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 안중근 의사 출생 / 1912 시인 노천명 출생 / 1919 강우규의사 조선총독에 포탄 / 1945 연합군최고 사령부, 미국. 소련 양군의 한반도 분할 정책 발표 / 1975 전국 중앙 학도 호국단 창설 / 1989 제30회 국제 기능 올림픽 페막. 한국 8연패 / 2000 비전향장기수 63명 북한으로 송환 / 2010 태풍 콘파스, 수도권. 강원을 관통하며 한반도를 강타.
안중근
안중근
신상정보
다른 이름 청계(淸溪) / 아명(兒名): 안응칠(安應七) / 일명(一名): 안다묵(安多默) / 출생 1879년 9월 2일 / 조선 황해도 해주부 / 사망 1910년 3월 26일(30세) / 일본 제국 만저우 지방 관동주 펑톈 성 / 료준 뤼순 감옥 / 성별 남성 / 본관 순흥(順興) / 직업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사상가, 저술가, 시인, 작가, 서예가 / 종교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 / 부모 부: 안태훈(安泰勳) / 모: 조마리아(趙瑪利亞) / 배우자 김아려 / 자녀 안현생(장녀), 안분도(장남), 안준생(차남)
친척
안정근(남동생) / 안공근(남동생) / 안명근(사촌 남동생) / 안경근(사촌 남동생) / 안우생(친조카) / 안미생(친조카) / 김인(친조카사위) / 안진생(친조카) / 안봉생(5촌 조카) / 안춘생(5촌 조카) / 김구(사돈) / 안창호(친족척)
활동 정보
관련 활동 독립운동
주요 활동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 활동 이념 민족주의, 범아시아주의
경력
대한의군(1907년~1909년) / 대한의군 참모중장 / 의병 참모중장 / 특파독립대장 / 아령지구사령관 /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중근
한글 표기: 안중근 / 한자 표기: 安重根 / 개정 로마자 표기: An Junggeun / 매큔-라이샤워 표기: An Chungkŭn / 예일 표기: An Cwungkun / 국제 음성 기호: [ɐndʑuŋɡɯn]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대한독립군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정치 사상가이다. 태명은 안응칠(安應七)이었으며 세례명은 토마스(음역어 도마, 사도 토마에서 따옴), 일명은 다묵(多默)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고려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몇몇 본래의 목적을 가지지 않은 동학군 부대들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이후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혀 일본 총영사관으로 옮겨졌고,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생애 /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瑪利亞)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진해 명예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안중근은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아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안억핍(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安廬)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이로써 안효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安起玉)에 이를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불확실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1845년에 순흥안씨 족보소가 간행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중근의 17대조 안려에게 진사, 후사 없음(進士無后)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년 안최량(安最良)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반해 1910년대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장조카로 강진현령을 지낸 안효충(安孝忠)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安順福)이 안려의 양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안중근의 15대조이자 해주 입향시조인 안효신의 존재는 1918년에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와 1936년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한 1800년대 중반과 후반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형인 안의(安毅)의 후손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년대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의의 후손으로 안효충 외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복, 안성복, 안준복 등이 새로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해주에 정착한 순흥안씨 참판공파 인사들의 낙향 직전의 세계와 해주 입향 이후부터 한말까지의 신분 문제는 불명확한 사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한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州吏)를 지내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거나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또한 심산 김창숙은 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에서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의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부친 안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國子生)이 되었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나간 이서(吏胥)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有豊), 안순풍(安順豊)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
또한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고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안인필(安仁弼)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기록에는 안인수의 아들 안태건(安泰健)은 고종(高宗) 28년(1891) 신묘(辛卯)년에 24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으로 등과됨을 알리고 있다.
초기 활동
안중근은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안중근은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다. 또한, 서당 공부를 빼먹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차분히 앉아있는 날이 드물자 할아버지는 원래 이름인 응칠 대신 '무거울 중'에 '뿌리 근'자를 써서 중근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안중근 자신은 《안응칠역사》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9년 동안 한문을 익혔으며,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
소년기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고 그와 함께 백성을 괴롭히는 동학 농민군이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고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출처 필요]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에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 데 참여했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입교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고,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Joseph Wilhelem, 한국명 홍석구(洪錫九))으로부터 토마스(도마, 다묵(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이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는 설명도 있지만, 안중근은 홍석구 신부와 함께 뮈텔 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한 후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안중근》(조정래 지음, 문학동네)에 의하면, 뮈텔 주교(한국이름 민주교)가 조선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문을 하면 머리가 깨일 것이고, 머리가 깨이면 천주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와 비판으로써 의문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서 실망한 안중근은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 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청인 난타 사건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일 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했다.
한청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했다.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重根은 明治三十七年(一九◯四) 봄 黃海道 載寧에서 淸國人과 爭鬪한 끝에 그가 携帶한 短銃으로 淸國人을 射殺하였으므로 淸國領事로부터 外部에 交涉하는 바가 되어 事件이 重大하게 되려고 하였으므로 重根은 上海로 逃走하고 父 泰勳은 그 사이에서 當時의 外部大臣 李夏榮에게 哀願하여 간신히 無事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는 조금 다르게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안중근이 경성에 가서 외무부에 청원서를 올렸고, 재판이 진남포 재판소에 회부되어서 서씨와 같이 재판을 받게 됐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이 재판에서는 서씨의 만행이 드러나고 안중근이 옳다는 판결이 났다. 이후 안중근은 어떤 청나라 사람의 소개로 서씨와 만나 서로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자기 집안의 전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독립운동가 서상돈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독립운동 투신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의병 활동
1907년(융희 1년) 황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13]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13])에 선출되었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처형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사격하였다.총알은 할로포인트를 사용하였으며,현재는 금지되어있는 총알이다.이외에도, 일곱 발의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에게 총격하였다.
총격 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 코레아 우라! ”
이라고 3번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만세라는 뜻이었다
총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가끔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기록에서는 죽기 직전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 누구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체포와 국내외 변호 모금 운동 그리고 사형 판결
을사조약 변호사 제도의 공포 문서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었고 1차 조사 이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
첫 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마지막 행적
2008년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사망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함.
1910년 2월 17일: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2세.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유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년 3월 25일자에는 '안씨 결고(安氏 訣告)'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도되었다. 거월십오일(2월 15일)에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씨가 여순감옥내에서 안중근씨를 면회 고별할 시에 안중근씨가 한국동포에게 결고(訣告)하는 사의(辭意)를 안병찬씨에게 설급(說及)하였는데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유지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하였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10년 3월 9~10일경, 어머니가 준비한 하얀 명주천으로 지은 수의를 가져온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 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 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은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사후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근처 죄수 공동묘지에 묻혔다. 일제는 안중근을 매장한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유해가 묻혀 있는곳을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당시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형인 안중근의 시신을 돌려달라 요구했지만 일본은 안중근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숙소에 있던 형제를 감금하고, 강제 귀국 시키는등 안중근의 시신을 못가져가게 하기위해 안달이였다. 왜냐하면 안중근의 묘지가 한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1945년 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1946년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 3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였고, 그 옆에 언젠가는 안치될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만들었다. 이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 선생은 1949년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였고 김구 선생도 이곳에 안장됐다. 가묘 앞에는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뤼순(旅順)감옥 북쪽 야산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를 묻었다는 일제 당시 간수들의 증언에 따라 정부는 2008년 1차 발굴 작업을 진행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안태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은 “당시 정부가 발굴 작업을 진행했던 곳은 일본인 공공묘지로, 태평양전쟁 직전에 일본인들이 유해를 파서 본국으로 가져갔다”며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3000여평의 땅을 파는 대대적인 사업을 진행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말했다.
안태근 회장은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에 유해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발굴을 벌였던 지점과는 반대 방향으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여m 떨어진 곳이다. 가장 오래된 죄인 묘역이다. “1943년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사람, 아버지와 함께 안 의사의 묘를 참배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모두 그곳을 안 의사 묘지로 지목해요. 묘지가 있는 뤼순에 가면 해당 주민들이 실제 그곳을 묘지로 알고 있기도 하고요. 1차 발굴지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인데, 1차 작업 때 거길 파지 않은 게 못내 아쉽습니다.” 현장에는 이미 아파트가 들어서 유해 발굴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2019년 12월 26일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만수길 25-121에 있는 장흥 해동사가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91호로 지정되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기리며 따르자는 취지로 2022년 전반기 신앙의 선조에 신자 안중근을 선정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대한 반응
일본의 반응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평가
긍정적 평가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 즉, 안중근을 한국 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안중근의 서예 작품 경천은 감정가가 6억원으로 감정이 되었는데[32] 카톨릭 서울대교구는 이 작품을 기증받았고 서대문 순교성지 교회사박물관에 전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안중근은 그의 저서 《동양 평화론》의 집필을 위해서 사형 집행을 한 달 늦추도록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다. 그래서 《동양 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그런 상황이었으나 뤼순 감옥에서 일하던 간수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을 존경하여 그의 사후에 그의 유품들을 간직하다 유족들에게 반환을 하였다.
