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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위기 (2022) - 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

동방박사님 2024. 8. 12.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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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국내에 이미 출간된 『얄타』, 『체르노빌 히스토리』를 비롯한 수십 권의 논픽션의 저자인 세계적 석학 세르히 플로히는 『핵전쟁 위기』에서, 새롭게 발굴된 소련의 문서고 자료와 특히 우크라이나에 보관 중인 KGB 자료를 활용하여 당시 크렘린의 의사 결정 과정과 소련의 미사일 전략 동원과 파견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세르히 플로히는, 1969년에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위기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의 『13일』이 출간된 이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수많은 저작들이 중대한 시사점들을 던지면서 우리가 사건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담론은 변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그가 보기에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기존의 담론은 ‘존 케네디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고, 최측근 참모들이 관여한 의사 결정 과정 덕분에’ 결국 위기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세르히 플로히는 이 위기에서 ‘핵심 인물들이 올바른 일을 했던 순간을 포착하는 대신, 이들이 일을 그르친 수많은 상황들을 고려함으로써’, 그리고 미국 위주의 관점에서 놓치고 있는 것을 새로이 발굴된 러시아 자료를 통해 밝혀냄으로써 기존의 담론에 도전하고자 한다.

목차

옮긴이 서문 | 한반도 핵 위기의 반면교사, 쿠바 미사일 위기

들어가는 말
프롤로그

1 네메시스

견습 대통령
게임의 주도자

2 붉은 도박

공산주의의 승리
로켓맨
핵경쟁으로
아나디르 작전
공해

3 결정의 고뇌

베를린의 포로
제보
신혼여행
“모두 없애버려라”
검역

4 진실의 순간

모스크바의 밤
어둠 속의 깜박임
나무칼
미국인들이 쳐들어온다!

5 검은 토요일

터키라는 수렁
통제권 상실
“목표물 명중”
비밀 회동
버뮤다 삼각지대

6 부활

일요일의 공포
승자와 패자
분노

7 해결

미션 임파서블
바리케이드로 돌아가다
추수감사절

저자 소개 

저 : 세르히 플로히 (Serhii M. Plokhy)
1957년 옛 소련 고리키(현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드니프로페트롭스크대학(University of Dnipropetrovsk)을 졸업한 뒤 1990년 타라스 셰브첸코 키예프국립대학에서 국가박사학위(Habilitation degree)를 받았다. 1983~1991년 드니프로페트롭스크대학에서 강의하다가 1991년 캐나다로 이주하여 앨버타대학교 역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7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역 : 허승철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학과 브라운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88년 브라운대학에서 슬라브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 러시아연구소(현 Davis Center for Russian Studies)에서 연구교수(Mellon Fellow)를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구교수 시절 하버드대학교 우크라이나 연구소(HURI)에서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역사를 공부했다. ...

책 속으로

뚱뚱하고 대머리에 에너지 넘치고, 허세를 잘 부리고, 연기를 잘하고, 종종 떵떵거리곤 하는 흐루쇼프는 젊은 미국 대통령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가난한 하층계급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성장 과정, 경력 행적, 정치적 이념에서도 케네디와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다. 젊은 케네디의 야망이 의지 강한 자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흐루쇼프의 야망은, 가족의 실패자로 여겨진 남편과 달리 아들의 성공을 보고 싶어 한 어머니의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케네디가 국가가 제공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면, 흐루쇼프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케네디가 사람을 다룬 경험이 2차대전 중 PT-109 순찰 어뢰고속정을 지휘한 것이 전부였다면, 흐루쇼프는 생애 대부분을 큰 프로젝트와 많은 사람들을 감독하면서 보냈다. 케네디가 평생을 국제 정치에 관여하기 위해 준비했다면, 흐루쇼프는 60세가 넘어서야 고위급 외교에 처음으로 관여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이도 컸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흐루쇼프 인생과 경력의 전환점이었다. 그보다 스물세 살 젊은 케네디는 바로 그해에 태어났다.
--- p.39

