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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을 강조하는 홍세화 에세이 『생각의 좌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등에 이어 저자가 홀로 집필한 이 책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생각의 뿌리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러한 개인적 성찰이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지도록 한다.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내가 주인이 아닌 내 생각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가 주체적으로 걸러내지 못한 부모의 요구나 주류 사회의 통념이 내 생각의 자리에 대신 똬리를 틀고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그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유하는 자’가 아닌 ‘암기 잘하는 자’를 양산하는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지는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의 핵심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주문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이미 ‘생각의 노예’ 상태에 놓인 한국사회구성원들에 대한 쓸쓸한 시선 또한 그 속에 담겨 있다. 이에 저자는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을 강조하는 홍세화 에세이 『생각의 좌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등에 이어 저자가 홀로 집필한 이 책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생각의 뿌리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러한 개인적 성찰이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지도록 한다.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내가 주인이 아닌 내 생각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가 주체적으로 걸러내지 못한 부모의 요구나 주류 사회의 통념이 내 생각의 자리에 대신 똬리를 틀고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그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유하는 자’가 아닌 ‘암기 잘하는 자’를 양산하는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지는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의 핵심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주문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이미 ‘생각의 노예’ 상태에 놓인 한국사회구성원들에 대한 쓸쓸한 시선 또한 그 속에 담겨 있다. 이에 저자는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목차
책머리에
1.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생각은?/ 네 가지 경로/ 학습
선택과 집중/ 사형제도/
반학문/ 서열/ 복종/ ‘왜?’의 죽음
탈의식/ 두 개의 질문
2. 회색의 물신 사회
고향/ 탐욕/ 회색/ 도시 서민
보잘것없음/ 몰상식
분노/ 쓴소리/ 달걀
나눔과 분배/ 무상교육/ 지금 여기
3. 긴장의 항체
쓸쓸함/ 자화상/ 항체
망자와 연대/ 긴장
1.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생각은?/ 네 가지 경로/ 학습
선택과 집중/ 사형제도/
반학문/ 서열/ 복종/ ‘왜?’의 죽음
탈의식/ 두 개의 질문
2. 회색의 물신 사회
고향/ 탐욕/ 회색/ 도시 서민
보잘것없음/ 몰상식
분노/ 쓴소리/ 달걀
나눔과 분배/ 무상교육/ 지금 여기
3. 긴장의 항체
쓸쓸함/ 자화상/ 항체
망자와 연대/ 긴장
책 속으로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그 동안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 새롭게 작성한 글, 강연 원고를 정리한 글을 묶은 그야말로 잡문집이다. 이 책이 젊은이들에게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의 작은 실마리라도 제공한다면 그지없이 기쁜 일이다. 정리된 것이든 아니든 세계관과 가치관이 녹아 있는 우리 생각은 사회화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한국사회구성원인 나의 생각에 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하나에서 만난다. 이 책에서 첫마디로 제기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이 이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책머리에」 중에서
사람은 편함을 추구한다. 남에게 불편함은 물론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면서까지 나의 편함을 추구한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말은 내 편함의 추구가 남에게 불편함, 고통, 불행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만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편함을 추구할 뿐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다. 물신 지배가 극성을 부리는 한국사회처럼 비교라는 말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와 내일의 관계를 견준다는 뜻은 사라지고 즉자적으로 남과 가진 것으로 견준다는 뜻만 남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다시금 “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 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도 계속 고집할 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고.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 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습(習), 즉 ‘익힘’이다.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習).’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이길 것을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인권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서열화된 대학구조가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왜곡시킴으로써 학생들의 ‘자기 생각과 논리’를 죽였다면, 각 가정은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을 죽였다.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의 말로 전해진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 상대방에게 논리로 밀릴 것 같으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함으로써 자리를 모면하는 사람들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21세기에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는 키케로의 말을 아주 잘 따른다.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당신 몇 살이야?”라고 묻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라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남을 설득해본 사람은 안다. 남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날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사회진보가 어렵고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사회진보를 도모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주입한,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의식화나 계몽 대신 나는 ‘탈의식’을 주문한다.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고 존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운동권에서 흔히 ‘의식화’를 말하지만 여기엔 중대한 잘못이 있다. 첫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을 아무런 의식을 갖지 않은 자 혹은 중립적 의식의 소유자인 양 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가 관철돼 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 「책머리에」 중에서