안중근의 일본인 교도관 다카오 미조부치는 그를 동아시아의 의인이라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2005년 6월 21~24일,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35]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청산리 전투주역 김좌진은 안중근의 의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김경천은 자신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이는 안응칠씨라 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에게도 사람이 있구나!"라고 평가했다.
국제태권도연맹에서는 '중근'이라는 틀을 정하여 태권도의 기본 품세를 연습하도록 하고 있다.
부정적 평가
당대 천주교 신자 자격 미달
로마카톨릭 조선 대목구 교구장 뮈텔 대주교는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중근의 신자 자격을 박탈한다. 처형을 앞두고 안중근의 종부성사 요청을 거절하였으나, 프랑스 선교사 니콜라 빌렘이 종부성사를 집전하니 그에게 징계를 내린다.
교육보다는 투쟁을 중시
권태훈 (1900년) 예언
빌렘 신부의 안중근에게 베푼 성사는 안중근의 의거를 이해한 때문이 아니라 천주교 사제로서 신자에게 성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에 의한 행위였다는 견해가 있다. 이 판단의 근거로 빌렘 신부의 서한의 프랑스어 원문을 오역하였기에 가공해 낸 내용이었기 때문에, 빌렘 신부가 이토가 죽은 것이 잘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는 2010년의 서강대학교에서 연구 결과가 있다. 빌렘 신부가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안중근과 의견을 크게 달리하게 되어 투쟁보다는 교육을 중시하였다는 것이다.
서양에 관한 부정적 견해 소지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박광득 교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미완성으로 보존하기 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완성 작품으로 채워갈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하였다. 하지만 미완성인 동양평화론에서 안중근은 동서양의 문명적, 인종적 차이에 대한 선입견을 매우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고 하였다. 당연히 서양의 장점을 수용하여 동양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런데 문명적으로 개화를 통한 국가발전을 고려하는 거시안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 만큼, 서양에 대한 경험과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개화를 소유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은 서양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동양평화론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와 허점을 논하였다.
일본 국익에 반대편
일본 우익들은 안중근을 존경하는 지바 도시치를 비판하거나 위협을 하였다.
사상과 신념
동양평화론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라고 서술하였다.
서문의 설명처럼 안중근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내용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바라는 ‘동양평화(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반대로 ‘일본식 동양평화’를 주창하는 이토에게는 안중근은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다.
이러한 이토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일으켰고 이후 5개월간의 수감생활과 공판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미완성의 옥중 저서가 된 《동양 평화론》은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형장에서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
동양평화론에 대한 평가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시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사가 추구한 동양평화의 정신을 오늘 중국인도 배웠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선구적인 사상”이라며 “한국에서 안중근의 평화사상을 왜 국제화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들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최후진술하기 위하여 1910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법정 제5차 공판에서 당당히 밝힌 것도 동양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20세기 넘어 서구 유럽 등에서 구상한 평화보다 70년이 앞서는 사상이었다는 것이다.[출처 필요]
안중근이 지향하는 평화는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길을 찾았고, 이를 통해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이 침략적 속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과 모순을 이미 꿰뚫어보았기에 이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부정적 시각
안중근은 1894년 16세 나이로 동학 농민군 토벌에 나서 공을 세웠다. 그는 옥중에서 쓴 자서전에서 동학군을 "'동학당'(현 일진회의 뿌리이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구실로 군현을 횡행하면서 관리들을 살해하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었다(이때가 한국이 장차 위태롭게 된 기초로, 일본과 청나라와 러시아가 개전하게 된 원인을 만든 병균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어 동학농민혁명 봉기가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본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안중근의 부정적 시각은 생애 말년 옥중에서 쓰던 《동양평화론》 전감(前鑑)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나간 해(갑오년) 일청전쟁을 논하더라도 그때 조선의 좀도둑떼와 같은 동학당의 소요로 인해서 청일 양국이 군사를 움직여 건너와 무단으로 전쟁을 시작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안중근은 대한제국 멸망 원인에 대해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민영익을 비롯한 고위 층의 무책임한 처사, 일제의 강도짓 등을 거론한다. 그러면서도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조선 정부의 실정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동학군을 '좀도둑떼'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상당한 책임을 돌린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안중근은 조선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는 근왕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저서 및 유묵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저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시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쥐도적'이라 지칭했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유묵
이 부분의 본문은 안중근 의사 유묵입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연보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년~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
1908년: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1909년 영산전투 패배 후 만난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을 함
1909년 10월 26일: 거사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당시 재판관할권은 일본에 없었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사망.
세계(世系)
시조부터 본인까지의 세계
1세 자미(子美) → 2세 영유(永儒) → 3세 부(孚) → 4세 향(珦) → 5세 우기(于器) → 6세 목(牧) → 7세 원숭(元崇) → 8세 원(瑗) → 9세 종신(從信) → 10세 진(進) → 11세 윤(掄) → 12세 세량(世良) → 13세 려(慮) → 14세 순복(純福) → 15세 효신(孝信) → 16세 숙근(淑覲) → 17세 류(瑠) → 18세 삼춘(三春) → 19세 의길(義吉) → 20세 신정(信貞) → 21세 진망(震望) → 22세 익섬(益暹) → 23세 성택(聖宅) → 24세 광득(光得) → 25세 기옥(起玉) → 26세 지풍(知豊) → 27세 정록(定祿) → 28세 인규(仁奎) → 29세 태훈(泰勳) → 30세 중근(重根)
가족 관계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 1832~1893), 진해현감 역임
할머니: 제주 고씨(濟州 高氏)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1862~1905), 성균진사
어머니: 조마리아(趙性女 마리아, 1862~1927), 독립운동가,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여동생: 안성녀 루시아(安性女, 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매제 : 권승복(權承福), 독립운동가, 1920년 사망
조카 : 권헌(權憲)
남동생: 안정근(安定根, 1883~1949),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조카: 안원생(安原生, 1905~?), 독립운동가
조카: 안미생(安美生, 1914-2004)
조카: 안진생(安珍生. 1916~1988), 미얀마 대사 역임
남동생: 안공근(安恭根, 1885~1939),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조카: 안우생(安偶生,1907~1991)
조카: 안낙생(安樂生, 1913~?), 독립운동가
조카: 안연생(安蓮生, 1917~?)
조카: 안금생(安錦生)
조카: 안지생(安志生)
부인: 김아려(金亞麗, 1878~1946)
장녀: 안현생(安賢生, 1902~1959),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함.
사위: 황일청
외손녀: 황은주(1928 ~ 2021)
외손녀: 황은실(1931 ~ 2021 전)
장남: 안문생(安文生, 일명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7살 때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함.
차남: 안준생(安俊生, 1907~1951),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자부: 정옥녀(鄭玉女, 1905 ~ 1991)
손녀: 안선호(安善浩, 1930 ~2003)
손자: 안웅호(鄭雄浩, 1933 ~ 2013), 의학박사, 안중근의 유일한 손자다.
증손자: 토니안 주니어(안도용(安度勇)
증손녀: 리사 안
증손녀: 캐런 안(1973~ )
손녀: 안연호(安蓮浩, 1938~2011)
기타
거사 동지 우덕순, 일제 밀정 확인
2019년 KBS 탐사보도부가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던 밀정을 추적했다. 지난 8개월 동안의 추적이었다.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기밀문서, 헌정자료실에 보관된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 장의 문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취재진은 김좌진 장군의 참모 이정을 포함해 지금까지 모두 895명의 실명을 확인했다. 밀정 혐의자들이다. 8월 13일과 20일 방송되는 <밀정 2부작>(밤 10시, KBS1TV)에서 나눠 공개한다. 여기에 안중근의 거사 동지 우덕순이 밀정이었음이 드러났다.
1920년대 들어 우덕순은 이상 행적을 보인다. 취재진이 입수한 일본 기밀문서 등을 보면 우덕순은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민회' 주요 간부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당시 한국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 친일단체다. 정보 수집이 주요 역할이었다. 일반 한국인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를 면밀히 감시하고 정보를 끌어모았다. 취재진은 우덕순이 일제 정보기관인 '특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 등을 입수했다.
