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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간디와 함께 투쟁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웠던 네 명의 인물들(빔라오 람지 암베드까르, 수바스 찬드라 보세, 무함마드 알리 진나, 비나약 다모다르 사바르까르)을 통해 인도 독립의 과정과 그 속에서 제기된 쟁점들을 살피는 책이다. 흔히 인도의 독립은 간디가 이끈 비폭력저항 운동이 이루어낸 성과이며, 따라서 인도 독립의 공은 대부분 간디에게 있는 것처럼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인도의 독립을 위해 간디만큼이나 열정적으로 투쟁했던 인물들이 많았고, 그 방향과 방식은 많은 경우 ‘위대한 성인’ 간디와는 달랐다. 불가촉천민 문제의 해법을 놓고 간디와 맞섰던 암베드까르, 독립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동원하고 누구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면서 간디의 비폭력투쟁에 비판적이었던 보세, 간디와 국민회의가 힌두 중심의 국가를 만들려 한다며 무슬림 국가의 분리 독립을 위해 힘썼던 진나, 반대로 간디가 친무슬림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하며 ‘힌두스탄’(힌두의 국가) 건립을 위해 애썼으며 끝내 간디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기까지 했던 사바르까르. 이 네 명의 인물들은 모두 간디의 위대함에 존경을 표하고 인도 독립에 있어서 간디가 가진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간디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맞서고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연구교수로 인도의 식민지 시기와 독립과정에 대해 10여 년간 꾸준히 연구를 지속해온 저자 박금표는 오랜 연구의 성과들을 토대로 이 네 명의 인물, 그리고 그 맞섬의 대상이었던 간디라는 인물을 통해 영국에 맞선 인도의 투쟁과 독립의 역사를 꼼꼼하게 직조해 내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_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등장인물 소개
I부 간디 vs. 암베드까르: 하리잔과 달리뜨
1. 도띠와 넥타이
2. 시궁창과 스와라지
3. 불가촉의 족쇄 풀기: 쟁취와 자비
4. 사뜨야그라하 단식과 야비한 단식
5. 하리잔과 달리뜨
II부 간디 vs. 보세: 위대한 영혼과 용감한 지도자
1. 물레와 호랑이
2. 한 줌의 소금이 만들어낸 열기와 갈등
3. 힘겨루기: 좌파와 우파의 대립
4. 히틀러에게: 충고와 지원 요청
5. 줄다리기와 총공격
6. 위대한 영혼과 용감한 지도자
III부 간디 vs. 진나: 인도와 파키스탄의 아버지
1. 신념과 의심
2. 거목의 등장과 임무 교대
3. 거짓과 현실
4. 동상이몽의 대화
5. 인도와 파키스탄의 아버지
IV부 간디 vs. 사바르까르: 람 라즈야와 힌두뜨와
1. 아힘사와 암살
2. 돋보기로 읽는 역사
3. 더하기와 나누기
4. 미래를 위한 산실: 감옥과 군대
5. 비폭력주의자와 혁명주의자의 역설적 죽음
6. 람 라즈야와 힌두뜨와
에필로그 _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며
연표 | 후주 | 참고문헌 | 찾아보기
등장인물 소개
I부 간디 vs. 암베드까르: 하리잔과 달리뜨
1. 도띠와 넥타이
2. 시궁창과 스와라지
3. 불가촉의 족쇄 풀기: 쟁취와 자비
4. 사뜨야그라하 단식과 야비한 단식
5. 하리잔과 달리뜨
II부 간디 vs. 보세: 위대한 영혼과 용감한 지도자
1. 물레와 호랑이
2. 한 줌의 소금이 만들어낸 열기와 갈등
3. 힘겨루기: 좌파와 우파의 대립
4. 히틀러에게: 충고와 지원 요청
5. 줄다리기와 총공격
6. 위대한 영혼과 용감한 지도자
III부 간디 vs. 진나: 인도와 파키스탄의 아버지
1. 신념과 의심
2. 거목의 등장과 임무 교대
3. 거짓과 현실
4. 동상이몽의 대화
5. 인도와 파키스탄의 아버지
IV부 간디 vs. 사바르까르: 람 라즈야와 힌두뜨와
1. 아힘사와 암살
2. 돋보기로 읽는 역사
3. 더하기와 나누기
4. 미래를 위한 산실: 감옥과 군대
5. 비폭력주의자와 혁명주의자의 역설적 죽음
6. 람 라즈야와 힌두뜨와
에필로그 _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며
연표 | 후주 | 참고문헌 | 찾아보기
책 속으로
이 책을 쓰는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간디와 맞선 사람들을 쓰기 위해 내가 택한 방식은 몇 개월씩 간디와 맞선 네 명의 인물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었다. 즉 처음 몇 개월은 암베드까르가 되어 간디와 맞서며 살았고, 그다음 몇 개월은 보세가 되어 간디와 맞서며 살았던 셈이다. 그렇게 네 명의 인물이 되어 살면서 나는 ‘간디는 왜 암베드까르에게 불가촉천민 운동을 맡겨두지 않았을까? 보세에게는 왜 그렇게 냉혹했을까? 진나에게는 왜 또 그리 박절했을까? 왜 사바르까르를 그렇게 몰아세웠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 마음으로 간디와 맞선 네 명의 기초자료 정리를 마치고 나서야 내가 잊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명의 인물이 되어 살아보았듯이 간디가 되어 사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8~9쪽)
아프리카에서 양복을 입고 변호사로 활동한 간디가 인도에 돌아오면서 양복 대신 도띠를 입은 것은 그의 생각, 즉 인도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일어난 많은 개혁운동은 서구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개혁의 물결에 대해 재고하고, 단호히 인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을 선언하는 것이 간디가 입은 도띠의 상징성일 것이다. 그런데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은 거의 반나체 상태로 살고 있다. 그들은 인도의 전통 의상을 입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거나 영국이 가져다준 유럽식 의상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서 반나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신발과 장신구가 허용되지 않았고, 옷도 하체를 겨우 가릴 정도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반나체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불가촉천민인 암베드까르의 양복과 넥타이에는 이러한 불가촉천민을 차별하는 데 대한 저항의식이 들어 있다.(28~29쪽)
