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한국사여행 (2024~) [해설서]/6.문화유산 (문화재 궁궐 성곽 능)

[웹북] 경복궁

동방박사님 2024. 8. 3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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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2016 경복궁 전경사진

경복궁 景福宮 / Gyeongbokgung Palace /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의 사적

종목 사적 제117(1963121일 지정)  / 면적 432,703m  /시대 조선 태조 4(1395) / 소유 대한민국 정부 (국가유산청) / 관리 국가유산청 경복궁관리소 / 참고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위치

서울 종로구은(는) 서울특별시 안에 위치해 있다.서울 종로구서울 종로구 / 서울 종로구(서울특별시) / 주소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경복궁

서울시 종로구
서울시

경복궁(景福宮, 영어: Gyeongbokgung Palace)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에 위치한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1395년 창건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3조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외조, 내조, 연조이다. 내조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는데, 궁 밖에서 근정전까지 바깥부터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법궁의 역할을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고종 2)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일제강점기에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와 1926년 조선총독부 건설로 많은 전각들이 철거 혹은 훼손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박물관과 잔디밭을 비롯한 정원이 들어섰다. 이러한 모습은 1945년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전각이 추가로 소실되었다.

1968년 광화문 복원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 계획이 시작되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 2010년 광화문 목조 복원, 2023년 광화문 월대 복원을 비롯하여 각 권역별 주요 전각들을 오는 2045년까지 복원시킬 계획이다.

역사

과거의 모습을 반영한 경복궁도 (서울역사박물관)

태조의 창건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태조 3)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1395)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 경기우도 인부 5,000,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높이 201, 둘레 1813(: 6)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1398)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

전각 확대와 1553년 화재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 11(1411)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고,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세종 8)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경회루는 1474년 보수되고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와(靑瓦)가 올라간다.

명종 8(1553) 9월에는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13]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 동원한 인력은 부역 2,200,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15년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 궁궐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

겸재 정선의 경복궁도(1754년경). 광화문은 기단석축, 경회루는 밑기둥만 남은 채 울창한 숲으로 변한 모습이다.

1592년 선조 때에 임진왜란으로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 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고자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을 난민들이 불태웠다는 것이 실록의 기록인데, 이에 관해 논란이 있다.이기의 송와잡설과 류성룡의 서애집등에서도 '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을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궁중으로 침입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도 약탈했다'는 내용의 기록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조선 백성들이 방화의 주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이는 목격담이 아니라 전해 들은 것으로, 이들이 실제로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것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 4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후였다. 그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5월에 기록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의 전각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기록들로 인해 조선 백성들이 경복궁을 전소시킨 것은 아니었다는 설이 제기된다.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광해군 3년 이후로 경운궁, 지금 덕수궁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이후의 왕들은 대부분 창덕궁에서 정무를 본다.

흥선대원군의 중건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426(고종 2년 음력 42)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같은 해 57(음력 413) 공역이 시작되어 18686월 말에 공사를 마쳤으며, 7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移御)가 이루어져 정무를 개시하였다.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공사를 마치기까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7년이 넘게 걸렸는데, 경복궁에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 홍문관 등 기타 여러 관아가 정비되어 있었다.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그 뒤 몇 차례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 고종 32(1895)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1895년 을미사변),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이 시기 경복궁은 비록 왕이 머무르는 거처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관리되었다. 1903년에는 건물 수리를 위한 금액을 청구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1910년에 한일 강제 병합 이후 경복궁은 훼손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 1915911일부터 1031일까지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노승준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171110, 창덕궁에 큰 화재가 나서 침전이 모두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함원전, 경성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내어 창덕궁의 침전 복구공사 재목으로 썼으며, 1918년부터는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였다. 1916년부터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하였다. 총독부 청사 신축을 두고 조선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인들까지 맹렬히 비난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279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 밖에도 일본인들은 19295월에는 융무당(隆武堂), 융문당(隆文堂) 등을 헐어 한강로에 용광사를 지었으며, 1932년에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 1940년에는 건청궁터에다 미술관(옛 전통공예전시관)을 지으며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

일제 시대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고종 2)에 건설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설한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에 지은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

광복 이후

19658월의 경복궁 전경. 국립박물관이 건설되지 않은 모습이다.

