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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복원된 궁궐에서 만나는 더욱 풍성해진 우리 역사
1392년 조선의 개국과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한 조선의 궁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까지, 수많은 변란 속에서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변형되고 훼철된 부분이 많아 본래의 위용을 잃은 상태다. 그랬던 궁궐이 복원 사업을 통해 조금씩 원형을 찾아가고 있다.
그동안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 기행』을 통해 독자들에게 우리 궁궐과 그 속에 담긴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했던 쏭내관이 이번에는 달라진 궁궐만큼이나 더욱 풍성해진 이야기를 들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조선왕조실록의 어려운 용어와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냈고, 각종 희귀 사료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저자가 직접 찍은 궁궐 안팎의 사진과 영상들은 궁궐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새로 복원된 전각은 물론 터만 남은 채 사라진 전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긴 이 책은 지금의 궁궐과는 다른 역사 속 조선 궁궐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392년 조선의 개국과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한 조선의 궁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까지, 수많은 변란 속에서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변형되고 훼철된 부분이 많아 본래의 위용을 잃은 상태다. 그랬던 궁궐이 복원 사업을 통해 조금씩 원형을 찾아가고 있다.
그동안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 기행』을 통해 독자들에게 우리 궁궐과 그 속에 담긴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했던 쏭내관이 이번에는 달라진 궁궐만큼이나 더욱 풍성해진 이야기를 들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조선왕조실록의 어려운 용어와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냈고, 각종 희귀 사료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저자가 직접 찍은 궁궐 안팎의 사진과 영상들은 궁궐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새로 복원된 전각은 물론 터만 남은 채 사라진 전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긴 이 책은 지금의 궁궐과는 다른 역사 속 조선 궁궐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목차
01. 입궐을 준비하며
궁궐은 어떤 곳인가
궁궐의 구조
궁궐의 건축
궁궐의 역사
02. 경복궁
경복궁의 역사
육조거리 · 서십자각 터 · 해태상 · 광화문 · 사복시 터의 국립고궁박물관 · 흥례문과 회랑 · 영제교 · 유화문과 기별청 · 근정문과 근정전 · 사정전 · 천추전과 만춘전 · 내탕고 · 수정전 · 궐내각사 터 · 영추문 · 경회루 · 흠경각 · 강녕전 · 교태전 · 함원전 · 아미산 · 자미당 터 · 흥복전 · 함화당과 집경당 · 태원전 · 신무문 · 집옥재 · 건청궁 · 향원정 · 선원전 터의 국립민속박물관 · 자경전 · 소주방 · 자선당과 비현각 · 계조당, 춘방, 계방 터 · 건춘문 · 동쪽 궐내각사 터 · 동십자각
