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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국 연변 조선족 형성사
“두만강 국경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가 태동했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_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원제: Making Borders in Modern East Asia: The Tumen River Demarcation, 1881-1919)는 전반부에서 수십 년에 걸친 두만강 경계 획정을 추적하고, 후반부에는 두만강 너머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과 토지를 두고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가 펼친 경쟁의 양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한 이후 1909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간도 협약으로 두만강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의 역사가 상세하게 복원된다. 두만강 경계 획정의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국경을 정하는 것’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책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이 일어났던 위험한 시기에 ‘간도’라는 변경에서 서로 경쟁했던 여러 국민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주목한다. 이 지대의 땅과 인민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중국의 변경 건설 사업을 촉진했다. 한국은 국가를 잃은 상황에서 간도를 민족 결집의 상징적 공간으로 삼았으며, 일본은 식민사업을 촉발했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후기 제국(late imperial)’의 단계에서 저자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근대’라고 명명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복잡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기존의 연구가 두만강 북안의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했다면 쑹녠선의 신작은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교류와 소통의 기억을 소환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단절하고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보는 민족국가 중심의 분절적 서사는 자칫 충돌과 대립을 필요 이상 강조하기 쉬우며, 두만강이란 변경에서 동아시아의 근대가 태동했던 그 지역사·지구사적 의의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 형성 과정을 새롭게 선보인 이 책은 국민국가를 초월한 대안적 역사 연구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의 전작으로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2020, 역사비평사)가 있다.
“두만강 국경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가 태동했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_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원제: Making Borders in Modern East Asia: The Tumen River Demarcation, 1881-1919)는 전반부에서 수십 년에 걸친 두만강 경계 획정을 추적하고, 후반부에는 두만강 너머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과 토지를 두고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가 펼친 경쟁의 양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한 이후 1909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간도 협약으로 두만강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의 역사가 상세하게 복원된다. 두만강 경계 획정의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국경을 정하는 것’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책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이 일어났던 위험한 시기에 ‘간도’라는 변경에서 서로 경쟁했던 여러 국민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주목한다. 이 지대의 땅과 인민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중국의 변경 건설 사업을 촉진했다. 한국은 국가를 잃은 상황에서 간도를 민족 결집의 상징적 공간으로 삼았으며, 일본은 식민사업을 촉발했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후기 제국(late imperial)’의 단계에서 저자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근대’라고 명명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복잡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기존의 연구가 두만강 북안의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했다면 쑹녠선의 신작은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교류와 소통의 기억을 소환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단절하고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보는 민족국가 중심의 분절적 서사는 자칫 충돌과 대립을 필요 이상 강조하기 쉬우며, 두만강이란 변경에서 동아시아의 근대가 태동했던 그 지역사·지구사적 의의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 형성 과정을 새롭게 선보인 이 책은 국민국가를 초월한 대안적 역사 연구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의 전작으로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2020, 역사비평사)가 있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옮긴이 서문
들어가며: 사라진 비석과 실체가 불분명한 강
동아시아의 역사적 공간
다변적 로컬
지역적 차원의 로컬
지구적 차원의 로컬
1장 경계를 넘다: 두만강 지역의 사회생태학
두만강 지역: 청의 동북 대 조선의 동북
청과 조선의 초기 협상
위기의 동아시아, 연계망 속의 두만강
2장 왕조의 지리학: 경계 획정의 수사
국경회담 이전의 지리 지식
