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나치 독일에 대한 선구적인 저작 『제3제국사』
초판 발행 63년 만에 첫 정식 완역!
나치 독일을 다룬 최초의 통사이자 대표적인 대중 역사서. 초판 출간(1960) 1년 만에 양장본과 보급판 각각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축약판으로 연재되어 1200만 독자에게 읽혔다. 20세기 말까지 10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2011년 『타임』이 100대 논픽션에 선정하기도 했다. 이 분야의 수많은 저작을 제치고 여전히 제3제국 통사를 찾는 독자들에게 제1순위로 선택받고 있다. 한국에서 정식으로 완역된 것은 초판 출간 63년 만인 이번이 처음이다.
192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유럽에서 나치를 직접 취재한 기자인 지은이 샤이러는 1950년대에 막 공개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제3제국 시대라는 드라마의 주연들과 조연들, 단역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당대의 인물들이 눈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듯한 생동감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는 단순히 인용을 많이 하기 때문에 생기는 효과가 아니다. 샤이러가 7년간 독일에 주재하면서 실제 인물들을 매일같이 관찰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말을 (엿)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실감할 수 없는 전체주의 사회의 분위기에 둘러싸여 지냈기 때문이며, 히틀러가 최면을 걸듯이 불러일으키는 집단 히스테리 상태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럽 통신원으로서의 특별한 경험에 저널리스트로서의 단련된 필력과 서사를 엮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더해진 결과, 이 책은 오래도록 읽히는 현대의 고전이 되었다.
목차
제1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제1장 제3제국의 탄생
제2장 나치당의 탄생
제3장 베르사유, 바이마르, 맥주홀 폭동
제4장 히틀러의 정신과 제3제국의 뿌리
제2부 승리와 공고화
제5장 권력에 이르는 길: 1925~1931
제6장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나날: 1931~1933
제7장 독일의 나치화: 1933~1934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제3부 전쟁에 이르는 길
제9장 첫 단계: 1934~1937
제10장 이상하고 불길한 막간: 블롬베르크, 프리치, 노이라트, 샤흐트의 몰락
제11장 병합: 오스트리아 강탈
제12장 뮌헨에 이르는 길
제13장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멸
제14장 폴란드의 차례
제15장 나치-소비에트 조약
제16장 평화의 마지막 나날
제17장 제2차 세계대전 개시
제4부 전쟁: 초기 승리와 전환점
제18장 폴란드 함락
제19장 서부의 앉은뱅이 전쟁
제20장 덴마크와 노르웨이 정복
제21장 서부전선 승리
제22장 바다사자 작전: 영국 침공 좌절
제23장 바르바로사: 소련의 차례
제24장 전세 역전
제25장 미국의 차례
제26장 대전환점: 1942년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
제5부 종말의 시작
제27장 신질서
제28장 무솔리니의 실각
제29장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과 히틀러 살해 시도
제6부 제3제국의 몰락
제30장 독일 정복
제31장 신들의 황혼: 제3제국의 마지막 나날
책 속으로
---「제1장 제3제국의 탄생, 21-22쪽」중에서
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검열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신문과 라디오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대다수 독일인과 달리 나는 매일 외국 신문들, 특히 하루 늦게 도착하는 런던, 파리, 취리히의 신문들을 접할 수 있었고 또 주기적으로 BBC를 비롯한 외국 방송들을 들었음에도, 직업상 부득이하게 날마다 많은 시간을 들여 독일 신문을 샅샅이 훑고, 독일 라디오를 체크하고, 나치 관료와 상의하고, 당 집회를 보러 가야 했다. 나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고 정보원이 나치인 경우에는 처음부터 의구심을 품었음에도, 몇 년 동안 조작되고 왜곡된 정보를 꾸준히 접하다 보니 특정한 인상을 받게 되고 종종 그런 정보에 호도되는 경험을 하면서 깜짝 놀라고 때로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몇 년간이든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정권의 계획적이고 끊임없는 선전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439-440쪽」중에서
사실 히틀러는 나날의 세세한 통치 업무에 싫증을 냈고, 힌덴부르크 사후에 자기 입지를 공고히 다진 뒤로는 그것을 대부분 보좌관들에게 넘겼다. 괴링, 괴벨스, 힘러, 라이, 시라흐 같은 오랜 당 동지들에게는 저마다 권력의 제국을 ─ 아울러 대개 이권을 ─ 쌓아올릴 재량권이 주어졌다. 초기에 샤흐트에게는 정부 지출을 확대하기 위해 어떠한 술책으로든 자금을 조달할 재량권이 주어졌다. 이 사내들이 권력이나 이권을 놓고 충돌할 때면 늘 히틀러가 나섰다. 히틀러는 그런 다툼에 특별히 개의치 않았다. 실은 그런 다툼을 곧잘 조장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최고 중재자로서의 자기 위신을 높이고 이 사내들이 자신에 맞서 뭉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486쪽」중에서