요컨대 진나가 국민회의와 등지게 된 것은 간디의 비협조 결의안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비협조 결의안의 어떤 점이 진나의 정치 행보와 충돌하게 된 것일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대중을 선동하는 정책과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동적 저항 활동은 진나의 정치적 궤도를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나는 기본적으로 의회민주주의와 입헌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에게 보통교육을 실시하는 의무교육제도의 도입과 공무원에 인도인 채용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것 등을 통하여 자치를 달성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간디는 대중을 동원하여 소요를 일으키거나 학생들에게 등교를 거부하라고 할 뿐만 아니라 공무원들과 의원들에게 사퇴하라고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간디의 정책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울라트 법안 반대 사뜨야그라하와 암리차르 대학살 등에서 드러난 영국의 포악성이 간디가 정계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고, 대중 역시 그러한 간디의 지도력에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진나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256~257쪽)
그의 삶 자체가 진리의 실험이었던 간디의 위대함은 그를 마하트마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식민지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어떤 순간에도 비폭력 정신을 잃지 않은 그에 대해 어떠한 찬사를 한다 해도 결코 지나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비폭력을 통한 진리 실험 정신은 간디가 살았던 당대는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비폭력의 실천이 때로는 우유부단하게, 때로는 너무 느리게 진행되었고, 완고한 직선 행보는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방법론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한 과정에서 불가촉천민의 울음이 가득했고, 느림의 미학만으로 아름다움을 생산할 수 없을 때 생기는 급진적 주장을 누그러뜨리지 못했으며, 타협정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등을 돌리는 인물들을 만들었다. 그 결과 파키스탄이 탄생했고, 불가촉천민을 비롯한 하층민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차별 조항이 헌법에 명시되었음에도 아직도 인도의 불가촉천민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힌두근본주의가 성장하여 종파갈등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 가혹한 평가일까.(426~427쪽)
아프리카에서 양복을 입고 변호사로 활동한 간디가 인도에 돌아오면서 양복 대신 도띠를 입은 것은 그의 생각, 즉 인도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일어난 많은 개혁운동은 서구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개혁의 물결에 대해 재고하고, 단호히 인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을 선언하는 것이 간디가 입은 도띠의 상징성일 것이다. 그런데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은 거의 반나체 상태로 살고 있다. 그들은 인도의 전통 의상을 입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거나 영국이 가져다준 유럽식 의상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서 반나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신발과 장신구가 허용되지 않았고, 옷도 하체를 겨우 가릴 정도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반나체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불가촉천민인 암베드까르의 양복과 넥타이에는 이러한 불가촉천민을 차별하는 데 대한 저항의식이 들어 있다.(28~29쪽)
요컨대 진나가 국민회의와 등지게 된 것은 간디의 비협조 결의안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비협조 결의안의 어떤 점이 진나의 정치 행보와 충돌하게 된 것일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대중을 선동하는 정책과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동적 저항 활동은 진나의 정치적 궤도를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나는 기본적으로 의회민주주의와 입헌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에게 보통교육을 실시하는 의무교육제도의 도입과 공무원에 인도인 채용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것 등을 통하여 자치를 달성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간디는 대중을 동원하여 소요를 일으키거나 학생들에게 등교를 거부하라고 할 뿐만 아니라 공무원들과 의원들에게 사퇴하라고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간디의 정책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울라트 법안 반대 사뜨야그라하와 암리차르 대학살 등에서 드러난 영국의 포악성이 간디가 정계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고, 대중 역시 그러한 간디의 지도력에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진나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256~257쪽)
그의 삶 자체가 진리의 실험이었던 간디의 위대함은 그를 마하트마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식민지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어떤 순간에도 비폭력 정신을 잃지 않은 그에 대해 어떠한 찬사를 한다 해도 결코 지나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비폭력을 통한 진리 실험 정신은 간디가 살았던 당대는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비폭력의 실천이 때로는 우유부단하게, 때로는 너무 느리게 진행되었고, 완고한 직선 행보는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방법론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한 과정에서 불가촉천민의 울음이 가득했고, 느림의 미학만으로 아름다움을 생산할 수 없을 때 생기는 급진적 주장을 누그러뜨리지 못했으며, 타협정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등을 돌리는 인물들을 만들었다. 그 결과 파키스탄이 탄생했고, 불가촉천민을 비롯한 하층민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차별 조항이 헌법에 명시되었음에도 아직도 인도의 불가촉천민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힌두근본주의가 성장하여 종파갈등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 가혹한 평가일까.(426~427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간디와 맞섰던 네 명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정치가로서의 간디’를 만난다!!
