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한일관계사 연구 (전공분야>책소개)/8.일제강제동원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2019)

동방박사님 2024. 8. 11. 09:20
728x90

책소개

해마다 8월이 되면 일본 언론은 전쟁(제2차세계대전 특히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과 특집 기사를 빠트리지 않는다. 원폭 피해자도 있고 공습 피해자도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피해를 당한 이들이다. 총 한 자루 쥐지 않았던 민간인들이다. 가슴 아픈 사연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까닭으로 그토록 무참한 피해를 입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대체로 침묵한다. 미군의 전격 공습과 원자폭탄의 가공할 살상력 그리고 무참한 피해만 조명한다. 대규모 공습과 원자폭탄의 가공할 포연에 가려진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및 침략지의 민간인 학살과 강제동원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전쟁에 패한 나라이자 인류 최초로 핵폭탄 피폭경험을 한 피해자성 부각에는 열심이지만, 가해자로서 피해자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데에는 관심이 적다.
이 책은,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청일전쟁 이후 아시아태평양전쟁까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민들이 당한 고통, 그 중에서도 사회의 최약자층인 미성년자들의 피해 사례와 증언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한 맺힌 호소이자 피 맺힌 절규이다. 

목차

프롤로그 - 6

제1장. 천국의 섬으로 떠난 아이들

- 남양섬은 유토피아라더니 - 17
- 가족과 함께 떠난 천국의 섬 - 32
- 사탕수수 농장의 어린이 일꾼 - 38
- 군부대에서, 비행장 공사장에서 - 46
- 전투 중에 목숨을 잃고 폭격 속에 가족을 잃고 - 53
- 천국의 섬은 없었다 - 58

이민인가 강제동원인가 - 29
남양농업이민을 주관한 국책기업들 - 30

제2장. 군수공장의 아이들

- 소년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군수공장 - 65
- 소년 항공병 대신 비행기 공장에 간 소년 - 95
- 군수 공장의 소녀들 - 105
- 봄날에 집 떠난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 122
- 죽거나 미쳐야 벗어나는 방적공장 - 130

군수회사 지정 - 94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 119
피폭자 건강수첩 - 120
실 만들기에서 군복 만들기까지 - 128

제3장. 특공정신으로 응모하라

- 소녀들이여! 특공정신으로 제로센을 만들라! - 151
- 그곳은 학교가 아니라 군수공장이었다 - 166
- 세상을 향한 외침 - 185

여성을 동원하기 위한 법령과 결정, 지시 - 156

제4장. 나이는 어려도 엄연한 소년 채탄부

- 아이도 여성도 모두 탄광부로 만드는 법 - 225
- 우리가 바로 일본의 소년광부요! - 245
- 화태의 소년광부 - 269
- 조선의 어린이 광부 - 284

탄광과 광산은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 - 241
하시마 탄광 - 265

제5장. 공사판의 어린아이들

- 어린이가 가야 했던 토건공사장 - 303
- 조선 방방곡곡 공사장에 동원된 아이들 - 314

제6장. 징용을 거부한 아이들

- 소년형무소의 탄생 - 337
- 나도 모르게 소년수가 되었다 - 342
- 방공호를 만들고, 멀리 흥남비료공장까지 - 351

에필로그 : 살아남았기에 - 358
부록- 참고문헌 - 364
 
저자 소개 
저 : 정혜경 (鄭惠瓊)
1960년 서울 출생. 서울시 문화재 위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식민지 시기 재일한인의 역사를 주제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구술사(Oral History)를 시작했고, 1999년부터 기록학(Achival Science) 분야도 공부했다. 그간 단행본 12권(단독)과 논문 40여 편을 발표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책 속으로

