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1.해방전후.미군정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 (2024) - 한 개인의 역사에서 모두의 역사로

동방박사님 2024. 8. 27. 17:56
728x90

책소개

30년대생 외할아버지와 90년대생 역사학도 손자
손에 잡히는 ‘무명의 역사’를 엮어내다
‘구술사+사료비판’으로 역사의 틈새 메우기

반갑다. 진작 이런 현대사 책이 나왔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의 전시동원체제, 해방공간의 좌우대립, 한국전쟁과 ‘인공치하’ 같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흐름을 짚어내는 책도 가치 있지만, 그 틈새에서 이름 없는 민초들의 실제 삶을 보여주는 ‘피부에 와닿는’ 역사도 놓치기 아깝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전공하는 지은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축으로, 묵은 사료에서 뒤져낸 ‘역사’를 더해 흥미롭고 생생한 ‘구술사 이상의 역사’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개명改名은 선택사항이었다는 등 ‘창씨개명’의 본질을 보여주거나(45쪽), 해방 직후의 중학교 입시제도 변화(112쪽), ‘인공치하’ 전후 좌우익의 학살로 얼룩진 아비규환(165~167쪽), 하루 평균 수십 명씩 탈영했던 ‘쌍팔년도’ 군 생활(194쪽) 등이 탄탄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된다.

목차

들어가며

1부 아산 지주 집안의 왜정살이

1장 ‘천석꾼’ 내력
허침의 17대손│‘15년 전쟁’ 중에 나다│〈토지대장〉에 담긴 신운리 219번지│영인면 유지, 허벽│‘이와무라岩村’로 창씨, 나아가 개명까지│돈 쥐어 무마한 주조酒造 단속
2장 식민지 농촌 지주가 사는 방식
소작 주고 소작료 징수│흉년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지주의 세금, 지세와 소득세│머슴을 셋이나 부리다│농촌의 권력, 정미소 운영

2부 몰락 속의 해방 전후

1장 ‘황금광’ 열풍에 뛰어들다
장항행 기차에 실린 황금 덩어리│제2의 금광왕을 꿈꾸며│무리한 투자로 망한 수영금광
2장 태평양전쟁기 조선인 가정의 생활상
일자리 찾아 부평 공장지구로│황국신민을 기르는 초등학교│“B-29 떴다” 집집마다 방공호│일제 패망과 일본인, 그리고 조선인
3장 해방 직후 아산의 이모저모
아산 지역 권력 변천사│1945~1950년의 초등교육 경험│마침내 ‘독립’은 되었건만

3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1장 2주 만에 점령된 아산
전쟁 결심은 누가 먼저?│피란 없이 맞이한 인민군│동네 ‘빨갱이’들의 기승
2장 북한 당국의 점령 정책
‘안 나오면 죽는’ 회의│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들│미 공군에 굴 파기로 대응
3장 반동으로 찍힌 허홍무 일가
가차 없는 반동분자 숙청│대한청년단의 가족이란 ‘죄’│구명 위해 도망치다 부자 이별│생명줄이 된 인천상륙작전
4장 유혈이 낭자한 수복 광경
후퇴 앞둔 분주소원들의 포악질│치안 공백 속 아비규환│무차별적인 부역자 처벌

4부 1954~1959년 사이의 전후 풍경

1장 배움 찾아, 촌사람의 서울살이
최선의 선택, 운전 기술│병역기피자의 강제 입대
2장 ‘쌍팔년도’의 군 생활
논산훈련소에서의 16주│후방으로, 제2야전군사령부 제2경비대│텅 빈 거제도 포로수용소│육군 차량 재생창 생활│전력산업의 핵심, 영월화력발전소 경비│46개월 만의 제대
3장 그 시절의 연애와 결혼
문현선 철길 옆, 연탄집 아가씨│연탄 빼돌리기로 마음을 얻다│서면 로터리에서의 영화 구경│불발로 끝난 연애결혼의 꿈│청계천변에서의 데이트│1959년 봄의 ‘구식 혼례’

저자 소개 

저 : 이동해
한국외대에서 국제경영학, 사학을 전공했다. 동 대학 사학과 석사과정에서 한국 현대사를 공부했으며 현재 동 대학 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발표 논문으로 〈해방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노선 변화〉(2023), 〈해방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일운동〉(2024)이 있다. 무리에 앞장서 바다에 뛰어드는 ‘First Penguin’을 타투로 팔에 새길 만큼 역사를 활용한 새로운 도전을 추구하며, 연구에서는 여러...

