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한국역사의 이해 (독서>책소개)/8.우리문화재

덕수궁 경희궁 실록으로 잃다

동방박사님 2022. 4. 12.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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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군의 자택에서 대한제국 황제의 궁궐까지, 덕수궁!
격동의 역사 속 제모습을 잃어버린 경희궁!


덕수궁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잊힌 보조궁궐 신세였다가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역사에 재등장하여 주목 받기 시작한 궁궐이다. 덕수궁은 본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자택이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궁궐을 대신해 임시거처 역할을 하면서 궁궐로 그 모습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창덕궁이 복원되고 다시 잊혀지는 듯 했으나 대한제국 시절 황제의 궁궐로 탈바꿈하면서 다시 역사에 재등장하기 시작한다. 동서양의 건축양식이 어우러져 있는 덕수궁이 담고 있는 격동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황제의 궁궐로 재탄생한 경운궁(덕수궁)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거처를 옮기려고 했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때 고종은 의외의 선택을 했다.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것이다. 당연히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국내외의 여론과 압력이 비등했고, 1년여를 버티던 고종도 결국에는 러시아 공사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무서워 경복궁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경운궁으로 들어갔다. 9월 17일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서 소공동(小公洞)의 원구단(圓丘壇=환구단)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날부터 1907년까지 10년간 경운궁은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가 정무를 보던 정궁(正宮=法宮)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고종 34년(1897) 10월 13일 /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다. 반조문(頒詔文)에,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 조서에 쓰는 황제의 자칭(自稱). 곧 천명(天命)에 따라 제운(帝運)을 계승했다는 뜻)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 (중략) …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 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 (후략) …

고명딸을 위해 궁 안의 전각을 유치원으로 만들다?!
회갑을 앞둔 나이에 얻은 고명딸이기에 고종은 덕혜옹주를 끔찍이도 아꼈다. 고종은 어린 덕혜를 위해 변복동 여사를 유모상궁으로 두었는데, 덕혜가 보고 싶어 찾아갈 때에도 유모가 어린 덕혜에게 젖을 물리고 있을 때면 덕혜가 놀라거나 울까봐 임금 앞에서도 유모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때문에 ‘천하의 주상 전하 앞에 누울 수 있는 것은 변 유모 뿐’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렇듯 귀한 고명딸을 위해 덕수궁 내의 준명전을 유치원으로 만들었는데 원래 편전으로 사용될 때
는 왕이 건물의 주인이어서 준명전이었으나, 1916년 준명전의 용도를 편전에서 유치원으로 바꾸면서 왕과 왕비의 전각에만 쓰는 전(殿)급 이름을 사용하지 못해 바꾼 듯하다.

순종 9년(1916) 4월 1일 /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여 복녕당 아기씨를 교육할 것을 명하다. 덕수궁(德壽宮)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여 복녕당(福寧堂)의 아기씨〔阿只氏〕를 교육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교구치 사다코와 장옥식을 보모(保姆)로 촉탁하였다.

일제강점기때 제모습을 잃어버려 현재 우리는 경희궁의 본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실록에 수없이 등장하는 경희궁을 통해 화려했던 궁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복원해보자.

동생의 집을 빼앗아 지은 경희궁?!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광해군의 즉위 과정에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잡음이 많았다. 광해군은 서자 출신인데다가 더군다나 장남이 아닌 차남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풍수지리와 관련된 인왕산 왕기설이 확 퍼졌다. 즉, ‘지금의 임금인 광해군은 서자출신에다가 심지어 명나라로부터 제대로 인정도 못 받은 임금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제대로 된 임금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새 임금은 인왕산의 왕기를 받은 사람이다.’라는 식의 소문이었다. 광해군이 그 소문을 쫓아 가보니, 인왕산 밑의 새문동이라는 동네가 지목되었고, 그 자리에는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을 강제로 빼앗고 궁을 지었는데 그 궁이 바로 경덕궁이었고, 훗날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실제로 그곳에 살던 정원군의 아들이 반정을 통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인조이다.

