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문화예술 입문 (책소개)/1.건축문화

도산서당 : 선비들의 이상향을 짓다

동방박사님 2022. 7. 12.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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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대한 건축가, 퇴계 이황의 집 짓기

조선 선비의 건축세계와 그 건축물을 조명하는 취지로 쓰여진 인문건축서 『도산서당, 선비의 이상향을 짓다』. 이 책의 저자 경기대학교 건축학부 김동욱 교수는 건축물이 지어진 역사적 배경과 시대 흐름에 관심을 갖고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을 탐구해왔다. 우리 전통건축을 연구하는 데 있어, 건물의 형태와 건축학적 특징뿐 아니라 당대 지식층들의 집에 대한 생각, 집을 짓는 데 참여한 장인들의 기술, 시대적 여건 등을 통해 한 시대의 건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자 애써왔다. 『도산서당, 선비의 이상향을 짓다』 역시 저자의 그러한 관심사와 방법론에 의해 저술되었다.

이 책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퇴계 이황과 그가 지은 도산서당을 다루는데,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퇴계 이황의 건축가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재조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도산서당은 16세기의 대표적인 서당(서재)이면서 16세기 이후의 선비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에, 조선의 선비 건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한국 전통건축사에서 그렇게 의미 있는 건축물을 지은 이가 퇴계 이황이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저자 김동욱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로서의 퇴계 이황의 면모를 밝힘으로써, 도산서당의 의미와 가치를 갱신한다.

 

목차

〈테마한국문화사〉를 펴내며
Discovery of Korean Culture
Preface
저자의 말

서장 16세기 선비들의 이상적 건축
서당이란, 정사란|16세기, 은거하는 선비들|주자의 행적을 따라|영남 선비들의 앞선 사례들|이황이 지은 도산서당

제1부 도산서당을 짓기까지
1. 퇴계 이황의 한평생

어린 시절 퇴계는|과거에 내리 세 번 낙방하다|벼슬을 살면서도 고향의 산수간을 그리워하여|고향에 내려와서도 벼슬살이는 이어지고|형제, 아버지, 할아버지로서의 이황

2. 고향에서 집 장만하기
서른이 넘어 처음 달팽이집을 마련하다|집을 짓고는 동네 이름을 퇴계라 고치니|계상서당에서 50세 이후를 모색하다|서당이나 정사를 지을 수 있었던 토대는 |sb|정사의 유래

3. 도산에 터를 얻고 집을 구상하기
서당 고쳐 지을 땅을 도산 남쪽에서 얻다|서당을 지을 궁리로 가득하고|퇴계, 설계도를 직접 그리다|조선시대의 건축 설계도는

4. 도산서당 짓기
승려 법연에 이어 정일이 일을 맡으니|“스스로 고생을 사서 하니 혼자 웃습니다”|실로 5년 만에 서당이 완성되다|이상적인 집을 마련하려는 평생의 소원 |sb|용수사와 퇴계 집안

제2부 도산서당의 건축
1. 도산서당이 이루어지고

이황, 시를 지어 소회를 밝히니|온돌과 마루로 장수와 유식의 세계를 이루니|제자들이 본 도산서당의 모습은

2. 도산서당의 건축
오늘의 도산서당 모습은|7자, 8자, 9자로 이루어진 최소한의 공간|단정하게 흰옷 차려입은 선비를 닮다 |sb|창호 이야기

3. 도산서당의 경관
「도산기」를 짓다|연못과 화단과 울타리를 함께 만드니|서당을 둘러싼 외곽세계

4. 농운정사, 도산서당 서쪽의 학사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곳|지금의 농운정사를 살펴보니|베틀의 도토마리처럼 생긴 집 |농운정사와 그 전후의 정사들

5. 퇴계의 건축가적 활동
통풍과 습기까지 고려하다|집과 원림이 하나가 되게끔|16세기가 만든 선비 건축가 이황 |sb| 현판 이야기

제3부 인품으로 완성된 건축
1. 도산에서 이룬 학문과 교육

퇴계, 오십 이후에 학문을 이루다|퇴계의 제자들|제자들이 머물며 학문을 익히는 곳은

2. 도산에서의 일상
도산과 계상을 왕래하다|손님을 맞고 예를 행하다|계절을 즐기고, 산에 오르고, 뱃놀이도 즐기고, 때로는 술도 마시니 |sb|청량산과 퇴계

