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8.우리문화재

서울은 깊다

동방박사님 2022. 1. 2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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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서울사와 도시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역사와 인류학, 공간 비평과 문화 비평을 가로질러 도시 ‘서울’에 대해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한 보고서로 서울에 관해 깊이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한 곳에 모아서 들려주고 있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그 표피에 가려진 다양하고 심오한 의미와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서울’이라는 말의 본 의미를 살피는 데서 시작해, 서울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과 비평을 시도한다. ‘똥개’, ‘땅그지’, ‘무뢰배’, ‘깍쟁이’등의 말의 유래를 추적해 오래전 서울의 생태와 풍속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는가 하면, 청계천, 종로 거리, 덕수궁 분수대 같은 상징물들의 변화에 담긴 의미를 과감하게 추리해내기도 하고, 또 물장수, 복덕방 같은 사라져버린 문화를 회고담처럼 들려주기도 한다.이 풍성한 이야기들의 바탕에는 소비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현대 도시, 현실과 멀어져 장식품으로 전락한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깔려 있다.

역사적 사실과 고전 자료에 대한 적절한 참조, 탄탄한 역사적 지식에 기반한 과감한 추리,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발견하는 에세이적 구성, 시의성 있는 비판적 성찰 등을 책에 수록된 200여 컷의 풍부한 사진자료와 함께 더욱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 책을 펴내며

1. 신시, 서울
2. 서울과 지방
3. 정도전의 서울, 이방원의 서울
4. 노는 놈과 미친년
5. 뒷골목
6. 똥물, 똥개
7. 등 따습고 배부른 삶
8. 땅그지
9. 무뢰배
10. 촌뜨기
11. 압구정과 석파정
12. 남주북병南酒北餠
13. 탕평, 땅평
14. 어섭쇼
15. 복수의 하나님
16. 종로, 전차
17. 덕수궁 돌담길
18. 팔각정
19. 시계탑
20. 제중원
21. 촬영국
22. 파리국
23. 도깨비시장, 돗떼기시장
24. 물장수
25. 복덕방
26. 협률사
27. 와룡묘
28. 덕수궁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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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출처
 
 

저자 소개 

저 : 전우용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역사학자. SNS에 세상일에 대한 촌평을 쓰고 있다. 그의 쓴소리는 날카롭고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시대의 문제’를 함께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돕는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를 지냈다...
 

책 속으로

역사와 문화의 시대가 열렸다는데, 인문학은 오히려 위기에 빠져드는 아이러니의 상황이 펼쳐졌다. 그런데 사실 이런 현상이 아이러니로 보인 것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문화’ 다음에 ‘상품’이라는 두 글자를 빼버린 탓이다. 문화재 복원과 파괴가 오버랩되고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역사·문화 요소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는 것은 상품화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많은 역사학자들이 ‘역사와 문화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에 현혹되었고, 역사의 상품화가 곧 역사의 대중화라는 신화를 유포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 시대적 조류가 휩쓰는 사이에 청계천 바닥에 있던 유적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숭례문 문루는 불타 내려앉았다.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와 이듬해의 삼풍백화점 붕괴가 물량 위주의 성장제일주의에 대한 혹독한 교훈이었다면, 2008년의 숭례문 화재는 역사·문화 상업주의에 대한 뼈아픈 경고라 할 수 있다. ---pp.8~9

정도전은 새 도시에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이 거처할 곳을 아예 없애버리려 했다. 정도전은 종묘와 사직, 궁궐과 관아, 저자와 민가, 학교와 사당만으로도 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세부 위치를 선정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새 도시를 공적 건물과 공적 기관만으로 채우고자 했고, 왕에게조차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p.33