―논쟁과 대립을 통해 본 인도 독립의 역사와 쟁점들!!
이 책 [간디와 맞선 사람들]은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간디와 함께 투쟁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웠던 네 명의 인물들(빔라오 람지 암베드까르, 수바르 찬드라 보세, 무함마드 알리 진나, 비나약 다모다르 사바르까르)을 통해 인도 독립의 과정과 그 속에서 제기된 쟁점들을 살피는 책이다. 흔히 인도의 독립은 간디가 이끈 비폭력저항 운동이 이루어낸 성과이며, 따라서 인도 독립의 공은 대부분 간디에게 있는 것처럼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인도의 독립을 위해 간디만큼이나 열정적으로 투쟁했던 인물들이 많았고, 그 방향과 방식은 많은 경우 ‘위대한 성인’ 간디와는 달랐다.
불가촉천민 문제의 해법을 놓고 간디와 맞섰던 암베드까르, 독립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동원하고 누구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면서 간디의 비폭력투쟁에 비판적이었던 보세, 간디와 국민회의가 힌두 중심의 국가를 만들려 한다며 무슬림 국가의 분리 독립을 위해 힘썼던 진나, 반대로 간디가 친무슬림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하며 ‘힌두스탄’(힌두의 국가) 건립을 위해 애썼으며 끝내 간디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기까지 했던 사바르까르. 이 네 명의 인물들은 모두 간디의 위대함에 존경을 표하고 인도 독립에 있어서 간디가 가진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간디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맞서고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연구교수로 인도의 식민지 시기와 독립과정에 대해 10여 년간 꾸준히 연구를 지속해온 저자 박금표는 오랜 연구의 성과들을 토대로 이 네 명의 인물, 그리고 그 맞섬의 대상이었던 간디라는 인물을 통해 영국에 맞선 인도의 투쟁과 독립의 역사를 꼼꼼하게 직조해 내고 있다.
이렇게 여러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대립하고 논의했던 과정을 살피면서 저자는 인도라는 거대한 아대륙이 ‘독립’이라는 대의를 달성하는 것과 함께, 내부의 첨예한 갈등을 해결해야 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힌두 전통에서 비롯된 카스트제도의 문제, 다양한 종교·민족간 갈등의 문제 등. 간디는 때로는 대화와 청원으로, 때로는 기도와 단식으로, 때로는 비폭력 실천으로 이렇게 첨예하고 종종 극단적인 폭력 사태에 이르기도 하는 입장 차이들을 한데 모아나갔다. 하지만 이런 ‘마하트마’의 모습은 어떤 이들에게는 답답함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또 다른 폭력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권을 단식을 통해 막아내고, ‘비폭력’과 영국 정부에 대한 청원에만 몰두하는 듯 보이고, 무슬림과 정치적 권력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이면서도, 종교적 관용은 설파하고 싶어 했던 간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네 개의 각기 다른 렌즈를 통해 그 동안 위인전 류의 책들이 소개하지 못했던, ‘정치가’로서의 간디, ‘인간’으로서의 간디를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간디의 반대와 거부 ― 암베드까르와 보세
* 불가촉천민 분리선거제를 둘러싼 대립 : 암베드까르의 경우
간디가 인도인에 대한 차별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은 아프리카에서였다. 1893년 영국 유학을 마치고 변호사 일을 맡아 남아프리카 더반으로 갔을 때, 1등칸 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열차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이후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다가, 22년 후인 1915년에 귀국하여 인도의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귀국 이후 간디는 그동안 입었던 양복을 벗어버리고 인도의 전통 의상인 도띠를 입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외에서 인도인에 대한 불평등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간디와 달리, 불가촉천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미국과 영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인 암베르까르가 처음으로 차별을 느낀 것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바로 인도에서였다. 인도의 촌락에서 불가촉천민은 저수지나 우물, 도로를 함부로 사용할 수도 없었고, 언어와 의복에서도 정해진 규정을 따라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을 어길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정도의 폭력에 마주해야 했다. 불가촉천민에 대한 이런 혹독한 차별 속에서 살다가 미국과 영국의 자유로움을 경험하고 돌아온 암베드까르는 신발과 장신구가 허용되지 않고, 옷도 하체를 겨우 가릴 정도만 허용되는 인도의 불가촉천민 차별에 대한 저항의식을 양복과 넥타이를 통해 드러내면서 불가촉천민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도띠와 양복. 입고 있던 옷만큼이나 간디와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촌락에 대해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간디는 인도의 전통적인 촌락은 스와라지(자치)를 통해 완전히 평등하고 공평한 것으로 복원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인도의 자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바라보았다. 착취와 의존성을 논함에 있어 촌락과 외부의 관계를 문제 삼았을 뿐 촌락 내부의 문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암베드까르는 촌락이 차별의 온상이었으며 시궁창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불가촉천민에게 의존성과 착취의 문제는 외국 지배자와 인도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촌락 안에서 살고 있는 카스트 힌두와 불가촉천민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두 입장의 차이는 1931년 9월 7일 런던에서 개최된 ‘2차 원탁회의’에서 논의된 ‘불가촉천민 분리선거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맞붙게 된다. 인도 통치법의 개정을 논의하는 3차에 걸친 원탁회의에 암베드까르는 불가촉천민의 대표로 참석하여 그동안 무슬림에게 허용되어 왔던 분리선거제를 불가촉천민에게도 부여할 것을 주장했고, 암베르까르의 이런 노력으로 영국 정부는 불가촉천민에게도 분리선거권을 부여한다는 결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간디는 원탁회의의 이러한 결정에 죽음을 불사하는 단식으로 반대한다. 