3. 도산에서 지은 시들
『퇴계잡영』, 퇴계에서 흥취를 읊조리다|『도산잡영』, 도산에서 흥취를 읊조리다|「도산십이곡」, 노래할 수 있게 국문시가를 짓다

4. 도산서당의 건축적 품격
산수간에서 지내는 뜻은|매화 형은 어찌하여 함께 들지 않았던가|퇴계라는 선비의 인품 |sb|퇴계의 유품

제4부 | 도산서원의 건립과 전개
1. 퇴계의 죽음

퇴계는 죽고, 남은 사람은 장례를 치르고|스승의 사후에 제자들은|문집이 간행되다

2. 도산서원의 건립
서원이 지어지는 경위|도산서원의 건축에도 퇴계의 영향이

3. 도산서원의 구성
서원 전체의 모습|퇴계의 신주를 모신 상덕사|퇴계의 학맥을 잇는 전교당의 품격|장판각의 목판, 광명실의 서책과 진도문|제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고직사|16세기의 서원과 도산서원

4. 17세기 이후의 도산서당과 도산서원
도산서당을 감히 고치지 못하는 까닭|서당과 서원의 크고 작은 수리|서원에 변고가 일어나다|도산서원의 치제와 시사|화폭에 재현된 도산서원|문집의 추가 간행과 퇴계의 후손들 |sb|『정본 퇴계전서』 간행을 기다리며

5. 20세기의 도산서원
도산서원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다|서원을 변형시켜버린 1970년의 수리|
선현의 유적을 온전하게 보존한 유일한 서원 |sb|퇴계의 맏제자 조목

결어 | 도산서당, 선비 건축의 새로운 경지를 열다
평생에 걸친 집에 대한 꿈|영남 땅에 퍼져간 선비들의 건축|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이 갖는 오늘날의 의미

도산서원 살펴보기
퇴계 제자들의 서당과 정사
도산서원의 주요 연혁
퇴계 이황의 주요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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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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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김동욱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지냈다. 저자는 건축물이 지어진 역사적 배경과 시대 흐름에 관심을 갖고 조선시대의 건축을 집중해서 탐구해오고 있다. 특히 조선 후기 궁궐이나 성곽이 갖는 건축 특성을 밝히는 데 주력해오고 있으며, 건물의 외형보다는 당대 지...
 

출판사 리뷰

왜 ‘도산서원’이 아니고 ‘도산서당’인가
책의 제목이 익히 알려진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아니고 ‘도산서당’(陶山書堂)인 데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퇴계가 살아생전에 학문 탐구의 처소로 삼고자 지은 건물이 도산서당이고, 퇴계 사후에 퇴계의 유지를 기리고자 후학들이 도산서당을 확장하여 지은 건축물이 도산서원이다. 4부에서 도산서원의 건립과 그 의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 책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대상이 도산서당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산서당, 선비의 이상향을 짓다』는 조선시대 건축물로서의 서당 또는 서원 건축물의 건축사적 의미를 함께 다루고 있지만, 서당(書堂, 정사精舍)이 지어진 16세기의 시대적ㆍ사상적 배경과 퇴계 이황의 삶과 학문이 서당 건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충실하게 논구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건축물, 도산서당에서 퇴계 이황의 사상이 완성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기틀이 잡혔고, 조선 유학을 이끌게 되는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도산서당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조선시대의 사상사적 맥락에서 온전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황은 무엇을 얻기 위해 평생 집을 짓고 또 옮겼는가
이황이 도산서당을 완성한 것은 그의 나이 61세(1561)가 되었을 때였다. 도산서당을 짓기 전에도 이황은 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느라 애를 썼다. 지산와사(芝山蝸舍, 1531)에서 시작해서 양진암(養眞庵, 1546), 죽동(竹洞)의 집(1548)을 거쳐 계상에 한서암(寒棲庵, 1550)과 계상서당(溪上書堂, 1551)을 짓기까지 무려 다섯 차례나 옮겨 다녔다. 처음 지은 집인 지산와사를 지은 때가 31세이므로 61세까지 30년에 걸친 노력이었다. 그가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친 시간은 고작 10년에 불과했다.
이 책은 퇴계가 말년에 이르기까지 평생 집을 짓고 옮긴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퇴계가 좀 더 나은 주거지를 찾느라 집을 지었다고 볼 수 없는 건, 도산서당의 작은 규모에서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퇴계가 그토록 절박하게 좋은 터를 구해 집을 짓고자 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아래의 편지글이 퇴계의 심정을 추측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세상에 발을 잘못 내디뎌 세속을 따르느라 골몰하다 보니 수십 년의 세월이 홀연히 이미 잘못 지나갔다. 고개를 돌려 회상하여 보니 망연자실할 뿐이라 내 몸을 어루만지며 크게 탄식할 뿐이다. 그래도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은 몸을 거두어들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옛 서적을 찾아내어 깊은 뜻을 찾고 뜻을 풀어보니 때때로 내 뜻에 맞는 것이 정말 옛날부터 이른바 ‘공부에 몰두하면 혼연히 밥 먹는 것도 잊는다’고 한 말이 나를 속이지 않음을 알겠다. 퇴계 곁에 겨우 몇 칸의 집을 엮어 이제부터는 곧바로 죽을 때까지 기약하고서, 묵묵히 앉아서 고요하게 학문을 완상하면서 여생을 지내려 한다.(64쪽)