1398년,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였다. 정도전이 새 도시 공간 위에 구현하고자 했던 꿈도 아울러 사라졌다. 새 임금 정종은 다시 개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종묘와 사직은 한양에, 왕궁은 개경에 있는 어정쩡한 양경兩京 시절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1400년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5년 거처를 다시 한양으로 옮겼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한양 공간 도처에 새겨 놓은 꿈을 다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소를 모욕할 수는 있어도 그 흔적을 지울 수는 없는 법이다. 장소 위에 새겨진 역사는 누적될 뿐 대체되지는 않는다. 이방원은 정도전의 집을 사복시司僕寺 마굿간으로 바꿔버렸고, 신덕왕후 묘의 신장석을 광교 교각의 초석으로 삼아버렸지만, 장소가 남긴 흔적은 어쨌든 이방원보다 훨씬 오래 살아 지금껏 남아 있다. ---p.36

그러나 이든 동이든 골목 안의 택지 구성은 기본적으로 같았다. 고관대작이 사는 큰 집이 막다른 집이 되고 그 앞으로 난 골목길 좌우에 작은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꼴을 하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는 결코 가로지를 수 없는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가 있었을 터이지만 그래도 이웃이었다. 불이 나도, 염병이 돌아도, 도둑이 들어도 같이 대처해야 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를 구성해야 했고, 그 안에서 일상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조에서는 골목끝 고루거각에 사는 부자 나리가 같은 골목 안에서 굶주리는 이웃에 자선을 베풀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일상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연대의식이었다. ---pp.55~56

영조대의 준천濬川은 거지들에게 큰 선물을 하나 남겼다. 개천 바닥에서 퍼올린 흙을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없어 오간수문 양쪽에 쌓아두었는데, 그러고 보니 두 개의 산이 생겨버렸다. 이 산을 조산造山, 또는 가산假山이라 불렀다(오늘날 방산동의 옛 이름은 조산동이다). 다리 밑을 차지하지 못한 거지들이 이 산에 땅굴을 파고 거처를 마련했다. 그로써 ‘땅거지’ 무리가 생겨났다. 영조 임금은 준천의 부산물로 생긴 가산에 땅거지가 모여들자, 이들을 방치할 경우 심각한 치안 문제가 생길까 우려했던 모양이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계 거리를 줄 심산으로 뱀 잡아 파는 독점권을 주었다. 그때는 신해통공 전이라 모든 물종에 다 독점 판매권이 붙어 있었다. 뱀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땅거지를 땅꾼이라고도 했는데, 그 이후로 뱀잡는 사람을 땅꾼이라 부르게 되었다.

땅거지는 출현하자마자 수적으로 다리 밑 거지를 압도했다. 1년에 한 차례, 각처의 거지들이 모여 거지패의 총두목 - 꼭지딴이라고 했다 - 을 뽑는 행사를 가졌는데, 그 행사가 가산에서 열렸다. 가산의 거지 두목이 서울 장안 거지 전체를 ‘통솔’하게 되었던 것이다. 꼭지딴은 그 위세가 워낙 당당하여 거지들의 잔칫날에는 장안의 명기名妓도 마음대로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기생 처지에서도 무료 봉사만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거지들의 입이 가장 훌륭한 광고매체였다. 무슨 군君이니 무슨 대감이니 하는 자들도 거지들을 통해 기생의 평판을 들었다고 한다. ---pp82~83

18세기 중엽 서울에 반입되는 쌀 중 대략 1/3 정도가 양조용으로 쓰였다. 이 무렵 서울 주민들이 ‘밥’으로 먹는 쌀이 연간 100만 석 정도였으니 ‘술’로 먹는 쌀은 그 절반인 50만 석에 달했던 것이다. 굶주림을 참지 못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서울로 밀려드는 거지떼, 땅꾼이 날로 늘고 있는데, 같은 도시 한 편에서는 ‘밥 배’를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서 ‘술 배’까지 가득 채우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왕정의 불인지심不刃之心으로 이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영조의 금주령은 바로 배 불리는 데 쓰이지 않는 쌀 소비를 줄여 백성의 질고를 덜어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세계사상에서 금주령이 끝내 성공한 예는 없었다. 이때에도 제사에 쓰기 위해서라거니 병자용 약으로 쓰기 위해서라거니 노인을 봉양하기 위해서라거니 하면서 갖은 예외 사안을 만들어 술을 만들고, 팔고, 마셨다. ---p.122

