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한국사여행 (2024~) [해설서]/2.조선시대사 (1392~1910)

[웹북] 08월 21일 (1545 을사사화)

동방박사님 2024. 8. 2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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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21일 한국사 주요 사건

1545 을사사화 / 1821 한국최초 천주교신부 김대건 출생  / 1919 안창호 임정기관지 "독립" 창간 / 1976 청량리 하수처리장 준공  / 1980 전국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전두환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 / 1981 경제기획원,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게획발표 / 1985 한국, 국제이동위성기구 가입 / 1986 구 중앙청을 개조한 국립 중앙박물관 개관 / 2003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 개최 / 2003 제22회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대구광역시에서 개막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명종 즉위년) 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 윤임과 소윤(小尹)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배경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씨인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윤임과 윤원형은 같은 종씨(宗氏)이면서 서로 국구(國舅)가 되어 세력을 잡으려고 일찍부터 반목하여 세간(世間)으로부터 윤임은 대윤(大尹), 윤원형은 소윤(小尹)이라 불렸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자 윤임이 득세하여 사림(士林)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이언적(李彦迪유관(柳灌성세창(成世昌) 등을 정부의 대관(臺官)으로 임명하는 등 일시 사림은 그 기세를 회복하였다. 당시 뜻을 얻지 못한 이들은 윤원형의 밑에 모여서 사림과 반목하고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경과

그런데 인종이 겨우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여 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니 형세는 역전하였다. 이번에는 소윤 윤원형이 득세하여 전일(前日)의 윤임 일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있던 윤원형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평소 대윤파와 사감(私感)이 있던 지중추부사 정순명(鄭順明),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 심복들과 더불어 계책을 꾸몄다. 또 한편으로 그의 첩 정난정으로 하여금 문정왕후와 명종을 선동케 하여 형조판서 윤임 및 그 일파인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좌의정 유관(柳灌) 등을 반역 음모죄로 몰아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이어서 계림군(桂林君)도 이 음모에 관련하였다는 무고로 죽이고, 전직 주서(注書) 이덕응(李德應)을 협박, 그 무고로서 수찬(修撰) 이휘(李輝), 부제학 나숙(羅淑), 참봉 나식(羅湜), 정희등(鄭希登)과 박광우(朴光佑), 사간(司諫) 곽순(郭詢), 정랑(正郞) 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楗) 10여 명을 죽였으며, 그 뒤 이덕응도 화를 입었다. 또 명종의 이복형인 봉성군(鳳城君)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봉성군과 계림군은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한편 사화의 여파는 그 후 6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윤임 등을 찬양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죽은 자의 수가 거의 100명에 달하였다.

영향

연산군 이래의 큰 옥사는 이 사화가 마지막이 되었으나, 을사사화로 인해 모후 및 외척이 정권을 전횡하는 길을 열어 놓았으며, 사화에서 일어난 당파의 분파는 후기 당쟁의 한 소인(素因)이 되었다. 또 훈구가 전 정권을 장악하고 사림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축소되었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조선 4대 사화는 현실 정치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극명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인간이 공의公義를 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현실을 사는 우리들은 잘 알 것이다.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자란 사람들이 믿는 각각의 진실들은 대의를 향한 합의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현실에서 갖는 것이 많게 될수록 또 현실에서 원하는 것이 분명해질수록 인간들은 사심을 버린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인간 사회 속에서 폭발한 조선의 4대 사화는 각자의 권력을 확장하고 분명히 하기 위한 싸움의 결과라 보여진다. 그렇지만 또한 권력 싸움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변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정치 현상이라 하겠다.

