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기독교 신학연구 (독학>책소개)/2.신학일반

유대신비주의 카발라와 생명나무 (2023)

동방박사님 2024. 9. 1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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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본서는 유대신비주의 카발라의 핵심 도해인 생명나무를 새로운 시각에서 풀이하고 있다. 성학십도는 퇴계 이황이 유학과 성리학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전승되던 도해에 덧붙여 10개의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군주와 유생들, 그리고 후학에게 성리학의 핵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지혜다. 마찬가지로 카발라에서 생명나무는 모세 오경을 압축하여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 매우 탁월한 도해다. 성서를 놓고도 서로 다른 관점의 해석으로 수많은 분파가 발생한다. 그처럼 생명나무의 도해를 놓고도 서로 다른 해석이 충돌한다. 서구 문명의 배면에 흐르고 있는 카발라를 이해하지 못하면 서구 철학은 물론이려니와 서구 사상사를 제대로 읽어내기 어렵다. 서구 사상의 저수지와 같은 카발라는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그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

카발라 신비주의의 가장 중요한 본령은 ‘신’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신의 문제는 동시에 인간의 문제다. 신과의 합일과 일체는 신비주의 주제 중 주제다. 종교의 교리체계 안에서 설명하는 신의 문제가 아니다. 카발라에서는 ‘그 신은 네 안에 타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너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누구나 신을 말해도, 신비의 영역에 있는 신과 신의 발현에 대해 카발라의 신비주의에서처럼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카발라에서는 네가 곧 그다. 그와 하나다.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나가 되는가를 설명한다. 카발라의 신비주의는 하나님과 하나(One with God), 곧 일체가 되는 과정을 주목하고 있다. 신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의 진정한 얼굴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발라의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는 신과의 합일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인간의 영적 단계를 설명하는 도해다.

저자는 생명나무의 토대인 아인, 아인 소프, 아인 소프 오르에 대한 개념을 헤겔의 변증법과 불교 반야심경의 공(空)과 무(無)를 빌려서 설명한다. 아울러 생명나무의 핵심 개념인 10개의 세피라에 대해 그것의 배경이 되는 히브리어 성서의 맥락을 좇아 개념파악을 시도한다. 이 책은 카발라의 생명나무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존재 문제와 연관하여 타자 자아(others-ego)와 존재 자아(ε?ναι-ego)라는 개념을 대두시켜 인생이 궁극적으로 지향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성서의 수많은 이야기가 제시하려는 뜻은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 자아(ε?ναι-ego)로 우뚝 서게 하는 데에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존재 자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사람이고, 카발리스트가 안내하는 생명나무도 결국 우리 내면에 세워져야 할 ‘존재의 왕국(그대 안의 왕국)’에 귀결된다는 점을 드러내려 한다.

목차

시작하는 말
Ⅰ. 신성 네 글자와 생명나무 ˙ 17
신성 네 글자 ˙ 18 생명나무 풀이에 앞서 ˙ 27
신비주의란? ˙ 35 생명나무의 토대 ˙ 39
아인 ˙ 40 아인 소프 ˙ 45 아인 소프 오르 ˙ 52
Ⅱ. 생명나무와 세피라 ˙ 57

아칠루트계(발산의 세계) ˙ 58
1. 케테르-왕관 ˙ 60 인자의 임함과 번개 ˙ 60
혼돈과 공허 ˙ 64
2. 코크마-지혜 ˙ 65 3. 비나-이해, 총명 ˙ 69

브리야계(낳음의 세계) ˙ 73
4. 케세드-야웨의 자비 ˙ 76 5. 게부라-권위 힘 ˙ 81
6. 티페레트-아름다움 ˙ 87
다윗의 육각별(hexagram) ˙ 90
생명나무의 첫 번째 야웨와 두 번째 야웨 ˙ 91

예치라계(지음의 세계) ˙ 95
7. 네차크-인내, 승리, 영원 ˙ 97 8. 호드-존엄 ˙ 102
9. 예소드-기초, 토대 ˙ 107

아시야계(활동의 세계) ˙ 115
10. 말쿠트-왕국 ˙ 117 의식의 세 기둥(pillars) ˙ 124
메르카바 신비주의 ˙ 125

Ⅲ. 야웨 신앙 여전히 유효한가 ˙ 133
비존재는 무가 아니다 ˙ 134 파루시아 ˙ 136
은폐와 탈은폐의 구조 ˙ 139 의식의 감옥과 해방 ˙ 144
야웨 엘로힘과 예흐예 ˙ 147
엘샤다이 엘로힘과 야웨 엘로힘 ˙ 153
예수와 야웨 ˙ 160 요한계시록의 야웨 ˙ 166
인자(仁慈)와 진리(케세드 베에메트)리˙ 172
무(無)와 기름 부음 ˙ 176 좋음의 근원 ˙ 181 명랑 ˙ 184