계상에 한서암을 지었을 때의 퇴계의 감상이 드러난 글이다. 여기서 퇴계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한 것은 ‘학문을 완상’할 수 있는 서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서당에서 학문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산수간에 사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에서 관료생활을 해오던 이황은 40세 이후부터는 고향에 정착하여 학문을 이루고자 했다. 정계에서 은퇴하기까지 임명과 퇴직의 잦은 반복은 퇴계의 심리적 갈등과 그러한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퇴계가 여섯 차례에 걸쳐 집을 짓고 옮겨 다닌 것은, 학문을 수양하여 도를 이루고자 하는 퇴계의 간절한 바람의 반영이었다. 『도산서당, 선비들의 이상향을 짓다』는 퇴계의 건축에 대한 열정이 조선 선비의 정신문화와 연계되어 있음을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도산서당의 건축적 특징
서당이라는 공간 서당의 공간적 기능은 크게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으로 대별할 수 있다. 장수는 학문을 닦는 공간적 성격을 의미한다. 도산서당의 완락재(玩樂齋)는 책을 읽고 잠을 자는 장수의 공간으로서, 바닥에는 온돌을 드리고 벽에는 책이나 문방용품을 놓을 선반을 꾸몄다. 특히 온돌은 장수의 공간을 만드는 한 방법이었다. 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낮은 천장을 한 따듯한 온돌 바닥은 고요히 집중하여 책을 읽고 공부하기에 알맞았다.
암서헌(巖栖軒)은 두 면이 개방된 도산서당의 마루방이다. 공부로 피로한 심신을 달래는 휴식, 즉 유식의 공간이며, 손님을 접대하거나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다. 마루는 유식의 공간을 만드는 전통 건축기법인 것이다. 벽이 개방되고 바닥이 시원한 마루는 주변을 내다보며 휴식을 취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에 적합했다. 쉬면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는 유식은 장수와 함께 선비들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 책에서는 온돌과 마루가 선비들이 학문을 수양하고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데 적합한 전통건축 기법임을 밝히고 있다.

도산서당이 크지 않고 소박하고 단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온돌방과 마루에는 따로 의자나 침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책을 보는 데는 낮은 책상이면 족했고, 잠은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펴는 것으로 충분했다. 손님이 찾아오면 마루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바깥 경치를 함께 즐기면 되었다. 이 점에서 조선의 서당은, 퇴계를 비롯한 선비들이 따르고자 한 주자(朱子)의 무이정사(武夷精舍)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장수와 유식에 필요한 공간은 집을 크게 짓지 않아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남송과 조선의 기후 차이 때문에 조선의 서당과 서당 건축의 모범이었던 무이정사는 실제로는 매우 다른 외관과 실내 구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산서당은 조선의 실정에 맞게 지어져, 조선의 건축 전통을 계승한 건축물이었다.

