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유대인
유대인 총인구
2050만 명
인구분포
이스라엘 이스라엘 6,835,500
미국 미국 10,000,000
프랑스 프랑스 456,000
캐나다 캐나다 390,000
영국 영국 370,000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180,500
러시아 러시아 176,000
독일 독일 116,000
오스트레일리아 호주 140,000
브라질 브라질 93,800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공 69,300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53,000
헝가리 헝가리 47,500
멕시코 멕시코 40,000
네덜란드 네덜란드 29,800
벨기에 벨기에 29,300
이탈리아 이탈리아 27,300
콜롬비아 콜롬비아 27,000
스위스 스위스 18,700
칠레 칠레 18,300
우루과이 우루과이 16,900
튀르키예 튀르키예 15,300
언어
히브리어,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이디시어, 라디노어, 유대인 아랍어 등
종교
유대교
민족계통
히브리인 / 기원·발상 유다 왕국 / 근연민족 사마리아인, 아랍인, 아시리아인 등
유대인(단수: 히브리어: יְהוּדִי 예후디, 복수: 히브리어: יְהוּדִים 예후딤) 또는 유태인(猶太人)은 히브리 민족에서 기원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집단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대 민족성과 종교는 매우 밀접한 관계인데 이는 유대교가 유대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로의 개종자들은 보통 유대인 사회 내에서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던 이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주류 유대교에서 개종은 권장되는 것은 아니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과의 결혼이 이에 해당된다.
성서에 따르면 유대 민족은 고대 가나안의 족장이던 아브라함에게서 유래되었다. 이집트에 의해 잔혹한 정복과 학살을 당한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대대로 노예 민족으로 살며 탄압받다가 이집트인들이 끝내 유대인 남자는 아기까지 다 죽이고 여자들만 남겨 멸족시키려 하자 출애굽을 거쳐 가나안에 다시 정착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이 유다 지역은 이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 제국의 영토에 들어갔으며,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 진출하였고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동화되지 않은 채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왔다. 중세에도 다수가 동화되지 않고 차별을 겪었는데, 이로 인해 천하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금융, 상업, 무역 등에 종사하게 되어 오히려 유대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차별의 고통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가진 부에 비해 나약했기 때문에 많은 습격을 당했다. 심지어 극심한 차별로 인하여 가난해진 유대인들은 신과 민족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동족들을 팔기도 했다. 근대에 와서도 차별은 잔존하였고 유럽 정치의 극단화의 끝에 나치 독일이 주도한 홀로코스트 대학살이 일어나 유럽 유대인의 과반수가 죽고 남은 대부분은 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으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다. 현대국가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로서 수립되었으며, 기본법에서도 스스로를 유대 국가로 규정하므로 귀환법에 의해 이스라엘 시민권을 요구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국적 취득을 승인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역사
후기 청동기 시대 (1550–1150 BCE)
가나안 사람들은 중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2100-1550년) 에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후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1550-1200년) 동안 가나안의 대부분은 이집트 신왕국 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을 형성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로 가나안은 혼란에 빠졌고 이집트의 지배권은 완전히 무너졌다. 하솔, 벧스안, 므깃도, 에크론, 아쉬돗 및 아스글론은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민족이 기원전 1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이집트 비문인 메르넵타 비문(Merneptah Stele)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인의 조상에는 이 지역에서 태어난 고대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포함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 고고학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인과 그들의 문화는 야훼를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단일 숭배(후에는 일신교) 종교의 발전을 통해 가나안 민족과 그들의 문화에서 분기되었다. 성서 히브리어로 알려진 히브리어 의 고대 형태를 사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블레셋 사람들은 남쪽 해안 평야에 정착했다.
철기 시대 I (기원전 1150-950년)
고고학자 Paula McNutt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철기 시대의 (가나안)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혼인 금지, 가족사 및 계보, 종교 등을 통해 이웃과 차별화 하였을 것입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고지대에 약 25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지만 1차 철기 시대 말에는 300개 이상으로 증가했고 정착 인구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 마을은 북쪽에 더 많고 더 컸으며 아마도 유적을 남기지 않은 목가적 유목민과 고원을 공유했을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은 그들을 특별히 이스라엘인으로 정의할 수 있는 어떤 특징도 식별 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이스라엘 사이트를 구별하는 데 사용되었던 네방형(four-room) 집이나 collared-rim 항아리들은 고지대 밖에서도 확인되었기에 이스라엘 사이트를 구별하는 데 사용될 수 없게 되었다. 고지대 마을의 도자기는 저지대 가나안 지역의 도자기보다 훨씬 제한적이지만 유형적으로는 이전의 가나안 도자기에서 발전했다.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초기 고지대 일부를 구별하는 타원형 또는 원형 레이아웃과 언덕 지역에서 눈에 띄는 돼지 뼈의 부재가 인종의 표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 고지 생활에 대한 상식적인 "적응이며 반드시 기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19]. 다른 아람 유적지도 초기 가나안 및 후기 블레셋 발굴과 달리 그 당시 돼지 유해가 동시대에 없었다는 것을 보였다.
