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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번을 폐하고 현을 만든다!
폐번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폐번치현이 선언되기 불과 닷새 전이었다!
“폐번 단행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정부 내의 동요는 격렬하였고 상하가 함께 ‘경악’했다”
칙서 한 통으로 번이 사라지고 에도막부체제가 완전히 붕괴,
메이지 중앙집권국가, ‘메이지국가’가 탄생하다
『폐번치현』은 2014년 가도카와문고에서 출판된 가쓰타 마사하루의 『폐번치현 근대국가탄생의 무대 뒤(?藩置?―近代?家誕生の舞台裏)』의 번역서로, 메이지유신기 폐번치현을 단독으로 다룬 책으로는 국내 첫 소개이다. 폐번치현을 결과론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몸을 두고 그 장소로부터 들여다보는 것이 본서의 기본적인 입장으로, 폐번치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문서와 일기류, 회의록 등에 기초한 1차 사료를 풍부히 인용한 서술이 현장감 넘친다. 특히 일부나마 판적봉환의 건백문과 폐번치현 조서를 직접 다루고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더욱더 생생히 전달해준다.
폐번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폐번치현이 선언되기 불과 닷새 전이었다!
“폐번 단행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정부 내의 동요는 격렬하였고 상하가 함께 ‘경악’했다”
칙서 한 통으로 번이 사라지고 에도막부체제가 완전히 붕괴,
메이지 중앙집권국가, ‘메이지국가’가 탄생하다
『폐번치현』은 2014년 가도카와문고에서 출판된 가쓰타 마사하루의 『폐번치현 근대국가탄생의 무대 뒤(?藩置?―近代?家誕生の舞台裏)』의 번역서로, 메이지유신기 폐번치현을 단독으로 다룬 책으로는 국내 첫 소개이다. 폐번치현을 결과론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몸을 두고 그 장소로부터 들여다보는 것이 본서의 기본적인 입장으로, 폐번치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문서와 일기류, 회의록 등에 기초한 1차 사료를 풍부히 인용한 서술이 현장감 넘친다. 특히 일부나마 판적봉환의 건백문과 폐번치현 조서를 직접 다루고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더욱더 생생히 전달해준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장 번(藩)이 사라진 날
제1장 유신정권이 탄생한 날
1. 왕정복고 대호령
2. 부번현 세 통치 체제의 성립
3. 보신전쟁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제2장 판적봉환과 번체제
1. 기도·오쿠보의 계획
2. ‘토지 인민 반환’을 상주한 번주들
3. 봉건인가 군현인가─지방제도의 모색
4. 번주의 영유권이 부정된 때
제3장 중앙집권화로 가는 길
1. 핍박하는 번 재정
2. 번제(藩制) 제정
3. 서남 웅번들의 반발
제4장 일대비약으로서의 폐번치현
1. 폐번건백의 움직임
2. 친병창설의 위력
3. 혼미한 정부개혁
4. 폐번 단행으로
제5장 폐번치현의 충격
1. 반란은 어째서 일어나지 않았는가
2. ‘구 번주 만류’ 봉기
3. 외국인이 본 폐번치현
제6장 메이지 중앙집권국가의 탄생
1. 중앙관제 개혁
2. 구 번 세력과의 단절
3. 메이지 집권시스템의 성립
종장 이와쿠라사절단의 출발
저자 후기 | 문고판 저자 후기
참고 문헌 | 연표 | 부번현(府藩?) 대조표
역자 후기 | 찾아보기
서장 번(藩)이 사라진 날
제1장 유신정권이 탄생한 날
1. 왕정복고 대호령
2. 부번현 세 통치 체제의 성립
3. 보신전쟁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제2장 판적봉환과 번체제
1. 기도·오쿠보의 계획
2. ‘토지 인민 반환’을 상주한 번주들
3. 봉건인가 군현인가─지방제도의 모색
4. 번주의 영유권이 부정된 때
제3장 중앙집권화로 가는 길
1. 핍박하는 번 재정
2. 번제(藩制) 제정
3. 서남 웅번들의 반발
제4장 일대비약으로서의 폐번치현
1. 폐번건백의 움직임
2. 친병창설의 위력
3. 혼미한 정부개혁
4. 폐번 단행으로
