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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미학의 힘 (2024) - 대중을 현혹한 파괴의 예술가

동방박사님 2024. 5. 30.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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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안다. 뭘 더 알아야 하나?” 한 저명한 유대인 지도자가 히틀러의 젊은 시절에 관한 영화 제작 계획을 발표했을 때 한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히틀러에게서 인간성을 발견하려는 시도라면 말이다. 그가 증오와 폭력, 전쟁과 인종 학살을 행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역사상 독재자들은 대중을 통제하고, 존경을 얻고, 권력을 과시하고, 자신을 기념하는 수단으로 예술을 활용해 왔다. 하지만 히틀러는 ‘미학’을 활용하고 자신의 통치를 문화적 차원에서 정당화했다. 그는 차원이 다른 독재자였다. 파괴와 인종 청소는 새로운 건설로 가기 위한 길이었다. 예술은 권력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궁극적으로는 권력이 지향해야 할 목적이었다. 그는 제3제국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문화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 책은 정치인이 아닌 예술가로서 히틀러의 기록을 모았다. 미적 이상을 구현하려는 뒤틀린 욕망이 어떻게 세계를 불행에 빠뜨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 등장한다. 예술이 독재자에게 어떻게 아우라를 씌울 수 있는지, 독재자가 예술에 심취했을 때 어디까지 파괴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독자들은 예술에 심취한 히틀러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겠지만, 비로소 역사적 비극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목차

이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
머리말
참고문헌에 관하여

1부_마지못한 독재자

1장_보헤미안 예술 애호가
2장_문화 철학
3장_거대한 역설

2부_예술적인 지도자

4장_정치가인 예술가
5장_예술가인 정치가

3부_파괴의 예술가

6장_새로운 독일, 새로운 독일인
7장_죽음의 정화

4부_실패한 화가

8장_악전고투하는 수채화가
9장_위작 화가들과 수집가들

5부_예술 독재자

10장_모더니스트라는 적
11장_국가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실패
12장_예술품 수집가

6부_완벽한 바그너 숭배자

13장_히틀러의 바그너인가? 바그너의 히틀러인가?
14장_‘바이로이트 공화국의 총통’

7부_음악의 마스터

15장_에우테르페의 강간
16장_음악 후원가
17장_지휘자와 작곡가들

8부_건축의 마스터

18장_건축을 통한 불멸
19장_정치적 건축
20장_독일 리모델링
21장_미학과 교통
 

저자 소개

저 : 프레더릭 스팟츠 (Frederic Spotts)
미국의 전직 외교관이자 문화 역사가. 스와스모어 대학교를 졸업하고 터프스 대학교 플레처 스쿨에서 석사 학위를,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년 넘게 미국 외무부에 몸담으며 워싱턴 DC, 프랑스 파리, 서독 본, 이탈리아 로마에서 근무했다. 유럽의 정치와 문화 분야에 관한 폭넓은 저술 활동을 했으며, 이 책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국제문제연구소에 방문학자로 재직 중이던 2003년에 썼다. 이외...
 
역 : 윤채영
서울대학교 미학과,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예술과 사회, 정치와 윤리 사이의 관계 규명에 관심이 많으며 저현고등학교에서 국어, 논술, 미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제임스 앙소르』『마크 로스코』『후쿠자와 유키치다시 보기』가 있다.

책 속으로

예술적 재능은 독일인들을 장악한 히틀러의 수수께끼 같은 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스탈린이 테러를 통해 성취한 것을 히틀러는 유혹을 통해 성취했다. 그는 상징, 신화, 의례, 스펙터클, 사적인 드라마를 매개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를 활용하여 대중에게 다가갔다. 당대의 어떤 다른 지도자도 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그는 독일인에게서 민주 정부를 앗아갔지만, 그가 선사한 정치 참여 감각이란 확실히 더욱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인들을 단순한 구경꾼이 아닌 국가사회주의 극장의 참여자로 변모시켰다.
--- p.17~18, 「머리말」중에서

전쟁이 끝나고 1920년대 초반이 되어서도 히틀러는 계속 예술가임을 자임했다. 퀸스틀러(예술가)에서 말러(화가), 쿤스트말러(순수 화가), 아르키텍투어말러(건축가), 때로 슈리프츠텔러(작가)라며 자신을 가리키는 명칭이 계속 바뀌었지만 말이다. 사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는 완전히 방황하는 상태였다. 화가의 경력을 다시 시작할 만한 전망도 보이지 않았고, 다른 대안도 없었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당시 무명이었던 내게는 유의미한 활동에 필요한 아무런 기반도 없었다.”라고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군에 남게 되었다가 준군사조직인 국가방위군의 ‘교육 간부’가 되었다. 장병들을 격려하고 선동하는 애국 연설을 함으로써 군의 사기를 고취하는 역할이었다. 그는 빈 시절 이후로 범독일 민족주의에 열광하는 태도를 취해 왔으나 정작 정치적 경력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청중을 이해하고 조종하는 능력만큼은 매우 뛰어나서 자신의 대중 선동 연설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진가를 발견했다. 정치가 히틀러를 찾아왔지, 히틀러가 정치를 찾아가지 않았다.
--- p.37~38, 「1장 〈보헤미안 예술 애호가〉」중에서

