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5.조선역사문화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2021)

동방박사님 2024. 5. 1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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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70년 전 살인사건으로 본 조선의 사법 시스템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원님 재판은 잊어라

우리가 몰랐던 조선 왕조 500년의 ‘버팀목’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은 경남 안음현(현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1751년 두 기찰군관이 살해된 사건의 수사, 재판, 처형 과정을 담았다. 피해자가 역사적 인물도 아니고, 사건의 파장이 크지 않았으니 책의 소재 자체야 심상하다. 한데 지은이는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의 형사 시스템을 손에 잡힐 듯이 그려낸다. 현장검증을 할 때 의생, 율관과 함께 검시를 할 오작인을 반드시 대동해야 했고(69쪽), 용의자를 신문할 때 쓰는 장杖의 규격, 때리는 횟수와 부위도 정해져 있었다(122쪽). 또한 사인을 교차 확인하기 위한 복검覆劍,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공동 신문인 동추同推를 포함한 3심제도가 확립되어 있었고(166쪽), 여기에 더해 국왕만이 사형을 명할 수 있도록 했다(97쪽). 이를 보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보는 ‘네 죄를 알렷다’식의 우격다짐 재판은 오해라는 것이 드러난다. 한마디로 조선의 사법제도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공정성 확보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 책은 여느 역사 교과서에선 보기 힘든, 조선 왕조가 500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한 자락이 완비된 시스템이었음을 보여준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01_안음현, 기질이 억세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땅
02_사건 전 상황의 재구성
03_검시 원칙과 과정
04_검시 결과
05_현장조사에서 자백까지, 신문의 원칙
06_첫 번째 피의자 신문
07_두 번째 피의자 신문
08_복검과 동추
09_경상감영의 판단과 사건의 결말

저자 소개 

저 : 이상호
 
계명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정제두의 양명학의 양명우파적 특징》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책임연구위원으로 근무하면서, 민간 소장 기록유산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고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 조선시대 민간에서 기록된 일기들을 창작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스토리 테마파크〉를 기획했다. 전통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을 일반인들과 공유하고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모색...

책 속으로

현내에 비치되어 있는 〈검시장식檢屍狀式〉에 따라 시신을 검시한 후, 그에 대한 초검관의 판단에 해당하는 〈시장屍帳〉과 살인사건에 대한 초동수사 보고서이자 종합 의견서에 해당하는 〈초검발사初檢跋辭〉(이 두 보고서를 합해 검안檢案이라고 했다)도 써야 했다. 만약 이 보고서들의 내용이 미진하거나 약간만 의심이 가도 상급기관에서 재조사 명령이 떨어지거나 차사원差使員이 파견되기 일쑤였다.
--- p.21

현청 내에서는 형의 집행을 책임지는 형방과 검시에 특화되어 있는 오작인, 의생, 율관들부터 모아야 했다. 그리고 현청에 소속되지 않은 인물들 중심으로 ‘검시 참여인’(참검인)들도 모아야 했다. 특히 살해당한 김한평과 김동학의 가족이나 친척은 필히 입회시켜야 했다.
--- p.22

관료에 대한 평가도 범죄가 발생한 후 이를 잘 처리하는 사람보다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교화하는 사람을 더 높게 평가했다. 지방 수령을 평가하는 일곱 가지 항목인 수령칠사守令七事에 들어있는 학교흥學校興(교육을 융성하게 함)이나 간활식奸猾息(토호와 아전들의 간사한 업무 처리를 그치게 하는 것), 사송간詞訟簡(소송을 빠르게 처리함)과 같은 내용도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p.43

《영총》에 따르면 김산군 소속 기찰군관들은 매년 교체를 원칙으로 했다. 기찰은 항시적 신분이 아니라, 매년 선임되는 방식인 듯하다. 특히 해마다 예납例納, 다시 말하면 기찰군관이 되는 조건으로 일정 정도의 대가를 군郡에 납부해야 했다.
--- p.45

만약 뇌물에 대한 분배 합의 없이 도기찰과 사후가 이 뇌물을 독식하려 한 것으로 비쳤다면, 김태건과 구운학의 불만은 극에 달했을 수도 있다. 특히 이들이 예납까지 내면서 기찰군관 자리를 유지하던 사람들이라면, 이 돈은 그들의 생계수단일 수도 있었다.
--- p.(60

의생이나 율관이 의료지식과 법률지식으로 보좌했다면, 오작인은 직접 시신을 만지면서 검시를 진행하는 일을 맡았다. 원칙적으로 검시는 지방관의 일이었지만, 지방관이 직접 시신을 닦고 상처 크기를 재며 사망 원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수령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들이 바로 오작인이었다.
--- p.69

