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4.조선역사문화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1792년 만인소운동 (2024)

동방박사님 2024. 5. 1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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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최초의 상소, ‘만인소’
조선 ‘공론 정치’의 생생한 복원

현미경으로 보는 조선사


조선은 우리가 무심코 상상하는 그저 그런 전제 왕권이 지배한 나라가 아니었다. “인심이 동의하는 바를 공론이라 하고, 공론이 있는 바를 국시國是라고 한다”라는 이이李珥의 말처럼 조선은 공론정치를 지향했고, 이로 인해 관료를 넘어 재야 유생들에게까지 상소를 올리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1565년 22차례에 걸쳐 연명 상소운동인 ‘백인소’를 시작으로 집단 상소가 이어졌다. 조선 시대 일상에서 현대적 의미를 길어내는 작업에 천착하고 있는 지은이는 류이좌(추정)의 《천휘록》을 바탕으로 1792년 조선 최초의 ‘만인소’를 꼼꼼하게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권점圈點(벼슬아치 후보자 이름 밑에 지지를 표시하는 점 찍기), 근실謹悉(상소 남발을 막기 위한 성균관의 확인 절차) 등 여느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조선사의 내밀한 사실을 만날 수 있다.

목차

머리말_열려 있는 청원문화
프롤로그_어머니의 눈물
편지_아니 갈 수 없는 길|어머니의 눈물_위험한 길

01 도산별과_새로운 희망

영남_반역의 땅|정조의 즉위_희망과 절망 사이|도산별과_새로운 영남의 희망

02 반발_류성한의 상소

발화_류성한의 상소|비판_당파를 넘어|확산_윤구종 사건|의도_정조의 생각

03 분노_공론의 수렴과 소행

소식_영남의 행보|의결_여론 형성과 도회|상소운동_공론이 갖는 권위|소행_상소운동의 시작|지역_배소 유생들의 활약

04 소청_본격화된 상소운동

조직_소두와 공사원|운영_상소 준비와 예산|소두의 재선출_이념의 강조

05 1차 봉입_이산의 눈물

근실_상소를 막는 빌미|실랑이_그리고 묘수|봉입_왕의 눈물|비답_아픔과 공감

06 회유_그리고 2차 상소

성균관_근실불허의 책임|회유_내려진 관직|고민과 출사_늦어지는 상소운동|재소 준비_명분과 소두의 재선출|부조_도움도 명분에 맞게|2차 봉입_형식적 비답

07 삼소_시도와 좌절

왕의 회유_이제는 돌아갈 때|왕이 내린 비용_받아도 문제, 받지 않아도 문제|설득_명분에 따른 거부|갈등_명분과 현실|말미_사도세자의 기일|중지_그리고 낙향

에필로그_만인의 청원, 만인소운동
영남_만인소 이후|배경_조선의 권력과 상소의 권위|의미_만인소의 가치와 영향

저자 소개

저 : 이상호
 
계명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정제두의 양명학의 양명우파적 특징》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책임연구위원으로 근무하면서, 민간 소장 기록유산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고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 조선시대 민간에서 기록된 일기들을 창작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스리 테마파크〉를 기획했다. 전통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을 일반인들과 공유하고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모색...

책 속으로

그해(1776년) 3월 10일,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李?’이 왕위에 오르자 영남은 이를 새로운 기회로 여겼다. 새로 즉위한 정조는 당연히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가능성이 높았고,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된 기호 노론에 대한 타격으로 이어지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p.15

이인좌의 난 진압을 기념하면서도 호서가 아닌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웠다. 그리고 영남 인사에 대한 출사 자체를 금지했다. 안 그래도 막혀 있던 출사 길이 역향逆鄕이라는 오명으로 인해 아예 마음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 p.29

1776년 정조가 즉위했고, 그는 채제공(1720~1799)을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도사로 삼아 아버지의 죽음에 직접 관계된 인물들을 처결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의 즉위를 반대했던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제한된 처결이었지만, 이 자체만으로도 영남은 새로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 p.31

