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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08월 06일 (1298 정도전 피살)

동방박사님 2024. 8. 2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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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8 정도전 피살 / 1597 백두산 화산폭팔 / 1886 육영공원 개원 / 1926년 소설가 나도향 사망 / 1948 노동운동가 전태일 출생 / 1948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체경 /1953 비상계엄령 전면 해제 / 1955 IMF와 IBRD가입 .2005 제1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평양) / 2009 남북적십자회담 재개

정도전

정도전 / 鄭道傳

조선의 판삼사사 / 임기 1393926~ 1398826일 / 군주 조선 태조 이단 / 섭정 문하정승 조준() / 고려의 전교시주부 / 임기 1363511~ 1364811일 / 군주 고려 공민왕 왕기 / 섭정 고려 덕흥군 왕혜()

이름

별명 삼봉(), 종지(), 문헌(시호), 봉화백(작위), 해동장량(별칭)

신상정보

출생일 1342106일 / 출생지 고려 양광도 단양(대한민국 충청북도 단양군) / 사망일 1398106(음력 826) (향년 56) / 사망지 조선 한성부 의성군 남은 사가에서 암살됨 학력 1360년 진사시 합격 /1362년 문과 급제 / 경력 문관, 유학자, 사상가, 정치인 / 정당 무소속 / 부모 정운경(), 영주 우씨 부인() / 형제자매 정도존(아우) / 정도복(아우) / 배우자 경숙택주 경주 최씨(최습의 딸) / 자녀 슬하 3남 정진(장남) 정영(차남) 정유(삼남) / 친인척 정균(할아버지) / 우연(외조부) / 황유정(매제) / 최습(장인) / 종교 유교(성리학) / 유교(儒敎)

정도전(鄭道傳, 1342년 10월 6일 ~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이다. 본관은 봉화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부패 정치와 이에 기생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성리학(신유학) 이념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인 조선 왕조 성립에 공헌을 하였다.

개요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431번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1347년에서 1348년까지 그 자신의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1년간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직위를 지낸 정운경 선생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 선생의 딸이다.

고려 시대 시절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이성계,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인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일부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1차 요동 정벌(1388년 음력 6)과 제2차 요동 정벌(1392)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이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생애 /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삼봉 정도전은 1342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과 어머니 영주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여 양주 삼각산에서 성장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정운경은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유년기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정도전이 유년을 보낸 곳은 영주와 양주 삼각산이다. 정도전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따라 개경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이곡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정도전은 그 뒤 성균관에서 대사성이자 성균박사 이색을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학과 소년기

포은 정몽주와는 이색의 같은 문하이자 학문적 친구이고 동지였다가 조선 왕조 개국 여부의 의견 차이로 인해 갈라져 그와 정적이 된다.

유년기 그는 가학과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을 통해 기초학문을 배우고, 개경으로 올라와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과 교류하면서 그는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층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포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 설장수(偰長壽), 박상충 및 5년 연하의 이숭인과 하륜, 10년 연하의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대사성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보,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당시 그는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않게 불교는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 백성이 불교에 귀의함으로 인한 조세수입의 궁핍과 부역의 징발 부재로 나타난 국가경영 존립의 위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조차 기약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후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생각이라는 공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게 된다. 이후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불씨잡변》으로 집성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정몽주와 마음이 맞아, 정몽주에게서 유교 경전들과 성리학과 시들을 배우고 영향을 받았으며, 또 이와 반대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을 이야기했고 여기에 대해 정몽주는 깊이 감격, 공조하였다.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조선 개국과 관련하여 정적으로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기

공민왕 때인 1360(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 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1365년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우 씨가 1366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 관직에 복귀하였다.

신돈의 죽음과 성균관 강학

1367년 성균관을 중영하고 그해 목은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1370년 그는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신돈의 무모한 전횡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였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에 정도전은 등용되었다. 1374(공민왕 24)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이때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관직 생활과 권문세족과의 갈등

친원파, 권문세족과의 갈등

이때 그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문란이 정치 경제 사회의 폐해가 극심함으로 불교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다.

1375(우왕 1)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북원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사신영접을 거부했다.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임·경복흥 등이 원나라와의 이중 통교를 주장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해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 등 권신의 노여움을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리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귀양길에 곤장까지 맞을 뻔하였으나 때마침 일어난 석기의 난 때문에 경황이 없어 장형은 당하지 않았다.

석방과 교육 활동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유랑하며 지냈다. 그 뒤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草廬)를 짓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경기도 김포로 옮겨야 했다.

유배와 유랑 살이를 통하여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이때 그는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성계와의 만남(1383)

1383년 가을, 정도전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를 찾아갔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학문과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10]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개혁 정치와 정변 기도

이성계와 역성혁명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蒼茫歲月一株松 / 아득한 세월 속에 한 그루 소나무여

生長靑山幾萬重 / 청산에서 자람은 어찌 만 배나 중하지 않으랴만.

好在他年相見否 / 좋았던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人間俯仰便陳蹤 /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묵은 흔적뿐이구나.

정도전,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측근이 되었다.

1384년 가을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으로 복직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양국간 첨예한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우왕의 승습(承襲)과 공민왕의 시호를 받아 귀국하였다. 1385년 귀국 후 성균관 좨주(祭酒)와 지제교를 거쳐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뒤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과 권력 장악(1388년 음력 6)

1388년 음력 6월 제1차 요동 정벌에 출정한 이성계 등이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

전국적인 토지 몰수와 균등 재분배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이어 우왕의 장인인 최영, 이인임, 염흥방, 조민수 등 구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같은 해, 우왕을 내쫓고, 이색의 주장으로 창왕을 세웠고, 이때 우왕의 측근인 최영 일파를 제거하였다.

정변과 공양왕 추대

윤이 이초 사건

1389년 음력 11월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와 정득후에게 보검을 주며 곽충보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이성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는 구실로 폐위시키고, 폐가입진이라는 명분을 구실로 공양왕을 추대하고 공신이 되었으며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이때 그는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으나 이에 대해 조선의 양식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은 이를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았고 현대 학계에서도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고 있다.[출처 필요] 이성계, 조준 등과 함께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그는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된 뒤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이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90(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에 올랐다. 그 해 1390년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명 태조에게 밀고하는 윤이 이초 사건이 발생하자,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이초의 주장이 무고임을 밝히고 돌아왔다. 곧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우창비왕설

귀양

위화도 회군 및 선죽교 

1391년에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삼군도총제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 이어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도로 몰아 제거한 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 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과 우현보 등을 신우와 신창(우왕과 창왕을 말한다)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했었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정도전은 거듭 그들을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다.

김진양  중서문하성에서 이성계 일파의 변란 날조를 지적 

그해 9월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 등은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케 하여 봉화로 유배당하였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의 탄핵 내용을 접한 그는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된다.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당해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김진양을 사주하여 사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그를 처형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공양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유배되자 정몽주는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강력 상소하였지만 공양왕의 반대로 1392(공양왕 4)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갔다.

1392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해 410,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그 뒤 610일 유배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복직하였다.

역성혁명과 조선 건국

조선의 건국(1392)

조선 건국 및 개국공신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였고 7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는 임금으로 추대되어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인사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조선의 첫번째 임금인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의 중요한 부분을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사대문과 사소문 및 성안 52()의 이름 등을 제정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국정 방안 수립과 병권 장악

이후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고, 개국공신 1등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의흥삼군부사로 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관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였다.

720일 도평의사사사 겸 상서사사(尙瑞司事)가 되었다. 728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된 뒤 봉화군(奉化君)에 봉군되었다.

새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맨 먼저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이성계는 곧바로 궁궐터를 닦기 시작했다.[15] 그런데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살기 어렵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금강이 멀어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이유였다. 계룡산에 대한 반대 상소가 올라가자 정도전 등도 계룡산으로의 천도를 반대하여 태조는 새로운 길지를 선정하게 하였다.