제5장 폐번치현의 충격
1. 반란은 어째서 일어나지 않았는가
2. ‘구 번주 만류’ 봉기
3. 외국인이 본 폐번치현
제6장 메이지 중앙집권국가의 탄생
1. 중앙관제 개혁
2. 구 번 세력과의 단절
3. 메이지 집권시스템의 성립
종장 이와쿠라사절단의 출발
저자 후기 | 문고판 저자 후기
참고 문헌 | 연표 | 부번현(府藩?) 대조표
역자 후기 | 찾아보기
책 속으로
필자가 폐번치현론을 발표하고 나서 이미 23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그간에 필자의 폐번치현론에 수정을 가할 정도의 비판이 밀려오지는 않았으며, 지금도 그 견해는 바꾸지 않고 있다. 또한 그와 별개로, 일본 이외의 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것은 뜻하지 않은 기쁨이었기에, 이번의 한국어판 간행 및 서문을 흔쾌히 수락하게 되었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폐번치현은 ‘만국과 대치’하는 데에 필요한 중앙집권을 실현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만국과 대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과 ‘마주보며 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만국대치(万??峙)는 당시 어떻게 사용되었던 것인가?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에도시대의 체제는 막번체제로 불린다. 막부(쇼군)와 번(다이묘)을 기축으로 한 정치사회체제이다. 따라서 막부의 타도와 붕괴뿐만 아니라, 번을 소멸시키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에도막부체제 시대가 끝났다고 할 수 없다. 왕정복고를 결행하여 막부를 무너뜨린 것은 사쓰마·조슈 양 번을 중심으로 하는 제번과 공가(公家)에 의한 도막파이고, 번을 소멸시킨 것이 그 도막파에 의한 유신정권이다.
---「번(藩)이 사라진 날」중에서
왕정복고 대호령은 요시노부의 정권 반환과 쇼군직 사임을 허가하고, 왕정복고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섭정·관백·막부를 폐지한다는 선언이다. 단순히 막부제도뿐 아니라 섭관제도도 폐지한 것이다. 대호령에는 ‘진무 창업의 시(始)’에 기초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가마쿠라막부 이래의 무가정치와 그에 앞선 섭관정치(* 헤이안시대 이래, 후지와라 씨가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관백으로 조정의 정치를 맡은 것―역자 주)를 부정하고, 고대의 천황친정으로 복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지당한 공의’를 다하라는 뜻을 높이 세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번(藩)이 사라진 날」중에서
유신정부가 스스로의 통치체제로서 처음 번을 위치시킨 것이 정체서로, 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번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어가며 직할지인 부현과 병존시키는 것이었다. 부번현 세 통치 체제란 어디까지나 번체제를 온존시키는 것이었다. 유신정권은 결코 성립 당시부터 번체제를 소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부번현 세 통치 체제 실현도 장래의 목표로 두었다. 당면한 상황에서는 직할지인 부현의 일치에 힘쓰는 것만을 의도했으며, 현실의 번은 아직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유신정권이 바란 번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유신정권이 탄생한 날」중에서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각각 완급의 차는 있었지만 거의 동시기에 판적봉환론이 형성되었다. 번주 모리 다카치카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사쓰마와의 교섭 허가를 얻은 기도는 오쿠보에게 ‘내담’(오쿠보의 말)을 요청하였고, 그 회담은 9월 18일 교토에서 실현되어 양자 사이에 ‘비밀스러운 일’(기도의 말), 다시 말해 판적봉환이 처음으로 거론되었다.
