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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2015)

동방박사님 2024. 8. 17.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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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광복 70주년, 장준하 선생 서거 40주기 기념 전면 개정판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 광복군에 투신한 6천 리 대장정의 기록

1944년 7월 7일, 중국 쉬저우의 ‘쓰카다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장준하가 일본군이 중일전쟁 7주년을 맞아 기념 회식을 하느라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김영록?윤경빈?홍석훈과 함께 목숨 걸고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돌베개』는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고인이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세에 남긴 뜨겁고도 준엄한 항일수기이다.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7개월여에 걸쳐 쉬저우에서 충칭 임시정부까지 6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대장정에 굽이굽이 서린 숱한 일화와 1945년 11월 임시정부 환국 직후의 상황까지 2년여의 기간을 다룬 이 책의 무대는 평양에서 쉬저우→린촨→난양→라오허커우→파촉령→충칭→시안→상하이→서울 등지로 광활하게 펼쳐진다. 함석헌 선생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 이 책이 나를 빨아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회오리바람을 쳤습니다”라고 한 바 있는 이 책은 저자의 표현 그대로 자신보다 앞서 죽어간 “불쌍한 선열들 앞에 띄우는 바람의 묘비”이며, 그 내용은 망국과 분단이라는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하다. 진정한 나라 사랑의 길이 무엇인지를 뜨겁게 웅변하는 이 책을 통해 장준하라는 역사의 거목을 추모하며 다시금 오늘을 돌아보자.

목차

발문-『돌베개』에 부치는 말

탈출
불로하 강변의 애국가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잊히지 않는 얼굴들
광복군훈련반에서 3개월
라오허커우의 공연
파촉령 넘어 태극기
눈물의 바다
자링 청수는 양쯔 탁류로
8·15 전후 I
8·15 전후 II
임시정부의 환국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연보

저자 소개

저자 : 장준하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 선천 신성중학교, 일본신학교, 한국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징집되어 중국 쉬저우에 배치되었다가 그해 7월에 탈출, 중국 대륙 6천 리 장정을 거쳐 1945년 1월 충칭 소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국내 진입작전을 위한 OSS(미국 전략첩보대) 특수훈련을 받았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을 이루지 못...

책 속으로

나는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이 수기 속에서 중언부언했다. 왜냐하면 내가 광막한 중원 대륙 수수밭 속에 누워 침 없이 마른입으로 몇 번이나 되씹었고 또 눈 덩어리를 베개로 하고 동사凍死의 기로에서 밤을 지새우며 한없이 울부짖었던 이 말이 곧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못난 조상에 대한 한스러움과 다시는 후손에게 욕된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단호한 결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 p.6

머큐로크롬을 병째로 뒤집어씌워놓고 지혈을 시키기 위해 꽁꽁 동여매었을 뿐, 그러나 나는 일군 육군 중위와의 대결에서 판정승을 얻었다는 자부심으로 그의 앞을 물러서려고 하였다.
“……야, 내 외과의사 생활 10여 년에, 너 같은 지독한 놈은 처음 본다. 장하긴 장하다. 독종이구나.” 나의 아픔은 이 한마디로 보람을 찾은 듯이 잠시 내게서 잊혔다. 그러나 ‘너 같은 일본 놈에게 아프다는 소리는 차마 하기 싫어서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올 뻔했다. 그런데 내가 채 의무실을 나오기 전에 한 후보생이 들어왔다. S라는 초년병 동료다. (중략) S초년병은 엉덩이에 종기가 나 있었다. 의무관이 그곳을 건드리자 “아이구……”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의무관은 군홧발로 이 후보생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쾅, 쓰러진 S초년병에게 던지는 한마디가 찌르릉 귀를 먹게 하였다. “이놈! 저놈은 그 아픈 생손 다섯 군데를 그냥 쨌어도 소리 한번 안 질렀어…….” --- p.18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위해 나는 가련다. 나의 인생의 과정은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의 푯말을 꽂고 이제부터 나를 안내할 것이다.
--- p.74