도산서당의 건축 구조 ①3칸 제도 16세기 조선 선비들의 서당은 소박하게 지어졌다. 도산서당 역시 3칸 제도(三間之制, 3량집)의 최소 규모이다. 남아 있는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권벌의 충재(沖齋)ㆍ금난수의 성성재(惺惺齋)ㆍ이언적의 계정(溪亭)을 보면 16세기 선비들의 서당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으로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벌 같은 재력가도 굳이 3칸 집을 고집했다는 것은, 재력의 여부와 서당의 규모는 상관이 없었던 듯하다.
②실내 공간을 넓히는 방안으로 퇴주와 익첨을 활용 3칸 집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고자 생각해낸 방식이 퇴주(退柱, 툇기둥)를 세우고, 익첨을 덮는 것이었다. 퇴주를 이용해 처마를 덧대는 것(익첨)은 집의 구조를 확장하지 않으면서 실내 공간을 넓힐 때 쓰는 방식이다. 이황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라는 소박한 서당의 구조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실내를 여유있게 하는 방안을 퇴주와 익첨에서 찾았다. 도산서당은 16세기 영남의 3칸 서재 전통을 계승하면서 퇴주와 익첨을 활용하여 공간의 부족을 해결했다는 점에서 선비 건축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으며,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룩한 건축의 한 정점을 보여주었다.
③질박하고 간소한 느낌을 주는 기둥과 창호 도산서당이 간소하면서도 질박한 느낌을 주는 또다른 요인으로 네모난 형태의 굵은 기둥과, 가공이 거칠고 투박하며 가로세로가 반듯한 창호를 꼽을 수 있다. 네모난 기둥은 둥근 기둥에 비해 격을 낮춘 것이다. 위치와 크기는 다르지만 투박하게 만들어진 창호는 단정하고 깨끗한 선비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도산서당은 3칸 집의 최소 규모로, 엄격하게 절제되고 소박한 모습으로 지어졌다. 퇴주와 익첨을 이용했다는 것은 3칸 집이 다소 좁았음을 반증한다. 그리고 사대부의 집답지 않게 네모난 기둥을 써서 애써 격을 낮춘 점, 아무런 치장 없이 간소하고 질박한 외관을 유지한 점은 선비들이 학문을 하면서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했는지를 시사해준다.