겨우 4년 반 만에 이 미천한 출신의 남자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혼란스러운 데다 거의 파산한 상태였던 독일, 유럽의 강대국들 중 최약체였던 독일을 구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심지어 영국이나 프랑스까지 포함해 다른 모든 국가들을 벌벌 떨게 하는 지위로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독일이 어지러울 정도로 상승하는 동안 베르사유의 승전국들은 그 어떤 단계에서도, 독일을 제지할 만한 힘이 있을 때조차 감히 제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실제로 히틀러가 이룬 최고의 정복으로 기록된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기를 쓰며 총통을 지지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히틀러를 놀라게 한 것은 ─ 베크 장군이나 하셀 장군 같은 소규모 반대파들은 확실히 경악했다 ─ 영국 및 프랑스 정부를 좌우하는 사람들(총통은 뮌헨 협정 이후 사석에서 이들을 가리켜 경멸조로 “버러지들”이라고 불렀다) 중 그 누구도 나치 지도자의 연이은 공세 행동에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이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제12장 뮌헨에 이르는 길, 738쪽」중에서
실제로 이 과대망상증 독재자는 곧 역대 독일 제국들을 통틀어 어느 누구도 ─ 황제든 국왕이든 대통령이든 ─ 보유하지 못했던 권한을 합법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키웠다. 1942년 4월 26일, 총통의 발의라면 무턱대고 찬성하는 제국의회는 법률 하나를 통과시켰다. 그 내용인즉 히틀러에게 모든 독일인의 생사를 좌우할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고 그 권한을 방해하는 다른 모든 법률의 효력을 정지한다는 것이었다. 조문을 살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을 지경의 법률이었다.
“독일 국민이 존속하느냐 절멸하느냐 하는 투쟁에 직면한 이번 전쟁에서 총통은 승리를 촉진하거나 쟁취하는 데 기여하는 모든 권리를 요구하고 보유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의 지도자, 군대의 최고사령관, 정부의 수반과 최고행정관, 최고법관, 당의 수장의 자격으로 총통은 ─ 기존의 법적 규제에 구애받는 일 없이 ─ 필요할 경우 일반 병사와 장교, 관료나 법관의 지위 고하, 당직자의 지위 고하, 노동자와 고용주를 막론하고 모든 독일인에게 의무를 다하도록 가용한 모든 수단으로 강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의무를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할 경우, 총통은 신중하게 심사한 뒤, 소위 마땅히 보유하는 권리와 상관없이, 규정된 절차를 안내할 필요 없이, 위반자에게 응당한 처벌을 내리고 위반자를 그의 직책, 계급, 지위에서 배제할 자격을 지닌다.”
실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지도자에 그치지 않고 ‘법’ 자체가 된 것이다. 심지어 중세에도, 더 거슬러 올라가 야만적인 부족사회에서조차 명목상으로나 법률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이 정도로 전제적인 권한을 행사한 독일인은 일찍이 없었다.
---「제24장 전세 역전, 1492-1493쪽」중에서
4월 22일은 히틀러의 파멸의 길에서 마지막 전환점이 되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그날 이른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전화기에 매달려 슈타이너의 반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여러 사령부에 확인하려 했다. 아무도 몰랐다. 수도에서 남쪽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반격에 나서기로 되어 있었지만, 콜러 장군의 항공기들도, 지상군 지휘관들도 그 전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슈타이너의 부대는 고사하고 슈타이너도, 비록 존재하긴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분노 폭발은 오후 3시 벙커의 일일 군사회의에서 일어났다. 히틀러는 노기등등하게 슈타이너의 소식을 요구했다. 카이텔도, 요들도, 다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장군들에게는 다른 소식이 있었다. 슈타이너를 지원하기 위해 베를린 북부의 병력을 철수시킨 바람에 그곳 전선이 너무 약해져서 소련군이 돌파했고 지금 전차들이 도시의 경계 안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이었다. 최고사령관에게는 견딜 수 없는 소식이었다. 생존한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히틀러가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증언한다. 히틀러는 생애 최대로 분기탱천했다. 이제 끝장이라며 절규했다. 모두가 나를 저버렸다. 배반, 거짓말, 부패, 비굴함밖에 없다. 다 끝났다. 좋다, 나는 베를린에 남을 테다. 제3제국 수도의 방위를 직접 떠맡을 테다. 다른 사람들은 원한다면 떠나도 좋다. 이 장소에서 나는 최후를 맞을 테다.