사람은 편함을 추구한다. 남에게 불편함은 물론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면서까지 나의 편함을 추구한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말은 내 편함의 추구가 남에게 불편함, 고통, 불행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만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편함을 추구할 뿐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다. 물신 지배가 극성을 부리는 한국사회처럼 비교라는 말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와 내일의 관계를 견준다는 뜻은 사라지고 즉자적으로 남과 가진 것으로 견준다는 뜻만 남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다시금 “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 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도 계속 고집할 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고.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 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습(習), 즉 ‘익힘’이다.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習).’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이길 것을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인권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서열화된 대학구조가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왜곡시킴으로써 학생들의 ‘자기 생각과 논리’를 죽였다면, 각 가정은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을 죽였다.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의 말로 전해진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 상대방에게 논리로 밀릴 것 같으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함으로써 자리를 모면하는 사람들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21세기에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는 키케로의 말을 아주 잘 따른다.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당신 몇 살이야?”라고 묻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라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남을 설득해본 사람은 안다. 남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날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사회진보가 어렵고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사회진보를 도모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주입한,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의식화나 계몽 대신 나는 ‘탈의식’을 주문한다.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고 존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운동권에서 흔히 ‘의식화’를 말하지만 여기엔 중대한 잘못이 있다. 첫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을 아무런 의식을 갖지 않은 자 혹은 중립적 의식의 소유자인 양 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가 관철돼 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홍세화가 6년 만에 새 책 『생각의 좌표』를 펴낸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빨간 신호등』에 이어 그가 홀로 집필한 다섯 번째 책이다. 이번 새 책의 화두는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질문이다. 내가 지니고 있는 생각의 뿌리를 살펴보자는 것! 물음은 꼬리를 문다. 과연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내가 주인이 아닌 내 생각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가 주체적으로 걸러내지 못한 부모의 요구나 주류 사회의 통념이 내 생각의 자리에 대신 똬리를 틀고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사회적 약자들은 왜 강자의 논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주인 없는 생각이 넘쳐나는 까닭은 개인의 게으름이나 무지 때문인가, 아니면 시스템, 즉 미디어 환경이나 교육 제도의 문제인가?
이렇듯 개인적 성찰은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진다. 특히 그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유하는 자’가 아닌 ‘암기 잘하는 자’를 양산하는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암기 능력을 기준으로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며 경쟁을 부추기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자신의 존재나 처지를 배반하는 의식을 내면화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생각의 길을 잃어가는 이 땅의 젊은 벗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글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비판적 안목을 지닌 ‘사유하는 인간’으로 발걸음을 딛는 작은 실마리라도 얻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바람이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이 질문이 왜 중요할까?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잘 던지지 않는다. 생각이 많으면 사는 게 피곤하다. 게다가 사람의 생각은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홍세화에 따르면 “사람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 (자신의 기존 생각을) 합리화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내적 결단과 용기 없이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런데 그 생각들이 나의 부단한 성찰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밖에서 던져진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면? 우리는 내 생각의 주인이 아니라, 그들이 뿌려놓은 생각의 노예가 되고 만다.
홍세화가 이번 책에서 던지는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의 핵심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주문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이미 ‘생각의 노예’ 상태에 놓인 한국사회구성원들에 대한 쓸쓸한 시선 또한 그 속에 담겨 있다. “당신의 (지불) 능력을 보여주세요.”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1%의 힘” “당신이 사는 곳이 곧 당신을 말해줍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선동’이 완벽하게 대중들에게 먹혀들어간다는 사실은, 돈이 최고라는 물신 지배의 논리에 우리가 무방비로 포섭되어 있는 생각의 노예임을 너무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의식의 배반 - 왜 비판하지 않고 선망하게 되었나?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해고를 당하기 직전까지는 비정규직 당사자들 스스로가 고용 조건에 대해 남의 집 불구경하듯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갑작스런 재개발로 턱도 없는 영업보상비를 받고 쫓겨나기 전까지는, 같은 세입자의 입장에서도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몇 푼 더 받으려 애쓰다가 죽은 불쌍한 사람들’ 정도의 시선을 던질 뿐이다. “MB 정권의 감세 정책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70퍼센트 넘는 국민이 동의하면서도, 정작 부자 감세 정책에 50퍼센트 넘는 국민이 동의한다. 부자들은 수백만 원의 세금이 줄어들지만, 본인들은 고작 5만 원을 덜 낼 뿐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존재를 거스르는 의식의 배반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 가능성과는 무관한 ‘그들의 주술’에 의식을 맡겨놓고선, 현재의 처지가 아니라 ‘사장, 빌딩 소유주, 종부세 대상자’이라는 미래의 입장에 자신을 투사하기 때문인 것이다.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
“내가 유전자를 신뢰하는 데 비해, 그는 교육과 환경을 신뢰한다. 내가 자신과 남을 싸잡아 불신하는 데 비해, 그는 남과 자신을 동시에 신뢰한다. 우애, 연대 같은 말이 내게는 관념인 데 비해, 그에게는 구체다.” (고종석, 『기자들』, 1993)
“신념의 일관성에서,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반성의 철저함과 항구성에서, 말과 행동의 일치에 대한 점검의 부단함에서 그를 앞설 사람을 나는 얼른 떠올리지 못한다.” (고종석,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2006)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하던 남민전 망명객 홍세화를 가장 먼저 국내에 소개한 고종석이 자신의 책 속에서 그를 평가한 대목들이다. 특히, 촘촘한 자유주의자(고종석)의 시선이 포착한 16년 전의 홍세화는 지금의 모습과 전혀 다름이 없다. 꽤나 시간이 흘렀고, 망명객의 신분을 벗고 한국에 들어와 직접 한국 사회를 겪으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는 여전히 교육과 환경을 중요성을 가장 신뢰하며, 책상머리에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의 연대’를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꿈이라는,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실시하는 한국 사회를 섣불리 낙관하지 않지만, 결코 그 소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뀌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임을 너무나 잘 아는 그가,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는 성찰을 주문하는 까닭도 그래야만 사람의 생각이, 사회가 바뀔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열리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이상사회를 미리 그려놓고 그것을 향해 사회운동을 펼쳐 나가기보다는 오늘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과 불행을 덜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 여기’를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면서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좌절과 포기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고,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쉼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영원한 현역 척후병’의 분투는 소중하고, 아름답다.
