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 통감부,기관지 경성일보발간 / 1923 조선철도주식회사 설립 / 1923 일본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 1937 일제보통학교의 조선어 과목페지 / 1955 전국인구조사 실시 /1963 노동청 철도청 발족 / 1975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1981 서울 지하철공사 발족 / 1983, KAL007편 소련기에 피격 (탑승자 269면 전원사망) / 1986 외국산 담배 국내판매 개시 / 1989 과천 경매장 개장 / 1994 지하철 분당선 개통 / 1995 브라질과 범죄인 인도협정 - 투자보험협정체결
간토 대학살
간토 대학살(關東大虐殺) 혹은 관동 대학살은 1923년 일본 도쿄도 등을 포함한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간토 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과 군경에 의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벌어진 무차별적인 대량 학살 사건이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關東大地震朝鮮人虐殺事件) 또는 '1923년 조선인 대학살'이라고도 불린다. 희생자 수는 약 6,000명 혹은 6,6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추가 자료가 발굴되면서, 희생자가 약 2만 3,058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개요
간토 대진재 자경단의 폭력 사건
많은 전문가들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사건 자료의 부족 원인으로 일본 민간인들의 사실 은폐 여부와 더불어 일본 정부의 관련 여부와 충분한 결과를 제시하지 못하는 일본 정부의 조사 의지 등이 주요한 원인으로 언급되고있는 가운데 이러한 맥락이 매우 위험했던 일본의 상황뿐만 아니라 외국인에대한 관계 정립에서 올바른 미래로 나아가는데 안타까운 역사적 상황으로 여겨지고있다.
사건의 배경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사실확인도 없이 보도되었고, 보도 내용에 의해 더욱 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 여러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써 “조선인(또한 중국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거짓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인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 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 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에게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
관동대진재
이에 곳곳에서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심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이나 중국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이나 중국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이나 중국인, 타지역 출신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한국어에 없는 어두전탁 및 종종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 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15엔 50전)”(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이나 "大根(무)"(だいこん)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이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고신에쓰, 홋카이도 출신), 미국, 영국 등 서양 출신으로 도쿄에 온 기자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자경단이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였다. 외국인이나 타 지역 사람들이 도쿄에 가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경찰은 살인을 보고서도 방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자경단의 폭력
일본군이나 경찰의 주도로 간토 지방에서만 4,000여개나 되는 자경단이 조직되어 집단 폭행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요코하마 지역에서는 형무소에서 죄수들이 풀러나며 자경단의 활동이 가속화되었다. 이런 자경단의 집단행동으로 조선인 뿐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등의 사망자가 나왔다. 조선인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쉽볼렛을 말하게 시키거나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게 시켰으며, 한국어에는 어두에 탁음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이용해 행인에게 "15엔 50전"(일본어: 十五円五十銭 주고엔고주센), "가기구게고"(일본어: ガギグゲゴ 가기구게고[*])를 말하게 하여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조선인이라고 단정지으며 폭행하거나 살해하였다. "하얀 복장이라 조선인이다"라는 이유로 일본 해군 장교도 조선인으로 의심하기도 하였다. 또한 후다이촌 사건처럼 사투리를 말하는 지방 출신 일본인들도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 농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공격하여 도쿄농아학교 재학생의 절반 이상이 실종되었으며 졸업생 중 1명이 살해당했다. 9월 4일에는 사이타마현 혼조정(현 혼조시)에서 주민들이 조선인을 공격하여 살해하는 혼조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날 구마가야정(현 구마가야시), 9월 5일 메누마정에서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9월 5일에서 6일 사이에는 군마현 후지오카정(현 후지오카시)에서 후지오카 경찰서 내에 구금되어 있던 자갈회사가 고용한 재일조선인 17명이 경찰서 내로 난입한 자경단과 군중의 린치로 살해당한 후지오카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사건은 당시 사망진단서와 검시기록 자료에도 남아 있다.