“만일 미국이 독일을 놓고 전쟁을 벌이겠다면 그렇게 하시죠. 아마 소련은 즉시 평화조약을 맺고 그에 따라 대처할 것입니다. […] 전쟁을 원하는 미치광이가 있다면 구속복을 입혀야죠.” 케네디는 깜짝 놀랐다. 지금 흐루쇼프는 대통령을 전쟁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늦게 흐루쇼프와의 사담에서 베를린으로 화제를 다시 돌리려던 케네디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흐루쇼프는 강경했다. “무력에는 무력으로 대항할 것입니다.” 케네디는 이 말로 대화를 마쳤다. “추운 겨울이 닥쳐올 것입니다.”
--- p.47~48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은 독일 주둔 미군 감독관이자 1948~49년 베를린 공수작전의 영웅인 클레이를 케네디는 자신의 자문관이자 서베를린 주민들을 안심시키는 사절로 1961년 8월 서베를린으로 보냈다. 클레이는 그 목표를 달성했지만 10월 27일 모든 사람을 대단히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날 그는 동베를린을 포함해 베를린 전체를 자유롭게 이동할 미국의 권리를, 2차대전 종결 직후 4개국 합의에 의해 보장된 대로 집행하기 위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간 국경의 체크포인트 찰리에 미군 탱크를 보냈다. 소련은 자국 탱크를 그 지점에 보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초저녁 즈음 2열의 탱크부대가 체크포인트 찰리 경계선 양쪽으로 100미터 미만의 거리를 두고 서로 대치했다.

탱크에는 포탄이 장전되어 있었고, 만일 상대가 포격하면 대응 사격을 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미군을 지휘하는 클레이 장군은 탱크를 이용하여 새로 건설된 베를린 장벽 일부를 부술 생각이었다. […] 10월 27일 오후 5시에 시작되었던 대치 상황은 10월 28일 오전 11시에 종결되었다. 현장의 명령은 가장 최고위층, 즉 백악관과 크렘린에서 내려왔다. 케네디도 흐루쇼프도 모두 대치 상황이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p.54

피그스만 침공으로 ‘죽을 고비의’ 경험을 한 피델 카스트로는 정권의 공식적 수사를 극적으로 바꾸었다.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상징적 축일로 채택한 국제노동자의 날인 5월 1일 아바나에서 행한 연설에서 카스트로는 자신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선언하고 법률가들에게 쿠바를 위한 새로운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도록 요청했다. 그는 자신과 국가를 분단 세계에서 확고히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시켰다. “케네디가 사회주의를 싫어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제국주의를 싫어합니다!”라고 카스트로는 선언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싫어합니다! 그가 자신들의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곳에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의 존재에 항의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제국주의-자본주의 정권의 존재에 항의할 권리를 당연히 가지고 있습니다.”
--- p.61~62

6월에 미국 공군은 15기의 주피터미사일을 터키에 배치했다. […] 주피터미사일이 2,400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고 모스크바에서 2,080킬로미터 떨어진 터키 이즈미르 주변에 배치된 것을 감안하면 미국은 모스크바를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 1962년부터 소련군은 3,700킬로미터 사정거리를 가진 R-14 또는 SS-5스키언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 단거리, 중거리 미사일을 쿠바 해안에 배치함으로써 흐루쇼프는 미국의 목표물에 다다르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완벽한 해결책처럼 보였다. […] 흐루쇼프는 그로미코의 의견을 물었다.

외무장관은 이 아이디어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직 정치국원이 되지 못해 최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우려를 표현하는 데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가져가는 것은 미국에 정치적 폭발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그로미코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했다. […] “우리는 핵전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에 그로미코는 안도했다.
--- p.78~79

두어 해 전 쿠바를 방문한 적이 있는 미코얀은 이 작전이 비밀로 지켜질 수 없고 미사일이 일단 배치되면 미국의 탐지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나는 흐루쇼프에게 1960년 현지에서 내 눈으로 본 것을 얘기했다. 미사일 발사장치를 은폐할 숲이 없고, 야자수만 띄엄띄엄 있을 뿐이었다”라고 미코얀은 회고했다. […]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요? 단지 그것을 감내하고, 전 세계 앞에서 불명예를 감수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투자한 쿠바를 잃을 것인가요? 아니면 핵무기로 반격해서 전쟁을 발발시킬 건가요?” […] “당신 생각은 어떻소? 피델 카스트로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소? 그는 이에 동의할 것 같소?” 이제 외교관으로 변신하려는 KGB 장교는 자신의 모든 외교적 능력을 동원하여 대답했다.

