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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1세기 김정호’, 도보답사의 선구자이자 문화사학자
《신정일의 신新 택리지》 ‘산과 강의 풍수’ 편 출간!
대한민국 도보답사의 선구자 신정일 작가가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걸으며 완성한 도보답사기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의 열 번째 책이자 완결편. 유려하기로 유명한 한반도의 산천을 우리 선인들은 어떻게 보고 느꼈을까? 산은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고 들어가 노닐기도 하는 곳이었다. 산기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산을 ‘오르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들어가 사는’ 삶의 터전으로 여겼다. 옛 사대부들은 산천을 유람하면서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때 ‘등반기’나 ‘등산기’라고 하지 않고 ‘산을 뵙는다’는 뜻의 ‘근참’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산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지는 정신적·물질적 의미를 짐작하게 할 만하다. 산이 있다면 ‘물’도 중요하다. 산에서 시작하는 강줄기들은 생명의 근간을 이루고 지역과 물산의 경계를 나눴다.
산과 강은 곧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이루는 근원적 개념이다. 신정일 작가는 한반도의 산과 강의 흐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특징과 내력, 역사와 사람 이야기를 소개한다. 무엇보다 산과 강이 우리 정신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신정일의 신新 택리지》 ‘산과 강의 풍수’ 편 출간!
대한민국 도보답사의 선구자 신정일 작가가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걸으며 완성한 도보답사기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의 열 번째 책이자 완결편. 유려하기로 유명한 한반도의 산천을 우리 선인들은 어떻게 보고 느꼈을까? 산은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고 들어가 노닐기도 하는 곳이었다. 산기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산을 ‘오르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들어가 사는’ 삶의 터전으로 여겼다. 옛 사대부들은 산천을 유람하면서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때 ‘등반기’나 ‘등산기’라고 하지 않고 ‘산을 뵙는다’는 뜻의 ‘근참’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산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지는 정신적·물질적 의미를 짐작하게 할 만하다. 산이 있다면 ‘물’도 중요하다. 산에서 시작하는 강줄기들은 생명의 근간을 이루고 지역과 물산의 경계를 나눴다.
산과 강은 곧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이루는 근원적 개념이다. 신정일 작가는 한반도의 산과 강의 흐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특징과 내력, 역사와 사람 이야기를 소개한다. 무엇보다 산과 강이 우리 정신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목차
1 산수 : 만민이 우러러보는 우리 산하
산과 물을 논하는 이유 | 우리 역사 속 산 | 산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 산의 나라 조선 | 살 만한 곳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
2 백두대간에 자리 잡은 여덟 개 명산 : 백두산이 오지랖을 벌리고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 백두대간은 무엇인가? | 우리 민족의 진산 백두산 | 천리천평 | 우리나라의 지형 | 명에 대한 의리 내지는 사대주의 | 금강산 일만이천봉 | 아래를 굽어보면 시냇물이 파랗고 | 왼쪽을 보아도 그림, 오른쪽을 보아도 그림 |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 설악산 | 절세의 미인이 숨어 있는 설악산 | 오대산 월정사 | 우리 민족의 영산 태백산 | 작은 백산에서 유래한 소백산 | 신선이 있어야 이름이 날 수 있고 | 송시열과 화양구곡 | 신선들이 술잔을 나르던 파천
3 속리산에서 지리산으로 백두대간은 이어지고 : 높다란 사면 푸른 연꽃 같은 봉우리
국보급 문화유산이 즐비한 법주사와 속리산 | 속리산 너머 추풍령으로 | 민족의 성산 지리산 | 풍년과 흉년을 모르는 지리산 | 깨달은 사람이 들어가는 산 | 실상사와 백장암
4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명산 : 백두산 일지맥이 동으로 흘러나려
귀신의 솜씨로 빚은 칠보산 | 단군이 태어난 석굴이 있다는 묘향산 | 휴정과 유정이 수도한 묘향산 | 가야산에는 정견모주 신이 산다 |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 | 단정하면서 밝고 엄숙한 청량산 | 조선의 4대 명산 구월산 |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산
5 사람들이 가까이하여 즐겨 찾는 산 : 한가함을 틈타서 마음 놓고 등반했노라
바깥변산과 안변산 | 큰 산이 첩첩이 솟았고 | 일몰이 아름다운 선운산 낙조대 | 광주의 진산 무등산 | 산 우는 소리가 수십 리까지 들리고
6 누구에게나 오름을 허락하는 산 : 마음 맑게 하는 곳 여기에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 천관산에는 봉수대가 남아 | 구산선문의 큰 절 태안사 | 송광사와 화엄사의 본산이던 태안사 | 팔공산 자락에 쌓은 가산산성 | 영암사가 있는 황매산 | 거문고를 닮은 비슬산 | 운문산과 가지산 | 주왕의 전설이 서린 주왕산 | 청룡사와 남사당패 |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 |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냈던 명산 | 일곱 개의 명당자리가 있는 칠갑산 | 암마이산과 수마이산 | 경기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문산 | 입암산 아래 대흥리
7 바다에 인접한 명산 : 솔밭처럼 우뚝한 하늘 남쪽의 아름다운 곳
신선이 노니는 백록담 | 아름다운 섬나라 남해 | 감은사와 문무왕 이야기 | 다도해를 바라보는 두륜산 | 백련산 자락의 다산초당 | 그 아름다운 고군산군도 | 소정방이 머물렀던 덕적도 | 울릉도와 독도 | 다도해와 태안반도
8 나라 안에 이름난 절 :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 중일세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 | 자장법사가 창건한 큰 절 통도사 | 팔공산 자락의 큰 절 동화사 | 거조암에는 오백나한이 | 도선이 출생한 절 | 모악산 아래에 있는 금산사 | 민족 사상의 요람 | 조계산 자락의 송광사와 선암사 | 지공화상이 창건한 회암사 | 능가사가 있는 팔영산 | 천불천탑이 있는 운주사 |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 조선 500년 사직의 요람 북한산과 서울의 산들 | 계룡산 계곡물은 쪽빛처럼 푸르고 | 《정감록》의 십승지지과 호남 4대 명당 | 엄연하고 따뜻한 산, 계룡산 | 조선 전기의 도읍지 신도안