『등불』은 진정 우리의 뜻대로, 등불로써 불을 밝히고, 앞장서 길을 밝히며, 꺼지지 않는 등으로 이 민족 누구에게나 손에 손에 들게 만들어주고 싶은 그때의 뜻을 스스로 짓밟고 싶지 않다. 그것은 가마니를 깔고 누워 받은 최초의 사명감이었다. --- p.133

중국 중앙군 군관후보생들의 훈련 광경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훈련이 아닐 수 없었다. 집총훈련의 그 늠름한 모습이 부러웠고 사격훈련은 우리의 선망이었다. 병기분해 훈련은 같은 연병장 안에서 우리가 갖는 열등의식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중략)
‘우리는 총 없는 군대다. 우리는 조국 없는 군대다. 아니 조국은 있었으나, 잠시 빼앗겼을 뿐.’ 물론 이 임천 군관학교 당국으로서는 동등한 대우를 해준다고 말하고 있으나 확실히 그것은 나라 없는 설움을 받는 대우였다. 총 없는 군대. 구태여 이렇게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날개 없는 새처럼 무기 없는 군대는 의붓자식 대접 속에 있었다. --- p.146

충칭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기대, 이것은 적어도 우리의 정열에 불을 붙여줄 수 있는 일거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는 벌써 충칭에는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많은 파쟁과 알력과 갈등이 얽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모여든 한국인들이 남의 땅 충칭에까지 가서 조국 광복에의 의욕을 그렇게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분개하였다. 우리는 그 와중에 뛰어들고 파고들고 싶었다. (중략) 나이 탓으로 돌린다면 변명이 되겠는가. 너무나 맹목적이었던 스물네다섯의 의기였던가. 그것은 아름다운 자부였다. --- p.167

김준엽 동지와 나, 이렇게 단 둘이서 서로 몸을 의지하고 걸어가는데 무엇인가 난데없이 우리 머리 위로 휙 날아가는 것을 의식했다. “…….” 너무나도 큰 놀라움이 나의 가슴 안에서 무엇이라고 부르짖었다. 우리가 머리 위로 무엇인가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날쌘 호랑이가 언덕에서 뛰어, 바로 우리보다 네댓 발자국 앞에 소리도 없이 사뿐 내려앉았다.
‘아, 호랑이다앗!’ 이 소리는 끝내 입 밖을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호랑이는 우리를 본 체도 아니하고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나갔다. 오싹 우리는 얼어붙어 몸을 숨기고 어쩌고 할 수가 없었다. 마치 홀린다는 말대로, 우리가 호랑이에게 홀린 듯이 꼼짝도 못 하고 호랑이가 지나간 자국을 유심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만약 우리가 네댓 발자국만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 호랑이 발톱 밑에 덮쳐지고 말았을 것이다. --- p.220

왜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분이 바로 이분일까. 엷은 미소를 담은 선생은 검은 안경 속에 정중한 성격을 풍기는 아주 인자한 인상이었다. (중략) 이분을 찾아 6천 리. 7개월의 행군의 귀항처럼 우리는 애국가를 듣고 싶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그 얼마나 갈망했는가, 지금의 이 순간을. 걸어온 중국의 벌판과 산길과 눈길 속에 뿌린 우리의 땀과 한숨과 갈망이 들꽃으로 가득히 대륙에 피어나고, 그 들꽃에서 일제히 합창의 환영곡이 들려오는 듯한 환상의 곡 속에서 김구 선생을 맞았다. (중략) 몽매에 잊지 못하는 조국의 아들들이 그를 찾아왔다. 6천 리를 걸어서 찾아온 이들 50여 명의 청년들 앞에 김구 선생은 새삼스럽게 헛되지 아니한 그의 생애를 돌이키며 만감의 회포를 감당하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찌 아니랴! --- p.244~245

