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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구원받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구원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갈라디아교회에 슬며시 들어와 성도들을 복음에서 속히 떠나게 했던 “다른 복음”의 논리가 오늘 현대교회 안에서도 행위구원론, 새관점으로 무장하고 점점 힘을 발휘하며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신칭의 교리의 서신인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 교회에 더욱 필요한 성경이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서 기술한 서신으로 알려진다.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1차 선교여행 때 오늘날 튀르키예 중부에 해당하는 갈라디아 지방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방문하며 세운 교회들로부터 두 가지 매우 걱정스런 소식이 전해졌다. 하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만 믿어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고 율법의 규례와 절기들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하나는 바울은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함께 지낸 일이 없으므로 정통 사도가 아니라는 인신공격이다. 정통 사도가 아니니 바울의 가르침은 옳지 않다고 선동하는 것이다. 이로 인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며 미혹된 자들에게 해명하며 한 통의 서신을 보내니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갈 2:16) 분명히 한다. 갈라디아서가 제시하는 구원론은 “이신칭의”이다. 바울은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갈 4:19) 감내한다고 말한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삶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평신도들과 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목회현장에서 사역에 힘쓰고 있는 사역자들을 격려하고 돕기 위해” 이 책이 준비되고 출간되었음을 밝힌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구원의 진리와 성도의 삶에 대한 치밀하고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이 책은 “이상원성경강해” 씨리즈 다섯 번째 책이다. “이상원성경강해” 첫 책은 “21세기 십계명 여행”으로 2023년 7월에, 네 번째 책은 “데살로니가전후서-주의 날이 이를 때에”로 2024년 2월 15일에 출간되었다. 두 번째 책은 “21세기 사도신경 여행”, 세 번째 책은 “21세기 주기도문 여행”으로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출판사 지혜의언덕에서는 계속하여 야고보서, 사도행전,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등을 이어 출간할 예정이다.
구원받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구원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갈라디아교회에 슬며시 들어와 성도들을 복음에서 속히 떠나게 했던 “다른 복음”의 논리가 오늘 현대교회 안에서도 행위구원론, 새관점으로 무장하고 점점 힘을 발휘하며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신칭의 교리의 서신인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 교회에 더욱 필요한 성경이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서 기술한 서신으로 알려진다.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1차 선교여행 때 오늘날 튀르키예 중부에 해당하는 갈라디아 지방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방문하며 세운 교회들로부터 두 가지 매우 걱정스런 소식이 전해졌다. 하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만 믿어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고 율법의 규례와 절기들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하나는 바울은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함께 지낸 일이 없으므로 정통 사도가 아니라는 인신공격이다. 정통 사도가 아니니 바울의 가르침은 옳지 않다고 선동하는 것이다. 이로 인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며 미혹된 자들에게 해명하며 한 통의 서신을 보내니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갈 2:16) 분명히 한다. 갈라디아서가 제시하는 구원론은 “이신칭의”이다. 바울은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갈 4:19) 감내한다고 말한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삶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평신도들과 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목회현장에서 사역에 힘쓰고 있는 사역자들을 격려하고 돕기 위해” 이 책이 준비되고 출간되었음을 밝힌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구원의 진리와 성도의 삶에 대한 치밀하고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이 책은 “이상원성경강해” 씨리즈 다섯 번째 책이다. “이상원성경강해” 첫 책은 “21세기 십계명 여행”으로 2023년 7월에, 네 번째 책은 “데살로니가전후서-주의 날이 이를 때에”로 2024년 2월 15일에 출간되었다. 두 번째 책은 “21세기 사도신경 여행”, 세 번째 책은 “21세기 주기도문 여행”으로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출판사 지혜의언덕에서는 계속하여 야고보서, 사도행전,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등을 이어 출간할 예정이다.
