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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무관심에서 책임으로, 무기력에서 희망으로”
상실된 애도와 무뎌진 감각을 되찾기 위한 인류학적 성찰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 확산과 이태원 참사. 지난 10년간 반복되어온 사회적 참사들은 우리 몸과 마음에 무엇을 남겼을까. 《달라붙는 감정들》에서 다섯 명의 인류학자가 일상을 무대로 연이어 벌어진 참사의 궤적 속에 놓여 있는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저자들은 반복되는 참사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에 끈적하게 엉겨 달라붙는 감정이나 정서를 ‘정동’이라 명명하며 이를 추적한다.
책에서 짚은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정동’은 ‘무관심’과 ‘무기력’이다. 지난 10년간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사건들 위에 새로운 비극이 포개지고, 진상규명이 무산되는 것을 반복해서 목격하는 동안 무관심과 무기력을 학습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참사를 관심에서 치워버리는 동안 우리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감정적 진공 상태로 내몰린다. 원치 않는 우울과 불안, 긴장과 초조도 얻는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이 감정적 진공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다. 저자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스스로가 경험했거나, 참여연구를 통해 발로 뛰었거나, 당사자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들을 인류학과 정동 이론에 대입해 그 역사를 노련하게 추적한다.
상실된 애도와 무뎌진 감각을 되찾기 위한 인류학적 성찰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 확산과 이태원 참사. 지난 10년간 반복되어온 사회적 참사들은 우리 몸과 마음에 무엇을 남겼을까. 《달라붙는 감정들》에서 다섯 명의 인류학자가 일상을 무대로 연이어 벌어진 참사의 궤적 속에 놓여 있는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저자들은 반복되는 참사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에 끈적하게 엉겨 달라붙는 감정이나 정서를 ‘정동’이라 명명하며 이를 추적한다.
책에서 짚은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정동’은 ‘무관심’과 ‘무기력’이다. 지난 10년간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사건들 위에 새로운 비극이 포개지고, 진상규명이 무산되는 것을 반복해서 목격하는 동안 무관심과 무기력을 학습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참사를 관심에서 치워버리는 동안 우리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감정적 진공 상태로 내몰린다. 원치 않는 우울과 불안, 긴장과 초조도 얻는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이 감정적 진공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다. 저자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스스로가 경험했거나, 참여연구를 통해 발로 뛰었거나, 당사자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들을 인류학과 정동 이론에 대입해 그 역사를 노련하게 추적한다.
목차
머리말│고통 곁에서 부서진 언어 이어 붙이기
“열이 나면 받아줄 수가 없대요”: 의료 관료주의의 무심함과 기다림의 사회적 가치
- 김희경(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저녁에 걸려온 전화 한 통
구급차는 왜 출발하지 못했나
무심함에서 무자비함으로
익명의 돌봄 체계와 생략된 애도
기다림의 두 얼굴
무심함과 기다림의 사회적 가치
발과 손으로 다져간 아들의 생명: 참사 이후 부모의 일상
- 김관욱(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참사로 불리지 못한 일상적 참사
참사의 부모들이 모두 모인 정 군의 3주기 추모제
잊히지 않으려 마지막으로 선택한 도보행진
환대의 웃음 그리고 회한
엄마의 손으로 빚은 아들의 얼굴
비손, 비로소 아들을 떠나보냈던 순간
희망을 남기고 싶은 소망
우리가 그 시절 잃어버린 것들: 애도에 관하여
- 이기병(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춘천성심병원)
통째로 생략된 감각
최악보다 더 나쁜 결과
“아빠는, 충분했다”
기억하고 복원해야 할 필수적 정동
좋은 애도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품은 애도의 윤리
돌봄의 얼굴들: 의료와 철학의 언어를 넘어 실천과 삶의 언어로
- 정종민(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1초도 못 쉬는” 돌봄
퇴근 없는 삶
돌봄은 일방적이라기보다 관계적이다
하고 싶은 돌봄이 아니라 잘할 수 있는 돌봄
못다 한 이야기들
애도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반복된다: 이태원 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 김관욱(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1주기 첫날, 다시 시작되는 그날
마음속에 슬픔을 담는 새로운 장기가 생겼다
분노의 정동에 숨은 피해자의 위치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는 곳, 분향소
상징으로 가득 찬 애도의 일상
같은 얼굴의 재난 앞에서
