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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19년은 펜윅 선교사의 한국 선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이러한 중요한 해에 “한국 침례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펜윅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의 삶의 발자취를 책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130년전 펜윅을 선교사로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복음 전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복음 전도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지금 시대에 130년 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여 이 땅에서 복음을 전했던 펜윅의 열정이 큰 귀감이 될 것이다. 펜윅의 삶을 보며 그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신앙을 본받고 복음의 열정을 새롭게 불태우기 원하는 마음을 담아 출간된 책이다.
목차
추천사
인사말
머리말
제1장 프롤로그 : 한국 기독교의 시작
제2장 펜윅의 제1차한국선교(1889∼1893)
1. 들어가는 말
2. 내한 전 말콤 C. 펜윅(1863∼1889)
3. 펜윅의 내한과 주요활동(1889∼1893)
4. 나오는 말
제3장엘라씽기념선교회 한국 선교
(1895∼1901)
1. 들어가는 말
2. 엘라씽기념선교회의 설립과 선교사 파송
3. 엘라씽기념선교회 선교사 내한
4. 폴링의 선교사역(1895∼1899)
5. 스테드맨의 선교사역(1896∼1901)
6. 나오는 말
제4장 펜윅의 제2차 한국 선교(1895∼1906)
1. 들어가는 말
2. 귀국 후 펜윅의 활동(1893∼1896)
3. 펜윅의 제2차 내한과 주요활동(1896∼1906)
4. 나오는 말
맺음말
참고문헌
부록(1): 초기 한국 침례교회 연표(1889-1906)
부록(2): 해방 전 한국 침례교 관련 자료
인사말
머리말
제1장 프롤로그 : 한국 기독교의 시작
제2장 펜윅의 제1차한국선교(1889∼1893)
1. 들어가는 말
2. 내한 전 말콤 C. 펜윅(1863∼1889)
3. 펜윅의 내한과 주요활동(1889∼1893)
4. 나오는 말
제3장엘라씽기념선교회 한국 선교
(1895∼1901)
1. 들어가는 말
2. 엘라씽기념선교회의 설립과 선교사 파송
3. 엘라씽기념선교회 선교사 내한
4. 폴링의 선교사역(1895∼1899)
5. 스테드맨의 선교사역(1896∼1901)
6. 나오는 말
제4장 펜윅의 제2차 한국 선교(1895∼1906)
1. 들어가는 말
2. 귀국 후 펜윅의 활동(1893∼1896)
3. 펜윅의 제2차 내한과 주요활동(1896∼1906)
4. 나오는 말
맺음말
참고문헌
부록(1): 초기 한국 침례교회 연표(1889-1906)
부록(2): 해방 전 한국 침례교 관련 자료
저자 소개
책 속으로
본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펜윅이 1911년에 출판한 자서전 성격의 『The Church of Christ in corea : A Pioneer Missionary’s Own Story』를 토대로 서술했다 (13P)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한반도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북미대륙 캐나다의 한 청년이 주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내한함으로 인해 한국 침례교 가 시작되었다. 그는 말콤 C. 펜윅이다. (16P)
본서는 펜윅이 처음으로 내한한 이후 교단이 설립될 때까지 약 17년간의 초기 한국 침례교 역사를 다룬다. 이 시기는 한국 침례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시기이다. 더불어 이 시기는 펜윅의 선교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의해 한국 침례교회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즉 그의 제1차와 제2차 한국 선교는 물론이요, 엘라씽기념선교회의 한국 선교
역시 펜윅의 요청에 의해 시작됐다는 측면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19P)
‘한국 침례교의 아버지’ 펜윅은 1863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마캄(Markham)에서 아취볼트 펜윅(Arckibald Fenwick, 1813-1868)의 11자녀 중 10번째로 출생했다. 그의 선조는 스코틀랜드 퍼스셔(Perthshire)의 핏케언(Pitcairn)출신으로, 일찍이 캐나다 토론토(Toronto)에 정착한 이주민이었다. (35P)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임으로 믿는다. 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함께 침례 받아서 한 몸을 이루었고 서로 회원이 되었다. 우리는 평화의 끈 안에서 성령의 연합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분파적인 편견과 교단적인 편협성을 극복해야 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열정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48P)
펜윅이 황해도 소래로 떠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서경조의 애정 있는 권유 때문이었다. 서경조의 증언에 의하면, 펜윅은 자신을 만나기 전 이미 어학선생을 여러 명 교체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펜윅의 조급함이 그 원인일 것으로 생각된다. 서경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상태로는 결코 언어를 습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에 함께 소래로 가서 어학공부 할 것을 제안했다. (64P)
펜윅은 주로 모국인 캐나다 출신 독립선교사들과 교류했고, 다른 교파 선교사들과는 특별히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는 자신이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평신도라는 열등감에 의한 방어기제의 결과요, 다음은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통해 19세기 후반 신앙선교(faith mission)를 지향했던 선교단체(대표적으로 중국내지선교회)들이 의도적으로 교파 선교사들을 멀리했던 것이 일정부분 그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79P)
한편, 장석천은 1902년 봄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테드맨이 잠시 내한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1903년 2월 신명균이 원산에서 공주로 부임할 때, 동행했다. 공주성경학원이 개원했을 때, 황태봉·고문중과 함께 첫 입학생이 되어 신명균, 황상필, 손필환으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목회자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과 소양을 익혔다. (214P)