책 속으로

허홍무가 태어나던 날 …… 《조선일보》 조간 1면엔 재무장에 나선 히틀러 독일에 맞서 프랑스, 소련의 ‘포위 진영 정비’가 외교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탐내면서 두 나라가 모두 속한 국제연맹이 혼란에 빠질 것이란 소식이 실렸다.
--- p.24

일본에서는 흔히 ‘15년 전쟁’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1931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종료된 1945년까지 지속된 전쟁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허홍무는 ‘15년 전쟁’ 한가운데에서 태어난 셈이다.
--- p.26

병합 이후 총독부 주도로 본격적인 토지조사사업에 돌입한다. ……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장장 8년에 이르는 대사업이었다. …… 이 사업으로 확정된 소유권은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 대한민국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룬다.
--- p.27

통감부는 1908년 ‘삼림법’을 제정하고 1910년 ‘임적林籍조사사업’을 실시한다. …… 이때 조사된 한반도의 임야는 총 1,584만 정보로, 그중 46퍼센트에 해당하는 726만 정보가 ‘관리기관이 없는 국유임야’로 파악된다. 통감부는 이를 둘로 구분했다. 첫째는 요존要存국유림 …… 둘째는 불요존不要存국유림으로, 직접 관리하기엔 여러모로 많은 비용이 발생하니 굳이 갖고 있을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고민 끝에 통감부는 불요존국유림을 민간에 판매할 계획을 세운다.
--- p.33

허벽이 소유권을 획득한 임야는 신운리 산58-1번지, ‘2정 9단 5무’ 8,850평이었다. …… ‘조림대부제도’는 “으레 일본인이나 대자본가들이라야만 허가를 얻을 것”이란 인식이 있던 만큼,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허환과 허벽의 경제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p.36

1920년 7월 부의 부협의회에 이어, 도에 도평의회가 면에 면협의회가 새롭게 설치됐다. ‘자문’ 역할에 불과했던 이 기관들은 1931년 큰 변화를 맞이한다. …… 의결권을 부과한 것이다. …… 하지만 …… 보통 면의 면협의회는 그대로 두었다. 단, 그동안 군수가 임명하던 면협의원을 이제는 선거로 뽑게 했다. ‘25세 이상의 남자’, ‘연간 5원 이상의 읍 · 면세’를 내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 커다란 금전적 혜택이 따르는 직책은 아니었다. 면협의원으로 활동하며 쓴 돈에 대해 비용 변상을 받는 게 다였다.
--- p.37

1943년부터 면협의회는 실상 추천제로 바뀐다. 면장을 중심으로 지방 유력자와 함께 ‘후보자추천회’를 만들고, “국체의 본의에 투철하고 식견이 높으며 봉공심이 두터운 참으로 대전 완수에 정신분 투할 유위한 인격자”를 추천하게 했다.
--- p.39

성을 바꾸라는 뜻의 개성改姓이 아니라, 씨를 새롭게 만들라는 뜻에서 창씨創氏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도 총독부는 호적에 ‘본관’과 ‘성’을 남겨두도록 했다. 다만 씨를 새로이 만들어 ‘씨+명’을 법률적 호칭으로 사용할 뿐이라고 홍보했다. 또한 창씨는 강제적이었지만 개명은 선택사항이었다. 심지어 1인당 50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재판소에 신청 이유를 제출해 허가를 받아야 개명이 이루어졌다. …… 엄밀히 따지면 개명은 선택사항이니 ‘창씨’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 p.45