03. 창덕궁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 가는 길 · 돈화문 · 금호문과 사라진 어도 · 규장각 · 억석루 · 선원전 · 예문관 · 약방 · 옥당 · 금천교 · 상의원 · 진선문 · 정청 · 배설방과 내병조 · 원역처소와 호위청 · 상서원 · 인정전 · 빈청 · 승정원 터 · 사간원 터 · 선전관청 터 · 선정전 · 희정당 · 대조전과 수라간 · 경훈각 · 집상전 터 · 성정각과 관물헌 · 중희당 터 · 낙선재 · 후원의 역사 · 부용지와 부용정 · 주합루(규장각) · 서향각과 희우정 · 영화당 · 기오헌 · 연경당 · 관람지(반도지) 일원 · 옥류천 일원 · 신 선원전 영역
04. 창경궁
창경궁의 역사
홍화문 · 주자소 · 옥천교 · 명정전 조정과 회랑 · 문정전 · 오위도총부 터 · 교자방 터 · 관천대 · 금루각 터 · 빈양문과 숭문당 · 함인정 · 환경전과 경춘전 · 통명전 · 양화당 · 집복헌과 영춘헌 · 자경전 터 · 성종대왕 태실비 · 춘당지 · 대온실 · 관덕정 · 집춘문 · 월근문 · 창경궁 내전 터
05. 경희궁
경희궁의 역사
흥화문 터 · 금천교 · 빈청 터 · 흥화문 · 승정원 터 · 내의원 터 · 숭정전 · 자정전 · 태령전과 서암 · 방공호와 서울역사박물관 · 경희궁 후원과 황학정 · 궁방 터
06. 덕수궁
덕수궁의 역사
대한문 · 금천교 · 잔디밭과 광명문 · 함녕전 · 덕홍전 · 정관헌 · 중화문과 중화전 ·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 · 석조전 · 돈덕전 · 선원전 터 · 중명전
궁궐은 어떤 곳인가
궁궐의 구조
궁궐의 건축
궁궐의 역사
02. 경복궁
경복궁의 역사
육조거리 · 서십자각 터 · 해태상 · 광화문 · 사복시 터의 국립고궁박물관 · 흥례문과 회랑 · 영제교 · 유화문과 기별청 · 근정문과 근정전 · 사정전 · 천추전과 만춘전 · 내탕고 · 수정전 · 궐내각사 터 · 영추문 · 경회루 · 흠경각 · 강녕전 · 교태전 · 함원전 · 아미산 · 자미당 터 · 흥복전 · 함화당과 집경당 · 태원전 · 신무문 · 집옥재 · 건청궁 · 향원정 · 선원전 터의 국립민속박물관 · 자경전 · 소주방 · 자선당과 비현각 · 계조당, 춘방, 계방 터 · 건춘문 · 동쪽 궐내각사 터 · 동십자각
03. 창덕궁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 가는 길 · 돈화문 · 금호문과 사라진 어도 · 규장각 · 억석루 · 선원전 · 예문관 · 약방 · 옥당 · 금천교 · 상의원 · 진선문 · 정청 · 배설방과 내병조 · 원역처소와 호위청 · 상서원 · 인정전 · 빈청 · 승정원 터 · 사간원 터 · 선전관청 터 · 선정전 · 희정당 · 대조전과 수라간 · 경훈각 · 집상전 터 · 성정각과 관물헌 · 중희당 터 · 낙선재 · 후원의 역사 · 부용지와 부용정 · 주합루(규장각) · 서향각과 희우정 · 영화당 · 기오헌 · 연경당 · 관람지(반도지) 일원 · 옥류천 일원 · 신 선원전 영역
04. 창경궁
창경궁의 역사
홍화문 · 주자소 · 옥천교 · 명정전 조정과 회랑 · 문정전 · 오위도총부 터 · 교자방 터 · 관천대 · 금루각 터 · 빈양문과 숭문당 · 함인정 · 환경전과 경춘전 · 통명전 · 양화당 · 집복헌과 영춘헌 · 자경전 터 · 성종대왕 태실비 · 춘당지 · 대온실 · 관덕정 · 집춘문 · 월근문 · 창경궁 내전 터
05. 경희궁
경희궁의 역사
흥화문 터 · 금천교 · 빈청 터 · 흥화문 · 승정원 터 · 내의원 터 · 숭정전 · 자정전 · 태령전과 서암 · 방공호와 서울역사박물관 · 경희궁 후원과 황학정 · 궁방 터
06. 덕수궁
덕수궁의 역사
대한문 · 금천교 · 잔디밭과 광명문 · 함녕전 · 덕홍전 · 정관헌 · 중화문과 중화전 ·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 · 석조전 · 돈덕전 · 선원전 터 · 중명전
저자 소개
책 속으로
1395년 태조실록의 내용을 보면 궁궐이란 곳은 정말 장대하고 장엄하고 호사스러운 모습일 듯하다. 그러나 실제 궁궐에 가서 주위를 둘러보면 ‘이곳이 과연 왕이 살았던 곳인가?’ 싶을 정도로 그 규모가 소박하다. 생각보다 규모가 작게 느껴지는 이유는 조선의 통치 철학인 ‘검약儉約’에서 찾을 수 있다. 궁궐이 화려해질수록 백성의 삶은 고단해진다. 바로 이 점을 조선의 국왕들은 가장 경계했던 것이다. 물론 화려한 궁궐에 집착했던 연산군과 광해군 같은 왕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지붕의 기와 한 장도 모두 백성의 피땀으로 만드는 것이니 어쩌면 조선 궁궐의 품격은 겉모습이 아닌 군주의 애민 정신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르겠다.
