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1.한국근대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연구

동방박사님 2022. 4. 26.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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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경성제국대학은 식민지 조선의 최고학부로서 교육과 학술생산의 정점에 섰던 ‘조선총독부 기관’이었으며, 일본의 제국대학 중 처음으로 식민지에 세워진 대학이었다. 학문의 전당을 표방하면서도, 대륙 진출이라는 제국적 과제와 식민통치의 안정화라는 식민지적 과제가 중첩되는 식민지 조선이란 공간에서 경성제대는 ‘국책(國策)과 학문 사이의 균열’이라는 모순된 운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균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경성제대 초대 총장 핫토리 우노키치가 제시한 해답은 바로 ‘조선 연구’였다. 그는 조선 연구가 조선 그 자체만 다루어서는 안 되며, 조선을 통해 중국과 일본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중국과 일본 속에서도 조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조선 연구는 조선을 지양(止揚)함으로써 비로소 ‘동양 문화의 권위’를 지향(志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책은 일본의 다른 어떤 제국대학도 넘보지 못한 독보적인 영역이었던 경성제국대학에서의 조선 연구, 그중에서도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일본인 연구자들의 조선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추적한다. 근대적인 것, 제국적인 것, 식민지적인 것 사이에서 법문학부의 다섯 학자, 즉 오다 쇼고, 이마니시 류, 후지쓰카 지카시, 아베 요시오, 이즈미 아키라를 통해 이들이 추구한 ‘조선 연구’는 무엇이며, 이 연구가 어떻게 변화하고 변주되었는지 그 실체를 밝힌다.

 

목차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를 출간하면서
책머리에

프롤로그 경성제국대학과 식민지 조선 연구의 궤적

1장 제도화되는 식민주의 역사학: 오다 쇼고의 조선사학회와 경성제국대학
관료형 학자의 탄생


통치 업무로서 조선 연구
식민사학의 궤적과 조선사학회
조선사학회의 출범과 그 이면
실패한 전통, 조선반도사 편찬사업
식민지 통사 편찬의 딜레마
강좌라는 형식과 학회라는 이름
통신강좌로서 『조선사강좌』
『조선사강좌』의 면면
조선사학회와 『조선사대계』
조선사 연구자로의 전신과 그 식민주의적 함의

2장 종속화되는 조선 고대사: 이마니시 류의 조선사 기획

또 한 사람의 조선사학 창시자
‘식민사학’,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역사서사와 식민주의 역사학
권력의 서사와 식민주의 역사학의 딜레마
불가능한 식민주의 역사학?
조선사, 민족의 역사 혹은 권역의 역사
일본 동양사학과 한사군 연구
식민국가 낙랑군과 문화전파의 경로
이마니시 류의 지적 이력과 조선사 기획
이마니시의 낙랑군 혹은 조선사 서술에서 ‘중국적인 것’
왕도의 길과 패도의 길
이마니시 조선사 기획의 귀결

3장 ‘국사’와 동양학 사이: 후지쓰카 지카시와 아베 요시오의 동양 문화 연구

식민지 대학의 사명과 그 이면
핫토리 우노키치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학문 편제
경성제국대학과 ‘동양 문화 연구’의 제도적 윤곽
외부이자 내부인 ‘조선’과 일본 동양학의 딜레마
핫토리 우노키치 이후의 경성제국대학 동양 문화 연구
식민지발 동양 문화 연구의 말로

4장 불가능한 조선의 식민정책학?: 식민정책학자 이즈미 아키라의 운명

어느 식민정책학자의 침묵
식민정책학, 모호한 위상과 분열적 성격
식민정책학자가 식민지로 간 까닭
폴 라인쉬와 이즈미 아키라: 일본 식민정책학의 방향 전환
농정학적 식민정책학과의 결별
이상주의의 급진성: 동화주의와 비동화주의
경성의 이즈미 아키라: 식민지 현실 속 식민정책학자
이즈미 아키라의 침묵, 그 이유

에필로그 경성제국대학의 조선 연구, 그 후

본문의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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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정준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교토대학 외국인 공동연구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역사사회학과 지식사회사가 전공이며, 한국에서 근대학문이 어떻게 제도화된 형태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피의 인종주의와 식민지의학」, 「제국 일본의 도서관체제와 경성제대 도서관」, 「한...
 