‘천국의 섬’에서, 전투 중에 목숨을 잃고 폭격 속에 가족을 잃고
낫질하다가 다친 금복처럼 어머니를 따라 다녀도 농장은 아이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낫질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낫질을 하지 않아도 농장은 안전하지 않았다. 1944년 1월부터 미군이 본격적으로 남양군도 상륙작전을 시작하면서, 사탕수수농장이 가득한 티니안은 폭탄이 작렬하는 위험한 전쟁터가 되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학자들은 이미 1937년 중일전쟁이 일본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한다. 중일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넓디넓은 만주에서 일본의 국력을 키울 수 있었을 텐데 과도한 욕심이 가져온 결과라고 한다.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참전했고, 1942년 4월에 B-25 듀리틀 폭격대가 도쿄東京, 나고야名古屋, 고베神戶 등 일본 주요 도시에 폭탄을 퍼부었다. 물론 미국은 처음에 괌과 필리핀을 빼앗겼으나 곧바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줄곧 승전의 역사를 남겼다. 1942년 6월의 일이다.
이제 일본에게 남은 것은 패전이었다.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패전을 경험했다.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일본의 남태평양진공작전은 끝났다. 그리고 미국은 남태평양과 동남아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하나씩 탈환하기 시작했다. 1943년 11월 1일, 미군이 솔로몬군도 부겐빌Bougainville Island에 상륙한 후, 길버트 제도 타라와Tarawa까지 탈환했다. 11월 21일의 일이다. 이후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미군은 1944년 1월 남양군도 공격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2월 1일 마샬제도 콰젤란kwajalein에 상륙했다. 미군이 태평양을 얻는다면, 일본 본토 공습이 가능해진다. 그 때문에 미군은 집중적으로 화력을 투입해 남양군도를 공격했다. 예상대로 남양군도 점령 후 미군은 1944년 8월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일본 본토를 폭격했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도시에서 하룻밤 사이에 십만 명씩 죽어나갔다.
전투는 치열했다. 그리고 참담한 일본의 패배였다. 2월, 축섬 공습으로 무려 13만 명이 사망했다. ‘전멸’, ‘전멸’, ‘전멸’ 일본수비대가 맞은 운명이다. 폭격의 피해는 남양군도에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닥친 운명이기도 했다.
전쟁터가 된 남양군도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이들은 민간인들,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던 농민들이었다. 이 가운데 여자와 어린이는 가장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고 다치는 아이들이 생겼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다친 가족을 살리려고 고군분투했던 아이, 부모를 잃고 슬퍼할 사이도 없이 다친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동생들을 데리고 슬픈 귀국길에 올라야 했던 소녀도 있었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려면 어린이라는 사실을 잊어야 했다.
농장에서 일 하다가 가족 5명이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1940년 여섯 가족이 사이판으로 가서 아기간 직영농장에서 일하던 백씨 가족은 1944년 6월 3일, 폭격으로 농장에서 일하다가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둘, 딸 하나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남은 가족은 사이판에서 낳은 갓난쟁이와 세 살짜리 형이었다. 한 순간에 고아가 된 어린 형제는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후 고아로 살아낸 인생은 더 할 나위 없이 기구했다.

순임이 아버지가 당한 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하고이 비행장에 동원되었던 순임이 아버지도 비행장에서 터 닦고 폭탄 나르다가 사고를 당해 미군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순임은 1931년 순창에서 태어났다. 9살 때인 1941년에 가족이 같이 갔다. 순창에서 출발해 티니안의 니시하고이라는 사탕수수농장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조선 사람들이 많았다. 작년과 재작년에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일본말도 잘 알아듣고, 농장일도 잘했다. 순임은 어머니가 일하는 사탕수수 농장에 따라다녔다. 학교 갈 나이가 되었으나 학교 대신 농장에 갔다. 아홉 살부터 농장의 일꾼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다가 하고이 비행장에서 일했다. 회사에서는 농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비행장으로 보내 일하도록 했다. 아버지는 비행장에서 활주로 터 닦고 폭탄 나르다가 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으나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군인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약도 없지만, 군인들도 죽어가는 마당에 민간인을 챙길 여유는 없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 미군 수용소에 갔을 때 치료를 좀 받았으나 시기를 놓쳐 결국 사망했다. 1945년 10월 30일이었다. 아버지 유해는 나중에 작은 아버지가 유골상자를 받아 모셨다.

