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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차마 잊을 수 없고, 잊혀서도 안 되는
100년 전 그날, 은폐된 ‘사냥’의 기억
민족의 비극, 이대로 무심히 흘려 보내서야
올해는 관동대학살이 벌어진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한 대지진 후 2주 남짓한 동안에 애꿎은 조선인 6,000여 명이 ‘사냥’ 당해 목숨을 잃었다. 한데 뜻밖에도 조용히 지나갔다. 외교 ‘정상화’ 흐름에 힘입어서였는지 한일 양국 정부는 침묵했고, 관련 언론보도나 특별한 추모행사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관동대학살을 다룬 신간도 불과 3종만 선보였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일한국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여러 모로 각별하다. 신문·소설 등 일본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관동대학살의 실상과 역사적 배경, 심리적 상흔 등을 입체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100년 전 그날, 은폐된 ‘사냥’의 기억
민족의 비극, 이대로 무심히 흘려 보내서야
올해는 관동대학살이 벌어진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한 대지진 후 2주 남짓한 동안에 애꿎은 조선인 6,000여 명이 ‘사냥’ 당해 목숨을 잃었다. 한데 뜻밖에도 조용히 지나갔다. 외교 ‘정상화’ 흐름에 힘입어서였는지 한일 양국 정부는 침묵했고, 관련 언론보도나 특별한 추모행사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관동대학살을 다룬 신간도 불과 3종만 선보였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일한국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여러 모로 각별하다. 신문·소설 등 일본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관동대학살의 실상과 역사적 배경, 심리적 상흔 등을 입체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목차
들어가며
1부 관동대지진 학살, 그날 그 자리
1. 되살아나는 유언비어
도착하지 않은 ‘추도사’│혐오 발언 ‘불령조선인’의 함정│작가 에마 슈의 기억
2. ‘관’에서 ‘민’으로 하달된 유언비어
현실이 된 ‘새롭고 무서운 재앙’│대지진 다음 날│아직 이루어진 적 없는 실태 조사│‘관’에서 ‘민’으로 전달된 유언비어│자경단 대표의 고백
3. “너 조선인이지?”-작가 쓰보이 시게지의 체험
유언비어는 ‘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쓰보이 시게지의 《십오 엔 오십 전》│도쿄를 탈출하는 사람들│“당신 조선인이지?”
4. 난바 다이스케가 본 조선인 노동자
조선인 노동자와 메이데이 대탄압│시나노강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계엄령이 가져온 것│“폭도 있음, 방방곡곡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
5. 유언비어를 확산한 신문
붙잡힌 조선인의 운명│군에 의한 살육│지방으로 확산된 유언비어│“주고 엔 고주 센”
6. 조선인 식별법 “십오 엔 오십 전”
조선인 식별법│발음으로 갈린 삶과 죽음│‘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선도주의’의 역수입│‘선도주의’의 좌절
7. 허위로 부풀려진 증오와 공포
허위로 과장된 ‘불령조선인’ 이미지│오해를 산 일본인│자경단이 사용한 식별법│3·1운동의 심리적 외상
8. 학살을 담당한 자경단의 원류
3·1운동과 자경단│‘제국재향군인회’의 발족│주객이 전도된 유언비어│가해자의 피해자 행세
9. 일본 문단의 작가들이 본 조선인 학살
진재문학│다야마 가타이의 무용담│시마자키 도손의 애매한 대답│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작가의 한계
10. 소설가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도발
환영으로서의 ‘불령선인’│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소설 〈불령선인〉│모두 일본이 짊어져야 할 죄
2부 관동대학살의 상흔
11. ‘불령선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저항운동과 간도 파병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불령선인’의 탄생│“불령선인은 테러리스트”│간도 파병에 의한 ‘학살’│학살은 테러리즘과의 전쟁
12. 박해를 두려워한 재일조선인들의 귀환
문학에서 지워진 조선인 학살│식민지의 동요│피해자의 ‘정신적 살해’
13. 학살 소식에 동요한 재조선일본인과 총독부
조선에 퍼진 유언비어│도쿄로 간 조선의 현지 조사단│조선의 통곡을 그린 나카지마 아쓰시의 〈순경이 있는 풍경〉│나카지마 아쓰시의 ‘조선’ 체험
14.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 반복되는 학살의 악몽