히틀러는 고급문화가 사실상 지배력을 행사했던 20세기 이전 시기를 부러운 시선으로 회고했다. 이 시기는 교양을 갖춘 후원자와 문화 엘리트가 취향에 관한 지침을 내릴 수 있었던 시기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그러한 시절은 이제 영영 지나간 과거가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문화 정책에는 엄청난 모순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는 예술가들에게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대중들에게는 그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을 향유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남은 인생에서 그가 독일인들에게 강요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미적 이념과 취향─그들이 함께 공유하든 말든─이었다.
--- p.68, 「2장 〈문화 철학〉」중에서

러시아 침공 당시 독일국방군이 모스크바 바로 코앞까지 진격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엿보였을 때, 그는 전쟁이란 쉽게 잊히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질 때쯤에는 아무도 30년 전쟁에 관해 기억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쟁이 끝나고 아무도 1700년경의 전투에 관해 기억하지 못했고, 스당 전투의 기억은 라이프치히 전투의 기억을 밀어냈다. 타넨베르크 전투나 우리가 치렀던 폴란드와 서부전선 전투의 기억도 이번에 치르고 있는 동부전선 전투가 끝나면 희미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동부전선 전투의 기억도 똑같이 잊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세운 건축물만큼은 굳건히 서 있을 것이다.” 그는 권력이란 ‘문화적 경이’를 만들어내는 데 써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전쟁에 든 비용보다 훨씬 많은 돈을 문화사업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전쟁을 문화국가 건립이라는 최종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 간주했다.
--- p.71, 「3장 〈거대한 역설〉」중에서

거대하고 입체적인 무대 효과가 히틀러의 특기였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청중들─독일 대중─에게 퍼레이드, 페스티벌, 헌정식, 기념식, 경례, 횃불 행렬 같은 정교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는 제작자, 감독, 무대 디자이너 그리고 주연 배우를 맡았다. 그만큼 오페라나 연극 공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준비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공연의 세부 사항들을 직접 챙겼다. 압도적인 시청각 효과─수천 개의 깃발과 기치, 페넌트, 장식 리본 그리고 플래카드, 이러한 것들이 보여주는 수천의 색상, 조명과 서치라이트, 횃불 행진이 자아내는 기대감, 군악대와 가수들에게서 느껴지는 전율, 팡파르, 사이렌, 축포 그리고 축하 비행이 주는 흥분─이 모든 것들로부터 연타당한 군중은 거의 넋이 나가버렸다.
--- p.112, 「4장 〈정치가인 예술가〉」중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히틀러가 예술가들을 온화한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점이다. 하인리히 호프만의 말에 따르면 히틀러는 예술가들이 ‘너무나 불안정하고, 너무나 독립적이며, 너무나 제멋대로’라고 생각했다. 슈페어는 이를 좀 더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모두 똑같다고 생각했다. 모두 정치적 백치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온정 어리고 자비로운 통치 아래 그들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바보들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었다. 히틀러는 사실 예술가들의 정치적 견해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떤 예술가에게도 국가사회주의를 강요할 생각이 없다.”라고 했다. 당에 가입했거나 에밀 놀데처럼 열렬한 나치 추종자인 예술가도 있었지만, 그런이들을 대하는 히틀러의 태도는 쌀쌀맞기만 했다. 나치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예술가들도 예술적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예술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 p.152~153, 「5장 〈예술가인 정치가〉」중에서

다리우스건, 아우구스투스건, 루이 14세건, 스탈린이건, 히틀러건 모든 절대 권력자들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예술을 조작하고 거대한 건물을 지어 압도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주장과 자기 숭배를 동기로 삼는다. 그들은 자신의 낭비에 어떤 제약이 걸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히틀러는 다른 이들과 차원이 다르다.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데 미학을 활용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지배를 규정하고 정당화한 사람도 그가 유일하다. 예술에 관한 그의 관심은 사적이고 또 진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매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플라톤처럼 예술을 통제하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비극이 있다. 차라리 그가 무솔리니처럼 예술에 아무 관심도 없고 무지한 속물이었더라면, 그는 덜 파괴적이었을 것이다.
--- p.606, 「맺음말」중에서

출판사 리뷰

“예술은 어떻게 파시즘의 무기가 되는가”
독재자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 문제적 저작


히틀러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그를 반유대주의와 학살, 전쟁과 파괴를 일으킨 정치적 인물로만 다루어 왔다. 히틀러 전기를 쓴 역사학자 이언 커쇼도 “정치 바깥에서 히틀러의 삶은 대체로 공허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인종주의만큼이나 예술에 관해서도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정치적 행위를 단순한 권력욕의 결과로 본다면 이 커다란 비극의 절반만 보는 셈이다.