중국 지역 한국독립운동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조선인민회가 활용하는 밀정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 정보가 조선인민회장을 했던 우덕순에게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우덕순이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다. 우덕순도 현재 독립유공자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김구와의 인연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우덕순, 김구 등이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정근은 김구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안창호를 따랐지만, 안공근은 김구의 부하가 되어 한인애국단과 한국독립당특무대를 조직하는데 동참한다.
신자 자격 박탈과 자격 회복
안중근은 19세 때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천주교 영세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토마스(Thomas)이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먼저 영세를 받아 입교한 후, 그의 집안은 모두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안중근은 당시 조선교구장으로 사목 중이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주교와도 인연을 맺고, 성당 건축에 필요한 헌금을 봉헌하는 등 왕성한 신앙생활을 해왔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의 의거 이후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사형집행 직전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 행위로 단죄, 조선교구의 신부들로 하여금 안중근에게 성사를 배푸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니콜라 빌램 신부가 뮈텔 주교의 명을 어기고 뤼순 감옥으로 찾아가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해주었고, 안중근은 성사를 받고 사망했다. 뮈텔 주교는 주교에게 불순명했다는 이유로 빌렘 신부의 성사집행권을 정지시켰으나, 빌렘 신부가 교황청 교회법원에 이의를 제기해 성사집행권 정지는 해제되었다. 한편 천주교 신앙이 독실했던 안중근은, 자신의 아들인 안분도를 사제로 키우려고 계획했었다.
오랜 기간동안 한국 천주교에서 살인자로 단죄되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 안중근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평가가 변화하기 시작했고 1993년 8월, 탄신 미사를 집전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안 의사의 당시 행위는 살인이 아니라 독립운동이자 정당방위로 봐야 마땅하다" 라는 입장을 밝히며 한국 천주교에서 안중근의 평신도 신분은 완전히 복권되었다.
기념 사업
1958년 -“애국열사 안중근”은 북한에서 창작, 공연되었다.
1963년 -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으로 윤치영이 취임하였다.
1974년 - 안중근 기념 동상이 작가 김경승에 의해 제작되어 남산 구 조선신궁 자리에 설치되었는데 최성모 신동아그룹 창업주가 성금을[52] 희사하기도 했다.
1979년 -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북조선에서 개봉되었다. 감독은 엄길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이다.
1979년 - 명동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대미사가 집전되었다.
1986년 -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뤼순 감옥을 방문하여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요청하였다.
1987년 - 소설가 복거일이 하얼빈 의거의 실패와 그로 인한 일제강점기의 연장을 가정한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1990년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안중근 (도마) 의사 추모 자료집-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를 발간하였다.
1999년 -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공원 조성 제안을 부결하였다.
2000년 - 안중근 의사 유골 발굴위원회가 발족되었다.
2000년 - 하얼빈역에서 남한과 북조선의 공동 기념식이 열렸다.
2001년 - 오페라 “아시아의 횃불 안중근”이 독일에서 초연되었다.
2002년 - 오페라 “안중근 손가락”이 한국에서 공연되었다.
2월 1일 -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개봉하였다.
2002년 - 안중근 의사 국제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2003년 -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진의 퇴진과 개혁을 촉구하는 100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2004년 - 안중근의 삶을 그린 《도마 안중근》이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연출가는 서세원이며 개봉 당시 8.15 광복 59주년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30주년 기념 영화란 이름으로 홍보했으나 허술한 연출-장면들로 관객들한테 외면당해 흥행에 실패했고 안중근을 《영웅본색》의 주윤발 또는 서부영화에 나올 총잡이처럼 묘사한 역사왜곡물이란 지적이 있었는데 자문 역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더욱 종용해 혹독한 평가를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2004년 최악의 한국영화 불명예를 안았다.
2006년 - 가짜 안중근 휘호가 8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초로 2008년 건조된 한국 해군의 1800톤급인 손원일급 잠수함 대형 3번함의 이름이 안중근함으로 명명되었다.[58][59] 안중근 잠수함은 2008년 6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진수되었다. 안중근함 진수식에는 김태영 대한민국 합참의장과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등 군관계자와 현대중공업 임직원, 안중근 의사 숭모회 관계자 등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2009년 -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6월부터 국내 공연을 시작으로 11월까지 하얼빈, 일본 등지에서 최수종이 안중근 역을 맡은 연극 '대한국인 안중근'의 막이 올랐다.
9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 시에 세워졌다가 대한민국에 반입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대한민국 국회에 임시 전시됐다.
10월 9일~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1909년 10월의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최초로 국제 장기 기전인 제1회 세계인 장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10월 26일 -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 '영웅'이 초연되었다. (제작사: 에이콤 / 연출: 윤호진 / 공연장: LG아트센터)
2010년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안중근 의사 추모행사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3월 26일 - 이명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셔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 서울 서울광장에서 안중근 의사 사망 100주년 추념식이 정부 주관으로 열렸다.
7월 27일 배우 송일국이 1인 2역을 맡은 안중근의 삶과 처음으로 그의 아들 안준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나는 너다' (2010년 7월 27일 ~ 2010년 8월 22일)가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9월 30일 - 국방부와 조선일보가 안 의사 사망 100주년과 조선일보 창간 90주년을 맞아 공동으로 제정한 위국헌신상이 11명에게 처음 수여되었다.
9월 30일 - 러시아 정부가 안중근과 관련된 외교 문서를 대한민국 정부에 처음 전달하였다.
11월 19일 - 안중근의사 사망 100주년기념, 대한독립 운동가 42인 초상화 특별전 《대한독립전》이 남산의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서양화가 조영규)
12월 1일 - 안중근의사 사망 100주년기념, 대한독립 운동가 42인 초상화 특별전 《대한독립전》이 안양시 소재의 평촌아트홀에서 개최되었다. (서양화가 조영규)
12월 4일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 '영웅'이 1년 만에 다시 막이 오를 예정이다. (제작사: 에이콤 / 연출: 윤호진 / 공연장: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안중근 사형 이후의 축하연 기록을 찾아냈다.
2011년 -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주교)가 안중근을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 대상으로 거론하면서 안중근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실시하였다.
[Sources Wikipedia]
고결한 삶을 살다 간 ‘지나간 미래상’ 안중근