일본을 떠나도│공습과 원폭 투하 때에도│“기뻐하는 얼굴을 해서는 안 된다”
15. 도쿄 대공습 때 반복된 유언비어와 폭력
반복되는 폭력…‘오모토 사건’과 가해자의 외상│도쿄 대공습과 유언비어│패전 쇼크
16. 패전 쇼크로 재현된 유언과 잔혹 행위
패전의 충격│‘요리이寄居 사건’-전후에 재현된 잔혹 행위│“조선인 한둘은 죽여도 돼”
17. 재일동포의 번민을 그린 작가, 이양지
대지진이 일어나면 조선인은 또 학살될까│이양지의 〈제적등본〉│5년마다 전쟁을 치른 ‘제국’ 일본
18. 학살은 왜 일어났는가 1-“가해자의 죄책감” 결여
‘전쟁신경증’과 PTSD│“가해에 따른 죄책감” 결여│‘탈감작脫感作’과 ‘집단면책’│‘열등한 인종’을 응징하다
19. 학살은 왜 일어났는가 2-정상 참작된 자경단의 잔혹 행위
잔혹 행위의 ‘합리화와 수용’ 과정│하늘 아래 떳떳한 살인│“학살”이란 말은 금기어
20. 학살은 왜 일어났는가 3-가해자의 증언, 지금도 유포되는 유언비어
학살 작전 가담 군인의 증언│‘불령일본인’ 탓이라고 간파한 사령관│심판받지 않는 살인│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이들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거짓 없이 진실을 마주 보는 태도
참고문헌
찾아보기
1부 관동대지진 학살, 그날 그 자리
1. 되살아나는 유언비어
도착하지 않은 ‘추도사’│혐오 발언 ‘불령조선인’의 함정│작가 에마 슈의 기억
2. ‘관’에서 ‘민’으로 하달된 유언비어
현실이 된 ‘새롭고 무서운 재앙’│대지진 다음 날│아직 이루어진 적 없는 실태 조사│‘관’에서 ‘민’으로 전달된 유언비어│자경단 대표의 고백
3. “너 조선인이지?”-작가 쓰보이 시게지의 체험
유언비어는 ‘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쓰보이 시게지의 《십오 엔 오십 전》│도쿄를 탈출하는 사람들│“당신 조선인이지?”
4. 난바 다이스케가 본 조선인 노동자
조선인 노동자와 메이데이 대탄압│시나노강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계엄령이 가져온 것│“폭도 있음, 방방곡곡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
5. 유언비어를 확산한 신문
붙잡힌 조선인의 운명│군에 의한 살육│지방으로 확산된 유언비어│“주고 엔 고주 센”
6. 조선인 식별법 “십오 엔 오십 전”
조선인 식별법│발음으로 갈린 삶과 죽음│‘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선도주의’의 역수입│‘선도주의’의 좌절
7. 허위로 부풀려진 증오와 공포
허위로 과장된 ‘불령조선인’ 이미지│오해를 산 일본인│자경단이 사용한 식별법│3·1운동의 심리적 외상
8. 학살을 담당한 자경단의 원류
3·1운동과 자경단│‘제국재향군인회’의 발족│주객이 전도된 유언비어│가해자의 피해자 행세
9. 일본 문단의 작가들이 본 조선인 학살
진재문학│다야마 가타이의 무용담│시마자키 도손의 애매한 대답│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작가의 한계
10. 소설가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도발
환영으로서의 ‘불령선인’│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소설 〈불령선인〉│모두 일본이 짊어져야 할 죄
2부 관동대학살의 상흔
11. ‘불령선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저항운동과 간도 파병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불령선인’의 탄생│“불령선인은 테러리스트”│간도 파병에 의한 ‘학살’│학살은 테러리즘과의 전쟁
12. 박해를 두려워한 재일조선인들의 귀환
문학에서 지워진 조선인 학살│식민지의 동요│피해자의 ‘정신적 살해’
13. 학살 소식에 동요한 재조선일본인과 총독부
조선에 퍼진 유언비어│도쿄로 간 조선의 현지 조사단│조선의 통곡을 그린 나카지마 아쓰시의 〈순경이 있는 풍경〉│나카지마 아쓰시의 ‘조선’ 체험
14.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 반복되는 학살의 악몽
일본을 떠나도│공습과 원폭 투하 때에도│“기뻐하는 얼굴을 해서는 안 된다”
15. 도쿄 대공습 때 반복된 유언비어와 폭력
반복되는 폭력…‘오모토 사건’과 가해자의 외상│도쿄 대공습과 유언비어│패전 쇼크
16. 패전 쇼크로 재현된 유언과 잔혹 행위
패전의 충격│‘요리이寄居 사건’-전후에 재현된 잔혹 행위│“조선인 한둘은 죽여도 돼”
17. 재일동포의 번민을 그린 작가, 이양지
대지진이 일어나면 조선인은 또 학살될까│이양지의 〈제적등본〉│5년마다 전쟁을 치른 ‘제국’ 일본
18. 학살은 왜 일어났는가 1-“가해자의 죄책감” 결여
‘전쟁신경증’과 PTSD│“가해에 따른 죄책감” 결여│‘탈감작脫感作’과 ‘집단면책’│‘열등한 인종’을 응징하다
19. 학살은 왜 일어났는가 2-정상 참작된 자경단의 잔혹 행위
잔혹 행위의 ‘합리화와 수용’ 과정│하늘 아래 떳떳한 살인│“학살”이란 말은 금기어
20. 학살은 왜 일어났는가 3-가해자의 증언, 지금도 유포되는 유언비어
