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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
북일 교섭 30년의 평행선을 돌아보다
일본은 1945년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청일전쟁 이후 50여 년에 이르는 전쟁 국가의 역사를 끝냈다. 이후 일본은 연합국과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조인했고, 이후 여러 나라들과 조약 또는 협정 등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1952년 타이완, 1954년 미얀마, 1956년 소련, 1965년 대한민국, 그리고 1972년 중국, 1973년 북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했다. 하지만 일본은 북한과는 국교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과 북한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1959년 재일 조선인 귀국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은 1962년까지 계속돼 총 9만 명의 재일 조선인이 북한으로 이주하게 됐다. 하지만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일본과 한국의 국교가 열리면서, 북일 관계는 다시 긴장 관계에 놓인다. 그러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에는 북일 사이에 무역이 시작되기도 했다. 한편, 공식적인 국교 수립 노력은 1991년이 되어서야 시작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91년부터 1992년까지 8차례 이어진 회담은 결국 결렬되고 만다. 그리고 그 상태는 2000년 9차 회담이 재개될 때까지 이어졌고, 이때와 맞물려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2001년 중에 늦어도 2002년 월드컵 개최까지는 북일 교섭을 실현하자”라는 목표 아래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가 설립돼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이 협회에서 사무국장을 맡았던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가 협회의 활동을 비롯한 북일 국교 수립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되짚어 본 백서라 할 수 있다.
북일 교섭 30년의 평행선을 돌아보다
일본은 1945년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청일전쟁 이후 50여 년에 이르는 전쟁 국가의 역사를 끝냈다. 이후 일본은 연합국과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조인했고, 이후 여러 나라들과 조약 또는 협정 등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1952년 타이완, 1954년 미얀마, 1956년 소련, 1965년 대한민국, 그리고 1972년 중국, 1973년 북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했다. 하지만 일본은 북한과는 국교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과 북한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1959년 재일 조선인 귀국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은 1962년까지 계속돼 총 9만 명의 재일 조선인이 북한으로 이주하게 됐다. 하지만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일본과 한국의 국교가 열리면서, 북일 관계는 다시 긴장 관계에 놓인다. 그러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에는 북일 사이에 무역이 시작되기도 했다. 한편, 공식적인 국교 수립 노력은 1991년이 되어서야 시작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91년부터 1992년까지 8차례 이어진 회담은 결국 결렬되고 만다. 그리고 그 상태는 2000년 9차 회담이 재개될 때까지 이어졌고, 이때와 맞물려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2001년 중에 늦어도 2002년 월드컵 개최까지는 북일 교섭을 실현하자”라는 목표 아래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가 설립돼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이 협회에서 사무국장을 맡았던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가 협회의 활동을 비롯한 북일 국교 수립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되짚어 본 백서라 할 수 있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들어가며 일본과 북일 국교 정상화
최후의 전후 처리 미달성국 북한 | 전후 일본과 북한 | 국교 없는 북일 관계의 현실 | 북일 국교 수립의 태동
1 북일 국교 교섭의 개시와 결렬, 1990~1992