이곳, 이 순간에 나는 내 생애에 기록될 만한 일을 저질렀다. 그건 처음으로 술잔을 입에 댄 것이었다. 그까짓 것을 가지고 그러느냐고 하겠지만, 내 자란 집안 환경이 청교도적 기독교 가정이었고 엄격히 술, 담배를 입에 대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나와 친근한 사이면 아예 술, 담배는 권하려 들지도 않으려 했다.
“신철 동지[장준하], ……난 뜻이 있어서 이 잔을 권하오. 일군 대좌가 따라주는 이 한 잔의 맥주……, 자, 이 잔만은 들어보구려. 중원 6천 리를 횡단하며 이를 갈던 그 원한을 생각해서……, 얼마쯤은 풀어질 것이요. 정말 그 고생을 생각해서 딱 한 잔만.”
신일 동지[김준엽]가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부자와 대좌가 따라 놓은 잔을 움켜잡았다. 눈을 감았다. 그 맥주 한 잔을 쓰디쓴 승리의 잔으로 생각하고. --- p.321

나는 지금 이 내 땅에 와 있는 거야. 속으로 이렇게 타일렀건만, 황토 흙 몇천 리를 걸어 걸어 지나던 대륙의 행렬 속에 끼인 나로 자꾸 착각하고 있었다. 정말 조국은 우리를, 나를 기다려주었구나. 나의 고향도 지금껏 날 기다려주고 있을 거야······. 나는 목젖으로 넘어가는 나의 한 부분을 삼켜 가슴에 간직하며 우리를 반기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진정 우리를 이 산천처럼 반겨준 것이 있었던가? 뒤돌아다보는 차창으로 멀어지는 그 산기슭에서 한 처녀가 물동이를 이고 나왔고 강아지 한 마리가 앞질러 뛰고 있었다. 나는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더 바라볼 수가 없었다. --- p.397

임정을 위요하고 있는 밖의 정치 세력도 물론 집요하게 달겨들었다. 임정과 연결을 가지려는 이 악착스러운 움직임 속에 빠져 국무위원들은 제멋대로 외적인 파벌과 결탁을 하기에 바쁜 것이 현저한 그들의 활동이었다. 물론 오랫동안의 망명생활 끝에 돌아온 요인들이니, 개별 접촉이 없을 수 없으리오마는, 그것이 임정 요인으로서이기 때문에 문제점이 따랐다. 언제나 명목은 ‘환영의 모임’이었고 그 모임에의 초청 대상으로 해서 임정의 권위와 의지는 부스러지기 시작하였다.
환영만 받다가 버림받을 처지임이 적어도 내 안목으로는 명백한 것이었다. “우리의 의지가 환영으로 대접받기 위한 것이었던가?” 비로소 나의 체내에 움트고 있던 회의의 초점이 드러났다.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의사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 p.422

그러나 분명히 역사는 결코 미사여구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호화스러운 향연으로 장식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그것은 이 자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짧은 겨울해가 덕수궁 담 뒤로 넘어가고, 석양만이 석조전의 석주에 비껴 긴 그림자가 누운 5시 반까지, 흥겨운 연회석엔 술잔이 자꾸 돌았다. 임정이 이렇게 환영과 초대에 분주히 쫓아다닐 때, 이미 임정의 이성은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의 망명길처럼 눈이 내려 쌓이고 바람이 불었으나 ‘충칭으로의 길’을 국내에서는 아무도 가려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 p.430