목차
서문
1.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1-10)
서론
인사말 (1:1-5)
하나님의 심부름꾼 (1:1-2)
폭풍 속에서 누리는 평강 (1:3-4)
다른 복음 (1:6-9)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복음
2. 바울이 전한 복음 (갈 1:11-17)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1:11-12)
은혜의 부르심 (1:13-17
3. 정직하고 지혜로운 바울 (갈 1:18-2:10)
정직과 은혜 (1:18-24)
전도의 열정과 뱀 같은 지혜 (2:1-10)
또 하나의 문제
예루살렘교회 앞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설명하는 바울(2:1-2)
열매1: 사도단으로부터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전폭적인지지 를 얻음 (2:3)
열매2: 종의 신분으로 다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차단함(2:4-6)
열매3: 사역의 분담 (2:7-10)
같이 가야 하는 전도의 열정과 뱀 같은 지혜
4. 베드로를 꾸짖는 바울 (갈 2:11-14)
5. 의에 이르는 두 길 (갈 2:15-21)
의에 이르는 두 길 (2:15-16)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길의 결과 (2:17-18, 2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길의 결과 (2:19-20)
율법의 정죄의 관할권으로부터 하나님의 관할권으로 (2:19)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 (2:20)
6. 바울의 복음변증 1 : 성령체험에 호소 (갈 3:1-5)
7. 바울의 복음변증 2 : 구약성경에 호소 (갈 3:6-14)
아브라함 (창 15:6; 17:24)
에발산의 저주 (신 27:26)
행하면 살리라 (레 18:5)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결론
8. 언약에 근거한 논증 (갈 3:15-18)
9. 율법의 기능 : 감독하는 후견자 (갈 3:19-25)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율법 (3:19-20)
죄 아래 감금된 인류 (3:21-22)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감독하는 후견자 (3:23-25)
10.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세계 (갈 3:26-4:7)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세계 (3:26-29)
부유한 가정의 상속자가 된 아들 (4:1-7)
11. 다시 메지 말아야 할 종의 멍에 (갈 4:8-5:1)
논증의 마무리와 적용의 시작 (4:8-11)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 (4:12-18)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4:19-20)
종의 멍에를 다시 메지 말라 (4:21-5:1)
12.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 (갈 5:2-12)
행위의(行爲義)의 길과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길 (5:2-6)
미혹하는 대적들에 대한 비판 (5:7-12)
13. 사랑과 성령 안에 있는 율법 (갈 5:13-18)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의 삶 (5:13-15)
성령의 능력으로 실천하는 성도의 삶 (5:16-18)
14.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갈 5:19-26)
육체의 일 (5:19-21)
성령의 열매 (5:22-23)
결론 (5:24-26
15. 공동체적 의무와 개인적 의무 (갈 6:1-10)
서로의 짐, 자기의 짐 (6:1-6)
낙심을 이긴 선행 (6:7-10)
16. 마무리 인사 (갈 6:11-18)
1.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1-10)
서론
인사말 (1:1-5)
하나님의 심부름꾼 (1:1-2)
폭풍 속에서 누리는 평강 (1:3-4)
다른 복음 (1:6-9)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복음
2. 바울이 전한 복음 (갈 1:11-17)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1:11-12)
은혜의 부르심 (1:13-17
3. 정직하고 지혜로운 바울 (갈 1:18-2:10)
정직과 은혜 (1:18-24)
전도의 열정과 뱀 같은 지혜 (2:1-10)
또 하나의 문제
예루살렘교회 앞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설명하는 바울(2:1-2)
열매1: 사도단으로부터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전폭적인지지 를 얻음 (2:3)
열매2: 종의 신분으로 다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차단함(2:4-6)
열매3: 사역의 분담 (2:7-10)
같이 가야 하는 전도의 열정과 뱀 같은 지혜
4. 베드로를 꾸짖는 바울 (갈 2:11-14)
5. 의에 이르는 두 길 (갈 2:15-21)
의에 이르는 두 길 (2:15-16)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길의 결과 (2:17-18, 2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길의 결과 (2:19-20)
율법의 정죄의 관할권으로부터 하나님의 관할권으로 (2:19)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 (2:20)
6. 바울의 복음변증 1 : 성령체험에 호소 (갈 3:1-5)
7. 바울의 복음변증 2 : 구약성경에 호소 (갈 3:6-14)
아브라함 (창 15:6; 17:24)
에발산의 저주 (신 27:26)
행하면 살리라 (레 18:5)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결론
8. 언약에 근거한 논증 (갈 3:15-18)
9. 율법의 기능 : 감독하는 후견자 (갈 3:19-25)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율법 (3:19-20)
죄 아래 감금된 인류 (3:21-22)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감독하는 후견자 (3:23-25)
10.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세계 (갈 3:26-4:7)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세계 (3:26-29)
부유한 가정의 상속자가 된 아들 (4:1-7)
11. 다시 메지 말아야 할 종의 멍에 (갈 4:8-5:1)
논증의 마무리와 적용의 시작 (4:8-11)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 (4:12-18)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4:19-20)
종의 멍에를 다시 메지 말라 (4:21-5:1)
12.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 (갈 5:2-12)
행위의(行爲義)의 길과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길 (5:2-6)
미혹하는 대적들에 대한 비판 (5:7-12)
13. 사랑과 성령 안에 있는 율법 (갈 5:13-18)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의 삶 (5:13-15)
성령의 능력으로 실천하는 성도의 삶 (5:16-18)
14.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갈 5:19-26)
육체의 일 (5:19-21)
성령의 열매 (5:22-23)
결론 (5:24-26
15. 공동체적 의무와 개인적 의무 (갈 6:1-10)
서로의 짐, 자기의 짐 (6:1-6)
낙심을 이긴 선행 (6:7-10)
16. 마무리 인사 (갈 6:11-18)
책 속으로
갈라디아서는 교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서신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로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연구하고 강의하면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특히 루터가 좋아했던 서신이었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나는 사실상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부인 캐더린이다.”
