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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영조와 네 개의 죽음』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왕이자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 하지만 아들을 뒤주에 집어넣어 죽인 비정한 왕으로 그려졌던 영조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 대신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내재적 접근방식을 취했다. 영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어머니, 형, 아내, 아들 네 사람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동안 그에게 덧씌워졌던 왜곡과 오해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서술상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요즘 유행하는 ‘팟캐스트’ 형식을 빌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른바 [나는 영조다]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팩션 형식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혹은 지워져 있던 ‘영조가 말하는 영조’인 셈이다.
이 책에서 영조는 어머니와 황형의 유지를 이어 ‘고추장’에 밥 비벼 먹기를 좋아하고 세누비 옷을 기피한 소박한 왕, 백성을 위해 애쓴 왕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때로는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열등감을 느끼는 옹졸한 남편으로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서 보여주었던 자신의 인간적인 결점과 잘못들까지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동안 영조를 둘러싼 숱한 오해와 편견을 깨고, 왕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다채로운 면모들-80여 년에 걸친 생애의 희로애락과 고독까지-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서술상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요즘 유행하는 ‘팟캐스트’ 형식을 빌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른바 [나는 영조다]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팩션 형식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혹은 지워져 있던 ‘영조가 말하는 영조’인 셈이다.
이 책에서 영조는 어머니와 황형의 유지를 이어 ‘고추장’에 밥 비벼 먹기를 좋아하고 세누비 옷을 기피한 소박한 왕, 백성을 위해 애쓴 왕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때로는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열등감을 느끼는 옹졸한 남편으로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서 보여주었던 자신의 인간적인 결점과 잘못들까지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동안 영조를 둘러싼 숱한 오해와 편견을 깨고, 왕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다채로운 면모들-80여 년에 걸친 생애의 희로애락과 고독까지-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저자 서문: 영조가 말하는 영조
프롤로그: 조선의 국왕, 인간이 '헌법'이어야 했던 그 고독한 자리의 기록
1장 어머니의 죽음 - 숙빈 최씨
어머니는 무수리가 아니었다 / 침방나인에서 숙원으로 / 어머니의 밀고? / 삼종의 혈맥 / 불효자의 눈물, 백성의 눈물
2장 형제의 죽음 - 경종 이윤
나뭇가지의 우애 / 장희빈의 아들이란 걸림돌, 천출이란 걸림돌 / 왕세제로 책봉되다 / 문고리 내시들의 벽 / 목호룡의 고변 / 게장과 생감에 얽힌 곡절 / 뗄 수 없는 꼬리표 / 왕이 가야 하는 길
3장 아내의 죽음 - 정성왕후 서씨
한 마디 말이 낳은 비극 / 부담 없는 여인 / 시대를 호령했을 여인, 정성왕후 / 영빈 이씨 / 외정의 동반자들 / '암행어사'가 아닌 어사 박문수 / 정성왕후의 마지막 말 / 60후반에 얻은 열여섯 살 신부
4장 자식의 죽음 - 사도세자 이선
