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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메이지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공교육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책
이 책은 일본에 서구식 근대 교육이 제도적으로 도입된 1872년부터 지금까지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와 함께한 일본 공교육의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은 원제(『학교의 전후사學校の戰後史』)에서 알 수 있듯이 2차 세계대전 패전 후의 일본 학교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책이긴 하지만, 앞부분에 서구식 근대 교육의 태동기와 2차 대전까지의 전시체제 교육을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일본 교육사의 큰 흐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일본의 학교는 근대 학교라는 1층 위에 “일본의 학교”라는 2층을 쌓아 올린 2층 건물로 실제 학교의 운용이나 문화의 성격은 패전 전 학교를 바탕으로 하고 그 골격이 패전 후의 학교를 지탱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패전 후의 학교를 바라볼 때에는 반드시 패전 전의 학교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패전 전과 패전 후의 교육사적 연속선상에서 자명했던 학교의 토대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일본 교육의 현실을 바라보며 넓은 관점으로 개혁 동향을 주시하자는 것이 저자의 저술 의도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일본 학교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일본 학교의 문제점들을 회피하거나 숨기지 않고 조목조목 짚고 드러낸다. 저자는, 이미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심각한 입시 경쟁, 학벌, 집단따돌림, 자살, 등교거부, 학교폭력을 한 순간에 아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제가 아니라 국가나 사회와 연동된 문제임을 밝힌다. 그러나 저자는 차라리 “일본 학교의 문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할 일본 학교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절망에 빠지지도 않고 성급한 해결책을 내놓지도 않는다. 다만 학교의 역사와 문제점, 변화 양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며 “학교란 무엇인가? 학교에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독자 스스로에게 생각하고 돌아볼 거리를 던진다.
결국 이 책의 주제는 교육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는, 누가 누구를 무엇을 위해 어떤 것을 어떻게 교육하는가? 그리고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것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시민은 누구인가, 시민은 무슨 일을 하는가, “평등”과 “공공성”과 “시민성”과 “기회균등”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전통시대의 공동체성은 버려야 할 가치인가? 시민의 삶에서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계속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은 일본에 서구식 근대 교육이 제도적으로 도입된 1872년부터 지금까지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와 함께한 일본 공교육의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은 원제(『학교의 전후사學校の戰後史』)에서 알 수 있듯이 2차 세계대전 패전 후의 일본 학교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책이긴 하지만, 앞부분에 서구식 근대 교육의 태동기와 2차 대전까지의 전시체제 교육을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일본 교육사의 큰 흐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일본의 학교는 근대 학교라는 1층 위에 “일본의 학교”라는 2층을 쌓아 올린 2층 건물로 실제 학교의 운용이나 문화의 성격은 패전 전 학교를 바탕으로 하고 그 골격이 패전 후의 학교를 지탱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패전 후의 학교를 바라볼 때에는 반드시 패전 전의 학교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패전 전과 패전 후의 교육사적 연속선상에서 자명했던 학교의 토대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일본 교육의 현실을 바라보며 넓은 관점으로 개혁 동향을 주시하자는 것이 저자의 저술 의도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일본 학교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일본 학교의 문제점들을 회피하거나 숨기지 않고 조목조목 짚고 드러낸다. 저자는, 이미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심각한 입시 경쟁, 학벌, 집단따돌림, 자살, 등교거부, 학교폭력을 한 순간에 아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제가 아니라 국가나 사회와 연동된 문제임을 밝힌다. 그러나 저자는 차라리 “일본 학교의 문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할 일본 학교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절망에 빠지지도 않고 성급한 해결책을 내놓지도 않는다. 다만 학교의 역사와 문제점, 변화 양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며 “학교란 무엇인가? 학교에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독자 스스로에게 생각하고 돌아볼 거리를 던진다.
결국 이 책의 주제는 교육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는, 누가 누구를 무엇을 위해 어떤 것을 어떻게 교육하는가? 그리고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것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시민은 누구인가, 시민은 무슨 일을 하는가, “평등”과 “공공성”과 “시민성”과 “기회균등”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전통시대의 공동체성은 버려야 할 가치인가? 시민의 삶에서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계속 떠올리게 된다.