--- p.16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바른 복음은 무엇인가요?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은 2장 16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본문에서 말하는 “의롭게 된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너는 의로운 자다”라고 판단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곧 바울은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 곧 율법을 행한 어떤 공로가 전혀 개입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 p.24
이와 같은 바울의 행동은 교회 전체의 평화를 위하여 한 걸음 물러날 줄 아는 탄력 있는 바울의 인품을 잘 보여줍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토록 강조해 온 바울이 이처럼 겸손하게 예루살렘교회의 판단을 구한 것은 바울이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의 행동은 유대주의자들에게 “봐라, 너의 행동은 네가 전하는 복음에 어떤 결함이 있으니까 사도단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공격의 빌미를 줄 수도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같은 오해의 소지를 예견하면서도 복음사역이 방해받지 않게 하려는 중심을 가지고 이 일을 결행한 것입니다.
--- p.45
순결이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내적인 마음의 상태를 강조한다면, 지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중한 외적인 행동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바른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내적인 순결이라는 아름다운 보화는 거기에 합당한 좋은 그릇에 담아야 빛이 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결의 덕, 하나님을 향한 거짓 없고 때로는 불붙는 열정은 “뱀 같은 지혜”라는 견실한 그릇 안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 p.55
“모든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 곧, 하나님 앞에서 법정적으로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써”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모름지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행하는 것을 가지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여 의에 이르고자 하는 길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 p.77
그런데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는 부정적인 선언은 긍정적인 선언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발판이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동전의 뒷면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뒷면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사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아 안에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거하시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주십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에서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기 시작한 이후부터는”을 뜻합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는 말은 “내가 육체 안에서 그 생명을 산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이 누구의 생명입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푹 잠겨서 그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잠겨서 사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 p.91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미 행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을 알리는 극히 중요한 행위입니다. 바로 이 믿는 행위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조차 없습니다. 문제는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행위가 과연 하나님 앞에 내어놓았을 때 의롭다는 선언을 끌어낼 만큼 견실하고 완전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만큼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p.108
긴 논증을 마친 바울은 18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유업은 곧 유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업은 하나님이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는 선언을 해 주시는 것 곧, 구원을 뜻합니다. 만일 의롭다는 선언유업이 “율법에서” 곧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1장 7절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유업 곧 의롭다는 선언은 하나님이 약속을 통하여 은혜로 주신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 p.141
율법은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전달해 주는 사자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율법이라는 사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율법이 인간을 사망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다만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이 사망의 형벌을 내리신다는 정보를 전달해 줄 뿐입니다. 또 율법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 p.150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5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들” 곧, 초보적인 종교원리들 아래 있었던 우리를 속량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들”은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양자로 되어 있습니다. 양자는 혈통 상으로는 아들이 아니지만, 법적으로 아들로 여겨주는 것을 뜻합니다. 신자들은 본질상 성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들이 성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성자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은 것을 보시고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주십니다.
--- p.169
바울은 자신이 다시 시작하려는 일의 목적을 새로운 용어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간 개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다는 것은 법정적인 선언으로서 선언을 받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변화를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이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내면과 생활 속에서 실질적으로 찾아오는 변화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 p.184
정하심 → 부르심 → 의롭다 하심 → 영화롭게 하심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한 과정이 빠져 있습니다. 곧 “성화”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화도 물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성화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성령의 사역과 은혜에 반응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개입되는 한 그 결과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결과는 칭의의 때이건 아니면 영화의 때이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202
소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말한 바울은 계속하여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삶을 말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5장 6절에서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표현된다 또는 역사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믿음과 사랑의 긴밀한 관련성을 말한 바울은 여기서는 사랑의 실천방법을 말합니다. 바울이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율법이 성도들에게 계속하여 유효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14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 p.217
바울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소개한 뒤에 24절에서 성도들의 신분을 재서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일어난 사건을 재차 묘사한 것입니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는 말은 성도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의 지배권, 장악력을 하나님이 깨뜨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p.241
바울은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상처들과 상흔들을 자신이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리스도의 보호하심 아래 있음을 증명하는 표식으로 인식했습니다. “너희에게 할례의 흔적이 있느냐? 나에게는 십자가 고난의 흔적이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 흔적을 가진 자신을 부당하게 괴롭히는 자들은 곧 그리스도를 괴롭히는 자들이요, 하나님을 괴롭히는 행동을 하는 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은혜”를 기원하면서 서신을 마무리 짓습니다.