---「판적봉환과 번체제」중에서
판적봉환에서 유신정권은 많은 번주가 동의한 영지 재교부는 하지 않았다. 종래의 개별영유권을 재확인하지 않은 채 법적으로는 천황에 영유권을 일원화했다. 사쓰마번 내에 있던 재교부론은 부정되어(이 경위는 불명하나 기도의 주장일 것이다), 번주의 기대는 명백히 배신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번주가 어떠한 반대도 없이 받아들인 것은 어째서였을까.
---「판적봉환과 번체제」중에서
‘번제’에 의해 제번은 철저한 번정개혁을 재촉받게 되었다. 사족졸의 가록을 삭감하는 녹제개혁은 이미 언급했으나, ‘번제’로 새로이 번채와 번찰의 정리를 명하자 지번사 중에서는 스스로 가록 일부를 번의 경비에 충당하겠다고 청원하는 자도 나타났다. 야마시타 사부로의 『근대천황제 연구서설』에 의하면, 이는 폐번치현 때까지 38개 현에 이른다.
---「중앙집권화로 가는 길」중에서
사쓰마번 내에서 정부협력태세를 정리하는 데 진력하고, 더 나아가 3개 번 제휴론에 의한 친병창설도 제기한 것이 사이고였다. 사이고는 어떤 생각에서 이러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것인가?
---「일대비약으로서의 폐번치현」중에서
폐번치현은 사쓰마·조슈 양 번만의 결정에 의해, 양 번에서도 사이고·오쿠보·기도 3명의 주도로 단행된 것이다. 산조·이와쿠라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제후는 전혀 계획에 관여하지 않았다. 부번현 세 통치 체제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길을 단념한 시점에서, 번에 의거하는 공론체제는 벗어던지고 한층 더한 권력 집중을 꾀하게 되었다.
---「일대비약으로서의 폐번치현」중에서
폐번 단행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폐번 전까지 대납언의 지위에 있었고 폐번과 함께 14일 사임한 사가(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는 같은 날의 모습에 대해 정부 내의 동요는 격렬하였고 상하가 함께 ‘경악’했다고 일기에 남겼다. 전혀 예기하지 않았음이 엿보인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폐번치현은 ‘만국과 대치’하는 데에 필요한 중앙집권을 실현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만국과 대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과 ‘마주보며 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만국대치(万??峙)는 당시 어떻게 사용되었던 것인가?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에도시대의 체제는 막번체제로 불린다. 막부(쇼군)와 번(다이묘)을 기축으로 한 정치사회체제이다. 따라서 막부의 타도와 붕괴뿐만 아니라, 번을 소멸시키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에도막부체제 시대가 끝났다고 할 수 없다. 왕정복고를 결행하여 막부를 무너뜨린 것은 사쓰마·조슈 양 번을 중심으로 하는 제번과 공가(公家)에 의한 도막파이고, 번을 소멸시킨 것이 그 도막파에 의한 유신정권이다.
---「번(藩)이 사라진 날」중에서
왕정복고 대호령은 요시노부의 정권 반환과 쇼군직 사임을 허가하고, 왕정복고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섭정·관백·막부를 폐지한다는 선언이다. 단순히 막부제도뿐 아니라 섭관제도도 폐지한 것이다. 대호령에는 ‘진무 창업의 시(始)’에 기초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가마쿠라막부 이래의 무가정치와 그에 앞선 섭관정치(* 헤이안시대 이래, 후지와라 씨가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관백으로 조정의 정치를 맡은 것―역자 주)를 부정하고, 고대의 천황친정으로 복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지당한 공의’를 다하라는 뜻을 높이 세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번(藩)이 사라진 날」중에서
유신정부가 스스로의 통치체제로서 처음 번을 위치시킨 것이 정체서로, 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번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어가며 직할지인 부현과 병존시키는 것이었다. 부번현 세 통치 체제란 어디까지나 번체제를 온존시키는 것이었다. 유신정권은 결코 성립 당시부터 번체제를 소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부번현 세 통치 체제 실현도 장래의 목표로 두었다. 당면한 상황에서는 직할지인 부현의 일치에 힘쓰는 것만을 의도했으며, 현실의 번은 아직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유신정권이 바란 번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유신정권이 탄생한 날」중에서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각각 완급의 차는 있었지만 거의 동시기에 판적봉환론이 형성되었다. 번주 모리 다카치카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사쓰마와의 교섭 허가를 얻은 기도는 오쿠보에게 ‘내담’(오쿠보의 말)을 요청하였고, 그 회담은 9월 18일 교토에서 실현되어 양자 사이에 ‘비밀스러운 일’(기도의 말), 다시 말해 판적봉환이 처음으로 거론되었다.
