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역사기행 (독서)/5.세계문화기행

검은 땅의 경계인 (2024) - 우크라이나 도시 역사문화 기행

동방박사님 2024. 2. 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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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 사회에서 우크라이나는 흐릿한 모습을 하고 있다. 혹은 단편적인 사실이 전체인 양 과장되어 호문쿨루스 같은 기이한 모습을 띠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전문적인 식견과 생생한 현장성에 바탕하여 우크라이나의 진면목을 독자들과 함께 그려나가고자 한다.

저자는 한국의 젊은 학자로서, 이 책에서 우크라이나 땅 곳곳을 누비며 그곳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상세히 전한다.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 열네 곳에 대한 탐방 기록이 전문적인 역사 지식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매력과 독특함은 물론, 무리한 역사 지우기와 극우화 경향 같은 치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정직한 눈으로 우크라이나를 직시한다. 저자가 직접 촬영한 현장 사진도 100컷 정도 담겨 있다.

목차

프롤로그
들어가기 전에

1부 수도

1장 키이우: 유서 깊은 우크라이나의 뿌리

2부 동부

2장 드니프로: 정치와 경제를 이끄는 핵심
3장 하르키우: 전쟁을 견디고 부흥한 첫 수도
4장 카먄스케: 소련공산당 총서기 브레즈네프의 고향
5장 자포리자: 코자크의 요새에서 소비에트 공업화의 상징으로

3부 남부

6장 오데사: 역사의 중심에 선 흑해의 보석
7장 미콜라이우: 고대 그리스 유적부터 강변 도시 경관까지
8장 헤르손: 옛 요새에서 시작된 해군 도시

4부 서부

9장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독특한 문화와 유럽풍 건축의 매력
10장 루츠크: 중세 성과 근현대 시가지의 조화
11장 테르노필: 파괴에서 재건된 고즈넉한 호숫가 도시

5부 돈바스

12장 세베로도네츠크: 한적하고 쓸쓸한 소도시의 풍경
13장 크라마토르스크: 멋들어진 조형물이 빛나는 계획도시
14장 마리우폴: 아조우해와 함께한 역사의 비극적인 종착지

에필로그
부록: 우크라이나의 딜레마
감사의 말
참고문헌
 

저자 소

저 : 고광열
 
연세대학교에서 철학과 노어노문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오리건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소련 흐루쇼프 시기 우크라이나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지역의 인민경제회의 개혁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1919~1921)과 볼셰비키의 세계 혁명관 변화〉, 역서로 《러시아혁명 1917-1938》, 《해방 직후 한반도 북부 공업 상황에 대한 소련 민...

책 속으로

우크라이나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을 지닌 사람들의 후예이며, 우크라이나 국가의 수립은 서로 다른 역사적 유산을 지닌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우크라이나’라는 이름 하나로 묶어놓은 데 지나지 않았다. 몹시 흐릿하고 변화무쌍한 경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최근에 만들어낸 우크라이나인의 공간은, 어찌 보면 수백 년 전에 영토를 확정 짓고 큰 변동 없이 유지된 한국인의 공간과 대척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 p.17

모스크바와 키이우 사이의 거리는 약 750킬로미터 정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불과 300킬로미터 조금 넘는 작은 국토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국토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정도 거리는 ‘옆 도시’라고 느낄 만하고 실제로 그렇게들 이야기한다.
--- p.37

한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널리 퍼진 적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출처가 불분명하다(외국에서는 정확히 똑같은 말을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 이 말만큼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어울리는 말이 없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민족이 한 역사가가 역사를 쓰면서 창조되었고, 결국 그 민족의 국가까지 만들어졌다.
--- p.52

소련에서 제일가는 금속공장이었기에 처음에는 굉장히 기대가 컸지만, 자세히 보니 기대와 다른 부분도 많았다. 당연히 일반인으로서 마음대로 공장 안을 헤집고 다닐 수 없으니 주변에서 공장을 살펴보기로 했다. 페트로우스키 공장 주변에는 폐건축 자재나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황량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으며, 버려진 폐허처럼 보였다. 한국이었다면 하다못해 ‘함바집’이라도 여럿 있었을 텐데 이곳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식사를 해결하는가 싶었다.
--- p.104