1392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승인 받아왔다. 12월에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다. 139211월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1393(태조 2) 7월 다시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변방으로 나가 여진족을 토벌, 회유하고 되돌아왔으며, 한성으로 되돌아온 뒤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데 쓰이는 자료로 삼도록 권고하였다. 13939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0월 관습도감판사(慣習都監判事)를 거쳐 1394(태조 3)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 도총제사가 되어 지방의 병권까지 장악하였다.

체제와 관제의 정비

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일부 만들어나갔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결정한 태조 이성계의 명에 따라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조선의 건국 직후부터 그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일 것을 계획하였으며, 경세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북벌론 문

또한 명나라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주장,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나간다.

또한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태조 6)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경원(慶源 : 함경북도)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리하고 주·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불교를 대체할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지목했다. 그는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으로 미신이라 여겨지는 불교와 노자교(老子敎), 무속 등을 압도하고자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따라 기생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종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으나,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해 긍정적인 시를 쓰거나 승료들과 교류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유교를 전파하고자 조선 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歷代府兵侍衛之制)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한양 천도(13941121)

경복궁 근정전

한성부 지도

한양 천도,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사대문 및 사소문 

13928월부터 태조는 수도를 옮길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은 신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394년 태조의 명에 따라 정도전은 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였고, 태조는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이후, 한양의 도시 설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성부의 각 궁궐과 전각, 문의 이름을 짓고 도로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1394년 한양 천도의 지도와 감독을 병행하면서 새 사회에 걸맞은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정식 국교로 채택할 것을 주청하였으며, 그해에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 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정도전이 경복궁을 설계할 때 근정전(勤政殿)이라 지은 것이다. 또한 한성의 사대문과 사소문의 첫 이름과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 년간 궁중에서 연주되었다.

조선 건국(1392) 이후 정권 투쟁

세자 책봉 문제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배극렴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또한 다른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자신들을 배제하고, 후처인 강씨의 아들 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도전은 바로 세자시강원이사(世子侍講院貳師)의 한사람이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국방력 강화와 명나라와의 갈등

1395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였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6월에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제문감경제문감별집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업무와 인사 행정 및 실무를 논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 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해 태조는 그의 상소를 수용하는 것을 머뭇거렸고,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3953월에는 다시 판삼사사로 복직했다.

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문하시랑찬성사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되었다.

한성부의 도시 정비

천도가 확정, 단행될 무렵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394년부터 2년간 그는 한성부의 도시 정리를 추진했다.

1395(태조 4)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 측량을 하게 했으며, 총책임자는 정도전이 되었다. 1396년부터 성곽을 쌓기 시작 1년여 만에 완성했다. 백악산 꼭대기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한성부 시내를 돌아 백악에 이르는 성곽은 총길이 595백 자, 그 중 토성이 43백여 자, 석성이 192백 자, 높이 402치로 정도전은 이 수치를 정확히 계산, 파악했으며, 공사 기간은 여름과 겨울로 농번기를 피해 2기로 나누어 공사를 벌였다.

사상과 신념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현대의 영국식 입헌 군주제를 그때부터 생각한 것이다. 또한 감찰(사헌부)의 탄핵권을 강조하고 간관(뒷날 사간원)의 권리를 국왕과 대등하게 설정했다. 고려 정치 제도에서 어사대(사헌부)는 독립된 기구였지만 낭사(사간원)는 중서문하성 산하 기구에 불과했기 때문에, 간쟁 기구를 왕과 대등한 위치에 놓은 정도전의 사상은 조선 정치 체제의 중요한 특징인 전제 왕권 통제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지방자치 .

또한 조선은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관료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지방 세력을 인정하는 봉건국가와는 비교되는 정체였다.

경세론

그의 경세론(經世論)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등에 제시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각국과 각 시대의 법령과 규정을 참고한 것이 주목된다. 주례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외국의 사례로는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을 빌려왔다.

그는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10분의 1세의 확립, ((((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경영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그의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그가 계획한 모든 계획 중 일부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정치론과 인재 채용

의정부서사제 

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을 긍정하였으며, 실제로 혁명이론에 입각하여 왕조교체를 수행하였다.[18] 그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와 패도 정치의 사례를 제시한 후, 패도 정치를 하는 군주는 역성혁명이나 기타 수단에 의해 폐위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또한 군자와 소인의 존재를 역설하여 군왕은 군자들을 등용하여 올바른 정치를 수행해나가야 된다고 봤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는 일종의 내각에 의한 정국운영론으로, 그의 재상 중심, 신권 중심의 정치이론은 후일 이방원 집권 후 폐지되었다가, 다시 세종과 문종의 연이은 죽음 이후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의해 부활된다. 이를 의정부 서사제라 한다.

그는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으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불교 배척과 비판

그는 불씨잡변을 지어 숭유억불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그러나 그의 불교 비판론은 모순적인 측면이 많았다. '불씨잡변'을 지어 신랄한 불교 비판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해서 긍정정인 시를 짓거나 승려들과 교류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삼봉집 제 2권 산사에 노닐다[遊山寺] 와 삼봉집 제2권 백정 선사에게 기증하다[寄贈柏庭禪] , 고헌 스님을 심방하는 도중[訪古軒和尙途中], 삼봉집 제3권 서() 화엄종사 우운을 전송하는 시의 서[送華嚴宗師友雲詩序] 글들이 좋은 예이다.

생애 후반

이방원과의 갈등

정도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동의 장량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임금은 세습되는 직책이라 어리석은 임금이 나올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재상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에게 눈엣가시로 찍혀 후일 이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그를 살해했으며, 더불어 세자 방석도 살해하였다.

요동 정벌 계획

명나라의 초대 황제 홍무제(주원장)

요동 정벌 

1392년 건국 직후부터 그는 요동 정벌(1392)을 계획한다. 1396년 요동 정벌의 방안으로 그는 그때까지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자는 사병 혁파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병을 중심으로 정변을 세우려고 계획한 이방원은 고려 유신 그룹을 규합하여 노골적으로 반감을 품고 역습의 기회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나라로 가는 사신 하륜, 설장수 등을 비롯한, 반감을 품은 인사들을 사주하여 은밀히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

1396(태조 5) 3월 과거 고시관(科擧考試官)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조유인(曹由仁), 이치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396727일 봉화백에 봉작되었다. 1397(태조 6) 3월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로 공동 상서사판사인 조준과 함께 내관과 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정하여 올렸다. 1397년 명나라의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조선의 화()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정도전을 해임하고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왕족들과 여러 지배층으로부터 몰수한 사병들을 새로 신설한 의흥삼군부에 병합한 뒤 그가 지은 진도(陳圖)에 따라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과 요동 정벌 준비는 같은 개국공신인 조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끝내 그와 결별하게 되고 만다.

요동 정벌 계획 실패

그해 4월 요동정벌 계획을 명나라에 누설한 설장수와 권근의 문책을 요구하였으나, 불문율로 부치고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 정도전은 확보한 병력으로 남은(南誾)과 함께 양주목장에서 대대적인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준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 다시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인구 수와 군관(軍官) 수를 점검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10월 가례 도감(嘉禮都監) 제조에 임명되었다.

1398년초 그는 왕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 것을 건의하고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한다. 바로 그는 태조에게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사병을 모두 압수하며,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개인이 거느린 사병 집단을 국가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정변과 최후

1차 왕자의 난 

1398(태조 7) 음력 8, 그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자신의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낸 것을 인용하여 이방원은 전라도로, 이방번은 동북면으로 보내야 된다고 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파견을 거부하고 민무구, 민무휼 등과 함께 정도전 암살을 기도하였다.