---「판적봉환과 번체제」중에서
판적봉환에서 유신정권은 많은 번주가 동의한 영지 재교부는 하지 않았다. 종래의 개별영유권을 재확인하지 않은 채 법적으로는 천황에 영유권을 일원화했다. 사쓰마번 내에 있던 재교부론은 부정되어(이 경위는 불명하나 기도의 주장일 것이다), 번주의 기대는 명백히 배신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번주가 어떠한 반대도 없이 받아들인 것은 어째서였을까.
---「판적봉환과 번체제」중에서
‘번제’에 의해 제번은 철저한 번정개혁을 재촉받게 되었다. 사족졸의 가록을 삭감하는 녹제개혁은 이미 언급했으나, ‘번제’로 새로이 번채와 번찰의 정리를 명하자 지번사 중에서는 스스로 가록 일부를 번의 경비에 충당하겠다고 청원하는 자도 나타났다. 야마시타 사부로의 『근대천황제 연구서설』에 의하면, 이는 폐번치현 때까지 38개 현에 이른다.
---「중앙집권화로 가는 길」중에서
사쓰마번 내에서 정부협력태세를 정리하는 데 진력하고, 더 나아가 3개 번 제휴론에 의한 친병창설도 제기한 것이 사이고였다. 사이고는 어떤 생각에서 이러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것인가?
---「일대비약으로서의 폐번치현」중에서
폐번치현은 사쓰마·조슈 양 번만의 결정에 의해, 양 번에서도 사이고·오쿠보·기도 3명의 주도로 단행된 것이다. 산조·이와쿠라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제후는 전혀 계획에 관여하지 않았다. 부번현 세 통치 체제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길을 단념한 시점에서, 번에 의거하는 공론체제는 벗어던지고 한층 더한 권력 집중을 꾀하게 되었다.
---「일대비약으로서의 폐번치현」중에서
폐번 단행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폐번 전까지 대납언의 지위에 있었고 폐번과 함께 14일 사임한 사가(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는 같은 날의 모습에 대해 정부 내의 동요는 격렬하였고 상하가 함께 ‘경악’했다고 일기에 남겼다. 전혀 예기하지 않았음이 엿보인다.