The Bible Unearthed (2001) 에서 Finkelstein과 Silberman은 최근 연구를 요약했다. 그들은 1967년까지 팔레스타인 서부 고원지대에 있는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사실상 고고학적 미지의 땅 이었다고 설명했다 . 그 이후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의 전통적인 영토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러한 조사는 철기 시대 초기에 이스라엘 땅에 존재했던 블레셋과 가나안 사회와 대조되는 새로운 문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드러냈다. 이 새로운 문화는 돼지고기가 부족하고(어디서나 블레셋 식단의 20%를 돼지고기가 차지함), 고도로 장식된 도자기를 사용하는 블레셋/가나안 관습을 포기하고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출애굽과 그에 따른 정복 이 아니라 기존 가나안-블레셋 문화의 변형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초기 이스라엘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모두 몇 세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빽빽한 고원 촌락 네트워크의 유적 발견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중앙 산악 지대에서 극적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했습니다. 폭력적인 침략의 흔적이나 명확하게 정의된 민족 집단의 침투조차 없었습니다. 대신 라이프 스타일의 혁명인 것 같았습니다. 남쪽 유다 산에서 북쪽 사마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희박했던 고지대에 와해되고 와해되고 있던 가나안 성읍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약 250개의 산꼭대기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최초의 이스라엘인이 있었습니다. These surveys revolutionized the study of early Israel. The discovery of the remains of a dense network of highland villages – all apparently established within the span of few generations – indicated that a dramatic social transformation had taken place in the central hill country of Canaan around 1200 BCE. There was no sign of violent invasion or even the infiltration of a clearly defined ethnic group. Instead, it seemed to be a revolution in lifestyle. In the formerly sparsely populated highlands from the Judean hills in the south to the hills of Samaria in the north, far from the Canaanite cities that were in the process of collapse and disintegration, about two-hundred fifty hilltop communities suddenly sprang up. Here were the first Israelites.
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고지에 있던 기존 백성들로부터 평화롭게 내부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
광범위한 고고학적 발굴은 초기 철기 시대 동안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제공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마을과 같은 사회를 나타내지만 자원이 더 제한적이고 인구가 적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주로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 중 가장 큰 마을은 인구가 300~400명 정도였다. 그들의 마을은 언덕 꼭대기에 지어졌다. 그들의 집은 공동 뜰 주위에 무리지어 지어졌다. 그들은 돌 기초와 때로는 나무로 만든 2층이 있는 흙벽돌로 방이 서너 개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산비탈에 테라스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다양한 작물을 심고 과수원을 유지했다. 마을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했고 경제적 교류가 만연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정이 일어나기 전에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재판관들 에 의해 인도되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의 역사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지역 추장과 정치가 보안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마을은 성벽이 없었지만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의 주체였을 가능성이 높습다. 기록 및 문자의 사용은 작은 사이트/지역에도 보급되었고 기록이 가능해졌다.
철기 시대 II (기원전 950–587년)
Israel Finkelstein에 따르면 , BCE 10세기에 기브온-기브아 고원을 기반으로 급작스럽게 대규모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성서의 시삭인 쇼솅크 1세에 의해 파괴된 후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회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950년에서 900년 사이에 또 다른 대규모 정치가 북부 고지대에서 나타나 결국 이스라엘 왕국의 전신으로 간주될 수 있는 디르사를 수도로 삼았다. 이스라엘 왕국은 중요한 지역 강국으로 통합되었다. 유다 왕국은 기원전 9세기 후반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의 초기 존재 와 그 범위와 권세에 대한 논쟁이 있다. 이스라엘 연합 왕국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ca. 기원전 900년에는, 그리고 유다 왕국은. 기원전 850년에는 존재했을 것으로 본. 이스라엘 왕국은 두 왕국 중 더 번영했고 곧 지역 강국으로 발전했다. 오므리 왕조 시대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 갈릴리, 요단 계곡 상류, 샤론 및 트랜스요르단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사마리아는 레반트에서 가장 큰 철기 시대 구조물 중 하나의 본거지였다.
고전 시대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 의해 멸망하였고 기원전 586년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제1차 성전을 파괴하였으며 남유다의 지배층을 추방하였다. 당시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의 일부가 되었으며 유다에 남은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게 되었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다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끝났다. 제2차 성전은 기원전 515년에 건설이 끝났다. 페르시아령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제에게 멸망하는 기원전 333년까지 제국에서 평화로운 지역에 속했다. 유대인들은 이후 다시 기원전 140년에서 36년까지 하스모니안 왕조 아래에서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한다.