책 속으로

경성제대는 제국대학 중 처음으로 식민지에 세워진 대학이었다. 그리고 확장을 꿈꾸는 일본제국의 입장에서는 그 길목에 세워진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이기도 했기에 설립의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의 안정화라는 식민지적 과제와 대륙 진출이라는 제국적 과제가 중첩되는 지점에 식민지 조선은 위치했다. 일본의 제국대학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총독부의 기관이기도 했던 경성제대가 식민지 조선을 학술 탐구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이것은 일본의 다른 어떤 제국대학도 넘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영역이었다.
---「프롤로그: 경성제국대학과 식민지 조선 연구의 궤적」중에서

경성제대의 조선사학은 오다 쇼고가 구축했던 식민주의 역사학의 제도적 기반 위에서 탄생하여 성장했다. 경성제대의 조선 연구가 서 있는 제도적 계보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오다 쇼고의 조선사학, 그리고 그 태동이 되는 조선반도사 편찬사업과 조선사학회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료였던 그는 왜 ‘조선사’라는, 자기로서는 미지의 영역에 뛰어들었을까? 그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조선사학회란 어떤 단체였을까? 그리고 오다 쇼고는 이 조선사학회라는 단체를 통해 당시 식민주의 역사학이 직면했던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리고 그 결과는 경성제대로 어떻게 이어졌을까?
---「1장 제도화되는 식민주의 역사학」중에서

이마니시는 일본의 관학 아카데미즘 속에서 ‘조선사’를 자신의 전공으로 표방한 첫 역사학자였다. 실제 학문적 이력을 보아도 “조선사로 시작해서, 조선사로 끝난” 명실공히 “조선사학의 개척자”였다. 특히 조선 고대사 분야에서 그는 일본 본토의 학계에서도 “다이쇼·쇼와 시기를 통틀어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역사가였다. (중략) 그에 대한 한국 학계의 평가도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한국 고대사의 말살과 왜곡의 기초를 다진 자”라는 혹독한 비판이 있는가 하면, “박사라는 호칭이 붙여져 불릴 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드문 학자”라는 엇갈린 호평이 지금까지도 공존한다.
---「2장 종속화되는 조선 고대사」중에서

후지쓰카는 한국, 중국, 일본의 지식인들이 얽혀 있는 당대의 방대한 지식인 네트워크를 추적해나간다. 전통적인 방식의 중국 연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조선사학 연구자들이 해오던 조선 연구도 아니었다. 양자를 지양(止揚)하는 ‘동양 문화 연구’를 지향했다고 하겠는데, 이것은 후지쓰카의 스승이자 경성제대의 초대 총장으로서 사실상 대학 설립의 산파 역할을 했던 동양학자 핫토리 우노키치의 이상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중국 송학(宋學)의 사상적 영향과 그 지적 궤적을 추적하던 아베 요시오는 식민지 조선에 건너와서는 퇴계 이황을 새삼 주목하여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했으며, 이후 이황의 사상적, 도학적 전통이 어떻게 근세, 근대의 일본 사상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했다. 대상은 달랐지만 문제의식과 접근 방식은 후지쓰카 지카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스승 핫토리 우노키치가 경성제대가 출범할 당시 표명했던 바, ‘동양 문화 연구’라는 청사진 아래에서 진행된 것이다.

연행을 통해 청조 고증학의 석학들과 교유했던 조선 지식인들은 에도 한학의 전통에 서 있던 후지쓰카 지카시의 입장에서도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중략) 그가 반쯤은 동경하는 마음으로 담헌 홍대용에서부터 시작되는 조선 지식인들과 청조 지식인들과의 국경을 넘나드는 교류의 양상을 추적하여 질리도록 촘촘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특히 주인공인 김정희에 이르면 후지쓰카 지카시는 같은 한학자, 즉 고증학 전통에 서서 존경과 흠모의 자세로 그를 다룬다. 김정희와 교유했던 청조의 명사들이 주고받은 편지와 시를 찾아 수록했고, 교유의 매개가 되었던 책, 그림, 비문 탁본 등을 꼼꼼히 조사했다. (중략) 후지쓰카는 완당이 보여준 이런 ‘혜안’은 그가 조선 지식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취한 것이며, 조선을 뛰어넘는 당대의 지적 거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보았다.
---「3장 ‘국사’와 동양학 사이」중에서