학살 작전 가담 군인의 증언│‘불령일본인’ 탓이라고 간파한 사령관│심판받지 않는 살인│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이들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거짓 없이 진실을 마주 보는 태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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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불령不逞(불량)”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으로 “불령조선인”은 “무법자이며 불순한 조선인”을 가리킨다. …… 이 ‘불령(조)선인’이라는 말이야말로, 혼란한 사회 틈새에서 거대한 살의가 되어 조선인을 덮친 것이었
--- p.19
내무성 경보국장은 각 부?현 지사 앞으로 “도쿄 부근에서 대지진 재해를 빌미로 조선인들이 각처에서 방화하고 불온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으며 “실제로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려 방화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엄격한 단속”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 p.42
요츠키 다리 아래 스미다구 쪽 강변에서 조선인을 10명씩 묶어 줄 세우고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서 죽였어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수레 선로 위에 눕힌 다음 석유를 뿌려서 태웠어요
--- p.49
나고야의 지역 신문인 《신아이치新愛知》에는 “우물과 농업 용수로에 독약을 타고 군중에게 폭탄을 던지며 각처에서 방화를 저지르는 불령조선인과 중국인이 맹렬히 날뛴다”, “불령조선인 1,000명과 요코하마에서 전투 개시, 보병 일개 소대의 전멸인가”, “발전소를 습격하는 조선인”, “지붕에서 지붕으로 조선인들이 방화하며 다닌다” 등의 기사가 실렸다
--- p.50
조선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탁음이 있는 단어를 말하도록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부톤(방석)’을 ‘사후톤’으로 발음해 그 자리에서 살해된 조선인도 있었다. 내가 기차 안에서 목격한 사건. 만약 ‘주고 엔 고주 센’처럼 탁음 많은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 노동자도 나쁜 일을 당했을 것이다
--- p.55
재조선일본인 자경단은 이 무장 집단인 재향군인회와 소방대를 중심으로 지역의 민간인이 참여해 조직되어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할 때 활용되었다. 이는 관동대지진 당시 ‘지진 자경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유사시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하도록 만든 폭력 장치의 일환으로 조직된 재향군인회가 지진 재해의 혼란 속에서 소방대 빛 민중과 연계하여 자위?자경이라는 틀을 넘어 발동한 것이다
--- p.69
보도 규제가 해제된 후에 내무성이 “유언비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인정했음에도 일반 국민에게는 널리 알리려 하지 않았다. 신문은 ‘학살은 불령조선인의 폭동’에 대한 자위적 행동이었다는 취지의 기사를 계속 내보냈다. 도쿄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 공개적으로 당국을 비난하거나 저항적 태도를 드러내는 문단 작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 p.81
일본에서는 가해와 학살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인들이 관부연락선을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통해 학살 사건이 조선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한 총독부는 부산에 ‘구호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수용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귀환한 조선인들을 그곳에 밀어넣었다. 수용소 내에서는 학살 사건에 대한 입막음을 엄격히 시행했다
--- p.101
총독부 경무과장이었던 마루야마 쓰루키치의 회고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수돗물에 독약을 뿌렸다든지, 무장봉기를 몰래 계획하고 있다든지 하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고 …… 부산에서조차 일본도를 들고 수원지를 경호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 p.104