Ⅳ. 존재 자아와 타자 자아 ˙ 187
천국의 비밀(너희와 저희) ˙ 188 의식의 기원 ˙ 195
타자와 나 ˙ 197 타자 자아(others ego) ˙ 202
타자 자아(others-ego)의 연쇄 고리 ˙ 205
타자 자아(others-ego)에서 존재 자아(εἾναι-ego)로 ˙ 208
존재 자아와 위버멘쉬(Ubermensch) ˙ 212

Ⅴ. 존재 자아 그 빛나는 특성들 ˙ 217
엑소더스는 엑스-오더스(Ex-others 탈타자) ˙ 218
존재 자아와 만나나˙ 223 ‘그게 아닌데’와 ‘아하!’ ˙ 231
의식의 하늘과 뿌리 올리기 ˙ 236 두물머리와 하나 ˙ 240
새로운 시선 ˙ 248 이해를 토대로 한 긍휼 ˙ 252
가브리엘과 권위 ˙ 259 아름다움(美) ˙ 262 욥과 인내 ˙ 265
존엄 ˙ 272 비로소 씨알, 그 토대 ˙ 275 그대 안에 왕국 ˙ 279
성서가 말하는 정신의 유형-숨에 대해 ˙ 282
1. Gouph 구프(쏘마) 인체 ˙ 284
2. Nephesh 네페쉬(푸쉬케) ˙ 285
3. Basar바살(싸르크) ˙ 286
4. Ruah 루아흐(프뉴마) ˙ 289
5. Neshamah 네샤마(프노에) ˙ 294
6. Hayyah 하야(에고 에이미, 생명, 존재) ˙ 295
7. Yechidah 예히다( 헨, 누스) ˙ 297
하나의 숨결-비움과 채움 ˙ 300
그 사람의 그 아들 ˙ 303

부록 / 김창호TV 영상 목록 ˙ 309

저자 소개 

저 : 김창호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철학교육을 전공하였다. 수도침례신학교와 중부대학에서 기독교철학과 헬라어, 히브리어를 강의한 바 있으며 저서로는 ‘베드로의 고백 그 허와 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냐’ ‘예수의 믿음’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등이 있다. 원어성서원 刊 스테판원어성경 데이터 작업과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격월간지‘형상과 글’을 창간하기도 했다. 현재 유튜브 방송 엔테비블로...

책 속으로

야웨란 ‘그가 존재다’이며, 신약의 방식으로 하면 ‘내가 나로 나아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 야웨 엘로힘이란 ‘나의 나 됨’을 이루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명확하다.
--- p.20

의식은 처음에는 부득불 타자에 의해, 전통에 의해 의식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활성화된다. 타자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의식활동의 영토에 들어온다. 곧 전두엽과 후두엽, 좌뇌와 우뇌의 각종 신경망을 타자가 자극하여 활성화시킨다. 정보전달 체계의 우주가 반짝이고 뉴런과 뉴런 사이를 잇는 신경 전달 물질이 활성화된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시작된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자극된다는 것은 전통과 사회의 집약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타자가 언어 감각을 일깨우고 대뇌피질에 각종 의식의 씨를 반복해서 뿌리며 자극한다.
--- p.32

카발라의 신비주의는 하나님과 하나(One with God), 곧 일체가 되는 과정을 주목하고 거기서 인간의 진정한 얼굴이 드러난다는 것을 천착한다. 카발라의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는 신과의 온전한 합일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인간의 영적 창조의 단계를 설명하는 도해며, 동시에 이것의 완성이 신과 합일(single one)의 성취라고 본다.
--- p.38

깨달음이란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지극한 마음의 처소에 숨어있는 광대한 빛에 다가가기다. 성서는 그곳을 지성소(至聖所)라 일컫는다. 거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곧 밝고 원만하며 한량없는 광대함이 있다. 요한계시록의 수많은 상징어가 이를 은유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오온의 버섯구름이 결국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챔이며, 무변 광대한 빛을 발산하는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 p.44