노론을 견제하고 정조의 힘을 지지해 줄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 채제공이 정조와 함께 적극적으로 영남을 향해 시선을 돌렸던 이유이다. 그는 정승이 되자마자 이인좌의 난으로 차별받던 영남의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신원하고, 영남 지역을 덮은 역향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정조는 영남이야말로 사학邪學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 학문의 순수성을 공공연하게 노론에게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1792년 3월, 도산서원에서 치러진 ‘별과’는 바로 이러한 노력이 만든 결과였다
--- p.33

류성한의 상소는 사도세자를 생각하느라 경연까지 소홀히 하는 정조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특히 여기에서 방점은 ‘경연 참석 소홀’ 그 자체보다 ‘목이 메어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사도세자를 생각하는 마음’에 찍혔다
--- p.41

정조는 류성한의 처벌 문제에 대해 ‘왕의 사적 복수가 아닌 국가의 역적이 되었을 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류성한에 대한 처벌이 정조 자신을 비판한 사람에 대한 개인적 처벌이 아니라, 국가의 역적이라는 판단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그 처벌의 당위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 p.58

류성한의 상소는 정조를 정확하게 겨냥했는데, 이는 도산별과를 통해 보여 준 영남에 대한 정조의 따뜻한 시선을 직접 겨냥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류성한의 상소가 궁극적으로는 영남을 겨냥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제 영남도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p.61

윤4월 4일 김한동은 자신이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는 기별을 받았고, 기록으로 볼 때 그가 류성한의 상소 사태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 김한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에 차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는 쪽으로 의견을 나누었고, 자신이 출입하고 있던 삼계서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를 열기로 약속했다
--- p.62

이날 바로 삼계서원에 통문을 보냈고, 이틀 뒤인 윤4월 6일 귀향하는 참봉 박한동 편에 삼계서원에 보낸 통문을 베껴 상주에 있는 도남서원道南書院에도 보냈다. …… 이 통문은 성균관에서 보낸 공식 통문은 아니었고, 한양에 체류하던 영남 출신 인사들이 상황을 공유하고 함께 상소운동을 진행할 것을 제안하는 통문이었다
--- p.64

윤4월 9일, 삼계서원에서는 안동을 비롯한 인근 현에 빠르게 이 소식을 알렸고, 마침내 윤4월 10일 삼계서원 도회가 열렸다. 이날 삼계서원 관물루에는 70여 명의 영남 유림이 참석했다. …… 도회 전부터 김한동은 진신들 중심으로 사도세자 이후 30년간 응집된 의리를 펼쳐야 한다고 여론을 모은 데다, 이 말을 들은 유생들[장보章甫] 역시 자신들도 사양하지 않고 동참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태 온 터였다
--- p.66

류성한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도회를 통해 의결된 상소운동 관련 사안들을 통문으로 제작해 먼저 지역 거점 서원들로 보냈다. 이 통문에는 윤4월 17일 출발한 후 20일 충주에서 모여 한양으로 들어가는 일정으로 공지했다
--- p.67

윤4월 17일이 되면 이미 영남의 상소운동은 의견 수렴 단계를 넘어 행동하는 단계로 이행되고 있었다. 홍문관 수찬으로 제수되어 윤4월 12일 한양으로 먼저 올라간 김한동의 뒤를 이어 대부분의 영남 인사들의 출발 준비는 윤4월 17일 끝이 났다. 윤4월 18일 김희택과 김희주가 삼계서원에서 출발했다. 이들이 풍기향교에 도착하니 이미 그곳에는 류회문이 사빈서원과 호계서원, 구계서원의 명첩과 상소 비용 25냥을 가지고 그 전날인 17일부터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p.70

조선은 이러한 상소를 특정인에게만 열어 준 것이 아니라, 원론적으로는 글을 할 수 있고 유학적 이념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올릴 수 있도록 열어 놓았다. …… 이러한 특징은 조선이 지향했던 ‘공론에 의한 정치’라는 당위로 이어졌다. “인심이 동의하는 바를 공론이라 하고, 공론이 있는 바를 국시國是라고 한다”라는 이이李珥의 말처럼 조선은 공론정치를 지향했고, 이로 인해 관료를 넘어 재야 유생들에게까지 상소를 올리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 p.73