1950년대에 대통령 이승만의 낚시터로 경회루 북서쪽에 조선시대 기법의 목조건물 하향정(荷香亭)을 설치했으며, 19615·16 군사 정변 당시 출동한 30사단 1개 대대병력이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대대로 명칭을 바꾼 뒤 태원전 권역에 머물렀다. 30경비대대는 주둔 후 천막막사를 사용하였으나, 1965년 경복궁 서북쪽 일대에 간이건물 20동과 콘크리트 블록 5동 등 반영구막사를 건설했으며 30경비대대 구조물은 1996년 철수까지 이용되었다. 1963121일 경복궁 일대를 사적 제117호로 지정 보호하였으나, 그 해 10월 문화재관리국이 한 해 3백만원의 입장료 수입으로는 현상유지도 힘들다며 경회루 동쪽 약 7천평의 잔디밭을 헐어 골프장과 휴게시설·식당·주점·잡화점 등의 신축 계획을 발표했고 이는 여론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96618일 정부는 선원전 영역에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한 건물 외형을 조건으로 하는 국립종합박물관 현상설계를 공고했다. 같은 해 착공하여 1972년 완공했으나 고종 2(1865) 건립돼 해방 이후에도 남아있던 건물인 경안당, 대향당, 정훈당(동당) 9106칸의 전각을 철거했다. 19705층 철근콘크리트조로 제2별관을 건설하였으며 후에 문화재연구소로 활용되다 2004년 철거되었다. 1979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후생관을 완공하였고, 문화재관리국청사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구로 이전하면서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궁중유물전시관을 옮겨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82년에는 '역사상 수난의 현장에 대한 교육시설계획' 방침에 따라 건청궁 영역에 한식목조건물로 을미사변기록화전시각(2007년 건청궁 복원 시 철거)을 설치했다.

광화문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63년에 원래 위치쪽에다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였다.

복원사업

1990년에 들어서 2030년 완료를 목표로 경복궁 복원사업을 시작하였으나,2045년으로 계획을 연장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으로 건립되어 공진회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된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1995년 철거하였으며, 1926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청사를 1997년 철거, 1935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1999년 철거,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 수정전 남측의 한식 건물인 무명각을 1998년 철거했다. 다만 조선총독부 박물관 창고로 건립(1915)된 부속 건물은 현재 경복궁 관리소로 사용 중이다. 2010년 기준으로,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이 완료되어 898987m2(2720)의 건물이 복원됐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 500여 동의 약 25% 수준에 도달하였다. 20109월 이후 광화문 권역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2011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이 추진 중으로 1차 복원이 중심 건물들로 경복궁의 뼈대를 갖추는 것이었다면, 2차 복원은 임금의 수라간과 궐내각사 등 많은 부속건물을 지어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1차 복원정비사업

지난 1990년 시작하여 당초 2009년 완료될 예정이었던 1단계 종합정비 사업은 총 1789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강녕전 등 9310,743.85 m2(3250)를 복원할 계획이었다. 사업기간을 1년 연장한 2010년 기준으로 1572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898987 m2(2720)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일제의 철거를 피하여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하여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500여 동의 25%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사업기간 중만성 옛 조선총독부 청사와 옛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옛 조선총독부미술관(전통공예전시관) 등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이전 복원한 데서 나타나듯 일제의 유산인 네거티브 문화재를 철거하고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宮制)를 완비하는 것이 1단계 종합정비 사업의 목표였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정전(正殿)과 편전(便殿), 침전(寢殿), 동궁(東宮), 빈전(殯殿) 등 경복궁 중심축의 복원이 추진되었다. 구체적으로 침전 권역(19901995) 사업을 통하여 강녕전 등 12동의 건물이 복원됐으며 동궁 권역(19941999) 사업 당시 자선당 등 18동의 건물이 세워졌다. 또한 근정전이 일제강점기 때 축이 틀어진 것을 고치려고 '근정전 정비공사'(200~2003)까지 복원을 하였고, 흥례문 권역(19962001) 사업 당시 흥례문 등 6동의 건물이, 태원전 권역(19972005) 사업으로 태원전 등 25동의 건물이 각각 복구되었다. 끝으로 광화문 및 기타 권역(20012010) 사업으로 광화문과 건청궁 장안당 등 28동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1단계 (1990~ 199512) : 침전 권역 복원 (강녕전, 교태전 등 12794평 복원)