--- p.16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바른 복음은 무엇인가요?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은 2장 16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본문에서 말하는 “의롭게 된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너는 의로운 자다”라고 판단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곧 바울은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 곧 율법을 행한 어떤 공로가 전혀 개입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 p.24
이와 같은 바울의 행동은 교회 전체의 평화를 위하여 한 걸음 물러날 줄 아는 탄력 있는 바울의 인품을 잘 보여줍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토록 강조해 온 바울이 이처럼 겸손하게 예루살렘교회의 판단을 구한 것은 바울이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의 행동은 유대주의자들에게 “봐라, 너의 행동은 네가 전하는 복음에 어떤 결함이 있으니까 사도단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공격의 빌미를 줄 수도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같은 오해의 소지를 예견하면서도 복음사역이 방해받지 않게 하려는 중심을 가지고 이 일을 결행한 것입니다.
--- p.45
순결이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내적인 마음의 상태를 강조한다면, 지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중한 외적인 행동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바른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내적인 순결이라는 아름다운 보화는 거기에 합당한 좋은 그릇에 담아야 빛이 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결의 덕, 하나님을 향한 거짓 없고 때로는 불붙는 열정은 “뱀 같은 지혜”라는 견실한 그릇 안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 p.55
“모든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 곧, 하나님 앞에서 법정적으로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써”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모름지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행하는 것을 가지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여 의에 이르고자 하는 길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 p.77
그런데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는 부정적인 선언은 긍정적인 선언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발판이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동전의 뒷면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뒷면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사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아 안에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거하시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주십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에서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기 시작한 이후부터는”을 뜻합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는 말은 “내가 육체 안에서 그 생명을 산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이 누구의 생명입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푹 잠겨서 그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잠겨서 사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 p.91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미 행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을 알리는 극히 중요한 행위입니다. 바로 이 믿는 행위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조차 없습니다. 문제는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행위가 과연 하나님 앞에 내어놓았을 때 의롭다는 선언을 끌어낼 만큼 견실하고 완전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만큼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p.108
긴 논증을 마친 바울은 18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유업은 곧 유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업은 하나님이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는 선언을 해 주시는 것 곧, 구원을 뜻합니다. 만일 의롭다는 선언유업이 “율법에서” 곧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1장 7절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유업 곧 의롭다는 선언은 하나님이 약속을 통하여 은혜로 주신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 p.141
율법은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전달해 주는 사자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율법이라는 사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율법이 인간을 사망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다만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이 사망의 형벌을 내리신다는 정보를 전달해 줄 뿐입니다. 또 율법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 p.150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5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들” 곧, 초보적인 종교원리들 아래 있었던 우리를 속량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들”은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양자로 되어 있습니다. 양자는 혈통 상으로는 아들이 아니지만, 법적으로 아들로 여겨주는 것을 뜻합니다. 신자들은 본질상 성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들이 성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성자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은 것을 보시고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주십니다.
--- p.169
바울은 자신이 다시 시작하려는 일의 목적을 새로운 용어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간 개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다는 것은 법정적인 선언으로서 선언을 받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변화를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이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내면과 생활 속에서 실질적으로 찾아오는 변화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 p.184
정하심 → 부르심 → 의롭다 하심 → 영화롭게 하심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한 과정이 빠져 있습니다. 곧 “성화”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화도 물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성화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성령의 사역과 은혜에 반응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개입되는 한 그 결과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결과는 칭의의 때이건 아니면 영화의 때이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202
소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말한 바울은 계속하여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삶을 말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5장 6절에서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표현된다 또는 역사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믿음과 사랑의 긴밀한 관련성을 말한 바울은 여기서는 사랑의 실천방법을 말합니다. 바울이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율법이 성도들에게 계속하여 유효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14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 p.217
바울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소개한 뒤에 24절에서 성도들의 신분을 재서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일어난 사건을 재차 묘사한 것입니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는 말은 성도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의 지배권, 장악력을 하나님이 깨뜨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p.241
바울은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상처들과 상흔들을 자신이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리스도의 보호하심 아래 있음을 증명하는 표식으로 인식했습니다. “너희에게 할례의 흔적이 있느냐? 나에게는 십자가 고난의 흔적이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 흔적을 가진 자신을 부당하게 괴롭히는 자들은 곧 그리스도를 괴롭히는 자들이요, 하나님을 괴롭히는 행동을 하는 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은혜”를 기원하면서 서신을 마무리 짓습니다.