1565년 100명 이상의 지식인들은 22차례에 걸쳐 연명 상소운동인 ‘백인소’를 올려 역사를 바꾸었고, 이 전통은 1650년부터 1679년에 이르기까지 1천 명 가까운 지식인들이 연명한 ‘천인소’로 이어졌다. 100여 년 단위로 100명에서 1천 명으로 상소 연명자가 늘어났고, 천인소 이후 약 100여 년 정도 지나 1만여 명이 연명한 상소가 올라갔다
--- p.74

1792년 상소는 …… 최초로 1만여 명이 넘은 상소운동이었다. 당시 정조와 채제공이 영남을 통해 기호 노론을 견제하려 했다면, 영남의 사론士論이 만들어 내는 공론이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사론은 당연히 많은 선비나 유생들의 참여가 필요했고, 당시 금기시되었던 사도세자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기존 수천 명보다 더 많은 이들의 참여가 필요했다. …… 규모에 있어서 ‘많은 사람의 참여’와 속도에 있어서 ‘빠른 봉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했다
--- p.74

당시 소임을 맡아 영남에서 직접 올라온 인원은 25명이었으며,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반촌에서 미리 상소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인원들 중에서도 이날 10명이 참가했다. …… 경상좌도의 중심인 안동에서만 7명, 그리고 경상우도의 중심인 상주에서 6명이 참여했다. 그 외에 작은 군현들에서 2~3명, 적게는 1명씩 참가하기도 했다. 대체로 경상도 북부 지역 중심이었는데, 지역의 크기와 학단 등에 따라 안배된 듯했다
--- p.87

이들이 만든 명첩은 상소의 위조 여부 등을 판단하는 데 중요했다. 이 때문에 반드시 자필 서명과 수결을 원칙으로 했다. …… 1792년 영남의 상소운동 관련 모든 기록에서 명첩이 문제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배소 유생이 마치 군사작전 하듯 일사불란하게 연명과 수결을 받고, 이를 정리해서 한양으로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 p.90

소청은 상소운동의 효율성을 감안해야 했다. 궁궐과 가까우면서도, 지역 유생들에게 익숙한 곳이 좋았다. 이 조건이 가장 잘 충족되는 곳이 바로 성균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촌이었다. 반촌의 사현사동四賢祠洞에 있는 반인도청소?人都廳所를 빌렸다
--- p.96

소두를 선출하기 위해 보통 3배수를 천거받았고, 투표를 통해 그들 가운데 한 명을 선출했다. …… 이날 회의에서 천거된 3명은 영주 출신의 전 지평 성언집(1732~1812)과 상주 출신의 전 장령 남필석(1738~1813), 그리고 수찬 김한동이었다. 대체로 50대에서 60대의 관직 경험을 가진 진신들이었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영남 전체 여론을 대표하면서도 과거시험을 통해 검증된 사람을 선출하려 했던 의도였다
--- p.98

상소초를 짓고 이를 기반으로 청원문을 쓰는 업무인 제소製疏, 청원문과 연명자 명단을 옮겨 적어 왕에게 올릴 전체 상소 문건을 만드는 사소寫疏, 그리고 소두를 보좌하면서 상소운동을 조율하고 진행하는 장의掌議는 소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또한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관행管行, 그리고 회의에 참여해 방향을 설정하고 필요한 인력 수요에 대응하는 소색疏色도 중요했다. 더불어 사무 업무가 많아지면서 이를 담당하는 도청都廳의 직위를 두기도 했다
--- p.101

당시 제소들은 당연히 상소초―소본으로 채택되기 전의 상소문 원고―를 지어야 했지만, 제소가 아닌 류규가 지은 상소초가 세 번째 소본으로 채택되었다. 이로 보아 제소들이 청원 내용 정리 및 소본 작성을 주도하지만,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상소초를 작성할 수 있었다
--- p.103