감계: 의례적 경쟁
청 국경 형성의 연계망
국경지대의 지도 제작
왕조의 변경 지리학: 이중하와 오대징
3장 간도 만들기: 경계를 넘나드는 사회의 유동성
간도의 형성
토지소유권, 생산 관계, 민족 관계 그리고 교역
토비: 국가와 사회의 사이
4장 변경 길들이기: 국가권력의 침투와 국제법
청: 내지화와 귀화
러시아: 철도 식민주의와 공동행정구역
한국: 군사화와 영토화
일본: 아시아를 선도하고 만주를 정복하고 한인을 ‘보호’하다
국제법의 도래: 새로운 담론
5장 다시 정의된 경계: 다층적 경쟁
국가·비국가 행위자들의 경쟁
간도협약을 향하여: 갈등의 세 가지 층위
공간적 상상: 나이토 코난, 송교인 그리고 신채호
6장 다시 정의된 인민: 연변과 정체성의 정치학
연변 사회: 새로운 발전
일본인이 된다는 것: 식민지의 경제와 정치
중국인이 된다는 것: 한인의 수용과 배제
한국인이 된다는 것: 한국 너머의 민족 정치학
맺으며: 우리 땅, 우리 민족
목극등비의 실종과 만주의 변화
한국계 중국인의 정체성
다시 그어진 경계
경계와 역사
에필로그: 영화 [두만강]
감사의 말
참고문헌
주
찾아보기
옮긴이 서문
들어가며: 사라진 비석과 실체가 불분명한 강
동아시아의 역사적 공간
다변적 로컬
지역적 차원의 로컬
지구적 차원의 로컬
1장 경계를 넘다: 두만강 지역의 사회생태학
두만강 지역: 청의 동북 대 조선의 동북
청과 조선의 초기 협상
위기의 동아시아, 연계망 속의 두만강
2장 왕조의 지리학: 경계 획정의 수사
국경회담 이전의 지리 지식
감계: 의례적 경쟁
청 국경 형성의 연계망
국경지대의 지도 제작
왕조의 변경 지리학: 이중하와 오대징
3장 간도 만들기: 경계를 넘나드는 사회의 유동성
간도의 형성
토지소유권, 생산 관계, 민족 관계 그리고 교역
토비: 국가와 사회의 사이
4장 변경 길들이기: 국가권력의 침투와 국제법
청: 내지화와 귀화
러시아: 철도 식민주의와 공동행정구역
한국: 군사화와 영토화
일본: 아시아를 선도하고 만주를 정복하고 한인을 ‘보호’하다
국제법의 도래: 새로운 담론
5장 다시 정의된 경계: 다층적 경쟁
국가·비국가 행위자들의 경쟁
간도협약을 향하여: 갈등의 세 가지 층위
공간적 상상: 나이토 코난, 송교인 그리고 신채호
6장 다시 정의된 인민: 연변과 정체성의 정치학
연변 사회: 새로운 발전
일본인이 된다는 것: 식민지의 경제와 정치
중국인이 된다는 것: 한인의 수용과 배제
한국인이 된다는 것: 한국 너머의 민족 정치학
맺으며: 우리 땅, 우리 민족
목극등비의 실종과 만주의 변화
한국계 중국인의 정체성
다시 그어진 경계
경계와 역사
에필로그: 영화 [두만강]
감사의 말
참고문헌
주
찾아보기
책 속으로
이 책은 영토 주권의 귀속이나 이주민의 국민 신분을 고증하는 것을 핵심 문제로 삼지 않고 ‘주권’, ‘국민’과 같은 근대 개념에 대한 반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다른 연구와 다르다. 또한 곡절이 많은 두만강 경계 획정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국가, 영토, 국민, 민족 등에 대한 오늘날 우리 인식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근대성의 산물인 국경 만들기 행위와 전통적 거버넌스 방식 사이에는 어떤 연결성이 있을까?
---「지은이의 말」중에서
쑹녠선은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이분법적 전환 과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근대화 과정은 종종 ‘전통’의 극복과 ‘근대’의 수용이라는 방식으로 설명되지만, 저자는 동아시아의 실제 근대 국민국가 건설 과정은 두 가지 요소가 때로는 공존하면서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아울러, 공간적으로도 두만강을 서로 다른 영역/영토를 구분하는 ‘단절’의 경계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랜 세월에 걸쳐 교류하고 소통해온 ‘연속’의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옮긴이의 말」중에서
감계가 끝나갈 무렵, 조사관들은 홍토산수와 홍단수 사이에서 홍토산수의 또 다른 작은 지류를 발견했다. 청 관리들은 이중하에게 양측이 조금씩 양보하여 이번 국경회담을 끝내도록 ‘석을수石乙水’로 새롭게 명명된 이 물줄기를 두만강 수원으로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중하는 이 물줄기가 비석이 세워진 분수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이번에도 청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양측 견해차는 좁혀졌다. 양측은 유일하게 아직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지역은 석을수가 홍토산수로 합류하는 지점과 목극등비 사이의 작은 구간뿐이라는 데 합의했다. 그럼에도 조선-청의 마지막 공동감계였던 1887년 감계는 또다시 허사로 끝났다. 이후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마무리하자는 제안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처음에는 조선이, 그다음에는 청이 거절했다. 따라서 분쟁은 끝내 해결되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 p.124~125
이전에 육도구六道溝(여섯 번째 도랑)로 알려졌던 용정은 해란하 남안에 있는데, 1877년에 조선인 열네 가구가 이곳에 처음 거주했다. 1886년 여진족이 팠던 고대 우물이 그곳에서 다시 발견되었고, 이로써 더 많은 한인과 한족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 수원水源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이 마을은 ‘용의 우물’이라는 뜻의 ‘용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용정은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에 적합했으므로 이 지역에서 발달한 촌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00년경에는 용정의 한 논에서 벼가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는데, 이는 간도 전역에서 첫 사례였다. 1907년까지 이 촌락에는 101개 가구(조선인 96개 가구, 중국인 5개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주민 400명 중 4분의 1은 소작농이었고 나머지는 자작농이었다. 인근 주민들은 한 달에 여섯 번씩 용정의 농촌시장에 모여 옷과 식료품을 구입했다.
--- p.169
간도 지역 일진회는 간도파출소와 기꺼이 결탁했다. 많은 일진회 회원이 자기 소유 토지를 절실히 원하는 빈농이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한국이 두만강 북안의 영유권을 확보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1907년 8월 설립되었을 때 간도파출소에서는 함경북도와 간도의 일진회 지부 회장들을 포함하여 일진회 회원 총 19명을 직원으로 고용했다. 또한 일본은 일진회 회원들을 촌락과 마을 공동체 지도자로 임명하여 청에서 임명한 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일진회는 일본의 지원에 힘입어 전성기에는 1만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하고 13개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등 간도 지역 전체로 확대되었다.