기나긴 혁명, 그래서 우리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 참사 이후 정동의 갈래들
- 이현정(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살려주세요!―국가의 검은 공백
재난 이후 정동의 양분화
무력감과 우울, 해결되지 않는 과제
무관심의 정동 이후
맺음말 의미를 상실한 시대, 새로운 방향을 지향하며
“열이 나면 받아줄 수가 없대요”: 의료 관료주의의 무심함과 기다림의 사회적 가치
- 김희경(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저녁에 걸려온 전화 한 통
구급차는 왜 출발하지 못했나
무심함에서 무자비함으로
익명의 돌봄 체계와 생략된 애도
기다림의 두 얼굴
무심함과 기다림의 사회적 가치
발과 손으로 다져간 아들의 생명: 참사 이후 부모의 일상
- 김관욱(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참사로 불리지 못한 일상적 참사
참사의 부모들이 모두 모인 정 군의 3주기 추모제
잊히지 않으려 마지막으로 선택한 도보행진
환대의 웃음 그리고 회한
엄마의 손으로 빚은 아들의 얼굴
비손, 비로소 아들을 떠나보냈던 순간
희망을 남기고 싶은 소망
우리가 그 시절 잃어버린 것들: 애도에 관하여
- 이기병(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춘천성심병원)
통째로 생략된 감각
최악보다 더 나쁜 결과
“아빠는, 충분했다”
기억하고 복원해야 할 필수적 정동
좋은 애도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품은 애도의 윤리
돌봄의 얼굴들: 의료와 철학의 언어를 넘어 실천과 삶의 언어로
- 정종민(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1초도 못 쉬는” 돌봄
퇴근 없는 삶
돌봄은 일방적이라기보다 관계적이다
하고 싶은 돌봄이 아니라 잘할 수 있는 돌봄
못다 한 이야기들
애도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반복된다: 이태원 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 김관욱(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1주기 첫날, 다시 시작되는 그날
마음속에 슬픔을 담는 새로운 장기가 생겼다
분노의 정동에 숨은 피해자의 위치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는 곳, 분향소
상징으로 가득 찬 애도의 일상
같은 얼굴의 재난 앞에서
기나긴 혁명, 그래서 우리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 참사 이후 정동의 갈래들
- 이현정(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살려주세요!―국가의 검은 공백
재난 이후 정동의 양분화
무력감과 우울, 해결되지 않는 과제
무관심의 정동 이후
맺음말 의미를 상실한 시대, 새로운 방향을 지향하며
저자 소개
책 속으로
생의 감각이 무력화된 삶은 진정한 의미에서 생동하는 삶이라 말할 수 없다.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어도 일상의 삶 곳곳에 드리우는 무기력의 감각과, 내가 혹은 나의 가족이 참사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우리를 건강하지 못한 삶으로 이끈다. 결국 이 책의 저자들은 모두의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각자의 삶 안에 들어온 참사의 기억과 거기에 찐득찐득하게 엉긴 감정이나 정서 등으로 명명되는 정동(affect, 情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출발점이었다.
--- p.8
의료 체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료를 소비하고 구매하는 소비자의 지위를 보장받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정과 돌봄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7
J씨의 차는 2002년에 제조된 것으로 주행거리가 19만 킬로미터 남짓이었다. 차의 나이는 정 군보다 1살 정도 많았고, 정 군이 태어났을 때부터 마지막 응급실에 실려간 순간까지 가족이 함께 머문 장소였다. 가족이 정 군을 보고 만질 수 있었던 마지막 ‘장소’가 바로 이 차의 뒷자리였던 것이다. 차는 아들의 유품이었다.
--- p.60
정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을 다루고자 하는 기존 논의들의 핵심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일상의 느낌들이 항상 “마주침”의 결과이며, “반드시 관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느낌들은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정동적 사실”로서 다분히 개인과 집단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마주침은 특정한 정동적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 p.76
애도는 이처럼 사회 환경과 상황, 조건과 맥락에 따라 경사(傾斜)되거나 심지어 폭력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애도에 있어 사회적 조건과 맥락은 다시 중요해진다. 또한 앞서 짚어본 ‘애도의 윤리’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사안이 된다. 그 사회가 어떤 애도의 윤리를 품고 있는지가 실제 애도 행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p.114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정답은 없다. 따라서 ‘애도’ 또한 주입식으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애도’는 죽음을 마주한 사람들이 누구나 동의하는 공통의 이해와 감각을 반영하기에 죽음 자체보다 논의하기 수월하다. 또한 애도에는 윤리적 함의가 담겨 있기 때문에 교육적 논의를 통해 향후 애도의 수위와 수준을 논하는 일이 가능하다.