중종 사후 인종이 즉위하면서 대윤이 정권의 핵심으로 부상하였고, 사림파를 지지하던 인종으로 인해 기묘사화 후 몰락했던 사림들도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정 왕후와 남매인 윤원형, 윤원로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를 벌인다. 그 와중에 즉위 채 1년도 되지 않아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문정 왕후의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오른다. 소윤의 핵심 윤원형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모사를 꾸미고 1545년 대윤 일파 거의 모두를 제거해 버리는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한편 윤임에 의해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윤원형은 이후로도 자신에게 조금의 위협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자는 모조리 없애 버렸으며, 자신의 친형 윤원로를 제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문정 왕후는 명종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해 왕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그 곁에서 윤원형은 20여 년의 세월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바쳤다. 조선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왕과 조정이 아니라 의적 행세를 하는 임꺽정을 지지하고 의지할 정도였다. 문정 왕후의 죽음과 함께 윤원형도 몰락하고 재야의 사림들이 다시 등용되었으나 사림 중심의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유교 정치는 권력 지향적인 붕당의 싹이 되었고, 왜구의 침략도 빈번해져 백성들이 겪는 고단한 삶은 더욱 심해졌다.

목차

작가의 말

조선 시대 4대 사화
외척들이 벌인 권력 쟁탈전의 결과 ㆍ 을사사화의 여파 ㆍ 붕당 정치의 출현

을사사화
천아성天鵝聲은 슬피 울리고 ㆍ 인종을 제거하려는 소윤 일파의 음모 ㆍ 오히려 형제를 파직하는 문정 왕후 ㆍ 인종과 인성 왕후의 마음고생 ㆍ 재위 1년도 안 되어 하직하는 인종 ㆍ 명종의 즉위와 문정 왕후 윤씨의 야욕 ㆍ 대윤과 소윤, 치열한 당파 싸움의 시작 ㆍ 인성 왕후를 통해 신원을 청하는 폐비 신씨 ㆍ 대윤 타도의 계책을 실행하는 인면수심의 윤원형 ㆍ 왕후의 밀지, 바로 법률이 되다 ㆍ 처형당하는 대윤 일파와 계림군 일가의 몰락 ㆍ 을사사화의 여파 ㆍ 형제 윤원로와 윤원형의 대치 ㆍ 윤춘년의 상소문과 숙청당하는 윤원로 ㆍ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소윤 ㆍ 꼬리를 무는 자중지란自中之亂 ㆍ 을사사화의 비극, 이약빙과 두 아들 이홍남 이홍윤 가계도 ㆍ 권좌의 전면에 나서는 윤원형 ㆍ 보우의 출현과 양종兩宗을 부활하는 문정 왕후 ㆍ 난세에 상소를 올리는 상진 ㆍ 친정을 시작하는 명종 ㆍ 왜구의 침입과 기강이 무너진 조선 병사들 ㆍ 올바른 인재를 찾고 국방에 힘을 쏟는 명종 ㆍ 비운의 여인 폐비 신씨의 죽음 ㆍ 세력을 키워 가는 청송 심씨 일파 ㆍ 밝은 횃불을 들고 나선 임꺽정 ㆍ 불교를 탄압하는 또 다른 이유 ㆍ 윤원형과 신진 세력의 대결 ㆍ 임꺽정 토벌에 어려움을 겪는 조정 ㆍ 새로운 왕세자빈을 맞이하는 순회 세자 ㆍ 임꺽정의 최후 ㆍ 선릉의 완성과 기로소에 들어가는 상진 ㆍ 무너지는 외척 이양의 아성 ㆍ 방탕을 일삼던 순회 세자의 요절 ㆍ 문정 왕후의 죽음과 유배를 떠나는 보우 ㆍ 탄핵은 간신 윤원형을 피해 가지 않았다 ㆍ 신의 심판을 받는 윤원형과 정난정의 종말 ㆍ 풍진으로 흉흉해지는 세상 ㆍ 인자하던 명종의 표변 ㆍ 궁중으로 입시하는 중종의 손자 하성군 ㆍ 익선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옵니다 ㆍ 결국 명종의 부름에 응하는 이황 ㆍ 후사는 어찌하오리까 ㆍ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의 등극