9 나라 안의 여러 고개 :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고개 이야기 | 대관령 너머에 동해의 푸른 바다가 | 소백산 아랫자락에 있는 큰 고개 죽령 | 사연 없는 고개가 어디 있으랴만
10 사람의 길, 땅의 길 : 길 끝에서 언제나 또 다른 길이 시작된다
길이란 무엇인가? | 사람의 길은 하늘의 길에 따르는 것 | 길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 도로는 물길을 대신하고 | 사라진 역사 속의 옛길 | 세상의 어느 누가 불행에서 안전할까? | 도보 답사에 필요한 것들 | 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 |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 우리나라의 옛 주막 | 걷기,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만나는 출구 | 누구나 걷고 싶은 숲길 | 빠름에서 느림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 | 우리가 걸어가야 할 동해 해파랑 길
산과 물을 논하는 이유 | 우리 역사 속 산 | 산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 산의 나라 조선 | 살 만한 곳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
2 백두대간에 자리 잡은 여덟 개 명산 : 백두산이 오지랖을 벌리고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 백두대간은 무엇인가? | 우리 민족의 진산 백두산 | 천리천평 | 우리나라의 지형 | 명에 대한 의리 내지는 사대주의 | 금강산 일만이천봉 | 아래를 굽어보면 시냇물이 파랗고 | 왼쪽을 보아도 그림, 오른쪽을 보아도 그림 |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 설악산 | 절세의 미인이 숨어 있는 설악산 | 오대산 월정사 | 우리 민족의 영산 태백산 | 작은 백산에서 유래한 소백산 | 신선이 있어야 이름이 날 수 있고 | 송시열과 화양구곡 | 신선들이 술잔을 나르던 파천
3 속리산에서 지리산으로 백두대간은 이어지고 : 높다란 사면 푸른 연꽃 같은 봉우리
국보급 문화유산이 즐비한 법주사와 속리산 | 속리산 너머 추풍령으로 | 민족의 성산 지리산 | 풍년과 흉년을 모르는 지리산 | 깨달은 사람이 들어가는 산 | 실상사와 백장암
4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명산 : 백두산 일지맥이 동으로 흘러나려
귀신의 솜씨로 빚은 칠보산 | 단군이 태어난 석굴이 있다는 묘향산 | 휴정과 유정이 수도한 묘향산 | 가야산에는 정견모주 신이 산다 |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 | 단정하면서 밝고 엄숙한 청량산 | 조선의 4대 명산 구월산 |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산
5 사람들이 가까이하여 즐겨 찾는 산 : 한가함을 틈타서 마음 놓고 등반했노라
바깥변산과 안변산 | 큰 산이 첩첩이 솟았고 | 일몰이 아름다운 선운산 낙조대 | 광주의 진산 무등산 | 산 우는 소리가 수십 리까지 들리고
6 누구에게나 오름을 허락하는 산 : 마음 맑게 하는 곳 여기에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 천관산에는 봉수대가 남아 | 구산선문의 큰 절 태안사 | 송광사와 화엄사의 본산이던 태안사 | 팔공산 자락에 쌓은 가산산성 | 영암사가 있는 황매산 | 거문고를 닮은 비슬산 | 운문산과 가지산 | 주왕의 전설이 서린 주왕산 | 청룡사와 남사당패 |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 |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냈던 명산 | 일곱 개의 명당자리가 있는 칠갑산 | 암마이산과 수마이산 | 경기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문산 | 입암산 아래 대흥리
7 바다에 인접한 명산 : 솔밭처럼 우뚝한 하늘 남쪽의 아름다운 곳
신선이 노니는 백록담 | 아름다운 섬나라 남해 | 감은사와 문무왕 이야기 | 다도해를 바라보는 두륜산 | 백련산 자락의 다산초당 | 그 아름다운 고군산군도 | 소정방이 머물렀던 덕적도 | 울릉도와 독도 | 다도해와 태안반도
8 나라 안에 이름난 절 :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 중일세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 | 자장법사가 창건한 큰 절 통도사 | 팔공산 자락의 큰 절 동화사 | 거조암에는 오백나한이 | 도선이 출생한 절 | 모악산 아래에 있는 금산사 | 민족 사상의 요람 | 조계산 자락의 송광사와 선암사 | 지공화상이 창건한 회암사 | 능가사가 있는 팔영산 | 천불천탑이 있는 운주사 |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 조선 500년 사직의 요람 북한산과 서울의 산들 | 계룡산 계곡물은 쪽빛처럼 푸르고 | 《정감록》의 십승지지과 호남 4대 명당 | 엄연하고 따뜻한 산, 계룡산 | 조선 전기의 도읍지 신도안
9 나라 안의 여러 고개 :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고개 이야기 | 대관령 너머에 동해의 푸른 바다가 | 소백산 아랫자락에 있는 큰 고개 죽령 | 사연 없는 고개가 어디 있으랴만
10 사람의 길, 땅의 길 : 길 끝에서 언제나 또 다른 길이 시작된다
길이란 무엇인가? | 사람의 길은 하늘의 길에 따르는 것 | 길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 도로는 물길을 대신하고 | 사라진 역사 속의 옛길 | 세상의 어느 누가 불행에서 안전할까? | 도보 답사에 필요한 것들 | 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 |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 우리나라의 옛 주막 | 걷기,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만나는 출구 | 누구나 걷고 싶은 숲길 | 빠름에서 느림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 | 우리가 걸어가야 할 동해 해파랑 길
책 속으로
단군신화가 산에서 시작되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의 발상지가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니산이나 태백산과 같은 높은 산정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 백제 때는 산의 신에 먼저 제사했고 신라 때부터는 삼신산과 오악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삼신산은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해동삼신산’을 본떠서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으로 정했다. 그리고 오악은 동서남북과 중앙 지역을 대표하는 산으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는 국가가 관장했다. 동악에 토함산, 서악에 계룡산, 북악에 태백산, 남악에 지리산, 중앙에 부악父岳(팔공산)을 오악으로 정했다. 고려 때 이르러서는 지리산과 삼각산(북한산), 송악산, 비백산을 사악신四嶽神으로 지정하여 제사를 지냈고 덧붙여 치악산, 죽령산, 주흘산, 금성산, 한라산, 오관산, 마니산, 감악산, 백두산 등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우리 역사 속 산」중에서