사위들만 열거하는 심정 / 효장 세자 / 궁녀 순정의 매흉 사건 / 아들의 고마운 탄생 / 다섯 살배기 아들에게 양위? / 세자의 영혼에 드리워진 그늘 / 비극의 씨앗, 대리청정 / 의문스런 역모 사건 / 불통의 비극 / 세자의 비행과 살인 행각 / 세자의 모반? / 나경언 고변 사건 / 대처분 / 사도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다 / 마지막 남은 한마디
에필로그: 아들의 죽음, 그리고 세손 정조
영조 연표
프롤로그: 조선의 국왕, 인간이 '헌법'이어야 했던 그 고독한 자리의 기록
1장 어머니의 죽음 - 숙빈 최씨
어머니는 무수리가 아니었다 / 침방나인에서 숙원으로 / 어머니의 밀고? / 삼종의 혈맥 / 불효자의 눈물, 백성의 눈물
2장 형제의 죽음 - 경종 이윤
나뭇가지의 우애 / 장희빈의 아들이란 걸림돌, 천출이란 걸림돌 / 왕세제로 책봉되다 / 문고리 내시들의 벽 / 목호룡의 고변 / 게장과 생감에 얽힌 곡절 / 뗄 수 없는 꼬리표 / 왕이 가야 하는 길
3장 아내의 죽음 - 정성왕후 서씨
한 마디 말이 낳은 비극 / 부담 없는 여인 / 시대를 호령했을 여인, 정성왕후 / 영빈 이씨 / 외정의 동반자들 / '암행어사'가 아닌 어사 박문수 / 정성왕후의 마지막 말 / 60후반에 얻은 열여섯 살 신부
4장 자식의 죽음 - 사도세자 이선
사위들만 열거하는 심정 / 효장 세자 / 궁녀 순정의 매흉 사건 / 아들의 고마운 탄생 / 다섯 살배기 아들에게 양위? / 세자의 영혼에 드리워진 그늘 / 비극의 씨앗, 대리청정 / 의문스런 역모 사건 / 불통의 비극 / 세자의 비행과 살인 행각 / 세자의 모반? / 나경언 고변 사건 / 대처분 / 사도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다 / 마지막 남은 한마디
에필로그: 아들의 죽음, 그리고 세손 정조
영조 연표
책 속으로
여기서 제가 생전에 겪은 죽음」중에서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가장 의미가 깊었던 네 개의 죽음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어머니의 죽음,형제의 죽음,아내의 죽음, 자식의 죽음. 이를 통해 저는 참으로 어리석었던 모습까지 보여드리려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조선의 '헌법'으로서 제 몫을 다하기 위해,군왕으로서 피할 수 없이 마셔야 할 잔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어야 했던 모습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 pp.19-20「프롤로그」중에서
예순이 된 나이에 다시 한번 어머니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 불효자의 눈물은 어머니 생전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르리라는 다짐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이란 당쟁을 억제하며 쾌함을 경계하는 것,그리고 어려운 백성들을 잘 보살피라는 것이었지요. 생각하면 저는 역대 임금 중 가장 천한 피를 받았지만,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 가깝기도 했습니다. 궁을 나와 생활할 때는 서민 자제들과 어울리면서 백성의 삶과 희로애락을 직접 보고 느꼈고,어머니의 검소함과 자중함을 본받아 서민과 별 차이 없이 소박하게 살았습니다. --- p.68「제1장 어머니의 죽음-숙빈 최씨」중에서
“(너와 나는)궁궐에서 함게 애쓰며 지낸 지 오래더니,어려 해를 윗분들게 드릴 상약을 함께 걱정하였었지. 동궁에서 가까이 지내는 세월이 길었으니 코흘리개일 때 서로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뛰어다니며 놀기도 하지 않았느냐.” 이것은 나중에 제가 황형으로부터 왕세제에 책봉될 때 내리신 교서의 일부인데,의례적이고 엄숙한 표현 가운데 이처럼 애틋하면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도 들어 있었습니다. --- pp.76-77「제2장 형제의 죽음-경종 이윤」중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가 있을 때면 찾아가곤 했던 정성왕후의 빈자리는 날로 크게 다가왔습니다. 국정이든 집안일이든 골치 아픈 문제가 불거질 때면 저는 눈을 감고 이마에 내 천 자를 그린 채로,마음속으로 그녀를 찾는 것이 버릇이었습니다. '중전,당신이라면 뭐라고 하시겠소? 이럴 때 나는 어찌 해야만 하오?' 그리하여 제 삶에서 어쩌면 가장 잔혹하고 괴로운 선택을 해야만 할 순간에 내몰렸을 때도,저는 그녀를 생각했습니다. --- p.230「제3장 아내의 죽음-정성왕후 서씨」중에서
