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2.개항기.구한말

한말 일제초기 (2019) - 국유지 조사와 토지조사사업

동방박사님 2024. 7. 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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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그 역사적 성격과 실상은 어떠했을까?

이 책은 한국근대의 토지제도 특히 토지소유권의 정리과정을 분석한 것이다. 다룬 시기는 1890년대 갑오·광무개혁기부터 1910년대 일제초기까지이다. 30여 년간 근대 토지소유권과 토지조사사업 문제를 꾸준히 파고든 저자 최원규 교수의 실증 연구가 돋보이는 결과물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근대국가 수립기 전국 단위의 토지조사가 두 차례 시도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대한제국이 근대적 토지제도 수립을 목표로 추진한 양전, 관계발급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에 적합한 토지제도를 수립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이다. 갑오, 광무정권과 일제 모두 국유지조사와 민유지조사라는 두 단계로 토지조사를 추진했다. 이들은 구래의 토지권을 조사하여 ‘근대법’으로 법인하려 한 점, 이를 토대로 지가에 근거한 ‘근대적’ 조세제도 시행을 전망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적에서 갑오·광무정권은 조선국가의 ‘근대적’ 개혁기반으로, 일제 식민지 정권은 제국주의의 자본축적 공간으로 삼으려 했다는 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목차

책머리에
서 장

제1부 한말 토지정책과 국유지 조사

제1장 한말 토지정책과 국유지 조사과정

1. 머리말
2. 갑오·광무정권의 토지정책과 토지조사
3. 통감부의 토지정책과 역둔토 조사
4. 국유지 실지조사와 국유지통지
5. 맺음말

제2장 융희년간 일제의 국유지 조사와 법률적 성격-전남 나주군 궁삼면 토지분쟁의 고등법원 판결문을 중심으로-

1. 머리말
2. 융희년간 국유지 조사와 법적 효력
3. 궁삼면 토지분쟁과 제1차 고등법원 판결
4. 제2차 고등법원 판결과 법적 효력
5. 맺음말

제3장 일제의 토지권 관습조사와 그 정리 방향

1. 머리말
2. 통감부의 토지권 조사와 인식
3. 소유권의 법률적 성격
4. 소유권과 경작권의 법적 지위
5. 맺음말

제2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소유권 분쟁

제1장 토지조사 관계법과 토지신고

1. 머리말
2. 토지조사 관계법의 내용과 성격
3. 토지신고서의 내용과 성격
4. 맺음말

제2장 무토·유토의 구분과 국·민유 분쟁

1. 머리말
2. 무토·유토의 법적 규정과 和田一郞의 인식
3. 국·민유 분쟁과 매매의 의미
4. 김해군의 국·민유 분쟁
5. 국유지의 유형과 분쟁지 판정 기준
6. 맺음말

제3장 토지소유권의 사정과 재결

1. 머리말
2. 토지소유권 분쟁과 사정
3. 재결과 전국통계 검토
4. 맺음말

제4장 고등토지조사위원회의 재결서 통계와 사례

1. 머리말
2. 재결대상과 경계 불복신청
3. 재결서의 통계분석
4. 국·민유지에서의 불복신청 사례
5. 분쟁지에 대한 불복신청 사례
6. 역토의 국·민유 처리기준과 국유지 처리방안
7. 맺음말

제3부 和田一郞과 토지조사사업

제1장 和田一郞의 이력과 저술

제2장 和田一郞의 조선토지제도론과 국·민유지 구분

1. 「조선토지제도요론」 분석
2. 국유지의 유형과 분쟁
3. 和田一郞의 토지문서 이해
4. 맺음말
저자 소개 
저 : 최원규
부산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다. 저서로는 『한말 일제초기 국유지조사와 토지조사사업』(혜안, 2019), 『일제시기 한국의 일본인 사회-도시민·지주·일본인 농촌』(혜안, 2021) 등이 있고, 공저로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민음사, 1995), 『Land lords, Peasants & Intellect...

출판사 리뷰

저자가 책에서 가장 주목한 점은 일제가 국유지조사와 토지조사사업에서 사정한 소유권이 당시 배타적 수준에 도달하여 그대로 조사 추인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의 여부이다. 그리고 갑오·광무정권의 공토조사와 일제의 역둔토(=국유지)조사와의 동질성과 차이점을 밝히는 문제다. 갑오정권이 추진한 갑오승총은 공토에서 면세조치를 철회, 무토는 돌려주고, 유토는 결세를 부과하고, 작인이 결세는 탁지부에, 도조는 해당기관에 납부하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유·무토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때문에 결세가 이중삼중 부과되어 분쟁이 제기되었다. 분쟁은 유·무토의 구분에 따른 소유권 문제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결세 증가에 따른 수조액의 수준을 둘러싸고 제기된 것이다. 작인납세제는 경작권의 물권화가 보장되어야 시행할 수 있는 방안이고, 을미사판(乙未査辦)의 작인과 도조를 확정하는 작업은 그 일환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농민군의 평균분작론, 유길준과 이기 등의 감조론적 여론에 힘입어 추진된 것이었다.