--- p.116
이 글은 코로나19를 온몸으로 이겨낸 돌봄 노동자의 공을 치하하거나 떠받들기 위한 영웅 서사가 아니다. 무섭고 두렵고 피로를 넘어 소진에 이르러서도 현장을 지켰던 어느 쓸쓸한 돌봄 노동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섣부른 위로나 추앙, 격려를 담기보다 돌봄 노동자가 팬데믹 기간 동안 살아온 일상을 되짚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비교적 있는 그대로 담아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팬데믹을 견딜 수 있었던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 p.126~127
테일러에게 인지증과 사는 삶이란 시간이 멈춰진 진공의 무의미한 삶도 아니고 일방적인 두뇌 퇴화 과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인지증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은 세상과 마주하면서 “포용”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는 등 상응하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화되는 “생성”적 존재라고 강조한다.
--- p.131
어머니는 참사 후 1년하고 10일이 지난 시간을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참사 10일째를 그대로 다시 살아내고 있었다.
--- p.154
참사를 막지 못했는지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가족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며, 되레 유가족에게 피해자임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는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의 책임은 정부에 있음에도, 이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정부가 아닌 유가족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바뀐 형국이다.
--- p.166
배 안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보관한 휴대전화에는 사진들과 영상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사진들과 영상들을 보면서 울다가 지쳐갔다. 거기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부터, 배가 기울어지고 물이 차오르는 순간까지의 긴장과 두려움, 친구와 선생님을 걱정하는 목소리, 빨리 오지 않는 해경과 어른들을 향한 욕설, 그리고 엄마와 아빠와 동생에게 남기는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 요청들에 국가는, 어른들은, 응답하지 않았다. 응답(respo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 책임감(responsibility)이 없었다. 신고와 긴급한 도움 요청 이후에,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 p.187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공동체가 갈라진 걸까? 그것은 참사 피해자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공동체적 행위와 달리, 비난과 혐오 표현은 자발적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 p.193
무력감과 우울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정동이다.
--- p.8
의료 체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료를 소비하고 구매하는 소비자의 지위를 보장받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정과 돌봄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7
J씨의 차는 2002년에 제조된 것으로 주행거리가 19만 킬로미터 남짓이었다. 차의 나이는 정 군보다 1살 정도 많았고, 정 군이 태어났을 때부터 마지막 응급실에 실려간 순간까지 가족이 함께 머문 장소였다. 가족이 정 군을 보고 만질 수 있었던 마지막 ‘장소’가 바로 이 차의 뒷자리였던 것이다. 차는 아들의 유품이었다.
--- p.60
정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을 다루고자 하는 기존 논의들의 핵심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일상의 느낌들이 항상 “마주침”의 결과이며, “반드시 관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느낌들은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정동적 사실”로서 다분히 개인과 집단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마주침은 특정한 정동적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 p.76
애도는 이처럼 사회 환경과 상황, 조건과 맥락에 따라 경사(傾斜)되거나 심지어 폭력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애도에 있어 사회적 조건과 맥락은 다시 중요해진다. 또한 앞서 짚어본 ‘애도의 윤리’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사안이 된다. 그 사회가 어떤 애도의 윤리를 품고 있는지가 실제 애도 행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p.114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정답은 없다. 따라서 ‘애도’ 또한 주입식으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애도’는 죽음을 마주한 사람들이 누구나 동의하는 공통의 이해와 감각을 반영하기에 죽음 자체보다 논의하기 수월하다. 또한 애도에는 윤리적 함의가 담겨 있기 때문에 교육적 논의를 통해 향후 애도의 수위와 수준을 논하는 일이 가능하다.
--- p.116
이 글은 코로나19를 온몸으로 이겨낸 돌봄 노동자의 공을 치하하거나 떠받들기 위한 영웅 서사가 아니다. 무섭고 두렵고 피로를 넘어 소진에 이르러서도 현장을 지켰던 어느 쓸쓸한 돌봄 노동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섣부른 위로나 추앙, 격려를 담기보다 돌봄 노동자가 팬데믹 기간 동안 살아온 일상을 되짚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비교적 있는 그대로 담아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팬데믹을 견딜 수 있었던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 p.126~127
테일러에게 인지증과 사는 삶이란 시간이 멈춰진 진공의 무의미한 삶도 아니고 일방적인 두뇌 퇴화 과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인지증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은 세상과 마주하면서 “포용”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는 등 상응하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화되는 “생성”적 존재라고 강조한다.
--- p.131
어머니는 참사 후 1년하고 10일이 지난 시간을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참사 10일째를 그대로 다시 살아내고 있었다.
--- p.154
참사를 막지 못했는지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가족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며, 되레 유가족에게 피해자임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는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의 책임은 정부에 있음에도, 이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정부가 아닌 유가족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바뀐 형국이다.