목차
들어가며 5
서장 패전 후의 취학·진학 동향: 학교의 수용과 정착 11
제1장 “일본의 학교”의 성립: 근대 학교의 도입과 전개 31
1. 산업혁명과 근대 학교 33
2. 일본의 근대 학교 39
3. “살아가는 현장”의 형성과 갈등 52
제2장 신학제의 출발: 패전 후부터 고도성장 이전까지 65
1. 전후 학교의 틀 67
2. 교육행정과 커리큘럼 85
3. 전후 초기의 학교의 동향과 형세 91
제3장 “학교화 사회”의 성립과 전개: 경제성장 시기의 학교 99
1. 고도성장과 학교 101
2. “출구”의 전개: 중학교의 변화 107
3. 고등학교의 대중화 114
4. 학교 간 연계 문제의 양상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연계 119
5. 산업화 사회에 대응한 양상들 124
6. 학교에 대한 이의 제기 131
제4장 학교 기반의 동요: 1990년대 이후 137
1. 제도 기반의 변용 139
2. 학력과 학교제도의 새로운 동향 146
3. 자명성에 대한 되물음 157
4. 학교 내부의 움직임 167
5. 학교 지식을 둘러싼 새로운 전개 173
종장 학교의 역할과 과제: 전후 학교제도의 재고 179
저자 후기 195
권말 수록 도판 198
참고 문헌 203
도판 출전 209
역자 후기 210
서장 패전 후의 취학·진학 동향: 학교의 수용과 정착 11
제1장 “일본의 학교”의 성립: 근대 학교의 도입과 전개 31
1. 산업혁명과 근대 학교 33
2. 일본의 근대 학교 39
3. “살아가는 현장”의 형성과 갈등 52
제2장 신학제의 출발: 패전 후부터 고도성장 이전까지 65
1. 전후 학교의 틀 67
2. 교육행정과 커리큘럼 85
3. 전후 초기의 학교의 동향과 형세 91
제3장 “학교화 사회”의 성립과 전개: 경제성장 시기의 학교 99
1. 고도성장과 학교 101
2. “출구”의 전개: 중학교의 변화 107
3. 고등학교의 대중화 114
4. 학교 간 연계 문제의 양상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연계 119
5. 산업화 사회에 대응한 양상들 124
6. 학교에 대한 이의 제기 131
제4장 학교 기반의 동요: 1990년대 이후 137
1. 제도 기반의 변용 139
2. 학력과 학교제도의 새로운 동향 146
3. 자명성에 대한 되물음 157
4. 학교 내부의 움직임 167
5. 학교 지식을 둘러싼 새로운 전개 173
종장 학교의 역할과 과제: 전후 학교제도의 재고 179
저자 후기 195
권말 수록 도판 198
참고 문헌 203
도판 출전 209
역자 후기 210
저자 소개
책 속으로
1870년대 학교 도입 초기에는 부모들에게 소중한 일손인 어린이들을 데리고 가고 소학교 건축 비용이나 수업료까지 징수하는 것에 반대하여 학교를 부수는 일까지 일어났다. 또한 고용한 교사가 학교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일도 있었다
---p.16
18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학교제도는 사법은 사법성 법학교, 공학은 공부성 공부대학교라는 식으로 학문 영역별로 정점에 위치하는 학교가 존재했다. 후에 그 정점 학교를 통합하는 형태로 제국대학을 설치했고, 신지식·신기술의 이입을 도모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학교를 근대국가의 통치기구와 연계하여 자리매김했다. 제국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국가 관료조직에 배치하는 명확한 우대 정책을 취한 것이 그 상징적인 예다.
---p.41~42
초창기 일본의 근대 학교는 새로운 지식·기술을 도입하고 흡수하는 장치였을 뿐 아니라 언어와 역사와 도덕을 공유하는 국민의 형성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그 국민 형성의 중핵에 자리매김한 것이 소학교였다.
---p.42
1885년에 1등급의 표준 수학 기간이 반년에서 1년으로 변경되었고, 이듬해에는 1년 진급제가 도입되었다. 그 후 1892년에는 4월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일본의 기본적인 입학식 풍경이 되어 “봄, 벚꽃나무 길을 걸어 학교생활이 시작된다”는 이미지로 이어진다. 사실 4월 초순에는 홋카이도에는 아직 벚꽃전선이 도달하지도 않았고, 오키나와에서는 이미 벚꽃이 져버렸지만, 이 광경은 교과서 등을 통해 공유되었다.
---p.44
20세기 전후에는 “소학교 생활의 집대성”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중에서 “부름”이라고 하는 행사에서는 졸업생과 재학생 집단이 서로 마주 보며 이별 인사를 하거나 일동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표를 정해 송사와 답사를 낭독하고 “슬픔”을 포함한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졸업식 노래 등을 하면서 졸업식을 연출한다.
---p.47
전시였던 1941년에 소학교를 대체하여 설립되었던 “국민학교”에서는 “우優”, “양良”, “가可”의 평가를 도입하여, “양”을 표준으로 한 신민(황민) 형성을 위한 절대평가로 바뀌었다.
---p.60
1941년 4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소학교를 대체하여 국민학교가 설치되었고, “황국민의 기초적 연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으로서 아시아·태평양전쟁 시 교육의 전시체제의 요체를 담당하게 되었다.
---p.61
패전 전의 교육칙어를 지주로 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교육은 헌법에 근거한 개인의 권리로 치환되었고, 이 교육기본법 아래에서 패전 후 교육의 틀이 만들어졌다. 즉 “인격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고,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며, “근로와 책임”을 중시하고, “자주적 정신이 충만한 심신”을 가진 “평화적인 국가 및 사회의 구성원”의 육성이 명문화되었다. 패전 전과 같이 “부당하게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반성에 입각해 자율적인 주체로 아이들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사회관이 뒷받침되었고, 개인으로서의 인격적 성장을 전제로 한 주권재민을 실질적으로 이루고자 했다.
---p.68~69
시야를 넓혀 1940년대 세계의 학교제도의 동향을 보면, 중등학교 수준을 풀타임으로 의무화한 것은 미국 외에는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제 중학교의 의무교육화가 결정된 것은 세계적으로 큰 실험이라 할 수 있고, 패전 후 일본 학교의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것으로 주목받았다.