포나페에서 눈을 잃은 복순
1928년생인 복순은 포나페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 1939년 아버지, 어머니와 삼촌, 이렇게 넷이서 떠난 고향(전북 임실)이었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부모님이 서른 넘어 간신히 얻은 귀한 외동딸이었다. 포나페에서 가족들은 모두 제당공장에서 일했다. 복순도 학교 대신 제당공장에 다녔다. 그러다가 1944년 미군이 남양군도를 공격하자 회사에서 복순에게 군인들 간호를 하라고 했다. 제당공장 기계는 이미 멈추었고, 공장 소속 노무자들은 비행장이나 군대 공사장으로 가서 일해야 했다.
복순도 군부대에 가서 환자 간호를 하면서 군대 훈련도 받았다. 다친 환자도 있었지만 폐병환자도 있었다. 전쟁 통에 먹을 것이 부족하니 폐병환자가 많았다. 그보다 더 많은 환자는 전염병 환자였다. 군부대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습한데다 깨끗한 물이 부족하고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전염병은 쉽게 번졌다. 간호라고는 하지만 약이 없으니 그저 물이나 떠 주고, 닦아주고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복순은 폭탄 파편을 맞아 눈을 다쳤다. 군 병원에서 일을 했지만 치료는 받을 수 없었다. 치료해줄 약이 없었다. 그저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미군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한쪽 눈은 보이지 않았다.

종석 소년과 경순 누나
종석은 온 가족이 남양에 갔지만 언제 인지 모른다. 너무 어려서 갔고, 전쟁 말기에 가족들이 폭탄을 맞아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누나, 형, 남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가 갔다. 한 8?9년 정도 있었지 싶다. 가족들은 남양흥발이 운영하던 사이판의 소채원에서 일했다. 남양 현지말로 짜랑가라는 동네였다. 소채원은 군인들 먹을 야채를 재배하는 곳이었다.
종석은 너무 어려 농장에서 일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남양섬 생활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늘 배 고팠다는 것과 무서운 폭격 소리만 기억할 뿐이다. 계속 미군이 저 멀리 배에서 포를 쏘아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내에 사는 사람들은 방공호에 들어가 있었다지만 종석네 동네에는 방공호도 없었고, 넓은 소채원은 피할 곳도 없었다. 사탕수수농장은 문을 닫았다는데, 소채원은 군인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어야 하니 문을 닫지도 못했다.
몇 월인지 모른다. 어느 날 아버지와 경순 누나가 폭탄을 맞았는데, 아버지는 간신히 살아났지만 누나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폭탄 맞은 환자였지만 민간인은 병원은커녕 붕대 하나 구경할 수도 없었다. 아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피를 많이 흘려서 죽었을 것이다


소년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군수공장
1931년, 중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이 만주와 중국 본토로 쳐들어갔단다. 전쟁터에서는 날마다 승전보가 울렸다. 길거리마다 황군皇軍이 새로운 땅으로 진격해 들어갔다는 방송과 군가가 끊이지 않는다. 전시체제기라고 했다. 공출이 시작됐다. 쌀도 내가고 소금도 내가고 배도 내가고 소와 말도 내갔다. 사람 공출도 시작됐다. 물자만이 아니라 사람 나가는 것도 공출이라고 했다.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더니 마을마다 직장마다 근로보국대라는 것을 만들어 일하러 나오라 했다. 1939년부터는 남양군도로, 남사할린으로, 일본으로, 만주로 사람들을 데려갔다. 노동자라는 말도 사라졌다. 나라를 위해 당연히 한 몸을 바쳐야 하건만 노동자 권리니 뭐니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천황폐하께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노무자勞務者라 불렀다. 일 할 의무만 있다고 했다.
조선총독부에서 매년 마을마다 사람 공출 할당을 내려 보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해 할당이 내려왔다. 조선과 일본의 공장으로 간다고 했다. 머릿수를 채우다보니 부족하다고 아이도 데려갔다. 그러나 면사무소 사람들에게 법보다 중요한 것은 할당 인원수였다. 법은 어길 수 있지만 조선총독부에서 내려온 할당은 어길 수 없었다. 조선의 아이들이 군수공장에 가게 된 사연이다.
전쟁을 위해 후방에서 조달해주어야 하는 필수 물품은 군수품이다. 후방에서 보급을 해주어야 전방의 군대가 전투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 본토와 일본이 식민지로 삼고 점령한 모든 지역에는 군수공장이 있었다. 일본 본토에는 군수공장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조선인이 끌려간 군수공장은 1,176곳이다. 군이 운영하는 군수기지창과 민간이 운영하는 군수공장을 포함한 숫자다. 무기와 항공기?화학?제철?기계기기?조선소?정유?인조석유 등 무기 생산에 필요한 공장이다. 군인이 먹을 간이 식량과 음료를 만드는 공장도 있었다.
군수공장을 운영한 기업은 일본의 3대 재벌로 알려진 미쓰비시三菱?미쓰이三井?스미토모住友를 비롯해 지금도 일본에서 운영하고 있는 중견기업까지 빠지지 않았다.
조선에도 군수공장의 수와 종류는 만만치 않았다. 조선의 군수공장은 820곳이었다. 인구나 영토 규모로 볼 때 일본보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이다. 무기를 만드는 조병창과 항공창을 비롯해 화학?제철?기계기기?조선소?정유?시멘트?제지 등 총 18개 직종의 군수공장이 있었다. 군수품 종류도 링거 주사약부터 잠수함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수송이 편리한 철도와 항구와 가까운 지역에 군수공장만 모아놓은 군수기지를 만들고 군수품을 일본과 전선으로 실어날았다. 남선南鮮에서는 부평이, 북선北鮮에서는 흥남이 가장 큰 군수기지였다. 그 외 경성과 부산, 인천, 청진 등 항구와 인접한 대도시도 군수공장 밀집지였다. 군수공장을 운영한 기업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가 있었고,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각종 국책기업, 일본 중견기업이 조선에서 조선 사람을 동원해 군수품을 생산했다.