광무사검(光武査檢)은 무토를 유토로 환원시키는 등의 공토강화책, 수조액의 수준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공토를 조사한 것이다. 갑오정권의 조사원칙은 그대로 준수되었으며, 이는 광무양전사업에서 민전으로 확대되었다. 광무양안에 토지소유자인 시주와 납세담당자인 시작을 등재한 것이 그 반증이다. 그리고 지계아문에서는 시주에게 구문기를 회수하고 ‘대한제국 전답관계’를 발급하였다. 이는 한국 역사상 국가가 처음으로 토지소유권자를 ‘공인’하고 발급한 소유권 증명서였으며, 여기에 토지등기부 역할을 부여했다. 광무양전·관계발급사업은 제도적 완결성면에서는 미흡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구래의 관습적 용익물권이나 경작권을 물권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시주·시작을 조사하고 작인납세제를 전망한 근대적 토지조사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작인납세제는 경작권을 물권으로 인정하는 법적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당시는 실현되지 않았다. 1906년에 기안된 부동산권소관법은 임조권을 물권으로 인정하고 등기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단초를 연 시도라 하겠다.

반면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한 방안으로 토지조사를 추진하였다. 토지조사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와 일본인 지주·자본가의 경제활동을 고려하여 조선의 토지제도를 일본과 다를 바 없는 방향으로 구조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일제는 민유 아닌 모든 토지를 국유로 선언하고 농민의 자유로운 이용권을 박탈한 국유미간지이용법과 삼림법을 공포한 다음, 공토를 역둔토로 조사하여 근대법에 근거한 국유지로 확정하는 작업을 시행했다. 1907년 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을 설치하여 이 일을 담당하도록 했다. 신고제도와 청원제도를 도입하여 이를 조사하여 조사국의 행정처분으로 국유로 확정하고, 원시취득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행정처분’은 행정관청에게 소유권 판정의 독점권을 부여한 조치로 일제가 토지조사를 신속하게 실시하기 위해 도입한 핵심 방책이고, ‘원시취득’은 이렇게 결정한 소유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한, 토지분쟁을 일소하기 위해 마련한 법에 의한 강권적 조치였다.

다음으로 국유지실지조사는 소작인신고제를 미끼로 역둔토와 소작인을 확정하고, 결(結)+도(賭)를 합하여 소작료를 결정하는 등의 내용으로 역둔토(=공토)를 배타적 성격의 국유지로 확정하는 작업이었다. 또 각 필지를 근대적 측량방식으로 측량하고 장부에 등록하는 실지조사 작업을 병행하였다. 그 결과물이 국유지대장과 국유지도였다. 이를 근거로 작인을 임대차한 소작인으로 확정하고 국유지소작인허증을 발급했다. 탁지부에서는 이와 함께 혼탈입지와 투탁지를 환급해주는 조치를 계속 취했지만, 여기서 제외되어 자기 권리를 빼앗긴 관습적 용익물권자나 사실상의 소유권자들이 반발하여 국·민유분쟁을 격렬하게 일으켰다.

토지조사사업에서 ‘행정처분’으로 확정된 국유지라도 분쟁은 제기할 수 있었지만, 행정기관 스스로 오류라고 인정하고 번복하지 않는 한, 임시토지조사국 단독으로 민유로 판정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저자가 조사한 김해군과 창원군 분쟁사례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정부출자지도 맞물려 있어 번복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일제의 국유지조사는 수조권적 권리를 배타적 소유권으로, 다른 용익물권은 채권으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일제는 1910년 토지조사법으로 민유지조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국유지실지조사를 중단하는 등 여건이 악화되자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하고 전토지를 대상으로 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했다. 토지조사에서 국유지는 통지제도, 민유지는 신고제도를 도입하여 시행했다. 전자는 국유지대장을 근거로 이미 국유로 확정된 토지를 통지한다는 의미였다. 신고제도는 지주가 자기 토지를 의무적으로 신고하고, 소유권 판정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하도록 한 제도였다. 토지신고서는 소유권만 신고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결과 도지권 등 관습적 용익물권은 점차 소멸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리, 종중, 계 등 구래의 공동체는 토지소유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 소유지는 공유로 취급되어 점차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분쟁지 처리절차는 사정 전 분쟁지심사와 불복신청에 따른 재결의 두 과정이 있었다. 전체토지의 1/200씩 도합 1% 정도에 불과했지만 건별로 질적 편차가 심했다. 한건이 수백 명 또는 여러 동리를 포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주 영산강 유역 3개면에서 동양척식회사, 낙동강 유역의 김해·창원에서 무라이(村井吉兵衛)·오오이케(大池忠助), 만경강 유역에서 후지이(藤井寬太郞) 등 일본인 대지주가 여러 동·리를 포괄한 광대한 지역에서 주민들과 분쟁한 사례도 있었다. 토지분쟁 다발지역은 일본인이 집중 투자한 전남·경남의 농장지대, 부산 등 시가지, 큰강 하류의 개간지를 비롯하여 전남 섬지역과 경기·황해도 등 국유지 집중지역이었다.

