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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고종 (대한제국 황제) 고종즉위 (1863년 12월13일)

동방박사님 2024. 8. 5.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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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대한제국 고종 황제

대한제국 황제

재위 18971012~ 1907719(9)

즉위식 환구단 / 후임 순종 / 총리 의정대신 (1897-1907) / 내각총리대신 (1907-1910)

대조선국 대군주 / 재위 1895112~ 18971012(2) / 총리 총리대신 (1895-1896) / 조선 국왕

재위 1864121~ 189517(30) / 즉위식 창덕궁 인정문 / 전임 철종

재상 영의정  의정대신 (1896-1897덕수궁 이태왕 재위 1910~ 1919년 이름  재황(載晃) (묘호 고종(高宗시호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존호 통천융운····홍휴수강 능호 홍릉(洪陵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연호 개국 건양 광무

신상정보

출생일 1852725일 /  출생지 조선 한성부 운현궁 사저 / 사망일 1919121(66) / 사망지 일본 제국령 조선 경성부 덕수궁 함녕전 / 부친 흥선대원군 이하응 / 모친 여흥부대부인 민씨 / 배우자 명성황후 민씨 / 자녀 41(94)

서명

고종 (高宗, 1852725~1919121)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971012~ 1907719) 및 조선 26대 국왕(재위: 1864121(음력 18631213)~18971012)이다.

개요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국왕으로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받다가 1873년 친정을 시작했다. 1875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을 하고 내정개혁 및 개화운동을 전개했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이유로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듬해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10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고종 황제는 광무개혁을 실시하여 신식군대를 창설하고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였으며, 근대적 상공업을 진흥하고 공장과 은행 및 회사를 설립하였고, 발전소를 건설하여 전등을 켜고 전화를 개설하고 철도를 개통하여 전차를 운행했다. 또한 신교육을 보급하고 해외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전국의 토지 측량을 실시하고 모든 관리들에게 양복을 입도록 하고 단발령을 재개하는 등 근대적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을 뿐 아니라,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아들인 순종을 대한제국 2대 황제에 즉위하게 하였다. 곧이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고, 마침내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 제국에 흡수되었다.

일제강점기를 맞아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 머물면서 대한독립의군부 등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9121일 고종은 식혜를 마시고 갑자기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승하하였는데, 이빨이 모두 빠지고 혀가 닳아 없어지며 몸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이에 고종 독살설이 퍼지며 31일 고종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에 3·1 운동이 발발했다. 4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고종이 만든 '대한'을 국호로 사용하고 고종이 도안한 태극기를 국기로 정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법에서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생애

출생과 가계

한성부 안국방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군 이하응과 부인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희(), 초명은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이다. 재위 중의 연호는 개국, 건양, 광무이다. 호는 주연(珠淵)이다.

아버지 흥선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며,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지만,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따라서 남연군은 영조의 법적 증손자가 되어 순조와 동항렬이 되었으며,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익종과 동항렬이 되고 고종은 헌종과 동항렬이 되었다.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으로서 민치구의 딸이다. 고종 즉위 후 부대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훗날 고종 비 명성황후 가문에 입적되어 양오라버니가 되는 민승호와, 임오군란 때 참살당하는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고종에게는 생모 여흥 민씨 소생의 동복형제인 이재면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서형인 이재선과 이복누이 1명이 있었다. 그러나 흥선군은 경제적으로 무능하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왕위 계승

정조의 증손자 헌종이 후손없이 사망하자 직계후손이 끊어져서 방계가문인 철종으로 보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1863(철종 14) 128(양력 186414), 철종 역시 후계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4촌인 익평군의 아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로 압축되었다. 철종의 아들들은 전부 요절했으므로 흥선군은 익종 비 신정왕후 조씨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철종 사후 흥선군과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내리고 1213(양력 186414)에 왕으로 즉위시켰다. (고종)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일이 발생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흥선대원군 (1821-1898)

고종의 생부이다.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고 10년간 집권하였다.

1868년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

비변사 폐지

국왕의 생부로서 섭정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벌열들을 가급적 권력에서 배제하고 남인과 북인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기구로서 의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던 비변사를 폐지하였다.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비변사에 집중되어 있던 정치, 군사적 기능을 양분하였다.

서원 철폐

대원군은 붕당의 근거지로 오랫동안 면세의 특권을 누리며 온갖 폐단을 일삼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여 정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명나라 만력제의 사당인 만동묘를 철폐하였는데,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대원군은 서원 철폐와 관련하여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서원 철폐의 강한 의지를 내비치었다.

법전 편찬과 제도 정비

이어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은결을 색출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군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고 각 관청이 맡은 일과 세칙을 정리한 대전회통, 육전조례등의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규범을 재정비하였다.

경복궁 중건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회복을 위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상승을 초래하고, 원납전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성을 띤 기부금을 징수하였으며, 양반 소유 선산의 묘지림을 벌목하고, 도성 통행세를 거두고 백성에게 노역을 부과하였으므로, 백성과 양반 모두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대원군의 정책은 양반과 유생들의 격렬한 반감을 사게 되어 훗날 실각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병인양요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박해 및 병인양요 

고종 초기에 프랑스 군대와 미국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서학(천주교)과 동학이 백성들 사이에서 퍼졌는데, 대대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도들의 수는 증가하였다.

18661,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에 위기를 느끼고 견제하고자, 프랑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으나 프랑스 주교가 동의하지 않자, 정치적 이점을 얻을 수 없을거라 여겨,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도 수천인을 박해하였다.(병인박해)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같은 해 7월에는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자, 평양 지역민과 평안도 감사 박규수에 의해 선박이 불타고 선원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5년후인 1871년에 발생하는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669,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하였으나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등이 격퇴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의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관련 유물들을 약탈하였다.(병인양요)

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

1868(고종 5)에는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할 뻔한 일이 발생하였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남연군의 시신을 두고 협상하려 하였으나 회곽으로 단단히 굳어버린 묘지를 파지 못하고 실패에 그쳤다.