---「폐번치현의 충격」중에서
출판사 리뷰
그 메이지국가의 탄생 속에 숨겨진,
잘 알려지지 않은 무대 뒤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폐번치현은 일본을 봉건국가에서 근대국가로 이행시킨 사건이다. 폐번치현을 포함한 메이지유신에 의해 일본근대국가는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막부(쇼군)와 번(다이묘)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허나 막부와 번은 동시에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막부가 막을 내린 것은 1867년 12월의 왕정복고 쿠데타에 의해서였으나, 번이 소멸한 것은 그로부터 3년 8개월 후인 1871년 7월의 폐번치현에 의해서였다. _「한국어판 서문」에서
260년의 에도막부가 무너진 후, 번체제는 어떻게 붕괴되었고,
왕정복고에서 성립된 유신정부는 왜 번체제를 폐지하려 했는가
폐번치현은 에도시대의 막부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진정한 의미의 ‘메이지국가’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다. 폐번치현을 포함한 메이지 유신에 의해 일본 근대국가가 탄생하면서 봉건막부와 번은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막부와 번은 동시에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1867년 12월 왕정복고 쿠데타로 막부가 막을 내리고, 그로부터 3년 8개월 후인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이 소멸했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양력으로는 1871년 8월 29일. 이하 연월일은 음력으로 기술), 아침부터 비가 왔던 이날 오후 2시, 황거(皇居) 회합장에는 급히 호출되어 정장을 하고 달려온 재경(在京) 지번사(구 번주) 56명이 모였다. 그들 앞에 메이지 천황이 모습을 드러내고, 우대신 산조 사네토미가 칙서를 낭독했다. 칙서에는 ‘억조(*億兆. 수많은 백성―역자 주)를 보안(保安)하여 만국과 대치’할 수 있도록 ‘번을 폐하고 현을 만든다’는 천황의 어명이 있었다. 폐번치현의 단행이었다. 대부분의 지번사는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_「서장: 번(藩)이 사라진 날」에서
에도막부를 쓰러뜨리고 성립된 메이지 신정부가 번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권력을 지녔더라면 막부와 함께 번도 모습을 감추고 일거에 중앙집권국가를 세웠을 테지만, 메이지 신정부는 번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권이었기에 번을 유지하며 중앙집권화를 꾀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처음부터 폐번을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나, 3년 9개월 후 돌연 번을 해체하게 된다. 폐번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폐번치현이 선언되기 불과 닷새 전이었고, 천황의 조서 한 통으로 번이 소멸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 사쓰마?조슈번의 지도자가 극비리에 계획하고, 메이지 천황이 일방적으로 전광석화와 같이 단행한 ‘폐번치현’. 하루아침에 권력을 박탈당한 번주들과 혼란에 빠진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들은 직면한 상황 앞에서 어떻게 움직였는가. 이 책은 번에 의존하던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번을 해체하게 되었는지, 현(?)제도를 탄생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시킨 쿠데타의 실태는 어떠했는지를 주요 테마로 다룬다. 메이지유신기 폐번치현을 단독으로 다룬 책으로는 국내 첫 소개이다.
메이지유신사 연구의 최전선에서는 지금 폐번치현이 커다란 화제이며, 근년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260년 이상 이어진 에도막부가 무너진 후, 번체제는 어떻게 붕괴되어갔는가. 왕정복고에서 성립된 유신정부는 당초부터 번체제를 폐지하려 했는가. 판적봉환에서 폐번치현으로 이어지는 길은 자연스러웠는가. 이처럼 유신정권의 역사적 성격에 관하여 현재 폐번치현이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하나의 폐번치현의 모습을 제시해보려 시도한 것이 본서라 하겠다. _「저자 후기」에서
“번력에 의지하기가 곤란하다면 번력을 부정하는 수단,
다시 말해 폐번이라는 비약적인 수단이 뇌리에 떠올랐을 것이다.”
서장 〈번이 사라진 날〉에서는 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이 최초로 선언된 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폐번 합의가 유신정권 내부에서 성립된 것은 폐번 단행 닷새 전이었고, 그것도 사쓰마·조슈 양 번의 지도자만으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유력번인 도사번을 비롯한 제번에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았을뿐더러 당시 최고 수뇌였던 우대신 산조 사네토미와 대납언 이와쿠라 도모미가 폐번계획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이틀 전이었다. 이와 같이 단기간에 극비로 계획되고, 천황이 일방적으로 전광석화와 같이 단행한 폐번치현이 선언되던 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들여다본다.
제1장 〈유신정권이 탄생한 날〉에서는 요시노부의 정권 반환과 쇼군직 사임을 허가하고 왕정복고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섭정·관백·막부를 폐지한다는 왕정복고 대호령 선언과 이후 일어난 보신전쟁, 지방행정구역으로 번이 관제상 처음 등장하면서 부번현 세 통치 체제가 성립된 과정 등을 살핀다.