2단계 (1994~ 1999) : 동궁 권역 복원 (자선당, 비현각 등 18352평 복원)

3단계 (1996~ 2001) : 흥례문 권역 복원 (흥례문 등 6517평 복원)

4단계 (1997~ 2005) : 태원전 권역 복원 (태원전 등 25496평 복원)

5단계 (2001~ 2010) :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 (광화문, 건청궁, 함화당, 집경당 등 321,091평 복원)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 (2006~ 2010) : 광화문 권역 복원

2차 복원정비사업

문화재청은 20101차 복원 정비 사업이 완료된 후 2011년부터 2030년까지 20년 계획의 제2차 경복궁 종합정비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15년 연장하여 2045년까지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계획기간을 6단계로 구분하여 단계별 세부시행계획을 수립 및 추진하며, 254동을 복원하고 총 사업비는 약 5,4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중심 전각을 전면 복원하며 상대적으로 복원 의미가 떨어지는 지역으로 판단한 102곳은 기단 및 초석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사업이 완료되는 2030년까지 전체 379동으로 원래 규모의 75.8% 수준으로 복원하며, 5단계 선원전 일대 복원에서는 복원지의 대부분인 73동을 기단·초석으로 복원해 미복원한 상태로 둘 계획이었지만, 2045년으로 연장하면서 예산이 삭감되어 그 복원 규모도 축소되었다. 20135월 중 문화재청은 예산의 효율적 활용이 필요하며, 관람객 동선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를 들어 2010년에 수립된 기존의 계획을 대폭 삭감하는 "경복궁 2차 복원정비계획 조정안" 연구 용역에 착수했다. 권역별 대표 건물만 복원하고 부속 건물은 복구하지 않으며, 국립고궁박물관 철거 계획도 빠지는 것이 주 내용이다. 2015년 소주방 영역(외소주방등 18)이 복원되었다.

단계별 사업 계획은 다음과 같다.

1단계 궁중생활권역 (소주방 및 흥복전 권역 등, 2011~ 2021) : 소주방 영역(·외소주방, 대전생물방), 흥복전 영역(흥복전, 영훈당)등 총 28동 원형 복원, (빈궁소주방, 다경합, 원역처소)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2단계 제왕교육권역 (동궁 및 오위도총부 권역 등, 2019~ 2023) : 동궁영역(계조당), 건춘문영역(수문장청 등), 오위도총부 영역(상의원, 오위도총부 등) 14동 원형 복원, (춘방, 계방, 별군직청)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3단계 궁중통치권역 (궐내각사 권역 등, 2026~ 2034): 영추문 영역(영추문 및 수문장청 복원), 궐내각사 영역(빈청, 정원, 의약청), 등 총 14동 원형 복원 (국별장직소, 선전관청, 내반원) 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4단계 궁중의례권역 (혼전 및 선원전 권역, 2031~ 2042): 문경전 및 회안전 영역(문경전), 신무문 영역(수문장청 등 3, 측간 1), 만경전 권역, 선원전 권역(선원전, 경안당), 등 총 23동 원형 복원, (회안전 영역, 제수합 행각, 만화당 영역, 건복합) 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5단계 궁중방어권역 (·서십자각 및 내사복 권역, 2040~ 2045): 서십자각 영역(서십자각 1, 궁장복원), 동십자각 궁장 복원.