지난 2009년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토살한 하얼빈 의거 100주년이었다. 그리고 2010년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적 1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함으로써 한민족의 독립의지와 기상을 천하에 떨친 그의 행적이 그동안 너무 쉽게 간과되어온 탓이다. 안중근 의사가 안과 의사냐고 묻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안중근 의사와 안창호 의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부지기수인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다시 안중근일까.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뿐 아니라 세계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하얼빈 의거 말고도 국채보상운동, 교육사업, 의병전쟁 등 수많은 구국 운동에 참여했고,『동양평화론』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동양 평화에 대한 지론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의 ‘평화구도’와 공동체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그는 한?중?일이 공동으로 동양평화회의를 구성하고, 국제적 분쟁지인 여순을 중립화해 그곳에 동양평화회의 본부를 설치할 것과 3국 공동의 개발은행을 설립해 공동화폐를 발행하자고 제안했다.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기구를 100여 년 전에 구상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혜안은 21세기의 동아시아 정세에 그대로 대입해도 될 정도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안중근 의사를 ‘지나간 미래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 제1장 북두칠성 정기 안고 태어나다
망해가는 나라에 의열사 부르네
이토 히로부미, 고종황제 퇴위시켜
일본의 조선침략론 불타오르고
‘탈아론’의 첫 희생이 된 조선
7개의 흑점 있어 아명 응칠이라 지어
큰 인물, 아버지 안태훈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사
유복했던 어린 시절
글공부보다 상무기풍 키워
제2장 개화인물 안태훈과 상무소년 안중근
동학군에 맞서 담대한 용기 보여줘
40명 정병으로 1000여 동학군 물리쳐
‘갑오의려’의 개화적 시대인식
떡잎부터 남다른 ‘될성부른 나무’
안씨 가문에 밀려든 첫 번째 위기
백범 김구를 초청하다
안중근 가문과 김구의 인연
술마시고 노래하던 호방한 시절도
제3장 개화?천주교 수용을 통해 안중근 사상 형성
19세 때 영세 입교 후 천주교인으로 활동
좌절된 천주교대학 설립의 꿈
해서교안으로 탄압받아
의협심과 정의감으로 사회문제 해결
안태훈의 천주교 입교 시기 재론
제4장 민권?민족의식에 눈뜨고 구국운동 나서
러일전쟁 와중에 한국 침탈한 일제
망국위기에 계몽운동 나서다
아버지와 망명계획 세우고
상해 한국재산가들에게 실망하고
‘민족’의미 헤아린 민족주의자
국내 사명 깨닫고 귀국길에
돈의학교와 삼흥학교 세워
서북학회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제5장 구국의 꿈을 안고 고국 떠나 의병 창설
군대 해산 과정 목격
현대식 무기와 활?죽창의 대결
1907년 8월 1일 고국 떠나
간도에서 다시 러시아로
이범윤 등 만나 의병전쟁 설득 나서
의병참모중장으로 출전
제6장 의병전쟁 그리고 단지동맹
‘처변삼사’, 의병을 조직하고
의병 이끌고 국내 진입작전
사로잡은 왜군포로 석방이 화근 돼
만국공법 인식한 선각자
선혈로 맺은 ‘단지동맹’
제7장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협객 형가의 의거
거사자금 100원 빼앗다
“이토 처단은 내가 한다”
거사 동지 우덕순 등 만나
「장부가」 지어 의기 높이고
을사늑약 이래 희소식, 10월 26일
세 발의 탄환 이토를 토살하다
하늘을 향해 ‘대한만세’ 외쳐
이토 히로부미, 유언 없이 현장 즉사
제8장 교활한 검사에 맞서 당당히 진술
러시아 당국, 서둘러 일본에 재판권 넘겨
재판장소 놓고 일제 치밀한 계산
미조부치 검사와 치열한 ‘논쟁’ 벌여
“이토가 미쳐서 한국을 침략해 응징했다”
미조부치의 집요한 ‘회유’
“남의 나라 빼앗은 것을 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
제9장 일제, 안중근에 사형을 선고
잔혹한 조사 끝에 재판 회부
일제, 변호사 선임 거부하고 일본인 관선변호사로 대체
첫 공판정 인산인해 이뤄
“의병참모중장이 왜 일본판사의 심문 받나”
일왕 비판하자 비공개 재판
헐뜯고 비하로 일관된 검사 사형 논고
변호사의 황당한 변론
현하의 최후진술, 마침내 사형선고
사형선고 받고 미소 머금어
제10장 자서전과 『동양평화론』 등 집필
한국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여순감옥
여순감옥에서 『안응칠 역사』 저술
공소포기하고 『동양평화론』 집필
끝맺지 못한 논설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의 구체적 실천방안 제시
제11장 안중근 의거 찬양 시문
국내외에서 쏟아진 시문
송나라 문천상의 의기와 절필시
제12장 순국 전야, 죽을 준비 마치고
집요한 회유와 완강한 배척
총독부, 민완경찰 보내 회유
어머니의 간곡한 말씀
독립운동가 계봉우의 안중근 평가
홍 신부의 신심과 뮈텔주교의 배심
순국의 전야, 여섯 통의 유서 동생들에 전달
제13장 순국, 죽어 천년을 가오리다
순국의 날 온종일 비 내리고
북한 작가의 최후의 날 스케치
류동선의 최후의 날 증언
한국 연구가의 최후의 날 기록
통역 소노키의 ‘처형전후’ 공식 보고서
동생들의 뜻밖의 면회
형장의 마지막 순간
두 동생 만나 유서 여섯 통 전하고
국내외에서 추도회 열고 추도가 지어
청나라 원세개 등 만사 보내 조의
고결한 생애, 순결한 죽음
공화주의자인가 근왕주의자인가
제14장 문기 넘치는 휘호
옥중에서 쓴 수많은 휘호
일인 관리들도 휘호받기 원해
제15장 전기에 나타난 안중근 평가
안중근 전기 누가 썼는가
박은식이 평한 안중근
김택영이 평한 안중근
이건승이 평한 안중근
홍종표가 평한 안중근
계봉우가 평한 안중근
정육이 평한 안중근
오전기가 평한 안중근
안정근이 평한 안중근
황의돈이 평한 안중근
이강이 평한 안중근
채원배가 평한 안중근
양계초가 평한 안중근
제16장 안중근 의사의 유족 그 이후
유족, 의거 뒤 러시아로 이주
장남 분도의 사인 의문점 많아
안 의사 모친, 동포 경성운동 나서
안공근의 혁혁한 항일운동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운명적’ 관계
안 의사 유족의 시련과 비극
부록
이등감국 암살안건을 논함1
이등감국 암살안건을 논함2
이등감국 암살안건을 논함3
안중근 선생 추념가
대한국인 안중근 유묵
안중근이 비중 있게 거론한 인사들에 대한 인물평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554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안중근이 쏜 총소리에 놀라 달아난 이토의 수행원들
-안중근은 일본 환영객 군중 속에서 ‘뛰쳐나와’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이 아니었다!
-하얼빈 의거의 배후, 고종과 그의 비밀정보기관 제국익문사
-안중근이 고종에게 남긴 유묵 3점
-안중근 재판정 사진에서 발견한 량치차오
-하얼빈 저격 현장 영상, 세 가지 필름의 존재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가 20여 년간의 안중근 연구 성과를 『지식인 안중근』에 담았다. 안중근에 관해서, 그리고 그의 하얼빈 의거에 관해서는 다양한 논점이 존재하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1부에서는 하얼빈 의거 당시의 신문 기사와 1919년 발간된 『이토 공의 최후』를 중심으로 이 사건의 세부적인 사실 관계를 다시금 조명하고, 2부에서는 일본의 탐문 정보 자료에 의거하여 ‘하얼빈 의거의 배후 고종 황제’에 관해 다룬다. 3부는 안중근이 남긴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통해 그의 국민 의식과 평화 사상에 관하여 논하면서 칸트와 량치차오의 사상과 비교해 보고, 4부에서는 그동안 다각도로 추적해 온 ‘하얼빈 의거 현장 필름의 행방’에 관하여, 그리고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였던 다가와 고조의 ‘복명서’를 통해 알게 된 ‘안중근 관계 자료 전체’의 윤곽에 관하여 다룬다.
목차
감사의 말
책머리에
프롤로그 나의 안중근 연구 행로
1. ‘조약 강제의 역사’ 연구에 얽힌 안중근 연구
2.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적장을 처단했다”라는 외침을 읽고
3. 안중근, ‘의사’인가 ‘장군’인가?
4. 안중근·하얼빈학회 창설: 의거·순국 100주년 행사
5. 일본에 있는 1차 사료 조사와 입수 ― 새로운 연구의 시발
6. ‘근대 국민’ 최우등생 안중근 재발견
7. 국가 원수에게 보내는 하직 인사 유묵 3점
8. 저격 현장 촬영 필름과 공판 기록 원본 문서들의 행방
1부 영상과 신문 기사로 보는 사건의 전말
신문 기사로 보는 하얼빈 의거 현장
1. 이토 히로부미, 왜 하얼빈으로 갔나? ― 『하얼빈 웨스트니크』
2. 안중근이 쏜 총소리에 놀라 달아난 이토 수행원들 ― 『페테르부르크 신문』
3. 당황하여 오보를 연발한 일본 신문 ― 『모지 신보』
새로 찾은 『이토 공의 최후』가 밝힌 저격 현장의 진실
1. 새로 찾은 1919년 간행의 『이토 공의 최후』
2. 안중근은 일본 환영객 군중 속에서 나와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이 아니었다
2부 일본 탐문 정보가 말하는 사건의 배후: 고종 황제와 대한의군
안중근: 불의·불법을 쏜 ‘대한의군 참모중장’
1. 안중근 연구와 인식의 현황
2. “나는 적진의 포로이므로 만국공법을 적용하라!”
3-1. 안중근의 항일투쟁 경력
3-2. 대한의군은 국군인가?
4. 일본 정부의 사건 진상 은폐, 축소 처리
5.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 조」와 안중근의 시국관
6. 안중근 최후의 정체성 발견: 어질고 약한[仁弱] 나라에 태어난 죄
하얼빈 의거, 고종 황제의 지시라는 일본 측 정탐 보고
1. 새로운 자료를 찾아
2. 블라디보스토크에 출현한 고종 황제의 밀사
3. 하얼빈 의거의 기획 전말에 관한 탐문 보고와 제국익문사 요원 정재관
4. 고종 황제 고문 헐버트의 상하이행, 덕화은행 황제 예금 인출 임무
5. 국제 변호인단 구성과 좌절의 전말
6. 새 자료에 의한 하얼빈 의거의 새로운 정의
3부 안중근의 국민 의식과 평화 사상
국민 탄생의 역사와 안중근
1. 옥중 유묵의 ‘대한국인 안중근’ 표기의 의미는?