지역에서는 관노 가운데 시신을 옮기거나 염을 해 주는 일을 맡은 사람이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역에서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그 일이 맡겨진 것으로 보인다.
--- p.70

참검인들은 함께 움직여야 했고 잠시라도 그 자리에서 이탈할 수 없도록 했다. 심지어 이들은 검시를 할 동안 타인을 만나지도 않고 뇌물도 받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검시가 끝난 후에는 검시 관련 서류인 〈검시장식〉에 수결을 함으로써, 그 검시의 객관성을 확인해 주었다.
--- p.71

현대 검시가 주로 시신의 해부와 약물검사 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면, 《신주무원록》은 주로 관찰, 그중에서도 색을 관찰하는 방법으로 사인을 규명했다. …… 상흔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떠한 법물을 사용해야 할지도 규정하고 있다. 시신을 닦고 상처가 제대로 드러나게 하거나 독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법물은 과학적 검시의 기반이 되었다.
--- p.75

〈검시장식〉이다. 흔히 〈시장식屍狀式〉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건은 세종 때 《신주무원록》이 발간된 1439년 2월 이를 인쇄하여 배포하도록 했다. …… 일종의 ‘문서 형식(표)’으로, 이를 인쇄하여 각 관청이나 고을 등에 비치하였다가 검시를 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여기에 따라 검시를 진행하고 그 위에 검시 결과를 기록하여 제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검시장식〉은 초검과 복검에 모두 동일한 양식을 이용해서 검시를 진행하도록 했던 일종의 지침서다.
--- p.80

조선시대의 살인사건은 역모와 강상綱常을 범한 죄 다음으로 중범죄였다. 살인죄는 정상을 참작할 만한 사정이 없다면 사형으로 처벌했다. 살인범에 대한 사형, 곧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형에 대해서는 오직 국왕이 최종적으로 확인해서 처결을 명할 수 있었다. …… 이 때문에 살인사건의 경우 왕명을 받은 관리(지방의 경우 지방관)가 직접 사건을 조사해야 했고, 수사 과정과 신문, 검시 결과 등을 비롯한 모든 내용들은 반드시 조정까지 보고해야 했다.
--- p.97

사건이 발생하면 관할 지방관은 범죄 사실 입증을 위해 검시와 정황 조사, 관련인 증언 청취, 혐의자 대상 신문 등을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해당하는 검안과 신문 보고서 등을 작성하여, 역시 행정과 사법 업무가 통합되어 있는 2차 책임자인 상급기관의 감사에게 보내야 했다. 이렇게 되면 감사는 초검관의 보고를 기반으로 2차 검시와 신문 등을 진행하게 하는데, 이때부터는 관할 지역 지방관을 넘어 감사(관찰사)의 시간이 된다.
--- p.99

임진왜란 이후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재난 상황에 대비해서 각 사찰을 중심으로 승병을 상시 조직으로 운영했다. …… 장수사 정도의 절이라면 안음현의 필요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발적이라면 몰라도, 계획까지 세워 기찰군관들을 습격하기로 했다면, 장수사 바로 뒤에서 이를 결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에 말이다.
--- p.103

신장은 신문할 때 사람을 때려 고통을 받게 할 목적으로 만든 일종의 신문용 몽둥이다. 신문할 때 허벅지에 장을 끼워 고통을 가하는 이른바 ‘주리’는 법에 규정되어 있던 신문 방법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방법이 동원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조선시대에도 용의자를 신문할 경우에는 《경국대전》이나 《대명률》 등에 규정되어 있는 방법을 따르도록 했다.
--- p.106

신장, 즉 신문을 위한 장은 형벌용이 아니라 아직 범인이 확정되지 않은 용의자를 신문하기 위한 것이므로 자백은 받으면서도 억울한 피해는 없어야 한다는 이념을 담아 형벌용 장보다는 좀 더 작게 만들었다.
--- p.108

《경국대전》은 타격 부위를 엄격하게 규정하여 “하단으로 무릎 아래를 치되, 정강이에는 이르지 못한다”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주로 종아리 부분만 때릴 수 있었다. 엉덩이 부위를 타격하다가 장기 등이 파열되거나 과다출혈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에는 고문을 위해 때릴 수 있는 횟수도 정해져 있었다. 종아리 부분만 때리더라도, 한 번 신문할 때 30대 이상 칠 수 없었고 신장을 사용해서 진행하는 신문은 하루 1회로 제한했다. 하루에 한 번, 그리고 그 한 번도 30대 이상을 때리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 p.110