11축의 종이를 구입한 비용으로 25냥을 지불하는데, 이는 2,200장의 종이를 구입하는 데 한양의 괜찮은 기와집 한 채 값의 5분의 1~4분의 1에 해당하는 비용을 쓴 셈이다. 특히 1만 명 이상이 연명한 상소는 그 길이만 해도 100미터가 조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 p.105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유생들이 상소를 봉입하기 위해서는 성균관의 확인을 받아야 했다. 상소의 형식과 내용 등을 일차로 검토함으로써, 왕에게 올라오는 상소가 남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절차가 1773년 만들어진 ‘근실’이었다. …… 진신이 소두인 경우에는 근실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빠른 상소 봉입이 가능했다
--- p.110

연명자 수는 최종 1만 57명으로 확인되었다. 왕에게 올리는 상소에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조선 최초의 상소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영남 남인들의 한과 마음을 담은 소본도 완성되었 다. “경상도 유학幼學 이우 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는 심정으로 상소를 올립니다”라는 문장을 담은 상소 내용은 대략 다섯 가지로 압축된다
--- p.118

창덕궁 앞에 도착하니, 진시辰時(오전 7~9시) 초였다. 1792년 윤4월 27일이 양력으로는 6월 16일이니, 이때쯤이면 이미 날은 훤하게 밝았을 시간이었다. 상소를 받드는 이들이 돈화문 바로 앞에 상소문을 넣은 상자를 안치하고, 그 바로 뒤에 소두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소두 뒤로 26명의 유생들만 대궐 앞에 엎드렸다
--- p.121

오늘의 이 거사는 비록 유생들 상소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진신들과) 합동으로 올리는 상소이기 때문에 ‘근실’의 유무는 상관이 없습니다. 게다가 벌써 여러 차례 태학(성균관)에 통문을 넣었지만 태학에서는 끝끝내 근실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1만여 명이 상소에 연명했는데, 어떻게 근실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구애되어 상소를 올릴 수 없다는 말입니까?
--- p.123

임금이 희정당으로 거둥했다. …… 정조는 서쪽으로 놓인 보좌에 단정하게 앉았다. …… 정조가 승선을 불러 낮은 목소리로 뜻을 전했다. …… “지난번 이지영 상소에는 내가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 리 길을 달려와, 안에 있는 진실한 마음을 모두 쏟아 내니, 그대들의 뜻을 얼굴을 보고 직접 들어야 할 것 같아 불렀다. 소두는 전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겠다”라는 임금의 뜻이 승선의 입을 통해 나왔다
--- p.129

너희들이 천 리 길을 발을 싸매고 올라왔고 1만여 명이 연명해 막중한 일을 했으니, 내가 어찌 한 번 보는 것을 어렵게 여겨 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내가 애통함을 머금고 참아온 지 이미 30년이 지났고 왕위에 올라 예를 거행한 지도 20년에 가깝다. 허다한 세월에 어느 날인들 근심을 품지 않은 날이 있었겠는가마는, 이미 감히 의리로 명백히 말하지도 못했고 또한 능히 형벌을 통쾌히 실시하지도 못했다
--- p.135

사도세자의 죽음이 ‘공론’의 이름으로 ‘억울한 일’ 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정조로서도 국면 전환을 시도할 명분을 얻었다. 영남은 영남대로, 정조는 정조대로 새로운 희망을 맞이하는 상황이었다
--- p.137

은혜는 꿈에도 기대하지 못했을 정도였지만, 상소의 요구가 해결된 것은 없으니 억울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한 번 더 왕의 실행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임금의 귀를 감격시켜서 상소 내용이 실행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5월 4일을 두 번째 상소를 올리는 날로 정했다
--- p.142

1만여 명이나 연명한 상소의 요구는 실행된 게 없는데, 상소운동을 주도한 한두 명이 관직을 얻는다면, 이는 상소운동을 이끌고 있는 소청 입장에서도 난감한 문제였다. 소청에서 기다린 소식은 상소를 주도한 사람들에 대한 상찬이 아니라, 상소의 요구를 이행하는 것이었다
--- p.150