출판사 리뷰
★★★ 『타임』 100대 논픽션 선정 ★★★
★★★ 전미도서상 캐리-토머스상 수상 ★★★
나치 독일에 대한 선구적인 저작 『제3제국사』
초판 발행 63년 만에 첫 정식 완역!
『제3제국사』는 영어권에서 나치 독일을 다룬 대중 역사서를 대표하는 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과 15년 만인 1960년 10월 초판이 출간된 뒤, 1년 만에 양장본과 보급판 각각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1962년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축약판으로 연재되어 1200만 독자에게 읽혔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서독의 정치권, 학계, 언론계 등에서는 이 책의 내용에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그런 비판이 오히려 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을 제외한 서구의 언론계에서 두루 호평을 받은 이 책은 1961년 논픽션 부문 전미도서상과 캐리-토머스상을 수상했다. 20세기 말까지 1000만 부 이상 판매된 이 책은 2011년 『타임』이 선정한 100대 논픽션에 들어가기도 했다.
나치 독일은 세계적으로 관심도가 높은 역사 주제이자 그만큼 철저한 연구가 이루어진 분야다. 이미 2000년에 나치즘에 관한 연구 문헌이 3만 7000종을 넘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제3제국 시대를 시간순으로 서술하는 통사로서 일반 독자가 읽을 만한 책은 지금도 손에 꼽을 만큼 적다. 그중에서 첫선을 보인 통사가 바로 이 책이다. 최초의 통사인 데다 지은이와 출판사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판매된 까닭에, 이 책은 미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와 전후 1960년대에 성년이 된 세대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전후 세대의 경우 이 책을 통해 나치 독일을 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로도 이 책에 대한 선호도는 떨어지지 않았고, 이 분야의 수많은 저작을 제치고 여전히 제3제국 통사를 찾는 독자들에게 제1순위로 선택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축약본이나 일본어판의 중역본 등이 나오긴 했지만, 정식으로 완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만큼 정확하고 깔끔한 번역으로 명성이 높은 이재만 번역가가 심혈을 기울여 우리말로 옮겼다. 더군다나 우경화를 넘어서 극우화의 경향을 보이는 작금의 시대상에 비추어보면, 아주 적절한 시기에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윌리엄 샤이러는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이 대작을 쓰게 되었을까?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지은이 윌리엄 샤이러는 대학 졸업 후 1925년 『시카고 트리뷴』의 파리 지부에 입사해 1932년까지 유럽 통신원으로 일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듬해인 1934년에 유니버설 통신사의 베를린 지국에 채용되어 나치 독일을 본격적으로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제국의회 의사당을 드나들며 히틀러의 연설을 꼬박꼬박 챙겨 듣는가 하면 자르 지역 반환과 라인란트 재무장 등 히틀러의 평시 성취를 보도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간에는 독일 정부가 대외적 이미지 제고와 선전을 위해 유대인 박해를 감추고 있다고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가 괴벨스의 선전부에 의해 공개 비판을 받고 독일에서 추방당할 뻔하기도 했다.
1937년, 미국 주요 라디오 방송사 CBS의 유럽 지국장 에드워드 R. 머로의 제안으로 입사한 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실시간 뉴스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 저널리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이 ‘월드 뉴스 라운드업’은 지금까지도 미국의 최장수 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으로 남아 있다.
개전 후 독일의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소식을 전하고 종군기자로서 서부전선의 독일군을 따라가며 폴란드 침공과 파리 진격을 직접 보도했다. 하지만 나치 당국의 보도 검열이 심해지고 게슈타포가 샤이러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우려고까지 하자 결국 1940년 12월,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전후(戰後) 1950년대에 불어닥친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공산주의 동조자로 매도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탓에 언론계에서 퇴출된 샤이러는 근 5년간 대학 강의로 생계를 꾸려야 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에게 저술을 위한 시간적 여유를 주었고, 때마침 1955년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문서가 공개되어 제3제국에 관한 방대한 양의 문헌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압수된 독일 문서를 읽어나가던 샤이러는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유럽에 주재하며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제3제국 인사들을 취재한 자신과 같은 언론인도 이 독재정의 흑막 뒤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렇게나 몰랐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리고 이 놀라움은 곧 집필의 동기가 되었다. 바로 독일 문서, 뉘른베르크 재판의 심문 기록과 증언, 제3제국 주요 인물들의 회고록과 일기, 그리고 본인의 경험에 근거해 나치 독일의 흑막 뒤에서 벌어진 사태를 일반 독자들에게 충실히 알려주는 통사를 써보겠다는 동기였다. 이 작업은 샤이러에게 일종의 사회적 책무로 다가왔을 것이다. 누군가 그런 책을 써야 한다면, 그 적임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5년여의 시간을 집필에 매진해 1960년에 『제3제국사』를 펴냈다.