106(음력 826) 정도전은 송현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남은, 심효생, 이직 등을 만나 술을 마셨다. 그가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이끌고 남은의 첩의 집으로 향한다.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후,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략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씌워 정도전을 살해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후에 이르러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승자에 입장에서 이방원이 비열한 인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봉집에는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의 최후를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겨 영웅호걸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

정도전, 자조(自嘲)

정도전의 두 아들 정영과 정유(鄭游) 그리고 조카 정담(鄭澹)은 부친과 숙부를 구하러 달려가다가 살해되고, 얼마 뒤 조카 정기(鄭淇)는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맏아들 정진은 당시 태조의 안변군 석왕사 삼성재(三聖齋)발원을 위한 밀접 수행 중이었으므로 해를 당하지 않고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후 평가

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유형원(1622-1673)동국여지지(東國輿之地)’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그의 가묘가 있다.

반발했던 조준은 태종때 중용이 되었고, 한편 정몽주는 태종 때 가서 권근의 요구와 하륜의 지지로 받아들여져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되어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아들 정진은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그는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그는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

신숙주는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한성부의 각 전각과 궁궐의 이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 견해가 일반화된 데에는 그가 죽은 후 정적들의 대거 복귀로 이색, 정몽주의 정치적 승계자인 고려 유신그룹과 사림파와 정몽주를 충신의 표본으로 현창함으로써 정도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의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런 의도만으로 정도전이 부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 수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의 이름을 일부러 삼봉이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광해군 당시 허균이 그의 시문을 애호하였다는 이유로 허균은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그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빠진 글들을 수집하고 편차를 재구성하여 수정 삼봉집을 간행하였다. 서인 성리학자로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군신공치의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마저 정도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1865(고종 2) 9월 대비 조씨의 건의로 다시 공신 칭호를 돌려받았다. 1865년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고종은 후손들이 사는 경기 양성현(안성군 공도면,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고종은 정도전의 조선 건국과 제도와 법령 마련, 체제 정비 등의 치적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4월 경기도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不遷之位)에 추대되었고, 그의 묘소가 실전되어 1872(고종 8) 왕명에 의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872년 개국공신으로 공식 복권되고 이듬해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었다. 1873(고종 10) 남인 인사들에 의해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과 중암 김평묵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복권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고종은 정도전 복권을 강행하였는데, 이는 정도전이 조선왕조건국에 끼친 공로를 추앙하여 복권을 한 것으로, 기존의 조선왕조에서 복권이 된 사람들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계유정난때 희생된 사람들과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 남이의 옥사에 희생된 남이, 기묘사화 때 희생된 기묘명헌의 사람 중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현대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함으로써 다시 그에 대한 폄하가 시도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2003년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311, 200712월 정도전 재평가와 그의 학문 연구를 위한 삼봉학 학술회의가 열렸다. 정도전의 신권정치(臣權政治, 재상중심의 정치)가 독일식 총리제, 영국식 수상제, 스위스식 집정부제와 같은 정권들을 통하여 경제개혁, 토지개혁으로 이어졌듯이 토지공동체와 같은 정책으로 땅의 제 역할이 회복될 수 있는 정도전의 정전제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의 바탕이 되었으며, 한국판 토지 뉴딜(New Deal)정책이었다는 평가다.

정도전의 묘가 경기도 과천현 10리 동쪽에 있다는 전설과 소문을 근거로 과천 일대의 야산을 탐사한 결과 목이 잘린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과 함께 많은 양의 고급 조선백자가 함께 발견되었다. 정도전 사당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가족 관계

본가 봉화 정씨(奉化 鄭氏)

고조부 : 봉화도장 호부령 정공미(奉华道政呼符令 鄭公美) 봉화 정씨 시조

증조부 : 비서랑 동정 정영찬(秘書郞同正 鄭英粲)

조부 : 검교 군기감 정균(檢校軍器監 鄭均)

아버지 : 형부상서 정운경(刑部尙書 鄭云敬, 1305~ 1366)

외조부 : 영주우씨 산원(散員) 우연(禹淵)

어머니 : 증 정경부인 영주 우씨(贈 貞敬夫人 榮州 禹氏)

여동생 : 봉화 정씨

매부 : 황유정(黃有定, 1343~ 1421)

동생 : 정도존(鄭道存, ? ~ 1398)

동생 : 정도복(鄭道復, 1351~ 1435)

처부 : 찬성(贊城) 최습(崔濕)

부인: 경숙택주 경주 최씨(慶淑宅主 慶州 崔氏)

장남 : 형조판서 증 우찬성 희절공 정진(刑曹判書 贈 右贊成 僖節公 鄭津, 1361~ 1427)

손자 : 정래(鄭來)

손자 : 정속(鄭束)

차남 : 정영(鄭泳 ? ~ 1398)

아들 : 정유(鄭游 ? ~ 1398)

저서

삼봉집(三峯集)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의론(經濟議論)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심기리(心氣理)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진맥도결(診脈圖結)

고려국사(高麗國史) 37

상명태일제산법(上明太日諸算法)

진법(陣法)

편저와 역서

고려국사(공저)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작품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寄圖)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

강무도(講武圖)

궁수분곡(窮獸奮曲)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文德曲)

신도가(新都歌) .

논란과 의혹

표절

그의 저서인경제문감(經濟文鑑)(1395)이 남송시대 저작인 주례정의(周禮訂義),산당고색(山堂考索),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문헌통고(文獻通考)등의 문헌들을 상당 부분 베껴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연합뉴스 20031027일자 기사인 "정도전의경제문감남송시대 책 도용"에서 연세대 도현철 교수(사학과)31`한국 중세사회의 변화와 조선건국'을 주제로 연세대 국학연구원(원장 전인초)이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정도전 사상의 재검토'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밖에 송재혁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원은 그의 논문인 '정도전은 왜 인용한 자료를 밝히지 않았나?:창업 군주를 위한 통치론의 저술과 원 제국의 유산*'이라는 논문에서 정도전이 경제문감 뿐만이 아니라 '조선경국전''경제문감별집'도 중국 송나라,원나라 시대의 많은 중국측 자료들을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저서들에 포함시켰음을 밝혀내었다.

정적에 대한 대량 숙청

그의 스승인 이색부터 시작해 수많은 무고한 고려측 인물들을 대량으로 죄인으로 몰아 고문과 살인을 일삼았다.

태만한 정적 경계

임금인 태조 이성계가 중병으로 누워 있는 상황에서 정작 정도전 자신은 신료답지 않은 처신으로 남은의 첩의 집에서 당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고, 이런 상식 밖의 행동으로 이방원 측의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오해

그가 이숭인의 재능을 시기해서 죽였다라는 이야기와 권근을 집요하게 죽일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이숭인의 문집인 '도은집'의 서문을 써 주었고, 이숭인 역시 정도전과의 우정을 다지는 시를 여러 편을 썼다. 또 권근은 그의 문집인 '삼봉집'의 서문과 '불씨잡변'의 서문을 써 주었고, 정도전 자신은 '삼봉집' 1'양촌부'에서 권근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기 때문이다.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면 이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는 이성계가 한 일을 정도전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조선왕조태조실록총설서를 보면 조선측에서 무고한 고려측 인물들을 고문하고 학살할 때 이성계는 늘 관련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성계 자신이 사실상 임금인데, 이럴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안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집권후 역적으로 처리되어 있다가 500여년이 지난 고종대에 회복되었다. 다만, 정몽주가 죽을 당시에 간신으로 몰려죽었을 때 그의 문집인 '포은집'의 모두가 불에 태워지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극히 일부의 자료들만 수집해 만들어져 '포은집'이 매우 엉성해 이로서 정몽주에 대한 연구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비해 정도전은 그의 문집인 '삼봉집'의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정도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또 삼봉집의 서문을 권근과 신숙주가 써주었고 조선 성종때 왕명으로 편찬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역대 우리나라의 시,문장,상소,묘비문,묘지문,인물 전기,여행기 등을 집대성한 조선왕조의 공식 문서모음집인 동문선에 그에 관한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그를 인정하는 모습들을 보였고, 또 심지어 정도전의 죽음을 애도하고 정도전이 조선왕조에서 잘못한 것은 세자를 올바로 옹립하지 못한 잘못밖에 없었다고 애도한 진의귀의 시도 수록해 주었고정도전의 맏아들인 정진은 태종 이방원에게 용서 받아 관직 생활을 계속 했고, 결국 형조판서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대접을 해주었고, 또 태종 이방원은 당시 아버지 이성계에 '양 정'이 있었는데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였고, 정도전은 자신의 부왕인 태조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둘 다 옳았던 것이다라고 말하며 정도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면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았을 때 조선 고종때 공식적으로 복권을 받았다고 해도 정도전이 조선왕조 500여년 내내 매도만 당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함을 알 수 있고, 또 이것들은 조선왕조가 정도전을 500년간 역적으로 매도해도 그의 모든 것들을 다 부인, 조작할 수 없었다라는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 고려 말 조선 초의 역사를 새롭게 만나보다!
이덕일의 역사특강 『정도전과 그의 시대』. KBS의 대하사극 《정도전》팀을 대상으로 한 강연 내용을 엮은 것으로, 위민의 정치가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혼란스러웠던 고려 말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을 설계했지만 이방원에게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혁명가인 정도전.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왜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우려 했는지, 무엇이 그를 백성을 대변하는 정치가로 만들었는지, 그가 만들고자 했던 이상적인 나라가 무엇이었는지를 서술 방식의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사를 풀어내었다.