조선에 건너오기 이전에 이즈미 아키라는 ‘리버럴한’ 식민정책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동화주의에 바탕을 둔 일본의 식민정책에 대단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식민지인들을 본위(本位)로 하는 식민정책을 지지하여 자치식민지를 지향했다. (중략) 심지어 그는 식민지의 자치를 지향하는 타이완 지식인들의 민족운동에서 이론적인 지주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경성제대 교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른바 필화 사건을 당하게 된다. (중략) 경성제대 교수 자리까지 위태로워질 정도로 상황이 전개되었지만 다행히 해직(解職)의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그 이후 그는 식민정책학자로서는 침묵하고, 국제법학자로서만 살았다. 이런 그의 침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4장 불가능한 조선의 식민정책학?」중에서

이 책이 다루는 주인공들에게 경성제대란 각자의 학문적 이력에서 맞닥뜨린 하나의 도달점 혹은 전환점을 의미했다. 오다 쇼고와 이마니시 류에게 경성제대란 그들이 추구했던 조선 연구의 도달점이었고, 후지쓰카 지카시와 아베 요시오에게는 그들이 추구했던 것을 조선 연구로 바꾸는 전환점이었다. (중략) 심지어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하기 이전에 자유주의적 식민정책학자로서 식민지의 사정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이즈미 아키라가 경성제대 부임 이후에 보여준 침묵 혹은 ‘조선 연구의 부재’마저도 경성제대 조선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하나의 양상이었다. 그리고 이 부재와 침묵을 통해 드러나는 경성제대 조선학의 특징은, 1930년대 중반 이후, 다시 말해 제국 일본이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의 길로 들어선 이후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도 했다.
---「에필로그: 경성제국대학의 조선 연구, 그 후」중에서
 

출판사 리뷰

근대적인 것, 제국적인 것, 식민지적인 것 사이에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일본인 연구자들이 추구한
‘조선 연구’란 무엇인가
―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없는 조선 연구’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일본의 제국대학은 19세기 스타일의 근대 대학 이념, 즉 가장 뛰어난 연구자가 가장 훌륭한 교사이며, 대학은 이런 학술지식의 생산을 배타적으로 영유해야 한다는 관념에 충실하고자 했다. 이는 식민지에 처음으로 세워진 ‘대륙 유일의’ 경성제국대학(이하 경성제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경성제대는 식민지의 권력기관인 조선총독부의 소속 기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함께 놓여 있었다. 즉, 일본의 제국대학과 같은 ‘격’을 유지하기 위해 ‘학술’의 가치를 주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식민통치의 인식을 뒷받침하고 실제 정책 수립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학문의 전당을 표방하면서도, 대륙 진출이라는 제국적 과제와 식민통치의 안정화라는 식민지적 과제가 중첩되는 식민지 조선이란 공간에서 경성제대는 ‘국책과 학문 사이의 균열’이라는 모순된 운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경성제국대학의 운영자들은 이러한 균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우고자 했을까?

경성제대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조선 연구’이며, 조선 연구는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 대한 고찰로 뻗어가며 최종적으로는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연구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을 이해하는 거울’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조선 연구는 조선의 문화 속에서 ‘중국적인 것’의 껍질을 벗겨내고 ‘일본적인 것’의 속살을 발견해내는 것이라 여겼다. 즉, 조선 연구는 조선을 지양함으로써 비로소 ‘동양 문화의 권위’를 지향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조선 연구는 조선인에 의한 연구보다 일본을 상세히 알고 중국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온 일본인 연구자에 의한 연구가 더 우월하다며 ‘조선이 없는 조선 연구’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조선 연구를 하기에 최적의 기관이 바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분과학문을 오롯이 갖춘 경성제대 법문학부였다.

이 책은 식민지의 대표적인 연구 거점이자 학술 연구가 허용된 유일한 제도적 공간인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한 조선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이들의 조선 연구가 가진 함의가 무엇인지를 추적해나간다. 저자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대상으로 한 조선 연구뿐 아니라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다양한 학문적 스펙트럼 속에서 전개된 ‘조선’ 연구까지를 포함해, 조선 연구가 일본사와 동양사 연구로 ‘확장’되고 식민지 현실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변용’되고 ‘역류’해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나간다. 이러한 조선 연구의 궤적을 살펴봄으로써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이라는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며, 또한 우리 학문 속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지(知)의 종속’이라는 식민유산의 극복에도 어느 정도 암시하는 바가 있기를 기대한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일본인 연구자,
그들은 누구인가
― 다섯 명의 일본인 연구자를 통해 본 ‘조선 연구’의 실체