그는 카스트로가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모든 외국 기지에 반대하는 선봉에 서 있으며, 미국이 관타나모기지에서 떠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므로, 쿠바에 소련기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정책과 모순된다고 말했다. […] “당신 말대로 그들이 이 계획에 동의하지 않으면 무슨 놈의 혁명이란 말이오?”라고 말리놉스키는 소리쳤다. “나는 스페인에서 싸웠소. 그곳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받았단 말이오. […] 그렇다면 사회주의 쿠바는 받아들일 이유가 훨씬 많지!” […] 이념적 논쟁이 벌어지자 알렉세예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p.87~88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이라고 엄숙한 목소리로 그는 연설을 시작했다. 긴박감을 드러내면서도 결의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지난주 일련의 공격용 미사일 기지가 그 감옥화된 섬나라에 준비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이 기지들의 목적은 다름 아닌, 서반구를 향한 핵공격 능력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는 흐루쇼프에게 쿠바에서 발사되는 핵미사일은 “소련에 대한 전면적 보복”으로 대응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베를린에 대한 소련의 보복 공격을 그 어느 때보다 우려하며 케네디는 봉쇄의 제한적 성격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는 소련이 1948년 베를린을 봉쇄한 것같이 생활필수품을 못 들어오게 막는 것이 아닙니다.” […]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계속 건설하고 새 미사일과 핵탄두를 쿠바로 계속 수송하도록 허용한 그 오랜 망설임 끝에 케네디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선언을 크렘린이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 아무 짐작도 할 수 없었다.
--- p.183

“우리가 공격하는 첫 번째 대상이 소련 잠수함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존 케네디는 참모들에게 말했다. “나는 차라리 상선이 대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맥나마라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키몹스크호나 가가린호에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소련 잠수함들을 강제적으로 부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저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잠수함에 대한 공격을 늦추면, 대통령님, 극도로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는 케네디에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우리 함정을 쉽게 잃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포기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그가 내각회의실에 설치된비밀 녹음테이프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사건의 방향을 처음에 주도했지만, 더 이상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다”라고 로버트 케네디는 나중에 썼다. 숙고의 중요한 순간이었다. 대통령은 소련 선박들을 차단하는 것을 승인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자신의 형이 불안해하는 신호를 보았다. “그의 손이 얼굴로 올라가 입을 막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는 주먹을 폈다 쥐었다. 얼굴은 핼쑥하고 눈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동안 마치 방 안에 다른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고, 그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닌 것만 같았다”라고 로버트는 회상했다.
--- p.216~217

소련 외무차관 바실리 쿠즈네초프는 몇 주 후 한 부하직원에게 은밀히 말했다. 미 전략공군사령부가 경계태세를 전쟁 직전 최고위 수준으로 상향했다는 정보를 받고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기겁해 까무러칠 정도였다”라고. […] 흐루쇼프는 볼샤코프를 통해 전달하려고 전날 작성해놨던 편지가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 “미국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 시설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그들이 흐루쇼프가 격앙된 감정을 폭발할 것으로 기대했다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 측에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쏘면 그들도 쏠 것 같습니다”라고 흐루쇼프는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은 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당연하죠”라고 그는 선언하며 자신의 두려움을 미국 측에 투사했다. […] 그러고서 그는 쿠바에 대한 자신의 정책을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이제 쿠바가 전 세계 관심의 초점이 되도록 만들었고, 체제끼리 서로 머리를 맞부딪치도록 만들었습니다”라면서 자신의 도박이 보상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 p.228~229

위기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케네디는 자신의 참모보다 흐루쇼프에게 더 가까움을 느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거래를 제안했다. 문제는 케네디가 이것을 정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가였다. 그는 엑스컴에서 유일하게 타협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나머지 모두가 반대했다. […]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변덕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원래 입장에서 후퇴함으로써 자신을 유약하게 보이게 만들 공개적 타협을 수용할 수 없었다. 나토 동맹국들에게 자신이, 오랜 세월 유럽이 더불어 살아온 소련의 핵위협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그들을 배신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했다.
--- p.254~255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면서 잠시 동안, 명령이 아무런 효력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레츠코가 U-2기를 격추시킬지 말지 주저하는 동안 목표물은 레이다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명령은 효력을 유지했고 몇 분 후, U-2기가 쿠바 동쪽 끝에서 기수를 틀어 다시 아바나 방향으로 서진하고서 다시 레이다에 잡혔을 때 보론코프의 부하들은 준비가 되었다. […] “어떻게 할까요? 발사할까요?”
--- p.277

“갑자기 해군항공기가 적막을 깨뜨렸다”라고 슬로터는 잠수함이 부상하고 약 한 시간 반 뒤에 일어난 사건을 서술했다. “거대한 P2V넵튠 항공기가 상공을 선회했다. 항공기는 전자카메라 렌즈를 작동하기 위해 몇 개의 조명탄을 떨어뜨렸다. 빵! 빵! 빵! 번쩍이는 불빛으로 눈이 부셨다.” 슬로터는 잠수함 함교의 장교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몇 분 뒤 다른 일이 일어났다. “자신들이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한” 잠수함 함장은 “선수의 어뢰관을 코니호에 조준”했다고 슬로터는 기록했다.