그 후 유대인들의 땅은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후,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승계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비 가문(Maccabees)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대인 왕국을 세웠는데 당시 에피파네스 왕조의 반유다주의 및 마카비 가문의 반란은 구약성서의 외경 중 '마카비 상, 하'에 나와 있다. 마카비 가문의 반란으로 세워진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Hasmonaean Dynasty)라 하는데 기원전 165년부터 기원전 63년 약 100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기원후 66년 유대인들은 총독과 세리를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 땅에서 유대교를 믿도록 허용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 살았으며 이슬람교가 성장하면서는 일부가 인도와 중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유대인 중 일부는 지중해 연안 외의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의 후손인데 하자르인(Khazars), 이두매아인(Edomites), 에티오피아인, 아랍인 등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
중세 유럽
유대인들은 유럽 곳곳에 퍼져 살게 되었으나 이들에게 허용된 직종은 한정되어 있었다. 중세에 기독교인들은 높은 이자와 관련된 금융활동을 죄악시하여 엄금하였기 때문에 대신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비롯하여 금융과 무역에 관련된 직업을 도맡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포도밭을 소유했으며 포도주를 만들었다. 이들에 대한 반감인 반유대주의는 역사적 뿌리가 깊어, 유럽에서 최초의 반유대 폭동은 11세기에 발생하였고 1182년 유대인들이 네덜란드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 주로 거주하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서서히 동유럽으로 이동하였는데, 특히 15세기 경 폴란드에 받아들여지게 된 이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최대 규모의 디아스포라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고 홀로코스트 직전까지도 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지역이던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서부 등지에서 유대인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근대
18세기부터 프랑스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계몽시대로 불리는 여러 자유 사상의 영향으로 유대인의 해방과 사회적 지위 상승이 이루어져 특별세금이나 게토 거주 등의 의무가 해제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아슈케나즈 유대인 인구가 독일로 재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편 이와 함께 독일 등 중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 움직임 역시 증가하면서 중유럽의 아슈케나즈 유대인을 중심으로 '궁극적인 귀환'을 추구하는 시오니즘이 민족주의의 새로운 형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많은 국가에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발흥하여 파시즘 성향의 정부들이 잇따라 집권하였고, 그 중 대부분이 반유대주의를 내걸면서 유대인들은 명시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주도로 이루어진 홀로코스트 정책으로 인해 유럽 유대인 인구는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전 유럽에 존재했던 약 8백만 유대인들 중 약 6백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체 인구와 학살당한 인구 모두 절대다수는 아슈케나즈 유대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폴란드에 존재했던 330만 유대인 중 3백만 명(91%)의 폴란드 출신 유대인과 110만 명 중 90만명의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82%)들이 희생당했다. 슬라브 민족,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와 발칸반도 출신 유대인들은 50~90%가 학살당했다. 아슈케나즈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희생된 나라는 그리스밖에 없었다. 생존한 유대인은 거의 대부분 유럽 밖의 이스라엘, 미국 등지로 이주하였고 오늘날까지도 다수의 유대인들이 이들 국가에 살고 있다.
오늘날의 유대인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전 세계의 유대인 인구가 약 1천 8백만 명 정도였으나 히틀러가 집권하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약 1천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전 세계 134개국에 약 14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미국에 약 580만 명, 이스라엘에 약 6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밖에 캐나다, 헝가리,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 등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소련의 경우 홀로코스트의 탄압을 피해서 자국으로 들어온 유대인들을 만주까지 도피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에 따라 그 일대에 유대인 자치주가 형성되었다.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240만 명, 라틴 아메리카는 약 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14일 건국된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게 허용하는데, 이는 '귀환법' 또는 '귀향법'이라고 한다. 이 법률상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되며, 또 유대인 이민자들과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따르는 유대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대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대인으로 여겨 반유대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이 다수민족인 국가는 이스라엘뿐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은 프랑스이고, 그 다음이 영국이다. 그 외, 독일, 헝가리, 네덜란드 등이 있다. 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과 동유럽으로 현재 많은 유대인이 재이주해 온다.
유대인의 분파
흔히 사용하는 아슈케나짐(Ashkenazim)와 스파라딤(Sephardim)의 구분은 종교적 차이와 민족적 차이를 다 포함한다. 어떤 학자들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이나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며 스파라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식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유다 민족의 4대 분파
아슈케나짐 -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동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일부는 네덜란드와 독일에 살고 있지만 인근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라트비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아르헨티나에도 살고 있다. 호세 페케르만 축구 감독이 아슈케나짐 출신 아르헨티나인이다.
스파라딤 -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살았으나, 16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쪽에 소수만 남게 되고, 상당수는 프랑스, 터키, 북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했다.
미즈라힘 -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지에도 퍼졌다. 이들은 스파라딤 유대인들과 종교 의례가 거의 같아 보통 스파라딤이라 부르기도 한다.
베타 이스라엘 - 에티오피아에 살던 흑인 유대인으로 '팔라샤(Falasha)'라고도 불린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소수 분파가 있다.
예멘 유대인 (Yemenite Jews) - '테이마님(Teimanim)'이라고도 한다. 동방 유대인이었는데 지리적·사회적으로 다른 유대인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특이한 예배식과 의례가 발전하였다.
베네 이스라엘 - 인도의 뭄바이(봄베이)에 살았다.
코친 유대인 - 이들도 인도에 살았다.
로마니오트 (Romaniotes) - 헬레니즘 시대부터 현재까지 발칸반도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다. 전 세계에 6천 명 정도 있다.
아슈케나짐은 전통적으로 이디시어를, 스파라딤은 라디노어(유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동방 유대인은 거의 대부분 아랍어를 사용했으나 아람어, 페르시아어(파르시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Spanish Inquisition) 이후 스파라딤 유대인들은 흩어져 유럽에 이주, 아슈케나짐과 동화되거나 중동으로 이주, 동방 유대인들과 동화되었다.