이 책에서는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일본인 연구자, 그중에서도 다섯 명의 학자에 주목한다. 먼저 오다 쇼고와 이마니시 류는 경성제대 초창기의 대표적인 조선사학 연구자로, 식민지 조선학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방식은 제각기 달랐다.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 출신의 오다 쇼고는 총독부가 주관한 각종 사업을 지휘한 경험을 살려 식민지에 산재한 일본인 조선 연구자들을 결집해 ‘학회’ 형식의 학술조직을 만들려고 한 반면, 이마니시 류는 본격적인 조선사 전공자라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기존과는 다른 관점의 이론과 방법론으로 조선사학의 실제 내용을 채우려 했다. 과연 이들이 지향했던 조선사학의 제도화란 어떤 것이었을까? 이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파고든 저자의 해석은 1장과 2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3장에서는 도쿄제대 지나철학과 출신의 후지쓰카 지카시와 아베 요시오를 다룬다. 각기 청대 고증학과 송대 성리학 연구자인 이들은 경성제대 초대 총장 핫토리 우노키치의 직계 제자로서, 조선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동양 문화의 권위’를 지향한다는 경성제대의 이상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연구 진행 과정에서 후지쓰카는 오히려 청대 지식인의 교류 속에서 중국 지식인을 압도하기까지 했던 홍대용, 박제가, 김정희의 지성사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였으며, 아베 요시오는 에도시대 일본 지성계의 송학 전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에 이르기 전 퇴계 이황이라는 지적 거인을 만날 수밖에 없음을 밝혀낸다. 이러한 연구 덕분에 이들은 오늘날 대표적인 친한(親韓) 연구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과연 타당한 평가일까? 저자는 후지쓰카와 아베가 한국의 지적 거인들을 발굴해낸 숨은 동기는 무엇이며, 이러한 조선 연구가 이들이 지향한 ‘동양 문화’와는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본 일본인 연구자는 국제공법 강좌 교수 이즈미 아키라로, 그는 제국대학 출신이 아닌 미국 유학을 통해 학문적 훈련을 거친 독특한 이력의 학자였다. 경성제대 부임 전에는 식민정책학자로서, 특히 타이완총독부의 식민정책을 강하게 비판함으로써 타이완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하기도 했으며, 3·1운동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폭력적 대처를 엄격하게 비난하며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가장 비판적으로 분석한 연구자였다. 그가 경성제대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식민정책학자로서의 이력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즈미는 경성제대 부임 후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학자로서의 발언을 멈춘다. 그는 왜 조선에 대한 연구를 중단했을까? 식민정책학자로서 그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저자는 식민지 조선학의 궤적이 숨기고 있는 이 침묵의 의미에 주목한다.

이렇듯 다섯 일본인 연구자는 전공 분야와 조선에 대한 접근 방식이 제각기 달랐으나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조선 연구가 어떻게 제도화되고 또 어떻게 드러나고 변용되어갔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진실-거짓’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벗어나
그 사이의 모호함에 주목한 경성제국대학 연구


이 책은 오랫동안 우리 학계를 속박해온 식민사관의 문제를 경성제대에서 활동한 일본인 연구자들의 조선 연구 사례를 들어 새삼 따져 묻는다. 지금까지의 식민사관 비판이 당시 활동한 일본인들이 얼마나 노골적 의도를 가지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해왔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책은 그러한 단순한 이분법적 관점에서 벗어나 그 사이의 모호함에도 주목한다. 특히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주의적 지향이 관철되는 공간이었음에도 제국적 지향과 근대 대학 특유의 보편적인 이상이 일정하게 통용된 독특한 장소였다. 따라서 식민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을 명확히 나누는 방식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공간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식민지 통치 시기 이루어진 조선 연구가 순수한 지식 추구일 리 없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이들의 연구 생산물이 오로지 식민주의적일 것이라는 단정 또한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선사학을 제도화했던 오다 쇼고와 이마니시 류는 후대에 관료형 학자와 엄밀성을 견지한 학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데, 특히 이마니시 류는 일본과 한국에서 대비되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양가적이고 분열적인 평가가 나오는 까닭은 무엇이며, 이 상반된 평가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저자는 식민주의적 맥락에서 일본인 연구자들의 조선 연구가 확장, 변용, 역류해가는 과정이 단순하지 않음을 들려줌으로써, 식민사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식민사학의 비판과 극복이란 무엇인가라는 확장된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