지금 우리의 행보는 큰 의리를 펼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와중에 앉아서 얼굴도 모르는 재상들이 주는 많은 부조를 받는 것은 의리가 없는 행동이며, 더구나 한 번의 상소로 이룬 것이 무엇이건대 태연하게 앉아서 명분 없는 물건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 p.159

조정 내 여론도 방향을 못 잡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몇몇 중신들은 소청에 부조를 보내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영남 유생들이 올린 만인소의 파장을 숨죽여 지켜보는 여론도 있었다. 결국 정조가 직접 나서야 했다. 류성한을 바로 처결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영남 유생들을 설득해서 상소운동을 그만두게 해야 했다
--- p.169

정조는 영남의 상소에 대해 찬성하면서도 류성한을 처벌하라는 그들의 요구에 대해 ‘살리는 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보여주려는 의도’로 처벌을 미루고 있다면서 일종의 양해를 구했다. 동시에 영남의 상소를 통해 자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상소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 p.170

지금은 의리가 분명하게 결판이 났으니, 영남 유생들은 더 이상 체류할 필요가 없다. 아까 경연에서 좌의정이 주청한 바가 있었다. 물러나 좌의정을 보고 상세히 물어서 영남 유생들에게 전달하라. 일전에 체류에 필요한 식량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금 돌아가는 데 사용할 비용을 주면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듣기로 유생들이 퇴수학업退修學業, 즉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는 비답을 듣기 원한다고 하니, 모름지기 비답을 내리는 법도에 따라 말로 하교를 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p.188

5월 24일 아침, 진청에서 백미와 청동으로 된 돈을 가지고 와서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유생들은 돌아가는 노자로 각각 쌀 5두와 돈 5관을 받았다. 더불어 강진에서 파견한 경저리도 돈 100민緡을 보내, 유생들이 돌아갈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5월 25일 아침, 소청의 유생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각각 소임을 기록한 명부인 임록任錄을 한 부씩 써서 자신이 여기에 참여했다는 증표로 삼기로 했다
--- p.192

영남의 만인소운동은 5월 27일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파장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심지어 세 번째 상소가 막혀 소청에서 내려갈 준비를 할 때에도 조정에서는 만인소 여진이 계속되고 있었다. 류성한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류성한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그 관계를 해명하며 거리 두기를 해야 했다. 류성한과 관계되었다는 의심 그 자체로 관직을 내려놓아야 했고, 조그마한 혐의점만 있어도 예외 없이 탄핵되었다
--- p.195

전체 상소운동 결과가 흡족했다고 느끼는 영남 유생들은 많지 않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 갈 영남은 더 이상 만인소운동 전의 영남이 아니었다. 정조의 영남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새로운 영남의 가능성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 p.197

만인소운동이 끝나고 약 한 달 뒤인 6월 22일 조정 인사를 결정하는 회의인 도목정사가 열렸다. 만인소운동 후 첫 도목정사였다. 이 회의의 결과에서 눈에 띈 것은 영남 사람들의 약진이었다
--- p.198

이 운동은 채제공이나 정조의 정치적 기획일 수도 있고, 중앙정계를 향한 영남 유생들의 간절한 정치적 바람이 담겨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건 만인소운동의 가치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만인소운동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통해 당대가 믿는 공정한 가치를 이루려 했던 사회운동이기 때문이다
--- p.202

1792년 윤4월 27일 봉입된 영남의 상소는 유생들의 연명 상소가 1만 명을 넘겼던 최초의 사례였다. …… ‘모든 백성의 뜻’을‘ 하늘의 뜻’으로 받들어야 하는 유교 정치 이념에서 만인소는 ‘만백성의 이름’으로 ‘하늘의 뜻’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었다
--- p.205

1792년 만인소는 1만여 명의 연명이 어떻게 공론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공론’은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만큼이나 ‘만드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이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자발적 참여’이다
--- p.205