도산서당, 통합적 건축의 전형 도산서당을 지으면서 단지 건물만 세운 게 아니라 집 곁에 못(정우당淨友塘)을 파 연꽃을 심고, 샘(몽천蒙泉)을 뚫고, 화단(절우사節友社)을 만들어 꽃나무(매화ㆍ대나무ㆍ소나무ㆍ국화)를 심고, 마당을 둘러싸는 울타리를 두르고 사립문(유정문幽貞門)을 냈다. 연꽃, 샘, 절우 등을 서당의 경계 안에 둠으로써 선비정신을 스스로 고양시키고자 한 것이다. 퇴계의 시대에 집과 원림(苑林)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하나의 건축물이었다. 물론 퇴계는 이를 손수 계획하고 설계하였다.
저자는 퇴계 시대의 건축이란 지금의 건축과 조경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이었다고 평가하면서, 현대의 건축이 전문화ㆍ분업화되면서 통합적인 면모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16세기의 빼어난 건축가, 퇴계 이황
퇴계가 건축에 대해 조예를 가질 수 있었던 배경 성리학이 조선에 유입된 시기는 고려 후기이지만, 학문의 기틀이 잡히고 본격적으로 사회의 규범으로 작용하게 된 것은 16세기가 되어서다.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일상과 의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사당을 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게 된 것도 이때 새롭게 제시된 실천 덕목이었다. 사당제도와 집안의 의례는 16세기 선비들이 건축의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성리학이 확산됨에 따라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사당이 요구되고 서원을 짓는 일이 생겼다. 선비들이 정사나 서당을 짓기 시작한 시기도 16세기였다. 시대의 이행기적 국면에서 새로운 형식의 건축물을 구상하고 건축 일을 이끌어갈 역할이 요구되었으며, 이 역할은 결국 성리학에 정통한 선비들이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퇴계가 건축 일에 관심을 갖고 도산서당을 짓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선 것은 이러한 시대적ㆍ사상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건축가로서의 퇴계의 활동 저자 김동욱은 도산서당을 짓는 과정에서 퇴계가 지금의 건축가 역할을 했다고 본다. 건물 터를 살피고 집의 쓰임새를 궁리하고, 경제적 여건을 염두하여 가장 적절한 크기와 형태의 집을 계획하는 일이 건축가의 역할일 텐데, 이황이 한 일이 바로 건축가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퇴계는 1557년 도산에 처음 터를 얻고 나서 여러 차례에 걸쳐 현지를 살피고 오랜 궁리를 거듭하면서 서당 건축을 계획했다. 도면을 그린 것만도 1559년까지 두 차례 이상이 확인되었다. 처음에 한 구상은 건물의 좌향, 실의 구성은 물론, 기둥 사이의 치수까지도 명시한 것이었다. 공사 과정 중에는 승려 정일에게 목수 일을 맡기는 한편 아들 준에게 세세한 일들을 지시하면서 공사를 이끌어갔다. 기와를 굽는 일이나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도 직접 나서서 꾸려나갔다. 그 이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기둥을 세우고 익첨을 달고 창호를 설치하는 과정에서도 퇴계가 구상한 바가 반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네가 집의 온돌이 습하고 냉하여서 거처할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거기는 내가 병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너도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 방은 담이 낮고 물길이 막혀서 물기가 쌓이고 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드니 지금 반드시 뒷담을 헐어 물길을 트게 하고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며 그 온돌방도 고쳐야만 우환이 없을 것이다. 만약 담을 허물지 않고 물길이 통하지 않는다면 비록 온돌을 고쳐도 무익할 것이다.(161쪽)

방이 습하고 냉기가 있다는 전언을 받고 퇴계가 이를 고칠 방법을 아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퇴계가 집을 관리하는 데 얼마나 꼼꼼했으며 어떻게 집안 구석구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어서 흥미롭다.

도산서당의 품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도산서당의 건축 품격과 깊은 인문향 주지하다시피 도산서당은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 3칸의 작은 집이다. 선비 한 사람이 거주하며 책을 보고 잠자고 손님을 맞는 데 필요한 최소의 공간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에서 61세부터 70세까지 10년을 지내면서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끌어올렸으며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작고 소박한 이 공간에서 그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저자 김동욱은 도산서당의 진정한 가치를 도산서당의 건축사적 의의뿐 아니라 퇴계와 도산서당으로 인해 가능했던 인문정신의 발현에서 찾는다. 건축과 인문정신의 결합이 ‘도산서당’이라는 것이다.
도산서당은 3칸 집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는다. 저자는 도산서당의 영역이 서당을 둘러싼 인문적ㆍ자연적 환경으로 확장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정우당, 몽천, 절우사, 유정문은 도산서당을 인문의 공간으로 맥락화한다. 퇴계가 ‘매형’(梅兄)이라고 부를 만큼 좋아했던 매화는 2월이 되면 어김없이 진한 향기를 피워냈을 것이다. 도산서당에서 강가를 향해 조금 나아가면 천연대(天淵臺)가 좌우를 호위하고, 낙동강 여울물이 모여 탁영담(濯纓潭)을 이루고 그 사이를 흰 바위의 반타석(盤陀石)이 펼쳐진다. 여기서 좌우를 돌아보면 푸른 숲으로 덮여 있는 동취병(東翠屛)ㆍ서취병(西翠屛) 봉우리가 팔을 벌린 채 맞이하고, 저 멀리 강 건너 의인촌 마을에서는 일상의 삶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도산서당은 산수간(山水間)과 경계를 나누지 않고 산수간을 여유롭게 품에 안아 그곳 공간 전체를 인문화한다. 도산서당이라는 공간과 이를 둘러싼 자연은 퇴계의 시(詩)와 학문의 세계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3칸의 작은 집은 산수와 경계를 짓지 않음으로써 무한한 세계로 확장될 수 있었고, 이는 퇴계의 높은 인문 경지로 나타났다.