--- p.272
중국과 일본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에 갇혀 있던 연변의 한인들에게 ‘정체성의 정치학’이 단순히 어느 한쪽 편에 서는 문제였다고 생각하면 간단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스스로 중국 국민이 되거나 귀화하지 않고 남아 이론상으로 일본 백성이 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미묘했다. 간민회와 농무계의 갈등은 친중파와 친일파 집단 사이의 갈등이라기보다는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이었다. 법률적으로 ‘한국인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방의 한인 엘리트들에게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고유의 정체성을 강화할 다양한 대안이 있었다. 게다가 이 정체성은 그 자체로 계속 유동적이었고, 모든 이주민이 항상 거기에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귀화할 것이냐, 하지 않을 것이냐의 선택은 ‘중국에서 어떻게 한국인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수동적으로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답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 p.352~353
재만 한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야 자신의 국적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연변은 일본이 철수하자 중국공산당이 만주의 한 ‘해방구’로 접수했다. 중국의 한인들을 ‘외국인 교민’으로 간주한 국민정부와 달리 만주의 중국공산당 정권은 현지 한인들의 ‘이중국적’을 인정했고, 그들이 스스로 국적을 선택하도록 허용했다. 더 중요하게는 중국공산당이 단행한 토지개혁으로 연변의 한인 농민들은 토지소유권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굳건한 지지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많은 한인 빈농·소작농이 인민해방군에 가입하여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전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연변의 한인 인구는 11만 6,000명 또는 18.2% 감소했는데, 그 가운데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다수가 중국 북부나 남부로 전출된 인민해방군 병사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대다수는 연변에 남았다. 1952년 연변의 한인 인구는 거의 52만 명이었다.
---「지은이의 말」중에서
쑹녠선은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이분법적 전환 과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근대화 과정은 종종 ‘전통’의 극복과 ‘근대’의 수용이라는 방식으로 설명되지만, 저자는 동아시아의 실제 근대 국민국가 건설 과정은 두 가지 요소가 때로는 공존하면서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아울러, 공간적으로도 두만강을 서로 다른 영역/영토를 구분하는 ‘단절’의 경계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랜 세월에 걸쳐 교류하고 소통해온 ‘연속’의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옮긴이의 말」중에서
감계가 끝나갈 무렵, 조사관들은 홍토산수와 홍단수 사이에서 홍토산수의 또 다른 작은 지류를 발견했다. 청 관리들은 이중하에게 양측이 조금씩 양보하여 이번 국경회담을 끝내도록 ‘석을수石乙水’로 새롭게 명명된 이 물줄기를 두만강 수원으로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중하는 이 물줄기가 비석이 세워진 분수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이번에도 청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양측 견해차는 좁혀졌다. 양측은 유일하게 아직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지역은 석을수가 홍토산수로 합류하는 지점과 목극등비 사이의 작은 구간뿐이라는 데 합의했다. 그럼에도 조선-청의 마지막 공동감계였던 1887년 감계는 또다시 허사로 끝났다. 이후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마무리하자는 제안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처음에는 조선이, 그다음에는 청이 거절했다. 따라서 분쟁은 끝내 해결되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 p.124~125
이전에 육도구六道溝(여섯 번째 도랑)로 알려졌던 용정은 해란하 남안에 있는데, 1877년에 조선인 열네 가구가 이곳에 처음 거주했다. 1886년 여진족이 팠던 고대 우물이 그곳에서 다시 발견되었고, 이로써 더 많은 한인과 한족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 수원水源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이 마을은 ‘용의 우물’이라는 뜻의 ‘용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용정은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에 적합했으므로 이 지역에서 발달한 촌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00년경에는 용정의 한 논에서 벼가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는데, 이는 간도 전역에서 첫 사례였다. 1907년까지 이 촌락에는 101개 가구(조선인 96개 가구, 중국인 5개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주민 400명 중 4분의 1은 소작농이었고 나머지는 자작농이었다. 인근 주민들은 한 달에 여섯 번씩 용정의 농촌시장에 모여 옷과 식료품을 구입했다.
--- p.169
간도 지역 일진회는 간도파출소와 기꺼이 결탁했다. 많은 일진회 회원이 자기 소유 토지를 절실히 원하는 빈농이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한국이 두만강 북안의 영유권을 확보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1907년 8월 설립되었을 때 간도파출소에서는 함경북도와 간도의 일진회 지부 회장들을 포함하여 일진회 회원 총 19명을 직원으로 고용했다. 또한 일본은 일진회 회원들을 촌락과 마을 공동체 지도자로 임명하여 청에서 임명한 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일진회는 일본의 지원에 힘입어 전성기에는 1만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하고 13개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등 간도 지역 전체로 확대되었다.
--- p.272
중국과 일본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에 갇혀 있던 연변의 한인들에게 ‘정체성의 정치학’이 단순히 어느 한쪽 편에 서는 문제였다고 생각하면 간단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스스로 중국 국민이 되거나 귀화하지 않고 남아 이론상으로 일본 백성이 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미묘했다. 간민회와 농무계의 갈등은 친중파와 친일파 집단 사이의 갈등이라기보다는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이었다. 법률적으로 ‘한국인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방의 한인 엘리트들에게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고유의 정체성을 강화할 다양한 대안이 있었다. 게다가 이 정체성은 그 자체로 계속 유동적이었고, 모든 이주민이 항상 거기에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귀화할 것이냐, 하지 않을 것이냐의 선택은 ‘중국에서 어떻게 한국인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수동적으로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답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 p.352~353
재만 한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야 자신의 국적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연변은 일본이 철수하자 중국공산당이 만주의 한 ‘해방구’로 접수했다. 중국의 한인들을 ‘외국인 교민’으로 간주한 국민정부와 달리 만주의 중국공산당 정권은 현지 한인들의 ‘이중국적’을 인정했고, 그들이 스스로 국적을 선택하도록 허용했다. 더 중요하게는 중국공산당이 단행한 토지개혁으로 연변의 한인 농민들은 토지소유권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굳건한 지지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많은 한인 빈농·소작농이 인민해방군에 가입하여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전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연변의 한인 인구는 11만 6,000명 또는 18.2% 감소했는데, 그 가운데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다수가 중국 북부나 남부로 전출된 인민해방군 병사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대다수는 연변에 남았다. 1952년 연변의 한인 인구는 거의 52만 명이었다.