구축함 코니호로서는 공포의 순간이었으나 함장인 윌리엄 모건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코니호 함장은 나에게 P2V기의 공격적 행동을 사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라고 슬로터는 기억했다. 그는 조명등을 켜서 이 메시지를 전달했다. 다행히도 메시지는 짧은 것이었다. 슬로터는 자신이 작은 오해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핵전쟁을 예방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코니호와 잠수함을 둘러싸고 있는 미 해군 선단을 겨냥한 어뢰는 핵탄두를 장착한 상태였다.
--- p.292

이때가 워싱턴 시각으로 아침 9시였다. 일요일 아침이었고, 케네디는 대국민 연설을 할 계획이 없었다. 흐루쇼프와 동료들을 그토록 놀라게 하고, 케네디에게 보낼 편지를 재촉하게 만든 그 케네디의 연설은 계획된 적이 없었다. 소련 군사 스파이들은 10월 22일 자 케네디 연설의 재방송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여러 번 발생한 것처럼 이것은 착각이었다. 이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였다.

소련 측은 아마도 부족한 영어 지식으로 TV와 라디오에서 들은 것을 혼동했을 것이고 더욱이 미국 정치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 거의 없었다. 설사 케네디가 일요일인 10월 29일 대국민 연설을 하려고 했다 해도, 자신과 국민들이 예배하러 교회로 향하는 아침 9시로 시간을 잡았을 리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인 소련의 정보원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이중의 실수였지만, 다행스러운 실수였다. 지금은 전쟁만 피한 것이 아니라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방송을 타고 있었다.
--- p.321

미사일 기지 철수 뉴스는 소련 병사들 사이에 큰 혼란을 일으켰고,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가 갑자기 이것을 해체하고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아, 가뜩이나 저하된 사기가 더 악화되었다. “그럼 우리를 왜 쿠바에 보낸 거야? 왜 이런 장비를 여기에 가져왔다가 다시 가져가는 거야?”라고 메탈루르그 아노소프호를 타고 쿠바를 떠난 사병 스토야노프는 동료 병사들에게 물었다. […] 소련 장교들과 병사들은 쿠바인들에게 기대했던 감사 인사도 듣지 못하고 쿠바를 떠났다. “쿠바 철수 과정은 우리 병사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라고, 전술핵탄두를 다루는 집단의 지휘관 라파엘 자키로프는 말했다. “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야간에 트럭에 장비가 실렸습니다. 쿠바 동지들의 작별 인사도 받지 못했죠. 소련 수송선은 다른 배가 없는 빈 부두에 대기했습니다. 모든 병사가 명예롭게, 이기심 없이 군사 임무를 수행하고 조국의 명령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떠난 겁니다.”
--- p.359

요구하고 위협한 것은 또다시 케네디였지, 흐루쇼프가 아니었다. 이전에는 의제와 사건 추이의 속도를 후퇴할 때조차 흐루쇼프가 주로 정했다면, 이제 주도권을 잡고 쇼를 펼치는 것은 케네디였다. 케네디와 참모들은 승자독식 무드에 사로잡혔고, 더 이상 흐루쇼프가 쿠바를 놓고 핵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새로운 양보를 요구했다. 10월 20일 케네디는 참모들에게 쿠바에 있는 소련 폭격기를 안고 살아야 하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관용은 불필요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케네디로부터 점점 압력을 받고, 날이 갈수록 핵무기를 사용할 의지가 없어지는 가운데 흐루쇼프는, 한편으로 카스트로와 세계 혁명에 대한 자신의 당찬 꿈과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자국의 이익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 p.375

11월 19일 저녁이 되자 카스트로는 폭격기를 둘러싼 전투에서 자신이 패배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는 미국과 타협을 해버린 것이다. 카스트로는 프로파간다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들과 세계 언론은 쿠바가 핵전쟁을 막기 위한 두 강대국 사이의 합의에서 핵심 장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스트로가 점점 더 우려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케네디의 대국민 연설이 임박했다고 미국 언론이 보도한 것이다. 카스트로는 케네디가 쿠바를 공격하고 모욕을 줄 것을 우려했다. “우리를 걸레처럼 만들어서” 쿠바인들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리고, 이들이 지도자를 포기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 그는 미코얀에게 쿠바는 봉쇄를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봉쇄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혁명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미코얀은 카스트로의 혁명적 수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카스트로가 얼마나 피로한지 알았기에 그의 말에서 판단 실수를 지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미코얀은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 p.379~380

출판사 리뷰

지나간 역사가 갑자기 현재가 되었다…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잊어버렸다…!