---「1. 입궐을 준비하며」중에서
광화문을 뒤로하고 북쪽을 바라보면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넓은 뜰이 나온다. 이곳에도 역사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 발굴 과정에서 땅속에 박석薄石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박석은 두께가 얇고 넓은 돌을 말한다. 하지만 고종 연간 경복궁 중건 당시 이곳에 박석을 깔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에 연구진들은 조선 초기의 사료를 검토했고 세종 연간 이곳에 박석과 회랑을 설치했다는 기록을 확인한다. 회랑은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있는 복도를 말한다.
그러니까 세종 연간 흥례문과 광화문 사이의 공간에는 회랑 이 설치되었고 바닥에는 박석이 깔렸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을 19세기 고종 연간 경복궁을 중건할 때는 이 박석을 흙으로 덮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발견된 박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정답은 복토覆土(흙덮기). 경복궁 복원 사업의 기준이 고종 연간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설령 발굴 중 조선 전기 때의 흔적이 나왔다 하더라도 복원 기준에 따라 조사 후 과감하게 복토를 결정한 것이다. 지금도 이곳 땅을 파보면 세종 시대의 박석이 나온다.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다.
---「2. 경복궁」중에서
특히 사신 접대를 희정당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숙종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신이 오면 왕은 맨발로라도 도성 밖에 나가 사신을 맞이하는 것이 사대의 예인데, 하필 숙종이 몸이 좋지 않아 나가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숙종은 관대를 갖추고 이곳 희정당에서 사신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이런 숙종의 모습을 보고 희정당 온돌방에서 더 심하게 아픈 척 누워서 사신을 맞으라고 제안한다.
희정당 온돌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숙종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웃음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 사신의 눈치를 이리 보는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하튼 이처럼 희정당은 왕이 거처를 하면서 공식 업무를 보는 편전의 역할을 했다.
---「3. 창덕궁」중에서
오위도총부 터를 지나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내사복시(內司僕寺), 교자방(轎子房) 등의 관청이 나온다. 앞서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자리에 사복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조선시대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관청이 사복시(司僕寺)다. 이곳 사복시에서 실제로 말을 키우는 노비들을 ‘거덜’이라고 불렀는데, 동궐도에는 이들이 사는 거덜방이 묘사되어 있다. 이 거덜들은 노비 신분임에도 중요한 말을 관리하는 일을 해서 평상시 상당히 우쭐거렸다고 한다. 사극을 보면 고관들의 행차 때 “○○납신다. 물렀거라!” 하면서 소리치는 이들이 바로 거덜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우쭐거리는 거덜들을 보고 ‘거들먹거리다, 거덜거린다’라는 표현을 썼고, 이것이 파생되어 오늘날 살림의 기반이 흔들려 망가지는 상황인 ‘거덜나다’가 된 것이다.
---「4. 창경궁」중에서
서울역사박물관 야외 전시장을 지나 새문안로를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 있어야 할 동쪽이 아닌 한참 떨어진 곳에, 게다가 담도 없이 문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이유는 1910년경 일제가 도로 확장 공사를 핑계로 흥화문을 이곳 남쪽 담장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 뒤로 흥화문은 경성중학교 학생들이 드나드는 통용문(대문 이외에 늘 자유롭게 드나드는 문) 신세가 되었고, 1931년 결국 강제로 철거되어 남산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절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이 되는 치욕을 겪고 만다.