이런 학살 와중에도 조선인 등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요코하마시의 쓰루미 경찰서장이었던 오카와 쓰네키치는 경찰 보호 하에 있는 조선인 300명을 보호하기 위해 1천여명의 군중과 대치하면서 "조선인들을 제군에게 넘겨줄 수 없다. 이 오카와부터 죽이고 나서 데려가라. 조선인을 넘겨주는 대신 목숨이 붙어있는 한 계속 싸우겠다"며 군중을 물리친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 "독을 탔다는 우물물을 가져와라. 그 우물물을 내가 직접 마셔서 보여주겠다."라고 하면서 1되짜리 병에 든 물을 다 마시기도 하였다. 오카와는 조선인들이 일하고 있던 공사업체 관계자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일본군 내 일부 인사들도 조선인을 보호하기도 했다. 당시 요코스카 진수부 장관이었던 노마구치 가네오의 부관이었던 구사카 류노스케(훗날 제1항공함대 참모장) 대위는 "조선인이 어선을 타고 대거 들이닥쳐 적기를 흔들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있다"라는 루머에 현혹되지 않고 해군육전대의 실탄 사용 신청이나 재향군인회의 무기 방출 요청 허가를 전부 내주지 않았다. 요코스카 진수부는 계엄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조선인 피난소"가 되었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낀 조선인들이 잇다라 이곳으로 대피하였다. 현재의 지바현 후나바시시 마루야마에 있었던 마루야마 취락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이전부터 같이 살고 있었던 조선인들을 자경단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하기도 하였다. 또 조선인을 고용했던 사이타마현의 한 마을 공장의 사장은 조선인들을 벽장에 숨겨 자경단으로부터 지키기도 하였다.
경관수첩을 가진 순사가 헌병에게 체포되었는데 우연히 그 자리에서 소꿉친구였던 해군장교에게 도움을 받아 풀러났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와세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주마 가오루(훗날 오사카 시장이 됨)는 숙모의 집에 문병하러 가던 도중 군중에게 둘러싸인 뒤 시토미사카 경찰서로 끌려가면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의" 폭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는 당시 간토 지역에서 잔학한 폭행이 매우 많았다고 말하고 있다.
10월 이후 폭주하는 자경단은 경찰에게 체포되었는데, 살인, 살인미수, 상해치사, 상해 등 4개 죄목으로 기소된 일본인은 362명에 달했다. 하지만 기소된 사람들 대부분이 "애국심"으로 일으킨 일이라고 대부분이 집행유예를 받았으며 몇몇 사람들도 매우 가벼운 형을 받았다. 후쿠다촌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황태자(후일의 쇼와 천황, 당시 섭정) 결혼으로 사면받았다. 간토 지역의 자경단들은 11월이 되어 전부 해체 명령을 받아 해체되었다.
일본 치안당국의 학살묵인
치안 당국은 루머상의 “조선인 폭동”이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만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하거나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그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가와와 아라카와의 두 강이 흘러 다니는 시체로 인해 피바다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줄여서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인 책임또는 도의적인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관련 사실
당시의 일본 당국은 지진 발생 얼마 전에 조선의 3.1운동과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낳은 대규모 봉기를 유혈 진압하면서 민중의 저항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지진 당시, 치안을 맡은 최고 책임자들은 주로 대만총독부에서 일하던 관료 및 군인 출신이었다. 또한 일본 본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인하여 노동운동,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지배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권리찾기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사회적 혼란 또는 일본제국의 위기으로 판단한 이들은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인 지진을 기화로 조선인을 희생양 삼아,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조선인 폭동설”을 날조하였다. 사건 이후, 일본 당국은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조선에서 다시 대규모 반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한동안 일본 내 조선인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또한 초기 발표를 하면서 조선인 사상자의 수는 불과 2~3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일본 정부는 사건을 숨기는데 급급하였다.
조선인 학살사건과 관련된 일본의 저명인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6살짜리 조카 다치바나 소이치,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이자 오스기의 아내인 이토 노에가 아마카스 마사히코 중위가 이끄는 군경에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구타당한뒤, 우물에 유기된 아마카스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간토 대지진후의 사회적 패닉상태를 일본 전국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인 학살사건도 이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는 대지진 후의 혼란기를 소년기에 직접체험하여,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과 자경단의 광기, 유언비어 등에 대하여 상세히 증언하는 유명인의 한 사람이다.
