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1.민주인권기억

남산 인권길 1 (수방사령부 터, 소릿길 터널, 옛 중앙정보부 제5별관)

동방박사님 2022. 7. 17. 12:48
728x90

1962 년 용산구 후암동에서 중구 필동 ( 현재 남산골한옥마을 위치 ) 으로 이전했다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을 근거지로 하는 대한민국 육군 소속 군단급 기능/작전사령부. 애칭은 방패부대. 별칭은 충정대(忠正臺).

 

196161일 창설되었으며, 2개의 사단과 1개의 여단을 예하에 두고 있다. 2022년 현재 사령관은 김규하 육군 중장(육사 47)이다.

 

수방사 창설 이전

이 수방사 이전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지키는 부대들은 당연히 존재했고, 첫 주자는 1948년 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지금의 수도사단)1949512()수도사단으로 승격한 7여단(지금의 제7보병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수도사단이 그 명칭답게 경기도 동두천과 포천 전방 경계를 맡던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적의 보전 공격을 맞이했는데, 문제는 부실한 대전차 장비와 병력차[2]로 동두천과 포천에서 맥없이 밀려났고, 뒤이어 벌어진 의정부 전투에서도 속수무책으로 밀려 결국 경비할 수도까지 잃어버리자 ()수도사단은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던 수도경비사령부에게 '수도' 명칭과 1연대를 넘겨주고 임시 해체되었고, 그 후 수도경비사령부는 지금의 수도사단으로 재편되어 한국전 내내 활약했다. 하지만 두 사단은 서울을 지키지 못한 죄로 각각 강원도 화천군과 경기도 동북부 일대에 머무르게 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정확히는 1955년 전후)부터 수방사가 창설된 1961년까지는 영등포 주둔 제6군관구사령부 및 그 예하 사단들(30, 33사단(17사단))이 서울의 방어를 담당했다. 수방사 창설 이후에도 군단급으로 증설되기 전까지는 한강 이북 도심(청와대 포함)만 수경사(수방사)가 담당하고, 한강 이북 나머지 지역 및 한강 이남은 여전히 6관구사가 담당했다. 서울 도심은 수경사가, 외곽은 30, 33사단이 지켰다고 간주하면 쉽다.

 

지금은 30사단은 일개(?) 기계화보병사단으로, 33사단(17사단)은 인천지역 위수사단이 되었지만, 수방사가 없었던 당시에는 각각 서울 북부와 남부(+인천을 비롯한 경기 서남부권)를 관장하는 거대한 부대였다. 17사단의 모 예하부대가 아직도 서울시 내에 주둔하고 있는 것도 그 흔적이다. (더욱이 17사단은 51, 52사단의 아버지나 다름없다. 해당 항목으로.) 참고로 당시 서울지역 향토예비군 교육훈련은 30사단이 담당했다.

 

6관구사는 이후 경인지역방어사령부를 거쳐 오늘날 수도군단이 되었으므로, 따지고 보면 이름에 수도가 들어가는 세 부대(수도기계화보병사단, 수도군단, 수도방위사령부)가 돌아가면서 서울을 지켜온 셈이다. 혼자 강원도로 간 7사단 지못미 현 수방사의 52, 56보병사단, 수도군단의 17, 55보병사단, 1군단의 30사단이 옛 제6군관구사령부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수방사

그렇게 한국전쟁이 끝나고 4.19 혁명 때에도 수도사단은 경기도 북부에 배치돼 전방 사단들과 비슷하게 운용되는 가운데 수도방위를 전담하는 부대는 없었다.

 

그러다 196161, 5.16 군사정변 직후 서울을 장악한 정변세력의 보호를 목적으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현재 미군부대 위치 내)에서 정변에 참여한 몇몇 부대들(주로 30[3], 33사단 병력)의 일부를 모아 사단급(지휘관 계급 소장)으로 창설되었다. 이때는 임시 부대의 성격이 강했으므로 편제나 규모를 논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당시 정변에 동원된 30, 33사단에서 1개 대대씩 차출되어 수방사 30, 33경비대대가 되었다가 30, 33경비단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들이 현 수방사의 핵심 직할부대인 제1경비단의 전신이다. 5.16 쿠데타 당시에 이미 서울 포함 수도권을 관할하던 위수부대인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가 존재해왔던 것을 고려하면, 수방사는 서울지역 위수부대로서의 역할보다는 당시의 군사정권의 친위대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런 역사 때문에 문민통제를 중시하는 일각에서는 수방사를 수도군단에 통폐합시키자는 개혁안을 주장하기도 한다. (중략) [출처: 나무위키]