신미양요

1871(고종 8),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의 지휘 아래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연이어 공격하였는데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전사하고 미군은 승전의 의미로 '()자기'를 탈취하였다. 미군이 탈취한 수자기는 현재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었다.

척화비

이 시기 서양 제국과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고종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 의지를 천명하였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의를 주장하는 것이고,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이를 자손 만대에 경계하며

병인년에 비문을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 척화비

친정 기간

 

개항과 친정

1869131일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 제국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고종 9)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고종 10) 음력 2월 대마번에 대()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사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고종 10)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말미암아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에 의한 척신 정치가 시작되었다.

강화도 조약

운요호 사건 및 강화도 조약

1875(고종 12) 3월부터 고종의 어명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920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1876227일 조선과 일본 양국간에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다.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영토 주권과 사법주권이 무시된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의 결과 부산(1876), 원산(1880), 인천(1883)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개화정책과 위정척사운동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세계 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고종은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여,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일본식 군제를 도입하여 교육받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하게 하였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한편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대원군 집권기부터 서양과의 통상 반대와 척화주전론이 제기되었는데, 대원군의 대외 정책과 맞물렸다. 하지만 대원군이 하야하고 정부가 개항과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최익현과 유인석 등의 유생들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과 개항불가론을 제기하였다.

1880(고종 17),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이 일본주재 청나라 공사 황준셴이 쓴 외교서인 <조선책략>을 갖고 들어왔는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일본, 미국 3국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고종은 미국과의 수교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이에 유생들이 반발하여 이만손과 홍재학 등이 만인소와 척화상소를 올려 개화정책을 반대하고, 책을 들여온 김홍집을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18824, 서양의 나라들 중 최초로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임오군란

1882(고종 19) 6,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13개월 간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불만으로 임오군란이 발발하였는데, 이러한 군란을 초래한 원흉으로 민씨 척족과 명성황후가 지목되었고, 구식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색출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이미 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구식 군인들의 추대로 정계를 떠나있던 흥선대원군이 10년만에 재집권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된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복권하였다. 이후 청라는 고문관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는데, 마젠창과 위안스카이,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이 파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의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제물포조약)

또한 청나라와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권과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갑신정변

1884(고종 21) 124일 김옥균과 박영효가 주축이 된 급진 개화파 등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켜 온건적인 개화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이궁시켜 다음과 같은 14개조 정강을 선포하였다.

14개조 정강

대원군을 즉각 환국케 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고, 실력과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奸吏,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들을 근절하고

궁민(窮民)을 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전후 국가에 해독을 끼친 간리(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각 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폐지할 것

규장각을 폐지할 것.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죄의 경중을 묻고, 무고한 죄인은 석방시킬 것.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임명할 것.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戶曹)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중앙 재무관청은 금지, 혁파할 것.

대신과 참찬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政令)을 의정, 시행할 것.

의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그러나 126일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갑신정변의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일본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된다.

거문도 사건과 한반도 중립화론

1885,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던 영국 군함 세 척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영국군은 섬 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병영을 설치하였으며 섬의 이름을 포트해필턴이라 명명하고 영국 국기를 게양하였다. 이들은 청나라의 중재로 1887년 철수하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유길준과 독일 부영사 부들러가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하자는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886년 사노비의 세습을 폐지하였다. 최초의 공립학교인 육영공원과,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이 이해에 개교하였다. 1887년 경복궁 내에 전등이 가설되었다.

동학농민운동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동학 교도들은 수차례에 걸쳐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는데, 동학의 창시자로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된 최제우를 신원할것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연대하였다.

18944,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고,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된 농민봉기가 거대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은 531일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조선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61, 청나라에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66, 청나라 군대 1500명이 아산만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왔는데, 9년전인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맺은 톈진조약의 내용에 의거하여, 이틀 후인 68, 일본 또한 인천항을 통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파병 요청을 하지도 않은 일본군이 조선으로 들어오자,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정부는 611일 서둘러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청일 양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한후 각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갑오개혁과 청일전쟁

갑오개혁 문서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철수요구를 무시하고 723, 군대를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였다.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후 개혁안을 발표하여 전근대적인 제도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법제화하였는데, 역사 이래 지속된 신분제도가 형식적으로 폐지되었다.

725, 일본은 청나라에 국교 단절을 통보하고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의 전장터는 조선이었다. 충청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이 청나라-일본 양국군대의 전장터가 되었고, 남부지방은 농민군과의 국지적 교전이 계속되어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을미사변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인 낭인들

청일전쟁의 결과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승전국인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辽东半岛)와 타이완을 할양받게 된다. 일본의 랴오둥반도 획득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러시아는, 동맹관계에 있던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도록 압박하였다. 일본은 이 세 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여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는데, 이 사건이 삼국 간섭이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 사태를 주시하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895825, 친러 성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는데 조선 내에서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견제하던 일본은, 친러시아적 성향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의 지휘아래, 1895108, 경복궁 내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를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일본인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에 의해 왕비가 제거되고 고종과 왕세자는 덕수궁에 감금되었다.

그 후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하였다.[12]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유생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아관 파천

1896211,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종용과,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찰나, 왕태자 척(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이때 왕태자비 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직후에 고종은 을미 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여 이들과 법부대신 장박을 포함한 다섯대신을 잡아 죽일것을 지시했다.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는 피살되었고 유길준, 장박,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사실상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주필(駐蹕)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사업을 명한다. 1896929일 조칙(내부령 제9)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과 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이 시기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4]

대한제국 성립  / 대한제국 선포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께서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고종실록 광무 1(고종 34) 1013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16]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군대로 하여금 모두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1899년 노면전차를 도입하였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조선의 국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광무개혁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구본신참의 기치 하에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여 교전소와 법규 교정소를 설치하고 시위대와 진위대의 증강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그는 직접 대원수가 되어 육해군 통솔하게 되었고, 황태자를 원수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가 하였고, 조병식과 같은 수구파 인사들의 모함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과를 낳았다.[19]

한청통상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였다. 울릉도와 독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켰다.

1902년에는 간도에 간도시찰원을,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였다.

행정개혁은 양지아문을 설치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했다. 1901년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지계를 발급하였는데, 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하였다.