현지 안내문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건축물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중앙에 근정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채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Sources Wikipedia]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1192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경복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10년 넘게 주말을 경복궁에서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며 관람객들을 안내한 저자 양택규가 1395년(태조 4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세운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조선을 이끌었던 지도자의 고뇌와 연민이 배어 있는 역사의 상징이며, 조선시대 문화의 결정체인 경복궁이기에, 그러한 경복궁의 면모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성리학의 원리부터 경복궁 굴뚝의 벽돌문양까지 다루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개국, 한양 천도와 경복궁 창건, 임진왜란의 혼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창과 전각들이 헐린 일제시대의 수난 등 굴곡 많은 600년 경복궁의 역사를 쉽고 자세히 알려주며 각 주요 전각, 건물들의 뛰어난 건축 양식과 그 안에 담긴 음양오행 사상뿐 아니라 세세하게는 각 건물에 걸린 현판의 뜻까지 경복궁 한곳 한곳의 의미를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직접 찍은 다채롭고 풍부한 여러 장의 도판들이 문화해설사로 살아온 저자의 10년 삶과 함께 그대로 담겨 경복궁 구석구석을 문화해설사의 눈으로 함께 관람할 수 있는 책이다.

목차

저자의 말

1. 경복궁이 지나온 길
한양 천도와 창건
법궁시대
공궐기의 경복궁
폐허 위에 다시 세운 경복궁
일제강점기의 경복궁
경복궁 옛 모습 되살리기

2. 경복궁으로 가는 길
도성
사대문과 큰길, 저자
육조거리
궁성

3. 새로 보는 경복궁
광화문
흥례문 일곽
근정전 일곽
사정전 일곽
궐내각사
경회루
강녕전 일곽
교태전 일곽
동궁 일원
자경전 일곽
향원정과 건청궁
집옥재 일원
때를 기다리는 전각들
태원전 일원
신무문을 나서면

부록
전통건축 엿보기
편액
경복궁 연표

저자 소개

저자 : 양택규

1946년생으로, 한때는 양가(楊哥)만 300여 호를 헤아렸다는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이 잘 나갈 때는 초등학교까지 들어섰는데, 학생들이 양가들로만 구성되었다 해서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희한한 동네였다. 동네 풍광도 고색창연하고 관습도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곳이었다. 전주서중·전주고를 마치고, 담임선생님의 강권에 힘입어 서울로 올라와 대입 시험을 치뤘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근로장학금...

책 속으로

궁궐 조영의 시작은 천리를 이 땅에 구현하겠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성리학으로 무장한 개혁적 인물들이 개국했다. 그들은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견인차인 임금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궁궐 구조물 곳곳에 상징으로 나타냈다. 눈만 뜨면 시야로 들어오는 경복궁의 온갖 길상 문양, 일화문·월화문·건춘문·영추문 등 사대문은 물론이고 일월오봉도·사신상과 십이지신상·단청·전각의 배치 등 거의 모든 표현과 구조가 천리와 지리에 묻어나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양 천도와 창건: p.26

광화문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보여준다. 다른 궁의 문들은 낮은 기단에 삼문형식이다. 그러나 경복궁의 사대문(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은 석축을 높게 쌓고 중앙에 홍예문을 터서 문루를 얹은, 성곽문과 같은 구조다. 다른 궁의 문이 규모 있는 시설의 대문 정도라면 경복궁 사대문은 궐문이다. ……광화문은 태조 4년 9월에 세워졌다. 창건 때의 이름은 남문(南門)이었다는 것 말고는 밝혀진 게 없고, 세종의 부탁을 받은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 지었다. ‘광화(光化)’는 《서경》의 ‘光被四表 化及萬方(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미침)’에서 따온 말이다. ‘光天化日(밝은 세상과 안정된 시대)’의 줄임말로도 본다. 어둡고 혼란한 시대를 마감하고 밝고 안정된 정치로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통치자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광화문: p.114