열두 살 징용공 소년 덕종
덕종 할아버지는 건강하고 다부졌다. 오이타大分현의 일본광업회사에 다녀온 다른 할아버지들에 비해 훨씬 젊어보였다. 실제로도 젊었다. 열두 살, 너무 어린 나이에 공장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손은 조그맣다. 열두 살에 멈춘 듯 작은 손과 체구.
1942년 초봄, 면서기가 와서 덕종에게 쪽지를 주면서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일본 공장에 가서 일하면서 편히 있다 오라”고 했다. 동네에서는 옆집 김씨 아저씨하고 두 명이 쪽지를 받았다. 징용장이라 했다. 두 집 모두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었다. 호적상 1932년생이었으니 덕종은 아홉 살 꼬마였다. 아무리 할당이 중요해도 절대 데려갈 수 없는 나이였다. 실제로는 1929년 5월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났으니 제 나이는 열두 살이다. 그래도 어린 나이였다.
덕종의 호적 나이는 왜 달랐을까. 호적에 이름을 못 올리고 살다가 나중에 큰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덕종에게는 호적에 이름을 올릴 부모가 없었다. 덕종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군무원이 되어 고향을 떠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 군무원은 군에서 일하는 민간인이다. 운전수나 전화교환수가 있고, 포로감시원이 있으며 짐 나르고 굴 파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가 고향을 떠날 당시에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이어서, 조선 사람을 강제로 데려 가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아버지는 군무원을 직업으로 삼은 것이다. 남편이 떠난 후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어머니는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버렸고, 한 명 남은 누나도 먹고 살 길이 막연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 덕종은 고아처럼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면서기가 쥐어준 징용장을 들고 면사무소에 갔더니 웬 일본 사람이 앉아서 쳐다보더니 손을 보자고 했다. 남의 풀도 베다 주고 나무도 해주고 살았으니 손이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어린애 손이었다. 손을 만져보더니 옆 사람에게 말했다. “이런 아이까지 데려가야 하나?” 그러면서도 집에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면에 모인 사람은 한 30명 정도였다. 수동에서 온 박 아무개라는 아이도 덕종 또래였다. 나중에 다카야마라고 불렀다. 30명이 옥천 군청으로 가니, 다른 면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모두 200명가량 됐다. 200명 가운데에도 덕종 또래는 세 사람밖에 없었다.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인솔자는 일행을 바라크baraque같은 집에 몰아넣었다. 다른 군에서 온 인원을 합하니 300명으로 늘어났다. 국민복이라는 옷을 입혀주었는데 덕종의 윗도리가 무릎 밑으로 내려왔다. 신발도 농구화 같은 것을 주었는데, 엄청나게 커서 걷기도 힘들었다. 인솔하는 일본 사람이 딱한 듯 보더니 몇 살이냐고 물어본다. 열두 살이라고 하니 잠시 생각한 후 “일만 잘하면 되니까 우선 옷이나 해 입자”며 아이 셋을 부산 시내로 데려갔다. 어느 옷가게에 가서, 아이들에게 맞는 옷을 달라고 해서 입혔다. 발에 맞는 운동화가 없다며 고무신을 한 켤레씩 사주었다.