창씨 신고는 일본 진무천황 즉위 2,600년 ‘기원절’에 맞춰, 1940년 2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신고 기간은 8월 10일까지 6개월이었다. …… 그전까지는 조선인이 일본풍 이름을 갖지 못하게 했다. ……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점점 전선이 확대되면서 …… 조선인의 협력이 절실해진 …… 일본은 조선인 스스로가 천황의 신민으로 여기도록 만들고자 했다.
--- p.45

신고율을 높여 성과를 내라는 공문이 각 기관에 하달됐고, 마을마다 관공서 직원이 돌아다니며 신고를 재촉했다. 그 결과 신고 종료일인 8월 10일엔 80.3퍼센트의 신고율을 달성한다.
--- p.46

식민지 당국이 강제로 싼 가격에 미곡을 매입하는 공출供出이 시행되는 한편,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 배급을 시행했다. 1943년의 ‘조선식량관리령’은 그 절정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허용되던 미곡 거래는 이제 아예 금지됐다. 오직 당국이 지정한 ‘조선식량영단朝鮮食糧營團’에 지정된 가격으로 넘기는 것만이 허용됐다. 시장가격보다 터무니없이 싼 값이었다.
--- p.51

짚으로 짜서 쌀을 담는 가마니, 가마. …… 이 말은 일본어 ‘가마스かます’에서 비롯됐다. 원래 조선에서는 홉(0.18리터), 되(1.8리터), 말(18리터), 섬 혹은 석(180리터)이란 단위를 사용했다. 그리고 짚으로 짠 ‘섬’에 곡식을 담아 숫자를 매겼다. …… 한 가마는 한 석의 절반에 해당한다.
--- p.64

1911년, 전라북도 장관이 농가 부업으로 가마니 생산을 장려하라는 유고諭告를 냈고, 옥구군 나포면에 승입제조조합이 설립된 사실도 확인된다. 승입繩?이란 가마니를 뜻하는 한자어다. 점점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가마니 사용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 p.66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에 돌입하자 이젠 더 많은 생산을 넘어 통제까지 하기에 이른다. 9월 총독부는 ‘조선산금령朝鮮産金令’을 제정한다. 금제품 제조에 까다로운 규제를 두는 한편, 금을 직접 매입해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 금을 집중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은행의 금은 최종적으로 일본 정부에 전달될 예정이었다.
--- p.76

나 여덟 살 때 아버지가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무기 공장에 취직을 해 가지고 사택을 지원해서 갔어. 당시 부평에 미쓰비시 공장이 있었어. …… 거기 근무하는 사람에 한해서 방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된 집을 빌려줬어.
--- p.84

내가 부평에 가서 국민학교 1학년에 들어갔잖아. 국민학교에는 선생도 일본 사람이었지. 한국 사람은 없었어. 2년 동안 다녔는데, 일본 사람들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시골 애들을 갖다가 일본 말로 가르치니까 뭘 알어? 이름도 다 갈아 버리고, 그런 바람에 그때 공부 별로였어. 그러고 선생이 종아리를 얼마나 패는지 말도 못했어. 뺨도 때렸지.
--- p.89

1941년엔 초등교육 이수 학생을 위한 황민화 종합 대책 ‘국민학교 규정’을 발표한다. …… “국체에 대한 신념을 견고히 하며 황국 신민임을 철저히 자각하는 일에 힘쓴다”고 명시돼 있었다. …… 심상소학교는 6년제 국민학교로 개편된다. 황국신민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을 담은 수신修身, 일본어, 일본 역사, 지리 과목을 핵심으로 가르치게 했으며, 국민학교 1학년 교사는 반드시 일본인 교사로 두어 철저히 일본어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 p.90

아침에 운동장에서 조회를 할 때는 〈황국신민서사〉를 외웠다. “①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②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③ 우리는 괴로움을 참고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하여[忍苦鍛鍊]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이걸 일본어로 외운 것이다. 조회를 마치면 군가에 맞춰 교실에 들어갔다.
--- p.91

1938년 5월 실제로 중국 항공기가 일본 영공에 출현하면서는 더욱 적극적인 대비에 나선다. …… 5~10호로 이뤄진 ‘가정방호조합’이 설립되기 시작했고, …… 1941년에는 전 조선인을 통제?동원하려고 만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조직, 10호 단위의 ‘애국반’에 방공 역할이 이전된다. 일개 가정 단위까지 방공에 투입할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 p.93