삼지연에서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끝없이 펼쳐진 잎갈나무숲으로 장관이다. 그리고 잎갈나무숲이 끝나면서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지는데,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후련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천생 나라 하나 만들게 생긴 땅이다’, ‘그 벌 하나만 해도 나라 하나를 만들기에는 너무 넓겠다’라는 말을 들었던 곳이 천리천평이다.
허항령(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 경계에 있는 고개)에 올라서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천리천평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종일 가도 막막하기 그지없는 그 평원도 전해 내려오는 천평의 한자락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백두산 주변에서는 조선과 청 사이에 분쟁 사건도 자주 일어났다. 백두산을 자신들의 영산이라며 귀속을 주장해 오던 청은 숙종 38년(1712) 청 차사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을 보내 국경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이에 조선은 접반사接伴使(외국 대표를 맞는 조정의 대표) 박권朴權을 보냈다. 이때 박권은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 자신이 조선의 접반사 군관 이의복과 감사군관 조태상, 통관 김응헌 등만을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동남쪽으로 4킬로미터 지점인 높이 2200미터 고지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
---「천리천평」중에서
태백산과 선달산을 지난 백두대간은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에서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로 넘어가는 고치령을 지난 뒤 소백산에 이른다. 조선 중기 천문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는 소백산을 보고 “허리 위로는 돌이 없고, 멀리서 보면 웅대하면서도 살기가 없고,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이라며 많은 사람을 살릴 산이라고 칭송했다. 소백산은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사이에 있는 산이다. 태백산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대간에 있는 소백산은 높이가 1440미터에 이르며 북동쪽에 있는 국망봉과 험준한 연봉을 이룬다. 북서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이른바 고위 평탄면을 이루는데, 그 위를 국망천이 흘러 남한강에 유입된다. 동남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급하다.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죽계천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소백산小白山의 ‘백산’은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ㅂㆍㄺ’에서 유래하는데, 소백산은 여러 백산 가운데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다. 예로부터 신성시한 산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의 국경을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소백산 남서쪽으로는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연화봉이 있고 이곳에서 약 4킬로미터 정도 더 내려가면 제2연화봉에 이른다. 이 산의 남쪽 4킬로미터 정도에 5번 국도와 중앙선 철도가 통과하는 죽령이 있다. 제2연화봉 동남쪽 기슭에는 선덕여왕 12년(643)에 두운이 창건했다는 유명한 희방사와 내륙에서 가장 큰 폭포인 희방폭포가 있다.
---「작은 백산에서 유래한 소백산」중에서
지리산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숨어들었던 곳이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이들은 병년과 흉년이 없는 피난과 보신의 땅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에는 혁명을 꿈꾸다 실패한 동학도들이 찾아와 후일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들은 지리산에 들어와 1차, 2차, 3차 의병 전쟁의 주역이 되었고 1923년에는 진주 형평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기도 했다. 이들 중 김단야 같은 사람은 조선공산당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이 지리산에 들어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나라 지리산은 스페인 내전 당시 파르티잔(빨치산)들이 활동했던 무대와는 판연히 달랐는데도 지리산으로만 가면 살 길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수없이 들어왔다가 죽고 만 한이 서린 산이다. 지리산은 한민족의 어머니와도 같은 산, 그 이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풍년과 흉년을 모르는 지리산」중에서
가야산 북서쪽에 자리한 수도산修道山에는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의 일화가 서려 있다. 도선이 청암사를 창건한 후 수도처를 찾아 수도산 내를 헤매다가 지금의 수도암 터를 발견하고 어찌나 마음이 흡족했는지 7일 밤낮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명산 중에서도 절이 있는 산이 좋은 산이자 좋은 터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 산에 수도암이 있다. 조선 숙종 때 학자 우담愚潭 정시한은 《산중일기》에서 수도암을 “암자 터는 평탄하고 바른 것이 마치 가야산으로 책상을 삼은 듯하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흰 구름이 왔다갔다 하여 무상한 느낌을 주는데, 앞문을 열어젖혀 놓고 종일토록 바라보니 무궁한 것이 실로 절경이었다”라고 했다.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중에서
곳곳에 기암괴석이 많고 정상 부근에 바위들이 비죽비죽 솟아 있는데 그 바위들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처럼 보여서 천관산天冠山이라 부른다. 이 산을 대덕이나 관산에 사는 사람들은 그저 큰 산이라고 부르는데, ‘큰 산에 비 몰려온다’라거나 ‘큰 산으로 소풍 간다’ 또는 ‘큰 산이 울었다’라고 말한다. 산의 서남쪽에 위치한 대덕 사람들과 산의 동쪽에 위치한 관산 사람들 사이에는 이 산의 정기를 독점해서 누리고자 다툼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날이 가물어 기우제를 올릴 때면 심한 편싸움이 벌어지는데 고을마다 서로 번갈아 기우제를 지내고는 산중의 분묘를 파헤쳤다. 큰 산에 누군가가 묘를 잘못 써서 화기를 돋워 수액을 말려 버린 탓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내장산, 월출산, 변산, 두륜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천관산은 가을에 억새숲이 절경을 이루어 해마다 가을철에는 천관산억새 축제가 열린다.