알렌의 소개로 에디슨의 회사에 전차와 전기에 대한 권리를 팔기도 하였다.

고종 암살 미수 사건

189882일 고종에게 앙심을 품은 러시아 담당 역관 김홍륙이 고종이 커피 애호가라는 점을 이용해 커피에 독극물(아편)을 타서 대접했다. 고종은 김홍륙이 대접한 커피를 엄청나게 이상하다고 판단해서 마시지 않고 커피를 땅에 부었다. 하지만 이 커피를 마신 고종의 아들 순종은 치아가 모두 결손되어 어린 나이에 틀니를 착용하게 되는 등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은 김홍륙을 체포한 후 18981010일 부로 교수했으며 김홍륙의 구족을 멸하고 그 일당들을 거의 토벌 수준으로 처리했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국의 국왕을 시해하려고 한 죄는 한 나라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이다.

이준용의 쿠데타 기도

고종의 조카이자 정적인 이준용

1899년 조카 이준용은 직접 쿠데타를 기획하였다. 이전까지의 쿠데타가 동학 농민군이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것이라면 이번 쿠데타에 이준용 본인이 직접 기획하고 사전 준비까지 한 것이었다. 그 해에는 이준용 추대 관련 역모가 3건이 적발되었다.

이준용이 일본에서 다시 활동을 개시할 때 쯤에 벌어진 장윤상 발언 사건과 어용선 사건은 고종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전 참봉 장윤상이 자신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셨다고 하면서 18991월 이준용이 귀국하면 고종 대신 국왕이 되거나 대통령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와전되어 "박영효가 반역하여 이준용을 추대하고 고종을 태상왕으로 만들 것이라"는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412일 소문의 발원자인 장윤상은 교형에 처해졌고, 그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이유로 유학 신현표와 전 순검 이지현은 태 1백 대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3월에 어용선 등이 일본에서 그를 모셔다가 현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공화정을 표방해 대통령제를 실시하려 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반정부 인사들이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나 움직임은 고종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장윤상 사건과 어용선 사건이 처리된 직후인 18996월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의 옹립을 기도했다는 고발에 따라 윤태영 등 3인이 체포되었는데, 이는 고종 정부가 이준용 추대 모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00년 안경수, 권형진을 처형 직전 양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18947월에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러한 역모 사건은 결국 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왔다. 이에 고종 정부의 고관들인 김성근, 신기선, 조병식, 윤용선, 민종묵 등과 재야의 유생들은 19006월부터 역모를 자행한 이준용을 일본에서 불러다가 처형하자는 상소를 되풀이하여 올렸다.그러나 고종은 그 때마다 윤허하지 않았다.

63일 궁내부협판 겸 대신서리 윤정구(尹定求)의 탄핵이 있자, 고종은 칙령을 내려 이준용의 궁내부 특진 관직을 박탈했다. 그러자 평리원과 학부에서 외부에 조회하여 1900619일에 주일본공사 이하영에게 이준용을 즉각 잡아서 돌아오게 하라고 하였다.그러나 이준용은 귀국을 거절했다. 620일 이하영은 "이준용이 꼼짝하지 않고 듣지 않으니 잡아서 돌려보낼 길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이준용과 엄귀비의 갈등

 

순헌황귀비 엄씨 (1854-1911)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이다.

일본 망명 직후부터 이준용은 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18994월 이준용은 일본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왕비책봉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유길준, 권동진, 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왕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왕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담아 궁내부대신 이재순에게 충고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국왕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엄상궁을 왕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왕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엄상궁의 왕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 중인 이준용과 의친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왕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서는 정치 망명객이라는 이유로 이준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고 고종은 밀지를 내려 자객들을 일본 도쿄 부로 파견했지만 실패한다. 이준용 역시 양돼지라는 별명과 달리 거구에 비교해서 상당히 민첩하게 움직였고 무예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고종의 이준용 제거 계획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재위 후반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과정

러일 전쟁  일본군의 인천 · 마산 · 원산 상륙

1904 2 8일 서울 · 덕수궁 점령

한일의정서 대한제국 내 일본군 주둔

1904223

1차 한일 협약 고문정치

1904822

대한제국군 감축 대한제국 친위대 해산

1905416 시위대 · 진위대 감축

화폐정리사업 조선후기 상업자본 몰락

1905~ 1909년 화폐경제 붕괴.일본 화폐에 예속

을사늑약(2차 한일 협약)대한제국 외교권 박탈.통감부 설치·통감정치

19051117

고종 양위 사건 고종 강제 퇴위

1907724 순종 즉위

정미7조약(3차 한일 협약) 차관정치

1907724

대한제국군 해산시위대 ·진위대 해산

190781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기유각서일본 제국에 사법권 ·교도행정권 위탁

1909712

남한 대토벌 작전 전체 의병 소탕

190991항일의병 만주 대이동

한일약정각서일본 제국에 경찰권 위탁

1910624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 멸망. 일본 제국의 식민지 통치 전략

1910829 일제강점기 탄생

 

러일전쟁과 국권 침탈

1900927일 육군 참위 김규복(金奎福), 노백린, 어담 등 19인에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29]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1902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3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2(최종적으로 16)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군대 창설 및 그와 관련한 일련의 성과는 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과는 철거되었고, 급기야 1907년 일본군은 군대를 풀어 한양 내에 있는 주변 시내를 장악하고 군대 해산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군대가 해산이 된다.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한국의 황성(한양, 지금의 대한민국 서울)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8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 고종은 그 뒤 1904123일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을사 늑약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11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은 다음 날인 1110일 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1115일 다시 고종 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조선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와 주 조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통감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통감은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통감과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통감은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고종에게 강요 및 협박을 했다.

고종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통감을 달래어 내보냈다. 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 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통감은 각료 8대신 가운데 5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을사 늑약 반대 운동

조약의 체결은 한국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을 목놓아 통곡한다)을 게재하였고, 민영환은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등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윤치호는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늑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또한 늑약에 대한 반발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지난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자주권과 독립의 기초를 남에게 의지한 적 없이

여유 있게 지켜온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외교를 잘못하여 조약을 체결한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찮은 소인들에게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궁실을 꾸미는 데 힘쓰게 되니 토목 공사가 그치지 않았고, 기도하는 일에 미혹되니 무당의 술수가 번성하였습니다.