의민정치가 제도적으로 불가능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저자는 위민의 관점에서 인물을 바라보고 평가하였다. 또한, 정도전의 일생뿐만 아니라 성리학과 토지 문제까지 다룸으로써 조선이 위화도 회군 세력의 무력에 의지해 개창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과 경제체제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개국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역사를 반성의 도구로 삼아 한 명의 사상가가 세운 전략으로 무너진 고려를 통해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역사적 반증으로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 제시하고 있다.

목차

● 서문_위민의 정치가, 정도전을 만나다
역사의 ‘관점’ | 역사는 반성의 도구 | 정도전의 삶은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 | 위민의 시선으로 토지제도를 개혁하다

1장_무너져가는 고려 왕실
고려 말의 구가세족들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다
충선왕의 전지정치
남송에서 성리학이 나온 이유
성리학의 기본 이념
고려 말 조선 초의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이유

2장_절망 속에서 위민사상을 일구다
신돈과 전민변정도감
역성혁명파의 대두
귀양에 처해지다
귀양에서 배운 것들

3장_정도전, 이성계를 만나다
대동사회와 소강사회
ㆍ《예기》 <예운> 편에 묘사된 대동사회와 소강사회
역사를 바꾼 만남
이성계의 왕사 정도전
이성계와 정도전의 개국 플랜
인구를 헤아려 농토를 나누어 주리라

4장_토지제도를 개혁하다
고려 말의 토지 현황
고려의 토지제도
ㆍ균전제를 주장한 유형원
조준의 토지개혁 상소
공사전적을 불태우다
과전법을 공포하다
조선 왕조 개창의 정당성
ㆍ조선총독부에서 토지국유제를 주장한 이유

5장_조선의 개창 이념, 성리학
성리학의 시작
한유의 유학 부흥 선언
송나라 사대부들, 불교를 받아들여 성리학을 만들다
사대부 계급의 지배 이념
주희와 정도전

6장_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지다
토지개혁 정국과 우왕, 창왕의 제거
과전법 반포와 조선 건국
표전문 사건과 요동정벌론
왕도정치를 꿈꾼 비운의 혁명가, 정도전

저자 소개 

저 : 이덕일 (李德一)
 
1961년 생으로 충남 아산에서 자랐다.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사료에 대한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 대중과 호흡하는 집필가로서의 본능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한국사에서 숨겨져 있고 뒤틀려 있는 가장 비밀한 부분을 건드려왔다. 언제나 발표하는 저술마다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역사 인...

출판사 리뷰

왕도정치를 꿈꾼 비운의 혁명가 정도전과 혼란한 고려 말·조선 초의 역사가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깨어난다!

고려 말, 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힘 있고 강한 자는 남의 토지를 빼앗아 더 부농이 되고, 가난한 자는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일 안 하는 소수는 호화롭게 살고 뼈 빠지게 일하는 다수는 가난하게 사는 이런 왕조가 왜 존속해야 할까? 정도전은 무너져가는 고려 왕실을 의연하게 등지고 새로운 왕조를 향해 결연히 나아갔다. 조선 개국의 이념과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 그가 원한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백성이 안녕한 나라를 꿈꾼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한국사의 쟁점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는 서술 방식으로 역사서 서술의 새장을 연 역사학자 이덕일의 첫 번째 강연집 《정도전과 그의 시대》가 도서출판 옥당에서 출간되었다.
정도전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혼란스러운 고려 말의 위기를 극복하고 조선을 설계했으나 큰 뜻을 제대로 펼쳐보기도 전에 이방원의 칼날에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혁명가라는 이미지다. 하지만 조선의 설계자라는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그의 삶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시대, 고려 말 조선 초의 시대적 상황과 그를 세상으로 이끌어낸 원동력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그가 이성계를 만나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는지, 무엇이 그를 백성을 대변하는 정치가로 만들었는지, 그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 그의 이상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정도전은 고려 말의 혼란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을 토지제도로 보았고, 그 폐해를 없애는 것을 새 왕조 개창의 명분으로 삼았다. 과전법은 조선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설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왕조 교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이 사전개혁이었고, 과전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바탕에 성리학이 있었다.

정도전의 등장, 그리고 절망 속에서 일군 위민사상

정도전은 우왕 원년(1375) 5월 개경에서 나주까지 머나먼 귀양길에 오른다. 그가 귀양길에 오른 것은 친원정책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보수파에 맞서 친명정책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는 외교정책을 두고 신구 세력이 갈등하고 있었는데, 이인임, 경복흥 등의 구세력은 친원정책을 주장했고,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신세력은 친명정책을 주장했다. 신세력의 주장은 공민왕의 유지를 계승해 원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원 세력인 구세력은 계속 북원과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신세력의 반대 주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 접대를 명했다. 격분한 정도전은 경복흥을 찾아가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오든지, 아니면 오라 지워서 명나라로 보내겠소”라고 따진다. 이를 항명으로 판단한 이인임, 경복흥 등이 정도전을 유배형에 처함으로써 정도전의 인생은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유배형에 처해진 정도전은 장장 9년 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하게 된다. 살아 있는 권력의 표적이 되어 복권될 희망을 점점 잃어가던 그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달래준 사람은 뜻밖에도 유배지의 부곡민들이었다. 편견의 시선 없이 온정을 베풀어주고, 책이 아닌 경험으로 습득한 인생의 지혜를 알려준 부곡민들 덕분에 그는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절망을 버리고 희망의 싹을 틔우게 된다. 그가 발견한 희망은 바로 백성, 곧 민중이었다. 다시 벼슬아치로 돌아갈 수 없는 사대부의 현실에 놓이게 되자 비로소 백성의 삶이 보였고, 백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고려 474년 왕조가 멸망하는 단초가 된다. 현실에서 절망한 한 지식인이 민중의 삶에 주목하게 되었고, 민중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나 승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9년간의 유랑 생활에서 쌓은 사상을 실현할 무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우왕 9년(1383), 승부수를 던진다. 바로 함주에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단순히 불우한 지식인과 촉망받던 무장의 만남이 아니라, 극심한 양극화에 시달리던 고려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가진 지식인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무장의 만남이었다. 이 만남은 그의 인생과 고려의 운명에 대전환점이 된다.