 

 

중앙정보부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민간의 방첩 활동까지 육군 특무대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인권 및 월권 문제로 말이 많았던 터라 순수하게 민간의 방첩 업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기관의 창설이 필요했다. 2공화국 당시부터 이런 계획이 있었는데, 이는 5.16 군사정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쿠데타 며칠 뒤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다. 2공화국 하에서 이런 정보기관의 창설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이후락이다. 실제로 이후락은 5.16 군사정변 직후 체포되기까지 했다. 3공화국때 정보부 수장이 되었다는 점을 보면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이후락이 능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전성기에는 각 부처마다 요원들이 상주하여 공무원 동향을 감시하기도 하고 검찰, 경찰, 교정기관을 배후에서 휘두르면서 수사권 뿐만 아니라 기소권까지 실질적으로 행사했다. 형식상으로는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를 한 다음 검찰에 송치를 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검찰이 중앙정보부에서 송치한 범죄자를 기소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므로 검찰은 그냥 장식에 불과했다. 교도소 역시 중정 요원들이 비전향장기수 등 좌익 재소자의 사상 전향 공작에 관여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는 이 막강한 권한을 바탕으로 단순 정보기관을 넘어 강력한 권력기관으로 자리했다. 중앙정보부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니 당연히 박정희를 뒷받침하는 역할이고, 한국사 교과서에도 박정희 정권의 권력기관이 중앙정보부라고 기술되어 있다. 박정희의 말 한마디에 여당의 중진급 국회의원들이 남산으로 잡혀가 풀코스 접대를 받고 그대로 정계에서 축출당하거나(10.2 항명 파동) 전 중앙정보부장이 외국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사례(김형욱 실종 사건)에서 그 위세를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앙정부의 기관들 중 '~'로 끝나는 곳의 수장은 장관이기 때문에 중앙정보부 장관이 되어야 하지만 중앙정보부 부장인 점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장관을 수장으로 하는 부는 대통령국무총리각 부처 장관으로 이어지지만 중앙정보부는 지금의 감사원이나 국가정보원처럼 대통령 직속 기관이기 때문에 장관이 아니라 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국무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국무회의 배석권도 없다. 물론 국가 비상 사태나 안보 회의에는 참석한다.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과 같이 일하는 시간이 상당히 많은 관계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분류되었다. 중앙정보부장의 지위는 부총리급으로 장관보다도 높았다. 국무총리 바로 밑이었으며 역시 부총리급인 경제기획원 장관과 동급이었다. 일부 드라마들을 보면 국가안보회의에서 중앙정보부장이 국방 장관 아래에 앉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설정으로 실제로는 모든 장관들의 상석이자 국무총리 바로 아래에 앉는다. 장관급으로 격하당한 현재도 국정원장은 의전서열상 부총리들 중 가장 낮은 교육부총리의 바로 다음 순위라 장관급 공직자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2공화국 때부터 미국 CIA 한국측 인사가 창설에 도움을 주었지만 중정이 일반 정보 기관으로서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수사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FBI의 수사권을 본따서 공안 사건에 한정해 수사권 발동을 가능하게 한 중앙정보부에 관한 법률이 생겨서 가능해졌다. , 검사 없는 단독 수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 당연히 간첩을 잡는 목적이어야 하지만 악용된 경우가 엄청 많았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확인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4대 의혹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코리아게이트가 있다. 특히 김대중 납치 사건과 윤이상의 경우는 외국의 사정이고 뭐고 무시하고 일을 벌였기에 당시 심각한 외교 마찰을 빚기도 했었다.

 

이렇게 막강한 힘을 과시했지만,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사살하는 10.26 사태가 터지고 김재규가 전두환에게 체포되면서 중앙정보부는 순식간에 추락했다.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국가안전기획부로 간판을 바꿔달고 새로 출범했지만, 3~4공 때 수행했던 권력기관의 역할은 보안사에게 일부 넘어갔다. [출처: 나무위키]

 

 

 