김태건은 진범으로 구운학을 지목하고, 구운학은 김태건을 지목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서로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 p.122

안음현감은 주범·공범의 문제만 남았을 뿐, 범인은 밝혀진 것이라 생각했다. 안음현감은 김해창과 박상봉의 진술을 통해 김태건과 구운학이 뇌물 수수에 직접 관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도적 떼의 이야기나 장수사 승려들이 김동학에게 맞았다는 진술 역시 구운학이 꾸며 낸 것임을 확인했다. 김태건과 구운학은 더 이상 빠져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경상감영으로 보낼 보고서 작성만 남아 있었다.
--- p.139

복검은 살인사건을 대하는 조선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는 절차다. 검시를 최소 두 번 이상 진행함으로써, 사인을 교차 확인하려 한 제도다. 이를 통해 조사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한 차례의 검시만으로는 놓칠 수 있는 단서들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복검은 세종 때부터 왕명으로 시행한 절차로, 이후 조선시대 살인사건 조사의 원칙이 되었다.
--- p.143

조선시대에는 형사사건을 심리할 때 동추는 복검만큼이나 중요했다. 동추란 중형, 특히 곤장으로 때리는 장형 이상의 형이 예상되는 범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관리 두 명이 ‘함께 신문[同推]’하도록 규정된 제도였다. 매질에 해당하는 태형 정도의 가벼운 형벌은 군현 단위의 지방관이 직접 판결하고 형량을 결정해서 집행할 수 있었지만, 사람의 목숨에 위해를 가할 수 있거나, 신분이 일시 정지되고 노동형에 준하는 벌을 일정 기간 받아야 하는 도형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완전하게 추방되는 유배형 등에 대해서는 군현 단위 지방관 재량만으로 판결하고 처결해서는 안 되었다.
--- p.149

문제는 동추가 중범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취조 과정에서의 인권은 그리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특히 동추는 범인을 확정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범죄를 행한 사람이 자기 범행을 시인하는 ‘자백’이 다른 어떤 신문에서보다 중요했다. 본인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 죽음으로 다스리는 것은 왕도정치를 행하는 군주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추에서도 신장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 p.153

조선시대에는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까지 음식을 주어야 한다는 인권 개념이 있던 시기도 아니다. 대부분의 감옥 생활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고참 죄수는 신참 죄수가 옷이나 음식 같은 것을 들여오지 않으면, 칼과 족쇄도 벗겨 주지 않고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괴롭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 p.157

경상감사 조재호는 이 사건을 원한도 없이 오직 금전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으로 규정한 후, “인정人情과 사리事理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했다. 돈 1냥 5전 때문에 두 명이나 되는 생명을 앗아간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이는 유학이라는 국가 이념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일로 평가했다.
--- p.163

고복은 살인사건과 같은 중범죄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점검하는 단계였다. 동추를 행하는 이유와 동일한 필요성에 따른 것으로, 신문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한번 더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고복관으로는 초동수사관인 안음현감 심전도 배제되었고, 복검관과 동추에 참여한 함양부사도 배제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선이해가 없는 단성현감과 거창부사가 고복관으로 내정되어 죄인에 대한 신문을 다시 진행했다.
--- p.166

김태건의 죄상에 대한 보고는 왕에게 직접 올라갔을 것이다. 장계에 기재된 날짜가 음력 10월 12일이었으니, 경상감영 차원에서는 대략 4개월에 걸친 안음현 살인사건이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경상감영에서의 조사까지 완결되었고, 조정에서 내리는 처분 결정만 남아 있었다.
--- p.171

형량이 결정되면 그 결과는 주청한 일을 허가하는 ‘판부判付’로 경상감영에 내려지고, 그에 따라 김태건은 경상감영에서 사형을 당해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경상감영의 사형 집행은 대부분 관덕당觀德堂에서 이루어졌다. 보통 한양에서 사형장 터는 숙살肅殺의 방위로 여기는 서쪽을 많이 선택했으며, …… 관덕당도 남서쪽에 가까운 지역으로, 약간 넓은 터를 잡아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일반인들로 하여금 범죄에 대한 경계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이 장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 p.174

조선시대에는 급하게 사형에 처해야 할 정도의 죄질이 아니면 대부분 기일을 기다려 한꺼번에 사형을 집행했다. 참형도 ‘대시待時 참형’과 ‘불대시不待時 참형’으로 나눈 것이다. 대부분의 참형은 ‘대시 참형’인데, 이는 시간을 기다려서 참형을 집행한다는 의미다. 대시 참형의 경우에는 보통 추분에서 이듬해 춘분까지, 다시 말해 흔히 숙살의 기운이 센 시기를 기다려 날짜를 정했다.
--- p.175