1980년대 말의 새 정세 | 7·7선언 | 가네마루·다나베 방북단 | 일본 국민은 사죄로 시작된 북일 교섭을 받아들였다 | 위안부 문제에서도 사죄가 이뤄지다 | 북일 교섭이 시작되다 | 서서히 높아지는 교섭 반대론 | 핵 문제와 이은혜 문제
2 북일 교섭 재개 노력과 반대 세력, 1993~1997
위안부 문제와 북일 교섭 문제 | 호소카와 정권의 탄생 | 북미 전쟁의 위기감이 높아지다 | 무라야마 정권의 탄생 | 북일 교섭 재개 시도 | 전후 50년 결의, 중의원에서 가결되다 | 북한의 자연재해와 식량 위기 | 1996년의 움직임 | 《현대 코리아》 그룹 | 납치 문제의 부상 | 요코타 메구미 납치 | 사토 가쓰미, 운동의 중심으로 | 북일 예비 교섭이 시작되다
3 북일 국교 교섭 제2라운드로, 1997~2001
북일 교섭 재개되다 | 납치 문제 운동의 본격화 | 무라아먀 초당파 국회의원 방북단 |북일 교섭 제2라운드가 시작되다 |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 발족 | 일본 정부의 자세 |‘가토의 난’ | 북한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격변
4 북일 정상회담과 북일 평양선언, 2002
고이즈미 총리와 다나카 국장의 도전 | 비밀 교섭 | 그 무렵 구원회 |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 활동 | 비밀 교섭이 드러나다 | 발표 그 후 | 북일 정상회담 | 북일 평양선언 | 기자회견 | 미국에 대한 보고 | 가족회와 구원회의 반응 | 외무성과 가족회·구원회의 응수 | 미국의 움직임 | 반대 세력의 역습 |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의 평가 | 5명 일시 귀국이라는 어리석은 방책 | 국교 저지 세력, 승리의 개가 | ‘해결’이란 무엇인가
5 2004년 고이즈미 재방북, 2003~2005
이라크 전쟁 중에 | 외무성과 북한의 접촉 | 2004년 고이즈미 재방북 | 회담의 합의 사항 | 고이즈미 재방북에 대한 여론 | 야부나카 국장의 평양 교섭 |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 감정 문제 | 생사불명 납치 피해자에 관한 재조사 | “엄중히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DNA 감정을 둘러싼 논쟁 | 벽에 부딪히다
6 아베 총리의 대북정책 선포와 시동, 2005~2007
6자회담 꿈의 합의와 그 부정 | 다나카 국장에 대한 문필 린치 | 관방장관 아베 신조의 첫 업적 | 아베 총리의 탄생 | 어떤 텔레비전 방송 | 아베 정권이 내놓은 정책 | 북한인권침해문제 계발주간 | 아베 납치 3원칙 | 납치문제대책본부의 활동 | 아베 총리 퇴진하다
7 아베 노선의 국책화, 2007~2012
후쿠다 내각의 대화 노선 | 변하지 않은 반응, 새로운 노력 | 반대파의 혼란 | 후쿠다 총리의 돌연한 강판 | 아소 내각 아베 노선을 되살리다 | 다하라 발언 사건 | 하토야마 내각 아래서 |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 활동 | 간 나오토 내각 | 간 내각 납치대책본부의 모습 | 도호쿠 대지진 가운데 | 사이키 발언의 폭로 | 북일 교섭 재개를 요구하는 움직임 | 노다 내각 시대의 모색 | 김정일의 사망 | 외무성은 정식 정부 간 교섭으로
8 아베 제2차 정권의 탄생, 2012~2015
아베, 두 번째로 총리가 되다 | 납치문제대책본부의 개편 | 외무성의 교섭 노력에 올라타다 | 스톡홀름 합의 | 스톡홀름 합의에 대한 평가와 반응 | 북일 관계의 악화와 합의의 해소
나오며 북미 대립의 심각화와 그 이후, 2016~2022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 미일 정상의 유엔총회 연설에서 미일 회담까지 | 평창올림픽의 기적 |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미 정상회담으로 | 북미 정상 싱가포르 회담 |2019년 1월 시정방침 연설 | 북미 정상 하노이 회담 | 그 뒤로는 혀끝으로만 거듭할 뿐
주
북일 관계·국교 교섭 연표
옮긴이 후기
머리말
들어가며 일본과 북일 국교 정상화
최후의 전후 처리 미달성국 북한 | 전후 일본과 북한 | 국교 없는 북일 관계의 현실 | 북일 국교 수립의 태동
1 북일 국교 교섭의 개시와 결렬, 1990~1992
1980년대 말의 새 정세 | 7·7선언 | 가네마루·다나베 방북단 | 일본 국민은 사죄로 시작된 북일 교섭을 받아들였다 | 위안부 문제에서도 사죄가 이뤄지다 | 북일 교섭이 시작되다 | 서서히 높아지는 교섭 반대론 | 핵 문제와 이은혜 문제
2 북일 교섭 재개 노력과 반대 세력, 1993~1997
위안부 문제와 북일 교섭 문제 | 호소카와 정권의 탄생 | 북미 전쟁의 위기감이 높아지다 | 무라야마 정권의 탄생 | 북일 교섭 재개 시도 | 전후 50년 결의, 중의원에서 가결되다 | 북한의 자연재해와 식량 위기 | 1996년의 움직임 | 《현대 코리아》 그룹 | 납치 문제의 부상 | 요코타 메구미 납치 | 사토 가쓰미, 운동의 중심으로 | 북일 예비 교섭이 시작되다
3 북일 국교 교섭 제2라운드로, 1997~2001
북일 교섭 재개되다 | 납치 문제 운동의 본격화 | 무라아먀 초당파 국회의원 방북단 |북일 교섭 제2라운드가 시작되다 |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 발족 | 일본 정부의 자세 |‘가토의 난’ | 북한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격변
4 북일 정상회담과 북일 평양선언, 2002