한편, 일본의 소설가이며,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자경단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일본 제국주의 정책과 전후의 사회 변화를 몸소 체험한 저자는 대지진 이상으로 조선인 학살을 커다란 문제로 여기고, 학살 자체만이 아니라 그 책임을 묻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이중의 범죄이자 수치를 덧칠하는 것이라 말한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사건은 그동안 감춰졌던 한일 근대의 역사상은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재구성해야 할 식민지기 역사를 드러내는 새로운 ‘문서사료관’의 기점이 될 것이다.
목차
옮긴이의 글
머리말: 일본인으로서 이 책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
1장 조선인 학살사건을 둘러싼 일본인의 정신 상태를 돌아보며
1.아시아 태평양전쟁 종전 전에 세워진 추도비와 묘비
2.아시아 태평양전쟁 종전 후에 세워진 추도비와 묘비
1) 조선인·일본인이 합동으로 또는 일본인 단독으로 건립한 추도비
2) 조선인·한국인이 독자적으로 건립한 추도비
3.맺음말
2장 재일조선인 운동의 발전과 일본 치안 당국의 인식과 대응
1.재일조선인 노동자 계급의 형성
2.재일조선인 운동의 발전과 이에 대한 일본 치안 당국의 인식과 대응
3.맺음말
3장 일본 국가와 조선인 학살사건
1.일본 국가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책임과 사후의 책임
2.일본 국가의 유언비어 유포 책임
3.일본 국가의 조선인 폭동 날조 및 자경단에의 전 학살 책임 전가
4장 민중 의식과 자경단
1.자경단의 성립
2.자경단의 사상
5장 일본 국가와 학살된 조선인을 둘러싼 추도·항의 운동
1.일본인의 항의와 반성이 반영된 추도 운동
2.재일조선인의 항의 추도회와 ‘일선 융화’ 추도회
3.맺음말
6장 학살된 조선인 수를 둘러싼 제반 조사의 검토
1.학살된 조선인 수에 대해 조선인이 실시한 두 가지 조사보고
2.일본 국가에 의한 조선인 유해 은폐 정책
3.조선인 학살 수에 대한 조사보고의 지역별 검토
1) 도쿄부 미나미카쓰시카군에서 학살된 조선인 수
2) 사이타마현에서 학살된 조선인 수
3) 가나가와현에서 학살된 조선인 수
4.맺음말
책 속으로
일본 국가는 학살 피해자의 유해를 찾으려 하기는커녕, 이를 극구 감추며 조선인에게 내어주지 않도록 조치했었다. 조선인들의 슬픔과 분노마저도 일본 국가의 노골적인 탄압에 의해 암흑에 묻혀버렸다. 그 묻혀진 조선인 유족들의 마음을 역사의 표면 위로 떠올려 드러내는 작업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추도인 것이다.
국가의 책임은 조선인 학살 책임에만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책임을 은폐한 사후의 책임 또한 중대하다. 전자를 제1의 국가 책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제2의 국가 책임이라고 해도 좋다.
본문에서 제2의 국가 책임으로 거론한 요점은 다음의 네 가지다.