불가촉천민의 대표는 그동안 힌두 사회에서 불가촉천민 문제 개선을 위해 노력했던 간디 자신이며,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 문제는 힌두인들의 각성과 반성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지 인도를 분열시킬 수 있는 방식인 분리선거권 획득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암베르까르는 불가촉천민 분리선거제와 간디의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고, 만에 하나 간디가 죽는다면 발생할 불가촉천민들에 대한 폭력을 생각하면서 분리선거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영국에 대해 비폭력 저항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되었던 간디의 ‘단식’이 암베드까르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는 강압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비폭력과 무력투쟁 : 보세의 경우
간디의 비폭력적 운동 방식에 대해 가장 강력히 맞서 비판했던 사람은 보세였다. 1921년 ‘웨일스 왕자 환영 보이콧운동’을 시작으로 투쟁과 구속을 반복하는 삶을 살았던 보세는 간디가 이끌던 국민회의에 가입하고 1938년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지만, 생애 내내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공감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했다. 간디가 소금행진으로 구속된 이후 석방을 위해 맺은 1931년의 ‘간디-어윈 협정’을 둘러싸고 보세는 간디의 활동과 지도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1941년 독일로 탈출한 이후 방송국과, 인도인들로 이루어진 군사조직 등을 이끌면서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히틀러에게 전쟁을 그만두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철저하고 진실했던 간디의 비폭력과,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파시즘(히틀러, 도조 히데키)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보세의 ‘무장투쟁’론. 이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부딪쳤던 것은 1939년의 국민회의 의장 재선 문제였다. 보세는 1938년 국민의장으로 선출되어 1년 동안 국민회의를 이끌었다. 이 1년의 임기가 끝나고 보세는 1939년 의장직에 대한 선거에 다시 출마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동안 국민회의의 의장 후보는 간디가 직접 선택하거나 간디의 의중을 읽어서 단일 후보를 세운 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식이었고, 1939년 국민회의 의장으로 간디와 국민회의 지도부는 보세가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장투쟁’을 중시하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화’를 지향하며, 간디와 생각이 다름을 공공연하게 밝히는 ‘보세’가 재선에 나섬으로써 의장 선거가 만장일치가 아닌 경선을 통해 치러지게 된 것이다. 국민회의 지도부가 모두 나서서 보세의 후보사퇴를 종용했지만, 결국 경선에서 보세가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에 간디는 “보세의 승리는 나의 패배”를 운운하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보세가 이끄는 국민회의에 남아 있지 말고 나오라는 뉘앙스의 편지를 보세에게 보낸다. 결국 보세 역시 암베드까르와 마찬가지로 간디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국민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독일로의 극적인 탈출을 시작으로 해외 무력투쟁에 전념하게 된다.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서 ― 진나와 사바르까르
* 무슬림 분리 독립의 문제 : 진나의 경우
간디의 마지막 단식은 ‘종파 갈등의 종식과 평화를 위한 단식’이었다(87쪽 간디의 단시에 관한 표 참조). 간디는 힌두와 무슬림은 형제로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수시로 강조했고, 종파간에 폭력사태가 벌어지면 이렇게 단식을 통해 종파간의 화합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인도의 온전한 독립이 아닌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이라는 독립 방식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분리 독립이 되어도 ‘힌두와 무슬림이 형제’이며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간디의 핵심적인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힌두와 무슬림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내지 못한 것은 간디에게 통한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게 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진나다. 진나는 인도 내 무슬림을 대표하는 기관인 ‘무슬림연맹’을 1910년대부터 이끌었던 인물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한 후에는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는 등, 인도 내 무슬림을 대표하여 분리 독립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다. 간디는 분리 독립을 막기 위해 독립 직전인 1944년 9월에 진나를 만나 18일간 협상을 했으나, 결국 진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분리 독립은 현실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진나에게는 처음부터 ‘힌두와 무슬림의 공존’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간디가 인도로 돌아온 해인 1915년 진나는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연차대회를 열 것을 제안하고, 두 단체 사이의 협력방안을 담은 ‘러크나우 협정’이 체결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역할로 “힌두와 무슬림 단합을 위한 최고의 사절”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던 진나는 이후 독립에 이르는 30여 년의 기간 동안 점차 ‘힌두와 무슬림의 분리’라는 생각으로 기울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울어짐에는 간디와 국민회의의 전횡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간디의 귀국에 마중을 나갈 정도로 간디를 환영했던 진나는 이후, 간디가 ‘전인도자치연맹’의 의장이 된 이후 단체의 이름을 ‘스와라즈야 사바’로 바꾸는 독단적인 행위를 하자 ‘자치연맹’에서 탈퇴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진나는 간디의 비협조 운동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간디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간디와 진나의 대립은 1937년의 지방의회 총선에서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의 갈등으로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1937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국민회의가 예상 외의 압승을 거두자 국민회의는 주의 각료를 국민회의에서만 임명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았고, 따라서 무슬림연맹이나 다른 소수 정당은 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으면 정부조직에 참여하는 기대를 버려야 했던 것이다. 