---「천관산에는 봉수대가 남아」중에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호남에서 무술을 연마할 때 산 모양이 말의 귀와 비슷하다 하여 마이라 이름 지었다고도 하고 그의 아들 태종이 지었다고도 한다. 높이 667미터의 마이산은 자웅의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으며 용암동문이라 새겨진 암벽 사이로 들어서면 기암괴석이 뒤엉켜 기기묘묘한 형상을 연출하며 절경을 펼쳐 놓는다. 마이산은 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 때는 용출봉, 조선 전기에는 속금산이라 부르다가 태종 때 이르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이산의 특징과 매력은 기묘한 형태로 갖가지 아름다운 형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수마이봉,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하는데 수마이봉 중턱에 화엄굴이 있고, 이 굴속에서 맑은 약수가 솟아올라 그 물을 마시면 옥동자를 잉태한다는 전설이 있다. 서쪽의 암마이봉 절벽 아래에는 100여 기의 돌탑을 쌓은 유명한 마이산 탑사가 있는데, 이 절의 탑들은 약 90년 전에 이 고장 사람 이갑용이 발원하여 전국 명산의 돌을 몇 개씩 날라다 이곳의 작은 바윗돌과 함께 쌓은 것이다. 이갑용은 임실 둔덕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부모상을 당하자 묘 옆에 움막을 치고 3년간 시묘했다.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중에서
토함산의 물줄기와 함월산의 물줄기가 만나서 동해로 접어드는 대종천에는 문무왕의 숨결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또 하나 숨겨진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이 침략해 왔을 때 황룡사 구층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이 불타고 말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제35대 경덕대왕이 천보 13년 갑오(754)에 황룡사 종을 주조했다. 길이가 1장 3치였으며, 두께가 9치였고 무게가 49만 7581근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황룡사에 있던 종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에밀레종보다 네 배쯤 큰 종이었다. 황룡사 종은 몽골군이 가져가려다 폭풍우를 만나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큰 종이 지나간 하천이라고 해서 대종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뒤로도 풍랑이 심하게 일면 이곳에서 대종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해녀 등 여러 사람이 탐색에 나섰지만 지금껏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로는, 대종천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황룡사 종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왜군이 대종천에 빠뜨린 감은사 종이 우는 소리라고도 한다.
---「감은사와 문무왕 이야기」중에서
팔영산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중국의 위(한 왕조의 뒤를 이어 조비가 220년에 세운 나라) 왕이 세수를 하려고 물을 받았더니 그 대야에 여덟 개의 봉우리가 비쳤다. 그래서 신하들을 보내 찾게 하여 발견한 산이 팔영산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팔전산이라 부르던 것을, 그 후로 그림자 영 자로 바꾸어 팔영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여덟 봉우리가 병풍같이 서 있는데, 신령한 기운이 뭉친 산이라고 하여 한때 신흥종교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팔영산에는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전한다. 한편 대한제국 말에는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고 광복 후에는 빨치산의 은신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팔영산 봉우리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팔영산 산자락에는 능가사뿐 아니라 팔영산자연휴양림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통역관으로 공을 세워 재상에 올랐던 류충신의 피난굴과 신선대, 강산폭포 등 볼거리가 많다.
---「능가사가 있는 팔영산」중에서
백두대간을 벗어난 고개 중 충청도 지방에서 이름난 고개가 충주와 제천 간의 박달재다. 소 장사 나간 아들에게 주기 위해 끓인 묵을 가지고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와 기다렸다는 눈물겨운 사연을 지닌 고개가 박달재다. 장호원과 충주 간의 임오치, 안성과 병천 간의 부수문이고개, 천안과 공주 간의 차령, 공주와 청양 간의 한치 등이 이름난 고개다.
특히 고개는 도둑들의 근거지였다. 여덟 명이 조를 짜서 넘었다는 대구의 팔조령, 길이 험하고 도둑이 들끓어서 60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는 남덕유산 자락의 육십령, 100명이 모여 넘었다는 구미시 장천면의 백곡고개, 1000명이 모여 넘었다는 인천의 천명이고개 그리고 도둑이 많아서 1만 명이 모여서 넘었다는 부여 홍산의 만인재가 도둑에 얽힌 재미있는 유래를 가진 고개들이다.