그렇게 부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덕종은 부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부관연락선은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여객선이다. 시모노세키下關의 한자 표기에서 ‘관關’과 부산의 ‘부釜’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조선 사람들은 부관연락선이라 부르고 일본 사람들은 관부연락선이라 불렀다. 연락선은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대개 길고 넓은 갑판 위로 원통형 기둥이 높이 솟아 검은 석탄 연기를 뿜어내는 증기선이었다. 인솔자들이 배 안에서, 데려가는 조선 사람들 중에 일본말 잘 하는 사람에게 소대장, 중대장이라고 완장을 채워주었다. 배 안에서 주먹밥도 하나씩 줬다. 부산을 출발한 이튿날 오후 3시 경 시모노세키에 내렸다. 역 앞에서 다시 주먹밥 하나씩 먹고 기다렸다가 밤기차를 타고 오이타역에 가서 트럭을 타고 사가노세키佐賀關제련소로 들어갔다. 구리 제련 공장인데 당시에는 일본광업이었지만, 지금은 일광日鑛금속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트럭에서 내려 산에 올라가자 바라크가 쭉 있었다. 조선 사람들 숙소라고 했다. 무슨 수용소 같았다. 아침에 도착했건만, 공장장의 훈시를 듣고 조사를 받고 숙소를 정하고 하니 어느 새 저녁때가 되었다. 방 한 칸에 다섯 사람씩 집어넣었는데, 소년 셋은 한 방에 들어갔다. 땡땡 울리는 소리에 어른들을 따라 식당으로 가니 시커먼 밥을 주었다. 밥이 아니었다. 도시락에 콩깻묵을 조금씩 올려서 무게를 달고 단무지 세 쪽과 소금 국물 한 컵을 주었다. 기가 막혔다. 조선에서도 저렇게 먹고 살지는 않았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먹기는 해야 하는데 냄새가 역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먼저 왔다는 어른이 말했다. 억지로라도 먹으라고, 나중에 바닷가에 나가 생선이라도 사다 끓여먹고 소 잡는 데 가서 내장도 사다 먹을 수 있다고.
하룻밤 자고 다음날부터 공장 일을 시작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여섯 시에 아침을 먹고 일하러 나갔다. 공장에 일하러 온 일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몇 명 있었지만, 나중에는 다들 군대에 가서 볼 수 없었다. 기계 다루는 사람과 관리자인 노무계만 몇 명 남았다.
감독은 소년 세 명에게 돌을 주워 광차鑛車에 싣고 나르라고 했다. 공장에서는 돌을 기계로 빻아 고운 가루로 만들어 쇳물 녹이는 데로 보내고, 끓여서 쇠를 만들었다. 돌가루를 끓여서 기계에 부으면 찌꺼기는 빠져나가고 쇠가 남는다. 소년들은 광석을 광차에 담아 분쇄기 옆에 실어다주는 일을 했다. 아침 일곱 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저녁 다섯 시가 되면 주야간 교대를 했다. 그래도 여기는 쇠를 다루는 군수공장이라 일하는 시간이 짧은 편이라고 했다. 탄광이나 방적공장은 열두 시간씩 일한다고 했다.
어른들 중에는 간혹 탈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앞문으로 가려면 사무실을 지나야 하는데 지키고 있으니 못 나가지만 뒤로 산을 넘으면 나갈 수 있었다. 낭떠러지 언덕이 쭉 이어져 위험하기는 하지만 길로 나갈 수는 있었다. 그런데 길을 찾아가봐야 시내로 가기는 어려웠다. 그저 인근에 소 내장 파는 데 갔다 오는 정도였다. 섬이어서 딱 외길이다. 시내까지 80리 길이라고 하는데, 멀리 가다가는 붙잡히기 십상이었다. 탈출했다 붙잡힌 사람들은 죽을 정도로 맞았다. 그런데도 탈출에 성공한 이들이 있었다. 참 용한 사람들이다.
공장에는 서양 포로들이 있었다. 바다 옆 산에다가 포로수용소를 만들어 놓고 일본 군인들이 지키며 일을 시켰다. 포로들도 광석을 실어 날랐다. 포로들이 광석이 많은 산에서 싣고 와서 쌓아두면, 덕종과 소년들이 실어서 크러셔 앞에 옮겼다. 덕종은 포로수용소로 포로를 데리러 간 적도 있었다. 말을 못 알아들어도 손짓을 해가며 포로들과 같이 일을 했다. 가끔 학도근로대로 일하러 오는 일본 여학생 누나가 고구마를 쪄서 가져올 때가 있었다. 이것을 조금 주면 포로들은 반드시 동료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가 일 년이 지나 덕종은 크러셔 돌리는 기술을 배웠다. 그랬더니 감독이 덕종에게 반장 완장을 채워주고 학도근로대 일하러 온 일본 학생들을 인솔하라고 했다. 덕종과 소년들은 일본 학생 열두 명을 인솔했다. 다들 덕종보다 큰 형들이었다. 어린애가 형들을 데리고 일을 한 것이다. 학생들은 아침마다 하얀 밥에 구운 생선이 들어 있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왔다. 참 맛있어 보였다.