대지진 직후인 9월 2일 《동아일보》 이상협 편집국장이 재일거류민의 가족 400명으로부터 안부를 확인해 줄 것을 의뢰받아 일본으로 향했다. …… 이상협은 지진으로 ‘압사’ 혹은 화재로 사망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조선인 “대다수는 살해당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며 “사태의 진상을 진실하게 공표하고” 아울러 “폭력 행위에 가담한 자를 적절히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 p.108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것처럼, 원폭이 투하된 혼란한 상황에서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의심을 샀다. “개에게 줄 약은 있어도 너희 조선인들에게 줄 약은 없다”며 치료를 거부당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부연 설명했다
--- p.115
제대군인이 대거 포진된 상인집단 ‘마스야 일가’가 김창근, 김성태 조선인 두 사람을 참수하고 또 한 사람을 상해한 “요리이 사건”의 내용은 처참하다. 이 사건은 1947년 7월, 사이타마현 요리이 경찰서의 관내 하나조노무라에서 일어났다
--- p.128
대지진 발생 4일 후, 피해가 두려워 경찰서에서 보호받고 있던 28세 조선인 엿장수 구학영을, 인근 마을인 요도무라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유치장을 습격해 그를 마구 난도질해, 경찰서 현관으로 끌고 나가 숨통을 끊어버렸다. 후세 다쓰지는 요리이 사건 변론문에서 이 두 사건의 공통점으로 “조선인 한두 명은 죽여도 좋다”는,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 이후의 “민족적 차별과 멸시의 관념”이 깔려있다고 보았다
--- p.129
관동대지진은 전쟁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령선인의 습격’이라는 소문은 시가지의 야전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자경단의 지휘를 맡은 재향군인회 소속 회원은 앞서 군대 생활을 통해 ‘탈감작’ 상태였고 그 아래 지시를 따른 이들은 ‘명령’에 따라 살해를 감행하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집단면책’ 또한 작용했다
--- p.142
“선생님, 조선인은 어떤가요? 전 오늘까지 여섯 명을 죽였는데요.” “저 녀석, 굉장한데.” “아무래도 자기 몸을 지키려면 그래야죠, 하늘 아래 떳떳한 살인이다 보니 호쾌하게 잘도 하네.”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결성된 자경단의 팀워크에 의한 행동은, 개별 구성원의 ‘살인에 대한 불안’을 경감해, ‘살해’에 대해 “떳떳한 살인”이라고 할 정도의 ‘고양감’을 선사했다
--- p.147
지진 재해 1년 후인 1924년 9월 13일, 조선인 동포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식’이 도쿄 도즈카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300명이 넘는 도쿄 거주 조선인들이 모였고 연단 옆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죽창과 ‘피학살 동포 추모식’이라 적힌 흰색 천이 걸려있었다. 회장에는 도즈카 분서에서 파견한 경찰 약 60명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 p.149
조선인 자신이 동포의 죽음을 추모하는 모임이었다 해도 학살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 이 《아사히신문》 기사는 검열로 인해 “피??동포 추모식”과 “학살”이라는 두 글자가 복자伏字 처리되었다. 조선인 학살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금기어였다
--- p.19
내무성 경보국장은 각 부?현 지사 앞으로 “도쿄 부근에서 대지진 재해를 빌미로 조선인들이 각처에서 방화하고 불온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으며 “실제로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려 방화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엄격한 단속”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 p.42
요츠키 다리 아래 스미다구 쪽 강변에서 조선인을 10명씩 묶어 줄 세우고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서 죽였어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수레 선로 위에 눕힌 다음 석유를 뿌려서 태웠어요
--- p.49
나고야의 지역 신문인 《신아이치新愛知》에는 “우물과 농업 용수로에 독약을 타고 군중에게 폭탄을 던지며 각처에서 방화를 저지르는 불령조선인과 중국인이 맹렬히 날뛴다”, “불령조선인 1,000명과 요코하마에서 전투 개시, 보병 일개 소대의 전멸인가”, “발전소를 습격하는 조선인”, “지붕에서 지붕으로 조선인들이 방화하며 다닌다” 등의 기사가 실렸다
--- p.50
조선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탁음이 있는 단어를 말하도록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부톤(방석)’을 ‘사후톤’으로 발음해 그 자리에서 살해된 조선인도 있었다. 내가 기차 안에서 목격한 사건. 만약 ‘주고 엔 고주 센’처럼 탁음 많은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 노동자도 나쁜 일을 당했을 것이다