퇴계의 고매한 인품이 깃들다 퇴계가 당시에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판서 이황을 특별히 부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황이 병으로 부름에 응하지 못하자 주상께서 궁중에서 은밀히 화공에게 명하여 이황이 사는 도산의 경치를 그려서 올리도록 하였다. 항상 이황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그가 살고 있는 곳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였으니 주상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어떻다 하겠는가.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미담으로 여겨 여항 간에 전파하였다.(『명종실록』, 1566년 5월)

명종은 이황의 연륜과 인품을 높이 여겨 그를 곁에 두고 싶어했다. 그러나 퇴계는 칭병하며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머물고자 했다. 명종과 퇴계 간의 줄다리기는 명종이 승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명종이 승하하였을 때 퇴계는 국장을 지휘하고 명종의 행장을 지었다). 임금이 여러 번 유시를 내려도 올라올 의사가 없자, 이황이 머물고 있다는 도산의 경승을 그림으로 그리고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병풍으로 만들어 침소에 둘러치라고 명하였다. 이 이야기는 명종이 퇴계의 인품을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퇴계가 머물던 도산서당의 위상과 상징적 가치를 가늠케 한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머물고 있는 건물로서만이 아니라, 퇴계의 고매한 인품이 깃들어 있는 인문정신의 발흥지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3칸의 작은 건축물에서 피어난 선비정신의 숭고한 기상 도산서당의 가치는 도산서당의 건축적 우수함이나 주변 경치의 아름다움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다. 도산서당은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서, 국가적 차원에서 존경을 받은 퇴계의 인품에 의해 온전하게 품격을 갖출 수 있었다. 3칸짜리의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건물이 지니는 품격은 건축으로써만은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아름답기로 치자면 궁궐이나 사찰의 화려한 건물들이 윗길일 것이다. 도산서당의 진정한 가치는 시대의 스승이자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퇴계가 직접 건축을 하고, 그 안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키워냈다는 점에서 기원한다. 뿐만 아니라 서당을 짓고 거기에서 학문을 닦고 시를 짓고 산수에서 안분지족하는 전통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조선 선비의 문화와 정신세계를 형성했다.
도산서당은 최소의 규모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퇴계는 그 공간에서 치열하게 자신을 연마하고 수양하였으며, 비로소 조선 성리학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가 지은 것은 작은 건물이지만, 후학들이 공감한 것은 선비정신의 숭고한 기상이었다. 『도산서당, 선비의 이상향을 짓다』에서 저자가 강조한 도산서당의 건축 품격은 바로 그것이다.

도산서원, 조선 유학의 성지가 되다
퇴계 사후 도산서원의 건립 도산서원은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 퇴계에게서 직접 학문을 전수받은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퇴계가 죽은 뒤 도산서원의 건립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1572년에 사당인 상덕사에 위패를 봉안하는 것을 시작으로 1574년 여름에는 서원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575년에 한석봉의 편액을 받고 사액서원으로 지정되었다. 선현이 죽은 뒤 이렇게 신속하게 사액서원으로 지정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이 모든 과정이 퇴계 사후 6년 만의 일로, 이후에 도산서원은 조선 유학의 성지가 되었다.
도산서원은 16세기 후반에 형성된 서원 건립의 규범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17세기 이후의 정형화된 서원과는 사당의 위치나 강당의 평면 구성에서 차이가 나고 사당 곁에 신주를 둔 점도 다르다. 이런 점에서 도산서원은 조선조 서원의 초기 형성기의 경향을 보여준다.

퇴계가 책을 읽던 도산서당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도산서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과 학사인 농운정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원의 건립이 선현이 죽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루어지면서 선현의 유지를 보존하기는 사실상 어려웠다. 도산서원의 경우 서원의 건립이 퇴계 사후에 바로 이루어졌고, 제자들과 후손들이 퇴계의 유지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고자 정성을 기울였기 때문에,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라는 역사의 질곡에서도 도산서원은 훼철을 면하였다. 도산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가운데 선현이 독서하던 건물(도산서당)을 서원 경역 안에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