--- p.266~267
출판사 리뷰
세상이 이상하다.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기괴했다. 반기독교다. 관람 첫 소감이다. 놀라운 것은 절대다수의 프랑스 국민이 잘됐다고 본다는 거다. 한때 기독교 국가였다고 불러 이상하지 않을 나라와 민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상한 것은 세상만이 아니다.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유사기독교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을 슬쩍 끼워 사람의 행함을 하나님의 은혜와 동등한 반열로 높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기독교를 오해하고,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며, 구원의 은혜를 상실한 세상과 사람에게 바울의 갈라디아서 말씀을 전할 수 있어 감사하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갈라디아서”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갈라디아서는 교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서신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로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연구하고 강의하면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특히 루터가 좋아했던 서신이었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나는 사실상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부인 캐더린이다’”(16쪽). 갈라디아서는 오늘의 기독교를 있게 한 종교개혁의 출발이다. 혹시 수백 년 지나며 왜곡된 교회, 변질된 신앙의 모습이 있다면 바로잡을 지침서가 될 것이다. 저자는 갈라디아서가 제공하는 복음과 은혜, 구원받은 자의 삶에 대하여 정확하고 자세하게 풀어 준다. 저자의 말을 세 곳만 살펴보자.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은 2장 16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본문에서 말하는 ‘의롭게 된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너는 의로운 자다’라고 판단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곧 바울은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 곧 율법을 행한 어떤 공로가 전혀 개입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24쪽).
“바울은 자신이 다시 시작하려는 일의 목적을 새로운 용어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간 개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다는 것은 법정적인 선언으로서 선언을 받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변화를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이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내면과 생활 속에서 실질적으로 찾아오는 변화들을 말하는 것입니다”(184쪽).
“정하심 → 부르심 → 의롭다 하심 → 영화롭게 하심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한 과정이 빠져 있습니다. 곧 ‘성화’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화도 물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성화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성령의 사역과 은혜에 반응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개입되는 한 그 결과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결과는 칭의의 때이건 아니면 영화의 때이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202쪽)
저자의 말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인지,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바르게 배울 수 있다. 핵심은 은혜다. 성도의 삶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친다. 그는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산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소원처럼 “바울의 사상의 깊이와 넓이를 체험하면서 구원의 확신과 아울러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다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일독을 권한다.
이상한 것은 세상만이 아니다.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유사기독교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을 슬쩍 끼워 사람의 행함을 하나님의 은혜와 동등한 반열로 높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기독교를 오해하고,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며, 구원의 은혜를 상실한 세상과 사람에게 바울의 갈라디아서 말씀을 전할 수 있어 감사하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갈라디아서”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갈라디아서는 교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서신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로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연구하고 강의하면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특히 루터가 좋아했던 서신이었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나는 사실상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부인 캐더린이다’”(16쪽). 갈라디아서는 오늘의 기독교를 있게 한 종교개혁의 출발이다. 혹시 수백 년 지나며 왜곡된 교회, 변질된 신앙의 모습이 있다면 바로잡을 지침서가 될 것이다. 저자는 갈라디아서가 제공하는 복음과 은혜, 구원받은 자의 삶에 대하여 정확하고 자세하게 풀어 준다. 저자의 말을 세 곳만 살펴보자.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은 2장 16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본문에서 말하는 ‘의롭게 된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너는 의로운 자다’라고 판단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곧 바울은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 곧 율법을 행한 어떤 공로가 전혀 개입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24쪽).
“바울은 자신이 다시 시작하려는 일의 목적을 새로운 용어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간 개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다는 것은 법정적인 선언으로서 선언을 받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변화를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이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내면과 생활 속에서 실질적으로 찾아오는 변화들을 말하는 것입니다”(184쪽).
“정하심 → 부르심 → 의롭다 하심 → 영화롭게 하심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한 과정이 빠져 있습니다. 곧 ‘성화’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화도 물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성화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성령의 사역과 은혜에 반응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개입되는 한 그 결과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결과는 칭의의 때이건 아니면 영화의 때이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202쪽)
저자의 말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인지,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바르게 배울 수 있다. 핵심은 은혜다. 성도의 삶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친다. 그는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산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소원처럼 “바울의 사상의 깊이와 넓이를 체험하면서 구원의 확신과 아울러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다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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