1970년 10월 30일 오전 10시, 종로 네거리 보신각 앞에 지하철 전노선의 기준이 되는 수준점이 설정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하철 건설이 본격 시작되었다. 옛 전차 노선 아래로 지하철을 놓겠다는 명시적 합의는 없었지만, 또 이미 이때의 서울은 사대문 안으로 국한되었던 1890년대의 서울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종로 네거리 보신각 앞을 서울의 중심으로 인정했고, 지하철 1호선은 종로를 관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까지도 사람들은 종로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집단적 이끌림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탑골공원과 종묘공원 사이를 산보하는 노인들은 전차가 달리던 옛 종로의 모습을 기억하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왜 서울역에서 청량리로 뻗은 노선이 지하철 1호선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110여 년 전 이 길 위에서 벌어졌던 장중한 행렬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도 역사다. 한성전기회사는 러일전쟁 직후 한미전기회사로 바뀌었고, 명성황후의 능은 고종 사후 금곡으로 옮겨졌다. 1929년에 『연혁사』는 전차에 관한 고종의 기획을 한갓 코미디로 만들어버렸고, 1933∼1934년 사이에는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엄숙하게’ 늘어서 있던 백양목 가로수들이 모두 베어져버렸다. 1968년 종로 전차 궤도가 철거될 때쯤에는 이미 더 이상 잊을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pp.184~185

1880년대 초반 조선 정부의 신문물 도입 정책은 일견 어수선해 보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려운 재정 형편에서나마 조선보다 앞서 서양 문물을 수용했던 중국과 일본의 경험을 나름대로 곱씹은 흔적이 엿보인다. 생사生絲 수출을 위한 잠상공사나 광산 개발을 위한 광무국, 조운 개혁을 위한 전운국 등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갓 조우한 나라에서 대외 수지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또 연무국이나 양춘국은 담배와 술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해 보려는 의도에 따라 만든 것이었다. ‘백해무익’한 술과 담배에 중과세하는 것은 근대 국가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표식 같은 것인데, 조선 정부 역시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이 점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p.276

왕조 정부가 도성에서 근무하는 군병들의 쪼들리는 살림을 조금이라도 펴 주기 위해 짜낸 묘안은 그들에게 ‘장사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국가의 배려 덕분에 보수로 받은 군포軍布― 당시 훈련도감 군인들이 받은 군포는 최상급 품질을 자랑했다 ― 를 바로 내다 팔거나 처자를 시켜 띠, 대님, 댕기 등으로 가공하게 해서는 내다 팔았다.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또 비슷한 일을 찾아 문어발처럼 뻗어나가는 법. 이윽고 군인들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취급하면서 본격적인 장사꾼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의 군제는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가 아니라 병상일치제兵商一致制에 입각하여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p.292

복덕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지복地福과 인덕隣德을 알선해 주는 업소이다. 그래서 복덕방 주인은 풍수쟁이를 겸해야 했고, 동네 사정도 꿰뚫어야 했다. 어느 집에 살던 누가 언제 입신양명해서 떠났는지, 혹은 어느 집에서 멀쩡히 잘 살다 급살 맞은 사람이 나왔는지, 어느 집 주인이 성질이 고약해서 늘 이웃에게 폐를 끼치는지, 어느 집 천정에서 물이 새고 어느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지 등등을 다 알아야만 비로소 온전한 복덕방 주인의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복덕방 주인’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능력은 오늘날의 ‘공인중개사’에게 요구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섬세하고도 총체적인 것이었다. 평당 가격으로 완벽하게 환산되는 오늘날의 아파트도 집주인이 망해 나갔다면 값이 깎이기는 하겠지만, 그걸 일부러 알리는 공인중개사는 거의 없고, 그걸 아는 공인중개사도 드물다. ---p.331