--- p.166
배 안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보관한 휴대전화에는 사진들과 영상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사진들과 영상들을 보면서 울다가 지쳐갔다. 거기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부터, 배가 기울어지고 물이 차오르는 순간까지의 긴장과 두려움, 친구와 선생님을 걱정하는 목소리, 빨리 오지 않는 해경과 어른들을 향한 욕설, 그리고 엄마와 아빠와 동생에게 남기는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 요청들에 국가는, 어른들은, 응답하지 않았다. 응답(respo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 책임감(responsibility)이 없었다. 신고와 긴급한 도움 요청 이후에,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 p.187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공동체가 갈라진 걸까? 그것은 참사 피해자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공동체적 행위와 달리, 비난과 혐오 표현은 자발적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 p.193
무력감과 우울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정동이다.
--- p.202
출판사 리뷰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코로나19, 이태원, 오송 지하차도…
다섯 명의 인류학자들이 추적한 일상적 참사와 정동의 계보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 확산과 이태원 참사. 이들은 각각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우리 기억 속에 서로 뗄 수 없는 일들로 차곡차곡 엉겨 있다. 지난 10년간 반복되어온 사회적 참사들은, 그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두말할 나위 없고 티브이나 포털을 통해 간접적으로 목격한 우리의 몸과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참사는 과연 무엇을 남겼으며, 무엇을 앗아갔을까.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김관욱, 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김희경,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춘천성심병원 이기병,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이현정, 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정종민 등 ‘의료인류학연구회’에 소속된 다섯 명의 인류학자가, 《달라붙는 감정들》에서 일상을 무대로 연이어 벌어진 참사의 궤적 속에 놓여 있는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저자들은 반복되는 참사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에 끈적하게 엉겨 달라붙는 감정이나 정서를 ‘정동(affect, 情動)’이라 명명하며 이를 추적한다. 책에 따르면 정동은 ‘감정’과 ‘정서’를 만들어내는 원형적이고 근원적인 힘이다. 즉 ‘슬프다’, ‘기쁘다’, ‘괴롭다’, ‘우울하다’ 같은 도드라진 이름이 붙기 이전의 원초적인 감정적, 정서적 에너지다.
책에서 짚은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정동’은 ‘무관심’과 ‘무기력’이다. 지난 10년간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사건들 위에 새로운 비극이 포개지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내몰리며, 진상규명이 무산되는 것을 반복해서 목격하는 동안 어느새 각자도생의 정신, 무관심과 무기력을 학습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참사는 이제 그만 듣기 싫은 ‘불편’하고 ‘골치 아픈’ 일,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으며 심지어 내 ‘자원’을 빼앗는 일로 전락한다. 참사를 관심에서 치워버리는 동안 우리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감정적 진공 상태로 내몰린다. 원치 않는 우울과 불안, 긴장과 초조도 얻는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이 감정적 진공 상태, 무기력과 무관심의 상황에 놓인 것이 아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엮은 공동 저자 김관욱은 책의 맺음말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스스로가 경험했거나, 참여연구를 통해 발로 뛰었거나, 당사자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들을 인류학과 정동 이론에 대입해 그 역사를 노련하게 추적한다. 그렇게 탐구하고 기록한 참사 속 정동의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 누적된 무관심과 무기력의 실체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코로나19와 기다림의 다양한 얼굴들,
무심함은 어떻게 무자비함으로 변하는가
책의 저자들은 의료인류학연구회 소속의 학자, 연구자 또는 의사다. 의료인류학연구회는 2014년 의료 영역의 다양한 주제들을 인류학의 관점에서 논의하기 위한 소규모 월례 세미나로 출발해 어느덧 10주년을 맞이했다. 이 책은 ‘의료인류학’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주로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여파들을 다룬다.
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김희경 교수는 코로나19가 한창일 무렵, 응급실에 제때 이송되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로 첫 장을 연다. 오미크론이 대유행하면서 재택 치료가 시작되고, 방역 체계가 완전히 재편되면서 ‘열이 나는 뇌졸중 의심 환자’인 아버지는 구급차를 두 차례 돌려보내고 응급실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아침을 맞는다. 김희경 교수는 의료 체계에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보편적인 ‘기다림’ 의미를 당사자의 보호자이자 인류학자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의료 체계에 진입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지난밤”에 깊은 무력함을 느끼는 한편, 그렇다면 기다림이 “무조건 수정되어야 할 폐혜”일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의료 체계(를 비롯한 관료제적 분류 체계) 속 기다림의 두 가지 측면을 균형 있게 보여준다.