총독부는 방공 방법을 담은 전단, 팸플릿, 책자를 대거 배포하는 한편,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 내용을 연재했다. 지붕에 올라가 모래를 끼얹는 방화 연습이나 소이탄 투하에 따른 방화?구호?방독면 사용 훈련도 수시로 이뤄졌다. 가정에서는 물과 모래를 담은 통, 그것을 뿌릴 양동이, 소방 시 착용할 작업복 · 모자 · 장갑, 고사포 파편에 대비할 방석, 등화관제燈火管制(야간에 적에게 포착되지 않도록 빛을 숨기는 일)에 사용할 검은 보자기 같은 용구를 준비하도록 했다.
--- p.94

몸뻬는 원래 일본 동북 지방에서 입던 바지 형태의 작업복이다. 그런데 이 몸뻬가 1942년 일본 후생성에 의해 여성이 입는 표준적인 활동복으로 지정된다. 전시체제 속 기존의 여성복을 대신해 활동이 편한 복장이 필요해졌고, 후생성에서 현상공모를 통해 몸뻬가 채택된 것이다.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도 …… 몸뻬를 입지 않을 시 사회 활동의 제약을 두어, 조선 여성의 전시 복장은 몸뻬로 통일된다.
--- p.94

1944년 10월 말에 이르면 한반도에도 적기가 출현한다. 미국이 태평양전쟁의 승기를 잡은 가운데, 중국에서 발진한 미군 항공기가 조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찰 외에 실제 공습도 이뤄졌다. 일본 당국이 인천에 미군기의 공습이 있었다고 시인한 것만 해도 1945년 5월 8일, 7월 18일 두 차례다.
--- p.95

조선총독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8월 27일 종전사무처리본부 산하에 보호부를 설치하고, 점점 약해 가는 통제력을 보완하기 위해 재조일본인의 민간 연락 조직인 ‘세화회世話會’를 발족시켰다. …… 이렇게 미군 진주 전까지 빠져나간 일본인은 적게는 6만, 많게는 16만 명으로 추산된다.
--- p.97

모든 일본인 재산은 미군정이 관리하고 이를 사용하는 조선인에게는 사용료를 받았다. “귀속재산은 주택이 약 8만, 점포가 약 1만 3,000, 기타 건물과 소기업체 건물이 약 8,400~500이요, 대소 30여 종의 기업체 약 2,500 개와 광산권 기타 주식 또는 지분권을 합하여 8?15 장부 가액으로 1,630억여나 되는 실로 우리나라 국재國財의 8할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1949년의 기사…….
--- p.98

10월 10일, 이승만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전국 단위 조직,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아산지부 ‘독립촉성회 아산군협의회’가 꾸려진다. 이들은 군정 당국에 적극 협조하며 인민위원회의 해산을 촉구했다. …… 10월 19일, 직접 아산 군수를 임명해 아산의 행정을 장악한 미군정이었지만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무턱대고 인민위원회를 적대할 순 없었다.
--- p.104

미군정은 1945년 9월 17일 ‘일반명령 제4호’를 발표해 교육에 관한 조치를 내리면서 9월 24일, 공립국민학교가 개학했다. 동시에 일제시기 동안 시행된 4월 신학기제도는 미국식의 9월 신학기제로 바뀐다. 수업을 받는 기간은 9월부터 3월까지였고, 4~8월 사이는 방학이었다.
--- p.107

미군정은 전격적인 의무교육 계획을 발표하면서 6~12세의 아동들을 모두 등록하도록 했다. …… 1948년까지 …… 학생 수만 본다면 약 100만 명이 늘었다. 더불어 교원 부족 문제도 심각했다. 해방 당시 국민학교 교원 2만 2,000명 중 40퍼센트 정도가 일본인이었다. …… 미군정은 부랴부랴 정규 사범학교 외에 교사 임시 양성과정 운영에 나서는 한편, 2부제로 나누어 학년당 하루 3시간씩 수업을 듣게 하는 식으로 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 p.108