어느 날, 일본 학생들이 수동 소년 다카야마를 폭행하는 일이 일어났다. 아침에 다카야마가 도구방에 도구를 가지러 갔는데 오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보니 일본 학생들이 다카야마를 조센징이라 욕하면서 때리고 있었다. 여러 놈에게 맞아 다카야마의 머리가 깨지고 피가 줄줄 흘렀다. 일본 학생들이 조선 소년들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나이도 많으니 맞을 수밖에 없었다.
덕종은 소리를 질렀지만 좀처럼 폭력이 멈추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쇠스랑을 집어 휘두르다가 다쳐서 새끼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렀다. 그때 갑자기 덕종은 상처가 난 새끼손가락 끝을 물어뜯었다. 잠시 후 노무계와 헌병대가 몰려오고 난리가 났다. 덕종과 다카야마는 처벌받지 않고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대여섯 명이나 되는 일본 학생들은 유치장에 갇혔다. 조선 소년들이 처벌 받지 않은 것은 덕종이 새끼손가락 끝을 스스로 물어뜯어 부상을 키운 덕분이었다. 새끼손가락 상처가 크지 않았다면 조선 소년들이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었다. 지금도 덕종의 새끼손가락 끝은 뭉그러진 상태이다. 어린 소년이 헌병에게 끌려가지 않으려는 절박한 마음에 스스로 새끼손가락 끝을 물어뜯어야 했던 시절. 참혹한 시절이었다.
공장이 있는 동네는 주변이 바다이고 기차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의 외진 곳이었다. 바다에는 군함만 잔뜩 있었고, 산에는 군인들이 버글버글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오는 쉬는 날에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산에 고구마 캐러 가거나 소 내장 사러 가는 정도였다. 몰래 고구마 캐다가 군인들에게 들켜서 매도 참 많이 맞았다. 그렇지만 고구마라도 캐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월급은 받았지만 저금이다 뭐다 해서 이것저것 다 떼이고 고향의 할머니에게 조금 보내고 나면 10원 정도밖에 없었다. 매달 월급날이 지나면 고향에 편지를 보내 할머니가 돈을 받았는지 확인했다. 이 돈이 없으면 할머니는 굶어죽을 판이었다. 다행히 공장에서는 떼먹지 않고 꼬박꼬박 송금해주었다. 남들은 월급을 타면 나가서 소 내장도 사먹고 그랬지만 덕종은 할머니 생각에 배가 고파도 고구마나 캐 먹고 어른들이 사온 소 내장이나 좀 얻어먹으며 견뎠다. 그렇게 모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쟁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하카타博多에서 배 기다리면서 다 썼다.
공장의 일본 사람들은 덕종이 크러셔 운전도 배우고 착실하게 일을 잘 한다고 좋아했다. 공장에 간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덕종은 공장 사람에게 얼굴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부탁했다. 고향에 계신 할머니가 아버지 소식을 간절히 기다린다고 사정했다.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사진 한 장뿐이었다. 공장 사람이 듣더니 “참 안됐다. 내가 한번 알아봐주마”하며 사진을 가져갔다. 그리고 5?6개월 만에 사무실에서 오라고 전화가 왔다. 감독의 허락을 받고 산기슭에 바라크 같이 지어놓은 사무실에 갔더니, 공장 사람이 저 사람에게 인사하라고 한다. 한 켠에 구렛나루가 까무스름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할아버지와 닮았다.