선거 전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 사이에 UP주의 각료 두 명 정도를 무슬림연맹에 배정하여 연정을 구성할 것이라는 암묵적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처가 취해지자, 무슬림연맹은 이를 무슬림연맹과 국민회의 사이의 협조를 말살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이 나라에는 국민회의와 영국정부라는 오직 두 개의 정치단체가 있을 뿐”이라는 국민회의 지도부의 발언이 드러낸 편협성은 무슬림연맹으로 하여금 국민회의와 함께해서는 자신들에게 정치적 전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이것이 파키스탄 건립으로 가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 힌두스탄의 건립을 위하여 : 사바르까르의 경우
비록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을 막지 못했지만, 종교적 갈등에 대해 가장 안타까워하면서 무슬림을 포용하고자 했던 인물이 또한 간디였다. 1947년 인도의 펀잡 지역에서 힌두와 시크가 무슬림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파키스탄에 속한 펀잡의 서부에서는 무슬림이 힌두와 시크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47년 9월 1일 캘커타의 한 무슬림의 집에서 단식에 들어갔고, 간디가 단식에 들어간 지 3일 후에 캘커타는 평온을 되찾았다. 또 간디가 이끄는 기도회에서는 힌두 성전의 구절뿐만 아니라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이나 꾸란, 심지어 성경에서 발췌한 기도문을 함께 낭송하기도 했다. 이렇게 기도와 참회, 단식으로 종교간의 화합을 촉구하는 간디의 모습은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간디의 몇몇 행동들은 오히려 종파적 갈등을 부추긴 요인이 되기도 했다. 힌두 사원에서 꾸란이나 성경의 기도문을 낭송하는 행위나 무슬림에 대한 폭력을 막기 위한 단식 등이 힌두근본주의자들을 자극했고, 결국 간디 자신에 대한 암살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힌두근본주의의 중심에 사바르까르가 있었다.
간디가 행한 모든 활동의 근간에 ‘비폭력’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면, 사바르까르는 일생 동안 ‘암살’을 주동하거나 암살에 연루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유학을 위해 영국에 머무르면서 폭탄을 제조하거나 폭탄 제조 방법을 가르치고, 여러 건의 암살사건에 관여하는 등 혁명활동을 벌이다가 구속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이후 1937년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이후 1942년까지 힌두민족주의 단체인 ‘힌두마하사바’의 의장으로 단체를 이끌면서 힌두민족주의의 확산과 힌두 국가(힌두스탄)의 건립을 위한 활동을 주도하게 된다. 특히 세포이항쟁을 다룬 [1857년 인도 독립전쟁], [힌두뜨와의 본질] 등의 저술을 통해 외래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배척하면서 ‘인도’라는 개념을 협의의 ‘힌두’로 변화시키기에 이른다.
사바르까르는 이런 힌두민족주의, 혹은 힌두근본주의 입장에서 간디가 이슬람이나 타 종교를 포용하는 행위를 하는 것에 반대했고, 결국 1948년 1월 30일의 간디 암살사건의 공모자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암살자인 나투람 고드세가 힌두마하사바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고, 간디를 암살하기 전에 사바르까르의 사무실에 들렀으며, 사바르까르가 고드세의 메토 역할을 했다는 사실 등 여러 정황들이 사바르까르가 간디의 죽음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바르까르는 52페이지에 달하는 진술을 통해 자신을 변호했고, 간디를 죽이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법률적 증거의 부족으로 무죄 선고를 받게 된다.
마하트마 간디,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인도의 독립은 간디의 지도하에 벌어진 일사분란한 투쟁의 결과가 아니다. 식민지 시기 인도라는 공간은 신념과 사상,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장이었고, 폭력 또한 난무하던 장이었다. 이 속에서 ‘마하트마 간디’라는 빛나는 이름이 어떻게 인류의 스승으로 우뚝 솟아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이 질문에 “간디와 맞선 그들이 동시대에 있었기에 그리고 그들이 대립했기에 간디의 비폭력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라고 대답한다. “간디의 정신을 받아들여 모두 비폭력에만 매진했다면 간디는 그저 간디로 남았을 뿐 우리에게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려 애썼던 마하트마로 다가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신념과 사상이 부딪치는 장에서 암베드까르, 보세, 진나, 사바르까르 모두 자신의 신념에 따라 끊임없이 무언가와 ‘투쟁’하고 무언가를 ‘쟁취’하려고 했다. 암베드까르에게 그것은 불가촉천민의 폐지였고, 보세에게 그것은 인도의 독립이었으며, 진나에게는 파키스탄의 독립, 사바르까르에게는 힌두를 위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간디에게 투쟁하고 쟁취하려는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간디가 얻고자 한 것이 ‘독립’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의 내면 혹은 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물리치려는 정신, 곧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이 ‘정치가’로서 ‘인간’으로서 그가 보여주었던 흠결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하트마’이자 인류의 스승으로 칭송되도록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몰랐던 ‘정치가로서의 간디’를 만난다!!