스파라딤과 아슈케나짐 사이엔 갈등이 많은데, 세력으로나 영향면에서 아슈케나짐이 압도적이다.[34] 오늘날 유대인의 80% 정도가 아슈케나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범 스파라딤계이다.
기타 유대인 하위 집단에는 '그루짐(Gruzim)' 즉 카프카스 조지아 지방의 유대인, '유후림(Juhurim)' 즉 코카서스 동부 다게스탄의 산악 유대인, '마크레빔(Maghrebim)' 즉 북아프리카 유대인, '아바유다야(Abayudaya)' 즉 우간다 유대인 등이 있다. 그밖에도 러시아의 러시아 유대인,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유대인, 싱가포르, 필리핀, 중국, 일본의 아시아 유대인도 있다.
한편 헝가리계 유대인 역사학자 아서 쾨슬러와 일본 학자 우노 마사미 등은 아슈케나짐이 인종적으로 셈족이 아닌 백인계 투르크족 하자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중세사 교수를 지낸 폴리악도 1944년에 <하자르 왕국과 유대교 개종>이란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이런 주장에 동조했다. 이들이 하자르 멸망 후 동유럽·중앙유럽으로 흩어져 아슈케나짐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셈족 유대인들에게는 금발이나 푸른 눈이 없으나 아슈케나짐 중에는 백인과 유사한 외모를 지닌 이들이 많은 이유라 한다. 2005년 유럽 유전체 학술지에 따르면 최근 인류학과 유전학 연구의 성과로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을 비롯한 기타 유대인의 인종학적 차이가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 밝혀져 아서 쾨슬러 등이 주장한 아슈케나짐의 하자르 설은 비판을 받고 있다.
중국의 유대인
중국 송나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서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한 성씨로는 리(李), 장(张), 안(俺), 진(金)씨 등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일부가 고려로 들어오기도 했다. 북송의 카이펑(开封)에 거주하여 카이펑 유대인(開封猶太人) 또는 이츠러예(一赐乐业, 일사락업)인으로 불렸다. '이츠러예'는 북송 황제가 하사한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음역이다. 중국에 진출한 이슬람교의 무슬림처럼 유대인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종교신앙으로 인해,북송시대의 중국인들은 이 두 집단 모두를 고교(古教), 남모회회(藍帽回回) 등으로 불렀으며, 유대인을 죽흘(竹忽), 주오(主吾), 주호득(朱乎得), 축호(祝虎), 주혁(珠赫) 등으로 불렀다. 북송 카이펑의 이츠러예인들은 한족과 같이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는데, 명나라가 건국되자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색목인(色目人), 회회인(回回人)은 본족 내 통혼을 불허함을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밝혀낸다
이스라엘의 경제적 성과는 눈부시다. 세계 경제위기 가운데서도 최저의 실업률과 호황을 맞은 부동산 시장, GDP 대비 R&D 투자비율 세계 1위와 같은 지표를 보여주고 있다.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연일 이슬람 국가들과의 전쟁 공포에 휩싸인 나라에서 경제대국 미국의 경제를 주무르는 유대인들의 부의 지배력이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22년간 KORTA에서 근무하며 세계 곳곳의 다양한 경제 환경을 경험한 저자는, 이 책에서 경제의 역사를 주도한 유대인들이 어떻게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파노라마처럼 들여다본다.
이 책은 쉽고 간결한 문체로 그려낸 한편의 대하 다큐멘터리이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관한 지엽적 서술이 아니라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살았던 수메르 문명부터 시작하여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를 횡으로 보고, 그 큰 흐름 속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정을 종으로 함께 엮어 경제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한다.
또한 ‘소금’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던, 일반 독자들도 흥미로울 주제들의 역사를 따로 뽑아서 유대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고, 이런 것들이 경제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등을 연대기적 흐름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팩트 위주의 서술은 얼핏 이 책이 단순히 역사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서술 방식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잘 몰랐던 유대인들의 특징과 세계 경제사의 흐름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도록 깊고 넓은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기존의 경제 관련 도서들은 미국이나 유럽, 중국이나 일본에 국한된 좁은 시야의 서술을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세계 경제의 현재와 밑바탕을 유대인과 유대인의 역사에서 찾고 이것이 세계는 물론,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앞으로 우리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21세기 경제 동력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법과 문제까지 제시하고 있다.