충실하고 어진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염치없이 조정에 가득 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 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개인 창고는 차고 넘치는데 국고(國庫)는 고갈되었으며 악화(惡貨)가 함부로 주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두 이웃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물자를 자뢰하니

온 나라가 입은 피해는 실로 우리의 탓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새 조약을 강제로 청한 데 대하여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끝끝내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굽실거리며 따랐기 때문에

조정과 재야에 울분이 끓고 상소들을 올려 누누이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強)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치안을 도모하며,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간사한 무당들을 내쫓으며 궁방(宮房)의 사재 축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궁인(宮人)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자강의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 《고종실록대한 광무 9(1905121) 기사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12월 내내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후 강원도 삼척군과 울진군에서 을사조약 무효 선언과 동시에 의병이 일어났고 쇠퇴해가던 의병 활동에 불을 지피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 힘을 얻은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한다.

이후 고종은 제2차 한일 협약 체결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황제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고종의 을사체약 무효선언서는 1906129일에 작성된 국서, 1906622일에 호머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6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4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 있다. 고종의 무효선언 발표는 훗날 대한민국에서 을사조약의 무효, 불법성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프랑스 국제법학자 레이는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당시 강박(強迫)이 사용된 점과 고종이 그 조약이 불법이고 무효인 점을 밝히기 위해 즉각 항의외교를 벌인 점을 들어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훗날 고종의 무효선언서의 존재를 확인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수교하는 조건으로 을사조약 무효, 파기를 요구한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을사조약(2차 한일 협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다. 후일 정상수 명지대 교수는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나타내는 독일어 전보를 발견하였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특사 파견과 강제 퇴위

헤이그 특사 파견 및 고종 양위 사건 문서를 참고

19074,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와 호머 헐버트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할 것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1907년 음력 720, 황태자에게 양위하였으나 양위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불참하는 기이한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퇴위 이후

1907(융희 원년) 724,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요하였고, 대한민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다.(대한제국 군대해산) 정미7조약의 체결과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정미의병)

1910(융희 4) 829,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였고,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 머물게 되었다.

1912, 임병찬 등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왕정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최후

고종의 장례 행렬

고종은 1919121일 오전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했다. 고종의 공식적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이지만,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고, 3 · 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묘소는 홍릉이다.

묘호는 고종(高宗)이고 시호는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고종 독살설

고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고종황제가 이왕세자와 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 《윤치호일기1919126일 일요일  

그런데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얼마 뒤 윤치호는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10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0센티 미터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하였다.

한편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인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에 의하면 고종이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수뇌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1919년에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합병의 부당함을 호소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이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고종으로 하여금 1905년의 을사늑약이 유효했음을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절하여 독살하였다는 일본 정계의 풍문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또한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와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와 같은 관료들에게 고종 독살에 대한 풍문을 묻기도 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번역)

"(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李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원문)

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

長谷川ヲシテ李太王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セサリシ

故其事スル尹德榮閔丙奭等太王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キタル

—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

19191026일 일요일 

책소개

“문명 전환의 길목에서 고종은 과연 어떠한 유형의 군주인가”

이 책은 고종의 생애를 군주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두어 살펴본 것이다. 전반부는 고종의 출생과 왕실의 가계, 고종의 즉위와 제왕 수업기의 학습내용, 청년기 국왕 고종의 국가 정책 추진 방향과 그가 직면했던 내외의 난관 그리고 조선의 붕괴를 불러온 청일전쟁 당시의 정황 등 한제국 선포, 황제 고종의 국가 운영 구상과 정책, 러일전쟁 전후의 상황과 고종의 대응을 다루었고, 헤이그 특사에 반영된 고종의 의도와 결과, 퇴위 이후 덕수궁 이태왕으로서의 존재 그리고 그의 최후와 삼일운동의 연계성 등을 다루었다.

고종을 평전 형식으로 다루기에는 연구가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국가의 인적, 물적 자원에 관한 통계 자료의 비교나 국내 각 집단의 동향이 더 깊이 분석될 필요가 있고, 국제관계의 변수는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게다가 고종이 직접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드물고,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난점에 더하여 이 한 권의 책에 고종의 생애 모두를 다루려다 보니 일부 주요 대상을 스치듯 언급만 하고 생략한 점이 아쉽다. 다만 전체적으로는 변화하는 국제환경을 유념하며 고종의 주요 정책과 구상 그리고 이를 제약한 내외 인물과 사건의 연관성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고종의 재위 당시는 어떠한 시대이며, 그의 생애는 어떠했고, 그는 과연 어떤 고민을 안고 있던 군주인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참고가 되기를 기대한다.

목차

독자에게 드리는 글
머리말

제1장 고종의 출생과 즉위

고종의 출생과 소년 시절
궁중의 조대비와 운현궁의 흥선군
철종의 승하와 고종의 즉위

제2장 제왕 수업기의 고종 - 수렴청정과 대원위분부

조대비의 수렴청정
조선의 정궁 - 경복궁의 유래와 상징성
조대비의 하명과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박해와 서양과의 충돌
고종의 흥선대원군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
제왕 수업기 고종의 일상과 학습교재
『주연집』에 보이는 고종의 서정(抒情)과 집옥재 서적
고종의 멘토 박규수와 젊은 그들
고종이 장가가던 날 - 운현궁과 감고당의 인연
조대비의 ‘은퇴’와 흥선대원군의 추락
고종의 우익으로 떠오른 여흥민가

제3장 청년 국왕 고종의 내외정책과 시련

메이지 일본의 정한론과 운양호사건
고종의 개항에 대한 인식과 강화도조약
고종의 개화정책과 서양문물 수용
고종의 호의적 미국관과 견미사절 파견
전국 유림의 개화정책 반대와 고종의 대응
임오군란 - 구식군대의 저항과 신식군대의 와해
갑신정변 - 청년 개화파의 쿠데타와 삼일천하
한성조약과 천진조약
포크가 관찰한 고종과 청년 개화파의 관계
푸트 공사의 정변 평가와 망명객의 고뇌
고종의 조러밀약 시도와 영국의 거문도 점령
원세개의 「조선대국론」과 고종의 응답