저는 그날 분명 제 손으로 세자를 뒤주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나 세자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제 결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만,일국의 세자이자 사랑하는 아들을 뒤주에 며칠 동안 감금해 굶겨 죽일 만큼 저는 미쳐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도록 했으되,한나절 정도만 들어가 있게 하고 일단 풀어줄 요량이었습니다. (…) 그런 극한의 경험이 세자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할 계기가 되지 않을까,저는 최후의 기대를 걸었던 것입니다. 사실 아주 연약한 기대였지만 말이죠. 실제 결과는 저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몹시 나쁜 것이었죠. --- p. 333「제4장 자식의 죽음-사도세자 이선」중에서
모든 정치적인 고려와 군주로서의 책임을 내려놓은 채,아들의 죽음을 마주 대한 한갓 아비로 돌아간 지금,생각한다는 '사' 한 글자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 군주로서 후계자에게 품었던 기대도 끝나고,부자로서의 악연도 끝나고,법과 원칙의 대표자로서 행해야 했던 책임도 끝난,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지금,제게는 다만 한 가지 말,사랑한다는 말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예순이 된 나이에 다시 한번 어머니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 불효자의 눈물은 어머니 생전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르리라는 다짐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이란 당쟁을 억제하며 쾌함을 경계하는 것,그리고 어려운 백성들을 잘 보살피라는 것이었지요. 생각하면 저는 역대 임금 중 가장 천한 피를 받았지만,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 가깝기도 했습니다. 궁을 나와 생활할 때는 서민 자제들과 어울리면서 백성의 삶과 희로애락을 직접 보고 느꼈고,어머니의 검소함과 자중함을 본받아 서민과 별 차이 없이 소박하게 살았습니다. --- p.68「제1장 어머니의 죽음-숙빈 최씨」중에서
“(너와 나는)궁궐에서 함게 애쓰며 지낸 지 오래더니,어려 해를 윗분들게 드릴 상약을 함께 걱정하였었지. 동궁에서 가까이 지내는 세월이 길었으니 코흘리개일 때 서로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뛰어다니며 놀기도 하지 않았느냐.” 이것은 나중에 제가 황형으로부터 왕세제에 책봉될 때 내리신 교서의 일부인데,의례적이고 엄숙한 표현 가운데 이처럼 애틋하면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도 들어 있었습니다. --- pp.76-77「제2장 형제의 죽음-경종 이윤」중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가 있을 때면 찾아가곤 했던 정성왕후의 빈자리는 날로 크게 다가왔습니다. 국정이든 집안일이든 골치 아픈 문제가 불거질 때면 저는 눈을 감고 이마에 내 천 자를 그린 채로,마음속으로 그녀를 찾는 것이 버릇이었습니다. '중전,당신이라면 뭐라고 하시겠소? 이럴 때 나는 어찌 해야만 하오?' 그리하여 제 삶에서 어쩌면 가장 잔혹하고 괴로운 선택을 해야만 할 순간에 내몰렸을 때도,저는 그녀를 생각했습니다. --- p.230「제3장 아내의 죽음-정성왕후 서씨」중에서
저는 그날 분명 제 손으로 세자를 뒤주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나 세자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제 결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만,일국의 세자이자 사랑하는 아들을 뒤주에 며칠 동안 감금해 굶겨 죽일 만큼 저는 미쳐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도록 했으되,한나절 정도만 들어가 있게 하고 일단 풀어줄 요량이었습니다. (…) 그런 극한의 경험이 세자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할 계기가 되지 않을까,저는 최후의 기대를 걸었던 것입니다. 사실 아주 연약한 기대였지만 말이죠. 실제 결과는 저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몹시 나쁜 것이었죠. --- p. 333「제4장 자식의 죽음-사도세자 이선」중에서
모든 정치적인 고려와 군주로서의 책임을 내려놓은 채,아들의 죽음을 마주 대한 한갓 아비로 돌아간 지금,생각한다는 '사' 한 글자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 군주로서 후계자에게 품었던 기대도 끝나고,부자로서의 악연도 끝나고,법과 원칙의 대표자로서 행해야 했던 책임도 끝난,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지금,제게는 다만 한 가지 말,사랑한다는 말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 pp.341-342「제4장 자식의 죽음-사도세자 이선」중에서
출판사 리뷰