아마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이 땅에서 산 사람 중에서 〈적기가〉를 불러 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 ‘민중의 기旗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19세기 말 영국의 사회주의자가 독일 민요의 음에 가사를 붙여 〈더 레드 플래그The Red Flag〉라고 이름 붙인 게 시초다. 1920년대 일본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소개되었고 곧 조선으로 유입된다.
--- p.109

1946년에는 출신 학교장의 추천서 · 필답시험 · 구두시험 · 신체검사로 선발이 진행됐는데, 일제시기와의 차이라면 일본어와 산술이던 시험과목이 13개 모든 과목으로 확대된 점을 들 수 있다. 1947년에는 출신 학교장 추천서 무용론이 대두되어 폐지된다. 그리고 학교 자율로 출제하던 필답시험을 대신해 지능과 기억력을 테스트하는 데 초점을 맞춘 ‘지능고사’가 도입된다. …… 1948년엔 국민학교의 내신, 지능고사, 신체검사로 입시가 이뤄졌으며, …… 1949년에는 오직 각 중학교에서 실시하는 시험성적 만으로 입학이 결정됐다.
--- p.112

미?소군 철수 후 38도선 경계를 따라 진지 구축 작업을 벌였다. 그런데 38도선은 가상의 선이기에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긴 어려웠고, 이는 연대급 군대가 부딪치는 대규모 전투로 이어졌다. 특히 1949년 개성, 옹진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 p.121

허용 일가는 반동분자로 찍혀 숙청 대상에 오른다. 다른 숙청 대상자가 농기구에 맞아 죽는 걸 보며 허용, 허홍무 부자는 밤길을 달려 도망가야 했다. 허홍무는 어느 굴속에서 한 달 정도를 숨죽여 지냈다.
--- p.126

1950년 7월 14일에 발표된 ‘군 · 면 · 리(동)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에 관한 정령政令’에 따라 7월 15일에서 9월 13일 사이 리부터 군 단위까지의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실시됐고, 임시적 성격에서 벗어나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북한의 공식 행정기구로 출범한다.
--- p.139

“인민군이 쳐들어와서는, 동네 빨갱이들을 통해서 저녁마다 회의를 하는 거야. 그냥 아무 안건도 없이 ‘회의한다. 모여라. 안 오는 놈은 모두 때려죽인다.’ …… 그걸 매일 해. 안 나오는 사람은 반동분자로 찍히고. 오늘 할 일, 내일 할 일, 이런 거 얘기하고. 나도 회의에 참석했었어. 학생이고 뭐고 안 나오면 다 죽인다고 그래 가지고.
--- p.140

북한은 문화선전성을 중심으로 각종 의식화 사업을 실시했다. 각 인민위원회는 총회와 강습회를 열었고, 각종 산하 단체들은 주민을 가입시켜 교육에 나섰다. 북한체제의 우월성, 즉 토지개혁으로 빈부격차가 사라지고 노동자의 천국이 되었으며 남녀가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누린다는 점이 주된 내용이었다. …… 거의 매일 밤 이러한 사상 교육이 이뤄졌다.
--- p.141

1950년 7월 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화국 남반부 지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함에 관하여’라는 정령政令을 발표한다. 각 마을에서 고용 농민,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이 총회를 열어 5~9명의 ‘농촌위원회’ 위원을 선거하고, 위원들은 몰수한 토지의 분배안을 작성해 인민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분여를 실시한다는 방법이 명시되었다.
--- p.141

낙동강 전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해 보급 상황이 열악해지자 ‘애국미’, ‘감사의 쌀’, 성금 헌납을 요구했고, ‘현물세 조기 납부운동’을 벌였다. 이걸로도 부족하면 산하 청년단체를 동원해 가택수색에 나서 식량을 징발했다.
--- p.143

7월 1일 만 18~36세를 대상으로 동원령을 선포한 데 이어 ‘인민의용군조직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 실제 의용군 모집은 인민위원회나 분주소(파출소에 해당)에서 적령자를 조사하면 산하 단체들이 찾아다니거나, 인민위원회 회의 또는 마을 모임을 통해 이뤄졌다. …… 결국엔 할당량이 정해지며 물리력과 강제성이 동반됐다. 어쩔 수 없던 마을 주민들은 투표나 제비뽑기로 의용군에 나갈 사람을 결정하곤 했다.
--- p.144