핵전쟁 위기가 핵전쟁으로 갈 뻔한
세계사의 그 순간, 그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북한 핵위협은 쿠바 미사일 위기의 슬로 모션을 보는 것 같다.”
[뉴욕타임스]

2017년 여름 두 명의 영향력 있는 논평가가 한목소리로 김정은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 간 대치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세계를 강타할 최악의 핵 위기라고 경고했다. 그중 한 사람은 공화당원으로 미래에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될 존 볼턴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민주당원으로 과거에 클린턴 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 오바마 정부에서 CIA 국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리언 패네타였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거론되고, 북한의 핵전력이 나날이 위협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은 그들의 어두웠던 전망을, 지난 몇 년간 평화를 희망하는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우리는 무엇을 오해했고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우크라이나 출신의 하버드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하버드 우크라이나연구소장인 세르히 플로히Serhii Plokhy의 2021년 작 『핵전쟁 위기?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Nuclear Folly: A History of The Cuban Missile Crisis)』은 이러한 핵 교착 상태에서 불가피하게 기억을 소환하게 되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저작으로, 1962년 당시 미국·소련·쿠바의 핵심 정치인인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니키타 흐루쇼프, 피델 카스트로가 전 세계를 핵전쟁의 위기로 몰아간 결정적인 오해와 착각과 오판의 순간들을 다시 그려냈다.

국내에 이미 출간된 『얄타』, 『체르노빌 히스토리』를 비롯한 수십 권의 논픽션의 저자인 세계적 석학 세르히 플로히는 『핵전쟁 위기』에서, 새롭게 발굴된 소련의 문서고 자료와 특히 우크라이나에 보관 중인 KGB 자료를 활용하여 당시 크렘린의 의사 결정 과정과 소련의 미사일 전략 동원과 파견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세르히 플로히는, 1969년에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위기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의 『13일』이 출간된 이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수많은 저작들이 중대한 시사점들을 던지면서 우리가 사건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담론은 변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그가 보기에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기존의 담론은 ‘존 케네디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고, 최측근 참모들이 관여한 의사 결정 과정 덕분에’ 결국 위기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세르히 플로히는 이 위기에서 ‘핵심 인물들이 올바른 일을 했던 순간을 포착하는 대신, 이들이 일을 그르친 수많은 상황들을 고려함으로써’, 그리고 미국 위주의 관점에서 놓치고 있는 것을 새로이 발굴된 러시아 자료를 통해 밝혀냄으로써 기존의 담론에 도전하고자 한다.

1962년의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차이와 착각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핵전쟁에 대한 공포였다. 두 사람 모두 핵전쟁에서 승자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르히 플로히가 보기에 그 점이야말로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게 된, 즉 ‘핵전쟁 위기’가 ‘핵전쟁’으로 가지 않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핵전쟁 위기』는 먼로독트린, 1898년 쿠바에 미군이 상륙하여 마침내 독립이 얻어졌던 일에서부터 케네디의 대통령선거 당시 상황, 취임 직후의 피그스만 침공, 베를린 장벽 건설, 흐루쇼프와 마오쩌둥 치하 소련과 중국의 관계 등 전 세계의 정황을, 쿠바 미사일 위기를 재구성하는 맥락으로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서술함으로써 20세기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하마터면 전 인류에 대재앙을 가져왔을 뻔한 순간들을 그 안에서 발견하며, 그 ‘옛 위기’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선 자리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저자는 전 세계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를 특징지었던 핵무기

벼랑끝전술(brinkmanship)로 다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대에게 오늘날 세계의 불확실성을 설명하는 한 방법으로 그 시기의 극적인 사건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냉전 시대 백악관과 크렘린을 오가는 생생하고 긴장감 넘치는 서술, 그들의 명령대로 움직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그 최고의 밀실을 충격에 빠뜨린 최전방의 군인들과 지휘관들의 이야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 어느 순간 감동의 전율에 휩싸이게 한다. 세간의 수많은 추천도서목록에 오른 논픽션이면서도 한 편의 잘 쓰인 소설처럼 읽히는 『핵전쟁 위기』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또 다른 역사의 결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이는 대작이다.