첫째, 조선인 폭동을 만들어내고는 “소수 불령선인이 있었으므로 조선인 학살이 있었다 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허위 변명을 늘어놓으며 유언비어 유포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은폐해 온 점이다. 둘째, 조선인을 학살한 일부 자경단원을 형식적인 재판에 부치는 것으로써 법치 국가로서의 국가 책임을 다한 듯이 겉치레하며 얼버무린 점이다. 셋째, 군대와 경찰의 조선인 학살은 은폐했다. 넷째, 조선인들이 행하던 조선인 학살 수 조사를 방해하고,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해를 숨겨 이를 조선인에게 인도하지 않았다. 학살된 조선인 거의 대부분은 그 이름과 고향이 불분명하므로, 각각의 유족들에게 인도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거기에 유골을 송환시켜 매장하는 조치는 가능했었다. 일본 국가는 조선인 학살의 전모와, 그에 대한 자신의 학살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수반되었다고는 하더라도, 묘비와 추도비를 세워 학살당한 조선인을 추도해 온 것은 민중뿐이었고, 국가는 이 같은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민중 외에는 앞으로 희망을 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나는 일본의 민중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국가의 제1과 제2의 책임을 명백히 하고 이에 대해 추궁해 물을 것을 제기하고 싶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죄의식이 깊으면 깊을수록 쉽게 입에 담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민중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민중을 조선인 학살로 몰아간 한층 더 무거운 국가의 죄와 책임은 명백하게 밝힐 수 없게 된다. 즉, 민중이 국가에 의해 조선인 학살로 내몰려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 자신의 사상적 결함을 반성함과 동시에, 국가의 책임을 밝히고 고발하는 일이 일본 민중으로서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임인 것이다. 민중의 책임이란 이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둘 중 그 어느 것도 던져버릴 수 없다.
2002년 9월 17일의 조·일 평양선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책임에 대한 보상 요구를 포기하고 일본이 주장하는 경제 협력 방식을 받아들였다. 일본 측이 그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는 했지만, 일본이 한·일조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협력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집했던 이유는 그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가능한 한 애매하게 접어두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 책임을 제대로 인정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가 이로써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북한에 대해 일본인 납치 문제만 거론하고 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일본인은 윤리적 퇴폐의 늪에 빠져버릴 위험성이 있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의 고통이란 어찌한다 해도 없앨 수 없다. 그러나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사건에서 생명을 잃었던 피해자와 그 유족들, 또는 전시하 강제 연행되어 사망한 조선인과 그 육친들은, 그들이 어떤 사업장에서 어떤 식으로 사망했는지조차도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고 있다. 그러한 유족들의 마음을 살필 수 있는 인간적인 면을 일본인이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인간의 비극, 고통에 대한 공감, 그것을 국가가 앗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관동대지진에 있어 수많은 일본 민중이 일본 국가와 함께 조선인을 학살한 것은, 일본 민중 그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국가에게 빼앗겨버리고만 나머지 일본 국가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저항이 가진 인간적 의미를 전혀 헤아릴 수 없는 상태에 빠져, 공연히 이들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채의 역사를 딛고 일어서서 국가에 의해 막혀져 있는 그 경계를 넘어 타자와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현재 일본 민중에게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의심스런 애매한 ‘애국심 교육’은 이제 그만 사절하고 싶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640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하버드대학 램지어 교수의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론, 그 진상을 밝히다
하버드대학 존 마크 램지어 교수가 2019에 발표한 논문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경찰 민영화: 일본의 경찰, 조선인 학살 그리고 민간 경비 회사」란 제목의 논문은, ‘관동대지진’의 혼란에서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 자경단은 기능부전의 사회가 만들어낸 경찰 민영화의 한 사례라고 주장하며 이는 정당한 방위 행위였다고 강변한 것이다. 논문의 표지에는 ‘하버드’라는 큰 글자와 함께 케임브리지대학 출판국에서 책으로 펴낼 예정이란 문구를 넣어,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권위’를 두루 갖춘 모양새였다. 램지어 교수는 2000년에 “위안부는 계약에 의한 매춘부였다”는 내용의 논문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또한 일본 미쓰비시 그룹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는 일본 법률 연구자로서 2018년에는 일본 문화홍보에 이바지하여 일본 훈장 ‘욱일중수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이자 역사 전문 기자인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2021년에 이 논문을 접하고 램지어가 주장하는 ‘학살 부정론’을 검증하기에 나선다. 그 검증 방법은 램지어 교수가 논거로 제시한 신문 기사들이 작성된 배경과 그 실태를 낱낱이 살피는 것이다. 이는 40년 경력 기자의 전문 분야이기도 하다. 100년 전 당시의 신문 기사들이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 작성되었는지를 신문 기사 자료, 연구 보고서, 기자로서의 경험적 지식 등을 바탕으로 톺아본다. 그리하여 조선인 학살의 원인이 된 유언비어라는 ‘가짜 뉴스’, 신문 기사를 통해 유포된 ‘가짜 뉴스’, 그리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정부가 조작한 ‘가짜 뉴스’가 나오게 된 배경을 전하고, 학살의 실상과 그 원인에 대한 분석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 기억이 오늘날 일본 사회에 사라진 채 전해지지 않은 원인에 대한 냉철한 통찰도 담아내고 있다.