출판사 리뷰

▶ 광복군 3대 회고록 중 으뜸으로 꼽히는 『돌베개』,
첫 출간 이후 44년 만에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지난 100년간 한국에서 출간된 최고의 문학서”라고 상찬한 장준하 선생의 항일수기 『돌베개』는 이범석 장군의 『우등불』,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장정』과 더불어 광복군이 직접 쓴 회고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오랫동안 널리 읽혀왔다. 1971년 4월 30일에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를 펴내던 사상사에서 처음 출간된 이래 여러 번 간행되었다. 1976년 일본에서 『석침?한민족에의 유서』石枕?韓民族への遺書라는 제목으로 사이마루출판회サイマル出版會에서 상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고(안우식安宇植 번역), 1978년에는 화다출판사에서, 1985년에는 ‘장준하선생10주기추모문집간행위원회’에서 ‘장준하문집’으로 1권 『민족주의자의 길』, 2권 『돌베개』, 3권 『사상계지수난사』가 간행되었다. 1987년에는 청한문화사에서 『돌베개: 청년시대의 항일투쟁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92년부터는 세계사에서 간행되었으며 2006년에는 요약본 『쉽게 읽는 돌베개』가, 2007년에는 양장본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979년에 장준하 선생의 책에서 출판사명을 따와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돌베개’ 출판사에서 드디어 선생의 서거 40주기에 즈음하여 『돌베개』를 출간하게 됨에 따라 출판사에서는 저자의 육필원고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1973년에 세로쓰기 형태로 나온 제3판을 저본으로 삼고 가장 최근에 나온 세계사 간행 개정판 9쇄(2014년 3월)를 참조하여 원문을 일일이 대조해가며 수많은 오류와 누락 부분을 바로잡은 전면 개정판을 펴내게 되었다.

▶ 숱한 오류의 교정과 장정 지도 ? 컬러도판 ? 주요 인물소개 등 풍부한 부속자료 보강

전면 개정판 『돌베개』는 이전 판본들과 몇 가지 면에서 크게 다르다. 우선 초판과 세계사판을 막론하고 저자의 착오나 당시 식자植字의 오류 등으로 짐작되는 다수의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그중 상당 부분이 한자의 오류인데 대표적으로 ‘중앙저비은행권’을 들 수 있다. ‘중앙저비은행’中央儲備銀行은 일본이 국민당의 화폐에 대응한 새로운 화폐가 필요해서 만든 은행인데 원문에는 ‘중국주비은행권’中國壽備銀行券[중국수비은행권]으로, 세계사 판본에는 ‘중국수비은행권’中國籌備銀行券[중국주비은행권]으로 각각 한글과 한자가 다르게 나와 있으나 ‘儲’[저]의 중국어 발음이 [ch?]인 데서 생긴 착오임을 중국 측 전문가를 통해 확인, 수정했다.
또한 원문에는 김준엽의 일군 탈출 시기가 장준하 일행보다 ‘5개월’ 앞섰다고 되어 있으나 김준엽은 3월 29일, 장준하는 7월 7일에 탈출했으므로 김준엽의 『장정』을 비롯한 대개의 관련 자료에 따라 ‘3개월’로 수정했다.
또 다른 대표적인 한자 오류로 ‘감협령변구’甘陜寧邊區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한자 ‘섬’陝과 ‘협’陜이 매우 비슷하게 생겨서 흔히 일어나는 착오다(보통 ‘섬감령변구’로 불리는 ‘감섬령변구’는 산시성 북부와 간쑤성, 닝샤성 동부지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 조항 중 각각 ‘광유’廣有와 ‘철교’撤橋로 잘못 기재된 한자를 ‘응유’應有(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뜻)와 ‘적교’敵僑(국내 잔존 일본인)로 바로잡았으며, 그 밖에도 용해선龍海線→롱해선?海線, 청감靑鑑→청람淸覽, 롱윈籠雲→龍雲, 나일환→나월환, 조경환→조경한, 한성수韓性洙→韓聖洙, 고이소小機→小磯 등의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
나아가 원문에는 실려 있으나 세계사 판본에는 누락되었거나 맥락과 다른 단어가 쓰인 순우리말을 원문대로 살리되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단어에는 편집자 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대표적으로 ‘스스럼히’(320쪽, 325쪽 참조)와 ‘거무푸레하다’(346쪽 참조) 같은 단어를 들 수 있다(그 외의 수정사항은 8쪽에 실린 상세한 일러두기를 참조).
그 밖에 장준하기념사업회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6천 리 장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세 지도와 이전 판본들에는 들어 있지 않던 다양한 컬러도판들, 주요 등장인물 소개 등을 보강한 새 개정판 『돌베개』는 향후 명실상부한 정본으로 자리 잡으리라 기대한다.