근정전의 처마는 활등처럼 굽은 완벽한 호상(弧狀)이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의 각도 차이를 두고 일정하게 서까래를 배열했기 때문이다. 치밀한 계산 아래 정연한 변화를 준 서까래는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렬되어 있다. 따라서 도리에 걸린 서까래는 위아래, 내민 머리의 위치가 모두 다르다. 호선을 이룬 이 궤적을 계속 따라가면 반대쪽 추녀와 만난다. 곧 하늘에 커다란 타원이 크려지는 것이다. 조정, 행각, 기단을 네모꼴로 조직하여 지상세계[地方]를 형상화했다면 지붕은 원의 속성을 부여하여 하늘[天圓]을 나타낸 것이다. 근정전의 구조는 천원지방, 곧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인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근정전 일곽: p.151

경회루를 칸, 기둥, 창호 수에 3, 8, 12, 24, 48, 64가 적용돼 있다. 다른 주요 전각이 양수(陽數) ‘5’와 관련된 체계인 데 반해 경회루는 물을 상징하는 음수(陰數) ‘6’과 관련된 구조다. 이는 경회루가 연회 장소라는 점 이외에 화기를 물로 제압하다는 주역적 사고가 작용한 까닭이다. 중창 당시, 이 역사(役事)에 깊이 간여한 정학순은 <경회루전도>에서 경회루가 《주역》의 원리와 일치한다고 밝혔다. 정학순은 6이 팔괘에서 큰물을 나타내는 수이며 경회루 구조는 6궁의 원리를 따랐다고 했다. ---경회루: p.217

신무문(神武門) 쪽은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왕은 후원에서 행사가 있을 때 이 문으로 출입했다. 신무문 밖에는 공신들의 결속을 다짐하는 회맹단이 있었다.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잡이하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도 신무문으로 나갔다. 신무문은 음기가 드세다 하여 평소에는 닫아두었다. 그래서인지 이 문의 이력에는 음습한 어둠의 그림자가 묻어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신무문은 힘자랑하던 사람들이 국면을 역전시키고자 할 때 은밀하게 드나들었던 곳이다. 1519년(중종 14년), 홍경주 등 훈구 세력들이 왕의 밀명을 받고 조광조와 사림파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깊은 밤중에 입직 승지들도 모르게 이 문으로 들어왔다. 그때의 참극을 기묘사회 또는 ‘신무의 난’이라고도 한다.
---신무문을 나서면: p.387
 

출판사 리뷰

경복궁의 과거, 현재, 미래를 그려냈다!

경복궁은 장엄하고, 정연한 조선의 법궁으로 국가 최고 지도자가 머물던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흥선대원군의 집념으로 경복궁이 다시 세워졌지만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는 콘크리트 날림으로 대충 복원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 다행히 2009년을 목표로 1989년에 기본 궁제를 복구·복원하려는 ‘경복궁 옛 모습 되살리기’ 계획이 수립되면서 경복궁의 원형 회복이 본격화되었다. 2007년까지 영추문, 흥례문 일곽, 만춘전, 태원전 일원, 건청궁 등이 복권되었고, 현재 광화문과 집경당?합화당 행각, 문경전과 회안전 터 등이 복구 중이다.