을사사화의 인물
인간의 근본을 버리고 역사의 중심에 선 윤원형 ㆍ 파평 윤씨 윤임ㆍ윤원형ㆍ문정 왕후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 ㆍ 윤원형과 음독자살한 정난정 ㆍ 초계 정씨 관동파 정윤겸ㆍ정난정 가계도 ㆍ 누나와 동생의 심부름만 하다 떠난 윤원로 ㆍ 정유삼흉의 중심인물 김안로 ㆍ 대윤의 거두 윤임 ㆍ 조광조 일파를 적극적으로 공격한 유관 ㆍ 억울하게 죄를 입은 선비들을 서용한 윤인경 ㆍ 일생을 성리학에 전념한 이언적 ㆍ 기묘ㆍ을사 사화를 혹독하게 치룬 충신 유인숙 ㆍ 진주 유씨 혈맥 ㆍ 퇴계 이황의 형 이해의 죄 없는 죽음 ㆍ 진성(진보) 이씨 이해ㆍ이황을 중심으로 한 가계도 ㆍ 윤원형과 문정 왕후를 비호한 상진 ㆍ 상대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리다 ㆍ 상진의 후손이 창달하지 못한 이유 ㆍ 목천 상씨 상진 가계도 ㆍ 대윤 제거의 밀지를 받은 허자 ㆍ 당파 싸움을 지적한 구수담 ㆍ 이기의 모함으로 파직된 성세창 ㆍ 국방 강화에 힘쓰다 임지에서 죽은 이윤경 ㆍ 임금의 신임에 올바른 보답을 한 이준경 ㆍ 을사사화에 참여한 것을 후회한 민제인 ㆍ 윤원형의 대윤 배척을 반대한 권벌 ㆍ 안동 권씨 혈맥 ㆍ 간신들과 대립하다 혹독한 고문을 받은 정희등 ㆍ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한 윤근수 ㆍ 문약에 저항한 문인 임형수 ㆍ 평택 임씨 혈맥 ㆍ 간신 윤원형의 사위 자리를 뿌리친 박계현 ㆍ 밀양 박씨 박계현 가계도 ㆍ 권세를 누림을 자책하며 자결한 박승종 ㆍ 윤원형의 악행을 낱낱이 감긴 사관 박근원 ㆍ 난세에 곧은길을 걸은 백인걸 ㆍ 의적을 자청하며 전국을 뒤흔든 임꺽정 ㆍ 윤원형의 최측근으로 간신의 선두에 선 이기 ㆍ 능안 마을에 있는 덕수 이씨 세장지지世葬之地 ㆍ 이기의 형 청학도인 이행 ㆍ 숙부 이기를 비판한 충신 이원록 ㆍ 덕수德水 이씨 이기 가계도 ㆍ 권력을 두려워하고 흠모한 간흉 정순붕 ㆍ 유관의 원수를 갚은 노비 갑이 ㆍ 짐승과 대화하던 기인 정순붕의 아들 정렴 ㆍ 숙부 정백붕에게 입양된 둘째 아들 정현 ㆍ 의술에 뛰어났던 셋째 아들 정작 ㆍ 온양 정씨 혈맥 ㆍ 온양 정씨 정순붕 가계도 ㆍ 관직을 삭탈당한 을사사화의 공신 임백령 ㆍ 임백령과 윤임의 악연 ㆍ 동생 임백령과 다른 길을 걸은 임억령 ㆍ 을사사화의 공으로 보익 이등공신에 오른 임구령 ㆍ 명종 대에 위사공신에 오른 홍언필 ㆍ 간신 이기의 충견 이무강 ㆍ 부조리한 시대를 호기롭게 살아낸 면앙정 송순 ㆍ 명종이 촛불을 켜고 귀가를 도운 박순 ㆍ 시세를 좇아 지조를 버리고 살아남은 이감 ㆍ 김안로의 잘못을 지적해 좌천당한 권철 ㆍ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친 소윤 김광준 ㆍ 현량과 출신으로 홀로 조정에 남은 김명윤 ㆍ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 ㆍ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좌천된 송인수 ㆍ 이조판서로 친족을 대거 등용한 최보한 ㆍ 문정 왕후 교지의 잘못됨을 지적한 임보신 ㆍ 대윤 일파로 쓆직당한 한숙 ㆍ 김안로 배척에 힘쓴 홍춘년 ㆍ 윤원형 비호에 앞장선 백인영 ㆍ 공물의 폐단을 개선하고자 노력한 신영 ㆍ 음험한 성품으로 모의에 능하였던 박한종 ㆍ 억울하게 죽은 인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김인후 ㆍ 글씨에 일가를 이룬 남응운 ㆍ 태종의 후손으로 중종의 총애를 받은 이영현 ㆍ 간신배의 횡포를 피해 낙향한 유사 ㆍ 어전에서 외척의 전횡을 직간한 유종선 ㆍ 윤원형을 보좌하여 좌의정에 오른 윤개 ㆍ 임꺽정을 물리치고자 했으나 물러나야 했던 유지선 ㆍ 손녀가 순회 세자의 비가 된 윤사익 ㆍ 혼란기를 맞아 지혜롭게 살다간 임열 ㆍ 간흉 이기의 매제 조광원 ㆍ 선비가 학문에 힘쓸 것을 상소한 이담 ㆍ 을사사화로 20년 넘게 귀양살이를 한 이진 ㆍ 강직하여 불의에 승복하지 않은 이준민 ㆍ 청렴한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 이탁 ㆍ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며 문명을 떨친 정사룡 ㆍ 계림군 역모 사건에 걸려든 윤여해 ㆍ 나라의 기강을 헤치고 청백리에 오른 윤춘년 ㆍ 동생들을 단속하지 못한 윤원필 ㆍ 아버지 윤원로의 원수를 갚고자 한 윤백원 ㆍ 중종의 장자로 사약을 받은 복성군 ㆍ 공신 홍경주의 외손자로 사사된 중종의 아들 봉성군 ㆍ 거열형을 당한 왕족 계림군 ㆍ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ㆍ 왕의 일족임을 탐하지 않은 한경록과 의혜 공주 ㆍ 인종의 정비와 네 후궁 ㆍ 명종의 정비와 두 후궁