제4장 청일전쟁과 조선 - 국왕 고종의 위기

동학의 성장과 농민봉기에 대한 고종의 인식
청·일의 파병과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조약 - 떨어진 녹두꽃
삼국간섭 직후 조선 정국의 변화 - ‘인아거일책’의 성격
경회루의 마지막 연회 - 개국기원절 행사
일본군의 경복궁 재습격과 조선 왕후 시해
춘생문사건 - 실패한 고종 구출기도
아관파천 -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난

제5장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내외정책

민영환특사의 러시아 파견과 고종의 환궁
고종의 칭제건원을 요청하는 상소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대한국국제 제정과 황제체제 정비
황제시대 고종의 정책과 그 방향
서재필의 독립신문 발간과 고종의 지원
고종과 독립협회의 애증관계
고종의 장충단 건립 - 근대적 의미의 현충사업
근대 한인의 디아스포라 - 하와이 이민

제6장 러일전쟁과 불타는 황궁 - 외교 주권 상실과 고종의 대응

의화단 봉기와 러·일의 만주 출병
고종의 국가 생존 모색 - 영세중립안과 전시국외중립 선언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강화조약
황궁의 대화재와 수옥헌의 고종
일본의 토지침탈 기도와 조야의 대응
일본의 외교권 탈취와 조야의 대항
국제사회를 향한 고종의 제소와 그 논리
헤이그특사가 밝힌 일본의 불법행위
고종의 제소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

제7장 고종의 퇴위와 운명

고종의 퇴위와 순종의 즉위
대한제국군의 저항과 안중근 의거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탈취
태황제의 궁 -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고종의 운명과 3·1운동
고종의 해외망명기도설 - 『우당 이회영 약전』
고종의 독립운동자금설 - 『덕수궁의 비밀』과 헐버트
고종의 후손

저자 소개 

저 : 이민원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충북대, 청주대, 교원대, 단국대, 경희대 등에서 한국사, 한국근현대사, 근대동양외교사 등을 강의하였으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한국보훈교육연구원 연구부장, 원광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한국의 황제』(2001),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2002), 『Q&A한국사5: 근현대』(2008), 『조...

책소개

역사 속 인물은 흔히 현재의 필요에 의해 상징으로 소환되지만, 한국 근대사에서 고종만큼 상징적인 인물은 찾기 어렵다.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은 곧 현재를 이해하고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고종의 통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물음이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의 향배를 어디로 정하는가와 결부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는 구한말 조선과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절박함에서 집필되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민족주의적인 희망으로 고종을 항일·자주·근대화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온 것에 맞서서, 실제 역사를 낱낱이 밝힌 뒤 현재 대한민국의 오류를 짚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이 책에 담겨 있다.

목차

프롤로그: ‘정신승리법’ 외교의 부활 006

1. 300년 정지된 조선의 ‘역사 시계’ 025
2. 고종 시대의 개막 071
3. 혼란의 시대 095
4. 러시아라는 ‘곰’을 경계하라 123
5. 쿠데타·반란의 시대 149
6. 조선-러시아 밀약의 후폭풍 185
7. 고종과 민 왕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 221
8. 청일전쟁과 동아시아 대변혁 263
9. 일본은 무엇 때문에 청일전쟁을 했나? 295
10. 대한제국의 운명을 바꾼 러일전쟁 327
11. 을사오적이 나라 팔아 대한제국이 망했나? 385

에필로그: 잘나가던 일본이 패망한 이유 434
 

저자 소개 

저 : 김용삼
대전고, 중앙대 문예창작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사월간지 [월간조선] 편집장, 경기도 대변인,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를 역임했다.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며 50여 개국 현지 취재를 통해 전·현직 국가원수 4명을 특종 인터뷰했다. 또한 황장엽 망명사건 특종보도로 제1회 대한민국 언론상 수상, 2008년 해양사상 보급에 공헌한 공로로 장보고대상을 수상했다. 2013년 『이승만과 기업가...

책 속으로

범지구적으로 개방과 통상·교류의 토네이도가 일고 있는 대항해의 시대에 조선은 북벌이니 소중화(小中華)니 하면서 ‘환상의 세계’로 도피했다. 상황 분석을 해보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은 모두 사전에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조선 지도부는 과거의 화려했던 영화에 젖어 이민족들에 대한 헛된 우월의식을 앞세우다 전쟁을 자초했다.
--- p. 11

조선의 ‘역사시계’는 1637년 삼전도의 항복과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에 정지되었다. 그 결과 동시대에 쉬지 않고 문명의 시계를 돌려 국부를 쌓고 국력을 축적한 청나라·일본에 크게 뒤졌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조선과 일본·중국과의 국력 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조선이 19세기 말 일본보다 30여 년 개항 시기가 늦어져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는 크게 다른 착각이다.
--- p. 69

격동의 구한말과 일제 시대를 살았던 윤치호는 고종의 통치에 대해 “어리석음과 실수의 연속”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고종의 정책에 대해 “조선 사람의 것은 빼앗고 타국 사람에게는 빼앗기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위정자들의 정책은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윤치호는 민 왕후에 대해서도 “그 영리하고 이기적인 여인이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열심히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안전했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 p. 159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조선과의 수교는 무한한 가치를 가진 ‘신(神)의 한 수’였다. 조선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오매불망 눈독을 들이고 있던 부동항 확보의 적지였다. 러시아는 조선과의 수교를 통해 조영 신조약과 거의 비슷한 권리를 획득했다. 즉 러시아가 필요로 할 경우 러시아 군함이 조선의 어느 항구라도 입항과 기항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 것이다. 러시아는 조선과의 수교를 통해 영국 해군의 글로벌 감시망을 피해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마음껏 누빌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되었다.
--- p. 226