2. 고종 시대 국민 탄생의 역사
3. 1909년 3월 15일, 태황제 고종의 주권 이양 선언
4. 「안응칠 역사」와 안중근의 국민 의식
5. 광무제(고종)에게 남긴 유묵 3점에 담긴 국가 의식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재조명: 칸트 철학의 평화 사상과 만남
1. 「동양평화론」에 대한 문헌적 검토: 「청취서」를 중심으로
2. 「동양평화론」 연구의 두 가지 새로운 시각
3. 칸트 영구평화론 영향설의 검증
4. 3·1독립만세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이념의 기초
안중근과 량치차오: 근대 동아시아 두 개의 등불
1. 안중근에 대한 중국 지식인·지도자들의 칭송
2. 량치차오의 안중근 칭송시 2편
3. 뤼순 재판정 방청석의 량치차오 ― ‘시치조 기요미 컬렉션’의 사진
4. 안중근과 량치차오의 공유 사상 세계
4부 남겨진 과제 ― 저격 현장 필름과 공판 기록 찾기
하얼빈 의거 현장 촬영 필름의 행방
1. 하얼빈에 간 이토 히로부미를 담은 활동사진 촬영기
2. 100년 후 한국 미디어계 필름 추적의 노력과 성과
3. 이태진의 조사 현황(2014. 10. 14.~현재) ― 두 가지 필름
4. 제3의 필름의 존재
5. 잠정 결론: 세 가지 필름의 존재
뤼순 고등법원의 ‘안중근 공판 자료’에 관한 다가와 고조(田川孝三)의 보고서
1. 안중근 공판 관계 자료 정리의 필요성
2. 다가와 고조의 「복명서」에 보이는 ‘안중근 관계 자료’의 내용
3. 그 외 만주 일원의 사료
4. 뤼순 법원의 ‘안중근 관계 자료’ 전체를 찾는 날을 기다리며
이 책의 내용이 된 논문 목록
출판사 리뷰
저자가 그동안 ‘하얼빈 의거 현장 영상 필름’의 행방을 다각도로 추적한 결과에 따르면, 하얼빈역 행사 현장은 러시아 육군 소속 영화 촬영기사 코브초프에 의해 촬영되었고, 이 필름의 복사본 하나가 일본의 한 사업가에게 팔려 갔다. 매입자는 최소 30분 길이는 될 필름을 잘라 20초짜리로 편집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는 장면은 잘라 내고 안중근이 러시아 헌병에게 잡혀가는 장면은 남겼다. 이렇게 편집된 필름을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장에서 상영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일본에서도 소수의 제한된 사람들이 이토가 쓰러지는 장면이 나오는 필름을 볼 수 있었는데,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신문』 1911년 10월 24일 자 기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필름에는 혼란스러운 순간에 일어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필름을 소유한 행운아는 필름을 상영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상영 금지 조치가 내렸다. 이 필름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장면을 담고 있다. 희생정신을 발휘한 V. N. 코콥초프는 쓰러진 후작[이토 히로부미]을 부축하고 있는 반면에 코콥초프와 이토를 수행하던 인물들은 깜짝 놀라 가까운 곳으로 피신하고 있다. 그들은 정신이 나가 도망쳤으며, 어느 러시아 장군은 네 발로 기어가면서 겁먹은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
저자는 이 기사를 소개하면서, 안중근이 쏜 여섯 발의 총소리에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던 자들이 모두 놀라 정신없이 달아난 것이 현장의 실제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이 광경 때문에 일본은 필름의 상영을 금지시켰고, 필름도 숨겨 버렸다는 것이다. 이 외에, 저자는 이토 히로부미가 왜 하얼빈에 갔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하얼빈 웨스트니크』 기사, 그리고 사건 발생 직후 당황하여 오보를 연발한 일본 『모지 신보』의 기사들도 소개하는데, 이로써 우리는 ‘하얼빈 의거 현장’ 그리고 그 전후의 상황들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모습에 한 발 다가갈 수 있다.
안중근은 일본 환영객 군중 속에서 ‘뛰쳐나와’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이 아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10주기를 맞아 하얼빈 일본인 거류민단과 『하얼빈 니치니치 신문』이 나서서 진상규명 작업을 했고, 그 결과물로 『이토 공의 최후(伊藤公の最期)』(1919)가 발간되었다. 저자는 2014년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보관돼 있는 ‘시치조 기요미 컬렉션’에서 이 책을 찾아 냈다. 저자가 특히 주목한 것은 안중근이 어느 지점에서 이토를 저격했는지에 관한 것으로, 『이토 공의 최후』는 이에 관한 세밀한 정보를 제공한다.
저자는 이 책에 실려 있는 ‘이토 공 조난 현장도’와 ‘저격 현장 배치도’ 등을 분석한 결과, 안중근이 환영 나온 일본거류민단 인파 속에 섞여 자신을 위장하다가 뛰쳐나와 이토에 접근하여 저격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의장병 대열 뒤쪽에서, 6미터 정도 거리가 되는 대열 앞쪽에서 움직이는 이토 히로부미를 겨냥하여 가슴과 복부 부분에 세 발을 명중시키는 고도의 숙련 사격술로 적장을 처단하는 작전에 성공했”음을 밝혀 내고 있다.
일본의 탐문 보고가 말하는 ‘하얼빈 의거’의 배후
저자는 2008년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소장한 『이토 공작 만주 시찰 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 별책』 11책을 입수하여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2021)로 출간한 바 있는데, 이 자료는 하얼빈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안중근 의사 순국 이후까지 일본 정부 관계 기관 사이에 오간 보고문과 훈령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책의 네 번째 글 「하얼빈 의거, 고종 황제의 지시라는 일본 측 정탐 보고」는 저자가 이 자료에서 찾아낸, 이 사건에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보고 및 이에 근거한 일본 정부의 판단 자료에 관한 내용이다. 저자가 살펴본 주요 탐문 보고서는, 뤼순 감옥에 수감된 안중근을 러시아 법정으로 이관하는 것을 목표로, 만주와 연해주 등지의 한인들에게 나서도록 독려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출현한 고종 황제의 밀사에 대한 일본 측의 탐문 보고서, 그리고 1909년 12월 중순 이후 ‘하얼빈 사건’ 관련 예산 증액으로 한국인 밀정을 매수 투입하여, 강화된 정보력으로 생산된 저격 모의 주체에 관한 조사 보고서 등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고종 황제가 1902년에 발족시킨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의 요원이 샌프란시스코와 블라디보스토크 두 공간 지점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음을 새롭게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일본 측이 최종적으로 사건 기획의 중심으로 판단한 정재관이 제국익문사 소속 샌프란시스코 지역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란 점, 블라디보스토크에 나타난 황제의 밀사 송선춘과 조병한 또한 제국익문사 요원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 등은 이 사건의 기획 자체를 새롭게 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이 기관의 해외 요원으로 보이는 이들은 모두 고종 황제 정부의 관력(官歷)과 외국어 구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국제 관계에서 국가 장래의 출구를 찾던 고종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 제거 후에 닥칠지 모를 대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상하이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예치한 15만 엔을 인출하고자 했고, 이것이 황제에게는 주권 수호를 위한 최후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한성의 고종 황제 측이 사건 기획의 진원지’라는 일본 측 정보망의 판단은 이 사건의 본령으로 주목할 만한 새로운 정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안중근이 고종에게 남긴 유묵 3점
안중근은 옥중에서 56점가량의 유묵을 남겼다. 이들 대부분에는 남기고자 하는 문구가 가운데 적혀 있고 왼쪽 가장자리에 “庚戌 二月(또는 三月) 大韓國人 安重根 書” 즉 “경술 2월(또는 3월) 뤼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라고 적혀 있다. 이 밖에, 특별히 유묵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경우 오른쪽 가장자리 위쪽에 받는 사람을 표시하고, 끝에는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대한국인 안중근이 삼가 절함)”이라고 썼다. 이 두 가지의 다른 점은 “安重根 書(안중근이 쓰다)”와 “安重根 謹拜(안중근이 삼가 절함)”로, 글씨를 받는 특정인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저자는 유묵 3점, 즉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임적선진 위장의무(臨敵先進 爲將義務)〉(적을 만나 먼저 나아가는 것은 장수 된 자의 의무이다), 〈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불부정(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不負情)〉이 위 두 가지 부류와 다른 형식임을 발견하고는 새로이 주목한다. 이 세 유묵에는 “安重根 謹拜” 곧 “삼가 절함”이라는 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답을 세 번째 유묵 〈사군천리…〉에서 찾고 있다.