히브리인들은 우주의 원초적 진동을 문자 요드(Yod)로 상징한다. 요드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가장 작은 문자이며, 운동의 한 점을 상징하고 그 자신의 주위를 움직인다. 요드의 움직임으로부터 다른 문자는 구조화되고 앞으로 나타난다. 문자 Yod는 근원적 점으로도 사용되고 알파벳 문자로도 사용된다. 원래 점으로서의 요드는 자연어에서 구두 문자보다도 더욱 명백한 최초의 진동과 유사하고, 한 줄기 번개와 같은 빛을 상징하기도 한다.
--- p.60

요드는 알레프를 구성하는 중요한 문자다. 대각선을 중심으로 오른쪽 상단과 왼쪽 하단에 요드 점을 찍어서 히브리어 첫 글자 알레프를 구성한다. 상형으로는 황소를 본뜬 것이나, 그 의미는 정신이 새로 태어났을 때의 첫소리를 상징한다. ‘아래아 (ㆍ)ㅏ’는 ‘아하!’의 원초적 제소리다. 하여 정신이 새로 태어날 때, 존재 자아가 내는 하늘 소리의 시원이라는 말이다.
--- p.61-62

아칠루트 다음에는 브리야가 등장한다. 브리야계란 흔히 창조계로 번역하지만 그 뜻은 ‘야웨의 창조’라는 뜻이다. 현대 카발리스트들의 설명이 이 부분에서 매우 빈약하다. 브리야계를 실존적으로 설명하는 이를 아직 찾지 못했다. 나는 브리야라는 단어를 분석하면서 처음 이 단어를 만든 카발리스트의 창의력에 깊이 공감하고 탄복하였다.
--- p.73

모든 권세가 위로부터 왔다 하여 세상의 권력도 다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순복해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도그마는 이제 그만하자. 민심은 천심이라는 세상의 속담도 예수는 보기 좋게 거부한다. 민심은 예수를 세상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예수는 민심을 역행했다. 세상의 권력은 민심에서 나온다. 땅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 있는 권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것의 질서대로 유지되며 그 나름의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며 문명의 진화를 따라 끊임없이 역동하며 변화해간다.
--- p.85-86

카발라에서는 생명나무에 10개의 세피라를 그리면서 그 각각의 자리마다 고유한 이름을 부여한다. 그러면서 세피라마다 개입하는 신의 이름, 혹은 천사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아니 개입하는 신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의 세피라를 형성하는 성질에 따라 ‘신의 이름’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과, 배라고 존재자에게 이름을 부여하듯, 신성의 빛마다 그에 어울리는 이름을 부여하여 빛의 발산에 대한 몇 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 p.91

신명이 없는 작품은 위작이고 속임수요 짝퉁이다.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쿠트는 왕국이다. 이렇게 왕국을 이뤄간다. 왕국은 동시에 관계와 소통으로 나라를 넓혀간다. 케테르는 말쿠트를 향하고 말쿠트는 케테르를 향해 있다. 서로는 마치 음과 양이 하나로 있는 것처럼, 플러스(+)와 마이너스(-)처럼 결합하며 새로운 나 를 창조하고 만들어간다. 성서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 나라 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다. 두 발과 다리는 온몸, 곧 머리와 가슴과 배를 그 다리에 싣고 어디든 다니며 활동한다. 온전한 왕국을 이룬다. 왕국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 있고 그대를 이룬다. 신과의 온전한 합일은 말쿠트에서 완성된다.
--- p.120-121

생명나무는 세 기둥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우측 기둥은 자비의 기둥이며 좌측은 의의 기둥이다. 가운데 기둥은 서로 균형을 잡아주는 중심의 기둥이다. 중심을 이루는 기둥은 케테르, 티페레트, 예소드, 말쿠트다. 인체의 척추와 같다고 하겠다. 의식의 기둥이다. 우측의 기둥은 자비의 기둥이면서 의식의 남성성이다. 코크마, 케세드, 네차가 남성성이며 플러스 에너지를 갖는다. 왼쪽 기둥은 비나와 게부라와 호드로 구성된다. 의식의 여성성이다. 아울러 마이너스 에너지다. 수용성이다. 받아들이고 이를 숙성하여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축적하여 내보낸다.
--- p.124

나는 불교의 돈오(頓悟)를 카발라의 코크마와 상응한다고 여긴다. 코크마는 비나(이해, 총명)의 자궁에서 키워져야 하고 숙성되어야 한다. 순간의 깨달음, 그 직관은 단지 씨앗일 뿐 나무나 열매가 아니다. 의식 내부에는 이를 씨로 받아 발아시키고 싹틔워 나무로 혹은 열매로 키우는 마음의 자궁이 있다. 이를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비나’라 한다. 불가의 점수(漸修)가 여기에 해당한다. 점수를 단지 수행이나 닦음으로만 여겨 돈오와 점수를 이항대립으로 여기는 것은 따라서 타당하지 않다. 돈오와 점수는 그런 점에서 하나다.
--- p.127