토지제도를 개혁하다

고려 말, 백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이 가진 토지의 크기는 산천으로 경계를 삼을 만큼 컸다. 그렇게 거대한 토지를 만드는 방법은 가난한 농민의 땅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대다수 농민들은 권세가에게 땅을 빼앗기고 전호, 즉 소작인이 되거나, 권세가의 집에 자신의 토지를 기탁해 노비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부전>에서 고려 말의 토지 상황을 “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세력 있고 강한 자는 남의 토지를 겸병해서 농토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라고 개탄했다. 또 《고려사》 <식화지>에는 “권세가들이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여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8~9할을 내야 한다”라는 구절도 있다. 가난한 전호가 소출의 8~9할을 빼앗기고 어떻게 먹고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농장들은 국가에 세금도 내지 않았다. 그러니 국가로서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권귀에게 투탁해 노비로 들어가 세입원이 줄어든 데다 막대한 땅을 가진 권귀마저 세금을 한 푼도 안 내니 국가는 가난해진 반면, 권귀들만 부자가 되었다. 백성의 불만은 점점 거세졌고, 부곡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농민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정도전은 백성을 위한 새로운 토지제도를 구상하게 된다.
정도전은 대사헌 조준이 전제개혁, 즉 토지개혁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게 한다. 1388년 7월, 조준은 “임금의 정사 중에서 경계를 바로잡는 것, 즉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라면서 강력한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조준 등은 1389년 12월 다시 상소문을 올려 토지 문제에 대한 처리 방안을 이야기하고, 대대적인 양전 사업의 결과 총 50만 결의 토지를 찾게 된다. 그간 이 농지 상당수가 권세가들의 개인 소득이 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정도전, 조준 등의 역성혁명파가 새 나라를 개창할 물적 토대가 된다.
토지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누어 사용해야 하는 유한재이므로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독점할 수 없다. 역성혁명파는 이런 당연한 진리를, 그러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진리를 실천한 것이다. 과전법은 이런 토대 위에서 공포되었다. 조선 개창 1년 전인 1391년 5월의 일이었다.
과전은 공전과 사전으로 나누었으며, 죽으면 반납해야 하는 토지이므로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 즉 세금 받을 권리를 주었다. 조와 세에 대해서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무릇 공전과 사전을 막론하고 1결당 조는 수전, 즉 논이면 조미 30말이고, 한전, 즉 밭이면 잡곡 30말인데, 그 이상을 제멋대로 거두는 자는 장죄, 즉 뇌물죄로 처벌한다.

무릇 토지를 점유한 자는 세를 나라에 납부해야 하는데, 논은 1결에 백미 두 말, 밭은 1결에 황두, 즉 누런 콩 두 말로 한다.

정리하자면, 국가에서 과전을 받은 벼슬아치는 관직 수행의 대가로 해당 과전 소출량의 10분의 1을 조로 걷고, 그렇게 받은 곡식 중 10분의 1을 국가에 세로 내는 것이 과전법의 요지였다.
또한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의 양을 달리했다. 풍년과 흉년의 등급을 10등급으로 나누어 흉년 때 수확이 10퍼센트 줄어들면 조도 10퍼센트 감해주었다. 20퍼센트 줄어들면 20퍼센트, 50퍼센트 줄어들면 50퍼센트를 감해주었고, 만약 대흉년이 들어 수확이 80퍼센트 줄어들면 전액을 면제해주었다.
해당 농지의 수확이 몇 퍼센트 줄어들었는지 판단하는 것도 체계적이고 공정했다. 각 주현의 수령이 직접 가서 조사하여 이를 감사, 즉 지금의 도지사에게 보고하면 감사는 담당관을 보내 재심하게 하고, 감사와 수령관이 삼심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또한 벼슬아치들이 수조권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농민들의 경작권을 강력하게 보호했다. 농민의 경작권은 벼슬아치의 수조권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다. 과전법에서는 농민의 경작권도 국가에서 법으로 철저히 보호했다. 높은 벼슬아치라고 마음대로 농민의 경작권을 빼앗을 수 없었다. 경작권이 사실상의 소유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작권을 타인에게 매매하는 것을 금지해 사전의 발생을 억제하고 농민생활을 보장하려 했다.
정도전은 당초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계민수전計民授田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구가세족의 반발과 백관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기 바랐던 이성계의 욕심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지는 못했다.

과전법, 조선 개창의 토대가 되다

과전법을 공포함으로써 역성혁명파는 왕씨 임금을 이씨로 바꿀 수 있는 기반을 획득했다. 과전법은 어떤 면에서 보면 새 왕조 개창을 지지하는 벼슬아치들이 큰 이익을 본 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면 물적 토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500년 가까이 존속했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하는데 개창 주도 세력만 이익을 본다면 저항이 강할 수밖에 없다. A라는 권세가가 차지하던 정치·경제적 이득을 B라는 신흥사대부가 고스란히 차지하고, 농민들의 처지는 똑같다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도둑놈이다”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구가세족과 온건파 사대부가 농민들을 부추길 때 농민들이 가담하게 되고, 격렬한 투쟁이 발생하는데, 이 경우 구세력이 이기기 쉽다. 그래서 역성혁명파 사대부들은 일반 백성에게도 이득이 되고 자신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최대공약수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과전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흥사대부는 과전법을 통해 농민들의 지지도 확보하고 새 왕조 개창의 물적 토대도 마련했다. 동시에 사전개혁으로 구세력의 물적 토대를 무너뜨렸다. 사전개혁으로 고려 말 농장들이 갖고 있던 불수조 특권을 폐지하니 국가로서는 세금이 늘어나서 좋고, 구가세족의 물적 기반을 해체해서 좋고, 백성의 지지를 확보해서 좋은 일거삼득의 방안이 바로 과전법이었다.
과전법은 또한 새 왕조 개창을 찬성하는 신진 관료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다. 사실 500년 가깝게 유지된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또 개창했다고 해도 이를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위기가 닥쳤을 때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는 핵심 지지 세력이 필요했고, 문무반 벼슬아치뿐만 아니라 국가의 역을 맡고 있는 모든 백성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새 왕조 개창을 지지하는 세력을 크게 늘린 것이다.

조선 개창의 이념, 성리학

정도전이 고려 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 왕조 개창을 주도하게 된 사상적 배경에는 성리학이 있었다. 끊임없이 토지를 확장해나가던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나중에는 중소지주의 토지까지 침탈하게 된다. 그런데 중소지주인 사대부들은 지식인들이다. 일반 백성처럼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지식도 있고, 벼슬도 있고, 어느 정도 경제력도 있다. 그래서 권문세족의 경제 침탈에 강력하게 반발하게 되고, 결국 이들의 토지 침탈을 용인하는 사회 구조가 문제라는 체제 문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체제 내 지배 세력이던 사대부들이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성리학이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사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성리학은 북송 시절 성립되기 시작한다. 북송의 지배층은 형세호形勢戶라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대토지 소유자로서 자기 농장의 전호들을 지배하고, 더 나아가 다른 중소 토지 소유자들까지 지배하려 했다. 송나라가 요나라나 금나라에 힘 한 번 못 써보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군사력이 약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이들 소수의 형세호가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했던 계급 구조에도 큰 요인이 있다. 소수가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하면 그 사회는 망하게 되는 것이 역사의 이치다. 그래서 금나라에 쫓겨 양자강 이남으로 내려와 남송을 건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남송의 사대부란 정치적으로는 과거에 급제한 관료나 학문이 있는 학자를, 경제적으로는 수전농업에 바탕을 둔 중소지주를 뜻하게 된다. 대토지 소유자인 형세호에 맞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들이란 철학에서 나온 것이 성리학이기도 하다. 바로 이 대목이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모든 사상, 모든 역사적 현상에는 뿌리가 있다. 이 뿌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현상만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정도전의 삶은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

역사는 반성의 도구다. 역사서에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나 조선 서거정의 《동국통감》처럼 ‘거울 감鑑’ 자를 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란 뜻이다. 옛사람들은 역사를 전철, 즉 앞서 지나간 수레바퀴라고 했다. 잘못된 길로 가다가 수레가 엎어졌던 시대를 교훈 삼아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고 미래의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도전이 살았던 쉰여섯 해는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로 부족함이 없다.
한 지식인, 한 사상가의 전략으로 고려가 무너졌다는 것은 그만큼 체제 내에 문제가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문제가 비등점을 향해 달려갈 때 체제 교체의 기운이 싹트는 것이다. 정도전의 인생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한 사회가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체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이를 사회 내부에서 순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비등점을 향해 치닫게 될 가능성이 있다. 정도전의 인생은 그런 불행한 사태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신에게 배우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843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정치인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실천에 옮긴 정도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그의 열정과 의지를 다시 읽는다!