思君千里 천 리 밖의 임금을 걱정하며
望眼欲穿 (그쪽을) 바라보는 내 눈이 (허공을) 뚫으려 하네
以表寸誠 작은 충성 표하였으니
幸不負情 저의 충정을 저버리지 마소서
저자는 ‘천 리 밖에 있는 임금’을 ‘광무제 고종’으로 보았고, 이 내용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광무제에게 ‘적장을 처단하는 작은 충성을 표했으니 저의 충정(衷情)을 저버리지 마소서’라는 작별의 인사말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앞의 두 유묵은 ‘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군인의 본분을 다하였고’, ‘장수 된 자로서 적을 앞에 두고 먼저 나아가 적장을 처단했습니다’라고 국가 원수인 황제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안중근과 고종의 관계가 새로이 해석된다. 안중근은 고종의 지시로 결성된 대한의군의 지휘관으로서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몸이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부과된 최대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하늘나라인 ‘운재(雲齋)’ 또는 ‘천당(天堂)’(두 문구 모두 안중근이 남긴 유묵)으로 갈 날을 기다리면서 국가 원수인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 것이다.
안중근 재판정 사진에서 찾은 량치차오
「안중근과 량치차오: 근대 동아시아 두 개의 등불」에서는 안중근에 대한 량치차오의 칭송시 2편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짚어 보며, 안중근 재판정 사진에서 한 손으로 가볍게 턱을 고이고 앉아 있는 사람이 량치차오임을 발견하고, 량치차오의 뒷줄에 앉은 한국인 변호사가 안병찬, 량치차오와 함께 앞줄에 앉은 서양인이 영국인 변호사가 더글러스임을 소개한다.
이어서 안중근과 량치차오의 공유 사상을 소개하는데, 저자는 “안중근과 량치차오 두 사람은 동아시아 전통 유가(儒家)의 인본(人本) 사상을 지닌 상태에서 칸트의 개인 자유의지와 국가 주권,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영구평화론’에 접하여 크게 공감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안중근이 거짓 동양평화의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나 량치차오의 ‘민족 제국주의’ 곧 민족 국민국가들의 공존 체제에 대한 신념은 뿌리가 같은 사상 체계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량치차오는 자신이 가장 위험시하던 ‘거대한 제국주의의 외압’의 실체가 된 일본 제국을 응징하는 결단을 내린 안중근의 의연한 모습에 경탄과 존경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한다.
‘저격 현장 영상 필름’과 ‘공판 기록’ 찾기
저자는 ‘하얼빈 의거 현장 영상 필름’의 존재가 알려진 이래 지금까지 그 필름을 찾으려 했던 노력들을 이 책에서 총정리하는데, 결론적으로는 세 가지 필름의 존재를 상정한다.
첫 번째는 러시아 육군 소속 촬영기사 코브초프가 현장을 촬영한 필름이다. 특별열차가 하얼빈 철도 정거장으로 들어오는 장면에서부터 안중근이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 가는 장면까지 담은 필름으로, 이에 관해 『페테르부르크 신문』(1911. 10. 24.)에서는 총소리가 나자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는 가운데 수행하던 일본 고위 관리들이 모두 달아나는 정황을 전했고, 『도쿄 아사히 신문』(1910. 2. 1.)에서는 촬영기사가 러시아 육군 소속이라는 점을 밝혀 주었다. 이 필름은 사건 후 하얼빈에서 상영될 예정이었지만, 일본 당국의 요청이 있었던지 하얼빈 영화관에서 상영이 조기에 중단되었고, 일본인과 프랑스 기업인에게 매각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본 측이 상영 금지를 요구한 중요한 원인은 일본 고위 관리들이 놀라서 도주하는 장면 때문으로 보인다. 이토 국장 추도 기간에 일본 도쿄 료고쿠 국기관에서 상영된 것은 이 장면을 빼고 저들이 말하는 ‘흉한’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데 역점을 두어 편집한 것이었다.
둘 번째는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 제작사 ‘파테 형제’가 제작한 〈이토 공작의 장례식―1909〉란 이름의 필름이다. 『황성신문』(1910. 3. 29.)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영될 예정이었지만 곧 당국의 제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이 필름 서두에도 저격 장면이 담겼던 것이 확실하다. 프랑스 기업인이 하얼빈에서 사 간 필름의 저격 장면을 활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필름은 파리의 국립영화센터 소장 목록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2010년 신건물(미테랑 도서관) 준공으로 수장 기관의 이전 과정에서 생긴 비치 위치 정보의 혼란으로, 현재 수장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세 번째는 러시아 육군 소속 촬영기사 코브초프가 하얼빈 철도 정거장에서의 상황이 끝난 후에도 멈추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이 열차로 운구되는 장면에서부터 그 유해가 일본 요코스카항에 도착하여 운구를 마친 군함들이 예포를 발사하는 장면까지 촬영한 필름의 존재다. 비슈넵스키의 저서 『러시아 혁명 이전의 기록영화, 1907~1916』에 소개된 〈이토 공의 하얼빈 역사에서의 피살과 일본에서의 장례식〉(영화번호 420번)이 전하는 정보다. 비슈넵스키는 이 필름이 1909년 12월 22일 바쿠에서, 그리고 1910년 1월 6일 카잔에서 상영되었다고 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1010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안중근. 하얼빈에 역사를 묻다』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행적과 선양, 안중근 의사 친척 그리고 유해 부문을 다룬 서적이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조선 침탈이 가일층 본격화되는 시점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 권총으로 척살함으로써 약소국의 주권을 함부로 유린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주에 제동을 걸고, 그 죄상을 만천하에 알린 쾌거를 이루었다. 이에 다급해진 일제는 안중근 의사에게 정치범이 아닌 살인죄를 뒤집어씌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속전속결로 사형시킴으로써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또한 안 의사의 순국이 일제의 침탈에 맞서는 동아시아인들의 성지로 확산되는 것이 두려워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줘야 하는 현행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안 의사의 시신을 유기해 암매장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순국한 지 100년이 넘도록 조국의 품에 안기지도 못한 채 먼 타국의 차가운 지하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우리 역사에 있어 안중근 의사가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지를 하얼빈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이다.
목차
하얼빈에대한 소고
추천사
제1장 동방 모스크바
- 하얼빈 역사, 왜 하얼빈이라고 했을까?
- 얼음 도시 하얼빈, 빙등제와 빙설대세계
- 노래하자 하루빈, 춤추는 하루빈
- 러시아 조차지를 가다
·중앙대가
·다리에바, 거와스, 홍창
·러시아 식당
·하얼빈역과 성·이베론 성당
·성·소피아 성당
·과과리대가와 추림공사
·불가장원과 성·니콜라스 성당
·태양도
제2장 하얼빈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 하얼빈에서 한국 독립운동
-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 안중근 의사 동지, 독립운동가 정대호
- 하얼빈 독립운동가 후손들 집단 거주지 취원창 가는 길
- 독립운동가 정율성과 정율성기념관
제3장 안중근 의사 유적지를 가다
- 안중근 의사와 함께 가는 여행
·김성백의 집
·조린공원
·서 7도가-서 8도가
·도리조선족중심 소학교
·하얼빈역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
·화원 소학교
·채가구역
- 하얼빈에 남겨진 안중근 의사 친척들
- 안중근 오페라 악보가 있다
- [1박 2일] 촬영 체험기, 안중근 의사
젊은이들의 레전드가 되다
- 하얼빈과 나
- 일본 식민시기 지역을 가다
·동북열사기념관과 조선 출신 항일연군
·화원 소학교와 독립운동가
·731 부대 ㅡ 악마의 블랙박스가 열리다
제4장 안중근의 유언
- 평화주의자 안중근 유해 발굴의 당위성
- 안중근 의사 유해는 관동도독부 감옥소 묘지에 묻혔다
- 안중근 유해 위치 확인 및 발굴 방안
·사료및자료방면
- 철도, 안중근 의사 평화의 길
·하얼빈의거철도에서평화를 위해 쏘다
·남북철도, 평화를 위하여 달린다
제5장 하얼빈 아리랑
- 하얼빈 아리랑
- 한중 우의의 상징,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 하얼빈의 역사 인물, 안중근 연구가
서명훈 선생
- 독립정신의 현재적 계승, 김기영 선생
부록
- 안중근 의사 연보
- 안중근 의사하얼빈에서 11일
- 하얼빈 대사기
- 참고문헌
저자 소개
- 김월배
- 김이슬
출판사 리뷰
저자가 확보한 안중근 의사의 자료와 즉, 안중근 의사 하얼빈 행적과 선양, 안중근 의사 친척 그리고 유해 부문을 다룬 서적이다.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따라 유해발굴 자료는 물론 하얼빈 지역에 이주해서 살고 있었던 우리 민족들의 삶의 모습과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안중근의 행적은 물론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하얼빈 내 조선족 역사와 동포들의 이야기, 그리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책이라는 것이다.
안중근이 할동한 하얼빈은 조린공원, 안중근 의사의 유목인 정초당,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이 있으며, 저자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1일의 행적을 쫓아 기록한 것은 의미가 있다.