기다림은 국가가 제공하는 보편적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누리기 위해 ‘시민’으로서 거쳐야 할 절차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관료주의적 무심함으로 무장한 구조의 처분을 무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순응적 주체’가 되는 과정이다. 즉, 기다림은 그 자체로 시민으로서의 권리 향유와 순응이라는 양극을 모두 포함한다. (41쪽)
의료 체계의 기다림은 때론 무심함을 넘어 무자비해진다.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김관욱 교수는 코로나19 시절 부실한 대응이 초래한 죽음을 다룬다. 코로나 감염자로 끝까지 의심을 받으며 발열 6일 만인 2020년 3월 18일 홀로 사망한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정유엽 군 이야기다. 처음 열이 날 때 ‘3~4일 기다리며 경과를 지켜보라’는 방역지침을 철저히 따랐던 정 군을 떠나보낸 정 군의 부모는 “차라리 욕을 하고 난리를 쳤더라면, 우리 아들이 살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의 날을 보낸다. 김관욱 교수는 ‘규범을 따르고, 지침을 준수하면 사회도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원칙의 배신은 ‘도덕적 상처’를 남긴다고 짚는다. 또 이렇게 누적된 배신을 경험하고 목격한 사람이 늘수록 개인의 트라우마가 집단적 트라우마, ‘문화적 트라우마’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미국 사회학자 닐 스멜서(Neil Smelser)는 문화적 트라우마를 “부정적 정동으로 가득한 집단의 기억”으로 정의내리며 이것이 “문화적 예측의 근간 자체를 파괴한다”고 설명한다. 연이은 참사로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 수많은 죽음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분위기, 일부 동료 시민의 무관심과 무시는 모두의 트라우마가 되어 문화의 근간인 도덕마저 뒤흔들지 모른다. (62쪽)
애도를 잃어버린 시절, 돌봄의 가치가 벼랑 끝에 내몰린 사회
우리가 복원해야 할 애도와 돌봄은 무엇인가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춘천성심병원 내과 전문의 이기병은 팬데믹의 절정기에 코로나19 중환자실에서 근무했다. 그는 방호복이 감염원으로부터 의료진을 보호하는 효과를 냈으나, 의사-환자 사이에 있어왔던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치료 과정의 단절을 가져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죽음과 유가족의 모습을 목격한 그는 우리가 ‘애도의 감각’을 잃어버렸다며, 이를 “단적으로 말해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의 죽어감을 곁에서 바라보는 이가 가질 수 있는 근원적인 감각의 부재”이자 “애도의 결락”이라 호명한다. 그가 코로나19가 확산되기 바로 이전 해에, 아버지를 보내드린 과정을 소상히 적은 대목은, 이 애도의 결락이 그저 ‘장례 절차’의 문제가 아님을 정확히 보여준다. 이기병 전문의는 미처 해결하지 못한 집합적 고통과 분노가 터져 나오기 전에, 이제라도 증발된 애도의 시간과 상실의 경험을 복원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나간 의료 현장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던져볼 만한 질문은 이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좋은 애도’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죽음을 조정할 수는 없어도 애도의 방식과 내용은 조정할 수 있다. 죽음 자체를 막을 수는 없더라도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을 수정할 수는 있으며, 죽어가는 이를 살려낼 수는 없더라도 그에게 반응하는 방식은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0쪽)
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정종민 연구원은 지난 3년간 코로나19 시절 인지증 당사자들을 돌보던 돌봄 노동자 3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중 돌봄 노동자 이정희와 그가 돌보던 인지증 당사자 김순례의 사례를 통해 돌봄 현장의 핍진한 일상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돌봄 노동자들은 팬데믹 시절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봄 가능 인원이 최소한으로 제한되면서, “1초도 못 쉬는”, “일 폭탄”을 감당해야 했다. 정종민은 지금의 돌봄 위기, 돌봄 참사는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작되면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며, 돌봄 노동자에게 독박 돌봄의 부담을 안기는 대신, 새로운 차원의 돌봄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주문한다. 그 방법으로 ‘돌봄이 관계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인지증과 인지증 당사자에 접근하는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부연한다.