도무지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혼돈으로 가득 찬 고려 말기와 새로운 왕조의 태동기에 역사의 중심에 서서 조선을 설계한 인물 정도전! 그는 뛰어난 문인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군사 전략가였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조선의 이념적 지주를 세운 사상가이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현실정치에 뛰어든 개혁가이자 실천가였다. 또한 그는 민본주의 사상을 현실정치에서 펼치려고 노력한 정치인이었으며 위대한 경세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자신이 세운 조선왕조에 철저하게 외면당한 비운의 인물 정도전! 지금 이 시대에 그와 그의 시대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혁명과 개혁 그리고 진보와 보수의 날선 대립의 시간들이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

1부 정치인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주다

600년 만에 다시 주목받다
한미한 가문, 어디까지 사실인가?
소년 정도전, 정체성을 형성하다
기대를 받으며 공민왕이 즉위했지만…
새로운 대안 세력이 부상하다

2부 청운의 뜻을 품고 관직에 나아가다

관직에 나아가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다
뼈저린 패배를 경험하다

3부 시련 속에서 길을 찾다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진정한 선비로 거듭나다
길을 나서다
이성계 가문, 동북면에 뿌리내리다

4부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다

대륙의 변화에 주목하다
다시 시작하다
기회가 찾아오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다
두 영웅의 운명이 엇갈리다

5부 어디로 갈 것인가

개혁의 불씨를 댕기다
정도전과 조준, 동지인가? 경쟁자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투표로 왕을 결정하다
누가 이색을 공격할 것인가?

6부 고려와 경계선을 긋다

정도전, 전면에 나서다
개혁에서 혁명으로 국면이 전환되다
천하 명장, 말에서 떨어지다
34대 475년의 고려 역사가 막을 내리다

7부 백성은 먹는 것이 하늘이다

백성의 나라를 위하여
조선을 설계하다
한양을 건설하다
조선을 저술하다

8부 역사 속으로

누구를 향한 칼끝인가?
요동 공벌의 진실은 무엇인가?
정도전을 보내라!
주원장은 왜 정도전을 주목했나?

9부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과 홍모보다 가벼운 죽음을 생각하다

36년의 정치 인생을 마감하다
역사 속의 세 사람, 정도전·정몽주·이방원
정도전의 공백을 메워나가다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과 홍모보다 가벼운 죽음을 생각하다

삼봉 정도전 연보/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김진섭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인문콘텐츠를 공부하여 문화예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홍보·교육·도시빈민 간사 ’99강원국제관광엑스포 홍보제작전문위원, 강원인재육성재단 사무처장을 지냈다. 춘천교육대학교 겸임교수, 동국대학교 만해마을 교육원 교수를 거쳐 춘천교육대학교,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인천대학교에 출강했다. 현재 한국미디어콘텐츠학회 이사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조선 건국기 재상열전』, 『조선의 아침을 꿈꾸던 사람들』, 『이야기 우리문화』, 『신화는 두껍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의 확장성과 전통연희에 대한 소고: 2006년 무한도전 등장 이후를 중심으로」 「리얼 버라이어티 쇼에 내재된 동시대인의 일상 연구」가 있으며, “김치의 혁명을 몰고 온 고추”, “우산, 근대와 전근대가 만나다” 등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책 속으로

14세기 중엽의 고려 사회는 권력이 사유화되었고, 민생이 사라졌으며, 학문과 종교는 이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상실했다. 뿐만 아니라 중원을 장악한 원나라의 지배력 강화로 자주성을 상실했으며, 개혁의 실패와 전쟁이 반복되었다. 정도전은 이러한 시기에 고려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자신의 삶을 깊이 통찰하며 개혁에 대한 의지를 구체화해 나갔다. 역사상 세상을 바꾼 위인들은 많지만, 정도전처럼 정치·경제·국방·사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변화와 혁명을 주도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삶은 60년을 넘지 못했지만, 600년이 지난 오늘날 그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35

정도전은 부모상을 치르면서 『맹자』를 하루에 한 장 또는 반 장씩 정독할 정도로 집중했다. 특히 여기에는 “백성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와 군주는 백성의 뜻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며 혁명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담겨 있었다. 즉 무왕이 주왕을 처형한 사건에 대해 “주라는 사내를 죽였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며 “군왕이 포악하거나 무능하면 이미 군왕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백성이 군왕을 선택할 수 있다”는 혁명의 정당성을 제시했다. 이렇듯 『맹자』는 정도전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
--- p.96

“바른말을 좋아하다가 귀양 왔지만, 목숨은 구했으니 나라에 고마워해야 하고,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면 화를 면하게 될 것이다”라며, 아무런 대책도 없이 권력에 저항했던 자신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반성도 한다. 이제까지 선비를 자처하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의義를 위해 죽겠다’는 자신의 각오가 무색해질 정도다. 그런 점에서 유배지에서의 시간은 정도전이 진정한 선비로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창 활동해야 할 나이인 30대를 넘기면서 시작된 유배와 피난 그리고 칩거 등 9년간의 낭인 생활은 정도전에게 더없는 현장 학습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는 거친 들판에서 단련되면서 사상적 토대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관계없이 고려의 상황은 좀처럼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p.139~151

정도전은 경사經史·예학禮學·병법兵法·산학算學·천문 등도 탐구했고, 성리학을 철저하게 받드는 유학자이면서도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무속과 풍수지리 그리고 참설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정도전을 ‘인仁이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 즉 안민安民이며,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등 ‘정치의 발견자’로 평가받는 에도江戶시대 일본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徠, 1666~1728)와 비교하여 몇백 년 앞서 위민爲民을 실천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p.203

이성계와 최영은 전쟁터에서는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에 맞서 패배를 몰랐던 천하 명장이었고, 조정에서는 청렴한 관리로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점도 적지 않았다. 최영은 중앙의 귀족 출신이었고, 그의 군사력은 왕의 시위와 숙위를 담당하는 우달치(于達赤우달적 또는 우다치) 그리고 왕궁과 왕을 숙위하는 성중애마成衆愛馬 등 중앙의 정부군이 기반이었다. 그는 권신 이인임과도 가까이 지냈다. 최영은 문인들에 대해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소비한다”며 좋지 않은 감정을 지녔고, 개혁 성향의 신흥사대부에 대해서도 “불평불만으로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 p.212

정도전은 이색에 대해 첫째, 왕씨가 아닌 우왕과 창왕의 옹립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왕실의 존엄성을 파괴했고, 둘째,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 창왕과 모사를 꾸며 국정을 혼란하게 했으며, 셋째, 왕의 스승으로 우왕의 포악한 행동을 말리지 않았고, 넷째, 전제 개혁을 완고하게 반대했으며, 다섯째, 유학자의 신분으로 불교를 숭상했다는 등 그동안 급진파가 개혁에 나서면서 비판했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비판했다. 다시 말해 이색에 대한 비판은 우왕과 창왕 대의 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 p.293