어느덧 광복 70주년이 넘었다.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피의 대가로 되찾은 광복이기에 한국인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벅찬 광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민족적 과제들이 많다. 아직 선열의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에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광복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고착화된 분단문제가 그러하고, 보상은커녕 사과 한마디 제대로 받지 못한 수많은 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물론이고 낯선 타국의 지하에 묻혀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을 수많은 선열들의 유해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특히 순국 110년이 되도록 유해조차 거두지 못한 안중근 의사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안중근. 하얼빈에 역사를 묻다』는 우리의 오랜 염원인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의 시급함과 의미를 우리 모두에게 새로이 인식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이토의 척살 현장과 그 11일간의 기록, 그의 독립의 의지가 묻어 있는 하얼빈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한 오페라 사료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올해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10주년 되는 해이며 다시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라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점점 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의 문화와 기술력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의 원류는 안중근 의사와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에 있기 때문이다.
하얼빈에는 수많은 역사가 있다. 특히 한민족의 역사가 곳곳에 즐비하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간 동포들의 역사, 하얼빈에서 태어난 동포들의 역사, 또한 하얼빈을 거쳐 간 동포들의 역사가 녹아 있다.
나는 하얼빈과 중국에서 보낸 기억과 역사의 현장을 모아 하얼빈 곳곳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동토의 땅 하얼빈에서 발로 뛰고 나의 두 다리가 기억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지금도 하얼빈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역사의 현장이며 이 글은 내가 15년간 중국에서 보낸 나의 기록이다.
누가 나에게 하얼빈이 어떠한 곳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얼빈이 제2의 고향 이라고 자신 있게 답한다. 하얼빈에는 나의 중년기가 녹아 있다. 나는 2005년 12월 하얼빈에 처음 갔다. 하얼빈은 정말 동토의 땅이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추위와 눈이었다. 그때 나 는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나는 당시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설립해야 했다. 2006년 1월 16일 오 후 15시 역사적 순간이었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국내가 아닌 하얼빈에 동상 컨 셉 제작, 설치 등 모든 순간들이 숨가쁘게 돌아갔다.
5미터가 넘는 안중근 의사 동상을 꼭두새벽 기중기를 동원해 번개처럼 세웠다. 실로 007 작전을 방불케 한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자랑스럽게 세워야 할 안중근 의사의 동상.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바로 그곳 하얼빈에 세우는 일인데도 모든 것이 녹록치 않았다.
긴박한 순간에 동상 제막 프로그램을 점검하였다. 방명록 점검, 시나리오 정 비, 축사, 내빈들의 동선 파악 등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내 차림새는 그야말로 막노동자의 차림이었다.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일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 해 그 와중에 중저가 옷가게로 뛰어가 저렴한 상의를 구입했다.
드디어 한국과 다롄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기리려는 손님들이 차량을 이용해 단체로 오셨다. 오후 세 시, 민족의 성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 (誅殺)한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세워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회를 보았다.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는지 가슴이, 심장 이, 온몸이 떨렸다.
이것이 나의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의 시작이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독립운동의 성지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고 안중근 의사를 사랑하는 행동가들에 의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 동상으로 부활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11일, 열하루 만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하얼빈에 계셨던 그 11일과 동일하게 불 과 11일 만에 숨 막히게 흥분하여 세웠던 안중근 의사 동상을 나는 3년 동안 지하에 모시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동상을 다시 하얼빈 광장에 다시 세우고 싶었지만 그 염원은 하얼빈에서는 다시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안중근 의사 동상이 경기 도 부천의 안중근 공원에 세워져 있다.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유언을 남기셨다.
“내가 죽거들랑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그러나 이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공원에 묻히면 바로 그곳이 대한독립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서 안중근 의사의 유언까지 묵살해 버렸다. 당시 하얼빈 일본 총 영사 가와카미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전문을 보내 안중근 의사 유해를 하얼빈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안중근 의사를 뤼순 감옥에 가둔 후 일제는 전 세 계인 앞에 자랑스럽게 공판 쇼를 벌이며 마치 일본이 최고의 법을 지키는 문명국인 양 선전을 해댔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이 만든 감옥법 74조를 어겼다. 일본의 감옥법 74조는 사형집행이 끝나면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안중근 의사 두 동생이 유해를 모시기 위해 뤼순에 갔지만 일본은 동생들에게 유해를 인도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감옥법을 어 기면서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는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일본이 감추고 있다. 광복 75주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우리는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 유해를 비밀리 매장한 원죄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많은 사람의 노고가 있었다. 특히 나의 가족이다. 나의 아내 김미애, 나의 사랑하는 아들 김종서 참으로 추운 하얼빈이었지만 가족 간 의 마음은 따듯했던 하얼빈에서 같이 살아온 수많은 시간들의 기록이다. 특히 하얼빈 이공대학 국제교류처 김기영 주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임 관장이신 강월화 관장, 침화 731부대 죄증 진열관 임화주임, 더욱이 하얼빈에서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하던 첼로 사진 예술원 김창 길 사장의 배려와 격려는 이역만리 하얼빈에서 힘든 시간을 지탱해 나갈 수 있 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하얼빈 빈현 검찰청에서 강직하게 살아오신 苑?彬님 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소중한 지면을 섬세하게 다듬어 주신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 문영숙 작가와 글의 품격을 높여 주신 박혜선 작가에게 지면을 빌어 다시금 감사함을 드린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 하얼빈의 여행자들은 더 깊은 하얼빈을 찾아 보시길 권한다. 중앙대가에서 송화강과 만나는 방홍기념탑에 새 겨진 조선족 여인, 동북 열사 기념관에 전시 소개된 경북 의성 출신 한국인, 서 울 구로구청에서 하얼빈에 세운 안중근 의사 동상은 처음 어디에 세웠으며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하얼빈에 가장 큰 한국기업으로 전임 대통령이 방문했던 기업은 어느 기업이며 지금은 어찌되었을까? 하얼빈에 현재 거주하는 로봇 공학 으로 중국에서 가장 저명한 동포 학자는 어느 분일까? 이에 대한 물음을 찾아 가는 하얼빈 여행길은 더욱 풍성하고 알차진다. 본 내용은 책에 일부러 수록하지 않았다. 여행자들이 관심을 갖고, 만나는 하얼빈 시민들과 질문을 통해서 찾아보길 바란다.
이 책이 하얼빈 여행을 하시는 분들을 위한 필독서가 되길 바란다. 또한 하얼 빈을 고향으로 둔 동포들에게 자긍심을 줄 수 있는 책이 된다면 좋겠다.
2020년 10월 26일 김월배
하얼빈에 대한 소고
하얼빈이라 하면 대부분 빙등제나 추운 겨울 혹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 거를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하얼빈에 오기 전까지 마찬가지였다. 약 10년 전 베이징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당시, 겨울 방학에 친구들이 하얼빈으로 빙등제를 보러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추위가 너무 싫었던 나는 절대 겨울에 하얼빈은 가지 않겠다고 하며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갔었다. 그런데 절대 가지 않겠다고 온몸으로 거부하던 하얼빈에서 현재 유학 생활을 하며 추운 겨울을 보내는 나 자신을 돌아보니 그 당시 뱉었던 말이 생각나 우습기도 하고 하얼빈과 인연이 있나 싶기도 하다.
하얼빈으로 박사 과정 공부를 하러 간다고 하니 떠나기 전,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할아버지께서 고향인 경북 의성에 살고 계셨는데 중학교 갈 때가 되자, 집안 어른들께서 하얼빈에 있는 친척 집으로 할아버지를 보내 중학 교 공부를 시키셨다는 것이다. 후에 할아버지께서는 방학을 맞아 하얼빈에서 고향으로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그 길로 계속 고 향으로 가시고 하얼빈이 아닌 고향에서 공부를 마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하얼빈역이나 중앙대가 등 을 걸을 때면 문득 할아버지께서도 이 길을 걸으셨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중국 경험이 오래되거나 많지 않다. 하지만 하얼빈 외의 다른 지역에서 도 살아 보기도 하고 여행으로 다닌 지역 역시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하얼 빈만큼 매력적인 도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얼빈에서 중국 동북의 문화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래된 도시답게 하얼빈만의 고유한 특색도 내뿜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한국과 많은 인연이 있는 도시로 한국 사람들이 관심을 가 질 수밖에 없는 곳인 것도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한의 독립과 동양평화 를 위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의 역사적 현장도 다름 아닌, 하얼 빈에 있다.
하얼빈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많은 중국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를 알고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하얼빈역 옆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방문한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들의 흔적도 남아있는 곳이다.
이렇듯 하얼빈은 한국 사람으로서,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제 역사의 현장을 발로 디디며 마음으로 느끼면서 동방의 모스크라 불리는 하얼빈의 문화와 매력에 흠뻑 빠져 볼 시간이다.