소련 역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레닌 시기에는 민족자결과 민족해방을 중시하며 소수민족을 보호해줬는데, ‘나쁜’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다시 러시아 문화를 강조하고 소수민족 문화를 탄압했다고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통념과는 다르게 소련은 소수민족에 관해 레닌 시기부터 스탈린 시기를 거쳐서 줄곧 일관적으로 ‘적극적 조치’ 정책을 시행했다. 적극적 조치란 현재 미국에서 주로 인종별로 시행되고 있는 일종의 쿼터제를 이야기한다.
--- p.156

한국에서는 기차역이 위치한 도시명을 역명으로 붙이기 때문에 당연히 서울의 기차역은 서울역이고 부산의 기차역은 부산역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기차역 이름은 종착지의 이름을 딴다. 모스크바에서 벨라루스 방면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기차역은 벨라루스역이며, 카잔 방면으로 출발하는 기차역은 카잔역이다. 따라서 모스크바에 모스크바역은 없다.
--- p.188

드디어 트로츠키가 1896~1898년까지 미콜라이우에 머물면서 처음에는 인민주의자로서, 나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지하 활동을 하며 살았던 집을 발견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 건물 앞 비포장 인도에는 보도블록을 깔아놓았고, 낡고 해진 건물 외부를 완전히 리모델링해놓았다. 그리고 1층에는 통신사가 들어서서 커다랗게 시뻘건 간판을 달았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건물과 연결된 1층짜리 가건물에 첼렌타노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피자를 파는 가게가 들어서 있던 모습이었다.
--- p.243

소련 도시에서 제일 중심이 되는 거리에는 대개 카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이 붙어 있다. 헤르손에서 내가 잡은 숙소는 우연하게도 마르크스 거리에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 거리라는 이름은 러시아 혁명 이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그전에는 포툠킨 거리라 불렸다. 소련이 붕괴하고 한참 지난 2012년에 도로 이름이 다시 원래 이름인 포툠킨 거리로 되돌아갔다.
--- p.256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소련 시절의 역사뿐 아니라 러시아인이 자취를 남긴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려 애쓰고 있다. 서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접점이 거의 없었고, 키이우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은 천 년이 넘는 지역사가 있으며, 드니프로 강변 동부 우크라이나는 어쨌든 코자크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남부 우크라이나 도시들은 러시아 제국 시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소련에 더해 러시아 제국마저 지워버리면 정말 남는 역사가 없다.
--- p.282

OUN과 UPA가 우크라이나 민족 독립을 위해 싸웠던 단체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누구와 싸웠느냐가 문제다. OUN과 UPA는 서부 우크라이나 땅에서 발생한 자생적 파시즘·나치즘 조직으로서 우크라이나 민족 독립과 동시에 우크라이나인만의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영토 안에 사는 유대인·폴란드인·러시아인 등을 물리적 방법으로 ‘제거’하려 했다. 따라서 OUN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 p.300

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자욱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절로 떠올랐다. 안개 낀 구시가지에는 아침이어선지 아니면 한 해의 마지막 날이어선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사람 허리춤까지 오는 큰 개 한 마리가 주인과 함께 있다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맹렬하게 뛰어왔다. 순간 어찌해야 하나 당황했다. 다행히 주인이 “이리 와!” 라고 외치니 개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우크라이나에는 도시마다 유기견이 너무 많다. 그것도 사람 허리까지 오는 대형견투성이다.
--- p.325

서부에서는 어디를 가나 UPA의 적흑기가 있었다. 식당에 내거는 것뿐 아니라 벽이나 다리에도 적흑기를 페인트로 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길을 걷다가도 뜬금없이 창문이나 벽에 내걸린 적흑기를 마주쳤다. 더욱 경악스러운 사실은 이 깃발이 공식적으로 관공서 앞에 걸린다는 점이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시청 앞에는 대개 공통적으로 다음 세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기, 유럽연합 깃발, 그리고 UPA의 적흑기. 이곳에서 신나치주의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어디에서나 자랑스럽게 적흑기가 휘날렸으며,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 깃발을 게양하고 있었다. 독일의 각 도시마다 시청 건물 앞에 하켄크로이츠가 휘날린다면 그냥 웃어넘길 일이겠는가.
--- p.356

서부 우크라이나를 돌아보면서 따뜻함과 착잡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친절한 사람들 덕분에 여행은 전반적으로 즐거웠다. 그러나 부패한 경찰과 구걸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화도 많이 났고 마음도 무거웠다.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 시절에 지어진 아름다운 옛 건축 물과 웅장한 소련 시절의 흔적은 눈을 즐겁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시절에서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도시 인프라의 모습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 p.375