--- p.55
재조선일본인 자경단은 이 무장 집단인 재향군인회와 소방대를 중심으로 지역의 민간인이 참여해 조직되어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할 때 활용되었다. 이는 관동대지진 당시 ‘지진 자경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유사시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하도록 만든 폭력 장치의 일환으로 조직된 재향군인회가 지진 재해의 혼란 속에서 소방대 빛 민중과 연계하여 자위?자경이라는 틀을 넘어 발동한 것이다
--- p.69
보도 규제가 해제된 후에 내무성이 “유언비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인정했음에도 일반 국민에게는 널리 알리려 하지 않았다. 신문은 ‘학살은 불령조선인의 폭동’에 대한 자위적 행동이었다는 취지의 기사를 계속 내보냈다. 도쿄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 공개적으로 당국을 비난하거나 저항적 태도를 드러내는 문단 작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 p.81
일본에서는 가해와 학살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인들이 관부연락선을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통해 학살 사건이 조선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한 총독부는 부산에 ‘구호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수용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귀환한 조선인들을 그곳에 밀어넣었다. 수용소 내에서는 학살 사건에 대한 입막음을 엄격히 시행했다
--- p.101
총독부 경무과장이었던 마루야마 쓰루키치의 회고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수돗물에 독약을 뿌렸다든지, 무장봉기를 몰래 계획하고 있다든지 하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고 …… 부산에서조차 일본도를 들고 수원지를 경호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 p.104
대지진 직후인 9월 2일 《동아일보》 이상협 편집국장이 재일거류민의 가족 400명으로부터 안부를 확인해 줄 것을 의뢰받아 일본으로 향했다. …… 이상협은 지진으로 ‘압사’ 혹은 화재로 사망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조선인 “대다수는 살해당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며 “사태의 진상을 진실하게 공표하고” 아울러 “폭력 행위에 가담한 자를 적절히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 p.108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것처럼, 원폭이 투하된 혼란한 상황에서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의심을 샀다. “개에게 줄 약은 있어도 너희 조선인들에게 줄 약은 없다”며 치료를 거부당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부연 설명했다
--- p.115
제대군인이 대거 포진된 상인집단 ‘마스야 일가’가 김창근, 김성태 조선인 두 사람을 참수하고 또 한 사람을 상해한 “요리이 사건”의 내용은 처참하다. 이 사건은 1947년 7월, 사이타마현 요리이 경찰서의 관내 하나조노무라에서 일어났다
--- p.128
대지진 발생 4일 후, 피해가 두려워 경찰서에서 보호받고 있던 28세 조선인 엿장수 구학영을, 인근 마을인 요도무라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유치장을 습격해 그를 마구 난도질해, 경찰서 현관으로 끌고 나가 숨통을 끊어버렸다. 후세 다쓰지는 요리이 사건 변론문에서 이 두 사건의 공통점으로 “조선인 한두 명은 죽여도 좋다”는,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 이후의 “민족적 차별과 멸시의 관념”이 깔려있다고 보았다
--- p.129
관동대지진은 전쟁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령선인의 습격’이라는 소문은 시가지의 야전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자경단의 지휘를 맡은 재향군인회 소속 회원은 앞서 군대 생활을 통해 ‘탈감작’ 상태였고 그 아래 지시를 따른 이들은 ‘명령’에 따라 살해를 감행하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집단면책’ 또한 작용했다
--- p.142
“선생님, 조선인은 어떤가요? 전 오늘까지 여섯 명을 죽였는데요.” “저 녀석, 굉장한데.” “아무래도 자기 몸을 지키려면 그래야죠, 하늘 아래 떳떳한 살인이다 보니 호쾌하게 잘도 하네.”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결성된 자경단의 팀워크에 의한 행동은, 개별 구성원의 ‘살인에 대한 불안’을 경감해, ‘살해’에 대해 “떳떳한 살인”이라고 할 정도의 ‘고양감’을 선사했다