---p.75
패전 후, 재일조선인으로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후에도 한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국어강습소가 개설되었다. 국어강습소는 1946년 무렵에 학생 수가 6만 명이었고 독자적인 교재를 사용했는데, 재일조선인연맹(약칭 조련) 사무소, 현지의 소학교 교사, 민가 등을 빌려 전국 각지에 대략 500개교가 생겨났다. 그 후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 형성과 취학 요구를 강하게 의식한 “조선학교”로 개조되었다. 1952년까지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 국민인 이상 소·중학교에 취학할 의무가 있다고 하여 조선학교는 폐지대상이었다. 그에 대해 조선어로 시행하는 민족교육의 필요로 조선학교 존속 운동이 조직화되었다.
---p.81
1947년에는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이 창설되었다. 일교조는 1950년대에 “제자를 다시 전장에 보내지 말라.”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문부성과 격렬하게 대립했고, 문부성 대 일교조라는 구도를 만들어냈다.
---p.83
패전 전까지 학교의 통제(거버넌스)는 일괄적으로 국가의 관리 하에 놓여 있었는데, 패전 후 개혁에서는 “교육은 부당한 지배에 복종하지 않고, 국민 전체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지고 이루어져야 한다”(1947년 교육기본법 제10조)고 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교육행정개혁의 원칙으로 지방분권, 민주화, 일반행정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이 이루어졌다.
---p.85
사노는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눈을 뜬” 아이들이 수도권으로 나가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금욕적인 형태로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말한다. 패전 전부터 상의하달의 집권적인 가치관을 유지하며 집단에 동조적인 삶을 살던 도시의 중간집단에 아이들마저 포섭된 것이다.
---p.95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친 패전 후 제2기는 경제발전과 함께 아이들이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학교의 존재가 불가결해지는 학교화 사회가 성립된 시기이다. 즉, 취학은 취업의 전제조건이라 여겨졌고, 직장-가정-학교가 연결되어 하나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시스템 내의 중요한 요소로서 학교가 자리매김한 것이다.
---p.101
도시의 상황은 1950년대 후반의 아이들과 부모의 생태와 교사의 사정을 보고한 나가타 도키오永田時雄의 『도시의 아이들과 학력都市の子どもと?力』(1959)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도시 아이들의 다수는 생산에서 분리됨으로써 소외되고, 소비를 만드는 생활의 장에 놓이게 되었다.”라고 하며,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더라도 상급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샐러리맨 가정”의 생각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p.105
학력시험 실시 교과의 선택까지 포함하여 구체적인 방책은 각 도도부현에 위임되었고, 각지의 교육행정 단위에서 입시경쟁 완화와 학교 간 격차 시정을 목표로 삼았다. 총합선발제의 도입 등 공립고교를 법적인 제도에 의해 평준화하려는 입시개혁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그 선구가 된 것은 1967년 도쿄도의 입시개혁이다. 오랜 전통과 높은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유명 공립고교를 정점에 둔 위계구조를 구축하고 있던 공립고교를 평준화하기 위해 학교군제를 도입했다. 이것은 수험자의 학교 선택에 제한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학교군제의 도입으로 인해 높은 사회적 위신을 얻어왔던 유명 공립고교는 약해졌고(군내 격차는 남아 있었지만) 공립고교의 평준화는 큰 성과를 거뒀다.
---p.120~121
한편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진학·취직처의 선고자료로서 학교가 제출하는 “내신서”를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입학자 선발제도가 도입되어, 단 한 번의 입시 점수로 합격·불합격이 정해지는 “학과시험 일변도” 선발의 폐해에 대한 대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객관성, 신뢰성의 확보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내신서에는 보다 엄밀한 대응으로 “5단계 평정”에 의한 “상대평가”가 엄밀하게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평소에도 내신서의 상대평가를 의식하게 되었고, 입시가 일상에까지 번진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p.122
학문의 계통에 근거한 계통학습 자체에 난점이 있다고 하여 “즐거운 수업”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p.129
1980년대 이후 죽음과 성 등 생명과 관련된 제재를 다루는 실천이 잇달아 생겨났다. 1980년 소학교 4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도리야마 도시코鳥山敏子의 “닭을 죽여서 먹는 수업” 등은 그 후 “생명 수업”의 선구가 되었고, 가나모리 도시로金森俊朗의 임산부를 초대한 성교육 수업이나 말기암 환자를 초대한 죽음수업도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실천이 주목을 받게 된 배경에는 과거에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삶”이 병원을 매개로 하게 된 점이나, 핵가족화가 진행되어 아이들이 “성”이나 “죽음”을 접할 기회가 사라진 점 등을 들 수 있다. 생명을 실감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으로 “삶” 자체를 가르칠 필요가 절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p.130
고도성장기 이후에는 지역의 교육 역량이 약화된 한편, 고학력 부모와 학교 사이에 긴장관계가 높아졌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순조롭게 사회에 나갈 수 없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던 가운데, 학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가정이 학교에 “불신”을 품는 상황이 퍼져갔던 것이다.
---p.131
1980년대에는 학교의 유리창을 깨는 등의 파괴행위나 교사에 대한 폭력 사건이 빈발한다. 이른바 “날뛰는 학교”가 일본 전체에 퍼져갔다. 집단 따돌림이나 자살 등이 사회문제로 부상했고, 등교거부 또한 눈에 띄게 증가했다.
---p.133
교사의 역할은 “지도”가 아니라 “지원”을 하는 사람으로 자리 잡았고, 최소한의 내용을 보장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아이들 곁에서 배움을 촉진해줄 것이 요구되었다.