아! 그래서 아버지인가보다 싶어 인사하니 “네가 덕종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까, “내가 네 애비다”라고 한다. 덕종은 너무 가슴이 막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멍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버지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아들의 손을 잡았다. 서로 손 붙잡고 한 시간 가량을 같이 울었다. 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는데, 공장에서 헌병대에 연락해줘서 휴가 받아 왔다고 했다. 군부대에 있다 보니 여의치 않아 연락도 못하고 살았노라 했다.
공장 소장의 특별 휴가를 받아 일주일간 아버지와 보냈다. 그 일주일은 덕종이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아버지는 다시 전쟁터로 돌아갔다. 그때가 1944년, 전쟁 말기라서 전선은 위험한 시기였다. 이후 아버지에게서 딱 한번 편지가 온 후 소식은 끊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간 오키나와는 무지막지하게 폭탄을 퍼붓고 싸우는 곳이라고 했다. 아마도 살아나지 못했을 듯싶다.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공장에서 라디오로 천황의 목소리를 들었다. 방송이 끝난 후, 일본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덕종도 그대로 일하며 지내는데, 10월쯤 되니 밥이 달라졌다. 쌀도 조금 섞이고 보리도 섞이면서 콩깻묵은 줄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에서 조선 사람들을 하카타로 데려갔다. 배가 오면 연락해줄 테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거기에서 미군 헌병을 보았다. 미군은 항구로 들어오는 일본 사람들을 조사해 무기나 물건을 빼앗아 항구에 쌓아두었다.
항구에 있던 조선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덕종을 불러 친구들과 같이 물건을 지키고 심부름을 하라고 했다. 소년들은 심부름을 하며 밥을 얻어먹었다. 소년들은 항구에서 한참 동안 지내며 배를 기다렸다. 그 다음해 여름까지 항구에서 생활하다보니 가지고 온 돈은 다 떨어졌다. 회사에서는 저금했던 돈이나 퇴직금도 주지 않았고 숙소에서 재워주기만 했다.
1946년 7월, 배가 왔다고 연락이 왔다. 소년 셋이서 귤을 한 상자 사서 나눠 짊어지고 연락선을 탔다. 고향에 가는데 무슨 선물이라도 가지고 가야 할 것 같아 산 귤이었다. 별다른 짐은 없었다. 부산에 내려 기차를 타고 한밤중에 옥천에 왔다. 옥천역에 내린 소년 셋은 40리 산길을 걸어 고향에 도착했다. 밤 11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니 할머니가 계셨다. 몇 년 사이 몰라볼 정도로 백발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손자가 보내준 돈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일본에서 굶으며 견딘 보람이 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덕종은 다시 고향을 떠나 군대에 갔다. 비록 오른쪽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없고, 성인이라 해도 덩치는 초등학생 수준이지만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상이군인이 되었다. 덕종이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있다가 휴가를 받아 집으로 가보니 할머니는 쓸쓸히 돌아가신 후였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임종도 못하고, 장례도 치러드리지 못했다. 그 놈의 전쟁 때문이다. 일본의 전쟁이든 한국의 전쟁이든 전쟁은 덕종의 가슴에 한恨을 남겼다.
책 속에서