고이즈미 총리와 다나카 국장의 도전 | 비밀 교섭 | 그 무렵 구원회 |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 활동 | 비밀 교섭이 드러나다 | 발표 그 후 | 북일 정상회담 | 북일 평양선언 | 기자회견 | 미국에 대한 보고 | 가족회와 구원회의 반응 | 외무성과 가족회·구원회의 응수 | 미국의 움직임 | 반대 세력의 역습 |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의 평가 | 5명 일시 귀국이라는 어리석은 방책 | 국교 저지 세력, 승리의 개가 | ‘해결’이란 무엇인가
5 2004년 고이즈미 재방북, 2003~2005
이라크 전쟁 중에 | 외무성과 북한의 접촉 | 2004년 고이즈미 재방북 | 회담의 합의 사항 | 고이즈미 재방북에 대한 여론 | 야부나카 국장의 평양 교섭 |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 감정 문제 | 생사불명 납치 피해자에 관한 재조사 | “엄중히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DNA 감정을 둘러싼 논쟁 | 벽에 부딪히다
6 아베 총리의 대북정책 선포와 시동, 2005~2007
6자회담 꿈의 합의와 그 부정 | 다나카 국장에 대한 문필 린치 | 관방장관 아베 신조의 첫 업적 | 아베 총리의 탄생 | 어떤 텔레비전 방송 | 아베 정권이 내놓은 정책 | 북한인권침해문제 계발주간 | 아베 납치 3원칙 | 납치문제대책본부의 활동 | 아베 총리 퇴진하다
7 아베 노선의 국책화, 2007~2012
후쿠다 내각의 대화 노선 | 변하지 않은 반응, 새로운 노력 | 반대파의 혼란 | 후쿠다 총리의 돌연한 강판 | 아소 내각 아베 노선을 되살리다 | 다하라 발언 사건 | 하토야마 내각 아래서 |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 활동 | 간 나오토 내각 | 간 내각 납치대책본부의 모습 | 도호쿠 대지진 가운데 | 사이키 발언의 폭로 | 북일 교섭 재개를 요구하는 움직임 | 노다 내각 시대의 모색 | 김정일의 사망 | 외무성은 정식 정부 간 교섭으로
8 아베 제2차 정권의 탄생, 2012~2015
아베, 두 번째로 총리가 되다 | 납치문제대책본부의 개편 | 외무성의 교섭 노력에 올라타다 | 스톡홀름 합의 | 스톡홀름 합의에 대한 평가와 반응 | 북일 관계의 악화와 합의의 해소
나오며 북미 대립의 심각화와 그 이후, 2016~2022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 미일 정상의 유엔총회 연설에서 미일 회담까지 | 평창올림픽의 기적 |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미 정상회담으로 | 북미 정상 싱가포르 회담 |2019년 1월 시정방침 연설 | 북미 정상 하노이 회담 | 그 뒤로는 혀끝으로만 거듭할 뿐
주
북일 관계·국교 교섭 연표
옮긴이 후기
출판사 리뷰
절망의 바닥에서 평화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지식인의 성찰과 모색
이 책에서 자신이 실무를 주도했던 단체에 대한 와다 하루키의 평가는 냉정하기만 하다. “국민협회는 2020년을 맞아 우리의 패배를 인정하고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이후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라며 선선히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용어는 ‘패배’다. ‘실패’가 아닌 ‘패배’라는 말을 썼다면, 승리를 거둔 상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민협회를 이끈 이들은 왜 패배한 것일까. 또 승리를 거둔 이들은 누군가. 와다 하루키는 전전戰前 체제의 일본 역사에 미련을 갖는 ‘보수 세력’과 지난 역사를 사죄·반성하며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던 ‘진보 세력’이 북일 국교 정상화라는 ‘결정적 전선’에서 맞붙었고, 이 처절한 싸움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진보 세력은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관여를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와 지난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 진일보한 역사 인식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에 행한 식민 지배에 대한 ‘진정한 청산’을 마무리하는, 북일 국교 정상화라는 더 중요한 싸움에선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 결정적 변곡점이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역사적 ‘평양 방문’이었고, 이 싸움의 향방을 사실상 결정지은 핵심 변수가 이 책의 중심 주제인 일본인 납치 문제였다.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는 올해 말에 활동을 끝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절망의 바닥 끝에서 희망을 본다. 일본 국민은 북일 국교 정상화를 반드시 달성할 것이다. 동북아시아 평화의 집, 함께하는 집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는 열어젖히지 않으면 안 되는 문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이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한국 국민의 이해와 지원이 필요하다. 먼저 이 책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이에 가세해 주길 바란다.