▶ ‘돌베개’와 함께한 6천 리 대장정 그리고 임시정부

- ‘돌베개’의 유래
‘돌베개’는 창세기 28장 10~15절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장준하가 광복군이 되기 위해 일군을 탈출할 경우 아내에게 남기기로 한 암호였다. 장준하는 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 시작하는 편지 말미에 “앞으로 베어야 할 야곱의 ‘돌베개’는 나를 더욱 유쾌하게 해줄 것이다”라는 다짐을 써서 보낸 후 일군에서 탈출한다. 탈출병을 거의 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쓰카다 부대에서 탈출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 일군 탈출
마침 ‘지나사변’(일본인들이 ‘중일전쟁’을 부르는 표현) 7주년 기념 회식이 떠들썩하게 치러져 온 부대원이 만취된 상태에서 점호조차도 간단히 끝난 상황. 이를 놓치지 않고 목욕을 가는 것처럼 행장을 꾸며 부대 철조망을 넘어 탈출에 성공한 장준하 일행은 이후 나침반과 성냥, 약간의 쌀에 의지해 무조건 동북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앞을 가로막는 운하, 죽을 것 같은 갈증과 배고픔 등을 이겨내며 150~160여 리는 벗어났으려니 했을 때 만난 중국 농민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기력은 회복할 수 있었지만 부대에서 고작 15리밖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절망에 휩싸인다.
그러나 일군에서 벌써 중국 농민들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다시 죽을힘을 다해 달리지만 또다시 나타난 강물 앞에서 진퇴유곡에 빠진다. 천우신조로 작은 배 한 척을 발견하여 가까스로 강을 건넜으나 김영록 동지는 낙오되고 만다. 모든 걸 체념한 상태에서 중국 중앙군 소속의 유격대에 발견되면서 이들의 탈출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한다. 그 유격대 사령부에서 쓰카다 부대 제1호 탈출병인 김준엽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다행히 김영록 동지 또한 뒤늦게 중국군에 구출되어 일행은 모두 다섯으로 늘어난다.
이러는 와중에 자못 감탄스러운 일화도 있었다. 바로 중국 중앙군 23종대縱帶 사령관 한즈룽韓治隆과 관련된 실화다.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 유격대에 구출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일군 사령관과 한즈룽 사령관 사이에 2인 담판이 벌어졌는데, 이때 일군 사령관이 한국인 탈출병 5인과 중국인 30명을 맞교환하자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당시 통역은 김준엽이 맡았는데 그에 따르면 한 사령관이 이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 그러고는 일군의 허를 찌르듯 야음을 틈타 부대 이동을 단행한 것이다. 이후 장준하는 한 사령관을 이국의 은인으로 여기며 사표師表로 삼기도 했다.

-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의 3개월
장준하, 김준엽,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 이들 다섯 명은 이후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 6천 리의 대장정에 오른다. 변변한 신발이나 복장도 갖추지 못한 채 오로지 걸어야 산다는 것과 기필코 임시정부에 도착해서 우리의 지도자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열의 하나만으로 이겨낸 대장정.
장제스 휘하 중앙군의 도움을 받아 린촨에 있는 한국광복군훈련반에 합류하게 된 일행은 이미 집결해 있던 한국 청년 80여 명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고 3개월간 광복군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중국 중앙군관학교 부설인 만큼 중국 군인들의 제대로 된 훈련과는 달리 목총 한 자루도 없는 형편이어서 일행은 큰 자괴감에 시달린다.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는 지루함과 괴로움을 떨쳐버리려 하루 두 가지씩의 강좌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여러 강좌가 대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자 그 소중한 기록을 책으로 엮어내기로 하고 그 제호를 ‘등불’로 정한다. 이때부터 장준하와 잡지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취사 책임까지 떠맡게 된 장준하는 ‘크리스천’으로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중국 농민들의 고구마밭에서 고구마를 캐오는 ‘야간 침투작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술, 담배조차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어린 시절에는 길에 떨어진 돈조차도 줍지 못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고뇌를 안고 배곯는 동지들 앞에서 ‘책임 완수’의 길을 선택하는 장면은 장준하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낸다.