--- p.147
지진 재해 1년 후인 1924년 9월 13일, 조선인 동포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식’이 도쿄 도즈카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300명이 넘는 도쿄 거주 조선인들이 모였고 연단 옆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죽창과 ‘피학살 동포 추모식’이라 적힌 흰색 천이 걸려있었다. 회장에는 도즈카 분서에서 파견한 경찰 약 60명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 p.149
조선인 자신이 동포의 죽음을 추모하는 모임이었다 해도 학살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 이 《아사히신문》 기사는 검열로 인해 “피??동포 추모식”과 “학살”이라는 두 글자가 복자伏字 처리되었다. 조선인 학살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금기어였다
--- p.150
출판사 리뷰
시가전을 방불케 한 가해와 학살의 뿌리
조선인인 지진 후의 혼란을 틈타 살인과 방화, 강간을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묵인한 것은 일본 정부와 언론이며 이에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는 것이 관동대학살에 관한 정설이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군대 역시 이에 가담했다. 9월 2일 출동한 한 기병연대는 이틀분 식량과 여분의 말발굽, 실탄 60발을 휴대한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으며 오후 2시경 가메이도에 도착해서는 즉시 “열차 검문”을 실시하고 조선인 한 사람을 끌어내려 총검으로 마구 찔러 죽였다(151쪽). 도쿄 오쿠라 다리 위에서는 조선인 5~6명이 몽둥이에 맞아 머리와 손발이 몽땅 으스러진 채 죽어갔다(47쪽).
지은이는 이런 참상을 전하면서 ‘주범’인 자경단의 뿌리가 3?1운동 당시 조선 각지에서 구성됐던 자경단과 재향군인회와 연결시킨다. 또 관동대지지 발생 당시 내무대신, 경시청 총감, 도쿄도 부지사가 조선총독부 출신으로 3?1운동으로 인한 심리적 외상이 작용했으리란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군?관?민 모두 헤어나지 못한 ‘불령선인’ 그림자
‘불령선인’은 “무법자이며 불순한 조선인”을 가리킨다. 하지만 당시 사법부 자료에 따르면 관동대지진 시기에 조선인 범죄 용의자는 대략 140명으로 관동 지역 일대를 습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데다 그나마 대부분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인데도 “조선인임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30쪽). 그러면서 내무부 경보국장은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엄격한 단속”을 요청하는 전문을 각 부?현 지사 앞으로 보냈고, 신문은 “학살은 불령조선인의 폭동에 대한 자위적 행동이었다는 기사를 계속 내보냈다. 관민 모두 불령조선인이란 유령에 더욱이 일본 정부가 1923년 9월 11일 “정상 참작”할 점이 적지 않아, “소란에 가담한 전원을 검거하는 일 없이” 검거의 범위를 “현저한 것으로 한정”해 검거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해서(148쪽) 학살을 부추겼다. 민족적 차별과 멸시의 관념을 바탕으로 “조선인 한두 명은 죽여도 좋다”는 집단의식이 형성된 계기였다.
제대로 증언하지 못한 진재震災문학
근대국가 일본이 최초로 경험한 대지진은 ‘진재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양식을 만들었다. 대부분은 일기, 수기, 르포르타주(기록문학)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처절한 피해 체험을 기록하거나 참혹했던 재난의 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분투를 그렸다. 이를테면 100세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 노가미 야에코가 “조선인을 죽인 피로 오미쿠라 다리 밑의 물이 빨갛게 변해 발도 못 씻었다”고 적은 일기가 그렇다. 그러나 지진 재해 상황에서 벌어진 잔혹한 폭력 행위를 기록하고 고발하는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더욱이 그러한 작품의 저자는 대부분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수들이었기에 검열의 대상이 됐고, 작품들은 복자伏字투성이가 되거나 출판 자체가 엄격히 통제되던 상황이어서 그 파급력은 한계가 있었다. 당시 일본 문단의 저명한 작가들은 죄악에 눈을 감듯, 이 잔혹한 비극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려 하지 않기도 했다. 국가와 사회가 손잡고 학살의 기억을 봉인했던 것이다. 결국 진재문학은 2년 남짓 후 시들해졌다.