---「소백산 아랫자락에 있는 큰 고개 죽령」중에서
계룡산 남쪽 마을의 신도안은 조선 건국 초기에 도읍으로 정해졌던 곳이다. 궁궐을 짓기 시작했는데, 조운의 불편 등 왕도로서 적합지 않다는 결론에 따라 중단되었다. 지금도 부남리에는 그때 초석으로 다듬었던 암석이 94기나 남아 있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일대 지명들이 동문거리, 서문거리 등으로 남아 있다.
계룡산 신도안은 크게 보아서 서울과 같은 득수국과는 거리가 멀다. 신도안을 두고 산태극수태극과 회룡고조라는 말을 자주 한다.이는 모두 계룡산과 그 주변 산천의 형세를 두고 말하는 형국론적 해석이다. 진안의 마이산과 덕유산의 맥이 무주, 영동, 대전, 회덕을 거쳐 공주로 이어지고 그 맥이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의 경계를 따라 이어져 태극 모양을 이룬다고 하며, 용세가 머리를 돌려 근원을 돌아보는 고조의 형세라는 것이다. 수류는 금강 물줄기가 대전, 공주, 부여, 강경을 거쳐 금강 하구인 군산으로 빠지면서 용추골 용동리의 명당수가 청룡의 뒤를 돌아 우회하면서 금강에 합류하는 거대한 태극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수태극이 된다.
---「우리 역사 속 산」중에서
삼지연에서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끝없이 펼쳐진 잎갈나무숲으로 장관이다. 그리고 잎갈나무숲이 끝나면서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지는데,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후련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천생 나라 하나 만들게 생긴 땅이다’, ‘그 벌 하나만 해도 나라 하나를 만들기에는 너무 넓겠다’라는 말을 들었던 곳이 천리천평이다.
허항령(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 경계에 있는 고개)에 올라서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천리천평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종일 가도 막막하기 그지없는 그 평원도 전해 내려오는 천평의 한자락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백두산 주변에서는 조선과 청 사이에 분쟁 사건도 자주 일어났다. 백두산을 자신들의 영산이라며 귀속을 주장해 오던 청은 숙종 38년(1712) 청 차사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을 보내 국경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이에 조선은 접반사接伴使(외국 대표를 맞는 조정의 대표) 박권朴權을 보냈다. 이때 박권은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 자신이 조선의 접반사 군관 이의복과 감사군관 조태상, 통관 김응헌 등만을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동남쪽으로 4킬로미터 지점인 높이 2200미터 고지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
---「천리천평」중에서
태백산과 선달산을 지난 백두대간은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에서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로 넘어가는 고치령을 지난 뒤 소백산에 이른다. 조선 중기 천문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는 소백산을 보고 “허리 위로는 돌이 없고, 멀리서 보면 웅대하면서도 살기가 없고,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이라며 많은 사람을 살릴 산이라고 칭송했다. 소백산은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사이에 있는 산이다. 태백산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대간에 있는 소백산은 높이가 1440미터에 이르며 북동쪽에 있는 국망봉과 험준한 연봉을 이룬다. 북서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이른바 고위 평탄면을 이루는데, 그 위를 국망천이 흘러 남한강에 유입된다. 동남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급하다.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죽계천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소백산小白山의 ‘백산’은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ㅂㆍㄺ’에서 유래하는데, 소백산은 여러 백산 가운데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다. 예로부터 신성시한 산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의 국경을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소백산 남서쪽으로는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연화봉이 있고 이곳에서 약 4킬로미터 정도 더 내려가면 제2연화봉에 이른다. 이 산의 남쪽 4킬로미터 정도에 5번 국도와 중앙선 철도가 통과하는 죽령이 있다. 제2연화봉 동남쪽 기슭에는 선덕여왕 12년(643)에 두운이 창건했다는 유명한 희방사와 내륙에서 가장 큰 폭포인 희방폭포가 있다.
---「작은 백산에서 유래한 소백산」중에서
지리산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숨어들었던 곳이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이들은 병년과 흉년이 없는 피난과 보신의 땅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에는 혁명을 꿈꾸다 실패한 동학도들이 찾아와 후일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들은 지리산에 들어와 1차, 2차, 3차 의병 전쟁의 주역이 되었고 1923년에는 진주 형평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기도 했다. 이들 중 김단야 같은 사람은 조선공산당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이 지리산에 들어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나라 지리산은 스페인 내전 당시 파르티잔(빨치산)들이 활동했던 무대와는 판연히 달랐는데도 지리산으로만 가면 살 길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수없이 들어왔다가 죽고 만 한이 서린 산이다. 지리산은 한민족의 어머니와도 같은 산, 그 이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풍년과 흉년을 모르는 지리산」중에서
가야산 북서쪽에 자리한 수도산修道山에는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의 일화가 서려 있다. 도선이 청암사를 창건한 후 수도처를 찾아 수도산 내를 헤매다가 지금의 수도암 터를 발견하고 어찌나 마음이 흡족했는지 7일 밤낮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명산 중에서도 절이 있는 산이 좋은 산이자 좋은 터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 산에 수도암이 있다. 조선 숙종 때 학자 우담愚潭 정시한은 《산중일기》에서 수도암을 “암자 터는 평탄하고 바른 것이 마치 가야산으로 책상을 삼은 듯하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흰 구름이 왔다갔다 하여 무상한 느낌을 주는데, 앞문을 열어젖혀 놓고 종일토록 바라보니 무궁한 것이 실로 절경이었다”라고 했다.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중에서
곳곳에 기암괴석이 많고 정상 부근에 바위들이 비죽비죽 솟아 있는데 그 바위들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처럼 보여서 천관산天冠山이라 부른다. 이 산을 대덕이나 관산에 사는 사람들은 그저 큰 산이라고 부르는데, ‘큰 산에 비 몰려온다’라거나 ‘큰 산으로 소풍 간다’ 또는 ‘큰 산이 울었다’라고 말한다. 산의 서남쪽에 위치한 대덕 사람들과 산의 동쪽에 위치한 관산 사람들 사이에는 이 산의 정기를 독점해서 누리고자 다툼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날이 가물어 기우제를 올릴 때면 심한 편싸움이 벌어지는데 고을마다 서로 번갈아 기우제를 지내고는 산중의 분묘를 파헤쳤다. 큰 산에 누군가가 묘를 잘못 써서 화기를 돋워 수액을 말려 버린 탓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내장산, 월출산, 변산, 두륜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천관산은 가을에 억새숲이 절경을 이루어 해마다 가을철에는 천관산억새 축제가 열린다.