고종의 황제 즉위 및 대한제국 선포는 자주적인 결정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공사관에 목숨을 의탁할 정도로 우호적인 친러 정책을 수행한 대가로 고종이 러시아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공포와 고종의 황제 칭제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1899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긴 했지만 자주적으로 독립해 나가긴 힘들고, 주변국들에 의해 운명이 휘둘리고 말 나라”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 p. 323

문재인 정부가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벌이고 있는 한·미·일 해양동맹에서의 이탈 및 중국·북한 추종외교는 선조(임진왜란), 인조(정묘·병자호란), 고종(대한제국 패망)의 뒤를 잇는 자멸 외교의 제4탄에 해당한다. 그것은 루쉰의 소설 주인공 아Q가 말한 ‘정신승리법’ 외교의 완벽한 부활이다.
문재인 정부의 폭망 외교는 구한말 고종과 왕비 민 씨의 나라 말아먹는 ‘정신승리 외교’와 어찌 그리 닮은꼴인가? 그 결말이 어떻게 되리란 것쯤은 이미 우리 근대사가 그 정답을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 p. 447

출판사 리뷰

고종, 시대를 읽지 못하고 고립을 자초한 지도자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는 어떤 이들에겐 퍽 충격적인 책일 수 있다. 저자 김용삼은 방대한 사료를 참고하여 자국 역사에 관한 한국인의 통념을 혁파해나간다. 고종이 주체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려던 찰나 외세의 침략을 당해 개혁이 좌초되었다거나,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문명을 전파해주었다는 등의 ‘역사적 오류’를 짚어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 책의 주요 비판 지점이 되는 것은 바로 고종의 ‘반시대적 행보’다. 고종은 근대가 발아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대에 조선의 이른바 ‘존명의리’ 사고방식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군주였다.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할 줄은 모른 채 개화파를 탄압했으며, 의지할 만한 국가를 찾아 헤매다 결국 러시아와 밀약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영·미·일 해양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패착에 빠지게 된다.

‘백성들이 무슨 죄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대한제국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저자 김용삼은 오랜 기자 생활로 다져진 현실감각과 역사 저술가로서의 안목으로 현재 우리의 위기를 진단한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가장 노골적인 반미·반일 성향을 보이며, 그러한 이념적 지향성을 애써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결국 중국과 러시아, 북한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설립하는 반면 한·미·일 공조는 흩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에서는 조선 멸망 원인을 외세의 침략이나 냉전체제 따위에서만 찾아왔던 우리의 통념이 문제시된다. 조선의 망국에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은 세계 주류 질서를 무시하고 ‘폐국’의 길을 택한 국가 지도부의 무능한 외교가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언제나 아래로 향했고, 백성, 즉 국민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비극이 이어져 왔다. 엄중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우리의 근대사는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1. 300년 정지된 조선의 ‘역사 시계’

일부 학자들은 조선의 멸망 원인을 피상적인 데서 찾는다. 19세기 말 조선이 일본보다 30여 년 개항이 늦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조선의 멸망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일본이 1543년에 개항하여 신문물을 받아들인 것과 달리, 조선은 백성에게 지식을 보급하지 않음으로써 폐쇄적인 사회로 굳어졌다. 이는 국가 지도부가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2. 고종 시대의 개막

당시 조선 사회의 폐쇄성의 책임은 물론 사회 지도층에게 있다. 1866년부터 조선을 드나들었던 독일인 오페르트는 그의 책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 “정부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체제” 때문에 영리한 백성이 능력을 펼치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1864년, 이처럼 위태로운 조선에 12세의 ‘소년 왕’ 고종이 즉위했다.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여러 개혁을 단행했으나, 그 부작용은 기존 정치의 폐해와 맞먹었다. 결국 대원군은 고종을 앞세운 민 왕후와의 권력 다툼 끝에 권력을 잃었다.

3. 혼란의 시대

고종이 권력을 잡고 단행한 조치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것뿐이었다.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화폐 정책을 단행했다가 경제 혼란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없앴던 만동묘를 부활시켜 오래전에 망해 없어진 명나라의 황제들에 제사를 올렸다. 군사 정책 역시 외적을 막는 데 신경 쓰기보다는 국왕 근위부대의 덩치만 키우는 식이었다. 변방 수비제도가 나약해진 결과는 참담했다. 1875년 운요호가 조선 해안에 나타났을 때 이 배가 지나간 고을 중 그 어디도 보고를 올리지 않았고, 조선군은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에서 일본군에 참담하게 패했다. 조선과 일본은 그 이듬해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4. 러시아라는 ‘곰’을 경계하라

세계의 흐름과 괴리된 조선의 실상은, 일본을 방문한 조선수신사의 모습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세계인의 눈에 수신사는 그 모습부터 시대착오적인 “화석과 같은 무리”일 뿐이었다. 수신사는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군사기술의 견문을 넓히라“는 목적이 무색하게 배울 생각은 없이 서둘러 본국으로 귀환한다. 이른바 ‘소중화 국가’의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던 조선이니 자신들의 국제적 위치를 알 수도 없었다. 당시 세계는 러시아와 영국의 패권다툼으로 시끄러웠는데,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국의 대열에 편입되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수신사 일행은 이 같은 상황을 고종에게 보고할 줄 몰랐다.

5. 쿠데타·반란의 시대

고종이 국왕 친위부대인 별기군 소속 군인들만 챙긴 결과,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어갔다. 이들이 흥선대원군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아 일으킨 반란이 임오군란이다. 스스로 반란군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고종과 민 왕후는 외세의 힘을 빌리게 되고, 일본군과 청군이 조선에서 무력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가를 올바르게 경영하지 못한 끝에 조선이 스스로 외세가 틈입할 만한 길을 열어준 셈이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는 제물포조약을 맺고, 청국이 경제적으로 침투할 만한 구실을 만들어주었으며, 영국과는 불평등조약의 전형인 파크스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6. 조선-러시아 밀약의 후폭풍

청국에서 보낸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조선이 러시아와 손잡는 구상을 시작하는데, 고종과 민 왕후는 이 구상에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이 강대국의 손을 잡아 저 강대국을 막아낸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사대주의적 외교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 위로부터의 혁명을 일으켜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과는 상반된 상황이었다.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이 일으킨 갑신정변도 실상은 일본의 물밑접촉에 의해 벌어진 것이었는데, 조선이 러시아의 손아귀에 넘어갈 경우 일본의 안보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즉, 조선이 러시아에게 의존하려던 것이 일본의 침탈을 부추긴 셈이었다.