인생은 두 길을 간다. 존재의 길을 찾아가거나 비존재의 길에 서 있거나. 무(無)란 비존재의 길을 떠나 존재의 길로 가는 인터체인지다. 여기서 존재란 나의 있음을 의미한다. 육체의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자명하다. 문제는 정신에 관해서다. 물론 정신도 누구나 활성화되어 있다. 그 기능은 작동한다. 다만 자신의 존재로 활성화되어 있는가 타자로 인해 활성화되어 있는가. 정신이 비존재(타자의 정신)로 존재하는가 스스로의 정신(제 정신)으로 존재하는가. 제 정신인가 타인의 정신을 이식하고 있는 숙주에 불과한가. ‘존재하기’ 그것이 문제다. 모든 불안의 근원은 자신으로 ‘존재하기’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 p.134

야웨의 유래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하야의 칼동사 완료형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와 히필동사(사역동사) 미완료형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칼동사 완료형과 미완료형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이 중 칼동사의 완료형과 미완료형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또한 하야 동사가 아니라 하바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하바는 하와의 고대 표기법이고 모세 시대에 하바는 하와로 대체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하바는 아람어에서 비롯되었고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와(산자의 어미)와 동일한 뜻이 있고 “비가 내리다. 번개가 친다”는 의미가 있다.
--- p.148

존재 자아의 형성기에, 처음에는 왕관이 시작되며 왕관(케테르)에 이어 피어나는 두 개의 쌍떡잎은 지혜와 총명 곧 ‘코크마와 비나’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잎이 피는 생명작용을 상징한다. 성서에는 매우 중요한 상징어가 등장하는데, 지성소(至聖所, 코데쉬 하코다심)다. 영어로는 The most holy place라 한다. 지극한 마음의 자리다. 진공(眞空)의 자리며, 아무것도 없는 지극한 고요의 자리다. 이곳에 묘(妙)가 있(有) 으니 법궤다. 법궤에는 상징적 귀물 세 개가 있다. 감추인 만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증거판이다. ‘없이 계신 분’에 대해 기술하는 성서의 진술 방식이다.
--- p.187

타자를 통해 우리 의식은 싹트고 태어난다. 어머니는 우리의 거울이고 아버지는 따라야 할 모범이다. 아버지는 관습이고 사회고 윤리고 도덕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더욱 연장되어 종교화되면 아버지는 마침내 신의 얼굴로 확장되어 나타나니 하나님 아버지다. 소위 절대 타자, 대타자의 얼굴로 나타나 인생을 지배한다.
처음에는 그러하다. 그렇게 우리의 의식은 길러진다. 우리는 처음 우리 자신의 생존과 보존을 위해 그렇게 존재한다. 본능과 육체의 속성을 중심으로, 자아를 중심으로 의식의 세계가 형성된다.
--- p. 197

종교의 교주가 이처럼 발흥하는 것은 바로 자기 없음과 타자를 자아로 동일시하는 무기력한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타자는 결코 자아와 동일시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없고 크게 다가오는 타자에 자신을 투영하며 타자 자아(others-ego)를 형성한다. 이게 인생이 걷게 되는 순례의 길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정신의 초기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러므로 아직 정신의 원시 단계에 머물러 있다.
--- p.204

엑소더스는 엑스-오더스(Ex-others, 탈타자)요 엑스 파라오(Ex-Pharaoh)다. 출애굽이란 출(탈)타자 자아요, 출(탈)파라오다. 파라오는 풍요인 동시에 빈곤이다. 파라오가 제공하는 나일강의 삼각지 고센 평야의 풍요는 육체의 풍족한 먹거리로 생존을 보장해준다. 동시에 정신의 자리에는 파라오가 지배자로 들어와 있으니 타자 자아요 자기 부재의 빈곤이다.
--- p.218

그러므로 만나는 불가의 화두다. 불가의 ‘간화선(看話禪)’의 히브리식 이야기다. 수행법이 아니다. 묻기 위한 물음이 아니다. 화두를 붙잡고자 해서 붙잡으려는 것은 가짜다. 스승이 던져준 화두를 억지로 붙잡고 수행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무병(巫病)을 앓으며 지금까지의 삶터에서 광야로 내몰리는 속에서 묻고 또 묻게 되는 것이 화두라 하겠다. 물어야 하는 게 아니라 묻지 않을 수 없고 묻게 된다. 물음이 찾아오는 것이지 화두를 억지로 붙잡는 게 아니다. 타자 지배로부터, 타자가 전해 준 정답에 대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삶의 근본에 대해 묻는 물음 속에서 찾아오는 게 화두요, 만나다.
--- p.226-227