목차
1. 영원한 계약
유대인의 역사는 《성경》과 궤를 같이한다
유대인의 역사는 세계 경제사와 궤를 같이한다
수메르 문명이 남긴 유산들
선택 받은 아브라함,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2. 고난의 역사, 엑소더스
이집트로 이주한 유대인, 12지파의 시작
이집트의 유대인, 건설노예가 되다
엑소더스, 이집트에서 탈출하다
3. 페니키아, 이스라엘, 그리스의 상권 각축
페니키아, 해상무역을 주도한 가나안 사람들
이스라엘, 그리스보다 빠른 민주주의 국가 건설
다윗 시대, 부국강병의 기술을 마련하다
솔로몬 시대, 이스라엘 최고의 전성기
솔로몬 이후, 왕국이 둘로 갈라지다
그리스, 해상무역에 뛰어든 후발주자
아테네 은화, 기축통화 되다
솔론의 개혁, 민주주의와 토지사유제
4. 유대인 방랑시대의 시작, 바빌론 유수기
유다 왕국의 멸망과 1, 2차 바빌론 유수
유대교의 재탄생, 움직이는 종교로의 탈바꿈
바빌론의 멸망과 유대인의 귀환
에스라 개혁, 유대교를 바로 세우다
5.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인
페르시아 전쟁으로 유대인 그리스의 지배를 받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탄생과 쇠락
6. 로마의 득세와 유대인
로마제국 초기,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카이사르
해외 유대인 공동체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생활
예수,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다
소금의 경제사
7. 1, 2차 유대-로마전쟁과 2천 년 방황의 시작
유대인 폭동의 시작, 1차 유대-로마전쟁
1차 로마-유대 전쟁 그 후, 유대인의 생활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유대인의 저항
8. 2차 이산 이후 후기 로마시대와 유대인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다
경제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로마제국의 멸망
탈무드
9. 이베리아 반도의 영화와 이슬람의 유대인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한 세력들
이슬람 왕국의 영화를 도운 유대인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생활상
이슬람 근본주의의 등장과 유대인의 수난기
10. 중세 유럽, 유대인의 동방무역과 금융업
기독교 대부업 금지가 낳은 유대인 대부업의 유래
중세 도시의 형성과 상인 세력의 등장
유대인이 상업을 석권했던 이유
동방무역으로 되살아난 유럽 경제와 유대인의 금융업
르네상스 탄생에 기여한 유대인
십자군 운동과 중세 유대인의 학살
2부 | 유대인 세계 경제사의 주역으로 우뚝 서다
1. 스페인제국의 영광과 몰락
이사벨 여왕, 스페인을 통일하다
흑사병의 창궐과 유대인 대학살
제국주의적 팽창정책, 스페인제국을 무너뜨리다
2. 동전의 양면, 중상주의와 유대인
브뤼헤 시대, 중계무역에 주력한 유대인
앤트워프 시대, 다이아몬드 유통의 중심지가 되다
암스테르담 시대, 종교개혁과 유대인 황금시대
네덜란드, 세계를 제패하다
근대 자본주의 토대를 구축한 유대인
서인도회사의 설립과 다양해진 금융기법
30년 전쟁, 유대인의 지위를 바꾸다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보석산업
3. 유대인, 동양을 요리하다
향신료 전쟁과 동인도 항로
아시아교역, 상품교역보다 환차익거래로 돈을 벌다
중국·일본 간 금은 중계무역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유럽, 동양 자기에 매료당하다
4. 유대인, 산업혁명 토대를 구축하다
해적의 나라가 세계 최강이 되기까지
크롬웰의 영국, 유대인을 반기다
민간 소유의 중앙은행 탄생
유대인, 고객만족경영으로 세상을 바꾸다
설탕과 노예무역이 키운 영국의 자본주의
유대인에 의한 면직물산업의 태동
5. 영원한 금융 황제, 로스차일드
본격적인 국제유대자본의 태동기
산업혁명의 원동력, 로스차일드의 자본
로스차일드 후손들의 눈부신 활약
6. 미국 산업사의 양대 축, 모건과 록펠러
미국의 산업과 자본주의의 태동
제이피 모건, 빠른 정보에 주목하다
세계 석유 시장을 석권한 록펠러의 등장
세계 최초로 유조선을 고안한 마커스 새뮤얼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 재벌을 탄생시키다
국제결제은행의 설립
7. 미국을 움직이는 오늘날의 유대인들
시티그룹, 미국 최초의 금융백화점
제이피모건체이스, 월가 제1의 종합금융그룹
골드만삭스, 유대계 자본의 상징
세계 금융산업의 변화, 헤지펀드의 약진
투기판의 살아 있는 전설, 조지 소로스
금융위기 감지해 대박 터트린, 존 폴슨
워싱턴 행정부의 유대인들
달러의 위기와 환율전쟁
저자 소개
책 속으로
4천 여 년의 유대인의 역사는 한 마디로 방랑의 역사였다. 4백 여년 간의 이집트 종살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보낸 40여 년, 아시리아와 바빌론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겼던 포로 시대, 로마제국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 2천여 년은 바로 유랑과 핍박의 역사였다. 이 시련의 유랑 길은 당시의 그들에게는 힘든 고난의 길이었지만 경제사적으로는 현재의 유대인들의 부와 영향력을 만든 ‘은혜의 길’이기도 했다. ---「선택 받은 아브라함,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중에서
엑소더스(exodus)란 탈출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다. 유대인 역사 가운 데 모세가 주도해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대탈출한 ‘출애급 사건’, 즉 엑소더스는 유대 신앙의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 와 문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비로소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엑소더스, 이집트에서 탈출하다」 중에서
오늘날까지도 역사가들은 국가와 군주 중심의 역사기술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페니키아인, 이스라엘인, 그리스인들은 국가나 군주 중심이 아닌 개인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들은 노예와 이방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고 보았다. 인간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부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게다가 가난은 일종의 위협이며 오히려 물질적인 부를 개척하고 축적하는 일이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아 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한 마디로 페니키아인, 이스라엘인,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미래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현재보다 나아져야 하며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역사는 그들 덕분에 진보할 수 있었다. 이렇듯 페니키아인, 이스라엘인,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숭상하고, 부의 축적을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상이 자본주의를 이루는 그리스·히브리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경제사에서는 그들의 진취적인 해외 시장 개척과 상업 활동을 고대라는 시간 틀에 가두며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시발점으로 그들을 재조명해야 진정한 경제사라고 하겠다. ---「페니키아, 이스라엘, 그리스의 상권 각축」 중에서