지은이가 최근까지 일반인들이 출입하기 어려웠던 이곳들까지 세세히 살핀 이유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쉽게 잊고 있던 경복궁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복원된 경복궁의 미래까지 생각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경복궁을 다룬 단순한 가이드북이 아니다. 경복궁을 통해 우리의 역사와 미래를 되짚어보게 하는 또 하나의 가치 있는 역사책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3884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10여 년 동안 ‘우리궁궐지킴이’로 활동해온 저자가 우리 궁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기획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의 아름다운 궁궐을 바쁜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남의 집 잠깐 들여다보듯 총총걸음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이나, 왁자하게 몰려와서 건물만 대충 기웃거리다 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궁궐은 결코 오랜 세월 역사 속에 묻힌 채 그 기록으로만 접근하는 고리타분한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살았던 옛사람의 향기와 함께 숨 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다섯 궁궐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 이 있다.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그 첫 번째로 시작하는 경복궁 여행은 세종로 광화문 광장에서부터 출발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인식을 새롭게 제고하고 있으며, 우리의 메마른 감성을 일깨운다.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의 심장부 세종로 광화문의 역사와 함께 경복궁의 희로애락을 읽어내는 저자의 감성을 따라가노라면 우리가 미처 관심을 갖지 않은 곳곳에 감추어진 역사가 있고, 그 역사는 우리의 상처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역사의 상처에 귀 기울이게 함으로써 ‘나의 힐링’은 곧 ‘우리 역사의 힐링’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는 궁궐여행은 색다른 시각이 주는 재미와 울컥하는 감동을 함께 전달한다.

목차

일러두기
저자의 말 : 궁궐, 아름다운 감성을 일깨우다

1. 광화문 가는 길
2. 영제교를 건너다
3. 근정전, 태평성대를 꿈꾸다
4. 사정전, 백성을 생각하다
5. 수정전, 집현전 학사를 만나다
6. 경회루, 연회를 베풀다
7. 강녕전, 왕의 시어소
8. 교태전, 왕비의 시어소
9. 자경전 꽃담에 취하다
10. 자선당, 세자를 위하여
11. 함화당과 집경당, 사색을 즐기다
12. 향원정 연꽃 향기에 실리다
13. 건청궁, 친정을 펼치다
14. 집옥재, 근대사를 생각하다
15. 태원전, 하늘의 이치를 따르다

부록
경복궁 십경
경복궁 복원의 역사
경복궁 연표
조선왕조 가계도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이향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으며, 다섯 번의 개인전과 수차례의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조각가로 활동하였다. 23년 동안 교직에 재직했고, 2000년부터 시민 NGO 단체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소속 우리궁궐지킴이로 활동하면서 문화재청장 표창을 수상했다. 한국의 전통 궁궐문화에 대한 강의와 원고 집필 활동을 통해 우리 궁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궁궐의 아름다움을 알려 나가고 있다. 현재 우리궁궐지킴이와 문화...

감수 : 나각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세종대학교, 신구대학에서 한국사와 한국중세사를 강의하였으며, 현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연구간사로 있습니다. 저서로는 《서울의 산》, 《서울의 성곽》 등이 있으며, <서울 가로명의 역사와 그 의미>를 비롯한 여러 논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육백년사》, 《한강사》, 《동명연혁고》,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

책 속으로

중국이나 일본 궁궐의 서수 조각들을 보면 그 살벌한 인상의 사실성에 깜짝 놀라고 실제로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합니다. 실은 그렇게 무서운 인상이라야 궁궐에 접근하는 자에게 위엄을 갖추고 겁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화강암은 단단하고 거친 돌입니다. 이런 돌을 가지고 아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려면 자칫 돌의 성향을 거스르게 됩니다. 우리 조선의 옛 석공은 돌의 성질을 알고 그 돌이 만들어내고 싶은 인상을 허락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땅에서 출토되는 가장 흔한 돌 화강암이 지니는 투박하고 거칠지만 따뜻한 돌의 성질을 이끌어낸 조선 석공들의 뛰어난 솜씨를 근정전 석수 조각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p.100