직접 취재·경험하고 방대한 공식 문서를 탐독해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다
“어떤 이들은 제3제국의 역사를 쓰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그런 과제는 과거를 조망할 관점을 얻을 수 있는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렇게 기다린 것은 서술에 필요한 믿을 만한 자료를 손에 넣기까지 그만한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장차 과거를 조망할 관점을 얻을 수 있다 해도, 저자가 자신이 쓰려는 시대의 생활상이나 분위기, 또는 역사상의 인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까닭에 무언가를 놓치게 되지 않을까?” ─ 〈머리말〉에서
샤이러는 독특한 방식으로 저술했다. 보통의 역사학자가 동료 연구자들의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논제를 정하고 해석과 분석을 개진하는 식으로 쓴다면, 샤이러는 역사학자들의 저작을 참고하되 무엇보다 막 공개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제3제국 시대라는 드라마의 주연들과 조연들, 단역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들의 말과 글을 그대로 전하는 직접 인용의 비중이 유달리 높다. 문장 단위뿐 아니라 문단 단위의 인용도 수두룩하다. 샤이러는 되도록 자신의 서술을 줄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려 한 것이다. 특히 히틀러의 목소리를 질리도록 들려준다. 이런 서술방식은 역사적 인물들이 눈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듯한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이는 단순히 인용을 많이 하기 때문에 생기는 효과가 아니다. 샤이러가 7년간 독일에 주재하면서 이 책에서 서술하는 실제 인물들을 매일같이 관찰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말을 (엿)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실감할 수 없는 전체주의 사회의 분위기에 둘러싸여 지냈기 때문이며, 히틀러가 최면을 걸듯이 불러일으키는 집단 히스테리 상태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직접 경험이 있었기에 샤이러는 자신의 서술에 생동감을 입힐 수 있었으며, 이는 나치 시대를 겪지 않은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누릴 수 없는 샤이러 세대만의 이점이다. 이렇듯 유럽 통신원으로서의 특별한 경험에 저널리스트로서의 단련된 필력과 서사를 엮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더해진 결과, 이 책은 오래도록 읽히는 현대의 고전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원서 초판이 나온 지 63년 만에야 정식 완역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으니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이 시점은 의미가 있다. 딱 100년 전에 히틀러와 초기 나치당이 소위 ‘맥주홀 폭동’ 사건(1923년 11월, 제3장 참조)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아직 세력이 크지 않고 설익은 이 집단은 와해되고 히틀러는 반역죄로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뒤 히틀러는 독재를 시작하고 독일은 나치화되었다. 왜 그들은 히틀러를 막지 못했을까? 아직 세력이 크지 않던 1920년대에 이미 히틀러는 공공연하게 자신의 포부와 계획을 밝혔지만(특히 1924년부터 집필한 『나의 투쟁』에서 노골적으로 표방했다), 불안정한 독일 사회의 분위기와 무능력한 정치가들로 인해 히틀러는 정치 생명이 위태로워지기는커녕 애국자이자 영웅으로 비쳤다. 그로 인한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이 책을 통해 더욱 상세하게 알 수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달라졌을까? 오히려 우리는 이 책이 더욱 유의미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다. 특히 히틀러와 나치당이 부상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제1권(제1부와 제2부)은 그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반면교사가 되어줄 것이다.
“1929년 말부터 들불처럼 전 세계로 번진 대공황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기회를 제공했고, 그는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대부분의 위대한 혁명가들처럼 히틀러도 난세에만, 그러니까 대중이 처음에는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고 자포자기했다가 나중에는 전쟁에 중독되는 어지러운 시절에만 성공을 구가할 수 있었다. … 히틀러가 표를 얻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라곤 1930년대부터 독일 국민을 다시금 절망에 빠뜨린 시대를 활용하는 것뿐이었고, 집권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라곤 자신만이 재앙과도 같은 곤경에 처한 독일을 구할 수 있음을 그들에게 납득시키는 것뿐이었다.” ─ 제5장 〈권력에 이르는 길: 1925~1931〉에서
“겨우 4년 반 만에 이 미천한 출신의 남자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혼란스러운 데다 거의 파산한 상태였던 독일, 유럽의 강대국들 중 최약체였던 독일을 구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심지어 영국이나 프랑스까지 포함해 다른 모든 국가들을 벌벌 떨게 하는 지위로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독일이 어지러울 정도로 상승하는 동안 베르사유의 승전국들은 그 어떤 단계에서도, 독일을 제지할 만한 힘이 있을 때조차 감히 제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실제로 히틀러가 이룬 최고의 정복으로 기록된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기를 쓰며 총통을 지지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히틀러를 놀라게 한 것은, 영국 및 프랑스 정부를 좌우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나치 지도자의 연이은 공세 행동에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이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 제12장 〈뮌헨에 이르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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