼭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약세에 있던 사람Underdog이 최종 승자가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3인 동맹을 맺을 당시 당사자들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모두 자신이 승리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동맹은 이들에게 한시적 도구에 불과했다. 중요한 점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을 너무 얕잡아 봤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잔뜩 긴장하면서도 그루지야 촌놈인 스탈린에 대해서는 전혀 경계심을 품지 않았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이었던 지노비예프는 3인조 가운데 연장자로서 인망이 가장 높았다. 카메네프는 좀 오만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지적으로 가장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있었다. 여하튼 두 사람 다 스탈린을 조역으로만 여겼다. 가끔 스탈린의 근성이나 비뚤어진 성격이 보일 때에는 좀 불안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에게 레닌의 후계자가 되려는 야심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출신, 학벌, 인품, 실력 등 모든 측면에서 스탈린은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받을 만한 소재가 없다는 것이 스탈린의 강점일 줄이야. 동료들은 스탈린 앞에서는 안심하고 무장을 해제했다. 개인적인 집착이나 야망이 거의 없어 보이는 스탈린의 성격이 공산당의 이념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을 감쪽같이 속인 스탈린은 공명심이 없는 겸허한 사람으로만 보였다.
---「스탈린」중에서
1979년 7월 후세인은 오랫동안 감추었던 발톱을 드러냈다. 정권 장악에 나선 것이다. 후세인은 제2인자로 때를 기다리는 동안 바크르에게 충성하면서 비밀 보안 조직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79년 1월 이란의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자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같은 바트당 정권인 이라크와 시리아를 통합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이 방안은 후세인에게는 독약이었다. 시리아-이라크 연방이 결성될 경우 바크르가 대통령, 부통령은 하페즈 아사드(시리아 대통령) 그리고 후세인은 잘해야 제3인자로 전락할 것이 확실했다. 후세인의 적들은 그를 분쇄하기 위한 호기로 생각하고 시리아와의 신속한 통합을 촉구했다. 위기를 느낀 티크리트 출신들은 후세인에게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 강제로 정권을 접수하라는 것이다. 잘못하면 지금까지 누려온 특권을 한 순간에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후세인은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카이랄라 툴파가 총대를 멨다. 파벌의 이익을 위해 바크르에게 사임을 촉구한 것이다. 물론 뒤에는 아들 아드난과 후세인이 버티고 있었다.
7월 16일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로 바크르의 사임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자리에 앉은 후세인은 바트당 사무총장, 군 최고사령관, 혁명평의회 의장 등 요직을 겸했다. 후세인은 권력을 잡은 것만으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한 숙청이 곧바로 진행되었다. 혁명평의회 위원 모하메드 무조브, 노조위원장 모하메드 아에시, 부위원장 비덴 파델, 혁명평의회 위원으로 한때 후세인의 측근이었던 가님 압둘 자릴, 요르단 출신 타리브 알 수웰레 등이 우선 처형되었다. 이들은 모두 후세인이 배신자로 점찍은 인물들이다. 그들에 앞서 살해된 사람도 있었다. 후세인의 정적으로 간주되었던 인물들이다. 군부 내 반 후세인 세력의 핵심이었던 왈리드 마무드 시라트 장군은 고문당한 뒤 몸이 찢겨 죽었다. 공무 출장으로 시리아를 방문했던 부총리 아드난 함다니는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체포된 후 살해되었다. 함다니는 후세인이 젊은 혁명가이던 시절 자금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후세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도 위험 요인이 있다고 판단하면 서슴지 않고 죽였다. 은인인 함다니도 사이가 조금 벌어지자 제거해버린 것이다.후세인의 잔인함은 스탈린과 비슷했다. 후세인으로서는 축제라도 벌여야 할 권력 이양 시기에 5백 명 이상의 정적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피의 잔치였다.
특히 히틀러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운명의 여신이 역사를 필연적으로 정해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점이 너무 많다. 히틀러 연구로 유명한 이언 커쇼Ian Kershaw도 이와 같은 의문을 가졌다. 지성, 사교성, 융통성, 리더십은 물론 출신, 학벌, 공직 경험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결코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 한 인물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충격파를 던졌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이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많은 전문가들의 답은 ‘노No’이다. 히틀러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유대인이라는 역병으로부터 독일을 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집스러운 그의 믿음이 문제의 근원이었다. 개인의 믿음 하나에 의해 수 천만 명의 목숨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20세기를 통틀어 히틀러만큼 엄청난 흔적을 남긴 개인은 없는데 이는 모두 그의 광신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희대의 확신범이었다.