시위군악대는 불과 6개월 만에 서양인들의 찬탄을 받을 만큼 훌륭한 연주 솜씨를 보여주었다. 시위군악대는 1901년 9월 9일 고종황제 탄신일 경축연에서 ‘내외 귀빈’을 청중으로 앉히고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했는데, 그 1년여 뒤부터는 ‘시민공원’으로 만들어진 탑골공원에서 매주 목요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 연주회를 열었다. 서울 사람들이 트럼펫이니 오보에니 클라리넷이니 하는 악기 소리에 어떤 감흥을 가졌는지는 알 방도가 없으나,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군악대의 ‘엄숙·경건·절도’를 상상해보건대, 아마도 연주회장에서 함부로 떠들거나 마구 돌아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연주회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함께 보고 즐기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불편도 있다’는 공중질서, 공중도덕의 최소 개념을 배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pp.354~355
 

출판사 리뷰

역사와 인류학, 공간 비평과 문화 비평을 가로지르는, 도시 ‘서울’에 대한 인문학적 보고서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하고 서울학연구소에서 10년 이상 서울사 관련 연구를 해온 전우용의 본격적인 저작이다. 서울에 관한 책들은 많지만, 건축가나 저널리스트, 혹은 근대문학 연구자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서울사와 도시이론을 공부한 연구자가 ‘서울’에 대한 종합적인 단행본을 출간한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건축이나 근대사 등 지엽적 시각에 한정되지 않은 채 서울에 관한 깊이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서울의 과거와 현재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그 표피에 가려진 다양하고 심오한 의미와 사연들을 들추어낸다. 먼저 ‘서울’이라는 말의 본 의미를 살피는 데서 시작해, 서울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과 비평을 시도한다. ‘똥개’, ‘땅그지’, ‘무뢰배’, ‘깍쟁이’ 등의 유래를 추적해 오래전 서울의 생태와 풍속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는가 하면, 청계천, 종로 거리, 덕수궁 분수대 같은 상징물들의 변화에 담긴 의미를 과감하게 추리해내기도 하고, 또 물장수, 복덕방 같은 사라져버린 문화를 회고담처럼 들려주기도 한다. 이 풍성한 이야기들의 바탕에는 소비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현대 도시, 현실과 멀어져 장식품으로 전락한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깔려 있다.

역사적 사실과 고전 자료에 대한 적절한 참조, 탄탄한 역사적 지식에 기반한 과감한 추리,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발견하는 에세이적 구성, 시의성 있는 비판적 성찰 등을 고루 담은 이 책은 200여 컷의 풍부한 사진자료와 함께 학생들부터 연구자들까지 다양한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서울의 유래부터 생태·주거환경, 계층적 분포와 습속의 변화까지
― 정도 600년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 책은 먼저 도시의 의미, ‘서울’의 본뜻을 묻는 데서 출발한다. 서울은 ‘높이 솟은 울’, 즉 신과 가장 가까운 도시, 가장 신성한 공간이고 정치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라는 뜻이다. 한편 그러기에 서울은 ‘생산’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주변 시골의 생산물을 빨아들이는 ‘소비’의 공간이기도 하다.

서울이 세계의 다른 도시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점은 바로 조선 초 서울의 틀을 구상한 정도전과 이방원의 경복궁 계획에서부터 드러난다. 여타의 오래된 중심도시들과 달리 서울에는 거대한 경기장이나 극장 등 스펙터클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간에 잘 알려진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갈등에서 저자는 도시 서울에서 종교성을 탈색시키고자 했던 정도전의 뜻을 읽어낸다. 또 경복궁을 『주례』에 따른 철저한 공적 공간으로 계획한 정도전과 그 ‘공’을 왕의 사적 권위와 등치시키고자 했던 이방원의 갈등 역시 경복궁과 서울이라는 장소에 고스란히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런 공간에 아로새겨진 역사의 흔적, 무늬를 섬세히 짚어가며 그 구체적인 서사徐事를 되살려내는 것이 곧 도시연구의 본무本務라고 강조한다.
또 다산이 “이里가 귀한 이름이고 동洞은 천한 이름인데 지금은 풍속이 어그러져 사람들이 서울 지명을 모두 동으로 쓴다”고 했던 것에서 출발해 조선 초기 잘 다듬어져 있던 곧은길이 왜 구불구불한 작은 길, 막다른 뒷골목들로 바뀌었는지 생각해보며 서울의 생태적·사회적 변화를 추적한다. 또 오래전 대감집과 여염집이 공존하던 골목 공동체를 기억하며 ‘끼리끼리 모여살기’가 일반화되어가는 현대 서울의 주거환경을 성찰하기도 한다. 이렇게 당시의 역사와 생태·환경적 변화, 또 그로 인한 풍속과 습속의 변화를 연결짓는 서술은 「똥물, 똥개」, 「등 따습고 배부른 삶」, 「땅거지」 등의 장에서도 이어진다.