거짓 없는 진실을 마주 보아야 하는 이유
일본은 관동대학살을 두고 침묵하거나, 심하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조선인 사냥’을 정당방위라거나 열등 민족 혹은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집단면책’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은폐된 기억은 새로운 유언비어를 낳고, 비극이 반복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책은 지난해 일본 온라인 사이트에, 일본 네티즌을 대상으로 관동대학살을 다룬 글을 묶어내는 이유다. 지은이가 말미에 강조했듯이, 그 부정적인 기억을 다시 불러와 진실을 마주 보는 태도가 모두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조선인인 지진 후의 혼란을 틈타 살인과 방화, 강간을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묵인한 것은 일본 정부와 언론이며 이에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는 것이 관동대학살에 관한 정설이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군대 역시 이에 가담했다. 9월 2일 출동한 한 기병연대는 이틀분 식량과 여분의 말발굽, 실탄 60발을 휴대한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으며 오후 2시경 가메이도에 도착해서는 즉시 “열차 검문”을 실시하고 조선인 한 사람을 끌어내려 총검으로 마구 찔러 죽였다(151쪽). 도쿄 오쿠라 다리 위에서는 조선인 5~6명이 몽둥이에 맞아 머리와 손발이 몽땅 으스러진 채 죽어갔다(47쪽).
지은이는 이런 참상을 전하면서 ‘주범’인 자경단의 뿌리가 3?1운동 당시 조선 각지에서 구성됐던 자경단과 재향군인회와 연결시킨다. 또 관동대지지 발생 당시 내무대신, 경시청 총감, 도쿄도 부지사가 조선총독부 출신으로 3?1운동으로 인한 심리적 외상이 작용했으리란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군?관?민 모두 헤어나지 못한 ‘불령선인’ 그림자
‘불령선인’은 “무법자이며 불순한 조선인”을 가리킨다. 하지만 당시 사법부 자료에 따르면 관동대지진 시기에 조선인 범죄 용의자는 대략 140명으로 관동 지역 일대를 습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데다 그나마 대부분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인데도 “조선인임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30쪽). 그러면서 내무부 경보국장은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엄격한 단속”을 요청하는 전문을 각 부?현 지사 앞으로 보냈고, 신문은 “학살은 불령조선인의 폭동에 대한 자위적 행동이었다는 기사를 계속 내보냈다. 관민 모두 불령조선인이란 유령에 더욱이 일본 정부가 1923년 9월 11일 “정상 참작”할 점이 적지 않아, “소란에 가담한 전원을 검거하는 일 없이” 검거의 범위를 “현저한 것으로 한정”해 검거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해서(148쪽) 학살을 부추겼다. 민족적 차별과 멸시의 관념을 바탕으로 “조선인 한두 명은 죽여도 좋다”는 집단의식이 형성된 계기였다.
제대로 증언하지 못한 진재震災문학
근대국가 일본이 최초로 경험한 대지진은 ‘진재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양식을 만들었다. 대부분은 일기, 수기, 르포르타주(기록문학)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처절한 피해 체험을 기록하거나 참혹했던 재난의 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분투를 그렸다. 이를테면 100세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 노가미 야에코가 “조선인을 죽인 피로 오미쿠라 다리 밑의 물이 빨갛게 변해 발도 못 씻었다”고 적은 일기가 그렇다. 그러나 지진 재해 상황에서 벌어진 잔혹한 폭력 행위를 기록하고 고발하는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더욱이 그러한 작품의 저자는 대부분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수들이었기에 검열의 대상이 됐고, 작품들은 복자伏字투성이가 되거나 출판 자체가 엄격히 통제되던 상황이어서 그 파급력은 한계가 있었다. 당시 일본 문단의 저명한 작가들은 죄악에 눈을 감듯, 이 잔혹한 비극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려 하지 않기도 했다. 국가와 사회가 손잡고 학살의 기억을 봉인했던 것이다. 결국 진재문학은 2년 남짓 후 시들해졌다.
거짓 없는 진실을 마주 보아야 하는 이유
일본은 관동대학살을 두고 침묵하거나, 심하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조선인 사냥’을 정당방위라거나 열등 민족 혹은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집단면책’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은폐된 기억은 새로운 유언비어를 낳고, 비극이 반복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책은 지난해 일본 온라인 사이트에, 일본 네티즌을 대상으로 관동대학살을 다룬 글을 묶어내는 이유다. 지은이가 말미에 강조했듯이, 그 부정적인 기억을 다시 불러와 진실을 마주 보는 태도가 모두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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