--- p.380
출판사 리뷰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土門)”
토문강이 송화강인가? 해란강인가? 아니면 두만강인가?
이 책은 1880년대 조·청 국경 분쟁에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가장 안정적인 국경인 두만강과 압록강의 분계를 표시한 비석인 1712년(숙종 38년)의 백두산 정계비(중국에서는 이를 세운 청 관료 이름을 따서 ‘목극등비’라 칭한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 36년(강희 49년) 한 범죄 사건이 양쪽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인 아홉 명이 인삼을 캐려고 압록강을 몰래 넘어갔다가 청나라 사람 다섯 명과 마주치자 그들을 살해하고 물건을 훔친 사건이었다. 이 월경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백두산 정상 동남쪽의 어느 산마루를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삼아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土門)”으로 경계를 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되었다. 문제는 토문강이었다. 당시 압록강은 수원지가 분명했지만 또 하나의 분계강인 두만강은 산림의 물줄기가 복잡하고 단속(斷續)적이어서 진짜 수원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얼마 후 조선인들은 청의 목극등이 선택한 그 물줄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물줄기는 북쪽으로 흐르다가 훨씬 북쪽에 있는 아무르강의 한 지류인 송화강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은 내부에서 격론을 벌인 끝에 사소한 실수로 청을 귀찮게 하지 않기로 했다. 북경의 청 조정은 이 오류를 알지 못했고 국경지대의 안보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므로 이후 어떤 청 관리도 다시 조사할 일이 없었다.
비석이 세워지고 170년도 넘어 조선인 빈농 수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 동남부의 황무지를 개간하자 이 모호함은 결국 공식적인 영토분쟁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토문강이 경계인가? 그렇다면 어느 강이 실제 ‘토문강’인가? 송화강인가? 해란강인가? 아니면 두만강인가? 두만강이라면 복잡한 물줄기 중 어느 것이 그 수원인가? 이 논쟁적인 질문을 둘러싸고 1880년대 청과 조선 사이에 영토분쟁이 반복되었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는 ‘간도’라 하고 중국에서는 옌볜(延邊)이라 하는 두만강 북쪽 지역의 한인 이주민에 대한 통치권이 어느 나라에 귀속되느냐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데 사안의 급박함은 러시아의 팽창과 결부되어 있었다. 제2차 아편전쟁 이후 러시아는 외만주를 점령하고 두만강 하구까지 팽창하여 연해주에 한국인 정착민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던 상황이었다. 즉 두만강 지역(또는 만주 전체)이 이미 몇몇 신구 강대국의 싸움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논쟁적이고 다변적인 분계강을 둘러싼 모순은 일본이 조선 통제를 확립한 뒤 만주를 식민화하려던 20세기 초에 청과 일본의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하며 장기화했다.
국경의 역사적 의미가 서로 다른 시대에도 똑같았을까?
이 책은 두만강이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으로 확정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1885년의 1차 국경회담 결과 양측은 두만강이 토문강임에 동의했으나 1887년의 2차 국경회담에서 조선은 두만강의 가장 북쪽 물줄기인 ‘홍토산수’를, 청은 남쪽 ‘홍단수’를 주장하다가 가운데 물줄기인 ‘석을수’를 타협안으로 제시했으나 조선의 거부로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1909년 이른바 청·일간의 ‘간도협약’에서 청의 타협안인 석을수를 일본이 받아들이는 대신 만주의 수많은 이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경계가 획정되었다.(참고로 1962/64년 북·중 간에 다시 그어진 경계선은 천지의 중앙과 홍토산수를 거쳐 두만강과 압록강의 물길을 연결한 것이다. 1887년 국경회담 당시에 홍토산수를 두만강 원류로 지목했던 조선의 주장을 이번에 중국이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백두산의 남쪽 부분과 천지의 절반 이상(54.5%)을 북한이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쑹녠선은 수십 년에 거친 국경 분쟁의 맥락을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여러 언어로 작성된 자료를 조사하여 한중일 3국의 시점에서 이 문제를 다층적으로 설명한다. 국경의 역사적 의미가 1712년의 정계비 설치에서 1885-7년의 1, 2차 조·청 국경회담, 1909년의 간도 협약까지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문제 상황을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의 맥락에서 이해하며 그 전화(轉化)와 생성의 원인을 탐구한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5)의 승리,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1905)를 거치면서 1907년, 두만강 국경 분쟁에 공식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1907년부터 1909년까지의 중·일 국경협상은 1885-7년에 있었던 조·청간 국경협상과 비교할 때 그 내용과 목적 모두 달랐다. 더 이상 종번과 포용에 기초한 ‘왕조의 지리학’ 차원의 경쟁이 아니었다. 논쟁에서 새로운 증거 제시도 없었고 현장 합동 조사도 없었다. 실제 갈등은 한국 이주민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중·일 양국의 국가 건설을 둘러싼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수백 년 전에 형성된 경계를 어떻게 국제법과 영토 국가라는 새로운 체제에 맞게 재규정할지를 둘러싼 담론 차원의 경쟁이었다. 간도 분쟁은 이제 인구와 국경을 둘러싼 청과 조선 사이의 충돌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국가건설 경쟁으로 국면이 전환된 것이었다.