―논쟁과 대립을 통해 본 인도 독립의 역사와 쟁점들!!
이 책 [간디와 맞선 사람들]은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간디와 함께 투쟁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웠던 네 명의 인물들(빔라오 람지 암베드까르, 수바르 찬드라 보세, 무함마드 알리 진나, 비나약 다모다르 사바르까르)을 통해 인도 독립의 과정과 그 속에서 제기된 쟁점들을 살피는 책이다. 흔히 인도의 독립은 간디가 이끈 비폭력저항 운동이 이루어낸 성과이며, 따라서 인도 독립의 공은 대부분 간디에게 있는 것처럼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인도의 독립을 위해 간디만큼이나 열정적으로 투쟁했던 인물들이 많았고, 그 방향과 방식은 많은 경우 ‘위대한 성인’ 간디와는 달랐다.
불가촉천민 문제의 해법을 놓고 간디와 맞섰던 암베드까르, 독립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동원하고 누구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면서 간디의 비폭력투쟁에 비판적이었던 보세, 간디와 국민회의가 힌두 중심의 국가를 만들려 한다며 무슬림 국가의 분리 독립을 위해 힘썼던 진나, 반대로 간디가 친무슬림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하며 ‘힌두스탄’(힌두의 국가) 건립을 위해 애썼으며 끝내 간디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기까지 했던 사바르까르. 이 네 명의 인물들은 모두 간디의 위대함에 존경을 표하고 인도 독립에 있어서 간디가 가진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간디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맞서고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연구교수로 인도의 식민지 시기와 독립과정에 대해 10여 년간 꾸준히 연구를 지속해온 저자 박금표는 오랜 연구의 성과들을 토대로 이 네 명의 인물, 그리고 그 맞섬의 대상이었던 간디라는 인물을 통해 영국에 맞선 인도의 투쟁과 독립의 역사를 꼼꼼하게 직조해 내고 있다.
이렇게 여러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대립하고 논의했던 과정을 살피면서 저자는 인도라는 거대한 아대륙이 ‘독립’이라는 대의를 달성하는 것과 함께, 내부의 첨예한 갈등을 해결해야 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힌두 전통에서 비롯된 카스트제도의 문제, 다양한 종교·민족간 갈등의 문제 등. 간디는 때로는 대화와 청원으로, 때로는 기도와 단식으로, 때로는 비폭력 실천으로 이렇게 첨예하고 종종 극단적인 폭력 사태에 이르기도 하는 입장 차이들을 한데 모아나갔다. 하지만 이런 ‘마하트마’의 모습은 어떤 이들에게는 답답함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또 다른 폭력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권을 단식을 통해 막아내고, ‘비폭력’과 영국 정부에 대한 청원에만 몰두하는 듯 보이고, 무슬림과 정치적 권력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이면서도, 종교적 관용은 설파하고 싶어 했던 간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네 개의 각기 다른 렌즈를 통해 그 동안 위인전 류의 책들이 소개하지 못했던, ‘정치가’로서의 간디, ‘인간’으로서의 간디를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간디의 반대와 거부 ― 암베드까르와 보세
* 불가촉천민 분리선거제를 둘러싼 대립 : 암베드까르의 경우
간디가 인도인에 대한 차별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은 아프리카에서였다. 1893년 영국 유학을 마치고 변호사 일을 맡아 남아프리카 더반으로 갔을 때, 1등칸 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열차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이후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다가, 22년 후인 1915년에 귀국하여 인도의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귀국 이후 간디는 그동안 입었던 양복을 벗어버리고 인도의 전통 의상인 도띠를 입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외에서 인도인에 대한 불평등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간디와 달리, 불가촉천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미국과 영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인 암베르까르가 처음으로 차별을 느낀 것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바로 인도에서였다. 인도의 촌락에서 불가촉천민은 저수지나 우물, 도로를 함부로 사용할 수도 없었고, 언어와 의복에서도 정해진 규정을 따라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을 어길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정도의 폭력에 마주해야 했다. 불가촉천민에 대한 이런 혹독한 차별 속에서 살다가 미국과 영국의 자유로움을 경험하고 돌아온 암베드까르는 신발과 장신구가 허용되지 않고, 옷도 하체를 겨우 가릴 정도만 허용되는 인도의 불가촉천민 차별에 대한 저항의식을 양복과 넥타이를 통해 드러내면서 불가촉천민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도띠와 양복. 입고 있던 옷만큼이나 간디와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촌락에 대해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간디는 인도의 전통적인 촌락은 스와라지(자치)를 통해 완전히 평등하고 공평한 것으로 복원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인도의 자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바라보았다. 착취와 의존성을 논함에 있어 촌락과 외부의 관계를 문제 삼았을 뿐 촌락 내부의 문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암베드까르는 촌락이 차별의 온상이었으며 시궁창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불가촉천민에게 의존성과 착취의 문제는 외국 지배자와 인도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촌락 안에서 살고 있는 카스트 힌두와 불가촉천민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두 입장의 차이는 1931년 9월 7일 런던에서 개최된 ‘2차 원탁회의’에서 논의된 ‘불가촉천민 분리선거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맞붙게 된다. 인도 통치법의 개정을 논의하는 3차에 걸친 원탁회의에 암베드까르는 불가촉천민의 대표로 참석하여 그동안 무슬림에게 허용되어 왔던 분리선거제를 불가촉천민에게도 부여할 것을 주장했고, 암베르까르의 이런 노력으로 영국 정부는 불가촉천민에게도 분리선거권을 부여한다는 결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간디는 원탁회의의 이러한 결정에 죽음을 불사하는 단식으로 반대한다. 