광복 후 박문사 자리에는 신라호텔이 들어섰고 흥화문은 다시 호텔 정문이 되었다. 흥화문이 경희궁으로 돌아온 것은 50여 년 후인 1988년.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이미 고층 빌딩이 들어서 있었다. 결국 흥화문은 원래의 자리인 동쪽에서 300여 미터 서쪽으로 옮겨진 지금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너무 안타깝고 아쉽지만 언젠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흥화문을 기대해 본다.
---「5. 경희궁」중에서
화재 후 수옥헌은 러시아 건축사 사바틴의 설계로 지금의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다. 그러다 1904년 대화재 때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름이 중명전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의 친일파들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장소로도 알려진 곳이다.
한일병탄 이후 중명전의 치욕은 계속되었다. 중명전은 덕수궁 영역에서 제외되며 정동 일대의 외국인들을 위한 클럽이 되었고, 광복 후 한국전쟁 때는 북한 공산당의 기지로 활용되었다. 그러다 다시 국가 소유의 건물이 되었고 1963년에는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 내외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영친왕 서거 후에는 결국 민간에게 매각되며 과거 궁궐 전각으로서의 역사성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건물이다. (중략)
복원된 중명전 내부의 1층은 을사늑약 및 대한제국의 외교를 테마로, 2층은 고종 황제가 사신을 접견한 장소로 나뉘어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중명전의 내부는 여느 박물관의 전시실과는 다르다. 실제 그 역사가 벌어졌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껴지는 감정 역시 남다르다.
---「1. 입궐을 준비하며」중에서
광화문을 뒤로하고 북쪽을 바라보면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넓은 뜰이 나온다. 이곳에도 역사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 발굴 과정에서 땅속에 박석薄石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박석은 두께가 얇고 넓은 돌을 말한다. 하지만 고종 연간 경복궁 중건 당시 이곳에 박석을 깔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에 연구진들은 조선 초기의 사료를 검토했고 세종 연간 이곳에 박석과 회랑을 설치했다는 기록을 확인한다. 회랑은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있는 복도를 말한다.
그러니까 세종 연간 흥례문과 광화문 사이의 공간에는 회랑 이 설치되었고 바닥에는 박석이 깔렸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을 19세기 고종 연간 경복궁을 중건할 때는 이 박석을 흙으로 덮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발견된 박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정답은 복토覆土(흙덮기). 경복궁 복원 사업의 기준이 고종 연간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설령 발굴 중 조선 전기 때의 흔적이 나왔다 하더라도 복원 기준에 따라 조사 후 과감하게 복토를 결정한 것이다. 지금도 이곳 땅을 파보면 세종 시대의 박석이 나온다.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다.
---「2. 경복궁」중에서
특히 사신 접대를 희정당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숙종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신이 오면 왕은 맨발로라도 도성 밖에 나가 사신을 맞이하는 것이 사대의 예인데, 하필 숙종이 몸이 좋지 않아 나가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숙종은 관대를 갖추고 이곳 희정당에서 사신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이런 숙종의 모습을 보고 희정당 온돌방에서 더 심하게 아픈 척 누워서 사신을 맞으라고 제안한다.
희정당 온돌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숙종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웃음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 사신의 눈치를 이리 보는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하튼 이처럼 희정당은 왕이 거처를 하면서 공식 업무를 보는 편전의 역할을 했다.
---「3. 창덕궁」중에서
오위도총부 터를 지나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내사복시(內司僕寺), 교자방(轎子房) 등의 관청이 나온다. 앞서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자리에 사복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조선시대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관청이 사복시(司僕寺)다. 이곳 사복시에서 실제로 말을 키우는 노비들을 ‘거덜’이라고 불렀는데, 동궐도에는 이들이 사는 거덜방이 묘사되어 있다. 이 거덜들은 노비 신분임에도 중요한 말을 관리하는 일을 해서 평상시 상당히 우쭐거렸다고 한다. 사극을 보면 고관들의 행차 때 “○○납신다. 물렀거라!” 하면서 소리치는 이들이 바로 거덜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우쭐거리는 거덜들을 보고 ‘거들먹거리다, 거덜거린다’라는 표현을 썼고, 이것이 파생되어 오늘날 살림의 기반이 흔들려 망가지는 상황인 ‘거덜나다’가 된 것이다.