굴뚝의 각 면에는 용면이나 불가사리 등의 벽사(?邪) 문양과 함께 십장생, 사군자, 만자문, 당초문 등의 길상문을 구워 박아서 자칫 칙칙해지기 쉬운 굴뚝을 아름다운 조형물로 표현했습니다. 아미산 굴뚝의 각 면에 그려진 여러 그루의 매화는 봄소식을 알리는 새의 노래가 한 폭에 담겨 있는 화조도입니다. 굴뚝의 꽃담에 어우러진 매화와 새, 복을 부르는 박쥐와 학이 동산을 꾸미고 있습니다. 굴뚝을 저토록 아름답게 치장하고 보물로 지정해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민족이 세계에 또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조그만 동산을 꾸며놓고 신선이 사는 아미산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우리 조상들의 시감(詩感)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낙하담과 함월지는 노을이 깃든 못과 달이 잠긴 연못이니 이 또한 얼마나 큰 자연인가요. 아주 차원 높은 차경(借景) 문화입니다.--- p.202

담장에는 보름달을 배경으로 어린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아 쉬고 있는 월매도(月梅圖)가 있습니다. 이곳 담장 안에 살고 있는 여성을 아름다운 월궁(月宮) 항아(姮娥)로 묘사한 은유를 이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경전 바깥 담에 설치한 꽃담은 누구를 위한 그림이었을까요. 원래 꽃담 치장을 그 집 주인이 볼 수 있는 울안에 했다면 이 매화 꽃담의 주인은 자미당에 살던 항아였을 겁니다. 우리가 자경전의 주인이었던 신정왕후 조대비를 위한 꽃담으로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혹자는 자경전 꽃담의 매화가지에 앉은 이 새를 가장 고운 소리로 노래한다는 휘파람새라고 합니다. 꽃담장의 백 년 된 매화가지에 앉은 휘파람새는 해마다 자미당 터에 피어 봄을 알리는 살구꽃과 봄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227

지금도 대지진 당시 불을 먹은 돌은 녹산 숲 그늘에서 푸슬푸슬 그 살점을 떼어내고 있습니다. 하필 그 유구가 놓여 있는 자리가 명성황후의 시신을 일본인들이 불태웠던 자리이고 보면 당시 우리의 힘없는 역사가 다시 한 번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나라를 잃으면 사람뿐만 아니라 건물도 이렇게 수난을 당했습니다.
--- p.305
 

출판사 리뷰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우리의 궁궐은 파괴와 상처의 시간을 견디어냈다.
이제 메마른 감성을 치유해주는 공간으로 우리에게 궁궐은 힐링이다.
동시에 궁궐도 자신의 상처와 역사를 들려줌으로써 힐링이 필요하다.

1. 궁궐은 힐링이다!

1873년 지어진 건청궁은 고종이 아버지 흥성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왕권에 대한 친정의지를 드러낸 곳으로, 궁궐 안의 또 하나의 궁이다. 하지만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건청궁(乾淸宮)은 1909년 일본인들에 의해 증거 인멸되어 사라졌다. 이렇게 치욕의 역사는 ‘하늘이 맑아(乾淸)’ 더욱 슬픈 건청궁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2007년 10월, 을미사변 100여 년이 지나 복원된 건청궁이 일반인에게 개방되기까지 우리는 그 비극의 현장을 알지 못했다. 곧이어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강제 조인됨으로써 조선의 국권이 강탈당한 후,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일제의 본격적인 궁궐 파괴가 시작되었다. 경복궁은 1915년 무렵부터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는데, 제일 먼저 궁궐의 작은 관청이었던 궐내각사 터가 완전히 사라져 수정전만 남았으며, 서십자각과 그 외 전각들이 파괴되어 본래 모습의 10분의 1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청사 건물을 완공하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서문인 건춘문 쪽으로 쫓겨 가고 말았다. 더군다나 1935년 무렵부터는 일반에게 놀이공원으로 공개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궁궐이자 법궁이었던 경복궁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 살아 숨 쉬던 공간이었지만,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철저히 파괴되었고, 우리 민족의 삶도 굴욕과 고통과 상처로 얼룩져왔다. 그 치욕의 시간을 견디어내고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우리 역사에 대한 복원이 한창 진행 중인데, 저자는 복원된 궁궐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우리의 메마른 감성을 치유해주는 공간으로서 궁궐 산책을 제안한다.