1823년에는 신분적으로 천대받던 서얼 9,996명이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연명을 받아 서얼 차별을 철폐해 달라는 상소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1855년에는 사도세자 사망 2주갑을 맞아 1만 94명의 영남 유생들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871년 대원군에 의해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1만 27명이 연명해 서원 철폐를 거두어 달라는 상소를 올렸고, 4년 뒤인 1875년에는 실각당한 대원군의 봉환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881년에는 1만 3,000여 명 정도로 추정되는 유생들이 연명해 당시 밀려 들어오는 서구 세력에 대한 척결을 청원하는 ‘척사 만인소’를 올렸다
--- p.208

만인소운동은 …… 올바름을 향한 공론의 힘을 신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던 이들의 노력이 역사의 전환점마다 다양한 형식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이후 언로 자체가 의미 없는 시기가 되었을 때에는 강한 무력운동의 철학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의병운동에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실천 정신의 철학적 기반을 만인소운동에서 찾는 이유이다
--- p.209

출판사 리뷰

시대를 뛰어넘는 정치셈법

지은이가 주목한 것은 미시적 사실만이 아니다. 정조와 그 측근인 채제공이 기득권층인 노론 견제를 위해 새로운 지지 세력이 필요했다든가, 영남 사림에 힘을 부여하기 위한 도산별과가 영남 사림을 정치적 동반자로 삼겠다는 의미였다는 등 만인소 운동의 굵직한 배경을 짚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자기 입으로 공론화하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공론의 장으로 올라오면 이 문제를 다루겠다는 정조의 노회한 속셈을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영남 사림에 정국 주도권이 넘어갈 것을 우려한 노론의 노심초사도 당시 권력다툼이 현대 정치판의 정치공학을 뺨칠 정도였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노론인 이조참판 김희의 주도로, 상소운동을 주도한 소두疏頭 이우나 성언집에게 관직을 주어 만인소 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려 한 시도가 그것이다. 또한 몇몇 중신들은 만인소 운동의 지도부에 부조를 보내는가 하면 근실 권한을 지닌 성균관 유생 대표들이 집권층의 눈치를 보느라 거부했다가 처벌받는 대목 또한 마찬가지다.

무릎을 치게 하는 의미 부여

책은 만인소 운동의 배경, 영남 유림의 상경 과정, 소두의 임명이나 상소문 마련, 처리 과정, 비용 등을 세밀하고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1만 57명이 연명했다는 사실이 단순한 물리적 숫자가 아니라 ‘만백성의 이름’에서 보듯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모든 백성의 뜻’을 ‘하늘의 뜻’을 받드는 유교 정치 이념이라는 의미를 들려준다. 또한 만인소 운동이 1823년 서얼 9,996명이 참여한 서얼 차별 철폐 상소나 1881년 1만 3,000여 명의 유생들이 청원하는 ‘척사 만인소’ 등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인소 운동은 유학적 권위를 빌려 구체적인 정책 변화를 촉구했던 시민운동으로 언로 자체가 의미 없는 시기가 되었을 때는 강한 무력운동의 철학적 기반으로 작용했다며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의 뿌리로 지적하는 대목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사극을 웃도는 읽는 재미

그렇다고 책이 딱딱하거나 고리타분하지는 않다. 지은이의 유려한 글솜씨에 힘입어 어지간한 사극 드라마를 능가하는 재미가 도드라진다. 그 정점은 우여곡절 끝에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정조에게 1차 상소를 전하는 장면이다. “이우의 목소리가 끝이 나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그믐이 얼마 남지 않아 달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희정당 주위를 눌렀지만, 이마저도 진신과 장보들의 긴장감을 가리지는 못했다. …… 촛불 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 희정당을 감싸고 돌았다. …… 정조는 상소를 듣던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었다. …… 류이좌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곁눈질로 그 답답한 상황의 이유를 알아보려 했다. …… ‘눈물’이었다. 용안 위로 촛농을 닮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처럼 드라마틱한 장면을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책은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에 이은 ‘조선사의 현장으로’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한데 전작이 그랬듯이 단순한 ‘현장답사기’를 넘어선 진지한 역사서이다. 주석이 본문의 4분의 1에 이를 정도인 것이 이를 웅변한다. 충실한 역사적 사실 소개, 이에 관한 설득력 있는 해석과 더불어 재미를 놓치지 않은 수작秀作이기에 지은이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