---「역사를 거스른 희대의 독재자들」중에서
히틀러의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대중연설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0년대 초반까지 히틀러의 연설 메뉴는 주로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바퀴벌레처럼 공격했다. 이후 뮌헨 감옥에서 출감한 20년대 후반이 되면 화두가 생존공간으로 바뀐다. 이번에는 아리안족의 위대함을 외치면서 넓은 세계로 나갈 것을 주문했다. 그러다가 1930년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그 전의 단골 메뉴는 싹 사라졌다. 유대인은 거의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생존공간도 예전처럼 무게감이 없었다. 새로 개발한 메뉴는 오직 나치를 선전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이익 집단들을 겨냥하여 독일의 분열을 막고 계급, 신분, 직업을 초월하여 위대한 독일을 재건할 수 있는 주역으로 나치스를 내세웠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당들은 폐쇄적인 이익만을 대표할 뿐이라고 하면서 나치스만이 전체적인 이익을 대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국민 전체의 이념으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나치당의 정치자금은 어디서 나왔는가? 전국적인 정당이 되기 전까지 나치는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정당이 아니었다. 당원들이 내는 당비와 각종 행사 시 거두는 입장료 정도가 당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러다가 히틀러와 당의 인기가 올라가고 전국적인 정당으로 대두되면서 재정 사정은 일시에 호전되었다. 대기업들이 앞을 다투어 후원금을 내고 당원들의 기여금도 액수가 훨씬 많아졌다. 당의 고위 간부들 중에는 이로 인해 재미 본 사람이 많았다. 특히 귀족적인 성향을 가진 괴링이 물질적으로 혜택을 많이 입었다. 철강업으로 유명한 재벌 티센이 그의 물주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괴링은 베를린의 고급 아파트에서 마치 로마의 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경제장관과 제국은행 총재를 지낸 발터 풍크, ‘장검의 밤’ 사건* 때 살해된 나치 좌파 그레고어 슈트라서 등도 목돈을 챙긴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나치스에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부패가 만연했다. 히틀러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다른 당료처럼 부패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재정적인 풍요를 누렸음은 틀림없다.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 출간으로 받은 인세, 연설로부터 들어오는 사례금, 그리고 국내외 언론 기고로 받는 원고료가 상당했다. 당수인 그에게는 당으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들어오는 돈이 있었으며 독지가들로부터도 끊임없이 후원금이 들어왔다. 이 모든 수입을 합하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도 남을 정도였다.
---「히틀러」중에서
스탈린이 정치국 내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권력의 정상으로 올라간 과정은 그야말로 공작정치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전략적인 합종연횡, 토사구팽, 배신과 음모 등 모든 권모술수가 총동원되었다. 선두주자였던 트로츠키를 제거하기 위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라는 강력한 두 정치국원과 먼저 동맹을 맺었다. 트로츠키가 제거되자 이번에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제거하기 위해 부하린과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제거된 후에는 부하린을 제거할 계책을 꾸몄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정적을 모두 제거했다. 모든 정적들은 레닌이 죽은 후 5년도 되지 않아 권력의 장막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최고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의 높은 명성으로 인해 해외로 나갈 수 있었고 당분간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을 지지한 것은 물론 존경심이나 우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탈린을 필요로 했다. 당 최고 지도자 자리를 놓고 트로츠키와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이들에게 스탈린은 매우 유익한 지원군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스탈린을 단순한 조력자로만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최초에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과 3인 동맹을 맺어 그들에게 대항하는 반대파를 공격했으나 스탈린 자신이 스스로 이 동맹을 깬 후에는 4인의 정치국원에 새로이 부하린, 루이코프, 톰스키 등 3인을 더해 7명으로 동맹을 확대했다. 당시 스탈린을 포함한 이 4인조를 우파라고 부르고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좌파라고 불렀다.
살얼음과 같은 권력투쟁에서는 처음에 높은 지위나 유리한 자리에 있었다고 꼭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약세에 있던 사람Underdog이 최종 승자가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3인 동맹을 맺을 당시 당사자들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모두 자신이 승리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동맹은 이들에게 한시적 도구에 불과했다. 중요한 점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을 너무 얕잡아 봤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잔뜩 긴장하면서도 그루지야 촌놈인 스탈린에 대해서는 전혀 경계심을 품지 않았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이었던 지노비예프는 3인조 가운데 연장자로서 인망이 가장 높았다. 카메네프는 좀 오만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지적으로 가장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있었다. 여하튼 두 사람 다 스탈린을 조역으로만 여겼다. 가끔 스탈린의 근성이나 비뚤어진 성격이 보일 때에는 좀 불안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에게 레닌의 후계자가 되려는 야심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출신, 학벌, 인품, 실력 등 모든 측면에서 스탈린은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받을 만한 소재가 없다는 것이 스탈린의 강점일 줄이야. 동료들은 스탈린 앞에서는 안심하고 무장을 해제했다. 개인적인 집착이나 야망이 거의 없어 보이는 스탈린의 성격이 공산당의 이념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을 감쪽같이 속인 스탈린은 공명심이 없는 겸허한 사람으로만 보였다.