---「천관산에는 봉수대가 남아」중에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호남에서 무술을 연마할 때 산 모양이 말의 귀와 비슷하다 하여 마이라 이름 지었다고도 하고 그의 아들 태종이 지었다고도 한다. 높이 667미터의 마이산은 자웅의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으며 용암동문이라 새겨진 암벽 사이로 들어서면 기암괴석이 뒤엉켜 기기묘묘한 형상을 연출하며 절경을 펼쳐 놓는다. 마이산은 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 때는 용출봉, 조선 전기에는 속금산이라 부르다가 태종 때 이르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이산의 특징과 매력은 기묘한 형태로 갖가지 아름다운 형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수마이봉,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하는데 수마이봉 중턱에 화엄굴이 있고, 이 굴속에서 맑은 약수가 솟아올라 그 물을 마시면 옥동자를 잉태한다는 전설이 있다. 서쪽의 암마이봉 절벽 아래에는 100여 기의 돌탑을 쌓은 유명한 마이산 탑사가 있는데, 이 절의 탑들은 약 90년 전에 이 고장 사람 이갑용이 발원하여 전국 명산의 돌을 몇 개씩 날라다 이곳의 작은 바윗돌과 함께 쌓은 것이다. 이갑용은 임실 둔덕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부모상을 당하자 묘 옆에 움막을 치고 3년간 시묘했다.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중에서
토함산의 물줄기와 함월산의 물줄기가 만나서 동해로 접어드는 대종천에는 문무왕의 숨결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또 하나 숨겨진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이 침략해 왔을 때 황룡사 구층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이 불타고 말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제35대 경덕대왕이 천보 13년 갑오(754)에 황룡사 종을 주조했다. 길이가 1장 3치였으며, 두께가 9치였고 무게가 49만 7581근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황룡사에 있던 종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에밀레종보다 네 배쯤 큰 종이었다. 황룡사 종은 몽골군이 가져가려다 폭풍우를 만나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큰 종이 지나간 하천이라고 해서 대종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뒤로도 풍랑이 심하게 일면 이곳에서 대종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해녀 등 여러 사람이 탐색에 나섰지만 지금껏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로는, 대종천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황룡사 종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왜군이 대종천에 빠뜨린 감은사 종이 우는 소리라고도 한다.
---「감은사와 문무왕 이야기」중에서
팔영산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중국의 위(한 왕조의 뒤를 이어 조비가 220년에 세운 나라) 왕이 세수를 하려고 물을 받았더니 그 대야에 여덟 개의 봉우리가 비쳤다. 그래서 신하들을 보내 찾게 하여 발견한 산이 팔영산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팔전산이라 부르던 것을, 그 후로 그림자 영 자로 바꾸어 팔영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여덟 봉우리가 병풍같이 서 있는데, 신령한 기운이 뭉친 산이라고 하여 한때 신흥종교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팔영산에는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전한다. 한편 대한제국 말에는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고 광복 후에는 빨치산의 은신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팔영산 봉우리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팔영산 산자락에는 능가사뿐 아니라 팔영산자연휴양림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통역관으로 공을 세워 재상에 올랐던 류충신의 피난굴과 신선대, 강산폭포 등 볼거리가 많다.
---「능가사가 있는 팔영산」중에서
백두대간을 벗어난 고개 중 충청도 지방에서 이름난 고개가 충주와 제천 간의 박달재다. 소 장사 나간 아들에게 주기 위해 끓인 묵을 가지고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와 기다렸다는 눈물겨운 사연을 지닌 고개가 박달재다. 장호원과 충주 간의 임오치, 안성과 병천 간의 부수문이고개, 천안과 공주 간의 차령, 공주와 청양 간의 한치 등이 이름난 고개다.
특히 고개는 도둑들의 근거지였다. 여덟 명이 조를 짜서 넘었다는 대구의 팔조령, 길이 험하고 도둑이 들끓어서 60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는 남덕유산 자락의 육십령, 100명이 모여 넘었다는 구미시 장천면의 백곡고개, 1000명이 모여 넘었다는 인천의 천명이고개 그리고 도둑이 많아서 1만 명이 모여서 넘었다는 부여 홍산의 만인재가 도둑에 얽힌 재미있는 유래를 가진 고개들이다.
---「소백산 아랫자락에 있는 큰 고개 죽령」중에서
계룡산 남쪽 마을의 신도안은 조선 건국 초기에 도읍으로 정해졌던 곳이다. 궁궐을 짓기 시작했는데, 조운의 불편 등 왕도로서 적합지 않다는 결론에 따라 중단되었다. 지금도 부남리에는 그때 초석으로 다듬었던 암석이 94기나 남아 있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일대 지명들이 동문거리, 서문거리 등으로 남아 있다.