제2장 〈판적봉환과 번체제〉에서는 판적봉환을 가장 먼저 주창한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움직임, 특히 오쿠보와 기도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이후 사쓰마?조슈?도사?히젠번이 판적봉환을 건백한 뒤 제번의 ‘토지 인민 반환’ 상신이 줄을 잇게 되는 과정, 판적봉환 후의 번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봉건인지 군현인지)를 둘러싼 지방제도 모색, 판적봉환으로 번주의 영유권이 부정되어 번이 부현과 같이 지방행정단위가 되면서 부번현 세 통치 체제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의의 등을 들여다본다.
제3장 〈중앙집권화로 가는 길〉에서는 보신전쟁 이후 극심한 재정 곤란에 빠지게 된 제번의 상황과 이후 줄을 잇는 폐번 신청, 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화를 꾀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번제’, 그리고 번제가 번 체제에 끼친 막대한 대미지 및 이로 인해 야기된 조슈번 탈대 소동 등 서남 웅번들의 반발을 다룬다.
제4장 〈일대 비약으로서의 폐번치현〉에서는 번의 존재가 민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 하여 폐번구상이 등장한 상황, 부번현 세 통치 체제의 철저화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부강화책으로서의 친병창설 주장 및 그 속내,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정부개혁 앞에 드리운 암운, 중앙집권화책의 한계를 깨닫고 폐번치현으로 일대 비약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제5장 〈폐번치현의 충격〉에서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폐번 단행으로 격렬히 동요한 상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 폐번치현에 뒤따른 구 번주의 상경에 반대하여 일어난 농민봉기, 외국인의 눈에 비친 폐번치현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들여다본다.
제6장 〈메이지 중앙집권국가의 탄생〉에서는 사조도히 4개 번에 권력을 집중시킨 태정관 삼원제 성립 등 중앙관제 개혁, 구 번세력과의 관계를 끊고 중앙집권의 실적을 거두기 위한 조치들, 마침내 중앙에서 부현에 이르기까지 일원적인 체제가 출현하여 태정관을 최고관청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 ‘메이지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을 살핀다.
종장 〈이와쿠라사절단의 출발〉에서는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메이지국가가 탄생하면서 국내 통일뿐 아니라 구미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초를 세우게 된 의의와, 불평등관계를 극복하고 구미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길은 서양문명화 이외에는 없다고 여겨 폐번치현 다음의 국가적 목표를 서양문명화로 설정하고 이와쿠라사절단을 파견하는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폐번치현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결행되었고, 중앙집권은 ‘만국과 대치’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만국과 대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과 ‘마주보며 선다’는 뜻이다. _본문에서
폐번치현을 결과론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몸을 두고 그 장소로부터 들여다본다
이 책은 2014년 가도카와문고에서 출판된 가쓰타 마사하루의 『폐번치현 근대국가탄생의 무대 뒤(?藩置?―近代?家誕生の舞台裏)』의 번역서로, 메이지유신기 폐번치현을 단독으로 다룬 책으로는 국내 첫 소개이다. 폐번치현을 결과론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몸을 두고 그 장소로부터 들여다보는 것이 본서의 기본적인 입장으로, 폐번치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문서와 일기류, 회의록 등에 기초한 1차 사료를 풍부히 인용한 서술이 현장감 넘친다. 특히 일부나마 판적봉환의 건백문과 폐번치현 조서를 직접 다루고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더욱더 생생히 전달해준다.