“동네서 이 했던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찍어 가지고 그냥 죽였어, 저녁이면은. 낮에, 밝을 때는 안 했어. 저녁 때, 어둑어둑 해질 무렵에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곡괭이, 몽둥이, 대나무 창을 가지고 나타났어. 낮에는 회의도 하고 다른 일도 하다가 저녁에는 죽일 사람 명단을 가지고 순번을 정해서 하는 거야. 아버지는 명단에 있는 사람이었어.”
--- p.149

“빨갱이가 오기 전에 대한청년단이라고 있었어. 공산당이 쳐들어오기 전에 청년단이 앞장서서 공산당 잡으라고 만든 거였지. 당시에 청년단은 열 몇 살부터 서른 몇 살까지인가, 무조건 가입해야 했어, 의무로. …… 보통 20~30명 정도 됐는데 …… 그때 동네마다 다 구성되어 있었어.”
--- p.153

“아산군 인주면 면사무소 부면장이 있었는데, 우리 집안 할아버지였어. …… 그 첫째 아들이 경찰서장이고, 둘째 아들이 군인이었거든. …… 근데 동네 빨갱이가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놓고 이 부면장을 양쪽으로 팔을 잡어 매고 얼굴을 낫으로 깎았어. 참 참혹했어. 내가 그걸 직접 봤어.”
--- p.162

‘인공 치하’는 막을 내렸다. 그런데 국군, 유엔군, 경찰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건 후퇴 직전까지 우익 학살을 자행하는 좌익 인사, 인민군 패잔병이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가면 위험해질까 두려움만 생겨서” 함부로 나올 수 없었다. 이런 상태는 남한 경찰이 치안을 확보하는 10월 4일까지 계속됐다. 어떠한 통제도 없이, 죽이려는 자와 살려는 자가 뒤섞인 ‘아비규환’이었다,
--- p.165

“마을이 복구되면서 군인 아들, 서장 아들이 군부대랑 당진에서 차로 총을 가지고 와서 동네 빨갱이들을 끈으로 전부 엮어 가지고 방공호 판 데다가 쫙 세워 놓고서 몽땅 다 사살을 했어. 그러고서 그대로 묻어 버렸어. …… 옆동네가 홍씨 집성촌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붉을 홍 전부 빨갱이었어. 그때 다 죽어서 동네 전체에 혼자 사는 여자들이 많았어.”
--- p.167

1950년 9월 19일, 부역자 처벌에 관용주의를 적용한 ‘부역행위특별 처리법’과 대한청년단, 치안대 따위 민간단체의 사적私的 형刑 집행을 금지하는 ‘사형私刑금지법’이 통과됐다. 이승만 정부는 “현재 판결 결과에 있어 극형이 상당수에 달하는 것은 우선 죄상이 중한 것을 먼저 처리하는 관계로 인한 것일 뿐이고 행정권, 사법권을 침해하는 처사”라며 반대했으나……,
--- p.171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했던 걸까. 다시 1년 동안 먹을 쌀을 얻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시체가 나오는 논으로 들어갔다. 구역질을 참고 이를 악물며 벼 베기를 이어 갔다. 다시 ‘생활을 하려고 준비하는 단계’였다,
--- p.173

허홍무가 서울에 올라오기 몇 개월 전, 정부는 중대 결정을 내린다. 만19~28세인 징소집 연령을 위아래로 한 살씩 늘려 만18~29세로 만들었다. 전쟁 기간 막아 둔 군인 제대를 허용하면서, 전력 공백 우려에 징소집 대상자를 확대한 것이었다,
--- p.178

전쟁 중 병력으로 충원된 인원은 77만 명에 달했다. 전시에 입대한 병사들은 ‘병역법’에 의거, 복무 기간이 무기한 연장된 상태였다. 4년 넘게 장기 복무한 사람도 많았다. 제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열악한 급여, 복지를 버티다 못한 군인들이 탈영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결국 정부는 1954년 4월 1일부터 사병이 제대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 p.187

