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역사기행 (책소개)/2.역사문화산책

인천 100년의 시간을 걷다 : 근대유산과 함께하는 도시탐사

동방박사님 2022. 6. 16.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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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리더스원의 큰글자도서는 글자가 작아 독서에 어려움을 겪는 모든 분들에게 편안한 독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책 읽기의 즐거움을 되찾아 드리고자 합니다.

100년 전 지도를 들고 현재의 거리를 걷다!
낯선 풍경에 담긴 오랜 이야기

익숙하지만 낯선 도시, 인천의 과거를 탐색하다


서울에서 전철로 한 시간이면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곳 인천. 하지만 인천역에 내리는 순간 주위는 예상하지 못한 낯섦으로 가득하다. 도시의 진정한 속살을 이해하기 위해 낯선 정서와 공간을 탐색하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걸으면서 생각하고 낯선 풍경의 이면에 담긴 오랜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낯선 풍경에 담긴 오랜 이야기

1
청국조계와 각국조계의 지층에 새겨진 기억과 흔적
-북성동, 선린동, 항동, 송월동, 전동 일대


1. 인천역
2. 러시아영사관 터
3. 영국영사관 터
+ 경인철도
4. 의선당
5. 공화춘
6. 청국조계 건축물군
7. 청국영사관 터·인천 화교중산학교
8. 청국영사관 회의청
9. 선린동 25-2 상가
10. 의생성
11. 선린동 1-5 주택
12. 청일조계 계단
+ 차이나타운
+ 차이나타운(선린동)의 어제와 오늘
13. 각국공원
14. 존스톤 별장 터
15. 제물포구락부
16. 세창양행 사택 터
17. 고노 주택 터·인천시장 공관
18. 우리탕 주택 터
19. 웃터골·부립중학교
20. 조선총독부 관측소
21. 전환국 터
+ 각국공원

2
일본조계에 흐르는 시대의 표정
-중앙동, 관동, 송학동, 해안동, 항동 일대


22. 일본영사관·인천부청사
23. 대화조 사무실
24. 대불호텔 터
25.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26.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27.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
+ 근대 도시 가로
28.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
29. 고오리 회조점·해안동 창고군
30. 하야시 상점·아사히구미 창고
+ 항구와 매립
31. 미쓰이 물산 인천지점
32. 가와바타 창고
33. 인천곡물협회 터
34.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터
35. 인천우편국
36. 미두취인소 터
37.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터
38. 인천세관 터
39. 인천세관 창고와 부속동
+ 인천세관의 기술자들
40. 관동2가 연립주택군
41. 조선신보사 터
42. 일선해운 사옥
43. 군영각 터
44. 후루타 양품점
45. 인천병원 터
46. 인천상업회의소 터
47. 인천경찰서 터
48. 혈문
+ 일본식 상점가와 마치야
+ 일본조계(중앙동·관동·해안동)의 어제와 오늘

3
조선인 거주지에서 풍기는 일상의 흔적
-신포동, 내동, 답동, 경동, 용동 일대


49. 인천 감리서 터
50. 내동교회
51. 유항렬 주택
52. 내리교회
+ 개항장 서양인 선교사의 활동
53. 인천공립심상소학교 터
54. 축현역
55. 인천흥업주식회사
56. 용동 권번 돌계단
+ 부도 유곽과 용동 권번의 설립
57. 애관
58. 공설시장
59. 답동성당
60. 가톨릭회관 터
+ 궁정(신포동)의 어제와 오늘

4
일본인 묘지에서 조계 외곽의 신시가지로
-신흥동, 신생동, 율목동, 사동, 선화동, 도원동 일대


61. 표관 터
62. 가부키좌 터
+ 극장의 장소성
63. 조선매일신문사 터
64. 오사카 상선 인천지점 터
65. 공립심상고등소학교
66. 동본원사 터
67. 서본원사·묘각사 터
68. 인천공원·인천신사 터
+ 인천의 묘지와 사찰
69. 리키타케 정미소 터
70. 가토 정미소 터
71. 리키타케 연탄공장
72. 부윤관사
73. 아카마쓰 별장
+ 문화주택
74. 인천남공립상업학교
75. 인천구 재판소 터
76. 부도 유곽 터
77. 다쿠 합명회사·아사히 양조주식회사 터
78. 공설운동장 터