이정희의 인지증 돌봄은 의료의 언어나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실천의 언어이자 삶의 언어로 다가온다. 당연히 인지증과 산다는 것은 아픈 몸에서 건강한 몸으로 혹은 소위 ‘비정상’에서 ‘정상’으로의 회복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픈 몸과 사는 삶 그 자체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또 다른 사회적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간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지증은 불치병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또 하나의 삶의 조건이 된다. (148~149쪽)
세월호에서 이태원까지 참사가 일상이 된 우리 사회의 정동,
그 너머의 희망에 관하여
책에는 코로나19 의료 참사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앞서 정유엽 군과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김관욱 교수가, 이태원 참사 1주기 무렵 유가족과 인터뷰한 내용을 기반으로 이태원 참사가 남긴 우리 사회의 정동을 살펴봤다. 김관욱 교수는 세월호 때와 달리 이태원 참사의 경우 국가가 나서서 애도의 시공간을 통제, 제한하면서 유가족에게서 제대로 애도할 기회를 빼앗았다고 지적한다. 또 참사 원인을 입증해야 할 정부가, 되레 유가족에게 피해자임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거꾸로’ 뒤바뀐 상황이 특정 감정(분노와 원망과 무기력)만을 느끼도록 내몰았다고도 덧붙인다.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은 평생 슬픔과 분노, 무력감과 죄책감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진짜’ 피해자다움(victimhood)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듯, 또한 그것에 애도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반복된다. 걸맞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듯 기쁜 일이 있어도 마음껏 웃지도 못하는 일상이 강요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유가족이 참사 후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힘든 감정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이외의 감정은 허락되지 않은 듯했다. (168~169쪽)
안산, 광화문, 팽목항, 목포 등 현장을 앞장서 찾아다니며 재난을 연구해온 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이현정 교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지금까지 10년간 우리 사회에 길게 드리워진 정동을 살펴본다. 이현정 교수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은 싸워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학습했으며 국가는 반대자의 싸움을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것을 영리하게 익혔다며, ‘무력감과 우울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정동’이라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무관심과 냉소의 긴 동굴을 빠져나올 방법은 없는 걸까? 이 교수는, 무관심과 책임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에 달렸다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그러면서 둘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내가 나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넘어 궁극적으로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와도 정확히 같은 질문이라고 지적한다.
내 앞에 고통받는 존재가 있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쿨’한 태도로 고개를 돌리고, 그 사람이 폭력을 당하고 죽어가는 것을 묵묵히 방관할 것인가? 아니면, 그가 죽기 전에 손을 내밀어 내 집으로 일단 피신하라고 말할 것인가? (…) 이것은 고통이 가득한 이 시대에, 내가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과제다. (204쪽)
책의 머리말에 따르면 “의료인류학자는 고통을 겪는 이의 곁에서 그가 온몸으로 토해내는 부서진 언어를 이어 붙여 모두가 함께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이 책은 고통 곁에선 다섯 명의 의료인류학자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참사에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또한 참사 당사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참사의 흔적들을 함께 들여다보기 위해 쓰였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일은 머리말을 쓴 김희경의 말대로, “고통으로 헐린 우리 몸과 마음”을 돌아보고, “참사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도 보듬어 앞으로 나아갈 힘”을 보태는 일이 될 것이다.
다섯 명의 인류학자들이 추적한 일상적 참사와 정동의 계보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 확산과 이태원 참사. 이들은 각각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우리 기억 속에 서로 뗄 수 없는 일들로 차곡차곡 엉겨 있다. 지난 10년간 반복되어온 사회적 참사들은, 그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두말할 나위 없고 티브이나 포털을 통해 간접적으로 목격한 우리의 몸과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참사는 과연 무엇을 남겼으며, 무엇을 앗아갔을까.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김관욱, 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김희경,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춘천성심병원 이기병,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이현정, 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정종민 등 ‘의료인류학연구회’에 소속된 다섯 명의 인류학자가, 《달라붙는 감정들》에서 일상을 무대로 연이어 벌어진 참사의 궤적 속에 놓여 있는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저자들은 반복되는 참사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에 끈적하게 엉겨 달라붙는 감정이나 정서를 ‘정동(affect, 情動)’이라 명명하며 이를 추적한다. 책에 따르면 정동은 ‘감정’과 ‘정서’를 만들어내는 원형적이고 근원적인 힘이다. 즉 ‘슬프다’, ‘기쁘다’, ‘괴롭다’, ‘우울하다’ 같은 도드라진 이름이 붙기 이전의 원초적인 감정적, 정서적 에너지다.