그 복잡하고도 고독했던 왕, 영조
영조는 조선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52년간 왕위에 있었고, 83세에 죽었던 최장수 왕이다. 40년 넘게 재위했던 선조나 고종이 오욕의 시대를 살아갔고, 46년간 재위했던 아버지 숙종이 장희빈의 치마폭에 싸여 환국 정치를 일삼았던 변덕쟁이 군주라는 인상이 강한 반면, 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 등의 정치적 업적도 일구고 신분제 개혁과 청계천 준설 등 굵직한 업적도 남긴 명군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천한 출신이란 콤플렉스에 평생 시달렸고,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른 야심 가득한 권력자라는 의심과, 아들을 잔혹하게 죽인 비정한 아비라는 비극적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길었던 인생살이와 재위기간 만큼이나 참으로 복잡하고도 고독했던 군주, 인간 영조를 네 사람의 죽음을 통해 그려내고자 했던 저자는 1년여 간 집필에 ‘시달렸다’. 저자 함규진은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왕의 권력 획득방식과 행사 방식, 왕의 일상생활과 정치의 관계 등에 대한 꾸준한 연구로 『왕의 투쟁』 『왕이 못 된 세자』 『왕의 밥상』 등의 저서를 낸 바 있는 정치학자다. ‘왕 전문가’라 할만하다. 이 책은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왕이자 영정조 시대라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로 알려진, 하지만 아들을 뒤주에 집어넣어 죽인 비정한 왕으로 그려졌던 영조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 대신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내재적인 접근방식을 취했다. 그러다 보니 영조에 대한 숱한 왜곡과 오해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것도 요즘 유행하는 ‘팟캐스트’ 형식을 빌려 [나는 영조다]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팩션 형식을 과감히 빌렸다.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혹은 지워진 ‘영조가 말하는 영조’인 셈이다.
사도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9일만에 죽게 했다는 것은 이제 거의 정설(定說)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함규진은 이에 과감히 반론을 제기한다. 한나절 정도 뒤주에 가두긴 했지만 그날 밤 뒤주를 제발로 나온 사도세자를 보고는 격분해 강서원에 가뒀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뒤주가 아닌 강서원(講書院)에 9일간 갇혀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저자의 추정이다. 추정의 근거로 저자는 첫 번째, 반역도들에게조차 처형을 되도록 삼가고, 잔인한 고문을 폐지했던 영조가 친자식을 발 뻗고 누울 수조차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9일이나 가두어 굶겨죽이는 잔악무도한 형벌을 내릴 리 없다. 두 번째, 인원왕후와 정성왕후의 위패가 있고, 역대 왕실 어른들의 혼전으로 쓰인 신성하고 엄숙한 휘령전에 뒤주를 가두는 참상을 연출할 수 없다. 세 번째, 신료들이 다 보고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는 세자가 쏟아냈을 오물 냄새가 진동하고, 살려달란 세자의 외침과 광언이 들려올 텐데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하는 상식적인 의문에서다. 그랬다면 신료들의 거센 저항이 없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본문 330-333쪽) 저자는 이런 추정뿐만 아니라 현대에 와서 발견된 영조가 쓴 묘비명에서도 그 증거를 찾는다.
아아,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거이 하였겠느냐? 어찌 내가 즐거이 하였겠느냐? 네가 만약 일찍 마음을 잡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 강서원에 여러 날 가두어 둔 것(多日相守)이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 아니더냐? 백성을 위함이 아니더냐?
이런 생각을 하며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랬다. 그런데 9일째에 네가 뜻밖에 죽었다는 비보를 받았다. 너는 어째서 칠십의 아비에게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였단 말이냐.