2020년 10월 26일 김이슬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77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안중근의사는 대한제국기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참담한 종말을 맞고 있을때 불타는 애국심으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민족의 영웅이시다.
2010년 새로히 건립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안의사의 단지동맹을 상징하는 12기둥 형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시실에는 안중근의사의 출생에서부터 순국에 이르기까지 전생애가 전시되어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402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안중근의사 일대기
안중근의사는 대한제국기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참담한 종말을 맞고 있을때 불타는 애국심으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민족의 영웅이시다.
한국 독립운동의 영원한 상징 안중근은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국외로 망명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 하였으며 , 1909년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민족과 인류의 구원 앞에 자신을 신화시켜 간 의사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문명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황해도 신천의 청계산골 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무술 연마에 힘을 기울이며 성장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동학군의 공격으로 부터 청계동을 지키는데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1897년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 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고에 입문하였다. 전도활동을 벌이던 무렵 그는 한국인의 지식 개발을 위해 "대학"설립을 계획 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끝날무렵 아버지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산동이나 상하이로 가족을 옮겨놓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을 바꿨다. 1906년 봄, 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통해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 강제퇴위, 군대해산 등으로 나라가 위기를 맞자 국외 망명을 단행하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각 마을 을 돌며 의병 모집을 위해 힘을 쏟아 의병부대를 창설 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병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속에서 1909년초 단지동맹을 맺고 의병재기의 의지를 다져 나갔다. 그러던중 이토오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찿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0월26일 의거를 결행하니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의거가 그것이다. 안중근의거는 이토 히로부미와의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한국독립,동양 평화를 위해 거행한 의거였다. 또한 안중근은 해외 망명이래, 연해주 일대에서 끊임없이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수 있었으니, 그것이 "동양 평화론"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으로, 인종주의에 매몰되거나 세계평화사상에 대치되는 것이 아니였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의롭게 동양평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안중근의사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인자 진정한 평화 주의자 였다
출생과 성장
안중근 의사는 구한말 나라가 열강의 침략으로 어지럽던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성녀(마리아) 사이에 3남1년 중 장남이었다.본관은 순흥 (順興)으로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40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하얼빈 의거계획
1909년 10월 이토오히로부미가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약침략 정책을 협상 하기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안중근은 이를 나라와 겨례의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유덕순, 우동하 등과 함께 하얼빈으로 향했다. 10월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신중하게 의거계획을 세웠다.
거사에 만전을 세우기 위해 채가구역은 우덕순과 조도순이 하얼빈역은 안중근이 맡아 의거하기로 하였다
23일밤, 안중근은 의거의 결의를 읊은 장부가를 짓고, 우덕순도 의거가를 짓고 이에 화답하였다.
24일에는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여 25일 채가구역에서 의거를 맡은 우덕순과 조도순이 남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역사를 뒤흔든 여섯발을 총성
단지동맹이후 블라디보스토와 엔치아를 오가며 몰두하던 안중근은 그해10월 중순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
으로부터 조선침략의 원횽 이토오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토가 제발로 만주에 오다니! 이것은 분명히 하늘이 준 기회 라고 여긴 안중근의사는 10월21일 의병동지 우덕순과함께 하얼빈을 떠난다.그곳에서 조도선 동지를 영입한 안중근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우덕순과 조도순을 채가구역에 대기토록 하고 자신은 홀로 하얼빈역에 와서 거사를 준비한다.
마침내 1909년 10월26일 오전9시경 이토가 탄 열차가 플랫홈에 멈추고 마중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지 20여분 후 이토와 수행원이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기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위장대를 사열하고 출영객들로 부터 인사를 받던 순간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안의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가슴과 흉복부에 3발을 맞은 이토가 무어라 몇마디 중얼거리며 쓰러지자 안의사는 혹시 다른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행 중 일본인으로 보이는 3명에게 다시 3발을 쏘았다. 이토를 뒤따르던 하얼빈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비서모리, 만주철도이사 이사다나카가가 차례로쓰러졌다. 이때가 오전 9시30분 저격후 러시아 헌병들이 덮처 넘어졌던 안의사는 곧징디시 일어나 "코레아우라" (대한민국만세) 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안중근의 총탄을 받은 이토는 수행의사 고야마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곧 절명한다.
이토의 죽음은 온 세계를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일본에서는 주요신문들이 호외를 발행하여 청청 병력과 같은 그의 죽음을 전했고 , 국내에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은 환호와 찬사를 보냈다.중국은 흡사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국냉의 일부 친일파들은 통감부를 방문하여 조문하고 사죄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
안의사는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하얼빈연 헌병분파소로 끌려가 간단한 조사를 받고 당일로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계된다. 거사가 이루어진 곳은 러시아 관할 구역 이었으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재외 조선인에 대한 재판 관할권은 일본에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뤼순옥중에서의 투쟁
안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 지하실에서 7박8일 동안 심문을 받은후 11월3일 별도로 잡혀온 우덕순, 조도순, 유동하 등 동지들과 함께 뤼순 형무소로 이송 되었다. 뤼순으로 온 뒤 안의사는 미조부치 검찰관으로 부터 본격적인 심문을 받는다. 이토를 살해한 이유를 묻는 검찰관의 질문에 안중근은
첫째 .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째 . 한국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넷째. 무고한 한구인을 학살한 죄요
다섯째. 정권르 강제로 빼앗은 죄요
여섯째. 철도, 광산, 산린.천택을 빼앗은 죄요
일곱째 . 제일은행 권 지페를 강제로 사용케한 죄요
여덟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아홉째. 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째.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죄요
열한째.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버린 죄요
열두째.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죄요
열세째. 현재 한국과 일본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 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열네째. 동양평화를 깨트린 죄요
열다섯째. 일본의 태황제를 죽인 죄 이다
라고 15개 항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심문하던 검찰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안의사에 대한 심문은 처음에는 비교적 온순한 분위기에서 이루어 졌던 것 같다. 안의사 자신도 자서전에서
"검찰관은 항시 나를 심문한 후 담배를 권하며 공정한 토론을 했고, 전옥 구리하라와 그밖의 일본 관리들도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어 고마웠다. 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심문이 거듭될수록 검찰관의 심문태도가 강압적으로 변해가자 안의사는 "일본이 비록 100만의 군사를 가졌고, 도 천만문의 대포를 가졌다 한들 이 안응칠의
목숨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무었이 더 있을 것인가?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것은 당연한 이치, 한번 죽으면 그만인 목숨인데 이미 죽기를 각오한 내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나는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 고 의연하게 검찰관을 꾸짖기도 하였다.
하얼빈 의거의 이유
나의(의거)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 이토히로부미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도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다.
소식을 듣고 고국에 달려온 정근과, 공근 두 동생이 한국인 변호사를 불러올 일을 논의하자 "한 번 죽기를 각오하고 나선 나다. 변호사보다 내게 성사를 배풀어줄 신부님이 더 간절하다.고 말하며 초연의 모습을 보였다. 1910년 2월7일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4명의 피고는 뤼순 관동도독부 법정에서 모두 다섯 차례의 공판을 받는다. 외국인과 많은신문기자등 300여명의 방청객이 빼곡히 들어찬 마지막 공판에서 안의사는 "내가 이토를 죽인것은 한국 독립전쟁ㅇ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고 의거의 성격을 당당히 밝힌다.
순국, 영웅의 최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사형이 선고 되었다. 일젱에 의해 처음부터 의도된, 국제법을 무시한 부당한 재판의 결과 였다. "사형" 이라는 선고를 받자, 안의사는 " 일본에서 사형이상의 형벌은 없느냐
?" 고 미소를 지었다 한다. 안의사는 상고를 할 수 있었음에도 공소권을 포기한다. 안중근의사는 의병장 다운 기품을 잃지않고 공소권을 포기 하는데는 아머니의 성원이 있었다. 면회를 가는 두 동생 편에"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라는 말을 전함으로써 모친보다 먼저 삶을 마감해야 하는 안의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사형이 확정된 이후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 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담은 많은 붓글씨를 써서 주변에 나누어 주었다. 공소를 포기하면 동양평화론을 집필한 시간을 주겠다던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3월26일 사형이 집행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의 유고로 남게 된다. 3월10일 조국에서 온 빌렘 신부로 부터 고해성서와 영성체 종부성사를 함으로서 종교인 으로써의 의식을 마친 안의사는 형 집행 하루 전인 3월25일 마지막으로 두 동생을 면회 하였다.
안의사는 모친, 처, 빌렘신부 등에게 보내는 여섯 통의 유서를 전달하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404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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