---「스탈린」중에서
1979년 7월 후세인은 오랫동안 감추었던 발톱을 드러냈다. 정권 장악에 나선 것이다. 후세인은 제2인자로 때를 기다리는 동안 바크르에게 충성하면서 비밀 보안 조직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79년 1월 이란의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자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같은 바트당 정권인 이라크와 시리아를 통합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이 방안은 후세인에게는 독약이었다. 시리아-이라크 연방이 결성될 경우 바크르가 대통령, 부통령은 하페즈 아사드(시리아 대통령) 그리고 후세인은 잘해야 제3인자로 전락할 것이 확실했다. 후세인의 적들은 그를 분쇄하기 위한 호기로 생각하고 시리아와의 신속한 통합을 촉구했다. 위기를 느낀 티크리트 출신들은 후세인에게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 강제로 정권을 접수하라는 것이다. 잘못하면 지금까지 누려온 특권을 한 순간에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후세인은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카이랄라 툴파가 총대를 멨다. 파벌의 이익을 위해 바크르에게 사임을 촉구한 것이다. 물론 뒤에는 아들 아드난과 후세인이 버티고 있었다.
7월 16일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로 바크르의 사임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자리에 앉은 후세인은 바트당 사무총장, 군 최고사령관, 혁명평의회 의장 등 요직을 겸했다. 후세인은 권력을 잡은 것만으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한 숙청이 곧바로 진행되었다. 혁명평의회 위원 모하메드 무조브, 노조위원장 모하메드 아에시, 부위원장 비덴 파델, 혁명평의회 위원으로 한때 후세인의 측근이었던 가님 압둘 자릴, 요르단 출신 타리브 알 수웰레 등이 우선 처형되었다. 이들은 모두 후세인이 배신자로 점찍은 인물들이다. 그들에 앞서 살해된 사람도 있었다. 후세인의 정적으로 간주되었던 인물들이다. 군부 내 반 후세인 세력의 핵심이었던 왈리드 마무드 시라트 장군은 고문당한 뒤 몸이 찢겨 죽었다. 공무 출장으로 시리아를 방문했던 부총리 아드난 함다니는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체포된 후 살해되었다. 함다니는 후세인이 젊은 혁명가이던 시절 자금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후세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도 위험 요인이 있다고 판단하면 서슴지 않고 죽였다. 은인인 함다니도 사이가 조금 벌어지자 제거해버린 것이다.후세인의 잔인함은 스탈린과 비슷했다. 후세인으로서는 축제라도 벌여야 할 권력 이양 시기에 5백 명 이상의 정적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피의 잔치였다.
---「사담 후세인」중에서
출판사 리뷰
절대 권력, 과연 그 끝은 어디인가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냉전, 이로 인한 한국전과 베트남전, 그리고 걸프전 등 굵직한 전쟁을 치른 한 세기였다. 다행히 더 이상 세계대전은 없었으나 21세기에 들어서도 국지전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이란, 이라크, 시리아, 예멘, 리비아와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과 서아시아에서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다. 20세기는 또한 독재자들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 주로 개도국에서 많은 독재자들이 탄생했고 이들의 철권통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21세기에 들어 독재자들의 준동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나 정세 변화에 따라서는 언제 이들이 다시 출몰할지 모른다. 세계 도처에는 아직도 국민을 기만하는 포퓰리스트들과 어떻게든 권력의 기회를 잡으려는 야심가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세기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세 명의 대표적인 독재자들을 다루고 있다. 유럽의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중동의 사담 후세인이 그들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가져온 독·소 전쟁의 주역으로 이 전쟁에서 진 독일은 패전국으로 전락하고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반면 전쟁이 막 시작할 때만 해도 패색이 짙었던 스탈린은 용케 살아남은 후 전열을 정비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고비로 나치군을 물리쳤다. 스탈린은 전후에도 냉전체제의 산파역으로 중동구와 코카서스 및 아시아에서 위성 국가들을 거느리며 세계 최대의 붉은 제국을 건설한 후 전제군주와 같은 통치자로 군림하였으니 놀라운 일이다. 작달막한 조지아(그루지야)의 시골뜨기가 이런 엄청난 일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는 대단한 확신범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옳고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말미암아 독일민족은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영원한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살하기 직전까지도 승전과 독일제국 건설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으니 꿈속에서 살았던 비현실적인 인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1937년 생으로 이들과 거의 두 세대 차이가 나는 사담 후세인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스탈린을 모델로 삼았다. 후세인의 권력투쟁과 숙청 및 폭력을 들여다보면 스탈린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의 일생은 스탈린과 같이 음모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전쟁도 여러 차례 치렀지만 모두 오판에 의한 것이었고 승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이라크 국민이 대신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그 자신도 결국 미국의 오판에 의한 침공으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시대는 바뀌고 통치자들도 끊임없이 바뀌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독재자들은 반드시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등에서 주로 독재자들이 출현하지만 유럽이나 여타 선진국에도 독재자가 출현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선거 민주주의는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좌절과 절망에 시달린 독일인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극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히틀러의 선동에 넘어가 그가 이끄는 나치당에 표를 몰아주었고 이것으로 독일의 비극적인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 우고 차베스는 선동적인 독재정치로 불과 10여 년 만에 남미의 석유 부국이던 베네수엘라를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시키는 묘기를 보였다. 사담 후세인도 마찬가지다. 한때 중동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여름에는 지중해에서 피서를 즐길 정도로 여유가 넘쳤던 국민을 배급에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고달픈 신세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독재의 피해는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독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당연하지만 방법은 독재자에게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처럼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던 시절에는 국민이 뜻이 반영되기 어려웠지만 요즘 쿠데타로 집권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투표 시 선동가나 포퓰리스트 등 독재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판별하여 뽑지 않으면 된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스스로 독재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국민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기 때문이다.