-[영조어제 사도세자묘비명](본문 336쪽)
사도는 영조에게 칼끝을 겨누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울화에 치민 세자가 “동궁 후원에 땅을 파두고는 병장기와 말을 감추었다”거나 궁궐 수구문을 통해 대전에 잠입하려 했다며 모반을 꾀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고, 이를 근거로 사도가 영조에게 칼끝을 돌렸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이 때문에 영조가 세자를 처단한 것이란 주장도 있다. 더 나아가 1761년 세자의 발목을 잡은 평양 밀행이 그곳에 있는 반란 병력 시찰용이란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서도 필자는 터무니없는 추정이라고 일축한다. 땅굴을 파서 병사와 말을 감출만한 공간이 궁궐 내에 있겠는가? 병마용갱도 아니고? 왕을 죽이려면 암살이 낫지, 반란을 궐내에서 했겠는가? 이 외에도 설령 정신이 통제 불능까지 가지 않았던 세자가 부친 살해란 조선의 국기를 거스르는 역모를 결심할 수는 없을 것이란 게 상식이다. 평양병력 동원설 역시 반란군을 준비하려면 서울 근교에서 하지 그리 먼 평양에서 하겠냐는 것 역시 저자의 추정이다. 한마디로 사도가 영조를 시해하거나 모반하려는 추정은 허무맹랑하다는 것이다. 영화 [사도]에서처럼 세자가 칼을 들고 대전에 잠입하려는 장면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본문 305-309쪽)
3정승이 세자 비행의 책임을 지고 연이어 자살했다?
1761년 정월 초에 영의정을 지냈던 영중추부사 이현보가 죽더니, 다음 달에는 우의정 자리에 있던 민백상이 죽고, 또 그 다음 달에는 좌의정 이후가 죽고 말았다. 영조의 후대인 『고종실록』에는 세 달에 걸친 삼정승의 죽음이 세자의 책임을 지고 연이어 자살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써 지키려 했다는 주장이 지금도 나오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영조실록』『승정원일기』에 이를 뒷받침할 기록도 전혀 없고, 이들의 죽음을 전후해 영조가 어의를 보내 진료하게 하기도 하고,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국사를 논했다며 영조에 대한 또 하나의 무고로 본다.(본문 15-18쪽)
지워진 역사, 왜곡된 기록을 넘어서
영조는 즉위 초부터 이복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혹에 시달려야 했고 재위기간 내내 이인좌의 난 등 숱한 모반사건을 겪었다. 길었던 재위기간이었지만 그를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던 잔인한 아비라는 오명을 남게 했던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기록은 손자 정조에 의해 지워졌고, 그 뒤 숱한 왜곡과 오해 속에 남게 되었다.
저자는 “영조가 비록 성군의 이름에 합당한 인물이 못될지라도, 그가 벌인 행동, 고독 속에서 내린 결단을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또는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해서는, 그 본모습을 놓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영조의 고백을 대신했다. 책에서 영조는 어머니와 황형의 유지를 이어 ‘고추장’에 밥
비벼 먹기를 좋아하고 세누비 옷을 기피한 소박한 왕, 백성을 위해 애쓴 왕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때로는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열등감을 느끼는 옹졸한 남편으로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서 보여주었던 자신의 인간적인 결점과 잘못들까지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동안 영조를 둘러싼 숱한 오해와 편견을 깨고, 왕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다채로운 면모들-80여 년에 걸친 생애의 희로애락과 고독까지-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출간 타이밍을 놓친 영화 [사도] 관련 책?