출판사 리뷰

징용, 징병 등 강제동원 피해는 어른들만의 고통이 아니었다

“어느 날, 일본에서 발표할 논문을 작성하려고 통계를 확인하다가 놀라서 한동안 먹먹한 적이 있었다. 위원회가 강제동원피해자로 판정한 218,639건 가운데 최저연령 사망자가 만 아홉 살 소녀였기 때문이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미쓰이三井광산㈜ 소속 신비바이新美唄광업소에서 일했다. 믿을 수 없었다. 실제로 아홉 살 소녀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당시에는 아동의 출생신고를 뒤늦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녀는 확인이 어려웠다.
그 다음으로 어린 사망자는 열한 살 소녀였다. 이번에는 호적 나이가 아니라 가족에게 확인한 실제 연령이었다. 1933년생으로 1945년 6월,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주) 부산공장에서 사망한 소녀. 기숙사 사감이 병원의 사망증명서를 근거로 사망신고를 했다. 열 살에 노무자가 된 소녀였다. 사망원인을 알아보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가족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아동의 강제동원은 한두 건이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았다. 열네 살 미만도 많았고, 열여덟 살 미만 미성년자는 엄청나게 많았다. 사연도 놀라웠다. 수족이 절단되고 눈이 먼 소녀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사망률은 너무 높았다. 너무 어렸기에 스스로 지키지 못한 목숨이었다. 전쟁에 동원된 어린이는 소녀들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한 탄광에서 사고로 사망한 소년은 고작 열네 살이었다. 일본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열두 살 소년은 헌병대에 끌려가지 않으려 고 스스로 제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목숨을 건진 것으로 만족하고 사는 어린이 경험자는 적지 않았다. 지금 세상에 살아남아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생존자는 모두 어린 시절에 동원되었던 이들이다.
다들 다행이라 한다. 엄혹한 시절을 견디고 살아났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러나 정말 다행일 수 있을까. 산 목숨이 죽은 목숨보다 행복하다고, 살아서 다행이라고 여길 여유도 없이 살았던 이들이다. 해방 후 이들에게는 엄혹했던 어린 시절보다 더 힘든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열두 살에 비행기 공장에 일하러 갔다는 이유로 평생을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정부에 피해사실을 신고한 후 가족들에게 알려져 낭패를 당한 할머니도 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남편은, ‘가증스럽게 평생을 속이고 살았다’며 일생을 함께 한 아내를 내쫓았다. 군위안부와 정신대, 근로보국대 같은 강제동원 노무피해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 탓이다. 공부를 하고 기술을 배울 시기에 공사장을 떠돌다보니 지금도 남의 집 일이나 하며 산다는 부안의 한 노인은, ‘TV에서 돈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죽여 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노동현장에서 겪은 무시무시한 성폭력 후유증으로 고통 받던 소녀에게 삶은 의미가 없었다. 소녀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1941년 근로보국대 동원 연령은 남녀 14세 이상, 1941년 노무조정령에서는 만 14세 이상, 1944년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규정에서도 만 14세 이상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낮아져서 1945년 4월 패전에 임박해서 마련한 국민근로동원령 시행규칙은 남녀 12세 이상으로 규정했다. 1944년 11월 여자정신근로령 규정은 12세 이상이지만 여성만 해당했다.
그렇다면 열 살 소녀는 일본이 만든 법 어디에 해당했을까.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법대로 했다면서 당국 스스로 법을 어긴 것이다. 물론 일본이 제정한 법을 지켰다고 해서 책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미성년 노동은 국제 기준을 어기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은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해 있었고, 1919년부터 1945년까지 ILO협약에 비준했다. 일본이 비준한 협약 가운데 ILO가 정한 미성년 노동 제한 규정은 1937년에도 15세 미만이었고, 이후에 노동제한 연령은 더욱 높아졌다.

2011년 5월, 일본 고베神戶에서 열린 ‘강제동원진상규명전국연구집회’에서 발표한 강제동원 사망자 현황 논문에 대해 일본 연구자들은 ‘놀라운 일’이라고 표현했다. ‘일본은 공장법이 있어서 어린애들은 동원하지 않았는데, 이런 사례는 처음 접한다.’고 했다. 그렇다. 일본은 공장법을 지킨 나라였다. 1802년 영국에서 제정해 여러 나라에 확산한 공장법은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 규제를 핵심내용으로 했다. 일본의 공장법은 1911년에 제정해 1916년에 시행했으나 조선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1923년 개정한 공장법에는 14세 미만 아동 노동금지조항이 들어 있었다.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 유소녀 동원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공장법을 지켰다던 일본 본토에서도 조선의 소녀들은 강제동원 현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모순이다.

이 책은 일본이 저지른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조선의 어린이가 동원된 전쟁이기도 했다는 점을 독자들과 나누려는 책이다. 그간 만났던 이들과 자료가 이 이야기의 기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