_ ‘한국어판 서문’에서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그리고 아베의 납치 3원칙
고이즈미는 평양 방문을 통해 북일 국교 정상화라는 새 역사를 열려 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납치 문제에 사과하면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납치 문제가 일부 사람들이 제기해 오던 ‘의혹’에서 ‘사실’로 지위가 변하게 되면서 일본 사회가 상상하지도 못할 수준의 분노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을 실현했던 한 외교관은 “납치 문제로 인해 전후 오랜 시간 한반도에 대해 ‘가해자’라는 의식을 가졌던 일본의 입장이 처음 ‘피해자’로 바뀌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순간 일본의 내셔널리즘적 대중 정서가 매우 강하게 터져 나왔다”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납치 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며 일본에선 아베 정권이 탄생했다. 이를 통해 이후 일본의 국책으로 굳어지게 되는 아베의 ‘납치 3원칙’이 만들어진다. 납치 3원칙이란 ① 납치 문제는 일본의 최중요 과제다, ② 납치 문제의 해결 없이 국교 정상화는 없다, ③ 납치 피해자는 전원 생존해 있어 피해자 전원 탈환을 요구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와다 하루키는 이 원칙에 대해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한 가해의 책임을 부정하고, 일본이 받은 피해만을 절대시하면서, 외교를 통한 문제 해결을 부정하고 북한과 철저히 싸우고 징벌을 가하려는 방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불행하게도 납치 3원칙은 이후 북핵과 미사일 위기가 첨예해지면서 북일 국교 정상화 3원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원칙은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선 북한이 ①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하고, ② 모든 사거리의 탄도미사일 폐기하며, ③ 납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북한에 절대 굴복을 강요하면서 도무지 실현 불가능하고 무책임한 결론일 뿐이다. 결국, 상대가 이행할 수 없는 요구를 제시해 북일 국교 정상화를 사실상 포기하고, 북한에 압력을 가해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원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포기할 수 없는 한반도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의 길
이처럼 북일 국교 정상화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면, 두 나라는 ‘영원한 적대’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런 갑갑한 상황은 지난 30여 년간 한반도와 세계정세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쳐 왔다. 1989년 말 냉전 체제가 붕괴한 뒤 나라가 붕괴할지 모르는 국난에 몰리게 된 북한 앞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핵 개발을 통한 ‘대결의 길’과 미일과 수교를 통한 ‘개방의 길’이다. 한국이 중국·소련과 수교한다면, 북한 역시 미국·일본과 수교해 그 효과를 상쇄하면 된다. 냉전이 마무리되던 시점에 한일 모두가 공감하던 ‘교차승인론’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대결의 길을 택했고, 북한과 사실상 화해를 포기한 일본이 선택한 길 역시 미일 동맹을 강화해 ‘위험해지는 북한’과 ‘부상하는 중국’에 맞서겠다는 대결의 길이었다.
아베의 납치 3원칙으로 인해 북한과 일본이 관계를 개선할 가능성이 사라졌다면, 그래서 일본이 한반도 평화의 ‘조력자’ 역할을 해 줄 가망이 아예 없어졌다면 한국은 일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이제 우리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차례다.
와다 선생은 이 책에서 일본의 대북정책을 좋은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그 어떤 실마리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현실주의자 와다 하루키의 최종 결론이라 한다면, 이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갈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한국인 자신일 수밖에 없다. 2019년 봄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의 실패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작동을 멈춘 지 4년이 흘렀다. 이후 한반도 정세는 살벌하게 악화돼 왔다. 쉽지 않겠지만, 이 컴컴한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해 내야 한다.