7. 고종과 민 왕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

갑신정변을 겪은 후 고종과 민 왕후는 ‘개화’라는 말만 들으면 치를 떨었고, 자립적 근대화의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청의 식민통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고종은 묄렌도르프 주재로 러시아와의 수교를 단행하고 심지어 밀약까지 체결한다. 이 상황을 파악한 영국은 블라디보스토크 공격 준비의 일환으로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약한 해군력에 의존하기보다 육군력에 의존하는 정책을 추진하는데, 이것이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이었다. 그 결과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8. 청일전쟁과 동아시아 대변혁

청일전쟁의 원인 제공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엇갈린다. 대륙 침공에 혈안인 일본 군국주의자들이나 농민봉기 진압을 위해 조선에 군대를 보낸 청나라가 청일전쟁을 벌였다는, 외세 때문에 조선이 고초를 겪었다는 주장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청일전쟁의 진정한 원인 제공자는 고종이라 할 수 있다. 영·미·일 등의 해양세력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시기에 국제 질서에 어긋나는 외교를 펼침으로써 외세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9. 일본은 무엇 때문에 청일전쟁을 했나?

청일전쟁의 원인으로는 동학농민봉기도 거론할 수 있다. 일부 역사학자 및 정치권에서는 동학농민봉기의 긍정적 측면만을 부각하려 하지만, 동학이 외세의 침략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조선은 세밀한 외교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종과 민 왕후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또다시 친러시아 행보를 밟았고, 이는 일본이 민 왕후 제거 계획을 세우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0. 대한제국의 운명을 바꾼 러일전쟁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현실로 다가오던 무렵, 고종은 망명할 곳을 찾느라 바빴다. 러일 협상이 결렬된 후 미국공사관에 망명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고종은 국외중립 선언을 추진했다. 이 선언은 독일 공사와 프랑스 공사, 이탈리아 공사에 접수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지지 입장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전쟁이 발발해 러시아공사관이 철수하자 고종은 파블로프 공사에게 “대한제국은 러시아군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메시지를 전했으나, 일본은 러시아를 꺾고 조선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11. 을사오적이 나라 팔아 대한제국이 망했나?

이상의 근대사를 정리해보면 ‘평화로운 조선에 외세가 침략한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라는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가 명확해진다. 영·미·일 해양세력이 세계의 주류로 떠오르고 국력을 기반으로 한 국제 질서가 확립되던 시기, 목숨을 의탁할 나라를 찾아다닌 고종은 조선을 폐망으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이 같은 외교 실패의 역사를 직시하고 ‘남 탓’만 일삼는 버릇을 고쳐야 오늘날 대한민국은 올바른 길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전, 고종황제의 국장> 

1919년 1월21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어 덕수궁에서 지내던 고종황제가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국장 國葬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주도하여 진행 하였기에 전통적인 조선국왕의 국장 절차에 비하여 매우 축소되고 변형되었다. 고종의 관[제궁 帝弓]은 불과 40여 일만에 덕수궁에서 발인 하였고, 이를 서러워 하는 많은 사람들의 통곡 속에서 조선의 제26대 왕이며 대한 제국의 1대 황제 였던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와 함께 남양주 홍릉洪陵 에서 잠들었다.

고종의 죽음은 우리나라 항일 독립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 李王家로 격하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나라의 상징이었던 고종황제가 독살 되었다는 소문은 나라를 잃고 억눌려 왔던 사람들의 울분을 폭팔시킨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의 <100년전, 고종황제의 국장> 전시에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역사적인 민중 항쟁의 배경이 되었던 고종황제의 국장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100년전 고종 황제의 죽음, 민족항쟁의 불씨가 되다.

고종은 500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였다. 비록 전근대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격동기에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통해 나라의 주권을 유지하고, 서구의 근대적 제도와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고자 노력한 군주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권을 박탈하고 권좌에서 강제로 물러나 덕수궁에서 쓸쓸하게 생활하고 있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백성들이 나라가 몰락했음을 뼈져리게 느낄만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3.1운동의 정신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한인사회에도 들불 처럼 번져나갔고, 나아가 1919년 4월11일 상하이에서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조선왕조오 대한제국은 먼 과거의 역사로만 느껴지기 쉽지만 고종의 죽음은 불과 백 년 전의 일이다. 이번 전시가 억압에 항거하는 우리민족의 기념비적인 항쟁 3.1운동의 의미를 되졸아 보면서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 온 역사의 흐름을 상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919년1월21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어 덕수궁에서 지내던 고종황제가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종 황제의 일생

고종 (1892~1919년, 재위 1863-1907년)은 조선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李昰應 (1820~1898)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철종이 승하하자 익종[ 翼宗 효명세자, 후에 문조 文祖로추존]에게 입적하여 왕위에 올랐다. 12세에 즉위한 고종은 신정왕후의 수렴청정 垂簾聽政과 흥선대원군의 섭정 攝政으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1873년(고종10)부터 친정 親政을 시작하였다.

고종은 즉위 초기부터 조선을 노리는 주변국에 대응해야 했으며, 바른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 노력했다.그러나 갈수록 대내외적인 혼란은 가중 되었고 1895년(고종32)에는 왕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하는 초유의사건[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등[아관파천] 위기극복을 피한 고종은 독립적인 나

라를 만들기 위해  1897년 대한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론에게 주권을 빼앗김으로써 독립국 건설의 의지는 좌절 되었다. 고종은 이런한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구편화회의에 특사를 파견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결과로 1907년 퇴위당하였다. 이후 덕수궁에 거처하며 말년을 보냈으며 1919년 1월21일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고종황제 갑자기 승하하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21일 새벽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사인死因은 뇌일혈로 알려졌으나 평소에 지병이 없고 건강했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곧 일제에 의한 독살설로 이어졌다. 고종이 조선 독립에 대한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하라는 일본정부의 강제적 요청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또는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성명문을 보내려고 했기 때문에 일본인 혹은 친일파에게 도갈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간 것이다.