영화 [사도]가 흥행의 막을 내리고 있다. 영업담당자가 서점에 책을 배본하다 마주한 서점담당자의 첫 반응은 ‘타이밍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영화 개봉을 전후해 내야지 왜 끝물에 내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출판사에서도 기왕이면 개봉에 맞춰서 냈으면 했지만 좀 더 온전한 책을 만들 욕심에 늦어지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의미가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후계자를 바란 아비의 비정함에 초점을 맞춘 영화와 직접적 관계가 있는 책도 아니고, 영화의 흥행에 기대 급조해낸 책이 아니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영조는 조선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52년간 왕위에 있었고, 83세에 죽었던 최장수 왕이다. 40년 넘게 재위했던 선조나 고종이 오욕의 시대를 살아갔고, 46년간 재위했던 아버지 숙종이 장희빈의 치마폭에 싸여 환국 정치를 일삼았던 변덕쟁이 군주라는 인상이 강한 반면, 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 등의 정치적 업적도 일구고 신분제 개혁과 청계천 준설 등 굵직한 업적도 남긴 명군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천한 출신이란 콤플렉스에 평생 시달렸고,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른 야심 가득한 권력자라는 의심과, 아들을 잔혹하게 죽인 비정한 아비라는 비극적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길었던 인생살이와 재위기간 만큼이나 참으로 복잡하고도 고독했던 군주, 인간 영조를 네 사람의 죽음을 통해 그려내고자 했던 저자는 1년여 간 집필에 ‘시달렸다’. 저자 함규진은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왕의 권력 획득방식과 행사 방식, 왕의 일상생활과 정치의 관계 등에 대한 꾸준한 연구로 『왕의 투쟁』 『왕이 못 된 세자』 『왕의 밥상』 등의 저서를 낸 바 있는 정치학자다. ‘왕 전문가’라 할만하다. 이 책은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왕이자 영정조 시대라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로 알려진, 하지만 아들을 뒤주에 집어넣어 죽인 비정한 왕으로 그려졌던 영조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 대신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내재적인 접근방식을 취했다. 그러다 보니 영조에 대한 숱한 왜곡과 오해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것도 요즘 유행하는 ‘팟캐스트’ 형식을 빌려 [나는 영조다]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팩션 형식을 과감히 빌렸다.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혹은 지워진 ‘영조가 말하는 영조’인 셈이다.
사도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9일만에 죽게 했다는 것은 이제 거의 정설(定說)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함규진은 이에 과감히 반론을 제기한다. 한나절 정도 뒤주에 가두긴 했지만 그날 밤 뒤주를 제발로 나온 사도세자를 보고는 격분해 강서원에 가뒀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뒤주가 아닌 강서원(講書院)에 9일간 갇혀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저자의 추정이다. 추정의 근거로 저자는 첫 번째, 반역도들에게조차 처형을 되도록 삼가고, 잔인한 고문을 폐지했던 영조가 친자식을 발 뻗고 누울 수조차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9일이나 가두어 굶겨죽이는 잔악무도한 형벌을 내릴 리 없다. 두 번째, 인원왕후와 정성왕후의 위패가 있고, 역대 왕실 어른들의 혼전으로 쓰인 신성하고 엄숙한 휘령전에 뒤주를 가두는 참상을 연출할 수 없다. 세 번째, 신료들이 다 보고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는 세자가 쏟아냈을 오물 냄새가 진동하고, 살려달란 세자의 외침과 광언이 들려올 텐데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하는 상식적인 의문에서다. 그랬다면 신료들의 거센 저항이 없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본문 330-333쪽) 저자는 이런 추정뿐만 아니라 현대에 와서 발견된 영조가 쓴 묘비명에서도 그 증거를 찾는다.
아아,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거이 하였겠느냐? 어찌 내가 즐거이 하였겠느냐? 네가 만약 일찍 마음을 잡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 강서원에 여러 날 가두어 둔 것(多日相守)이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 아니더냐? 백성을 위함이 아니더냐?
이런 생각을 하며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랬다. 그런데 9일째에 네가 뜻밖에 죽었다는 비보를 받았다. 너는 어째서 칠십의 아비에게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였단 말이냐.