2023년 9월 1일은 관동대지진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 사회에는 여전히 “학살이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살해당한 조선인은 있었지만, 그들은 범죄자이기 때문에 일본인의 자위 행동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학살 부정론은 일본 국내에서 도쿄도지사가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내는 것을 취소하는 사태뿐 아니라 램지어 교수의 논문처럼 해외에까지 그 무대를 넓히고 있는 형국이다. 관동대지진의 진실이 잊혀가고 왜곡되는 상황에서, 이 책의 역자이자 역사학자인 이규수는 이렇게 말한다. “100년 전의 관동대지진을 기억하는 일은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피해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본 군대와 경찰, 자경단의 야만을 새삼스럽게 폭로하려는 의도도 아니다. 이른바 반일 감정에 바탕을 둔 과도한 민족주의에 동조하기 위한 것 또한 아니다. 한일 양국이 역사적 진실을 공유하고 부조리한 과거를 거울 삼아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역사학 본연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목차
머리말
제1장 램지어 교수의 논문 읽기
1. 치안이라는 정상재
2. 조선인 범죄의 검토
3. 전후 일본의 경비 산업
제2장 논거 자료를 확인하다
1. 범죄가 없었다는 자료
2. 램지어 교수의 논거 자료
제3장 논거가 된 신문 기사를 읽다
1. 조선인 폭도 보도
2. 우스이 고개의 폭탄 테러 계획
제4장 10월 20일 전후의 신문 기사
1. 조선인과 관련된 보도 해금
2. 시민의 반응
3. 정부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허위 보도
제5장 도쿄대학 신문연구소의 연구
1. 전후의 연구
2. 인용된 《가호쿠신보》 기사
제6장 학살은 왜 일어났을까?
1. 학살의 실상
2. 귀환병들의 경험
맺음말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부록 관동대지진 관련 사진 자료
찾아보기
책 속으로
--- p.63
철로를 따라 전국을 연결하는 국철 통신망을 통해 전언 게임처럼 전해진 정보였다. 그것을 《나고야신문》 기자가 나고야의 철도 관련 시설에서 입수해 기사화했다고 볼 수 있다. ‘열차에 폭탄’이라고 하니 그 사태는 심각했다. 호외를 발행하겠다는 판단도 당연했을 것이다. 이 기사가 보도한 범죄가 이후 수사에서 어떻게 밝혀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보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 그런 기사가 나오고 호외가 발행됐는지 그 윤곽이 드러나는 듯하다. 이렇게 살펴보면 이 기사의 해석에서도 램지어 교수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 p.107
조선인 학살은 공공연한 장소에서 자행되었고 많은 사람이 목격했으니, 일본이 법치국가인 이상 이를 전혀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군과 경찰이 관여한 사실도 많은 사람이 목격했지만, 자경단의 잘못으로 돌리며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움직임이 역력했다. 이에 대해, 자경단은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문점이 증폭되었다는 것을 우에스기의 발언이 드러내고 있다. 자경단은 경찰에 협조하거나 지시를 따랐을 뿐인데도, 경찰은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다.