솔론은 유대인의 희년제를 본받아 부채 탕감을 시도했다. 희년제란 50 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토지를 원 소유주에게 돌 려주며 모든 노예를 해방시키는 유대인의 제도다. 《구약성경》 「레위기」 25장 8~55절에 ‘희년 계산법’, ‘대속죄일의 선포’, ‘휴경에 관한 규정’, ‘노예 해방’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희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상이었던 평등공동체의 회복을 뜻한다고 한다. 그들은 희년법을 통해 다 시 한번 평등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희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채무를 탕감해 주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 에게도 사면을 베풀었다. 더 나아가 가축과 땅에게까지 휴식의 시간을 주었다. ---「솔론의 개혁, 민주주의와 토지 사유제」 중에서
역사를 통해서 보면 기독교들은 오랜 기간 대부분이 문맹이었다. 성직자들만 글을 알았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글을 모르는 신자들을 위해 《성경》의 내용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하는 성화가 발달했다. 반면 유대교는 고난과 수난의 역사를 거치면서 움직이는 종교로 탈바꿈했고 종교를 지켜야 하는 책임 때문에 열세 살 성인식을 치루고 나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성경》을 읽어야만 했다. 유대인이 중세시댕에 상업을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세 유대 상인의 일상 업무 중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글쓰기였다. 그들은 일주일에 적어도 서너 통의 편지를 써야 했으며 이에 더해 자신의 상업 활동을 상세하게 장부에 기록해야만 했다. 물품을 받고 부칠 때 관련 증빙서류를 함께 동봉해야 했고 시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의 목록을 작성하고 수시로 시세를 파악해서 사업상의 동료나 랍비에게 보내야만 했다. ---「유대교의 재탄생, 움직이는 종교로의 탈바꿈」 중에서
유대 사회에는 가난한 동족을 위한 복지제도가 강화되었다. 성전 시대 이후로 유대인 공동체에는 무료 숙박소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 회당 어느 곳이나 ‘쿠파(kuppah)’라 불리는 모금함이 있었다. 이 모금함은 유대인 복지공동체가 축으로 삼는 구심점이다. 회당에는 구호금 접수원 이 있어서 매주 금요일 아침이면 시장과 일반 가정을 돌아다니며 구호금이나 구호품을 수거했고, 모아진 것을 당일에 나누어 주었다. 일시적으로 구호가 필요한 사람은 위급을 면할 만큼 충분히 받고, 영구 구호가 요구 되는 사람들에게는 하루에 두 끼씩 일주일에 열네 끼니를 받았다. 이 구호기금을 ‘쿠파’ 곧 ‘광주리 기금’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가난한 유대인은 구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바빌론의 멸망과 유대인의 귀환」 중에서
반유대주의는 신학적(anti-Judaism), 인종적(anti-Semitism), 정치적(anti- Zionism) 반유대주의라는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모두가 유대인 말살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유대 민족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의 통치자들은 대부분 반유대정책을 펼쳤다.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왕국 내에 거하던 고대 유대인들이 민족을 이루게 되자 그들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 서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또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의 장관 하만은 페르시아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모든 유대인들의 뿌리를 뽑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유대인 폭동의 시작, 1차 유대-로마 전쟁」 중에서
유대인들의 상업 및 교역 활동은 소비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비단, 가죽, 도자기 산업과 금, 은, 유리세공 산업의 발전은 외부로부터 유능한 기술자와 과학자들과 더불어 상인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 지역은 상업 외에도 문화와 과학에 있어서도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월등했다. 그 뒤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왕국은 문화적 번창뿐 아니라 지중해 교역을 장악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아프리카의 금, 아시아의 향신료, 유럽의 밀 등 전 세계의 부가 이곳으로 몰렸다.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생활상」
화폐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종류의 화폐나 경제제도는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최초의 금화와 은화의 출현, 최초의 지폐의 등장, 최초의 환어음의 소개는 그것이 정착할 때까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의혹의 눈총을 받았다. 새로운 화폐제도의 출현이 파탄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이 모든 의혹, 염려, 불안은 불신이다. 이러한 불신을 잠재울 수 있는 민족이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계약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다. 어음제도 는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간에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성이 강했고 계약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기 때문에 생겨날 수 있던 제도다. 금융과 회계 에 관한 새로운 창안과 진보된 방식은 늘 유대인에게서 나왔다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생활상」 중에서