이렇듯 개인적 성찰은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진다. 특히 그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유하는 자’가 아닌 ‘암기 잘하는 자’를 양산하는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암기 능력을 기준으로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며 경쟁을 부추기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자신의 존재나 처지를 배반하는 의식을 내면화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생각의 길을 잃어가는 이 땅의 젊은 벗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글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비판적 안목을 지닌 ‘사유하는 인간’으로 발걸음을 딛는 작은 실마리라도 얻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바람이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이 질문이 왜 중요할까?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잘 던지지 않는다. 생각이 많으면 사는 게 피곤하다. 게다가 사람의 생각은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홍세화에 따르면 “사람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 (자신의 기존 생각을) 합리화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내적 결단과 용기 없이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런데 그 생각들이 나의 부단한 성찰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밖에서 던져진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면? 우리는 내 생각의 주인이 아니라, 그들이 뿌려놓은 생각의 노예가 되고 만다.
홍세화가 이번 책에서 던지는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의 핵심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주문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이미 ‘생각의 노예’ 상태에 놓인 한국사회구성원들에 대한 쓸쓸한 시선 또한 그 속에 담겨 있다. “당신의 (지불) 능력을 보여주세요.”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1%의 힘” “당신이 사는 곳이 곧 당신을 말해줍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선동’이 완벽하게 대중들에게 먹혀들어간다는 사실은, 돈이 최고라는 물신 지배의 논리에 우리가 무방비로 포섭되어 있는 생각의 노예임을 너무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의식의 배반 - 왜 비판하지 않고 선망하게 되었나?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해고를 당하기 직전까지는 비정규직 당사자들 스스로가 고용 조건에 대해 남의 집 불구경하듯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갑작스런 재개발로 턱도 없는 영업보상비를 받고 쫓겨나기 전까지는, 같은 세입자의 입장에서도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몇 푼 더 받으려 애쓰다가 죽은 불쌍한 사람들’ 정도의 시선을 던질 뿐이다. “MB 정권의 감세 정책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70퍼센트 넘는 국민이 동의하면서도, 정작 부자 감세 정책에 50퍼센트 넘는 국민이 동의한다. 부자들은 수백만 원의 세금이 줄어들지만, 본인들은 고작 5만 원을 덜 낼 뿐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존재를 거스르는 의식의 배반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 가능성과는 무관한 ‘그들의 주술’에 의식을 맡겨놓고선, 현재의 처지가 아니라 ‘사장, 빌딩 소유주, 종부세 대상자’이라는 미래의 입장에 자신을 투사하기 때문인 것이다.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
“내가 유전자를 신뢰하는 데 비해, 그는 교육과 환경을 신뢰한다. 내가 자신과 남을 싸잡아 불신하는 데 비해, 그는 남과 자신을 동시에 신뢰한다. 우애, 연대 같은 말이 내게는 관념인 데 비해, 그에게는 구체다.” (고종석, 『기자들』, 1993)
“신념의 일관성에서,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반성의 철저함과 항구성에서, 말과 행동의 일치에 대한 점검의 부단함에서 그를 앞설 사람을 나는 얼른 떠올리지 못한다.” (고종석,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2006)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하던 남민전 망명객 홍세화를 가장 먼저 국내에 소개한 고종석이 자신의 책 속에서 그를 평가한 대목들이다. 특히, 촘촘한 자유주의자(고종석)의 시선이 포착한 16년 전의 홍세화는 지금의 모습과 전혀 다름이 없다. 꽤나 시간이 흘렀고, 망명객의 신분을 벗고 한국에 들어와 직접 한국 사회를 겪으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는 여전히 교육과 환경을 중요성을 가장 신뢰하며, 책상머리에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의 연대’를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꿈이라는,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실시하는 한국 사회를 섣불리 낙관하지 않지만, 결코 그 소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뀌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임을 너무나 잘 아는 그가,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는 성찰을 주문하는 까닭도 그래야만 사람의 생각이, 사회가 바뀔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열리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이상사회를 미리 그려놓고 그것을 향해 사회운동을 펼쳐 나가기보다는 오늘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과 불행을 덜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 여기’를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면서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좌절과 포기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고,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쉼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영원한 현역 척후병’의 분투는 소중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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