2. 궁궐지킴이가 들려주는 경복궁 여행!

이 책은 경복궁 여행의 출발을 세종로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한다. 1395년 경복궁의 정문으로 세워진 광화문은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왕조의 비명을 고스란히 몸으로 견뎌낸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저자는 광화문을 정면에서 바라보라고 주문을 하더니 교보빌딩 앞에 위치한 ‘기념비전’을 보기 위해 용기를 내라고 독려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곳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곳을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를 알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이 현실임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정면에서 광화문을 마주하며 입궐하면 귀여운 영제교 돌짐승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악귀를 쫓아내야 하는 돌짐승들이 혓바닥을 낼름 내밀며 ‘메롱’ 하는 귀여운 모습을 보게 되고, 흥례문과 근정문을 통과해 근정전에 이르게 되면 상월대와 하월대를 장식하는 수많은 돌조각상을 만나게 된다. 근엄한 궁궐에서 세상풍파 다 겪은 듯한 원숭이, 어미 젖을 힘차게 빨고 있는 새끼 해태 등 우스꽝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돌조각상들을 통해 조선의 옛 석공들의 뛰어난 솜씨와 소박한 심성을 읽을 수 있다. 왕의 공간인 사정전이나 강녕전에 들어서면 백성을 위해 불철주야 애썼을 왕과 신하들의 격렬한 토론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여인의 공간이었던 교태전과 자경전의 꽃담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궁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도 한다. 하물며 하찮은 굴뚝에도 꽃과 새들을 새겨 넣고, 조그만 동산을 신선이 사는 아미산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작은 돌연지에는 노을과 달을 담은 연못이라고 지칭하면서 큰 자연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화려한 단청을 입힌 궁궐의 측간을 찾아보는 재미와 경회루 2층 누각에서 바라보는 인왕제색의 풍경으로 이끌어간다.

북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가면 향원정과 건청궁과 집옥재가 보이는데, 아픈 근대사를 되돌려보는 시간이 된다.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앞서 전기 문명을 유입했다는 사실은 향원정 북쪽에 작은 표지석이 대신하고 있으나, 그 역사적 의미가 광풍과도 같았음을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건청궁과 집옥재에서는 고종의 공간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무능한 군주로만 평가되던 고종이 개혁을 위해 애썼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청휘문으로 나가는 녹산에서는 명성황후의 넋을 그려본다. 발길을 돌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에 도착하면 청와대가 정면에 보인다. 멀리 백악과 청와대를 바라보며 오늘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궁궐여행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저자는 당부하고 있다.

3. 살아 있네, 우리 궁궐!

옛사람들은 가고 이제는 그들이 살았던 공간을 통해서 그들의 삶과 아픔을 읽어내야 하지만, 500년 역사를 간직한 우리의 궁궐은 서서히 깨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 궁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궁궐의 역사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저자는 무엇보다도 궁궐의 아름다움과 스토리를 찾아내어 살아 있는 궁궐로서의 가치를 발견한다. 생생한 역사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실록을 뒤적이고, 그림과 사진으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광화문 궁장, 근정전 박석, 근정전 돌기둥과 동물 조각상, 전각과 전각 사이의 골목길, 전각과 전각의 겹쳐지는 지붕선 등 평범하여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곳을 찾아내어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단색의 벽돌에 새겨진 빙렬문을 화려한 채색으로 표현하거나 문고리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는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궁궐의 색깔에도 호흡을 불어넣어 경복궁 화첩을 완성한다. 또한 저자는 궁궐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낄 수 있도록 각각의 영역마다 뷰포인트를 짚어주고 그 장면들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독자들은 그 위치에서 잠시 머물러 궁궐의 선과 면을 수평과 수직으로 바라보면 족하다. 책은 우리 궁궐을 역사, 문화, 예술 등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 궁궐을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독특한 감성으로 일깨우고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388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