일반적으로 성공한 유대인 상인들은 단체를 조직해 다른 유대인을 돕기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사업정보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들 사회에 는 장사하려는 가난한 동포를 돕는 ‘무이자 대부제도’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장사를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이나, 실패해서 다시 재기하려는 사람에게 자금 조달은 지극히 절실한 문제다. 그런 면에서 사업자금을 무이 자로 대부하는 제도가 역사적으로 유대인 사회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매 우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유대인의 성공은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8세기부터 유럽에서 있었던 ‘헤브라이인 무이자 대부협회’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인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도 계속되었다. 지금도 성공한 유대인들은 기부금을 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런 모금단체를 비롯해 각종 커뮤니티 조직이 미국에만도 2백 개가 넘는다. ---「유대인이 상업을 석권했던 이유」 중에서
유럽시장에서 신용과 계약을 생명 이상으로 여기는 유대 인들끼리는 외상장사가 가능했다.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가면서 다음번 시장이 열릴 때나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시장에서 갚는 것들이 일반적이었다. 이때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가는 상인은 종이에 이러한 내용을 적어 증표로 주었다. 이 증표는 이후 강제적인 차용증서 형태로 발전되어 유대 상인들 사이에서 돈 대신 통용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은행가들은 환어음을 고안했는데, 이는 일정한 기간 내에 일정한 금액을 일방이 상대방에게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증서였다. 환어음은 신용장이나 약속어음과 달랐다. 신용장은 예금주 앞으로 작성되었고 약속어음이 발행인 자신이 지급할 것을 약속하는 것인 데 반해, 환어음은 제3자(지급인) 곧 외국은행 등이 지급을 보장하는 어음으로 주로 국제무역거래에 쓰였다. 환어음의 유통으로 해외 무역을 위해 현찰을 많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져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편해졌다. ---「동방무역으로 되살아난 유럽 경제와 유대인의 금융업」
유대인들의 보석 거래 가운데서도 다이아몬드가 가장 이윤이 많이 남았다. 그러자 유대 보석 상인들은 인도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협력해 직접 다이아몬드 원석을 들여와 이를 가공해 팔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2천 년간 인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다이아몬드 생산국이었다. 그 뒤 17세기 말 베네치아의 유대인 페르지(Vincent Peruzzi)가 다이아몬드 특유의 ‘브릴리언트 커팅’ 연마방법을 개발한 뒤로 다이아몬드가 명실상부하게 최 고의 보석이 되었다. (…) 앤트워프 유대인들은 보석 물량이 점차 커지자 이번에는 가공한 물건들을 외국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손잡고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다이아몬드 산업은 유대인들이 ‘수입-가공-수출-유통’ 프로세스 일체 를 장악해 완전히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독점산업이 되었다. 독점이다 보니 부르는 게 값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시장을 확고히 지배했다. ---「앤트워프 시대, 다이아몬드 유통의 중심지가 되다」 중에서
한편 네덜란드 정부는 유대인들이 급격히 성장하자 자국민들의 상업 적 경쟁력을 보호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1632년에 법령으로 유대인의 길드 가입을 금지시켰다. 당시 길드는 관련 업종의 독과점을 위한 기구였다. 작업시간이나 작업의 종류, 상품의 질 등을 세세하게 규제했고 길드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물건을 만들지도 팔지도 못했다. 유대인에게는 자국민과 충돌하거나 경쟁할 우려가 적은 대외무역과 금융 분야, 약사나 의사, 히브리서 출판 등만 허용되었다. 그 결과 조합이 없었던 직물업과 다이아몬드 세공업에 유대인이 몰렸다. 길드 가입 금지조치는 특히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에게 타격이었는데, 세파르디계 유대인들은 이미 덩치가 커져 조합 밖의 도매상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덜란드 정부의 이러한 제약이 유대인에게는 오히려 보약이 되었다. 산업과 무역업의 규모가 커진 상태에서 상업에서 배제된 유대인들은 실물경제를 뒷받침할 금융산업에 힘을 쏟았고 당연히 금융계와 증권계를 그들이 선도했다. 이후 금융산업이 실물경제를 리드하면서 유대인 의 자본축적이 급속도로 진행된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 토대를 구축한 유대인」 중에서
영국의 청교도 혁명 이후 유대인은 물 만난 고기였다. 그 이유는 청교도 정신이 유대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는 구약 성서의 정신을 이어받아 구약성서에서 신을 찾았다. 청교도가 ‘유대인의 신파’라고 불린 이유 중 하나이다. 청교도와 유대교 사이에 커다란 공통점이 있었다. 세계의 종교들은 부를 부정하고 탐욕을 억제하라고 가르친다. 가톨릭은 돈과 부귀를 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불교는 모든 물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도록 ‘무소유’를 설파하며 힌두교는 아예 아무것도 소 유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슬람교도 물욕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종교가 한결같이 물욕을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딱 두 개의 종교가 부를 인정하고 부자가 돼도 좋다는 교리를 강조한다. 이 두 종교가 바로 유대교와 청교도이다. 칼뱅은 ‘깨끗한 부자’를 강조했고 유대교도 부자가 축복받은 것임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유대교는 부는 인간을 교만하게 하여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으며 금전욕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의와 부패로 이끈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크롬웰의 영국, 유대인을 반기다」 중에서
한 마디로 그들은 18세기 경제체제에서 종합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더 낫고, 더 쉬우며, 더 싸고, 더 빠른’ 방식들을 끊임없이 모색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합리주의’를 추구했다. 이는 세상의 부란 다른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원리를 일찍이 터득한 것이었다. 옛 날부터 유대인들은 고객들의 필요와 욕구를 경쟁자보다 더 빨리 파악하고 만족시키는 ‘기업가 정신’에 충실했다. 따라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은 경쟁자보다 훨씬 나은 가치를 제공해 고객을 만족시켰다는 뜻이다. 이른 바 현대 경영학에서 이야기하는 ‘고객만족 경영’이었다. 유대인들의 상업 적 재능과 고객만족 경영은 전통과 규범에 얽매어 있던 영국의 수공업자조합을 17세기 말에 무력화시킨 것에서도 드러난다.