이 문제적 책은 2002년 출간되었을 당시 「인디펜던트」로부터 그해 최고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됐다. “철저하게 새로운 해석”, “근본적인 재평가”, “지금까지 정치나 인물 전기 분야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참신한 시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컨템퍼러리 리뷰」는 “이제부터 우리는 히틀러에 관해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고 긍정적으로 논평했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울적한 기분이 든다”라면서도 나치즘에 관한 주요 연구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평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책이 유대인 저널과 백인 민족주의 커뮤니티인 스톰프런트에서 동시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미국의 전직 외교관이자 문화 역사가인 프레더릭 스팟츠가 쓴 이 책은 아돌프 히틀러의 예술가적 측면이 정치적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독창적으로 탐구한다. 20년 넘게 미국 외무부에 몸담으며 유럽 주요 도시에서 근무, 유럽 정치와 문화에 대해 폭넓은 연구를 해온 저자의 학문적 엄밀함과 필력이 빛을 발한다. 이 책에서 히틀러는 단순한 악의 아이콘이 아니라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정치가로 재조명된다. 그의 복잡한 성격과 정치적 행동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 책은 히틀러가 어떻게 대중을 선동하고, 나치즘을 문화적 운동으로 발전시켰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독자들은 예술과 정치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예술이 어떻게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예술,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도 나치즘의 연구를 심도 있게 해줄 것이다.

“파괴는 건설로 가는 길이었다”
유럽 재건의 꿈과 창조적 열망의 이중성


히틀러는 자신을 본질적으로 예술가로 여겼다. 젊은 시절 그는 화가를 꿈꾸었고, 빈 미술 아카데미에 두 번 지원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러한 실패는 그의 자아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로 인해 그는 예술가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경로를 찾게 되었다. 바로 정치였다. 그러나 정치에 입문한 후에도 히틀러는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독일과 유럽을 재건하겠다는 강렬한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건축, 회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자신의 비전을 펼쳤으며,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국민을 결집하고자 했다. 전쟁은 그러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과정이었다. 설령 그 전쟁이 유럽을 파괴하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더라도 말이다. 그에게 파괴는 건설로 가는 길이었다.

히틀러의 예술가적 면모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뉘른베르크 당대회를 비롯한 장대한 퍼포먼스와 상징적인 연출을 즐겼다. 그의 연설은 철저히 연출된 이벤트였으며, 이를 통해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밤 시간대의 조명을 활용한다거나, 빨강과 검정의 스바스티카 깃발로 연단을 장식하는 등,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대중의 감정을 조작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성공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퍼포먼스가 대중들에게 정치 참여 감각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그가 대중을 파괴적인 전쟁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이 책에서 히틀러의 예술가적 기질은 그의 인간적 면모보다는 그가 지닌 파괴적 힘과 창조적 열망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히틀러는 문화국가를 표방한 수많은 예술 정책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 결과는 비극적인 전쟁과 파괴일 뿐이었다. 이 책에 담긴 수많은 인용문과 풍부한 사진 자료들은 발터 베냐민이 이야기했던 ‘정치의 예술화’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예술과 정치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합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예다.

문화는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이자
권력이 추구하는 목적 그 자체였다


히틀러의 예술 정책의 핵심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모든 독일인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따르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제3제국의 예술 정책은 선전부 장관과 제국문화회의소 소장인 요제프 괴벨스에게 맡겼다. 괴벨스는 예술 작품을 철저히 검열하고, 나치 이념에 부합하는 작품만을 전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작품이란 철저하게 히틀러의 입맛에 맞아야 하는 것이었다. 정책들은 철저하게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실행되었다. 게다가 그 지시는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하인리히 호프만, 게르디 트루스트, 아르노 브레커, 벤노 폰 아렌트, 한스 포세 등 히틀러가 예술적 식견을 인정한 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히틀러는 건축 분야에서는 알베르트 슈페어와 헤르만 기슬러 같은 건축가를 통해 거대한 공공건물과 기념비적인 구조물을 설계하고 건설했다. 특히 제3제국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펴낸 바 있는 슈페어는 히틀러의 비전을 충실히 따르며, 베를린의 ‘게르마니아’ 프로젝트를 포함한 여러 상징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조각 분야에서 대표적인 사례는 아르노 브레커와 요제프 토락이다. 히틀러는 특히 브레커에게 대규모 작업실을 제공하고, 수많은 공공 조각 프로젝트를 맡겼다. 브레커는 이상적인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을 표현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음악에 있어서 히틀러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숭배자였다. 그는 바그너의 후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바그너의 음악은 히틀러에게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동시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통해 독일 민족의 영혼을 표현하고자 했다. 단순한 예술적 동경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자신의 이념을 확산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렇게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 이념을 홍보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당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오페라를 위한 축제를 지원했다. 그 밖에도 지크프리트 바그너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음악가들을 지원하며, 그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념을 확산시키고자 했다.