군 전체를 놓고 봤을 때 1950년 1,425명이던 탈영병은 1952년 1만 명대로 늘더니 이후 매년 1~3만 명씩 발생했다. 하루 평균 수십 명씩 탈영했다는 소리다. 마음의 준비 없이 길거리에서 갑자기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 부실한 식사, 구타가 만연한 군 복무 환경을 떠올려 보면 왜 이리 탈영병 숫자가 많았는지 짐작된다,
--- p.194

“처음 부대 배치는 밀양이었어. …… 밤나무 밑에 천막을 탁 쳐 놓고서. 이제 겨울이니까 내복이랑 방한복을 줬는데, 방한복이고 내복이고 양쪽 꼬맨 자리에 이가 새끼를 쳤어. …… 안감도 떨어지고, 형편없었어, 그때. 튼튼하지도 않았어. 내무반이 어떻게 생겼냐 하면은, 천막을 딱 치잖아, 그러면 가운데 통로를 두고 흙을 쌓고 통로 양쪽에서 자는데, 자는 데에 짚을 깔아 놨어. …… 토요일 날 오후쯤 되면 …… 양지 쪽에서 이 잡는 게 일이었어.”
--- p.197

허홍무는 말 그대로 제대 자체가 없었다. 전쟁 발발 시점부터 입대한 모든 장병은 ‘병역법’ 의 전시하 복무 기간 연장 조항에 의거, 복무 기간이 무한대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부상을 당했거나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 p.214

1958년 말이 되어서야 3년 이상의 장기 복무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p.217

1953년 6월 정부는 서울, 부산 등 주요 도시에 장작 반입을 금지하는 동시에 무연탄 사용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숲을 보호하고, 전후 복구를 위한 나무 자재 확보가 목적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연탄 수요가 크게 늘었고, 더불어 연탄 제조로 먹고사는 사람도 증가했다. 무연탄을 가루 내 반죽으로 만들고 틀에 찍기만 하면 됐으니 진입 장벽도 그리 높지 않았다,
--- p.220

민간인과 결탁해 1,000여 가마니의 군량미를 암거래하거나, 군용 종이, 군용 피복, 리놀륨 장판지, 타이어 같은 물자를 빼돌려 팔아치우는 건 예사였다. 한 공병 기지창 중대장이 군용 목재를 15개 화차貨車에 실어 옮긴 뒤 부산형무소에서 제재 작업을 거쳐 전국의 목재 상인에게 팔아넘긴 대담한 사건도 있었다,
--- p.223

극장주들은 …… 많게는 40퍼센트에 달하는 무료 입장자 때문에 …… 더 많은 관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세무 기관, 기자, 경찰, 헌병, 특무대와 같은 권력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 1955년 11월, 이승만 정부는 …… 12월 1일부터 무료 입장을 금지하며, 극장 내 혼잡을 막기 위해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지정좌석제’, 영화가 끝나면 관객을 모두 내보내고 다음 영화 상영 시 다시 채우는 ‘교대제’를 실시한다는 방침……,
--- p.225

아버지들끼리. 날짜 정해서 결혼식을 하자고 자꾸 서둘고. 부산에서 결혼하려고 나도 생각하고 집에 가면, 옆동네에 아가씨가 있으니까 결혼식을 해야 한다고 그러고. 부산에서는 상면 얘기도 나오고. …… 근데 제대하고 집에 가니까 날짜를 딱 정하자는 거야. 내가 어떻게 했겠어. 도망갔잖아,
--- p.227

청계천은 그리 쾌적한 데이트 공간이 아니었다. “인체의 배설물인 인분이 하루에 1천여 석이나 서울 시내의 길거리 및 포장 없는 하수도를 거쳐 시내 한복판인 청계천으로 흘러내리고 있다”거나, 청계천 양편에 자리 잡은 무허가 판자 점포 철거 문제로 당국과 시장 상인들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었다,
--- p.231