분쟁지 심사에서는 국·민유분쟁이 65%로 압도적이었다. 절수사여지를 대상으로 국유론과 민유론이 충돌한 것이다. 김해·창원 등의 사례에서 보듯, 국유지대장에 근거하여 작성된 국유지통지서의 필지를 대상으로 제기된 분쟁은 통지서대로 판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등토지위원회에 재결을 위해 제기한 불복신청은 신고나 입회를 하지 않은 경우, 역둔토대장 등 장부를 무시하고 통지를 하지 않아 사정대상에 제외된 경우 등이 비일비재하였다. 때로는 신고와 통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사정된 경우도 있었다. 재결서만 보면 부실과 오류가 점철된 토지조사라고 할 정도였다. 불복신청을 제기한 건수를 보면, 조선인이 42%, 일본인이 36%, 국유가 21%를 차지하였다. 불복신청 대상이 된 토지는 조선인 토지가 80%, 국유가 6%, 일본인 토지가 10%정도였다. 사정작업이 조선인을 위한 것처럼 보이고, 불복신청은 사정에서 불리한 판정으로 소유권을 상실한 일본인과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상대로 권리회복에 나선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재결결과는 국유가 22%, 조선인 토지가 46%, 일본인 토지가 39%를 차지하였다. 조선인 토지가 절반정도 대폭 감소되고 일본인 토지와 국유지가 대폭 증가한 것이다. 국유지는 민유로 환급된 것도 있었지만, 조선인 토지가 국유로 재결되어 3배 이상 크게 증대되었다. 재결과정은 식민지 지배국가의 속성과 지배·피지배의 민족적 이해관계가 그대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200년 전 구양안까지 동원한 시원적(始原的) 판정, 일본인 지주들의 강압적 불법 행위 등을 논외로 한 문서증거, 특히 구문기보다 증명제도 위주의 판정, 일본인 지주의 입장을 반영한 개간권과 점유권을 근거로 한 소유권 판정, 수조권적 권리를 강권적으로 적용한 소유권 판정, 관습법에서 벗어난 일본민법의 적용강화 등을 판정에 적용하여 이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와다 이치로(和田一郞) 등 토지조사사업 담당자와 현대의 식민지근대화론자는 광무사검의 공토정책과 이를 계승한 융희년간의 역둔토조사 작업의 성과를 비판하고, 토지조사사업을 공전의 민전화, 민전의 공전화에 따른 문란을 바로잡는 작업이라고 동일하게 평가하고 있다. 후자는 이 과정에서 민유로의 환급이 크게 증가하였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토지소유권이 배타적 수준으로 발전해왔다는 전제아래, 소유권을 조사하여 일본민법적 배타적 소유권의 자격을 부여하는 과정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이해하고, 수탈성은 전면 배제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국·민유분쟁은 수조권 차원에서 추진된 광무사검의 성과를 일제가 역둔토조사에서 공토를 역둔토로 등록하고 국유지라는 배타적 소유권의 자격을 강제로 부여하는 한편, 관습적 용익물권을 배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토지조사사업도 물권적 경작권과 같은 관습적 용익물권이나 사실상의 소유권을 조사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해체시키고, 수조권적 권리(=명목적 소유, 법률적 권리)를 포함한 소유권을 조사하여 배타적 소유권으로 ‘법인’화 해가는 과정이었다. 광무양전사업과 질적 차별성을 보였다.

저자가 보기에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일제는 ‘법인’한 토지소유권에 일본민법의 배타적 소유권의 절대성과 ‘원시취득’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 소유권은 식민지 국가권력이 위로부터 부여해 준 속성 때문에 그 배타성과 절대성이 그들의 정책적 결정에 따라 휘둘릴 가능성이 상존해 있었다. 일제는 필요에 따라 소유권을 박탈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토지수용령을 제정하고 군사적 목적과 독점자본의 이해에 맞추어 이를 발동해 갔다.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역사성을 둘러싼 ‘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들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지만, 세밀한 실증적 연구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논의들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저자는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역사성의 부여는 보다 광범한 실증 연구들의 축적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자칫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이 연구작업을 저자가 지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