온건 보수파는 공양왕의 지원에 힘입어 정몽주를 중심으로 하여 일시적으로 뭉칠 수는 있었지만, 공양왕의 지원은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다. 그리고 구성원들의 생각이 모두 일치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비록 간관들이 앞에 나서기는 했지만, 정몽주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부모의 기대 속에서 훌륭하게 성장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기에는 버거움이 많았는지 ‘허무한 말을 꾸미고 대간들을 꾀어 대신을 모해하고 국가를 요란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참수되고 말았다. 공양왕 4년(1392) 4월 4일이었다. 그가 사망한 지 100일 만에 고려왕조는 막을 내리고 조선이 들어섰다. 정몽주를 마지막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324~325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국가의 기틀을 세우면서 정치를 포함해 모든 분야에서 철저한 유학자의 길을 걸었다. 권력이 부조리하게 유용되는 정치 권력을 통제하는 정치제도를 만들어내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등 조선의 정치체제에서 유교 이외의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도록 했다. 신왕조의 수도를 정하는 논쟁에서 고려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풍수지리를 과감하게 배제한 것도 정도전이 조선 개국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사상적 유연성과 비교되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 해도 그는 교조주의자가 아니었다.
--- p.340

정도전에게 사대 외교와 자주성 확립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대는 국가의 안녕을 보전하기 위한 선택이므로, 오랑캐라도 세력이 강대하다면 일시적으로 머리를 숙일 수 있다”며 사대 외교의 목적을 ‘백성과 국가의 평안’에 두었다.(……) 외교에서 ‘섬김도 파기할 수 있다’는 근거는 ‘왕이 부도덕하고 독선적일 때 신하가 왕을 파기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은 맥락이다. 정도전이 명나라에 사대하면서도 조선의 국방과 재정, 문화적 주체성 강화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국의 이익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실론자였다.
--- p.355~356

한양 건설에서 보여준 또 하나의 특징은 종묘와 사직, 궁궐과 관아, 시장과 민가, 학교와 사당을 조성하여 최대한 공적 건물과 공적 기능만으로 채웠다는 것이다. ‘조선의 궁궐은 고려에 비해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하고 장중한 자태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점포의 크기를 제한하고 대신들의 저택도 40칸을 넘지 못하게 했으며, 숙석(熟石, 석공이 솜씨 있게 잘 다듬은 돌) 같은 사치품 사용을 금하여 절제된 도시를 조성했다. (……) 정도전은 한양을 조성하면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철학을 철저하게 따랐고, 태조는 그 공을 치하하며 정도전을 ‘유학의 으뜸이요, 나라를 세우는 공도 으뜸’이라는 뜻으로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고 칭찬했다. 정도전이 한양 건설을 축하하기 위해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지어 태조에게 바치자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병풍을 만들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에게 각각 하사했다.
--- p.371

정도전은 나라의 근본을 세우기 위해 통치 체제는 중앙집권제를, 통치 철학은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를 기저로 하여 문물제도의 정비에 필요한 백과전서식 교재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태조 3년(1394) 3월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태조에게 바쳤고, 이를 받아본 태조는 감탄하며 말과 비단, 백은白銀 등을 하사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에 기초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포괄적인 정치체제 연구서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법전이다. 이 법전은 ‘중국의 사례와 고려의 경험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립했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제도와 운영 원리를 제시하여 정치를 중심으로 모든 사유事由를 구성했다’고 평가받는다.
--- p.378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음을 의미했다. 물론 공이 있는 사람은 이방원을 가리켰지만, 이방원은 이름조차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못했다. 이에 이방원은 누구보다 불만이 컸고, 불평의 화살이 정도전에게 향하게 된다. 이방원의 불만은 태조와 신덕왕후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현직 왕과 왕비였다. 정도전은 태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실권을 쥐고 개국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진두지휘하고 있었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책임도 맡고 있었다. 때문에 정도전이 태조 이후의 후계 구도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그를 표적으로 지목했다.
--- p.396

이방원은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으면 간신奸臣이 나와 권력의 전횡을 일삼는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군주는 약속을 중시하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데 익숙했다’는 역사적 경험에도 주목했다. 따라서 이방원의 눈에는 정도전이 비록 혁명에 참여하여 조선을 기틀을 다지는 등 최고의 공신이었지만, 왕조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일개 신하임에도 권력 구조를 논하며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축하려는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정도전을 부정했고, 피바람을 몰고 온 왕자의 난을 두 차례 치른 뒤 조선의 3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에서 정도전의 존재감은 지워졌다.
--- p.400

요동 공벌은 자주성 고취라는 명분을 내세워 민심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실행 여부와 관계없이 내정 개혁에 유효한 카드였다. 그런 점에서 정도전은 남은 등을 비롯한 동료들이 요동 공벌을 거론하는 것까지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처형당함으로써 요동 공벌은 승자의 기록만 남게 되고, 그 동기와 과정에 숱한 의문을 뒤로한 채 실체는 사라지고 말았다.
--- p.419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국가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며 왕권과 왕실의 존엄성을 세우기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개국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조선은 충신을 배출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태종은 고려왕조로 눈을 돌려 조선과 가장 가까운 시기를 살았던 정몽주를 호출했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정몽주의 충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의 결단은 고려의 잔재에서 벗어났다는 자신감이 한몫했다. 그만큼 새 왕조의 골격이 빨리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후 ‘충신 발굴 사업’이 강화되면서 ‘정몽주 숭배 사업’도 확대된다. 그 결과 정몽주는 조선이라는 왕조 국가에서 충절에 대한 하나의 좌표 또는 전도사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 p.469

“간신奸臣 정도전이 표전 때문에 견책을 받게 되어 황제가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치며 명령을 거부하려고 음모하였다. 무인년(1398) 가을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모든 적자嫡子를 제거하고 어린 서얼庶孼을 끼고 제멋대로 자신의 뜻을 펴고자 밤에 사제(私第, 개인 소유의 집)에 모이곤 하여 그 화단禍端의 기미가 이미 긴박하였다. 전하(태종)께서 이를 밝게 살피어 남김없이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정종)을 세자로 세울 것을 청하므로 인륜이 바로잡히고 종사가 곧 안정되었다.” 권근은 정도전을 간신으로 규정하여 “그 일파를 제거함으로써 인륜이 바로 서고 종사가 안정되었다”며 마지막까지 태종의 집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p.487

고종 2년(1865) 9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의 공훈과 지위를 회복시키고 시호를 내려 제사를 받들 후손을 세우라고 대왕대비(신정왕후)가 명했다. 정도전이 사망한 지 467년 만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대원군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한 정도전의 복권 작업은 그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경복궁 중건을 통해 왕실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정도전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영조·정조·대원군은 모두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 정치를 추진했던 특별한 경우에 해당했다. 따라서 관점을 달리하면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조선에서도 감당하기 버거운 존재였던 것이다.
--- p.491

출판사 리뷰

정치 혼돈의 시대에 정도전을 생각한다!

반만 년이란 기나긴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도약과 발전 그리고 쇠락을 거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를 되풀이한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역사는 수많은 사건들의 맞물림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 중심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역사의 기록에서 만난 수많은 인물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역사는 단순한 과거형이 아니며, 승자와 패자 또는 선과 악 등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역사의 결과에는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이란 바로 역동의 시대에서 선조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역사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전망과 대안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우리 역사에는 위기 때마다 사회에 대한 철저한 고민과 더불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그 대안을 제시했던 역량 있는 인물이 등장하곤 했다. 그들 가운데 혼란기인 고려 말에 태어나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의 반석을 마련한 정도전을 만나보려 한다.