책에서 짚은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정동’은 ‘무관심’과 ‘무기력’이다. 지난 10년간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사건들 위에 새로운 비극이 포개지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내몰리며, 진상규명이 무산되는 것을 반복해서 목격하는 동안 어느새 각자도생의 정신, 무관심과 무기력을 학습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참사는 이제 그만 듣기 싫은 ‘불편’하고 ‘골치 아픈’ 일,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으며 심지어 내 ‘자원’을 빼앗는 일로 전락한다. 참사를 관심에서 치워버리는 동안 우리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감정적 진공 상태로 내몰린다. 원치 않는 우울과 불안, 긴장과 초조도 얻는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이 감정적 진공 상태, 무기력과 무관심의 상황에 놓인 것이 아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엮은 공동 저자 김관욱은 책의 맺음말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스스로가 경험했거나, 참여연구를 통해 발로 뛰었거나, 당사자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들을 인류학과 정동 이론에 대입해 그 역사를 노련하게 추적한다. 그렇게 탐구하고 기록한 참사 속 정동의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 누적된 무관심과 무기력의 실체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코로나19와 기다림의 다양한 얼굴들,
무심함은 어떻게 무자비함으로 변하는가
책의 저자들은 의료인류학연구회 소속의 학자, 연구자 또는 의사다. 의료인류학연구회는 2014년 의료 영역의 다양한 주제들을 인류학의 관점에서 논의하기 위한 소규모 월례 세미나로 출발해 어느덧 10주년을 맞이했다. 이 책은 ‘의료인류학’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주로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여파들을 다룬다.
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김희경 교수는 코로나19가 한창일 무렵, 응급실에 제때 이송되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로 첫 장을 연다. 오미크론이 대유행하면서 재택 치료가 시작되고, 방역 체계가 완전히 재편되면서 ‘열이 나는 뇌졸중 의심 환자’인 아버지는 구급차를 두 차례 돌려보내고 응급실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아침을 맞는다. 김희경 교수는 의료 체계에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보편적인 ‘기다림’ 의미를 당사자의 보호자이자 인류학자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의료 체계에 진입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지난밤”에 깊은 무력함을 느끼는 한편, 그렇다면 기다림이 “무조건 수정되어야 할 폐혜”일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의료 체계(를 비롯한 관료제적 분류 체계) 속 기다림의 두 가지 측면을 균형 있게 보여준다.
기다림은 국가가 제공하는 보편적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누리기 위해 ‘시민’으로서 거쳐야 할 절차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관료주의적 무심함으로 무장한 구조의 처분을 무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순응적 주체’가 되는 과정이다. 즉, 기다림은 그 자체로 시민으로서의 권리 향유와 순응이라는 양극을 모두 포함한다. (41쪽)
의료 체계의 기다림은 때론 무심함을 넘어 무자비해진다.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김관욱 교수는 코로나19 시절 부실한 대응이 초래한 죽음을 다룬다. 코로나 감염자로 끝까지 의심을 받으며 발열 6일 만인 2020년 3월 18일 홀로 사망한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정유엽 군 이야기다. 처음 열이 날 때 ‘3~4일 기다리며 경과를 지켜보라’는 방역지침을 철저히 따랐던 정 군을 떠나보낸 정 군의 부모는 “차라리 욕을 하고 난리를 쳤더라면, 우리 아들이 살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의 날을 보낸다. 김관욱 교수는 ‘규범을 따르고, 지침을 준수하면 사회도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원칙의 배신은 ‘도덕적 상처’를 남긴다고 짚는다. 또 이렇게 누적된 배신을 경험하고 목격한 사람이 늘수록 개인의 트라우마가 집단적 트라우마, ‘문화적 트라우마’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미국 사회학자 닐 스멜서(Neil Smelser)는 문화적 트라우마를 “부정적 정동으로 가득한 집단의 기억”으로 정의내리며 이것이 “문화적 예측의 근간 자체를 파괴한다”고 설명한다. 연이은 참사로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 수많은 죽음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분위기, 일부 동료 시민의 무관심과 무시는 모두의 트라우마가 되어 문화의 근간인 도덕마저 뒤흔들지 모른다. (62쪽)
애도를 잃어버린 시절, 돌봄의 가치가 벼랑 끝에 내몰린 사회
우리가 복원해야 할 애도와 돌봄은 무엇인가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춘천성심병원 내과 전문의 이기병은 팬데믹의 절정기에 코로나19 중환자실에서 근무했다. 그는 방호복이 감염원으로부터 의료진을 보호하는 효과를 냈으나, 의사-환자 사이에 있어왔던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치료 과정의 단절을 가져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죽음과 유가족의 모습을 목격한 그는 우리가 ‘애도의 감각’을 잃어버렸다며, 이를 “단적으로 말해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의 죽어감을 곁에서 바라보는 이가 가질 수 있는 근원적인 감각의 부재”이자 “애도의 결락”이라 호명한다. 그가 코로나19가 확산되기 바로 이전 해에, 아버지를 보내드린 과정을 소상히 적은 대목은, 이 애도의 결락이 그저 ‘장례 절차’의 문제가 아님을 정확히 보여준다. 이기병 전문의는 미처 해결하지 못한 집합적 고통과 분노가 터져 나오기 전에, 이제라도 증발된 애도의 시간과 상실의 경험을 복원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나간 의료 현장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던져볼 만한 질문은 이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좋은 애도’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죽음을 조정할 수는 없어도 애도의 방식과 내용은 조정할 수 있다. 죽음 자체를 막을 수는 없더라도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을 수정할 수는 있으며, 죽어가는 이를 살려낼 수는 없더라도 그에게 반응하는 방식은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0쪽)
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정종민 연구원은 지난 3년간 코로나19 시절 인지증 당사자들을 돌보던 돌봄 노동자 3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중 돌봄 노동자 이정희와 그가 돌보던 인지증 당사자 김순례의 사례를 통해 돌봄 현장의 핍진한 일상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돌봄 노동자들은 팬데믹 시절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봄 가능 인원이 최소한으로 제한되면서, “1초도 못 쉬는”, “일 폭탄”을 감당해야 했다. 정종민은 지금의 돌봄 위기, 돌봄 참사는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작되면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며, 돌봄 노동자에게 독박 돌봄의 부담을 안기는 대신, 새로운 차원의 돌봄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주문한다. 그 방법으로 ‘돌봄이 관계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인지증과 인지증 당사자에 접근하는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부연한다.