쑹녠선은 이 작은 변경지대에서 발생한 충돌과 담판, 타협에는 심각한 지역사·지구사적 의의가 담겨 있다고 했다. 두만강 국경 ‘만들기’ 과정은 바로 동아시아 삼국이 새롭게 건설되는 과정이었다. 간도 사람들이 ‘국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동아시아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 과정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도(연변)는 동아시아 근대의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간도를 둘러싼 갈등은 궁극적으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향한 경쟁
청은 19세기 말 길림-조선 통상국을 설립한 후 아예‘한인 무단점거자들을 위무’한다는 뜻의‘무간국(撫墾局)’이란 지방행정기구로 전환하며 본격적으로 이민 사회의 초기 국가건설 프로젝트에 나섰다. 한국(대한제국)은 1903년 이범윤(친러정권기의 관료 이범진의 동생)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했다. 이범윤은 총 5백 정을 보유하고 러시아 고문의 훈련을 받은 1천 명이 넘는 병력을 확보한 뒤 그해 말 간도를 한국 영토라 선포했으나 청의 압력으로 해임되고 이후 의병장으로 반일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의 ‘간도파출소’ 설치였다. 1906년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상당하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된 직후 설치되었는데 행정체계와 경찰력의 구축, 간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역사학적·고고학적 연구를 포함한 광범위한 현지조사, 농업실험과 교육·위생사업 등을 전개했는데 일본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이상설이 설립하고 많은 항일 활동가를 불러들인 용정의‘서전서숙’을 폐쇄한 것도 간도파출소였다.
당시 간도파출소 법률고문이자 총무과장이었던 시노다 지사쿠의 이력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20-30년대 이왕직 장관으로 근무하며 일본의 검열과 왜곡으로 심각하게 변질되었다고 비판받는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두 편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의 편찬을 주재했고, 1940년대 현재 서울대의 전신이자 제국대학의 하나였던 경성제국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시노다는 간도(시노다의 간도는 북만주는 물론 남만주를 전부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를 ‘무인지대’, 즉 버려진 황무지라 주장하는 논문은 발표하면서 중국과 한국의 영유권을 모두 부정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무주지 개념이 1960-70년대 한국에서 ‘북방 영토’에 대한 향수로 되살아난다. 한때 일본 식민주의적 담론이었던 것이 한국 민족주의적 동기와 결합하면서 식민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사이의 상당히 역설적인 협력 사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간도(연변)를 둘러싼 한·중·일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경쟁이었다. 일본에게 간도는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장차 만주, 몽골, 심지어 시베리아 동부까지 정복하려는 제국주의의 도약판이었다. 청은 연변을 중국 동북 3성의 본보기로 간주했다. 연변을 만주에 묶어두지 못하는 것은 곧 동북 3성 전체를 중국에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승부에서 이기려고 각국은 군사화에서 관료화, 인구조사에서 치안 유지, 인프라 구축에서 공교육과 공공의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근대적’ 국가 장치를 강화함으로써 통치력을 강화했다. 중·일의 변경 건설 시도들은 차별성보다 유사성이 더 많았다. 여기에는 식민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등이 모두 반영되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여러 국가에서 도입한 이 장치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이 국경지대에서 국가권력의 힘이 빠르게 강화되었다.
간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경쟁에서 한국인들은 전혀 침묵하지 않았다. 다양한 정치 세력이 각자 정치적 청사진을 가진 채 양국의 경쟁에 개입했다. 일진회는 한국 근대화의 희망을 일본에 걸었다. 또 다른 다양한 세력들은 일본을 한국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모두 친중국적이지는 않았다. 실제 대립하는 두 진영에 속했던 한국인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본이나 중국과 연합을 결성하기는 했지만 어느 쪽도 강한 한국을 재건한다는 핵심적인 정치적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 책은 청의 ‘내지화’와 일본의 ‘식민화’, 한국의 ‘독립’이라는 세 종류의 ‘탈(脫)변경’의 각축전 속에서 국민, 국경, 국가, 영토 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등장했으며, 동아시아 3국이 모두 국가와 국민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계에서 동아시아의 근대가 창출된 것이다.