 중앙정보부장

주로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인물들은 7대 부장인 법조인 출신 신직수와 마지막 중정부장이자 초대 안기부장인 유학성(정훈 1기로 임관)을 제외하고 전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초대 중정부장은 김종필이며 박정희 정권과 유신 정권 시절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박정희의 측근으로 10.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도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고,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은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였다.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인물들의 경우, 3공화국에서 있었던 2인자 라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며 견제도 많이 받았다.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사람들이 대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도 이런 권력 집중의 폐해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최장기 정보부장 재임자인 김형욱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삼선 개헌이 통과된 후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박정희가 비서실장 이후락과 김형욱을 같이 잘라버렸다. 김형욱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워낙 많았기에 백수가 되자 보복을 피하려 망명길에 올라 미국에서 코리아게이트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하여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폭로했고, 그와 관련된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1979년 실종되었다. 여러 가설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설이 김재규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 믹서기에 던져져 살해되었다는 이야기와 차지철이 보낸 암살자가 김형욱 부장을 납치해 청와대 지하실로 산 채로 끌고 오자 박정희가 손수 카빈총으로 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둘 다 루머이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의 발표에 따르면 김재규의 부하들이 현지에서 살해하고 낙엽으로 덮었다고 하는데, 정부 공식 발표가 이러니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건 사실인 모양.

 

그나마 김종필은 부장 퇴임 후 6공 출범 전까지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았지만 국무총리를 두번 지내고 대선까지 출마하는 등 무난한 삶을 살다 2018년에 저세상 갔으며, 이후락은 중정부장에서 잘린 후 김형욱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해 절대 충성을 약속하며 국회의원까지 지냈고 전두환 집권 이후에는 정권과 간신히 합의를 봐서 살아난 경우라고 보면 된다. 운이 좋았다지만 이 양반도 전두환 집권기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서 크게 고생하다가 말년을 허망하게 보내고 2009년에 사망했다. 본인이 사망 전에 공개적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자신의 재직 중 벌어진 정치 공작은 전부 박정희가 모르게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한다. 정말인지 아니면 이후락이 대인배인지는 본인만이 아는 일이다. [출처: 나무위키]

 

 

들어가면 제발로 나오기 힘들다는 속칭 (남산) 지하실로 악명높았다. 얼마나 사람들을 혹독하게 다뤘던지 중정에서 고문을 받은 사람 중에는 꿈에서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지방에는 폐공장 등으로 위장한 분실들이 있어서 시시한 피의자들은 주로 거기서 처리했다. 연행된 이들은 입고 있던 평상복을 벗고 국방색 민무늬 군복을 입은 채 수사를 받았으며, 특히 간첩사건 같은 경우에는 본인뿐 아니라 일가 친척까지 불고지죄로 잡혀가 무수한 곤혹을 치렀다. 수사관들은 고문으로 인한 상흔을 숨기기 위해 생고기 등으로 멍을 뺐다고 한다. 고문에는 예외가 없어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박정희 심기에 거슬리면 지하실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는데, 1971년에 길재호, 김성곤, 김진만, 백남억 등 민주공화당 실세 4인방이 10.2 항명 파동 건으로 끌려와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 특히 김성곤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카이젤 수염까지 몽땅 뽑혔다.

 

현대사를 대충 안다면 전두환 시절에 거슬리는 놈들 잡아다 물 먹이고 두들겨팼다는 얘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 5공 시절 고문 수기를 보면 물, 전기 얘기가 나오는데, 중앙정보부는 여기에 더해 인두로 지지거나 손발톱 다 빼기(인혁당 사건), 진공실 증언까지 나올 정도로 안기부 시절보다 고문의 강도가 더 높았다. 이 정도면 CIA와 슈타지는 쨉도 안되고 소련 스탈린 시절의 NKVD, 일제강점기의 일본 육군 헌병,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나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세쿠리타테, 중남미 독재국가의 비밀경찰,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안부, 북한 보위부 정도는 되어야 견줄 수 있을 정도.

 

5.16 군사정변 이후 국회의원을 여러 번 지낸 송원영은 중정에 많은 시달림을 당했는데 맹장염 수술 이후 마취에서 깨어나자 "여기 정보부요?" 라고 묻더랜다. 그의 부인은 "여긴 서울대학교병원인데..." 라고 대답했으나 송원영은 희미한 목소리로 "아냐. 명칭만 그럴 거야."라고 대답했다고.

 

코리아헤럴드에서 기자 겸 번역가로 일하던 안정효의 회고담에 의하면 사무실을 이전하려고 출처가 불분명한 어떤 회사의 건물을 샀는데, 알고 보니 그 '회사'가 중앙정보부의 분실이었다고 한다. 급히 이사하느라고 고문실을 철거도 안한 채 그대로 넘겨주고 갔는데 섬뜩한 구조였다고.

 

이런 과거 때문인지 1960년생 이전 태어난 사람 중 상대방을 협박할 때 자신이 중앙정보부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만큼 정보부가 사회에 끼친 악영향이 크다는 이야기. 이런 모든 수치들은 국가정보원이 안고 가야 할 부담이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