이정희의 인지증 돌봄은 의료의 언어나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실천의 언어이자 삶의 언어로 다가온다. 당연히 인지증과 산다는 것은 아픈 몸에서 건강한 몸으로 혹은 소위 ‘비정상’에서 ‘정상’으로의 회복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픈 몸과 사는 삶 그 자체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또 다른 사회적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간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지증은 불치병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또 하나의 삶의 조건이 된다. (148~149쪽)
세월호에서 이태원까지 참사가 일상이 된 우리 사회의 정동,
그 너머의 희망에 관하여
책에는 코로나19 의료 참사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앞서 정유엽 군과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김관욱 교수가, 이태원 참사 1주기 무렵 유가족과 인터뷰한 내용을 기반으로 이태원 참사가 남긴 우리 사회의 정동을 살펴봤다. 김관욱 교수는 세월호 때와 달리 이태원 참사의 경우 국가가 나서서 애도의 시공간을 통제, 제한하면서 유가족에게서 제대로 애도할 기회를 빼앗았다고 지적한다. 또 참사 원인을 입증해야 할 정부가, 되레 유가족에게 피해자임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거꾸로’ 뒤바뀐 상황이 특정 감정(분노와 원망과 무기력)만을 느끼도록 내몰았다고도 덧붙인다.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은 평생 슬픔과 분노, 무력감과 죄책감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진짜’ 피해자다움(victimhood)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듯, 또한 그것에 애도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반복된다. 걸맞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듯 기쁜 일이 있어도 마음껏 웃지도 못하는 일상이 강요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유가족이 참사 후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힘든 감정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이외의 감정은 허락되지 않은 듯했다. (168~169쪽)
안산, 광화문, 팽목항, 목포 등 현장을 앞장서 찾아다니며 재난을 연구해온 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이현정 교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지금까지 10년간 우리 사회에 길게 드리워진 정동을 살펴본다. 이현정 교수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은 싸워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학습했으며 국가는 반대자의 싸움을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것을 영리하게 익혔다며, ‘무력감과 우울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정동’이라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무관심과 냉소의 긴 동굴을 빠져나올 방법은 없는 걸까? 이 교수는, 무관심과 책임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에 달렸다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그러면서 둘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내가 나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넘어 궁극적으로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와도 정확히 같은 질문이라고 지적한다.
내 앞에 고통받는 존재가 있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쿨’한 태도로 고개를 돌리고, 그 사람이 폭력을 당하고 죽어가는 것을 묵묵히 방관할 것인가? 아니면, 그가 죽기 전에 손을 내밀어 내 집으로 일단 피신하라고 말할 것인가? (…) 이것은 고통이 가득한 이 시대에, 내가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과제다. (204쪽)
책의 머리말에 따르면 “의료인류학자는 고통을 겪는 이의 곁에서 그가 온몸으로 토해내는 부서진 언어를 이어 붙여 모두가 함께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이 책은 고통 곁에선 다섯 명의 의료인류학자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참사에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또한 참사 당사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참사의 흔적들을 함께 들여다보기 위해 쓰였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일은 머리말을 쓴 김희경의 말대로, “고통으로 헐린 우리 몸과 마음”을 돌아보고, “참사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도 보듬어 앞으로 나아갈 힘”을 보태는 일이 될 것이다.
'59.생각의 힘 (독서>책소개) > 2.한국사회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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