5
유흥과 휴양의 핫플레이스 월미도
-월미도 일대


79. 월미교
80. 월미도유원주식회사 터
81. 월미도해수욕장 터
82. 월미도 조탕 터
+ 인천의 낙원, 월미도
83. 스탠다드 석유회사 저유창고 터
84. 임해학교 터
85. 검역소 터
86. 애탕신서 터
87. 무선전신소 터
88. 인천항 갑문
89. 소월미도 등대 터
+ 인천의 등대
+ 월미도에서 바라본 인천항 풍경의 어제와 오늘

6
산업화의 장소와 조선인 노동자의 삶
-북성동, 만석동, 송현동, 화수동, 화평동 일대


90. 일본제분
91. 곡물 창고
92. 애경사 터
93. 인천전기주식회사 터
94. 각국묘지 터
95. 도쿄시바우라 전기 노동자 사택
+ 노동자 주택
96. 동양방적
97. 인천제염소 터
98. 다카스기 장유양조장 터
99. 사이토 정미소 터
100. 아리마 정미소 터
101. 묘도·아카사키촌
102. 조선기계제작소 인천제작소 터
103. 도쿄시바우라 제작소 인천공장
104. 인천공작창 터
+ 인천의 공업화

7
이주민과 피난민이 형성한 노동과 배움의 현장
-배다리 일대


105. 송현배수지
+ 근대 상수도
106. 배다리시장
107. 조흥상회
108. 인천양조장
109. 조선인촌주식회사 터
+ 인천의 노동운동
110. 이십세기약방
111. 일본장유주식회사·노다 장유회사 터
112. 영화여학교
113. 인천공립보통학교
114. 인천공립상업학교 터
115. 여선교사 기숙사(갬블홈)
116. 창영감리교회
+ 근대 교육과 학교
117. 알렌 별장 터·전도관
118. 우각역 터

8
경인가도의 어제와 오늘
-신포국제시장에서 제물포역까지


경인가도의 어제와 오늘

나가며 도시에 새겨진 시간을 탐색하는 이들을 위하여

자료 출처
참고문헌
이미지 출처
 

 

저자 소개

저 : 이연경
 
인천대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이다.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6회 심원건축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성부의 ‘작은 일본’ 진고개 혹은 本町』 및 『사진으로 만나는 개항장 인천의 경관』(공저) 등의 저서와 『서울, 권력도시』(공역)의 번역서가 있다.
 
저 : 문순희
 
인천대학교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연구원 겸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BK21플러스사업단 박사후연구원. 일본 간사이?西 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엽서와 안내서로 만나는 인천의 명소와 근대 관광』(공저), 『사진으로 만나는 개항장 인천의 경관』(공저) 등의 저서와 『일본 문화의 선구자들』 등의 번역서가 있다. 19세기 이후 간행된 안내서와 여행 관련 기록을 소재로 근...

저 : 박진한 (Park Jin-Han)

 
인천대학교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소장 겸 일어일문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京都 대학에서 역사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학교 역사 상·하』(공저), 『지도로 만나는 개항장 인천』(공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근대도시 형성』(공저), 『도시는 역사다』(공저), 『일본 근세의 서민지배와 검약의 정치』(단독) 등의 저서와 번역서로 『쇼군, 천황, 국민-에도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책 속으로

인천은 다른 개항도시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바로 청국조계, 각국조계, 일본조계가 서로 병존하며 조계 밖 한국인들과 경합하고 충돌하면서 개항도시를 만들어갔다는 점이다. 본래 중국의 전통음식인 짜장면炸?面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짠맛에서 단맛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은 개항장의 문화충돌이 빚어낸 일종의 발명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개항장과 달리 다소 이국적인 풍취의 도시로 바라보았던 것은 비단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었다.
--- p.15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인 차이나타운은 1884년 4월 청국과 체결한 ‘인천 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에 따라 중구 선린동 일대 청국조계가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1883년 44명에 불과하던 화교 수는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과 함께 중국 상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일 년 만에 다섯 배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약 1,000명으로 늘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조계를 빼앗으려 했으나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조선과 서구 열강에 의해 청국조계는 그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 p.38