---p.147
“유토리 교육”은 수업 시수나 교육 내용을 삭감함으로써 저학력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989년의 신학력관 이후, “유토리 교육”은 인지능력뿐 아니라 대인관계 능력이나 태도 등도 포함하는 인간의 전체적인 능력을 사정권 안에 두는 포스트 산업화에 대응하는 자질을 기를 수 있다는 측면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p.150
문화적·민족적 소수자, 경제적인 핸디캡 등과 함께 장애아가 대상으로 거론되었고, 특별한 교육수요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필요한 교육을 실시할 필요성이 제시되었다. “포괄적 교육”이라는 틀로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수요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p.152
대학입시센터시험은 고교 단계에서의 기초적인 학습 달성 정도를 판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지식·기능”을 묻는 출제가 중심이고, 대학입학자 선발에서 요구되는 학력을 완벽하게 측정하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어왔다. 이에 대해 “대학입학 희망자 학력평가테스트”(가칭)에서는 지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을 묻는 시험 내용과 “합교과·과목형”이나 “총합형”의 시험과목 도입에 대해서도 논의되고 있다.
---p.154~155
산업 사회 때부터 앞장서서 문화의 방파제를 쌓아 올렸던 학교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역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배우는” 관계에 묶어두었던 학교문화가 크게 흔들렸고 “배움으로부터 도주”(사토 마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진행되었다.
---p.159쪽
1965년부터 2005년까지 40년의 기간 동안 하루 중 평균 공부 시간이 “매일 2시간 이상”인 사람이 20.8퍼센트에서 7.8퍼센트로 떨어졌고, 한편 “거의 공부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1.6퍼센트에서 14.1퍼센트로 증가했다.
---p.159
1990년대에 “학급붕괴”라 불리는 상황이 세상에 널리 보고되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해서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학급담임의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p.160
교육에서의 집단주의는 경제대국을 지탱했다는 점에서 외국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일본 학교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기반에 있던 학급의 존립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p.161
부등교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학교교육법에 정해진 주류의 “일조교”를 대신하는 대안학교alternative school가 1990년대 이후 대폭 증가했다
---p.163
“재일한국·조선인”(재일코리안), “화교”, “재일중국인”이 올드커머old comer라 불리곤 하는데, 이에 대해 “뉴커머new comer”라 불리는 사람들이 대거 입국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비정규 외국인노동자나 브라질 등으로부터 건너온 닛케이진日系人 노동자, 그리고 일본인과의 국제결혼 등으로 인해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 외국인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p.165
등교해서도 교실에 가지 않고 보건실에서 지내거나 학교생활의 거점을 보건실에 두는 상태의 이른바 “보건실 등교”가 양호교사를 중심으로 한 학교보건 관계자 안에 자리 잡은 것은 1980년대 중반이라고 하며, 이 동향은 부등교의 증가와 부합하고 있다. 부등교 아이들에 대해 시행착오를 거듭해 대응하던 가운데, 보금자리를 찾는 아이를 보건실이 받아들여온 것이고, 보건실 등교가 “등교”로 간주되는 토양을 만들어냈다.
---p.169~170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15세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대학은 학생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중요한 생존 전략이 되었고, 입시·홍보와 마찬가지로 취직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p.177
대학에 입학해서도 학자금 대출을 받고 있는 학생의 숫자가 반수를 넘었고, 그 돈을 갚는 일이 젊은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 각 학교 단계에서 아이들의 교육기회를 보장하고 어떻게 자립을 뒷받침해줄 것인가는 긴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p.188~189
교육을 사회의 공유재로 받아들이는 의식이 희박해진 가운데, 새삼 교육의 공공재로서의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육을 받을 권리는 사람들이 같은 조건에서 서로 이용하는 공유재산이고, 따라서 누구나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p.16
18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학교제도는 사법은 사법성 법학교, 공학은 공부성 공부대학교라는 식으로 학문 영역별로 정점에 위치하는 학교가 존재했다. 후에 그 정점 학교를 통합하는 형태로 제국대학을 설치했고, 신지식·신기술의 이입을 도모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학교를 근대국가의 통치기구와 연계하여 자리매김했다. 제국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국가 관료조직에 배치하는 명확한 우대 정책을 취한 것이 그 상징적인 예다.
---p.41~42
초창기 일본의 근대 학교는 새로운 지식·기술을 도입하고 흡수하는 장치였을 뿐 아니라 언어와 역사와 도덕을 공유하는 국민의 형성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그 국민 형성의 중핵에 자리매김한 것이 소학교였다.
---p.42
1885년에 1등급의 표준 수학 기간이 반년에서 1년으로 변경되었고, 이듬해에는 1년 진급제가 도입되었다. 그 후 1892년에는 4월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일본의 기본적인 입학식 풍경이 되어 “봄, 벚꽃나무 길을 걸어 학교생활이 시작된다”는 이미지로 이어진다. 사실 4월 초순에는 홋카이도에는 아직 벚꽃전선이 도달하지도 않았고, 오키나와에서는 이미 벚꽃이 져버렸지만, 이 광경은 교과서 등을 통해 공유되었다.
---p.44
20세기 전후에는 “소학교 생활의 집대성”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중에서 “부름”이라고 하는 행사에서는 졸업생과 재학생 집단이 서로 마주 보며 이별 인사를 하거나 일동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표를 정해 송사와 답사를 낭독하고 “슬픔”을 포함한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졸업식 노래 등을 하면서 졸업식을 연출한다.