불가촉천민의 대표는 그동안 힌두 사회에서 불가촉천민 문제 개선을 위해 노력했던 간디 자신이며,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 문제는 힌두인들의 각성과 반성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지 인도를 분열시킬 수 있는 방식인 분리선거권 획득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암베르까르는 불가촉천민 분리선거제와 간디의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고, 만에 하나 간디가 죽는다면 발생할 불가촉천민들에 대한 폭력을 생각하면서 분리선거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영국에 대해 비폭력 저항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되었던 간디의 ‘단식’이 암베드까르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는 강압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비폭력과 무력투쟁 : 보세의 경우
간디의 비폭력적 운동 방식에 대해 가장 강력히 맞서 비판했던 사람은 보세였다. 1921년 ‘웨일스 왕자 환영 보이콧운동’을 시작으로 투쟁과 구속을 반복하는 삶을 살았던 보세는 간디가 이끌던 국민회의에 가입하고 1938년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지만, 생애 내내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공감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했다. 간디가 소금행진으로 구속된 이후 석방을 위해 맺은 1931년의 ‘간디-어윈 협정’을 둘러싸고 보세는 간디의 활동과 지도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1941년 독일로 탈출한 이후 방송국과, 인도인들로 이루어진 군사조직 등을 이끌면서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히틀러에게 전쟁을 그만두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철저하고 진실했던 간디의 비폭력과,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파시즘(히틀러, 도조 히데키)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보세의 ‘무장투쟁’론. 이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부딪쳤던 것은 1939년의 국민회의 의장 재선 문제였다. 보세는 1938년 국민의장으로 선출되어 1년 동안 국민회의를 이끌었다. 이 1년의 임기가 끝나고 보세는 1939년 의장직에 대한 선거에 다시 출마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동안 국민회의의 의장 후보는 간디가 직접 선택하거나 간디의 의중을 읽어서 단일 후보를 세운 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식이었고, 1939년 국민회의 의장으로 간디와 국민회의 지도부는 보세가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장투쟁’을 중시하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화’를 지향하며, 간디와 생각이 다름을 공공연하게 밝히는 ‘보세’가 재선에 나섬으로써 의장 선거가 만장일치가 아닌 경선을 통해 치러지게 된 것이다. 국민회의 지도부가 모두 나서서 보세의 후보사퇴를 종용했지만, 결국 경선에서 보세가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에 간디는 “보세의 승리는 나의 패배”를 운운하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보세가 이끄는 국민회의에 남아 있지 말고 나오라는 뉘앙스의 편지를 보세에게 보낸다. 결국 보세 역시 암베드까르와 마찬가지로 간디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국민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독일로의 극적인 탈출을 시작으로 해외 무력투쟁에 전념하게 된다.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서 ― 진나와 사바르까르
* 무슬림 분리 독립의 문제 : 진나의 경우
간디의 마지막 단식은 ‘종파 갈등의 종식과 평화를 위한 단식’이었다(87쪽 간디의 단시에 관한 표 참조). 간디는 힌두와 무슬림은 형제로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수시로 강조했고, 종파간에 폭력사태가 벌어지면 이렇게 단식을 통해 종파간의 화합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인도의 온전한 독립이 아닌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이라는 독립 방식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분리 독립이 되어도 ‘힌두와 무슬림이 형제’이며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간디의 핵심적인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힌두와 무슬림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내지 못한 것은 간디에게 통한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게 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진나다. 진나는 인도 내 무슬림을 대표하는 기관인 ‘무슬림연맹’을 1910년대부터 이끌었던 인물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한 후에는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는 등, 인도 내 무슬림을 대표하여 분리 독립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다. 간디는 분리 독립을 막기 위해 독립 직전인 1944년 9월에 진나를 만나 18일간 협상을 했으나, 결국 진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분리 독립은 현실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진나에게는 처음부터 ‘힌두와 무슬림의 공존’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간디가 인도로 돌아온 해인 1915년 진나는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연차대회를 열 것을 제안하고, 두 단체 사이의 협력방안을 담은 ‘러크나우 협정’이 체결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역할로 “힌두와 무슬림 단합을 위한 최고의 사절”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던 진나는 이후 독립에 이르는 30여 년의 기간 동안 점차 ‘힌두와 무슬림의 분리’라는 생각으로 기울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울어짐에는 간디와 국민회의의 전횡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간디의 귀국에 마중을 나갈 정도로 간디를 환영했던 진나는 이후, 간디가 ‘전인도자치연맹’의 의장이 된 이후 단체의 이름을 ‘스와라즈야 사바’로 바꾸는 독단적인 행위를 하자 ‘자치연맹’에서 탈퇴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진나는 간디의 비협조 운동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간디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간디와 진나의 대립은 1937년의 지방의회 총선에서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의 갈등으로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1937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국민회의가 예상 외의 압승을 거두자 국민회의는 주의 각료를 국민회의에서만 임명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았고, 따라서 무슬림연맹이나 다른 소수 정당은 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으면 정부조직에 참여하는 기대를 버려야 했던 것이다. 