-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 다시 떠난 길
어느덧 한광반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중국군 육군 중위로 임명된 이들 일행은 한광반 김학규 주임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코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나게 된다. 마침 이들에게 인계된 민간인까지 포함하여 도합 53명이 1944년 11월 30일 오후 1시에 린촨을 떠나 3개월간의 충칭 행군에 오른다. 오합지졸의 중앙군 행렬을 만나 이들과 함께 일군 관할지역인 평한선을 넘기도 하고, 평균 하루 100리씩을 걸으며 마을의 보장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하고, 멋모르고 토비(마적단) 소굴에 들어갔다가 가까스로 목숨과 양식을 건져 나오기도 하고, 몸에 온통 옴이 올라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는 데다 양말도 없이 맨살에 노끈으로 잡아맨 초혜에 의지해 행군을 해야 하고, 일본 전투기의 공습을 당하기도 하고, 워낙 함산준령이라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한겨울에 서로의 체온과 굳은 의지에만 의존해 넘는 와중에 호랑이를 만나기도 하는 등 이들 앞에 놓인 역경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6천 리 대장정의 거의 모든 고비가 돌베개요, 눈으로 된 베개였던 것이다.

- 드디어 도착한 충칭 임시정부
바둥에서 5천 톤급 군용선박을 타고 8일에 걸쳐 양쯔강을 거슬러 도착한 충칭. 그러나 이들을 처음 맞이한 것은 쇠락하기 이를 데 없는 낡은 건물이었다. 일행은 그 초라함에 실망을 감출 수 없지만 다행히 새 임정 건물은 4개월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간 상태였다. 층암 위에 차례로 지어 올려 겉보기에는 5층짜리 같은 단층 건물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일행은 벅찬 감격에 피 끓는 환희를 느낀다. 1945년 1월 31일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정식 사열을 받은 후 김구 주석과 임정 각료들을 처음 대면한 일행은 드디어 몸 바칠 곳을 찾았다는 뜨거운 감격으로 환영회 자리에서 통곡의 바다를 이룬다. 그러나 그런 감격의 시간도 잠시, 임정 내의 무수한 파벌싸움에 곧 넌더리가 나고 만다. 한 명이라도 더 자파에 흡수해가려는 공작이 난무하는 가운데 끝없이 이어지는 환영회 자리를 일행은 딱 잘라 거절하는 한편, 임정 각료는 물론 충칭 시내 교포들까지 모두 모이는 주회週會에서 장준하는 드디어 ‘폭탄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충칭 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서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씀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들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 이를 악물고 헤매어 온 것은 아닌 것을 말합니다.”