출판사 리뷰

‘구술사+사료비판’으로 역사의 틈새 메우기

반갑다. 진작 이런 현대사 책이 나왔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의 전시동원체제, 해방공간의 좌우대립, 한국전쟁과 ‘인공치하’ 같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흐름을 짚어내는 책도 가치 있지만, 그 틈새에서 이름 없는 민초들의 실제 삶을 보여주는 ‘피부에 와닿는’ 역사도 놓치기 아깝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전공하는 지은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축으로, 묵은 사료에서 뒤져낸 ‘역사’를 더해 흥미롭고 생생한 ‘구술사 이상의 역사’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개명改名은 선택사항이었다는 등 ‘창씨개명’의 본질을 보여주거나(45쪽), 해방 직후의 중학교 입시제도 변화(112쪽), ‘인공치하’ 전후 좌우익의 학살로 얼룩진 아비규환(165~167쪽), 하루 평균 수십 명씩 탈영했던 ‘쌍팔년도’ 군 생활(194쪽) 등이 탄탄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된다.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도 그득하다. 가마니가 일본의 ‘가마스’에서 전래되었다든가(64쪽), ‘몸뻬’가 조선 여성의 전시 복장으로 통일된 사연(94쪽), 영화관에 ‘지정좌석제’가 도입된 배경 등 역사 교과서에서 만날 수 없는 사실들이 그런 예다.

이처럼 새로운 형식의, 흥미롭고 귀한 역사책의 집필 의도와 서술방식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는 아래 저자와의 대화에서 담겨 있다.

- 왜 외할아버지의 삶에 주목했는지?

“일제시기-해방공간-한국전쟁-전후 시기에 걸쳐, 독립운동가 혹은 구국 영웅처럼 거대한 사명을 지닌 사람들 말고, 말 그대로 ‘태어났기에 살아가는’ 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이 책의 구술자 허홍무에게 특별한 사명감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가치관과 정치적 지향이 없던 건 아니었겠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력의 있고 없음의 차이일 뿐 늘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의 시각을 따라 그 삶을 조명함으로써, 독립운동 혹은 주요 정치가 또는 구국영웅으로 대변되는 시대상에 無名인 사람들의 삶 풍경을 추가해 보고 싶었습니다.”

- 무명인의 구술을 ‘역사화’하기 위한 노력이라면?

“개인의 구술이 지닌 한계를 어디까지 극복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개인의 구술, 특히 무명인의 구술은 신빙성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마을지, 총독부 관보 등 문헌부터 시작해 학교 생활기록부, 군대 거주표까지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려 노력했습니다. 개인의 구술에 대한 일종의 ‘사료비판’을 가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명인의 구술도 역사적 인물들만큼이나 자신에게 유리한 구술을 하기 때문에 꼭 검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마음만 먹는다면 근현대사 영역에서는 무명인의 구술이라도 어느 정도 검증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개인의 구술에 대한 ‘완벽한 극복’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특히 무명인의 구술을 두고 이 정도로 접근한 것은 분명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 집필하면서 특히 유의한 점은?

“기존의 구술생애사 서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구술생애사를 다룬 책들을 보면, 구술자의 구술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만약 여기에 추가 설명이 덧붙는다면 구술자가 해당 사건을 겪으며 느끼는 것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이렇게 된다면 그 책은 역사학적 성격은 다소 부족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존 서술 방식을 넘어서서, 역사학의 성격을 대거 부여한 서술에 도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① 맥락 찾기, ② 검증하기, ③ 특정하기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도입해 구술의 증명과 사실관계 분석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구술생애사의 서술 범위가 더욱 확대되리라 생각합니다.”

- 독자들에게 주는 또 다른 의의는?

“자기 가족의 이야기 혹은 뿌리가 궁금하나,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분께 하나의 참고할 만한 교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구술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어떤 자료를 참고해야 할지 대략적인 감을 익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책의 마지막에 그 방법에 대하여 살펴볼 만한 내용을 서술해 두었습니다. 더불어 가족의 구술을 듣다 보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이는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공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구술사라는 분야의 독특한 성질이 아닐까 싶은데, 이것 또한 독자들도 함께 느껴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