선거 전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 사이에 UP주의 각료 두 명 정도를 무슬림연맹에 배정하여 연정을 구성할 것이라는 암묵적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처가 취해지자, 무슬림연맹은 이를 무슬림연맹과 국민회의 사이의 협조를 말살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이 나라에는 국민회의와 영국정부라는 오직 두 개의 정치단체가 있을 뿐”이라는 국민회의 지도부의 발언이 드러낸 편협성은 무슬림연맹으로 하여금 국민회의와 함께해서는 자신들에게 정치적 전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이것이 파키스탄 건립으로 가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 힌두스탄의 건립을 위하여 : 사바르까르의 경우
비록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을 막지 못했지만, 종교적 갈등에 대해 가장 안타까워하면서 무슬림을 포용하고자 했던 인물이 또한 간디였다. 1947년 인도의 펀잡 지역에서 힌두와 시크가 무슬림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파키스탄에 속한 펀잡의 서부에서는 무슬림이 힌두와 시크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47년 9월 1일 캘커타의 한 무슬림의 집에서 단식에 들어갔고, 간디가 단식에 들어간 지 3일 후에 캘커타는 평온을 되찾았다. 또 간디가 이끄는 기도회에서는 힌두 성전의 구절뿐만 아니라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이나 꾸란, 심지어 성경에서 발췌한 기도문을 함께 낭송하기도 했다. 이렇게 기도와 참회, 단식으로 종교간의 화합을 촉구하는 간디의 모습은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간디의 몇몇 행동들은 오히려 종파적 갈등을 부추긴 요인이 되기도 했다. 힌두 사원에서 꾸란이나 성경의 기도문을 낭송하는 행위나 무슬림에 대한 폭력을 막기 위한 단식 등이 힌두근본주의자들을 자극했고, 결국 간디 자신에 대한 암살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힌두근본주의의 중심에 사바르까르가 있었다.
간디가 행한 모든 활동의 근간에 ‘비폭력’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면, 사바르까르는 일생 동안 ‘암살’을 주동하거나 암살에 연루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유학을 위해 영국에 머무르면서 폭탄을 제조하거나 폭탄 제조 방법을 가르치고, 여러 건의 암살사건에 관여하는 등 혁명활동을 벌이다가 구속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이후 1937년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이후 1942년까지 힌두민족주의 단체인 ‘힌두마하사바’의 의장으로 단체를 이끌면서 힌두민족주의의 확산과 힌두 국가(힌두스탄)의 건립을 위한 활동을 주도하게 된다. 특히 세포이항쟁을 다룬 [1857년 인도 독립전쟁], [힌두뜨와의 본질] 등의 저술을 통해 외래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배척하면서 ‘인도’라는 개념을 협의의 ‘힌두’로 변화시키기에 이른다.
사바르까르는 이런 힌두민족주의, 혹은 힌두근본주의 입장에서 간디가 이슬람이나 타 종교를 포용하는 행위를 하는 것에 반대했고, 결국 1948년 1월 30일의 간디 암살사건의 공모자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암살자인 나투람 고드세가 힌두마하사바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고, 간디를 암살하기 전에 사바르까르의 사무실에 들렀으며, 사바르까르가 고드세의 메토 역할을 했다는 사실 등 여러 정황들이 사바르까르가 간디의 죽음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바르까르는 52페이지에 달하는 진술을 통해 자신을 변호했고, 간디를 죽이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법률적 증거의 부족으로 무죄 선고를 받게 된다.
마하트마 간디,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인도의 독립은 간디의 지도하에 벌어진 일사분란한 투쟁의 결과가 아니다. 식민지 시기 인도라는 공간은 신념과 사상,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장이었고, 폭력 또한 난무하던 장이었다. 이 속에서 ‘마하트마 간디’라는 빛나는 이름이 어떻게 인류의 스승으로 우뚝 솟아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이 질문에 “간디와 맞선 그들이 동시대에 있었기에 그리고 그들이 대립했기에 간디의 비폭력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라고 대답한다. “간디의 정신을 받아들여 모두 비폭력에만 매진했다면 간디는 그저 간디로 남았을 뿐 우리에게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려 애썼던 마하트마로 다가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신념과 사상이 부딪치는 장에서 암베드까르, 보세, 진나, 사바르까르 모두 자신의 신념에 따라 끊임없이 무언가와 ‘투쟁’하고 무언가를 ‘쟁취’하려고 했다. 암베드까르에게 그것은 불가촉천민의 폐지였고, 보세에게 그것은 인도의 독립이었으며, 진나에게는 파키스탄의 독립, 사바르까르에게는 힌두를 위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간디에게 투쟁하고 쟁취하려는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간디가 얻고자 한 것이 ‘독립’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의 내면 혹은 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물리치려는 정신, 곧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이 ‘정치가’로서 ‘인간’으로서 그가 보여주었던 흠결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하트마’이자 인류의 스승으로 칭송되도록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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