독일을 매혹시킨 딜레탕트
편협한 취향이 비극이 되기까지


독일을 ‘문화 국가’로 재건하고자 했던 히틀러는 모든 예술과 문화를 철저히 통제하려 했다. 특히 모더니즘 예술을 독일 문화의 타락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예술이 유대인의 영향 아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이 언론과 예술 평론을 통해 모더니즘을 확산시키고, 이를 통해 독일의 전통적인 가치를 훼손한다고 믿었다??. 특히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모더니즘 예술을 구매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챙기며, 독일의 문화적 순수성을 해친다고 비난했다. 이는 예술계에서 유대인의 영향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큐비즘, 다다이즘, 표현주의 등을 ‘타락한 예술’로 간주하고 배격했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같은 화가들은 히틀러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작품이 제거되고 전시가 금지되었으며, 퇴폐미술전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1937년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에서는 650점 이상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이후 파괴되거나 판매 금지되었다. 전통적인 미학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유대인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이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이러한 탄압은 많은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나 망명하게 했다.

결국 제3제국의 문화국가 비전이란 히틀러 자신의 예술관을 독일 국민에게 강요한 것에 불과했다. 그 결과로 독일 예술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문화국가라는 비전을 내세운 히틀러가 정작 예술과 문화에서도 파괴를 가져왔던 셈이다. 게다가 반유대주의는 예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제3제국 정책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처럼 커다란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히틀러의 예술관과 문화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이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비극의 이면이다.

추천평

제3제국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열쇠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정치 이외에 삶이 없었다는 견해와 달리 히틀러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인종주의만큼이나 강렬했다. 이 책은 히틀러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었던 극악한 범죄를 위장하기 위해 예술을 사용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위대한 아리안 국가에 대한 히틀러의 비전은 정치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표현되었다. 문화는 권력이 열망해야 하는 목적일 뿐 아니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뉴요커
히틀러는 자신이 결코 정치가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주장했다.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 연구의 권위자인 스팟츠는 화가로서의 실패한 경력, 유대인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숙청, 예술가들에 대한 개인적인 후원 등 히틀러의 예술 활동을 파노라마처럼 드러낸다. 스팟츠는 ‘진정한’ 독일 예술이 전례 없이 번성할 수 있는 제국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열망에서 히틀러의 본질을 찾는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토마스 만은 1938년 에세이 「브라더 히틀러」에서 히틀러가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느꼈다. 발터 베냐민은 그의 널리 알려진 말처럼 파시즘이 정치를 미학화한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통찰이 『히틀러와 미학의 힘』의 출발점이다. 저자의 말처럼 히틀러의 문제는 미적 충동과 미적 재능의 혼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예술이 히틀러의 삶과 국가사회주의의 정치 드라마에서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 가디언
스팟츠에 따르면 히틀러가 사회를 파괴한 건 예술가의 눈에 비친 이미지에 따라 사회를 재창조하려는 그의 미적 본성 때문었다. 유대인에 대한 성전도 히틀러가 모더니스트들이 독일 문화를 파괴했다고 간주한 결과였다. 이 책은 히틀러가 직접 그린 그림과 수많은 사진 자료를 통해 히틀러의 예술관을 드러낸다. 학문적 엄밀함과 예술적 기교를 통해 일반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학자들의 관심까지 사로잡을 책을 썼다.
- 라이브러리 저널
위대한 화가가 되겠다는 실현되지 못한 꿈과 수채화가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던 히틀러는 결국 대중 연설, 군대, 과대망상증에서 출구를 찾았다. 스팟츠는 독재자 히틀러의 미적 감성이 그의 정치에 화려한 색채를 불어넣었으며, 그가 독일 제국에 관한 자신의 비전을 문화적인 관점에서 정의 내리도록 해주었다고 주장한다. 건축가, 예술 후원자이자 수집가, 바그너 숭배자, 아우토반의 건설자로서 히틀러와 인종주의자, 파시스트, 살인광으로서 히틀러를 신선하고 간결하며 설득력 있게 통합한다.
- 북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