광해 9년(1617) 6월 11일 / 새 궁궐을 새문동에다 건립할 것을 의논하다
새 궁궐을 새문동(塞門洞)에다 건립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다. 성지(性智)가 이미 인왕산 아래에다 새 궁궐을 짓게 하고, 술인(術人) 김일룡이 또 이궁(離宮)을 새문동에다 건립하기를 청하였는데, 바로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이다. 왕이 그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들였는데, 김일룡이 왕의 뜻에 영합하여 이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 (후략) …

왕이 궁궐에서 암살당할뻔한 사건이?!
구중궁궐이라 불릴 만큼 궁궐은 넓고도 복잡한 미로 같은 곳으로 통했다. 또한 한 나라의 임금이 사는 곳인 만큼 각 건물들에 대한 경계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궁궐 안에 자객이 왕의 침전까지 침입했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정조임금 때의 일이다. 정조임금이 경희궁 존현각에 있을 때 자객이 지붕 위까지 숨어들었던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뤄질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에 관한 내용은 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조 1년(1777) 7월 28일 / 궁궐 내에 도둑이 들어 사방을 수색하게 하다
대내(大內)에 도둑이 들었다. 임금이 어느 날이나 파조(罷朝)하고 나면 밤중이 되도록 글을 보는 것이 상례이었는데, 이날 밤에도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았고, 곁에 내시 한 사람이 있다가 명을 받고 호위하는 군사들이 직숙(直宿)하는 것을 보러 가서 좌우가 텅 비어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 동북쪽에서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려왔고, 어좌의 중류(中?, 집의 한가운데 있는 방)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 (중략) … 홍국영이 말하기를, … (중략) … 필시 흉얼(凶孼)들이 화심(禍心)을 품고서 몰래 변란을 일으키려고 도모한 것입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변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나는 새나 달리는 짐승이 아니라면 결단코 궁궐 담장을 뛰어넘게 될 리가 없으니, 청컨대 즉각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게 하소서.” … (후략) …

이처럼 궁의 각 건물들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우리가 접하는 문화재를 컴퓨터로 예를 들자면 유물 또는 문화재들은 하드웨어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역사)는 소프트웨어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컴퓨터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듯 문화재 속에 담긴 역사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문화재 답사를 했다고 볼 수 없다. 스스로 한번 자문해보자. 우리는 항상 겉으로 들어난 덕수궁과 경희궁의 하드웨어만을 둘러보고 있지 않은가? 본 서적에 실린 소프트웨어(역사)를 잘 숙지하여 덕수궁, 경희궁의 하드웨어와 접목시킨다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궁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목차

머릿말 _4

제1부 덕수궁
궁성과 문 _012
덕수궁의 역사Ⅰ - 궁궐이 된 월산대군의 집 _013
덕수궁의 역사Ⅱ - 왕궁에서 황제궁으로 _024
덕수궁의 역사Ⅲ -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_034
대한문 - 이름 변경의 용의자, 이토 히로부미 _050

치조 일원Ⅰ - 정전 _066
중화문 - 매국노 이완용의 흔적을 찾다 _067
중화전 - 왕궁보다 초라한 황궁 _082

치조 일원Ⅱ - 편전들 _100
준명당 - 덕혜옹주의 유치원이 된 편전 _101
즉조당 - 대한제국 초기의 으뜸 전각 _117
석어당 - 인목대비의 한이 서린 곳 _128
덕홍전 - 대한제국을 다시 조선으로 되돌린 일제 _146

연조 일원 _155
함녕전 - 고종은 과연 독살당했나? _156
정관헌 - 임금 앞에서 안경쓰면 사형? _174

석조전 일원 _185
석조전 - 마지막 왕손 형제를 기억하며 _186
광명문 - 이완용보다 더 친일로 인정받은 고종의 친형 _195

덕수궁 밖 문화재 _214
환구단 - 밖으로는 왕, 안으로는 황제의 이중성 극복 _215
중명전 - 헤이그 특사의 후폭풍이 몰아치다 _224

제2부 경희궁
궁성과 문 _238
경희궁의 역사 - 서궐이라 불린 궁궐 _239
흥화문 - 한때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던 문 _252

남아있는 전각들 _263
숭정문과 숭정전 - 치조(治朝)중 유일한 주심포 건물 _264
자정전 - 성학십도를 논하다 _275
태령전 - 영조임금의 어진을 모신 이유 _284

사진 협조 _300
 

저자 소개 

저 : 최동군
 
강원도 원주에서 육군 보병 장교 최준호 대위와 김주자 여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3년 부산 연제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동해중학교, 동인고등학교를 거쳐 1991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문화와 역사에는 특별한 지식이 없는 너무나도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러던 중 1997년 태어나서 처음 참여하게 된, 2박 3일간의 경주 문화답사에서 거의 신내림에 가까운 큰 문화적 충격 및 감명을 받았고 그 후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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