- 이범석 장군과 OSS 훈련
그토록 그리던 임시정부에 왔으나 막상 거기서도 딱히 할 일이 없는 무위와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다 못한 장준하는 곧 임정에 요청하여 투차오土橋라는 작은 부락으로 옮겨가 이전에 내던 잡지를 속간해보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일거리를 찾고 자체적으로 기율을 강화하는 등 광복군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던 중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찾아와 광복군 제2지대장인 이범석 장군과 대면하기에 이른다. 광복군 제2지대가 시안 땅에서 미군과 합작하여 한국 침투작전을 위한 훈련을 계획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눌 수 없는 흥분에 휩싸인다. 마침내 광복군 제2지대로 배속된 장준하 일행은 정보누설을 막기 위해 가명까지 지어가며 조국을 위해 몸 바칠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나날을 보낸다.
1945년 4월 29일, 일찍이 김구 주석이 윤봉길 의사를 사지로 보내던 바로 그날, 임정 청사 앞뜰에 다시 모인 장준하 외 30여 명의 젊은 광복군들은 슬픔 가득한 김구 주석의 작별사를 뒤로하고 시안 두취지구를 향해 출발한다. 이후 미국 전략첩보대를 의미하는 ‘OSS’에 소속되어 특수훈련에 돌입한 일행은 3개월간 각자의 특기를 살려 훈련에 매진하며 조국에 상륙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러던 중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요청을 연합국에 통고해왔다는 뜻밖의 희보가 날아든다. 그러나 이들 일행에겐 실망과 환희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연합국의 한반도 상륙작전이 며칠만 더 앞섰더라면 조국을 위해 장쾌하게 혼을 불살랐으리라는 안타까움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 임시정부의 환국과 김구 주석의 비서로 보낸 나날
1945년 8월 14일, 장준하 일행은 중국 전구 미군사령부 사절단에 편승하여 국내에 진입하는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날 아침 미 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대의 공격을 받은 일로 산둥반도에서 회항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말할 수 없는 실망을 안고 다시 시안으로 되돌아온 지 나흘 후인 18일 새벽, 마침내 일행은 시안을 떠나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는 감격을 맛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간교한 일본군의 제지로 미군 번즈 대령은 휘발유만 급유받고 시안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장준하는 이렇게 해서 해외 독립투사 중 가장 먼저 고국 땅을 밟아본 특별한 경험을 갖게 된다.
1945년 11월 23일, 드디어 김구 주석을 필두로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상하이에서 중형 미군 수송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3천만의 희망이자 혁명투사인 민족의 지도자가 30여 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으나 환영 인파조차 없었으며, 미군정은 김구 일행을 임시정부의 환국이 아닌 ‘개인 자격’의 입국으로 제한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경교장으로 소문을 듣고 몰려든 기자들과 이승만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끝없는 방문으로 김구 주석의 비서였던 장준하는 정작 자신의 가족을 찾아볼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기저기서 끝없이 이어지는 환영회에 장준하는 ‘이런 환영을 받으러 귀국한 것인가’ 하는 깊은 회의에 빠져든다. 게다가 임시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파로 나뉘어 각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국내 상황에 차츰 깊은 우려와 실망을 느끼게 된다.
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허헌의 4당수 회담을 곁에서 지켜보며 각 인물의 발언과 그들에 대한 인물평을 곁들인 부분은 당시 어지럽던 시대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더불어 이들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침착함을 유지하는 모습이라든가 해맑은 어린아이들을 대하고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 온전한 정부를 못 가지고 들어온 회한에 괴로워하는 모습 등 백범 김구의 여러 면모가 잘 드러나 읽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12월 1일 임시정부 제2진의 환국이 이루어진 뒤에도 주지육림 속에서 놀아나는 환영회들이 되풀이되는 와중에 우리 민족의 운명은 이미 강대국 손에 요리되고 있었고, 끝내 임정의 이성 또한 취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
 

추천평

장준하 선생은 참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신 분이었습니다. 이 나라와 이 겨레를 당신 자신보다도, 사랑하는 당신의 가족보다도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이 보신 겨레의 분단은 남북을 갈라놓은 휴전선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갈라놓은 빈부의 격차에서도 그분은 겨레의 분단을 보았습니다. 권리를 빼앗긴 대중과 권리를 빼앗는 소수의 권력자 사이에 있는 불의와 부정의 깊은 수렁에서도 겨레의 깊은 분단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장준하 선생은 민족의 진정한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민중의 권리가 회복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의로운 사회질서가 만들어질 때 민족통일의 지고한 과업은 이룩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

그토록 파란 많고 수난으로 점철된 일생, 오십 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해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 가신 분. 장준하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지성인이었고 불의 앞에 용감히 도전하는 행동인이었습니다. 이런 선생님을 가리켜 한 동료는 “그는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혁명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로 보고 한 말입니다.
- 법정 (스님)

선생님은 우리 사회의 ‘소금’이요, 민중의 등불이시며, 민중 속에 사시다가 떠나신 민중의 위대한 지도자이십니다. 선생님은 전반생을 항일구국투쟁으로, 후반생을 민주화투쟁으로 온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민족의 창의성을 북돋우고 동원하여 국가적인 현실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일체감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역사 창조의 물결과 세계정세 속에 우리가 처해 있는 위치와 나아갈 바를 정확히 판단하고 확고한 신념으로 행동화하여 항상 민중에 의지하고 민족과 자유를 위하여 전진하였기 때문에 민중으로부터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받으셨으며 스스로 정의구현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홍남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