거리에 들어서자 도시의 중심 거리와 바로 연결되는 옆 구역인데도 놀랄 만큼 골목의 외양이 쇠락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아니었다. 점진적으로 지속된 영락이었다. 건물의 벽체에는 덕지덕지 때가 묻었고 쇠는 붉게 녹슬었으며 외장재는 부스러기가 되어서 떨어져 내렸다.
--- p.387

미국은 냉전기에 자신을 자유 진영의 필두로 생각하고 있었고, 소련의 적이기만 하다면 그들이 실제로 어떤 존재이든지 상관없이 동맹으로서 자유의 벗이라 홍보했음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물론 소련도 마르크스주의와 별 관련 없는 농민 혁명가들을 상대로 비슷한 일을 했다). 냉전의 맥락에서 우크라이나봉기군과 그들의 반소 투쟁 또한 ‘자유의 전사들’로서 포장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우크라이나 파시스트들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의 비호하에 북미로 망명하여 ‘일반인’으로서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며 자신들의 더러웠던 과거를 세탁할 수 있었다.
--- p.434

우크라이나의 과거를 이해하지 않고서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현재를 이해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들의 역사적 순간에는 항상 딜레마가 있었으며, 그 선택의 폭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심지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지금조차 그렇다. 푸틴의 침공은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 봉기 이래로 시작된 브레즈네프적 과거 청산에 대못을 박은 셈이었다.
--- p.445

출판사 리뷰

유럽에서 우크라이나보다 영토가 큰 나라는 러시아밖에 없다. 프랑스도 독일도 우크라이나보다 작다(유럽 영토 한정). 그만큼 우크라이나는 커다란 나라다. 더구나 이 거대한 땅을 우크라이나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모은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령 크림반도만 해도 1950년대에서야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을 정도다. 요컨대 우크라이나를 단순하게 파악하기란 그 태생부터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무리한 단순화가 역사 왜곡이나 국제정치적 진영 논리에 빠지기 쉽다고 보고, 우크라이나 전역의 다채로운 역사와 문화를 그 결대로 고스란히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전국 각 권역에서 주요 도시 열네 곳을 고르게 선정해 기행문의 틀 아래 제시한다.

수도 키이우는 물론, 동부의 드니프로, 하르키우, 카먄스케, 자포리자, 남부의 오데사, 미콜라이우, 헤르손, 서부의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루츠크, 테르노필, 돈바스의 세베로도네츠크, 크라마토르스크, 마리우폴이 그 대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해왔다. “서로 다른 역사적 유산을 지닌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한데 묶어놓은 것이 바로 지금의 우크라이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취한 각 도시에 대한 개별 접근이 전체로서의 우크라이나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비유컨대, 하나의 소실점 아래 장대한 풍경화를 그리기보다는 여러 조각조각들의 패치워크를 만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작업을 하기에 모자람 없는 전문성을 수년 동안 쌓아왔다. 학부와 석사 과정에서 러시아와 인접 지역에 대한 공부를 했으며, 우크라이나 한 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박사논문의 테마로 삼았다. 오랫동안 우크라이나 역사를 전문적으로 탐구해온 것이다. 이 책이 단지 여행자의 감상적인 인상기를 넘어서, 뛰어난 우크라이나 역사 교양서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저자는 여행에서 마주치는 풍경이나 유적들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는 한편, 관련된 역사 지식들을 충실히 풀어놓는다.

특히 이 책의 현장성을 주목할 만하다. 문헌에 바탕한 우크라이나 역사서들은 국내를 포함해 외국에도 제법 발간되어 있지만, 이렇게 현장을 직접 누비면서 역사를 돌아보는 책은 본서가 유일한 듯하다. 저자가 직접 촬영한 100컷 정도의 사진이 책에 수록되어 생생함을 더한다.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매력과 각 지역의 독특함을 애정을 담아 전한다. 그런 한편 젊은 학자의 정직한 눈으로 우크라이나의 어두운 면도 함께 그려낸다. 도시의 현장 곳곳에서 소련 시절 역사 흔적 지우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알리고, 그 아이러니와 부당성에 대해 짚어본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극우화 경향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의 온전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의 우크라이나를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