계룡산 신도안은 크게 보아서 서울과 같은 득수국과는 거리가 멀다. 신도안을 두고 산태극수태극과 회룡고조라는 말을 자주 한다.이는 모두 계룡산과 그 주변 산천의 형세를 두고 말하는 형국론적 해석이다. 진안의 마이산과 덕유산의 맥이 무주, 영동, 대전, 회덕을 거쳐 공주로 이어지고 그 맥이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의 경계를 따라 이어져 태극 모양을 이룬다고 하며, 용세가 머리를 돌려 근원을 돌아보는 고조의 형세라는 것이다. 수류는 금강 물줄기가 대전, 공주, 부여, 강경을 거쳐 금강 하구인 군산으로 빠지면서 용추골 용동리의 명당수가 청룡의 뒤를 돌아 우회하면서 금강에 합류하는 거대한 태극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수태극이 된다.
---「조선 전기의 도읍지 신도안」중에서
출판사 리뷰
“산과 물을 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사학자 신정일이 두 발로 쓴 ‘우리 산하’ 이야기
대한민국 도보답사의 선구자 신정일 작가가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걸으며 완성한 도보답사기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의 열 번째 책이자 완결편 ‘산과 강의 풍수’ 편이 출간되었다. ‘산하’라는 말이 곧 우리 국토를 의미하듯, 산과 강은 우리 삶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쭉쭉 솟은 산과 그 사이사이 유유히 흐르는 강이 우리가 지금껏 유지해온 줄기찬 생명력을 여실히 나타낸다.
옛사람들은 산과 강을 하나의 유기적 자연 구조로 보고 그 사이에 얽힌 원리를 찾는 것을 지리학과 풍수의 기본으로 두었다. 신경준의 《산경표》는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부터 시작해 큰 강을 낀 13개 산맥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산줄기들의 이름은 대부분 강 이름에서 비롯하는데, 이는 ‘산은 생명의 시작인 강의 산지産地’라는 전통적 지리 인식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산과 그 계곡을 따라 형성된 강이 촌락과 도시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산과 강은 문화적 풍토를 나누는 구분이 되기도 한다. 이 덕에 우리나라에는 각양각색의 산과 강처럼 개성과 매력을 자랑하는 지역색이 형성되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열 번째 책 ‘산과 강의 풍수’ 편에서는 남북으로는 백두대간부터 땅끝 해남까지, 동서로는 울릉도와 안면도까지,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의 한라산 백록담까지 저자의 발길과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을 망라한다. 산과 강의 특색, 풍토, 물산, 역사와 전설 등 곳곳에 얽힌 지리와 사람 이야기를 저자의 꼼꼼한 답사와 풍부한 입담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낸다. 특히 완결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가 길을 걷고 풍류를 즐겨야 하는 이유와 방법까지 친절하게 소개한다.
산이 솟고 강이 굽이치니
사람의 살 자리가 보인다
· ‘명사名士가 명산名山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사대부들은 이 땅의 산천을 유람하면서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고 정신을 수행하며 수많은 글을 남겼다.
· 옛사람들은 우리나라의 2대 명산을 백두산과 금강산으로 보았다. 백두산을 두고 산의 성자聖子라고 했고 금강산을 일컬어 산의 재자才子라고 했다. 즉 성스러운 산의 으뜸은 백두산이고 기이한 산의 으뜸은 금강산으로 본 것이다.
· 설악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골산骨山이다.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과 명승으로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문화유산과 관광 명소가 많다. 설산雪山 또는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花山이라고도 하며, 겨울뿐 아니라 사계절 모두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신라 때는 영산靈山이라 하여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고 또 옛날에는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 지리산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숨어들었던 곳이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동학 농민운동이 끝난 뒤에는 혁명을 꿈꾸다 실패한 동학도들이 찾아와 후일을 도모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이 지리산에 들어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 가야면 소재지에서 해인사 들목에 이르는 홍류동계곡은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이 붉게 흐른다 하여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이 붙었다. 해인사 들목까지 뻗어 내려온 이 골짜기는 그 언저리의 울울창창한 숲도 숲이지만 속세의 소리를 끊어 버릴 기세로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유별난 정취를 안겨 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10권으로 마무리된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는 서울, 경기, 전라, 북한, 제주, 강원, 경상, 충청 편에 이어, ‘명당과 길지’, ‘산과 강의 풍수’ 편까지 우리 땅의 면모와 역사, 인문지리학적 통찰을 담아낸 종합 교양서다. 30년 넘게 전국 곳곳을 직접 밟으며 시리즈를 완성한 신정일 작가의 입담을 통해 독자 역시 생생한 답사 경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호와 이중환이 그랬듯 산천 곳곳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를 담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국토 인문서로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문화사학자 신정일이 두 발로 쓴 ‘우리 산하’ 이야기
대한민국 도보답사의 선구자 신정일 작가가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걸으며 완성한 도보답사기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의 열 번째 책이자 완결편 ‘산과 강의 풍수’ 편이 출간되었다. ‘산하’라는 말이 곧 우리 국토를 의미하듯, 산과 강은 우리 삶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쭉쭉 솟은 산과 그 사이사이 유유히 흐르는 강이 우리가 지금껏 유지해온 줄기찬 생명력을 여실히 나타낸다.