---p.47
전시였던 1941년에 소학교를 대체하여 설립되었던 “국민학교”에서는 “우優”, “양良”, “가可”의 평가를 도입하여, “양”을 표준으로 한 신민(황민) 형성을 위한 절대평가로 바뀌었다.
---p.60
1941년 4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소학교를 대체하여 국민학교가 설치되었고, “황국민의 기초적 연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으로서 아시아·태평양전쟁 시 교육의 전시체제의 요체를 담당하게 되었다.
---p.61
패전 전의 교육칙어를 지주로 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교육은 헌법에 근거한 개인의 권리로 치환되었고, 이 교육기본법 아래에서 패전 후 교육의 틀이 만들어졌다. 즉 “인격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고,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며, “근로와 책임”을 중시하고, “자주적 정신이 충만한 심신”을 가진 “평화적인 국가 및 사회의 구성원”의 육성이 명문화되었다. 패전 전과 같이 “부당하게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반성에 입각해 자율적인 주체로 아이들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사회관이 뒷받침되었고, 개인으로서의 인격적 성장을 전제로 한 주권재민을 실질적으로 이루고자 했다.
---p.68~69
시야를 넓혀 1940년대 세계의 학교제도의 동향을 보면, 중등학교 수준을 풀타임으로 의무화한 것은 미국 외에는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제 중학교의 의무교육화가 결정된 것은 세계적으로 큰 실험이라 할 수 있고, 패전 후 일본 학교의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것으로 주목받았다.
---p.75
패전 후, 재일조선인으로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후에도 한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국어강습소가 개설되었다. 국어강습소는 1946년 무렵에 학생 수가 6만 명이었고 독자적인 교재를 사용했는데, 재일조선인연맹(약칭 조련) 사무소, 현지의 소학교 교사, 민가 등을 빌려 전국 각지에 대략 500개교가 생겨났다. 그 후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 형성과 취학 요구를 강하게 의식한 “조선학교”로 개조되었다. 1952년까지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 국민인 이상 소·중학교에 취학할 의무가 있다고 하여 조선학교는 폐지대상이었다. 그에 대해 조선어로 시행하는 민족교육의 필요로 조선학교 존속 운동이 조직화되었다.
---p.81
1947년에는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이 창설되었다. 일교조는 1950년대에 “제자를 다시 전장에 보내지 말라.”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문부성과 격렬하게 대립했고, 문부성 대 일교조라는 구도를 만들어냈다.
---p.83
패전 전까지 학교의 통제(거버넌스)는 일괄적으로 국가의 관리 하에 놓여 있었는데, 패전 후 개혁에서는 “교육은 부당한 지배에 복종하지 않고, 국민 전체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지고 이루어져야 한다”(1947년 교육기본법 제10조)고 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교육행정개혁의 원칙으로 지방분권, 민주화, 일반행정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이 이루어졌다.
---p.85
사노는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눈을 뜬” 아이들이 수도권으로 나가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금욕적인 형태로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말한다. 패전 전부터 상의하달의 집권적인 가치관을 유지하며 집단에 동조적인 삶을 살던 도시의 중간집단에 아이들마저 포섭된 것이다.
---p.95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친 패전 후 제2기는 경제발전과 함께 아이들이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학교의 존재가 불가결해지는 학교화 사회가 성립된 시기이다. 즉, 취학은 취업의 전제조건이라 여겨졌고, 직장-가정-학교가 연결되어 하나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시스템 내의 중요한 요소로서 학교가 자리매김한 것이다.
---p.101
도시의 상황은 1950년대 후반의 아이들과 부모의 생태와 교사의 사정을 보고한 나가타 도키오永田時雄의 『도시의 아이들과 학력都市の子どもと?力』(1959)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도시 아이들의 다수는 생산에서 분리됨으로써 소외되고, 소비를 만드는 생활의 장에 놓이게 되었다.”라고 하며,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더라도 상급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샐러리맨 가정”의 생각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p.105
학력시험 실시 교과의 선택까지 포함하여 구체적인 방책은 각 도도부현에 위임되었고, 각지의 교육행정 단위에서 입시경쟁 완화와 학교 간 격차 시정을 목표로 삼았다. 총합선발제의 도입 등 공립고교를 법적인 제도에 의해 평준화하려는 입시개혁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그 선구가 된 것은 1967년 도쿄도의 입시개혁이다. 오랜 전통과 높은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유명 공립고교를 정점에 둔 위계구조를 구축하고 있던 공립고교를 평준화하기 위해 학교군제를 도입했다. 이것은 수험자의 학교 선택에 제한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학교군제의 도입으로 인해 높은 사회적 위신을 얻어왔던 유명 공립고교는 약해졌고(군내 격차는 남아 있었지만) 공립고교의 평준화는 큰 성과를 거뒀다.