내가 나일 때, 나는 나로 존재하게 된다. 이를 생명(조에)이라 한다. 나라고 하지만 내가 아닌 타인이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으면 나라고 지칭한다 할지라도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를 성서는 사망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수없이 일컫고 있는 생명이란 그러므로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 p.234

번개와 천둥은 하늘에서 시작된다. 지진과 화산과 해일은 땅에서 시작된다. 존재 자아는 하늘에서 번개와 천둥이 일어나며 시작된다. 나팔 소리와 함께 타자 자아의 와해가 시작되며 하늘에 뿌리를 뻗는다. 뿌리를 올리는 것이다. 거꾸로 서 있는 나무와 같다. 존재 자아 의식의 자기 발아가 시작된 것이다.
--- p.236

존재 자아의 두 번째 특징은 빛이 비쳐 왔을 때 직관을 통해 개념으로 포착해가는 분화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타자 자아의 지배에 의한 지식활동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의식활동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이를 일컬어 지혜라 이름한다. 존재 자아는 이렇게 점차 자기 존재를 확장해간다. 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세포분열이고 기관 형성이다. 태아가 모태에서 장기와 손발과 머리가 만들어져 가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 p.238

요한복음은 신 존재를 ‘로고스’로 선포한다. 절대, 무한자, 우주 창조의 신이 아니라 ‘로고스’로 확언하는 책이다. 기독교는 신에 대해 유대교의 오류를 답습하고 많은 사상가는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무한 실체, 절대자로 오해한다. 이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절대 존재의 신으로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오해된 로고스를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한다. 거기서부터 서양 사유는 로고스를 중심에 놓고 선과 악을 나누고 흑과 백을 구분하려는 역사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 p.242

만물의 어머니라 일컫는 이해는 비로소 나의 꼴을 점차 넓혀가게 되는데 비로소 존재 자아의 심장을 낳는다. 케세드(자비심)는 존재 자아의 심장이다.
--- p.256

정신은 그때그때 호흡의 종류가 다르다. 성서는 여러 형태의 개념을 동원해 이를 표현해준다. 애굽에서의 호흡이 다르고, 광야에서의 호흡이 다르고, 가나안에서의 호흡이 다르다. 바빌론에서의 호흡이 다르고 다시 가나안에서의 호흡이 다르다. 처음 가나안과 두 번째 가나안에서의 호흡은 같은 가나안이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호흡으로 산다. 여기 등장하는 지역은 그가 머무는 정신의 거주지를 비유한다.
--- p.283

비움은 채움을 위해 있고 채움은 비움을 위해 있다. 이를 반복할 때 수레는 비로소 수레다. 호와 흡은 이렇게 상생하며 유무 또한 그러하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다른 둘의 세계가 아니다. 공과 색도 마찬가지다. 숨 쉼이다. 색즉시공이면 반드시 공즉시색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둘은 동어반복이 아니다. 색즉시공이 날숨이라면 공즉시색은 들숨이다.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 p.300

추천평

신학은 인간학이다. 모든 신화는 인간의 이야기다. 성서는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비유와 은유를 통한 싱글원으로서 우뚝선 존재인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오도송의 복음이다. 비로소 사람의 아들로 돈오점수해 가는 천로역정을 그린 이 역동적이고도 웅장한 인류의 대서사시인 성경이, 원죄의식과 선악구도로 점철돼 자본과 권력의 파시즘이 된 지 오래다. 높은 장대에 올려진 신은 기관총을 손에 들고 동서남북을 난사하고 있다

저자는 오랜 시간 카발라와 원어성경 불경 동서양철학을 융합통섭하며, 생명나무의 비의를 밝혀낸다. 그 通觀의 해석이 명징하지 않은가. 인생의 마스터키를 얻은 느낌이다. 귀 있는 이는 들으리라.
- 김여옥 (시인)
복음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새로운 역작으로 유대 신비 전통인 카발라의 생명나무 코드를 명쾌하게 풀어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서구신학의 틀에 갇혀 생명을 상실한 기독교의 도그마를 깨뜨리고 성경과 복음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놀라운 지혜의 눈을 뜨게 될 것이다.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누구라도 진리를 찾고 참 자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고 큰 깨우침을 얻기 바란다.
- 심중식 (귀일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