혼자 사역할 때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한국인 사역자 양성을, 펜윅은 결혼하면서 그의 아내와 함께 시작했다. 펜윅은 학생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되거나, 배운 사람이 육체의 노동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한국적 풍습에서 벗어나도록 오전에는 농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게 했고, 오후에는 공부하도록 교과과정을 편성했다 (218P)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침례교와 관련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는 1905년 당시 서울에 침례교가 존재했다는 것, 다음은 서울의 침례교가 기울어가는 국가의 존망(存亡)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인 기도를 통해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230P)
1896년 다시 내한하면서 시작된 펜윅의 제2차 한국 선교는 20대의 제1차 한국 선교와 달리 30대 선교사로서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전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많은 선교적인 열매를 맺었다. 첫 번째 내한에서 한국연합선교회(CUM) 선교사였던 그가 귀국 후 한국순회선교회(CIM)를 설립하고 스스로 이 선교회의 첫 선교사로 다시금 내한하여 1906년 교단이 설립될
때까지 약 10년간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된다. (238P)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한반도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북미대륙 캐나다의 한 청년이 주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내한함으로 인해 한국 침례교 가 시작되었다. 그는 말콤 C. 펜윅이다. (16P)
본서는 펜윅이 처음으로 내한한 이후 교단이 설립될 때까지 약 17년간의 초기 한국 침례교 역사를 다룬다. 이 시기는 한국 침례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시기이다. 더불어 이 시기는 펜윅의 선교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의해 한국 침례교회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즉 그의 제1차와 제2차 한국 선교는 물론이요, 엘라씽기념선교회의 한국 선교
역시 펜윅의 요청에 의해 시작됐다는 측면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19P)
‘한국 침례교의 아버지’ 펜윅은 1863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마캄(Markham)에서 아취볼트 펜윅(Arckibald Fenwick, 1813-1868)의 11자녀 중 10번째로 출생했다. 그의 선조는 스코틀랜드 퍼스셔(Perthshire)의 핏케언(Pitcairn)출신으로, 일찍이 캐나다 토론토(Toronto)에 정착한 이주민이었다. (35P)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임으로 믿는다. 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함께 침례 받아서 한 몸을 이루었고 서로 회원이 되었다. 우리는 평화의 끈 안에서 성령의 연합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분파적인 편견과 교단적인 편협성을 극복해야 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열정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48P)
펜윅이 황해도 소래로 떠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서경조의 애정 있는 권유 때문이었다. 서경조의 증언에 의하면, 펜윅은 자신을 만나기 전 이미 어학선생을 여러 명 교체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펜윅의 조급함이 그 원인일 것으로 생각된다. 서경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상태로는 결코 언어를 습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에 함께 소래로 가서 어학공부 할 것을 제안했다. (64P)
펜윅은 주로 모국인 캐나다 출신 독립선교사들과 교류했고, 다른 교파 선교사들과는 특별히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는 자신이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평신도라는 열등감에 의한 방어기제의 결과요, 다음은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통해 19세기 후반 신앙선교(faith mission)를 지향했던 선교단체(대표적으로 중국내지선교회)들이 의도적으로 교파 선교사들을 멀리했던 것이 일정부분 그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79P)
한편, 장석천은 1902년 봄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테드맨이 잠시 내한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1903년 2월 신명균이 원산에서 공주로 부임할 때, 동행했다. 공주성경학원이 개원했을 때, 황태봉·고문중과 함께 첫 입학생이 되어 신명균, 황상필, 손필환으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목회자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과 소양을 익혔다. (214P)
혼자 사역할 때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한국인 사역자 양성을, 펜윅은 결혼하면서 그의 아내와 함께 시작했다. 펜윅은 학생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되거나, 배운 사람이 육체의 노동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한국적 풍습에서 벗어나도록 오전에는 농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게 했고, 오후에는 공부하도록 교과과정을 편성했다 (218P)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침례교와 관련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는 1905년 당시 서울에 침례교가 존재했다는 것, 다음은 서울의 침례교가 기울어가는 국가의 존망(存亡)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인 기도를 통해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230P)
1896년 다시 내한하면서 시작된 펜윅의 제2차 한국 선교는 20대의 제1차 한국 선교와 달리 30대 선교사로서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전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많은 선교적인 열매를 맺었다. 첫 번째 내한에서 한국연합선교회(CUM) 선교사였던 그가 귀국 후 한국순회선교회(CIM)를 설립하고 스스로 이 선교회의 첫 선교사로 다시금 내한하여 1906년 교단이 설립될
때까지 약 10년간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된다. (238P)
--- 본문 중에서
'47.기독교-개신교 (독학>책소개) > 2.한국기독교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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