--- p.123
군과 경찰의 관여가 드러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정부는 모든 책임을 자경단에 떠넘기려 했다. 하지만 우에스기 신키치 교수의 발언과 흑룡회의 활동이 보여주듯이, 여러 곳의 반발이 거세져 자경단에게 중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조선인 학살은 많은 사람이 공공연한 장소에서 목격한 사실이기 때문에 없던 일로 간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려면 ‘유언비어가 전한 조선인의 범죄는 실재한 것’으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이 모순된 상황을 다소나마 꿰맞추기 위해 ‘없던 일을 있었던 것’으로 하고,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조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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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동시에 1894년 시작된 동학농민군과의 싸움을 비롯해 1910년 한국병합을 전후하여 일본의 지배에 저항한 의병의 진압 작전으로 인해, 일본군은 만 단위 수의 조선인을 죽였다. 1919년에는 3·1운동을 진압하고, 이후에도 일본군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불령선인’과 ‘조선인 빨치산’을 상대로 싸웠다. 자경단의 중심이 된 재향군인 중에는 그런 조선 전선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지진의 혼란 속에서 자경단이 적으로 판단해 찾아 나선 것이 ‘불령선인’과 ‘조선인 빨치산’이었다. 이런 사실은 조선 전선과 학살의 깊은 연결 고리를 보여준다.
출판사 리뷰
램지어 교수는 논문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방화를 저지르고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유언비어를 사실인 것처럼 강조한다. 그는 “중요한 것은 학살 여부가 아니라 조선인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범죄를 저질렀고, 실제 자경단이 죽인 조선인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 그는 당시에 보도된 신문 기사들을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 와타나베는 램지어 교수 논문에 등장하는 신문 기사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그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주로 신문 기사가 오보임을 증명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오보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살피고 추적하는 것이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와 연결되는 통신 시설은 모두 끊긴 상황이었다. 신문 기자들은 긴박한 상황에서 본연의 임무를 다해, 하나의 기사라도 더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모았다. 그러한 기록은 와타나베가 제시한 여러 신문사의 사사(社史)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리의 피난민에게 들은 풍설이나 철도 통신망을 통해 얻은 정보, 그리고 군의 전문(電文) 등이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채 마구 호외로 발행된 것이었다. 그러한 ‘가짜 뉴스’는 시민들에게 유언비어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가짜 뉴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벌어진 조선인 학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저자 와타나베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려면 ‘유언비어가 실재한 것’으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이 모순된 상황을 다소나마 꿰맞추기 위해 ‘없던 일을 있었던 것’으로 하고,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조율했다. 정부는 거짓 발표를 한 것이다. 권력이 의도적으로 유포한 가짜 뉴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진 직후의 ‘유언비어를 보도한 오보’와는 다른 형태의 혼란이라 볼 수 있는, ‘정부의 발표를 보도한 오보’가 이렇게 방대하게 생겨난 것이다.”
학살은 왜 일어났는가?
조선인 학살은 공공연한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왜 이런 학살이 일어났을까? 일본인은 유언비어의 어떤 부분이 두려웠던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와타나베는 그 원인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우선 당시 ‘불령선인’이라 불리던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이다. 많은 신문이 조선인 범죄에 대해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보도했으며, 특히 《가호쿠신보》(9월 4일 자) 1면 칼럼에는 유언비어로 나도는 조선인 범죄에 대해 “그들의 평소 행동을 보면 있을 법한 일이다”라고까지 표현한다. 이에 대해 와타나베는 “사람들이 믿는 유언비어의 중심에 있던 것은 조선인이 집단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싸움을 걸어온다는 구도였다. ‘불령’이란 ‘불평을 품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식민지 조선인이 일본에 대해 불평을 품고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하나는 재향군인이란 귀환병들의 존재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과의 싸움을 비롯해 1910년 한국병합을 전후해 만 단위 수의 조선인을 죽였다. 이후에도 3.1운동과,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불령선인’과 ‘조선인 빨치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 조선 전선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재향군인이 되었고 자경단을 조직한 것이었다. 와타나베는 이렇게 말한다. “쌀 소동에 대한 반성으로 경찰이 자경단을 발족했을 때, 그 중심에 재향군인이 편입되어 들어갔다. 거기에 지진 재해가 발생해 유언비어가 흘러 들어갔다. 그 내용에는 조선 전선에서의 체험을 떠올리게 하는 현장감이 있었다. 어떻게든 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무기를 찾고, 망설임 없이 조선인을 죽인 게 아니었을까?”
※ 이 책의 부록에는 재일사학자 강덕상 선생의 유물을 관리하고 있는 [강덕상자료센터]에서 제공한 관동대지진 관련한 이미지가 상당수 실려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6244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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