잘 알려지지 않은 무대 뒤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폐번치현은 일본을 봉건국가에서 근대국가로 이행시킨 사건이다. 폐번치현을 포함한 메이지유신에 의해 일본근대국가는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막부(쇼군)와 번(다이묘)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허나 막부와 번은 동시에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막부가 막을 내린 것은 1867년 12월의 왕정복고 쿠데타에 의해서였으나, 번이 소멸한 것은 그로부터 3년 8개월 후인 1871년 7월의 폐번치현에 의해서였다. _「한국어판 서문」에서
260년의 에도막부가 무너진 후, 번체제는 어떻게 붕괴되었고,
왕정복고에서 성립된 유신정부는 왜 번체제를 폐지하려 했는가
폐번치현은 에도시대의 막부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진정한 의미의 ‘메이지국가’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다. 폐번치현을 포함한 메이지 유신에 의해 일본 근대국가가 탄생하면서 봉건막부와 번은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막부와 번은 동시에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1867년 12월 왕정복고 쿠데타로 막부가 막을 내리고, 그로부터 3년 8개월 후인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이 소멸했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양력으로는 1871년 8월 29일. 이하 연월일은 음력으로 기술), 아침부터 비가 왔던 이날 오후 2시, 황거(皇居) 회합장에는 급히 호출되어 정장을 하고 달려온 재경(在京) 지번사(구 번주) 56명이 모였다. 그들 앞에 메이지 천황이 모습을 드러내고, 우대신 산조 사네토미가 칙서를 낭독했다. 칙서에는 ‘억조(*億兆. 수많은 백성―역자 주)를 보안(保安)하여 만국과 대치’할 수 있도록 ‘번을 폐하고 현을 만든다’는 천황의 어명이 있었다. 폐번치현의 단행이었다. 대부분의 지번사는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_「서장: 번(藩)이 사라진 날」에서
에도막부를 쓰러뜨리고 성립된 메이지 신정부가 번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권력을 지녔더라면 막부와 함께 번도 모습을 감추고 일거에 중앙집권국가를 세웠을 테지만, 메이지 신정부는 번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권이었기에 번을 유지하며 중앙집권화를 꾀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처음부터 폐번을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나, 3년 9개월 후 돌연 번을 해체하게 된다. 폐번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폐번치현이 선언되기 불과 닷새 전이었고, 천황의 조서 한 통으로 번이 소멸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 사쓰마?조슈번의 지도자가 극비리에 계획하고, 메이지 천황이 일방적으로 전광석화와 같이 단행한 ‘폐번치현’. 하루아침에 권력을 박탈당한 번주들과 혼란에 빠진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들은 직면한 상황 앞에서 어떻게 움직였는가. 이 책은 번에 의존하던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번을 해체하게 되었는지, 현(?)제도를 탄생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시킨 쿠데타의 실태는 어떠했는지를 주요 테마로 다룬다. 메이지유신기 폐번치현을 단독으로 다룬 책으로는 국내 첫 소개이다.
메이지유신사 연구의 최전선에서는 지금 폐번치현이 커다란 화제이며, 근년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260년 이상 이어진 에도막부가 무너진 후, 번체제는 어떻게 붕괴되어갔는가. 왕정복고에서 성립된 유신정부는 당초부터 번체제를 폐지하려 했는가. 판적봉환에서 폐번치현으로 이어지는 길은 자연스러웠는가. 이처럼 유신정권의 역사적 성격에 관하여 현재 폐번치현이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하나의 폐번치현의 모습을 제시해보려 시도한 것이 본서라 하겠다. _「저자 후기」에서
“번력에 의지하기가 곤란하다면 번력을 부정하는 수단,
다시 말해 폐번이라는 비약적인 수단이 뇌리에 떠올랐을 것이다.”
서장 〈번이 사라진 날〉에서는 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이 최초로 선언된 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폐번 합의가 유신정권 내부에서 성립된 것은 폐번 단행 닷새 전이었고, 그것도 사쓰마·조슈 양 번의 지도자만으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유력번인 도사번을 비롯한 제번에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았을뿐더러 당시 최고 수뇌였던 우대신 산조 사네토미와 대납언 이와쿠라 도모미가 폐번계획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이틀 전이었다. 이와 같이 단기간에 극비로 계획되고, 천황이 일방적으로 전광석화와 같이 단행한 폐번치현이 선언되던 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들여다본다.