_ ‘옮긴이 후기’에서
이 책에서 자신이 실무를 주도했던 단체에 대한 와다 하루키의 평가는 냉정하기만 하다. “국민협회는 2020년을 맞아 우리의 패배를 인정하고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이후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라며 선선히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용어는 ‘패배’다. ‘실패’가 아닌 ‘패배’라는 말을 썼다면, 승리를 거둔 상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민협회를 이끈 이들은 왜 패배한 것일까. 또 승리를 거둔 이들은 누군가. 와다 하루키는 전전戰前 체제의 일본 역사에 미련을 갖는 ‘보수 세력’과 지난 역사를 사죄·반성하며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던 ‘진보 세력’이 북일 국교 정상화라는 ‘결정적 전선’에서 맞붙었고, 이 처절한 싸움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진보 세력은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관여를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와 지난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 진일보한 역사 인식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에 행한 식민 지배에 대한 ‘진정한 청산’을 마무리하는, 북일 국교 정상화라는 더 중요한 싸움에선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 결정적 변곡점이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역사적 ‘평양 방문’이었고, 이 싸움의 향방을 사실상 결정지은 핵심 변수가 이 책의 중심 주제인 일본인 납치 문제였다.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는 올해 말에 활동을 끝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절망의 바닥 끝에서 희망을 본다. 일본 국민은 북일 국교 정상화를 반드시 달성할 것이다. 동북아시아 평화의 집, 함께하는 집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는 열어젖히지 않으면 안 되는 문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이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한국 국민의 이해와 지원이 필요하다. 먼저 이 책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이에 가세해 주길 바란다.
_ ‘한국어판 서문’에서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그리고 아베의 납치 3원칙
고이즈미는 평양 방문을 통해 북일 국교 정상화라는 새 역사를 열려 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납치 문제에 사과하면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납치 문제가 일부 사람들이 제기해 오던 ‘의혹’에서 ‘사실’로 지위가 변하게 되면서 일본 사회가 상상하지도 못할 수준의 분노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을 실현했던 한 외교관은 “납치 문제로 인해 전후 오랜 시간 한반도에 대해 ‘가해자’라는 의식을 가졌던 일본의 입장이 처음 ‘피해자’로 바뀌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순간 일본의 내셔널리즘적 대중 정서가 매우 강하게 터져 나왔다”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납치 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며 일본에선 아베 정권이 탄생했다. 이를 통해 이후 일본의 국책으로 굳어지게 되는 아베의 ‘납치 3원칙’이 만들어진다. 납치 3원칙이란 ① 납치 문제는 일본의 최중요 과제다, ② 납치 문제의 해결 없이 국교 정상화는 없다, ③ 납치 피해자는 전원 생존해 있어 피해자 전원 탈환을 요구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와다 하루키는 이 원칙에 대해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한 가해의 책임을 부정하고, 일본이 받은 피해만을 절대시하면서, 외교를 통한 문제 해결을 부정하고 북한과 철저히 싸우고 징벌을 가하려는 방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불행하게도 납치 3원칙은 이후 북핵과 미사일 위기가 첨예해지면서 북일 국교 정상화 3원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원칙은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선 북한이 ①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하고, ② 모든 사거리의 탄도미사일 폐기하며, ③ 납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북한에 절대 굴복을 강요하면서 도무지 실현 불가능하고 무책임한 결론일 뿐이다. 결국, 상대가 이행할 수 없는 요구를 제시해 북일 국교 정상화를 사실상 포기하고, 북한에 압력을 가해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원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포기할 수 없는 한반도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의 길
이처럼 북일 국교 정상화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면, 두 나라는 ‘영원한 적대’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런 갑갑한 상황은 지난 30여 년간 한반도와 세계정세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쳐 왔다. 1989년 말 냉전 체제가 붕괴한 뒤 나라가 붕괴할지 모르는 국난에 몰리게 된 북한 앞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핵 개발을 통한 ‘대결의 길’과 미일과 수교를 통한 ‘개방의 길’이다. 한국이 중국·소련과 수교한다면, 북한 역시 미국·일본과 수교해 그 효과를 상쇄하면 된다. 냉전이 마무리되던 시점에 한일 모두가 공감하던 ‘교차승인론’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대결의 길을 택했고, 북한과 사실상 화해를 포기한 일본이 선택한 길 역시 미일 동맹을 강화해 ‘위험해지는 북한’과 ‘부상하는 중국’에 맞서겠다는 대결의 길이었다.
아베의 납치 3원칙으로 인해 북한과 일본이 관계를 개선할 가능성이 사라졌다면, 그래서 일본이 한반도 평화의 ‘조력자’ 역할을 해 줄 가망이 아예 없어졌다면 한국은 일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이제 우리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차례다.
와다 선생은 이 책에서 일본의 대북정책을 좋은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그 어떤 실마리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현실주의자 와다 하루키의 최종 결론이라 한다면, 이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갈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한국인 자신일 수밖에 없다. 2019년 봄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의 실패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작동을 멈춘 지 4년이 흘렀다. 이후 한반도 정세는 살벌하게 악화돼 왔다. 쉽지 않겠지만, 이 컴컴한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해 내야 한다.
_ ‘옮긴이 후기’에서
'26.국제평화 연구 (박사전공>책소개) > 2.외교국제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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