케네디, 흐루쇼프, 당시의 세계 지도자와 시민들 세대는 1954년 미국의 캐슬 브라보 수소폭탄 실험과 1961년 소련의 차르 봄바 실험으로 입증된 믿을 수 없는 파괴력을 보았을 뿐 아니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의 그늘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그 세대는 원자폭탄과 특히 수소폭탄이 자국과 인류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통렬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책에 기술된 두 지도자의 모든 행보는 핵무기 사용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었다. 오늘날의 세계 지도자들이 1962년 케네디와 흐루쇼프보다 핵무기와 핵전쟁에 대해 더 무신경한 태도를 취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_들어가는 말에서

“어떻게 할까요? 발사할까요?”

‘우리는 핵미사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핵전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두려움을 줘야 합니다!’

위기가 전쟁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이 늦었다. 1823년 먼로독트린을 천명한 바 있는 미국은 1898년 6월 쿠바 해안에 상륙해 쿠바에 독립을 가져왔으나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 그랬듯, 친미 성향의 지도자들은 자국민들의 삶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몬카다 병영 습격의 실패 이후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체 게바라를 만나, 물 새는 요트 그란마를 타고 쿠바로 돌아온 카스트로는 극적으로 혁명에 성공한다. 그러나 농지 개혁, 공산주의와 소련 개입을 심각하게 우려한 미국은 쿠바의 정권을 바꾸기 위해 피그스만 침공을 단행한다.

아이젠하워 정권에서 세워진 이 침공 작전은 1961년 1월에 취임한 젊은 대통령 케네디의 첫 사안이 되었다.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그의 첫 시험대가 되었던 이 침공은 실패로 돌아가고, 대통령이 더 공격적으로 나서지 않은 데 대해 군부의 불만이 커진다. 이러한 갈등으로, 취약한 상황에 처해 있던 케네디는 바로 그해 6월 흐루쇼프의 호응을 받아 빈에서 회담을 갖지만, 냉전의 두 강대국 정상들을 예민하게 하던 베를린 문제는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

이러한 가운데 흐루쇼프는 쿠바 혁명의 상황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을까? 소련의 핵미사일 설치를 어떻게 결정하게 되었는가? 일명 ‘아나디르’라 불린 이 대대적인 작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그리고 국내 정치적으로 조금도 입지를 굳히지 못한 상태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케네디와 그 참모들은 어떤 논의와 결정을 이루어갔는가? 흐루쇼프의 장황하기로 유명한 편지와 연설, 워싱턴 역사상 최고의 학력 소지자들로 구성된 외교정책팀의 브레인스토밍, 그리고 이 미사일 위기에서 최고 지도층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군인과 지휘관들, 미사일과 정찰기와 잠수함 등 육해공을 아우르는 특별한 전쟁 무기들의 이야기가 『핵전쟁 위기』에 담겼다.

이 책에 서술된 사건들이 종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위기 종결 1년 후인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외국이 아닌 미국 댈러스 여행 중에 암살당했다. 흐루쇼프도 1964년 10월 14일 외국 군대가 아니라, 이전에 자신에게 아부하던 부하들에 의해 권좌에서 제거되었다. 이날은 미국 U-2기가 쿠바에서 소련 미사일을 발견하고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추천평

최고의 책이자 엄청난 학문적 성과로, 독자를 몰입하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20세기 국제관계를 주제로 한, 가장 중요한 책의 반열에 올릴 만하다.
- 제임스 로즌 (월스트리트저널)
생생하고 소름 돋는 새로운 디테일을 알게 하는 책이다. 정신이 번쩍 드는 설명을 다 읽고서, 오늘날 파키스탄, 인도, 중국, 북한, 미국 등의 핵 교착 상태에 실재하는 위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맥스 부트 (워싱턴포스트)
아마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가장 권위 있고 명민한 책일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연구자도 접근하지 못한 KGB 자료를 비롯해 최근에 기밀 해제된 러시아 자료의 새로운 정보가 가득 차 있어,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 빅터 세베스티엔 (파이낸셜타임스)
이 책을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궁극의 역사로 만드는 것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소련 관점의 디테일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서술했다는 점이다. 플로히가 핵심 정책결정자들이 상대편의 생각을 읽는 데 완전히 실패한 것을 그려낸 대목이야말로 가장 인상 깊은 지점이다. 이 탁월한 저술은 이제 모두에게 경종을 울린다.
-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