옛사람들은 산과 강을 하나의 유기적 자연 구조로 보고 그 사이에 얽힌 원리를 찾는 것을 지리학과 풍수의 기본으로 두었다. 신경준의 《산경표》는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부터 시작해 큰 강을 낀 13개 산맥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산줄기들의 이름은 대부분 강 이름에서 비롯하는데, 이는 ‘산은 생명의 시작인 강의 산지産地’라는 전통적 지리 인식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산과 그 계곡을 따라 형성된 강이 촌락과 도시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산과 강은 문화적 풍토를 나누는 구분이 되기도 한다. 이 덕에 우리나라에는 각양각색의 산과 강처럼 개성과 매력을 자랑하는 지역색이 형성되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열 번째 책 ‘산과 강의 풍수’ 편에서는 남북으로는 백두대간부터 땅끝 해남까지, 동서로는 울릉도와 안면도까지,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의 한라산 백록담까지 저자의 발길과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을 망라한다. 산과 강의 특색, 풍토, 물산, 역사와 전설 등 곳곳에 얽힌 지리와 사람 이야기를 저자의 꼼꼼한 답사와 풍부한 입담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낸다. 특히 완결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가 길을 걷고 풍류를 즐겨야 하는 이유와 방법까지 친절하게 소개한다.
산이 솟고 강이 굽이치니
사람의 살 자리가 보인다
· ‘명사名士가 명산名山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사대부들은 이 땅의 산천을 유람하면서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고 정신을 수행하며 수많은 글을 남겼다.
· 옛사람들은 우리나라의 2대 명산을 백두산과 금강산으로 보았다. 백두산을 두고 산의 성자聖子라고 했고 금강산을 일컬어 산의 재자才子라고 했다. 즉 성스러운 산의 으뜸은 백두산이고 기이한 산의 으뜸은 금강산으로 본 것이다.
· 설악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골산骨山이다.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과 명승으로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문화유산과 관광 명소가 많다. 설산雪山 또는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花山이라고도 하며, 겨울뿐 아니라 사계절 모두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신라 때는 영산靈山이라 하여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고 또 옛날에는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 지리산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숨어들었던 곳이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동학 농민운동이 끝난 뒤에는 혁명을 꿈꾸다 실패한 동학도들이 찾아와 후일을 도모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이 지리산에 들어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 가야면 소재지에서 해인사 들목에 이르는 홍류동계곡은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이 붉게 흐른다 하여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이 붙었다. 해인사 들목까지 뻗어 내려온 이 골짜기는 그 언저리의 울울창창한 숲도 숲이지만 속세의 소리를 끊어 버릴 기세로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유별난 정취를 안겨 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10권으로 마무리된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는 서울, 경기, 전라, 북한, 제주, 강원, 경상, 충청 편에 이어, ‘명당과 길지’, ‘산과 강의 풍수’ 편까지 우리 땅의 면모와 역사, 인문지리학적 통찰을 담아낸 종합 교양서다. 30년 넘게 전국 곳곳을 직접 밟으며 시리즈를 완성한 신정일 작가의 입담을 통해 독자 역시 생생한 답사 경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호와 이중환이 그랬듯 산천 곳곳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를 담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국토 인문서로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추천평
신정일의 책은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이 땅 구석구석을 누구보다도 많이 걸었던 그의 발이 쓴 국토 교과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덕일 (역사가)
- 이덕일 (역사가)
《택리지》의 현장정신을 계승한 신정일 저자는 30년 넘게 전국의 산천을 답사한 전문가이다. 아마 이중환보다 더 다녔으면 다녔지 못 다닌 것 같지가 않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안 가본 산천이 없다.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우리가 사는 지금, 김정호 선생을 닮은 사내가 있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산을 오르기 시작한 그가 다음은 강 길을 걷더니, 이제는 아예 우리나라 전 국토를 이 잡듯 뒤지며 걷고 또 걷는다. 나는 그를 보며 나는 ‘저 사내 틀림없이 김정호 귀신이 씌었지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한다. 현대판 김정호, 그가 바로 신정일이다.
- 김용택 (시인)
- 김용택 (시인)
신정일 선생은 촌놈 같기도 하고 동학군 같기도 하여 어수룩해 보인다. 그런데 이 ‘촌놈’의 얘기가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신정일은 무당처럼 답사를 한다. 이렇게 혼이 실리고 신명나는 답사의 궤적을 따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 이정만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 이정만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이 책은 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산과 들, 강과 바다, 시간적 과거들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소망들을 책상물림이나 머리로 쥐어짜는 짱구들의 억지 글과는 판이하다. 그는 자기의 발이 도달한 산천 도처에서, 금강의 여러 구비에서 울고 웃는다. 나는 그를 ‘발로 쓰는 민족사상가’라고 부른다.
- 김지하 (시인)
- 김지하 (시인)
우리가 사는 이 땅을 구석구석 밟아보고, 그 땅의 자연과 물산과 그 땅에 심어 놓은 조상의 문화를 직업 체험하면서 죽도록 이 땅을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250년 전에 이중환은 불우한 가운데서 그런 일을 했고, 《택리지》라는 명저를 냈다. 150년 전의 김정호도 이 땅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름다움을 《대동여지도》로 그려냈다. 그런데, 바로 지금 또 하나의 21세기 《택리지》가 나타났다. 세월이 변하고 국토가 변하고, 문화가 바뀐 이 시점에서 당연히 《택리지》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고, 그 일을 신정일이라는 문화사학자가 일구어냈다. 비록 분단의 북쪽 땅을 샅샅이 밟아보지 못하고 일부분만 보았으나 이 책은 왜 우리가 죽도록 이 땅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뜨거운 가슴으로 말하고 있다. 귀중한 현장 사진과 더불어 옛날과 지금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땅과 사람의 대화를 그려낸다.
-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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