훈구파와 사림파, 정몽주에서 윤원형까지
현실적 능력이 부족한 사림파와 권력을 농단하는 훈구파 ㆍ 사회적 변화가 사림파 등장에 끼친 영향 ㆍ 정치를 개혁하고자 한 성종의 노력과 한계 ㆍ 폭군 연산의 집권과 무오사화 ㆍ 갑자사화로 극에 달하는 연산군의 패악 ㆍ 중종반정으로 인한 연산군의 폐위 ㆍ 조광조의 신속한 개혁과 추락 ㆍ 당시 흉흉했던 조선을 둘러싼 상황 ㆍ 외척 권력투쟁의 끝 을사사화

저자 소개

저자 : 한국인물사연구원
한국인물사연구원은 원장 이은식 박사를 중심으로 한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행적과 사건을 통해 진실된 역사를 반추하고, 잊혀지고 왜곡된 과거를 밝혀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문을 열었다. 현재 『이야기 고려왕조실록』 상하권과 『읽기 쉬운 고려왕 이야기』, 『신라 천년사』를 출간하였으며 앞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알려 주는 지침서가 될 다양한 역사서들을 지속적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원장 이은식 박사는 ...

책 속으로

사화가 발생한 데 있어 학통과 정치적 이념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면, 당쟁은 순전히 정권을 잡기 위한 투쟁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당파성이 강하였다. 또 사화의 영향으로 사림들이 고향에 은둔해 학문 연구에 전념하면서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온 반면, 은둔한 사림들에 의해 생긴 서원이 학문뿐만 아니라 정치에 관한 논의를 하는 장소가 되면서 후세 당론의 진원지로서 붕당 세력의 온상이 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발달과 성격은 조선 왕조의 정치 문화적 특성과 정치 투쟁의 새로운 양상을 가져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붕당 정치의 출현 중에서

