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역사이야기 (독서)/8.제주이야기

이승만과 하지 장군 (2015)

동방박사님 2023. 4. 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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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승만은 자신을 못마땅해하던 미군정을
어떻게 이겨냈는가?

여전히 소련과의 좌우합작이라는 미몽(迷夢)에 얽매였던
미군정의 책임자 하지 장군의 실책에 정면도전한 자유의 투사 이승만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9권의 중요한 목적은 미군정 3년 동안 남한 정치계를 소용돌이 치게 만듦으로써 심각한 정치적 대결과 갈등의 원천으로 작용 했던 두 개의 정치적 현안들인 ‘한반도 국제신탁통치안’과 ‘남한 단독 정부수립론’에 대한 이승만과 하지의 인식과 대응을, 그 당시 그들이 처한 현실적인 상황여건과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하여 심층적으로 분석· 평가하는 것이다.
군정 3년 동안 이승만과 하지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의 관계였다. 그러나 그들은 견원의 동반자였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군정의 최고 책임자라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하지 또한 반공의 보루가 될 수 있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막강한 정치적 세력을 확 보하고 있는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자신의 목적달성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제거되기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임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과 하지. 그들은 서로 그토록 싫어했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는 불가피한 동반자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해방과 분단 그리고 군정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현안이었던 ‘한반도 국제신탁통치안’과 ‘남한 단독 정부수립안’을 둘러싸고 전개된 치열한 좌우익의 이념 대결과 갈등으로 소용돌이친 한국 현대사의 길목인 해방공간에서 이승만과 하지는 ‘비운’의 동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 둘의 정치적 선택과 행보가 신생 독립국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국에 미친 영향은 깊고도 넓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차

1부 들어가며: 해방공간의 두 주역·11
2부 하지의 군정 실시와 이승만의 귀국·19
3부 이승만과 하지의 불화: 한반도 국제신탁 통치안·43
4부 이승만과 하지의 갈등: 남한 단독 정부수립론·71
5부 이승만과 하지의 이별: 대한민국 정부수립·95
6부 맺으며: 비운(悲運)의 동반자·107

저자 소개

저자 : 차상철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서양사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미국외교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미국사학회장과 미국 워싱턴대학교 풀브라이트 연구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한미동맹 50년, 해방전후 미국의 한반도정책, 미국외교사(공저), The Syngman Rhe...

책 속으로

이승만과 하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다. 2015년 올해는 광복과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승만과 하지를 제외하고, 해방공간 3년을 제대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해 방정국의 핵심적인 주역들인 이승만과 하지의 정치적 신념과 역할, 그리고 한계를 가능한 객관적인 접근을 통하여 새롭게 재조명하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군정 3년 동안 이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불신과 불화, 그리고 갈등과 증오로 악화되어 갔다. 이러 한 견원지간의 관계를 초래하게 만든 근본적인 요인은 해방 후 한국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그들의 구상과 신념이 서로 달랐던 데에 크 게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 p.17

1947년으로 접어들면서 트루먼 행정부는 하지의 견해와 육군성 의 계속된 강력한 조기 철수 주장으로 인해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지금까지의 방침을 점진적으로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국제연합문제로 만드는 한편, 남한 으로부터 ‘명예롭게’ 철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는 곧 지금까지 좌우익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투쟁의 동인(動因)이었던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마침내 미국이 현실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 p.69

처음부터 원했던 것도 아니었고, 또한 자신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던 군인정치가로서 낯선 땅 남한을 통치하면서 느껴야만 했던 하지의 좌절감은 실로 컸다. 국방부의 고위 정책수립가였던 위드마이어와 드레이퍼 육군차관에게 장시간에 걸친 브리핑에서, 하지는 자 신의 좌절감을 상세하게 실토했다. 하지는 만약 본국정부가 자신을 계속 유임시킬 의도가 없으면, 하루빨리 퇴진시키고, 완전한 신임을 받는 인물로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 --- p.91

하지가 서울을 떠나기 전날 이승만은 하지에게 “비록 당신과 나 사이에 때로는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하지 중장은 한국민의 가슴 속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적은 마지막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한편 하지는 한국민에게 보낸 고별사에서 남한에는 자기 이 익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적인 정치가들’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모두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 오로지 한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합심 노력할 것을 마지막으로 주문했다. --- p.117

군정 3년 동안 이승만과 하지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의 관계였다. 그러나 그들은 견원의 동반자였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군정의 최고 책임자라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하지 또한 반공의 보루가 될 수 있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막강한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자신의 목적달성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제거되기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임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