1882년 4월 영사를 파견해 인천항 개항 준비에 착수한 일본은 1883년 현재의 중구청 자리에 의양풍擬洋風, 일본 전통 건축의 방식으로 서양 건축을 모방한 건축 양식의 2층 목조건 물을 짓고 영사관을 개설했다. 일본식 기와를 얹고 2층에 난간이 있는 발코니를 설치하고 그 위에 아치 모양으로 처마를 꾸민 건물은 비슷한 시기 지어진 부산의 일본영사관과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 p.69

1898년 착공된 일본조계 앞 매립 사업으로 새롭게 생겨난 4,000여 평의 매립지에는 부두시설과 각종 창고 건물이 들어섰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 남 건물과 한국근대문학관 맞은편 건물이 있는 해안동1, 2가 일대가 바로 매립지에 해당한다. 그 밑에 있는 해안동3, 4가는 1909년에 매립되어 각종 상점과 기업이 들어섰다. 바닷가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해안동 일대가 사실은 갯벌 이었다가 각종 창고와 상점이 가득한 매립지로, 지금은 세련된 문화시설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개항장이 겪어 온 다양한 역사를 보여주는 일례일 것이다.
--- p.87

영국 국교인 성공회는 1890년 9월 29일 선교를 목적으로 코프 주교Bishop Corfe와 의료 선교사 랜디스E. Landis 일행을 한국에 파견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이들은 곧바로 선교와 의료 활동을 시작하면서 성당과 병원 건축을 추진했다. 그 결과 1891년 9월에는 인천 감리서 맞은편에 성공회 성미카엘교회를 준공했고, 1891년 10월에는 각국조계 인근 내동 3번지 일대 언덕 위에 성누가병원을 건립할 수 있었다.
--- p.128

1923년 7월 14일에 개장한 월미도 조탕潮湯은 바닷물을 데워 입욕하는 해수탕으로 개업 첫날 5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본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13만 원의 자금을 들여 건설했지만 운영상의 문제로 1924년에 월미도유원주식 회사가 인수한 뒤 재개장했다. 풍광 좋은 바닷가에 마련된 조탕을 중심으로 1927년에는 유원지 시설이, 1930년에는 호텔이 들어서면서 월미도 유원지는 서울 근교에 최신식 시설을 갖춘 여름 피서지로 명성을 자랑했다.
--- p.192
 

 

출판사 리뷰

100년 전 지도를 들고 현재의 거리를 걷다!
낯선 풍경에 담긴 오랜 이야기

익숙하지만 낯선 도시, 인천의 과거를 탐색하다


서울에서 전철로 한 시간이면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곳 인천. 하지만 인천역에 내리는 순간 주위는 예상하지 못한 낯섦으로 가득하다. 도시의 진정한 속살을 이해하기 위해 낯선 정서와 공간을 탐색하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걸으면서 생각하고 낯선 풍경의 이면에 담긴 오랜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인천, 100년의 시간을 걷다는 1918년 인천 지도를 들고 인천역에서 도원역까지 인천의 구석구석을 탐색하는 여정에서 시작되었다. 100년 전 지도를 들고 걸으며 옛 모습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풍경 속에서 오래된 건물과 가로, 석축과 계단 위에 남겨진 100년 전 모습을 발견한다.

인천역에서 우각역까지, 개항 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의미 있는 장소 118곳 엄선

건축학과 역사학, 문학을 전공한 저자들의 다양한 시각을 담아 100년 차를 둔 인천의 풍경을 다각도에서 담아보고자 했다. 수천 컷의 사진을 찍고 수백 곳의 장소를 탐색하며 골라낸 118개의 장소는 지금은 멸실되었으나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장소도 다수 포함되었으며,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모여 살며 만들어낸 이국적인 풍경부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우리 삶터의 모습까지 담고 있다. 근대 산업화와 노동자들의 애환 어린 장소뿐 아니라, 근대적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위락의 장소까지 포함되었다.

새로운 장소를 발굴하고 기억하기 위하여

2012년에는 아사히 양조장이, 2017년에는 애경사가, 이어 최근에는 신일철공소가 철거되었으며, 이 책에서 다룬 신흥동의 문화주택들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미쓰비시 줄사택도 철거를 앞두고 있다. 한편에서는 근대 문화유산을 활용한 관광자원을 계속 발굴 또는 생산해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정말 지켜야 할 근대 문화유산들이 눈앞의 이익이나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미명하에 사라져가고 있다. 다시는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연구자들은 정확한 사료에 근거한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