만주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 신채호·나이토 코난·송교인
간도 협약을 전후로 두만강 북안 또는 더 큰 범위에서 만주는 다양한 지정학적 관점에 따라 새롭게 정의되었다. 이 공간을 둘러싼 경쟁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엄청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세 나라의 지식인들은 만주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의 선구자 나이토 코난, 국제법을 이용한 주권 수호를 역설한 중국의 송교인, 역사를 통해 민족을 수호하고자 한 신채호 등의 논의를 분석한다. 신채호에게 역사의 주체는 국가라기보다는 민족이었다. 그는 ‘한민족’의 옛 영광에 대한 민족주의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기존의 역사 서술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한국사의 지리적 중심을 한반도에서 만주로 옮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만강 지역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포함하는 한국의 역사적 공간 관념을 만들어냈다. 이 책은 하나의 지리적 공간이 서로 경쟁하는 정치적 목표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상상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개념이 서로 모순적임에도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규정했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두만강이 만들어낸 중국 조선족 형성의 역사
1860년대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넘어 청 지대 아래의 만주로 들어갔다. 초기 이주자의 대부분은 함경도 지방 출신으로,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에도 당시 조정이 이들의 남하를 통제했기에 살아남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들은 두만강 중류 지역 즉 두만강과 그 3대 북부 지류인 해란하, 부르하통하, 가야강에 의해 조성된 부채꼴 모양 충적평야 주변에 주로 모였다. 1880년대 수천 명이었던 것이 1910년대 말에는 한반도 남부 사람들까지 이주해 오면서 약 30만 명으로 늘었다. 중국과 일본의 한국인과 그 토지를 지배하기 위한 경쟁 속에서도 그들은 비록 하나의 통합된 집단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각자 한국에 가장 이익이 된다고 믿었던 것을 추구했다.
국권 피탈로 토지와 인민이 분리되고 민족과 국가가 따로 나뉘자 간도는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그들의 ‘상상된 공동체’를 건설한 공간을 제공했다. 교육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1910년대 간도는 당시의 한국 자체보다 더 ‘한국적’ 장소였다. 1919년 3월 13일 이른 아침 명동 학교와 다른 학교에서 온 학생과 교사들을 포함하여 한국인 약 2만 명이 인근 지역에서 용정으로 모여들었다. 3·1 운동이 ‘근대’라는 이름이 붙는 한국 민족주의의 시대를 출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 ‘근대’의 시대가 실제로는 한국 국경 너머 두만강 이북의 간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30년대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으로 한국과 만주의 국경이 사실상 없어졌을 때 일본인에 이은 2등 시민의 자격으로 더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었고 1940년대 초 연변에는 이미 63만 4천 명이 넘은 한국인이 터를 잡고 있었다. 만주의 한국인들은 글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국경을 초월한 사람의 집단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그들은 한국계 중국인이 되었다. 이 책은 두만강 국경이 만들어낸 중국 조선족 집단 형성사다.
토문강이 송화강인가? 해란강인가? 아니면 두만강인가?
이 책은 1880년대 조·청 국경 분쟁에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가장 안정적인 국경인 두만강과 압록강의 분계를 표시한 비석인 1712년(숙종 38년)의 백두산 정계비(중국에서는 이를 세운 청 관료 이름을 따서 ‘목극등비’라 칭한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 36년(강희 49년) 한 범죄 사건이 양쪽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인 아홉 명이 인삼을 캐려고 압록강을 몰래 넘어갔다가 청나라 사람 다섯 명과 마주치자 그들을 살해하고 물건을 훔친 사건이었다. 이 월경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백두산 정상 동남쪽의 어느 산마루를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삼아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土門)”으로 경계를 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되었다. 문제는 토문강이었다. 당시 압록강은 수원지가 분명했지만 또 하나의 분계강인 두만강은 산림의 물줄기가 복잡하고 단속(斷續)적이어서 진짜 수원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얼마 후 조선인들은 청의 목극등이 선택한 그 물줄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물줄기는 북쪽으로 흐르다가 훨씬 북쪽에 있는 아무르강의 한 지류인 송화강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은 내부에서 격론을 벌인 끝에 사소한 실수로 청을 귀찮게 하지 않기로 했다. 북경의 청 조정은 이 오류를 알지 못했고 국경지대의 안보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므로 이후 어떤 청 관리도 다시 조사할 일이 없었다.
비석이 세워지고 170년도 넘어 조선인 빈농 수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 동남부의 황무지를 개간하자 이 모호함은 결국 공식적인 영토분쟁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토문강이 경계인가? 그렇다면 어느 강이 실제 ‘토문강’인가? 송화강인가? 해란강인가? 아니면 두만강인가? 두만강이라면 복잡한 물줄기 중 어느 것이 그 수원인가? 이 논쟁적인 질문을 둘러싸고 1880년대 청과 조선 사이에 영토분쟁이 반복되었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는 ‘간도’라 하고 중국에서는 옌볜(延邊)이라 하는 두만강 북쪽 지역의 한인 이주민에 대한 통치권이 어느 나라에 귀속되느냐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데 사안의 급박함은 러시아의 팽창과 결부되어 있었다. 제2차 아편전쟁 이후 러시아는 외만주를 점령하고 두만강 하구까지 팽창하여 연해주에 한국인 정착민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던 상황이었다. 즉 두만강 지역(또는 만주 전체)이 이미 몇몇 신구 강대국의 싸움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논쟁적이고 다변적인 분계강을 둘러싼 모순은 일본이 조선 통제를 확립한 뒤 만주를 식민화하려던 20세기 초에 청과 일본의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하며 장기화했다.
국경의 역사적 의미가 서로 다른 시대에도 똑같았을까?