당시에는 1919년 1월25일로 에정 되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일본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여사)의 결혼을 보는 민중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황제의 독살설은 나라를 되찿고자 하는 민중의 뜨거운 열망과 함께 3.1운동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고종황제의 독살설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독립운동가 박은식 朴殷植 (1859~1925년) 등 당시 많은 사람으로부터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이는 3.1운동의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민중들에게 조선왕실과 이를 잇는 대한제국이 여전히 의미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종황제 홍릉에 잠들다

고종 황제가 영면한 곳은 남양주에 위치한 홍릉洪陵이다. 이곳은 고종이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능을 옮겨 훗날 자신과 합장하기 위해 마련한 장소였다. 1900년에 터를 정한후 1904년까지 일부 전각을 조성해 두었기에 석물 등을 보강한 후 단기간에 왕릉 조성을 위한 공사가 가능 하였다. 왕릉의 조성은 이왕직 李王職이 주도 하였다.

홍릉은 다른 조선왕릉에 비하여 능역이 상당히 축소되었지만 제도는 왕릉이 아닌 황제릉을 따랐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려는 고종의 의지를 보여준다. 전각의 명칭이나 석물의 종류 배치에 적용된 황제릉의 형식은 순종 황제의 유릉 조겅 때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홍릉의 석물은 쇠락한 나라의 현실을 반영하듯 매우 형식적이고 투박하게 조각되었다. 또한 국장 진행 중에 명성황후의 재궁을 청량리에 옮겨 오는 등 기존 에법과 어긋난 절차가 홍릉 조성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생 하였다.

고종 황제의 국장,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다

조선왕조에서 왕과 왕비의 장레 절차인 국장國葬은 민간의 장례의식에 비해 장중하고 복잡했다.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의 주도아래 승하昇遐한 후 발인發靷을  거쳐 왕의 관 [재궁 梓宮]을 왕릉에 안치하고,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모심으로써 끝났는데, 약70단게에 달하는 정차를 대략3년에 걸쳐 진행하였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장레는 조선총독부가 임시로 설치한 장의괘 葬儀掛가 주도하였고, 대부분의 절차가 축소, 변형되었으며 장례기간도 대폭 단축되었다. 또한 조선국왕의 국장이 아닌 일본 친왕親王의 국장을 기본으로 하고 이에 조선의 옛 더한다는 원칙으로 진행되었기에 일본 신도神道식 의레가 적용되었다. 이러한 변형과 왜곡은 일본 식민통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했다.

고종황제의 국장은 500년 조선왕조의 종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었기에 국내외에 큰 관심사가 되었다. 발인을 보기위해 상경한 지방민이 40만 명에 달했으며, 국장 기간 내내 관련기사가 끊임없이 보도되었고 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도 관련기사를 보도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449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고종황제의 죽음과 국장은 500년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상징했다. 그러나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폭제로서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4366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고종황제

생애 : 조선제 26대   묘호 : 고종 (高宗)  휘 :이휘

고종은 (1852년 (철종3년) 음력 7월25일 (양력9월8일)- 1999년 양력 1월21일)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민국 광무제 (光武帝 재위 1897~1907)이다.  연호는 건양. 광무이다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생부 흥선대원군과 헌종의모후 조대비와의 약속으로 삼종숙인 추존왕 익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1919년 1월21일에 사망하자 그가 독살당했다는 

독살설이 시중에 유포되기도 했는데, 윤치호 에의해  독살설이 기록으로 전하는 가운데 2009년 일본국회 헌정자료실에서 조선총독 데하우치 마사다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약을 탓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일본 궁내성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치적 : 고종은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재위했지만 1863년부터 1864년까지 삼종숙모이자 양어머니인 신전왕후 조씨가 섭정하였고 1864년부터 1873년 까지 생부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했다.

고종은 1880년대 이후 열강의 개항 요구와 정-일-러 3국의 3파전이 치열한 가운데 국권을 보존해 왔지만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양위하였고, 1910년에는 이태왕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에 발 맞추어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 였는데,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 무위영(武衛營) 과 장어영의 양영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교린, 군무,변정, 통상. 등 12사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임오군란 (1882) 갑신정변 (1884),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전쟁 (1894), 갑오개혁등으로 혼란에 빠진 가운데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원구단을 짓고 국호를 대한제국 ,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히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고종은 일본 침탈에 대비하여 1902년 6월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를 시작으로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제도를  절충하는 군제개혁을 에정하였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17일 일본의 강요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면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1907년 이준, 이상설 등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황태자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되었고 1910년 한일 합병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 제국으로 부터 이태왕 (李太王)의 작위를 받고 덕수궁에서 생활하다가 1919년 1월21일 아침 경운궁에서 붕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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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홍릉. 유릉

조선왕릉은 조선(1392~1897)의 왕고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 (1897년~1910)의 황제와 황후 73명의 무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능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와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햇습니다. 풍수사상에 따라 최고 명당에 왕릉자리를 정하고 주변 지형과 경관을 그대로 살려 능을 만들었습니다. 왕릉을 짓고 관리하는 일을 상세하게 적은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고 지금 각 왕릉에서는 해마다 제항을 지내고 있어 살아 있는 문화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홍릉은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1대황제 고종과 대한제국 1대황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이며, 유릉은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의 능입니다. 홍릉과 유릉은 숲을 사에에 두고 가까운 거리에 나란히 있습니다. 고종과 순종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잃은 뒤인 일제 강점기에 세상을 떠났으나, 두 능은 대한제국 황제릉의 제도에 따라 만들어져 다른 왕들과는 모습이 약간 다릅니다. 홍릉과 유릉의 주변에는 의민왕 황태자(영친왕), 의친왕 등 대한제국의 황족들과 고종의 후궁, 황족의 후실들의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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