---p.120~121
한편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진학·취직처의 선고자료로서 학교가 제출하는 “내신서”를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입학자 선발제도가 도입되어, 단 한 번의 입시 점수로 합격·불합격이 정해지는 “학과시험 일변도” 선발의 폐해에 대한 대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객관성, 신뢰성의 확보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내신서에는 보다 엄밀한 대응으로 “5단계 평정”에 의한 “상대평가”가 엄밀하게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평소에도 내신서의 상대평가를 의식하게 되었고, 입시가 일상에까지 번진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p.122
학문의 계통에 근거한 계통학습 자체에 난점이 있다고 하여 “즐거운 수업”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p.129
1980년대 이후 죽음과 성 등 생명과 관련된 제재를 다루는 실천이 잇달아 생겨났다. 1980년 소학교 4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도리야마 도시코鳥山敏子의 “닭을 죽여서 먹는 수업” 등은 그 후 “생명 수업”의 선구가 되었고, 가나모리 도시로金森俊朗의 임산부를 초대한 성교육 수업이나 말기암 환자를 초대한 죽음수업도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실천이 주목을 받게 된 배경에는 과거에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삶”이 병원을 매개로 하게 된 점이나, 핵가족화가 진행되어 아이들이 “성”이나 “죽음”을 접할 기회가 사라진 점 등을 들 수 있다. 생명을 실감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으로 “삶” 자체를 가르칠 필요가 절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p.130
고도성장기 이후에는 지역의 교육 역량이 약화된 한편, 고학력 부모와 학교 사이에 긴장관계가 높아졌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순조롭게 사회에 나갈 수 없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던 가운데, 학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가정이 학교에 “불신”을 품는 상황이 퍼져갔던 것이다.
---p.131
1980년대에는 학교의 유리창을 깨는 등의 파괴행위나 교사에 대한 폭력 사건이 빈발한다. 이른바 “날뛰는 학교”가 일본 전체에 퍼져갔다. 집단 따돌림이나 자살 등이 사회문제로 부상했고, 등교거부 또한 눈에 띄게 증가했다.
---p.133
교사의 역할은 “지도”가 아니라 “지원”을 하는 사람으로 자리 잡았고, 최소한의 내용을 보장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아이들 곁에서 배움을 촉진해줄 것이 요구되었다.
---p.147
“유토리 교육”은 수업 시수나 교육 내용을 삭감함으로써 저학력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989년의 신학력관 이후, “유토리 교육”은 인지능력뿐 아니라 대인관계 능력이나 태도 등도 포함하는 인간의 전체적인 능력을 사정권 안에 두는 포스트 산업화에 대응하는 자질을 기를 수 있다는 측면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p.150
문화적·민족적 소수자, 경제적인 핸디캡 등과 함께 장애아가 대상으로 거론되었고, 특별한 교육수요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필요한 교육을 실시할 필요성이 제시되었다. “포괄적 교육”이라는 틀로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수요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p.152
대학입시센터시험은 고교 단계에서의 기초적인 학습 달성 정도를 판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지식·기능”을 묻는 출제가 중심이고, 대학입학자 선발에서 요구되는 학력을 완벽하게 측정하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어왔다. 이에 대해 “대학입학 희망자 학력평가테스트”(가칭)에서는 지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을 묻는 시험 내용과 “합교과·과목형”이나 “총합형”의 시험과목 도입에 대해서도 논의되고 있다.
---p.154~155
산업 사회 때부터 앞장서서 문화의 방파제를 쌓아 올렸던 학교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역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배우는” 관계에 묶어두었던 학교문화가 크게 흔들렸고 “배움으로부터 도주”(사토 마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진행되었다.
---p.159쪽
1965년부터 2005년까지 40년의 기간 동안 하루 중 평균 공부 시간이 “매일 2시간 이상”인 사람이 20.8퍼센트에서 7.8퍼센트로 떨어졌고, 한편 “거의 공부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1.6퍼센트에서 14.1퍼센트로 증가했다.
---p.159
1990년대에 “학급붕괴”라 불리는 상황이 세상에 널리 보고되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해서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학급담임의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p.160
교육에서의 집단주의는 경제대국을 지탱했다는 점에서 외국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일본 학교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기반에 있던 학급의 존립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p.161
부등교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학교교육법에 정해진 주류의 “일조교”를 대신하는 대안학교alternative school가 1990년대 이후 대폭 증가했다
---p.163
“재일한국·조선인”(재일코리안), “화교”, “재일중국인”이 올드커머old comer라 불리곤 하는데, 이에 대해 “뉴커머new comer”라 불리는 사람들이 대거 입국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비정규 외국인노동자나 브라질 등으로부터 건너온 닛케이진日系人 노동자, 그리고 일본인과의 국제결혼 등으로 인해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 외국인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p.165
등교해서도 교실에 가지 않고 보건실에서 지내거나 학교생활의 거점을 보건실에 두는 상태의 이른바 “보건실 등교”가 양호교사를 중심으로 한 학교보건 관계자 안에 자리 잡은 것은 1980년대 중반이라고 하며, 이 동향은 부등교의 증가와 부합하고 있다. 부등교 아이들에 대해 시행착오를 거듭해 대응하던 가운데, 보금자리를 찾는 아이를 보건실이 받아들여온 것이고, 보건실 등교가 “등교”로 간주되는 토양을 만들어냈다.