이 책은 두만강이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으로 확정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1885년의 1차 국경회담 결과 양측은 두만강이 토문강임에 동의했으나 1887년의 2차 국경회담에서 조선은 두만강의 가장 북쪽 물줄기인 ‘홍토산수’를, 청은 남쪽 ‘홍단수’를 주장하다가 가운데 물줄기인 ‘석을수’를 타협안으로 제시했으나 조선의 거부로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1909년 이른바 청·일간의 ‘간도협약’에서 청의 타협안인 석을수를 일본이 받아들이는 대신 만주의 수많은 이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경계가 획정되었다.(참고로 1962/64년 북·중 간에 다시 그어진 경계선은 천지의 중앙과 홍토산수를 거쳐 두만강과 압록강의 물길을 연결한 것이다. 1887년 국경회담 당시에 홍토산수를 두만강 원류로 지목했던 조선의 주장을 이번에 중국이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백두산의 남쪽 부분과 천지의 절반 이상(54.5%)을 북한이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쑹녠선은 수십 년에 거친 국경 분쟁의 맥락을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여러 언어로 작성된 자료를 조사하여 한중일 3국의 시점에서 이 문제를 다층적으로 설명한다. 국경의 역사적 의미가 1712년의 정계비 설치에서 1885-7년의 1, 2차 조·청 국경회담, 1909년의 간도 협약까지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문제 상황을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의 맥락에서 이해하며 그 전화(轉化)와 생성의 원인을 탐구한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5)의 승리,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1905)를 거치면서 1907년, 두만강 국경 분쟁에 공식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1907년부터 1909년까지의 중·일 국경협상은 1885-7년에 있었던 조·청간 국경협상과 비교할 때 그 내용과 목적 모두 달랐다. 더 이상 종번과 포용에 기초한 ‘왕조의 지리학’ 차원의 경쟁이 아니었다. 논쟁에서 새로운 증거 제시도 없었고 현장 합동 조사도 없었다. 실제 갈등은 한국 이주민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중·일 양국의 국가 건설을 둘러싼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수백 년 전에 형성된 경계를 어떻게 국제법과 영토 국가라는 새로운 체제에 맞게 재규정할지를 둘러싼 담론 차원의 경쟁이었다. 간도 분쟁은 이제 인구와 국경을 둘러싼 청과 조선 사이의 충돌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국가건설 경쟁으로 국면이 전환된 것이었다.
쑹녠선은 이 작은 변경지대에서 발생한 충돌과 담판, 타협에는 심각한 지역사·지구사적 의의가 담겨 있다고 했다. 두만강 국경 ‘만들기’ 과정은 바로 동아시아 삼국이 새롭게 건설되는 과정이었다. 간도 사람들이 ‘국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동아시아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 과정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도(연변)는 동아시아 근대의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간도를 둘러싼 갈등은 궁극적으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향한 경쟁
청은 19세기 말 길림-조선 통상국을 설립한 후 아예‘한인 무단점거자들을 위무’한다는 뜻의‘무간국(撫墾局)’이란 지방행정기구로 전환하며 본격적으로 이민 사회의 초기 국가건설 프로젝트에 나섰다. 한국(대한제국)은 1903년 이범윤(친러정권기의 관료 이범진의 동생)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했다. 이범윤은 총 5백 정을 보유하고 러시아 고문의 훈련을 받은 1천 명이 넘는 병력을 확보한 뒤 그해 말 간도를 한국 영토라 선포했으나 청의 압력으로 해임되고 이후 의병장으로 반일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의 ‘간도파출소’ 설치였다. 1906년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상당하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된 직후 설치되었는데 행정체계와 경찰력의 구축, 간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역사학적·고고학적 연구를 포함한 광범위한 현지조사, 농업실험과 교육·위생사업 등을 전개했는데 일본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이상설이 설립하고 많은 항일 활동가를 불러들인 용정의‘서전서숙’을 폐쇄한 것도 간도파출소였다.
당시 간도파출소 법률고문이자 총무과장이었던 시노다 지사쿠의 이력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20-30년대 이왕직 장관으로 근무하며 일본의 검열과 왜곡으로 심각하게 변질되었다고 비판받는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두 편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의 편찬을 주재했고, 1940년대 현재 서울대의 전신이자 제국대학의 하나였던 경성제국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시노다는 간도(시노다의 간도는 북만주는 물론 남만주를 전부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를 ‘무인지대’, 즉 버려진 황무지라 주장하는 논문은 발표하면서 중국과 한국의 영유권을 모두 부정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무주지 개념이 1960-70년대 한국에서 ‘북방 영토’에 대한 향수로 되살아난다. 한때 일본 식민주의적 담론이었던 것이 한국 민족주의적 동기와 결합하면서 식민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사이의 상당히 역설적인 협력 사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간도(연변)를 둘러싼 한·중·일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경쟁이었다. 일본에게 간도는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장차 만주, 몽골, 심지어 시베리아 동부까지 정복하려는 제국주의의 도약판이었다. 청은 연변을 중국 동북 3성의 본보기로 간주했다. 연변을 만주에 묶어두지 못하는 것은 곧 동북 3성 전체를 중국에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승부에서 이기려고 각국은 군사화에서 관료화, 인구조사에서 치안 유지, 인프라 구축에서 공교육과 공공의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근대적’ 국가 장치를 강화함으로써 통치력을 강화했다. 중·일의 변경 건설 시도들은 차별성보다 유사성이 더 많았다. 여기에는 식민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등이 모두 반영되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여러 국가에서 도입한 이 장치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이 국경지대에서 국가권력의 힘이 빠르게 강화되었다.