한편에서는 윤원형의 첩 정난정이 궁중을 드나들면서 문정 왕후와의 연락을 맡았다. 윤원형 등이 대윤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어 궁중 출입이 금해진 뒤에, 윤원형은 정난정을 통해 문정 왕후와 연통하기 시작했다. 윤원형이 자주 드나들면 대윤 일파가 시끄럽게 들고 일어날 것이므로 윤원형은 정난정을 시켜 궐내 사정을 속속 알아 오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소윤의 거두 윤원형이 대윤의 윤임 일파를 제거할 준비를 갖추는 데에는 불과 한 달 남짓에 불과했다. 1545년(명종 즉위) 7월에 윤원로가 해남에 부처된 후 곧 이은 8월에 그 아우 윤원형은 칼을 뽑았다.---대윤 타도의 계책을 실행하는 인면수심의 윤원형 중에서

원체 사건이 애매했으므로 대윤을 실각시키는 정도로 온건히 마무리 지으려던 소윤들은 백인걸의 상소에 크게 정신을 차렸다. 잘못하다간 오히려 자신들이 모조리 당하게 될 터였다. 윤원형의 사주를 받은 정순붕이 맹렬히 윤임을 공격하였다.
“윤임은 지난날 삼흉 김안로, 허항, 채무택과 손잡고 국모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일이 잘 안되자 다시 중종 대왕이 동궁을 폐하고 경원 대군을 세자로 세우려 하신다고 거짓말을 퍼뜨려 조정을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행왕이 승하하여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권신들과 결합하고 불궤不軌를 꿈꾸어 노리는 자이옵니다. 극형에 처하십시오!”
정순붕은 대사헌을 쟁쟁히 지낸 사람이므로 탄핵하고 언론을 움직이는 데에는 빠삭했다.---왕후의 밀지, 바로 법률이 되다 중에서

윤춘년은 윤원형의 속을 짐작하고 말하였다.
“타합이 되지 않으면 큰일이지요. 자고로 두 호랑이가 오래 싸우게 되면 양편 다 지쳐서 쓰러지는 법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한편이라도 살아남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자네 그 좋은 글재주로 상소나 한 장 해보게.”
윤원형은 윤원로가 문정 왕후를 배반하려는 낌새까지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윤원형이 이렇게 언질을 하고 돌아가자 윤춘년은 가만히 그 두 형제를 저울질해 보았다. 아무래도 윤원로 편이 약했다.---형제 윤원로와 윤원형의 대치 중에서

이때로부터 3년 전인 1548년(명종 3) 9월 경복궁의 내전으로 한 신승神僧이 안내되어 들어왔다. 법명을 보우라고 하는 나이 서른네 살의 젊은 도승이었다.
문정 왕후 윤씨의 뜻을 받들어 이 도승을 천거한 사람은 강원도 관찰사 정만종이었다. 보우는 호를 허응당虛應堂 또는 나암懶庵이라 하고, 열여섯 살에 금강산의 마하연암에 입산하여 참선과 경학 연구에 전념하다가 7년 만에 하산하여 불도를 폈다. 그러나 이때는 불교를 크게 배척하던 때이므로 2년 만에 관헌들에 의해 사찰이 불타고 주지승들이 잡혀 투옥되므로 그는 다시 금강산으로 입산해야 했다. 그는 그 뒤 강원도 양양 신흥사의 승려로 있으면서 젊은 나이로 학문과 교리가 뛰어나 이름 높은 도승이 되었다.---보우의 출현과 양종兩宗을 부활하는 문정 왕후 중에서

정난정에게 갈 평안 감사의 뇌물을 몽땅 털어 버린 임꺽정 일당은 유유히 구월산의 저희 본거지로 들어갔다. 임꺽정은 의적임을 자처하여 빼앗은 물건을 불쌍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니 그들에게 협조하는 백성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이렇듯 임꺽정 무리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자, 경상도 예천의 도적떼들은 저희가 나라에서조차 손대지 못하는 임꺽정의 패거리라고 말하며 다녔다. 이에 조정에서는 군사 전략이 뛰어난 합천 군수 이윤탕과 예천 군수의 자리를 바꾸어 임명하고, 도적을 잡도록 하였다. 그러나 예천의 품관들은 임꺽정이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감히 손도 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밝은 횃불을 들고 나선 임꺽정 중에서