그동안 정도전에 관한 서적들이 소설과 역사 교양서로 선을 보였고 내용 또한 거의 대동소이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정도전을 다시 조망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야기 우리 문화』 『신화는 두껍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등,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 문화와 역사 읽기에 관한 책을 펴낸 저자 김진섭은 이번에 출간한 『정도전의 시대를 읽다』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오늘의 현실을 난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답답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시대를 보는 관점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 누구는 “이러다 곧 나라가 망한다”고 말하는데 누구는 “나라야 망하겠는가?”라고 말한다. (……) 그런 점에서 정도전이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했는지를 추적하여 박제된 정도전이 아닌, 살아 있는 정도전을 만나보는 것은 후세인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도전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의 고민이나 사상만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와 인물들을 함께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달리 표현하면 정도전을 중심으로 ‘여말선초의 역사 다시 읽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시대를 보는 관점이 달랐고, 같은 길을 갔던 사람들도 서로 다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혁명과 개혁 그리고 진보와 보수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여말선초의 신흥사대부들의 사상과 신념 그리고 실천 의지를 접하다!

권력이 사유화된 14세기 중엽의 고려 사회는 민생이 사라졌으며, 학문과 종교는 이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상실했다. 뿐만 아니라 중원을 장악한 원나라의 지배력 강화로 자주성을 상실했으며, 개혁의 실패와 전쟁이 반복되었다. 이렇듯 어수선한 대내외적 상황에서 고려의 관료 사회에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고,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과 민생民生과 민본民本의 사상적 기반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도구 삼아 사적인 치부를 일삼던 귀족들에 비하면 도덕성 면에서도 우위를 차지하는 부류가 등장했다. 바로 신흥사대부들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모두 끝까지 같은 길을 가지는 못했다. 일부는 권신들에게 강경하게 저항하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개혁의 방법을 놓고 서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해 정적政敵이 되기도 했다. 특히 위화도회군을 기점으로 정치적 입장이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지게 된다.

첫 번째 부류는 조선왕조의 개창을 둘러싸고 체제 변혁적인 입장에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추구한 신흥사대부들로, 정도전과 윤소종 등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부류는 개혁에는 동의했지만 고려의 체제 유지와 왕조 재건에 치중한 신흥사대부들로, 정몽주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세 번째 부류는 온건한 입장의 학문적 논거를 지녔고,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군을 들 수 있다. 권근과 하륜 등이 그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제명까지 살지 못하고 타살될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권신들에 대항해 반원투쟁反元鬪爭을 벌이다 곤장을 맞고 귀양 가는 도중에 사망하는가 하면, 말년에 탐학貪虐과 폐정弊政을 일삼았던 신돈을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는 등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 비명횡사했고, 이숭인은 정몽주와 같은 온건한 개혁 노선을 걸으면서도 조선 건국 후까지 생존했지만, 고려의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탄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또 위화도회군을 적극 지지한 윤소종은 정도전·조준 등과 함께 개혁에 참여하면서 고려 말부터 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개혁에 앞장섰으나 조선의 개국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개국 1년 만에 병사하는가 하면, 김구용은 정도전과 함께 반원 투쟁을 하다 유배된 후 풀려났으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병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의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룬 뒤 7년 만에 정도전은 절친한 동지 남은과 함께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반면 하륜과 권근은 역성혁명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태조에 의해 발탁되어 중용되었고, 그 후 이방원을 지원하여 살아남아 정도전과 교유했던 인물 가운데 드물게 태종 대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정도전의 뒤를 이어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정도전을 비롯하여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도전의 오랜 친구들은 대부분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 책 『정도전의 시대를 읽다』가 엮어낸 정도전의 시대와 정도전 그리고 그와 관련한 인물군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는 것은 혼돈의 시대에 실천적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삶인지 다시 한번 되새겨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 읽기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격동의 시대 ‘진정한 정치인’ 정도전을 만나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살았던 정도전은 어떠한 역사적 인물들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폭넓은 분야에서 깊은 족적을 남겨 놓았다. 많은 저자들이 그에 관한 저작물을 펴내고 또 다양한 평가를 내놓았으면서도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일까, 저자 김진섭은 “정도전은 한마디로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그 질문에 “정도전은 ‘진정한 정치인’이다”고 답하면서, 세상에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실천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준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태어난 정도전은 공민왕 12년(1363) 22세에 관직에 나아가 관직 생활을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상을 치르면서 정몽주가 소개해준 『맹자』를 접했다. 『맹자』는 정도전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맹자의 역사순환 발전론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머릿속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10여 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정도전은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도 않고 바른말을 하다가 쫓겨났고 바른말을 좋아하다가 귀양 왔지만, 목숨은 구했으니 나라에 고마워해야 하고,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면 화를 면하게 될 것이다”라며, 아무런 대책도 없이 권력에 저항했던 자신의 무모한 행동에 대해 반성한다. 이는 곧 고뇌하며 일상의 삶에 충실하려는 스스로를 만나면서 진정한 선비로 거듭나는 과정이었다.

정도전은 정치의 핵심은 일상에서 백성이 희망을 찾는 것이며, 백 번의 논쟁보다 백성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장 정치가 중요하다고 여겼으며, 이는 고매한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편히 먹고사는 일상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사상으로 무장한 정도전은 무력 기반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마침내 이성계와 극적인 만남을 이루었다.

조선을 건설하는 데 태조의 군사력이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태조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사대부들의 힘이 없었다면 조선의 개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정도전이 있었다. 정도전을 혁명가이면서 경세가였고, 새로운 왕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이론가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체제의 탄생을 시도한 진보적 정치가이자 사상가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저술 작업을 통해 조선을 설계하면서 경세제민經世濟民과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필요한 병학·의학·지리·산술·천문·음양학 등 잡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그의 저술들은 ‘민본주의에 기반하여 재상 중심의 권력 구조와 『주례』에 바탕을 둔 국가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경제구조 그리고 한당漢唐의 군현제도와 군사제도를 절충했다’는 평가를 받는 등, 한 사람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국가 경영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정도전과 사림들 사이에는 동일하게 추구하는 정치적 지향점이 있었다. 사림들 역시 정도전이 꿈꾸었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하는 신권정치를 계승하여 왕권에 대한 신권의 강화를 주장했다. 심지어 사색 당쟁으로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에는 ‘국왕의 나라’가 아닌 ‘사대부의 나라’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사림은 이러한 정치사상의 뿌리를 정도전에게서 찾지 않았다. 그들에게 정도전은 여전히 체제 변혁을 시도한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그는 태조 즉위 6년 차가 될 때까지 조선의 건국 이념을 구축하면서 법률과 제도를 만들고 인재 발굴과 중앙과 지방의 관리 등용 등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열정을 쏟았으며, 사병을 혁파하는 등 군제 개혁에 나서서 재상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갖추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다음 수순은 경제 개혁의 틀을 완성하기 위한 전제 개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도전은 전제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고, 태종이 즉위 초부터 과전법(1401)을 개정하고 관련 법률과 제도 개선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태종도 전제 개혁의 완성이 신생국 조선의 물적 기반을 구축하는 혁명의 완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상 세상을 바꾼 위인들은 많지만, 정도전처럼 정치·경제·국방·사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변화와 혁명을 주도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삶은 60년을 넘지 못했지만, 600년이 지난 오늘날 그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의 말처럼, 지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우리는 변화를 현명하게 맞아들일 수 있는 누군가의 인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정도전을 되돌아보는 일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어두운 서고書庫에 보관되어 있던 지난 역사를 다시 꺼내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그를 통해 이상과 모순된 현실 앞에서 분노와 비애감으로 자신을 소진시킨 것이 아니라,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현실정치에 펼쳐 보였던 열정과 의지를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조선을 세워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역사에 오래 남는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을 통해 이러한 의미가 전달되었으면 한다. 이 책 곳곳에 정도전이 틈틈이 남긴 시부와 더불어 그의 정치사상이 담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비롯해 『경제문감經濟文鑑』 등과 관련한 이야기들에서 왜 그가 조선 역사에서 철저하게 외면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진지한 역사 읽기 경험이 되었으면 한다.

‘실천이 전제되지 않은 사상은 죽은 것이 다름없다’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정도전의 민본주의 정치사상은 “백성을 위하고(爲民), 사랑하고(愛民), 존중하고(重民), 기르고(牧民), 편안하게(安民)” 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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