---p.169~170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15세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대학은 학생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중요한 생존 전략이 되었고, 입시·홍보와 마찬가지로 취직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p.177
대학에 입학해서도 학자금 대출을 받고 있는 학생의 숫자가 반수를 넘었고, 그 돈을 갚는 일이 젊은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 각 학교 단계에서 아이들의 교육기회를 보장하고 어떻게 자립을 뒷받침해줄 것인가는 긴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p.188~189
교육을 사회의 공유재로 받아들이는 의식이 희박해진 가운데, 새삼 교육의 공공재로서의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육을 받을 권리는 사람들이 같은 조건에서 서로 이용하는 공유재산이고, 따라서 누구나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p.191
출판사 리뷰
패전 후의 반성에서 고도성장기의 경쟁을 거쳐 혼란스런 전환점에 다다른 일본 교육사
저자는 패전 후의 교육사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다.
첫번째 시기는 패전 후부터 1950년대까지 전후 민주주의 사회의 구축을 담당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일본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와 결별하고 미 군정 치하의 “개인의 가치”와 “평화적인 국가 및 사회의 구성원”이 강조되는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의 도입이 큰 특징이다. 학제 또한 6-3-3제를 도입하여 중학교 의무교육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열린 체계를 지향했다. 1947년에 “제자를 다시는 전장에 보내지 말라”를 슬로건을 내세운 일본교직원조합이 창설되어 문부성과 대립했고, 지방분권, 민주화, 일반행정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이 교육행정의 원칙이 세워진 시기다.
두번째 시기는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산업화 사회의 구축에 대응하는 교육의 시기다. 직업 사회로의 이행이 학교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경제발전과 함께 아이들이 사회로 나가기 위해 학교의 존재가 불가결해지는 학교화 사회가 성립된 시기다. 직장-가정-학교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되어 노동력을 배출하였고,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더라도 상급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처럼 학생들은 더 나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극심한 경쟁 체제에 놓여지게 되었다. 이런 교육과 선별이 모순적으로 얽힌 학교 공간을 탈피하기 위하여 평준화 전략인 “학교군제”, “상대평가”를 적용한 “내신서”를 도입하였으나, 입시가 일상생활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고도성장기는 “수험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고학력 부모와 학교 사이의 긴장이 고조된 시기이다. 더불어 학생들의 “반란”도 펼쳐졌고, 학교 건물의 파괴나 교사에 대한 폭력도 빈번하게 발생하여 이른바 “날뛰는 학교”가 일본 전역으로 퍼져갔다. 집단따돌림이나 자살 등이 사회 문제로 부각하고 등교거부 또한 눈에 띄게 증가한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다.
저자는, 패전 전의 일본 공교육을 근대화를 위한 신지식, 신기술의 도입과 흡수를 추구하는 시스템, 언어와 역사와 도덕을 공유하는 국민의 형성, 전시체제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요체로 파악하는 한편, 패전 후의 교육은 교육기본법 아래 “부당하게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반성 위에서 자율적인 주체로 아이들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한다고 보고 있다. 전자는 국가에 복종하고 전쟁에 유용한 인간형을 생산하고 후자는 산업 현장에 적응하면서 생산과 소비에 능숙한 경제적 인간형을 기르는 데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고도성장기를 지나 지금까지의 세번째 시기는, 가정과 학교의 왕복이 아이들의 성장의 축이 되는 “진자형 성장”을 벗어나 가정, 학교, 소비문화 사회의 삼자를 성장의 축으로 하는 “트라이앵글형 성장”으로 변화한 시기다. 소비나 정보로부터 거리를 두고 오로지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만 특화된 학교 공간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더는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한편,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담임의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상태”인 “학급붕괴”가 세상에 널리 보고되었다.
한편 의무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25퍼센트가 빈곤 상태에 빠지고, 교실이 아닌 보건실로 등교하는 소위 “보건실 등교”가 느는 등 학교의 존재 가치 자체를 묻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기존 교과의 틀을 벗어난 “종합적인 학습시간”이나 “반전학습”이 대두하고, 대안학교와 프리스쿨이 늘었다. 대학생 또한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학자금 대출을 받아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각 학교 단계에서 아이들의 교육기회를 보장하고 어떻게 자립을 뒷받침해줄 것인가가 긴급한 현안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일본 학교 역사
저자가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본 학교의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은 바로 “재일조선인(재일코리안)”의 학교다. 이 학교들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후에도 한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돌아가지 않은 재인조선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국어강습소가 개설된 이후, 일본 각지에 약 500개교가 생겨났다. 그 후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 형성과 취학 요구를 강하게 반영한 “조선학교”로 발전하였다. 한편 올드커머old comer라 불리는 “재일한국·조선인”, “화교”, “재일중국인”에 대해 1970년대 후반부터 입국한 비정규 외국인노동자, 브라질 등으로부터 건너온 닛케이진日系人 노동자, 일본 이주 결혼이주민 “뉴커머new comer”의 교육 또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한국에서 “조선학교”에 대한 연대와 지지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뉴커머”의 교육을 실천할 때에 일본 학교 역사에서 중요한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학교의 역사를 읽을 때의 또다른 재미(?)는, 역자가 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일본 학교의 역사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마치 한국 교육의 역사와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국민학교, 운동장, 소풍, 교과, 국사, 국어, 신체검사, 우優”, “양良”, “가可”와 같은 단어뿐만 아니라, 6-3-3-(4)제, 입시, 학군제, 내신성적, 상대평가, 집단 따돌림, 즐거운 수업, 학벌, 대안학교, 프리스쿨과 같이 많은 단어들이 겹친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답게 일본과 한국의 교육제도와 그 역사의 궤적을 공유하고 있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원조이냐를 따지기 전에 일본 학교의 문제, 고민, 해결책, 미래상 등을 접하고 분석할 때에 한국 교육의 현실과 앞날을 조망하는 시야를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점에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저자는 패전 후의 교육사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다.