-[영조어제 사도세자묘비명](본문 336쪽)
사도는 영조에게 칼끝을 겨누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울화에 치민 세자가 “동궁 후원에 땅을 파두고는 병장기와 말을 감추었다”거나 궁궐 수구문을 통해 대전에 잠입하려 했다며 모반을 꾀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고, 이를 근거로 사도가 영조에게 칼끝을 돌렸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이 때문에 영조가 세자를 처단한 것이란 주장도 있다. 더 나아가 1761년 세자의 발목을 잡은 평양 밀행이 그곳에 있는 반란 병력 시찰용이란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서도 필자는 터무니없는 추정이라고 일축한다. 땅굴을 파서 병사와 말을 감출만한 공간이 궁궐 내에 있겠는가? 병마용갱도 아니고? 왕을 죽이려면 암살이 낫지, 반란을 궐내에서 했겠는가? 이 외에도 설령 정신이 통제 불능까지 가지 않았던 세자가 부친 살해란 조선의 국기를 거스르는 역모를 결심할 수는 없을 것이란 게 상식이다. 평양병력 동원설 역시 반란군을 준비하려면 서울 근교에서 하지 그리 먼 평양에서 하겠냐는 것 역시 저자의 추정이다. 한마디로 사도가 영조를 시해하거나 모반하려는 추정은 허무맹랑하다는 것이다. 영화 [사도]에서처럼 세자가 칼을 들고 대전에 잠입하려는 장면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본문 305-309쪽)
3정승이 세자 비행의 책임을 지고 연이어 자살했다?
1761년 정월 초에 영의정을 지냈던 영중추부사 이현보가 죽더니, 다음 달에는 우의정 자리에 있던 민백상이 죽고, 또 그 다음 달에는 좌의정 이후가 죽고 말았다. 영조의 후대인 『고종실록』에는 세 달에 걸친 삼정승의 죽음이 세자의 책임을 지고 연이어 자살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써 지키려 했다는 주장이 지금도 나오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영조실록』『승정원일기』에 이를 뒷받침할 기록도 전혀 없고, 이들의 죽음을 전후해 영조가 어의를 보내 진료하게 하기도 하고,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국사를 논했다며 영조에 대한 또 하나의 무고로 본다.(본문 15-18쪽)
지워진 역사, 왜곡된 기록을 넘어서
영조는 즉위 초부터 이복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혹에 시달려야 했고 재위기간 내내 이인좌의 난 등 숱한 모반사건을 겪었다. 길었던 재위기간이었지만 그를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던 잔인한 아비라는 오명을 남게 했던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기록은 손자 정조에 의해 지워졌고, 그 뒤 숱한 왜곡과 오해 속에 남게 되었다.
저자는 “영조가 비록 성군의 이름에 합당한 인물이 못될지라도, 그가 벌인 행동, 고독 속에서 내린 결단을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또는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해서는, 그 본모습을 놓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영조의 고백을 대신했다. 책에서 영조는 어머니와 황형의 유지를 이어 ‘고추장’에 밥
비벼 먹기를 좋아하고 세누비 옷을 기피한 소박한 왕, 백성을 위해 애쓴 왕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때로는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열등감을 느끼는 옹졸한 남편으로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서 보여주었던 자신의 인간적인 결점과 잘못들까지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동안 영조를 둘러싼 숱한 오해와 편견을 깨고, 왕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다채로운 면모들-80여 년에 걸친 생애의 희로애락과 고독까지-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출간 타이밍을 놓친 영화 [사도] 관련 책?
영화 [사도]가 흥행의 막을 내리고 있다. 영업담당자가 서점에 책을 배본하다 마주한 서점담당자의 첫 반응은 ‘타이밍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영화 개봉을 전후해 내야지 왜 끝물에 내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출판사에서도 기왕이면 개봉에 맞춰서 냈으면 했지만 좀 더 온전한 책을 만들 욕심에 늦어지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의미가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후계자를 바란 아비의 비정함에 초점을 맞춘 영화와 직접적 관계가 있는 책도 아니고, 영화의 흥행에 기대 급조해낸 책이 아니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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