세월이 흘러 잔인한 운명의 장난은 임백령과 옥매향을 적이 되어 만나도록 만들었다. 을사사화에 윤임이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히자, 윤임의 첩 옥매향도 모략에 대해 분명히 알았을 것이라는 이유로 붙잡힌 것이었다. 이때 임백령은 죄를 문초하는 추관의 신분이 되어 있었다. 윤임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었지 자신이 ?랑하던 여인까지 고초를 겪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나,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을사삼간의 원흉으로서 임백령은 후세에 두고두고 지탄을 면치 못하였지만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로서는 순정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임백령과 윤임의 악연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인종의 외척 대윤과 명종의 외척 소윤의 권력투쟁
사림파의 정치적 기반 축소와 붕당朋黨의 형성


사욕을 채우는 장으로 전락한 조선 정계

조선 중기, 왕비의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들은 조정을 비롯한 사회 전반적으로 절대적인 위세를 누렸다. 정치政治와 상관없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대립하던 두 정치 세력의 대표는 모두 외척 출신이었으며,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속한 대윤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속한 소윤이 두 축이었다.
중종 사후 인종이 즉위하면서 대윤이 정권의 핵심으로 부상하였고, 사림파를 지지하던 인종으로 인해 기묘사화 후 몰락했던 사림들도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정 왕후와 남매인 윤원형, 윤원로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를 벌인다. 그 와중에 즉위 채 1년도 되지 않아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문정 왕후의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오른다.

소윤의 핵심 윤원형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모사를 꾸미고 1545년 대윤 일파 거의 모두를 제거해 버리는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한편 윤임에 의해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윤원형은 이후로도 자신에게 조금의 위협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자는 모조리 없애 버렸으며, 자신의 친형 윤원로를 제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문정 왕후는 명종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해 왕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그 곁에서 윤원형은 20여 년의 세월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바쳤다. 조선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왕과 조정이 아니라 의적 행세를 하는 임꺽정을 지지하고 의지할 정도였다. 문정 왕후의 죽음과 함께 윤원형도 몰락하고 재야의 사림들이 다시 등용되었으나 사림 중심의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유교 정치는 권력 지향적인 붕당의 싹이 되었고, 왜구의 침략도 빈번해져 백성들이 겪는 고단한 삶은 더욱 심해졌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이어지는 조선 4대 사화를 보면 조선의 현실 정치가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알 수 있으며, 그에 따른 백성들의 생활상이 아프게 전해진다. 조선의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체계를 공고히 유지하고자 하던 조정 대신들은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었고, 체제를 위해 그들이 내린 선택은 인간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관료 자신들의 기반이 걸린 일이 되면서 점차 공의公義를 위한 정치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인격이 결여된 연산군이 왕으로 오르면서 그런 왕을 이용해 자신들의 안락을 추구하려는 간신들로 인해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법이 무의미해져가는 세상을 바로 세우고자 중종반정이 일어났으나 공신들은 왕의 권력을 넘어서는 지위를 갖고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신들이 죽고, 공정하고 풍족한 세상을 만들어 보려던 중종의 꿈은 조광조와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듯 싶었으나 그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기묘사화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을사사화는 연산군 대의 사화와 마찬가지로 포장된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너무도 보잘 것 없을 정도였다. 반복되는 사화는 죄 없는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생명을 잃는 것은 물론, 연좌제로 인해 일족까지 몰락해야 했다.

사욕을 추구하던 권력자들로 인해 발생한 조선의 4대 사화는 각자의 권력을 확장하고 분명히 하기 위한 싸움의 결과라 보여진다. 그렇지만 또한 권력 싸움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변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정치 현상이기도 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838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