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독재자들 특히 악명 높은 독재자들의 행태를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독재자들의 통치 방식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선전과 포장에 능하며 반대파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독재자의 술책이 어떤 것이며 이들이 얼마나 권력에 집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번 권력의 맛에 도취된 독재자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모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이성 마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냉전, 이로 인한 한국전과 베트남전, 그리고 걸프전 등 굵직한 전쟁을 치른 한 세기였다. 다행히 더 이상 세계대전은 없었으나 21세기에 들어서도 국지전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이란, 이라크, 시리아, 예멘, 리비아와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과 서아시아에서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다. 20세기는 또한 독재자들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 주로 개도국에서 많은 독재자들이 탄생했고 이들의 철권통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21세기에 들어 독재자들의 준동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나 정세 변화에 따라서는 언제 이들이 다시 출몰할지 모른다. 세계 도처에는 아직도 국민을 기만하는 포퓰리스트들과 어떻게든 권력의 기회를 잡으려는 야심가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세기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세 명의 대표적인 독재자들을 다루고 있다. 유럽의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중동의 사담 후세인이 그들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가져온 독·소 전쟁의 주역으로 이 전쟁에서 진 독일은 패전국으로 전락하고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반면 전쟁이 막 시작할 때만 해도 패색이 짙었던 스탈린은 용케 살아남은 후 전열을 정비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고비로 나치군을 물리쳤다. 스탈린은 전후에도 냉전체제의 산파역으로 중동구와 코카서스 및 아시아에서 위성 국가들을 거느리며 세계 최대의 붉은 제국을 건설한 후 전제군주와 같은 통치자로 군림하였으니 놀라운 일이다. 작달막한 조지아(그루지야)의 시골뜨기가 이런 엄청난 일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는 대단한 확신범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옳고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말미암아 독일민족은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영원한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살하기 직전까지도 승전과 독일제국 건설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으니 꿈속에서 살았던 비현실적인 인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1937년 생으로 이들과 거의 두 세대 차이가 나는 사담 후세인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스탈린을 모델로 삼았다. 후세인의 권력투쟁과 숙청 및 폭력을 들여다보면 스탈린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의 일생은 스탈린과 같이 음모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전쟁도 여러 차례 치렀지만 모두 오판에 의한 것이었고 승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이라크 국민이 대신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그 자신도 결국 미국의 오판에 의한 침공으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시대는 바뀌고 통치자들도 끊임없이 바뀌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독재자들은 반드시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등에서 주로 독재자들이 출현하지만 유럽이나 여타 선진국에도 독재자가 출현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선거 민주주의는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좌절과 절망에 시달린 독일인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극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히틀러의 선동에 넘어가 그가 이끄는 나치당에 표를 몰아주었고 이것으로 독일의 비극적인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 우고 차베스는 선동적인 독재정치로 불과 10여 년 만에 남미의 석유 부국이던 베네수엘라를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시키는 묘기를 보였다. 사담 후세인도 마찬가지다. 한때 중동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여름에는 지중해에서 피서를 즐길 정도로 여유가 넘쳤던 국민을 배급에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고달픈 신세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독재의 피해는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독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당연하지만 방법은 독재자에게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처럼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던 시절에는 국민이 뜻이 반영되기 어려웠지만 요즘 쿠데타로 집권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투표 시 선동가나 포퓰리스트 등 독재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판별하여 뽑지 않으면 된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스스로 독재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국민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기 때문이다.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독재자들 특히 악명 높은 독재자들의 행태를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독재자들의 통치 방식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선전과 포장에 능하며 반대파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독재자의 술책이 어떤 것이며 이들이 얼마나 권력에 집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번 권력의 맛에 도취된 독재자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모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이성 마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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