「무뢰배」, 「촌뜨기」, 「어섭쇼」, 「압구정과 석파정」, 「남주북병」, 「탕평, 땅평」 등의 장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계층적 분포와 각 계층별 생활방식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조선 후기 도시 상업발전 과정과 관직과 부의 양극화 현상은 서울 주민의 계층 분화를 더욱 재촉했다. 양반 사대부들이 자기들만의 성을 공고히 하자, 더 이상 건강한 방식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없게 된 서자·기술직 관리·무반의 무리가 사적인 인맥을 통해 세력 있는 자의 겸인 노릇을 하면서 인생역전을 꿈꾸는 일이 흔해졌고, 이들을 일컫는 말인 ‘무뢰배’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촌뜨기’ 역시 계층적 변화와 맞물려 생겨난 말로, ‘서울에서 나고 자란 자’들이 특권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말이다. ‘어섭쇼’는 서울의 계층구조가 변화를 겪으면서 도시의 익명성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중촌 상인들이 그러한 변화에 적응해 만들어낸 새로운 어법이었다.

가려진 역사에서 근대화의 풍경까지
―과거를 되돌아보는 따뜻한 감성,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추리

「종로, 전차」에서는 종로의 역사를 서울의 통신교통 수단의 변화(전차의 부설과 철거, 지하철의 부설 등)와 함께 살펴본다. 조선시대와 구한말을 거쳐 1960년대까지도 서울의 중심으로 기능했던 종로의 화려한 시절이 ‘전차 철거’와 함께 막을 내리는 쓸쓸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고종의 도로 정비, 경운궁 정비와 관련된 일화가, 「팔각정」에서는 오래 전부터 신성한 형상으로 여겨지던 ‘팔각’이 이승만 시대를 거치며 세속화된 사연 등이 펼쳐진다.

특히 ‘서울’을 다룰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서울, 경성이다. 서울 사람들은 근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끌어갔으며 그것이 서울 공간에는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저자는 「시계탑」을 통해 서울 사람들이 서력과 요일제, 24시제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을, 「제중원」을 통해서는 근대적 위생관을 심어주고 근대적 삶을 훈육하는 장치로서 병원의 기능을 살펴본다. 「파리국」, 「협률사」등의 장에서도 서울에 근대적 의미의 ‘공중’이 탄생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특히 서울 시장의 역사를 압축한 「도깨비시장, 돗떼기시장」에서는 17세기 이후 서울의 독특한 삶을 구성했던 병상일치제兵商一致制의 상황을 조감해볼 수 있다.

숨 가쁘게 변해온 서울의 시공간을 탐사하는 만큼, 이 책에는 최근의 역사지만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가고 있는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물장수’, ‘복덕방’, ‘전차’, ‘덕수궁 돌담길’ 등 벌써 역사가 되어버린 이야기들을 단순한 복고적 감수성을 넘어 기억해내는 작업은 우리의 가까운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또 「덕수궁 분수대」에서는 침강원·분수대라는 파격적 양식이 경운궁(덕수궁)에 들어선 연유가 1904년의 경운궁 화재 사건을 배경으로 과감하게 추리되기도 하고, 다양한 자료와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똥개’, ‘땅거지’, ‘도깨비시장’ 등의 유래가 추론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흥미진진한 글쓰기는 독자들에게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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