간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경쟁에서 한국인들은 전혀 침묵하지 않았다. 다양한 정치 세력이 각자 정치적 청사진을 가진 채 양국의 경쟁에 개입했다. 일진회는 한국 근대화의 희망을 일본에 걸었다. 또 다른 다양한 세력들은 일본을 한국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모두 친중국적이지는 않았다. 실제 대립하는 두 진영에 속했던 한국인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본이나 중국과 연합을 결성하기는 했지만 어느 쪽도 강한 한국을 재건한다는 핵심적인 정치적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 책은 청의 ‘내지화’와 일본의 ‘식민화’, 한국의 ‘독립’이라는 세 종류의 ‘탈(脫)변경’의 각축전 속에서 국민, 국경, 국가, 영토 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등장했으며, 동아시아 3국이 모두 국가와 국민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계에서 동아시아의 근대가 창출된 것이다.
만주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 신채호·나이토 코난·송교인
간도 협약을 전후로 두만강 북안 또는 더 큰 범위에서 만주는 다양한 지정학적 관점에 따라 새롭게 정의되었다. 이 공간을 둘러싼 경쟁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엄청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세 나라의 지식인들은 만주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의 선구자 나이토 코난, 국제법을 이용한 주권 수호를 역설한 중국의 송교인, 역사를 통해 민족을 수호하고자 한 신채호 등의 논의를 분석한다. 신채호에게 역사의 주체는 국가라기보다는 민족이었다. 그는 ‘한민족’의 옛 영광에 대한 민족주의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기존의 역사 서술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한국사의 지리적 중심을 한반도에서 만주로 옮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만강 지역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포함하는 한국의 역사적 공간 관념을 만들어냈다. 이 책은 하나의 지리적 공간이 서로 경쟁하는 정치적 목표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상상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개념이 서로 모순적임에도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규정했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두만강이 만들어낸 중국 조선족 형성의 역사
1860년대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넘어 청 지대 아래의 만주로 들어갔다. 초기 이주자의 대부분은 함경도 지방 출신으로,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에도 당시 조정이 이들의 남하를 통제했기에 살아남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들은 두만강 중류 지역 즉 두만강과 그 3대 북부 지류인 해란하, 부르하통하, 가야강에 의해 조성된 부채꼴 모양 충적평야 주변에 주로 모였다. 1880년대 수천 명이었던 것이 1910년대 말에는 한반도 남부 사람들까지 이주해 오면서 약 30만 명으로 늘었다. 중국과 일본의 한국인과 그 토지를 지배하기 위한 경쟁 속에서도 그들은 비록 하나의 통합된 집단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각자 한국에 가장 이익이 된다고 믿었던 것을 추구했다.
국권 피탈로 토지와 인민이 분리되고 민족과 국가가 따로 나뉘자 간도는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그들의 ‘상상된 공동체’를 건설한 공간을 제공했다. 교육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1910년대 간도는 당시의 한국 자체보다 더 ‘한국적’ 장소였다. 1919년 3월 13일 이른 아침 명동 학교와 다른 학교에서 온 학생과 교사들을 포함하여 한국인 약 2만 명이 인근 지역에서 용정으로 모여들었다. 3·1 운동이 ‘근대’라는 이름이 붙는 한국 민족주의의 시대를 출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 ‘근대’의 시대가 실제로는 한국 국경 너머 두만강 이북의 간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30년대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으로 한국과 만주의 국경이 사실상 없어졌을 때 일본인에 이은 2등 시민의 자격으로 더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었고 1940년대 초 연변에는 이미 63만 4천 명이 넘은 한국인이 터를 잡고 있었다. 만주의 한국인들은 글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국경을 초월한 사람의 집단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그들은 한국계 중국인이 되었다. 이 책은 두만강 국경이 만들어낸 중국 조선족 집단 형성사다.
추천평
쑹녠선은 한중일과 러시아의 국가기관과 활동가들이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던 한·중 국경 지대에서의 변경 개척에 관한 복잡한 이야기를 능숙하게 풀어낸다. 여러 가지 언어를 활용하며 복수의 시각에서 서술된 이 숙련된 연구는 아시아의 제국사를 위한 새로운 모델이다.
- 『중국의 서진』의 피터 C. 퍼듀(예일대)
이 책은 국민국가의 변화하는 공간 관념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흥미와 비극을 모두 포착하는 초국적 역사 연구이다. 만주의 한 작은 모퉁이가 쑹녠선의 능숙한 솜씨로 동아시아의 지구적 근대성을 둘러싼 지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분투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의 앙드레 슈미드(토론토대)
- 『중국의 서진』의 피터 C. 퍼듀(예일대)
이 책은 국민국가의 변화하는 공간 관념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흥미와 비극을 모두 포착하는 초국적 역사 연구이다. 만주의 한 작은 모퉁이가 쑹녠선의 능숙한 솜씨로 동아시아의 지구적 근대성을 둘러싼 지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분투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의 앙드레 슈미드(토론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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