제1장 〈유신정권이 탄생한 날〉에서는 요시노부의 정권 반환과 쇼군직 사임을 허가하고 왕정복고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섭정·관백·막부를 폐지한다는 왕정복고 대호령 선언과 이후 일어난 보신전쟁, 지방행정구역으로 번이 관제상 처음 등장하면서 부번현 세 통치 체제가 성립된 과정 등을 살핀다.
제2장 〈판적봉환과 번체제〉에서는 판적봉환을 가장 먼저 주창한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움직임, 특히 오쿠보와 기도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이후 사쓰마?조슈?도사?히젠번이 판적봉환을 건백한 뒤 제번의 ‘토지 인민 반환’ 상신이 줄을 잇게 되는 과정, 판적봉환 후의 번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봉건인지 군현인지)를 둘러싼 지방제도 모색, 판적봉환으로 번주의 영유권이 부정되어 번이 부현과 같이 지방행정단위가 되면서 부번현 세 통치 체제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의의 등을 들여다본다.
제3장 〈중앙집권화로 가는 길〉에서는 보신전쟁 이후 극심한 재정 곤란에 빠지게 된 제번의 상황과 이후 줄을 잇는 폐번 신청, 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화를 꾀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번제’, 그리고 번제가 번 체제에 끼친 막대한 대미지 및 이로 인해 야기된 조슈번 탈대 소동 등 서남 웅번들의 반발을 다룬다.
제4장 〈일대 비약으로서의 폐번치현〉에서는 번의 존재가 민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 하여 폐번구상이 등장한 상황, 부번현 세 통치 체제의 철저화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부강화책으로서의 친병창설 주장 및 그 속내,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정부개혁 앞에 드리운 암운, 중앙집권화책의 한계를 깨닫고 폐번치현으로 일대 비약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제5장 〈폐번치현의 충격〉에서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폐번 단행으로 격렬히 동요한 상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 폐번치현에 뒤따른 구 번주의 상경에 반대하여 일어난 농민봉기, 외국인의 눈에 비친 폐번치현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들여다본다.
제6장 〈메이지 중앙집권국가의 탄생〉에서는 사조도히 4개 번에 권력을 집중시킨 태정관 삼원제 성립 등 중앙관제 개혁, 구 번세력과의 관계를 끊고 중앙집권의 실적을 거두기 위한 조치들, 마침내 중앙에서 부현에 이르기까지 일원적인 체제가 출현하여 태정관을 최고관청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 ‘메이지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을 살핀다.
종장 〈이와쿠라사절단의 출발〉에서는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메이지국가가 탄생하면서 국내 통일뿐 아니라 구미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초를 세우게 된 의의와, 불평등관계를 극복하고 구미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길은 서양문명화 이외에는 없다고 여겨 폐번치현 다음의 국가적 목표를 서양문명화로 설정하고 이와쿠라사절단을 파견하는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폐번치현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결행되었고, 중앙집권은 ‘만국과 대치’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만국과 대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과 ‘마주보며 선다’는 뜻이다. _본문에서
폐번치현을 결과론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몸을 두고 그 장소로부터 들여다본다
이 책은 2014년 가도카와문고에서 출판된 가쓰타 마사하루의 『폐번치현 근대국가탄생의 무대 뒤(?藩置?―近代?家誕生の舞台裏)』의 번역서로, 메이지유신기 폐번치현을 단독으로 다룬 책으로는 국내 첫 소개이다. 폐번치현을 결과론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몸을 두고 그 장소로부터 들여다보는 것이 본서의 기본적인 입장으로, 폐번치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문서와 일기류, 회의록 등에 기초한 1차 사료를 풍부히 인용한 서술이 현장감 넘친다. 특히 일부나마 판적봉환의 건백문과 폐번치현 조서를 직접 다루고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더욱더 생생히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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