첫번째 시기는 패전 후부터 1950년대까지 전후 민주주의 사회의 구축을 담당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일본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와 결별하고 미 군정 치하의 “개인의 가치”와 “평화적인 국가 및 사회의 구성원”이 강조되는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의 도입이 큰 특징이다. 학제 또한 6-3-3제를 도입하여 중학교 의무교육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열린 체계를 지향했다. 1947년에 “제자를 다시는 전장에 보내지 말라”를 슬로건을 내세운 일본교직원조합이 창설되어 문부성과 대립했고, 지방분권, 민주화, 일반행정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이 교육행정의 원칙이 세워진 시기다.
두번째 시기는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산업화 사회의 구축에 대응하는 교육의 시기다. 직업 사회로의 이행이 학교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경제발전과 함께 아이들이 사회로 나가기 위해 학교의 존재가 불가결해지는 학교화 사회가 성립된 시기다. 직장-가정-학교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되어 노동력을 배출하였고,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더라도 상급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처럼 학생들은 더 나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극심한 경쟁 체제에 놓여지게 되었다. 이런 교육과 선별이 모순적으로 얽힌 학교 공간을 탈피하기 위하여 평준화 전략인 “학교군제”, “상대평가”를 적용한 “내신서”를 도입하였으나, 입시가 일상생활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고도성장기는 “수험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고학력 부모와 학교 사이의 긴장이 고조된 시기이다. 더불어 학생들의 “반란”도 펼쳐졌고, 학교 건물의 파괴나 교사에 대한 폭력도 빈번하게 발생하여 이른바 “날뛰는 학교”가 일본 전역으로 퍼져갔다. 집단따돌림이나 자살 등이 사회 문제로 부각하고 등교거부 또한 눈에 띄게 증가한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다.
저자는, 패전 전의 일본 공교육을 근대화를 위한 신지식, 신기술의 도입과 흡수를 추구하는 시스템, 언어와 역사와 도덕을 공유하는 국민의 형성, 전시체제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요체로 파악하는 한편, 패전 후의 교육은 교육기본법 아래 “부당하게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반성 위에서 자율적인 주체로 아이들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한다고 보고 있다. 전자는 국가에 복종하고 전쟁에 유용한 인간형을 생산하고 후자는 산업 현장에 적응하면서 생산과 소비에 능숙한 경제적 인간형을 기르는 데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고도성장기를 지나 지금까지의 세번째 시기는, 가정과 학교의 왕복이 아이들의 성장의 축이 되는 “진자형 성장”을 벗어나 가정, 학교, 소비문화 사회의 삼자를 성장의 축으로 하는 “트라이앵글형 성장”으로 변화한 시기다. 소비나 정보로부터 거리를 두고 오로지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만 특화된 학교 공간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더는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한편,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담임의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상태”인 “학급붕괴”가 세상에 널리 보고되었다.
한편 의무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25퍼센트가 빈곤 상태에 빠지고, 교실이 아닌 보건실로 등교하는 소위 “보건실 등교”가 느는 등 학교의 존재 가치 자체를 묻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기존 교과의 틀을 벗어난 “종합적인 학습시간”이나 “반전학습”이 대두하고, 대안학교와 프리스쿨이 늘었다. 대학생 또한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학자금 대출을 받아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각 학교 단계에서 아이들의 교육기회를 보장하고 어떻게 자립을 뒷받침해줄 것인가가 긴급한 현안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일본 학교 역사
저자가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본 학교의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은 바로 “재일조선인(재일코리안)”의 학교다. 이 학교들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후에도 한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돌아가지 않은 재인조선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국어강습소가 개설된 이후, 일본 각지에 약 500개교가 생겨났다. 그 후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 형성과 취학 요구를 강하게 반영한 “조선학교”로 발전하였다. 한편 올드커머old comer라 불리는 “재일한국·조선인”, “화교”, “재일중국인”에 대해 1970년대 후반부터 입국한 비정규 외국인노동자, 브라질 등으로부터 건너온 닛케이진日系人 노동자, 일본 이주 결혼이주민 “뉴커머new comer”의 교육 또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한국에서 “조선학교”에 대한 연대와 지지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뉴커머”의 교육을 실천할 때에 일본 학교 역사에서 중요한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학교의 역사를 읽을 때의 또다른 재미(?)는, 역자가 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일본 학교의 역사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마치 한국 교육의 역사와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국민학교, 운동장, 소풍, 교과, 국사, 국어, 신체검사, 우優”, “양良”, “가可”와 같은 단어뿐만 아니라, 6-3-3-(4)제, 입시, 학군제, 내신성적, 상대평가, 집단 따돌림, 즐거운 수업, 학벌, 대안학교, 프리스쿨과 같이 많은 단어들이 겹친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답게 일본과 한국의 교육제도와 그 역사의 궤적을 공유하고 있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원조이냐를 따지기 전에 일본 학교의 문제, 고민, 해결책, 미래상 등을 접하고 분석할 때에 한국 교육의 현실과 앞날을 조망하는 시야를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점에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39.일본학 연구 (학부전공>책소개) > 2.일본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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