---「4. 창경궁」중에서
서울역사박물관 야외 전시장을 지나 새문안로를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 있어야 할 동쪽이 아닌 한참 떨어진 곳에, 게다가 담도 없이 문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이유는 1910년경 일제가 도로 확장 공사를 핑계로 흥화문을 이곳 남쪽 담장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 뒤로 흥화문은 경성중학교 학생들이 드나드는 통용문(대문 이외에 늘 자유롭게 드나드는 문) 신세가 되었고, 1931년 결국 강제로 철거되어 남산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절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이 되는 치욕을 겪고 만다.
광복 후 박문사 자리에는 신라호텔이 들어섰고 흥화문은 다시 호텔 정문이 되었다. 흥화문이 경희궁으로 돌아온 것은 50여 년 후인 1988년.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이미 고층 빌딩이 들어서 있었다. 결국 흥화문은 원래의 자리인 동쪽에서 300여 미터 서쪽으로 옮겨진 지금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너무 안타깝고 아쉽지만 언젠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흥화문을 기대해 본다.
---「5. 경희궁」중에서
화재 후 수옥헌은 러시아 건축사 사바틴의 설계로 지금의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다. 그러다 1904년 대화재 때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름이 중명전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의 친일파들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장소로도 알려진 곳이다.
한일병탄 이후 중명전의 치욕은 계속되었다. 중명전은 덕수궁 영역에서 제외되며 정동 일대의 외국인들을 위한 클럽이 되었고, 광복 후 한국전쟁 때는 북한 공산당의 기지로 활용되었다. 그러다 다시 국가 소유의 건물이 되었고 1963년에는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 내외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영친왕 서거 후에는 결국 민간에게 매각되며 과거 궁궐 전각으로서의 역사성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건물이다. (중략)
복원된 중명전 내부의 1층은 을사늑약 및 대한제국의 외교를 테마로, 2층은 고종 황제가 사신을 접견한 장소로 나뉘어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중명전의 내부는 여느 박물관의 전시실과는 다르다. 실제 그 역사가 벌어졌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껴지는 감정 역시 남다르다.
---「6. 덕수궁」중에서
출판사 리뷰
복원된 전각,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내다
일제에 의해 훼철되고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조선의 5대 궁궐이 복원 공사를 통해 원형을 되찾고 있다. 전각의 복원은 단순히 궁궐의 외형을 변화시키는 것을 넘어 잃어버린 궁궐 속 역사를 다시 세우는 것과 같다. 경복궁의 궐내 음식을 담당했던 소주방의 복원을 통해 궁궐이 지존의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이 생활했던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아직도 복원되고 세워져야 할 전각들이 많고,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로 복원되어 겉에 칠한 페인트가 벗겨지는 경복궁 영추문 같은 미완의 복원들도 있다.
이 책은 새롭게 복원된 전각은 물론 터만 남은 공간에 있었던 원래 전각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한다. 흥복전 터에서 발굴된 조선 초기의 다채로운 색색의 지붕 기와 조각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경복궁의 이미지를 반전시킨다. 이처럼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익숙하고도 낯선, 그래서 여전히 흥미로운 궁궐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다양하고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매력적인 스토리텔링
조선왕조실록에는 아픈 와중에도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숙종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의복을 갖추고 사신을 맞이하려던 숙종은 꾀병으로 의심받을 것을 걱정하는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고 온돌이 깔린 창덕궁의 편전인 희정당에서 심하게 아픈 척하며 사신을 맞이한다. 대국의 사신에게 약점을 잡힐까 전전긍긍하는 소국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듯 펼쳐지니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 책은 어려운 옛말로 가득한 조선왕조실록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썼고, 쏭내관 특유의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더해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한다. 이외에도 현장감 있는 사진 자료와 신문 기사 등 다양하고 풍부한 사료를 통해 조선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 권의 책으로 떠나는 다섯 곳의 궁궐 답사!