우리가 재판관이 되어 변호인으로부터 관련 문제 제기를 받는다면, 김태건과 구운학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수사 진행의 객관성 문제와 확인이 필요한 살해 동기에 대한 조사, 그리고 핵심 증거물 등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태과 구운학이 현재 사법시스템에서 재판을 받았다면, 그들은 어쩌면 목숨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p.188

출판사 리뷰

중앙이 아닌 지방, 고관대작이 아닌 민초의 이야기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실록에서 개인 문집, 족보, 금석문까지 조선의 실체를 보여주는 기록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기록’은 일부만 향유되고 있다. 서울 경복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왕과 고관대작이 무슨 일을 행했는지가 조선사의 핵심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사의 현장으로’는 그러한 편향에서 벗어나고자 기획된 시리즈다. 중앙이 아닌 지방의 생생한 이야기, 고관대작이 아닌 민초의 살아 숨쉬는 이야기를 펼쳐보이고자 한다. 그동안 외면받아온 ‘지방’과 ‘민초’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좀더 풍성한 조선사와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소하지 않은 역사로 조선사의 재미와 정보를 더하다

역사는 영웅호걸이나 뛰어난 사상가, 예술가들 중심으로만 흘러간 게 아니다. 전쟁 등 굵직한 사건, 혁명적 조치, 빼어난 걸작으로만 이뤄진 것도 아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역사가 여울져 흘러오긴 했지만 민초들, 일상을 살펴야 역사의 전모를 온전히 보는 데 도움이 된다. 망원경으로 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큼이나 현미경으로 시야 밖을 탐색하는 것도 필요하다. 바로 미시사가 필요해지는 대목이다.
거시적인 역사적 구조보다는 인간 개인이나 소집단의 삶을 깊이 파고드는 미시사는, 역사라는 큰 그림의 여백을 메우는, ‘사소하지 않은 역사’이다. 우리는 이미 《마르탱 게르의 귀향》, 《치즈와 구더기》 등 흥미로운 미시사 서적을 접한 바 있다. 270년 전 경북의 한구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파고든 이 책도 그에 못지않은 재미와 정보를 제공한다.

살인사건 탐사보도를 보는 듯한 생동감

책은 사건 당시 경상감사를 지낸 조재호의 업무일지 《영영일기》에 포함된 《영영장계등록》의 글 한 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한데 추리소설이나 살인사건 탐사보도를 보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사건 현장에 관한 풍경 묘사도 그렇지만 검시 보고서와 신문 기록을 소개하는 대목은 생생하다 못해 긴박감을 준다. 이를테면 “김태건이나 구운학은 귀 뒷전으로 바람을 가르는 신장의 소리를 듣는 순간, 종아리가 터져 나가면서 뼛속까지 치밀어 오르는 고통에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신장으로 때리는 횟수가 늘면 늘수록 종아리 부위는 피가 낭자했을 것이고, 그 순간 나졸들은 잿가루를 뿌려 대면서 피의 흔적을 감추려 했을 것이다”(114쪽)는 대목이 그렇다. 당초 범행의 목격자인 기찰군관 김태건과 구운학이 각각의 신문 과정에서 서로를 진범으로 지목하면서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는 모습(123쪽)도 읽는 이의 눈길을 끈다.

든든한 저자의 꼼꼼한 연구, 탄탄한 저술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근무하는 지은이는 무명인이나 지방사람들의 일기와 기록을 가장 많이 읽은 연구자라 할 수 있다. 그의 내공은 유생들의 일기에서 조선의 일상을 길어낸 전작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바 있지만 이 책에선 언뜻 단순해 보이는 시골의 살인사건을 통해 조선의 사법제도를 조망해냈다. 경상감사의 일지를 뼈대로 하면서 실록, 당대의 법의학서인 《무원록》, 경상감영에서 펴낸 행정 실무서인 《영총》 등 다양한 사료와 선행연구를 활용해 조선의 형사 시스템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사건의 빌미가 된 뇌물 1냥 5전이 요즘 시세로 백만 원 정도 된다든가, 지방수령의 평가기준으로 토호와 아전들의 간사한 일 처리를 그치게 하는 ‘간활식奸猾息’이 있었다든가, 검시 도구인 법물에 은비녀, 술지게미, 식초, 소금 등이 있었다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러기에 권말에 수록된 ‘주석’ 한 줄도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