궁궐의 조정에 깔린 박석은 원래 자연 그대로의 모양이었으나 이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사라졌고 기계로 자른 듯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복원되었다. 근정전 앞의 회랑도 원래 안쪽은 벽이 있던 행각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벽체가 헐려 뻥 뚫린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렇듯 저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궁궐의 박석과 회랑의 기둥에도 우리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음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궁궐 내 잔디밭과 공터 또한 다양한 역사를 품은 전각들이 있었던 곳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일제에 의해 훼철되기 전, 빽빽하게 들어선 전각들을 상상하는 재미와 함께 궁궐을 향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이 책은 조선 건국 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총 다섯 곳의 궁궐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풀어낸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궁궐로 향한다. 궁궐별로 수록된 지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어느새 궁궐 답사 루트가 완성됨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은 궁궐 전각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며, 본문에 수록된 QR코드를 통해서는 궁궐의 전경을 영상으로 자세히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조선 궁궐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제에 의해 훼철되고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조선의 5대 궁궐이 복원 공사를 통해 원형을 되찾고 있다. 전각의 복원은 단순히 궁궐의 외형을 변화시키는 것을 넘어 잃어버린 궁궐 속 역사를 다시 세우는 것과 같다. 경복궁의 궐내 음식을 담당했던 소주방의 복원을 통해 궁궐이 지존의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이 생활했던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아직도 복원되고 세워져야 할 전각들이 많고,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로 복원되어 겉에 칠한 페인트가 벗겨지는 경복궁 영추문 같은 미완의 복원들도 있다.
이 책은 새롭게 복원된 전각은 물론 터만 남은 공간에 있었던 원래 전각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한다. 흥복전 터에서 발굴된 조선 초기의 다채로운 색색의 지붕 기와 조각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경복궁의 이미지를 반전시킨다. 이처럼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익숙하고도 낯선, 그래서 여전히 흥미로운 궁궐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다양하고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매력적인 스토리텔링
조선왕조실록에는 아픈 와중에도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숙종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의복을 갖추고 사신을 맞이하려던 숙종은 꾀병으로 의심받을 것을 걱정하는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고 온돌이 깔린 창덕궁의 편전인 희정당에서 심하게 아픈 척하며 사신을 맞이한다. 대국의 사신에게 약점을 잡힐까 전전긍긍하는 소국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듯 펼쳐지니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 책은 어려운 옛말로 가득한 조선왕조실록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썼고, 쏭내관 특유의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더해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한다. 이외에도 현장감 있는 사진 자료와 신문 기사 등 다양하고 풍부한 사료를 통해 조선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 권의 책으로 떠나는 다섯 곳의 궁궐 답사!
궁궐의 조정에 깔린 박석은 원래 자연 그대로의 모양이었으나 이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사라졌고 기계로 자른 듯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복원되었다. 근정전 앞의 회랑도 원래 안쪽은 벽이 있던 행각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벽체가 헐려 뻥 뚫린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렇듯 저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궁궐의 박석과 회랑의 기둥에도 우리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음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궁궐 내 잔디밭과 공터 또한 다양한 역사를 품은 전각들이 있었던 곳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일제에 의해 훼철되기 전, 빽빽하게 들어선 전각들을 상상하는 재미와 함께 궁궐을 향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이 책은 조선 건국 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총 다섯 곳의 궁궐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풀어낸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궁궐로 향한다. 궁궐별로 수록된 지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어느새 궁궐 답사 루트가 완성됨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은 궁궐 전각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며, 본문에 수록된 QR코드를 통해서는 궁궐의 전경을 영상으로 자세히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조선 궁궐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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