출판사 리뷰
부의 권력을 창조해낸 유대인들의 힘의 원천을 밝혀내,
지금 우리에게 그들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사태로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는 2013년 현재 여전히 진행 중인 전 세계적 고민거리이다. 유럽 발 경제 불황 뉴스가 우리 안방까지 찾아들고, 주식시장은 그때마다 휘청거린다.
반면 이스라엘의 경제적 성과는 눈부시다.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세계 경제와 달리 최저의 실업률과 호황을 맞은 부동산 시장, GDP 대비 R&D 투자비율 세계 1위와 같은 지표를 보여주고 있다.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연일 이슬람 국가들과의 전쟁 공포에 휩싸인 나라에서 어떻게 된 일일까. 비단 자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 특히나 경제대국 미국의 경제를 주무르는 유대인들의 부의 지배력과 저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유대인의 내밀한 저력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밝혀낸다
22년간 KORTA에서 근무하며, 뉴욕, 밀라노, 마드리드에서부터 상파울루까지 곳곳의 무역 현장을 누비며 다양한 경제 환경을 경험한 저자는, 고통과 수난의 역사 속에서 반대급부로 ‘부’에 눈을 뜨게 된 유대인들을 주목하게 됐다. 금융산업을 비롯한 서비스산업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대인이 있었고, 역사를 통해 볼 때 유통·금융·서비스산업의 창시자와 주역들은 대부분 유대인임을 확인하게 됐기 때문이다. 저자가 세계 경제사가 유대인의 발자취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보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유대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지식에 불과했다. 유대인의 역사나 유대인에 대한 정보 또한 우리의 시각으로 저술된 것은 거의 없었다. ‘민족적 자부심이 뛰어나며, 척박한 환경대비 교육열이 높다’와 같이 우리 민족과 유사한 점을 찾으며 ‘유대인을 배우자’고 여기저기서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정작 우리가 유대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파편적이고 피상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기존 유대인에 관한 책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유대인의 실체적 역사에 접근해보고자 했다.
이 책은 쉽고 간결한 문체로 그려낸 한편의 대하 다큐멘터리이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관한 지엽적 서술이 아니라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살았던 수메르 문명부터 시작하여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를 횡으로 보고, 그 큰 흐름 속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정을 종으로 함께 엮어 경제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한다. 경제의 역사를 주도한 유대인들이 어떻게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파노라마처럼 들여다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역사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그들의 의식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믿는 ‘유대인의 역사책’인 《구약성경》을 흥미롭게 인용하고 있다.
또한 ‘소금’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던, 일반 독자들도 흥미로울 주제들의 역사를 따로 뽑아서 유대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고, 이런 것들이 경제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등을 연대기적 흐름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팩트 위주의 서술은 얼핏 이 책이 단순히 역사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서술 방식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잘 몰랐던 유대인들의 특징과 세계 경제사의 흐름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도록 깊고 넓은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4천 년 방랑의 역사가 만들어낸 유대인의 키워드
‘신앙’·‘배움과 교육’·‘자유와 개방’·‘신뢰와 신용’을 말하다
보통 패망한 민족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섞이고 그 과정에서 그 문화에 젖어들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민족에 귀속된다. 이것이 역사의 일반적 흐름이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난 이후 4천여 년의 ‘방랑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만의 유일 신앙과 독특한 이상을 가지고 역사와 맞섰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부의 역사’를 쉬지 않고 써왔다.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유대인을 박해하고 쫓아낸 왕조와 나라는 경제적 쇠락의 길을 걷고 유대인이 대거 몰려온 지역은 경제적으로 부흥하는 계기를 맡는 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부의 역사’를 만들어온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 주지하다시피 유대인들은 매우 종교적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이 타민족과 섞이지 못하고 온갖 박해를 받고 떠돌아다닌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대교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꽉 막히고 권위적인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신 이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보는 그들의 생각이 상명하달 대신 어느 누구와도 맞장 토론이 가능한 실무 중심의 소통형 사회를 만들었다.
둘째,《탈무드》를 비롯한 유대교 경전들에서는 부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신용에 대해 가르친다. 기존의 종교들은 경제적 가치나 활동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르치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경제적 활동에 긍정적인 태도는 새로운 시장이나 산업을 개발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이것이 중세암흑기를 거쳐 근대를 지나 나치시대의 박해에도 그들이 전 세계 돈줄을 쥐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다. 한편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 옮겨간 나라들의 가장 빛나던 시기가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던 때라는 역사적 고찰은 이 책에서 짚어낸 가장 뛰어난 대목이다.
셋째, 배움과 교육을 중시하기 때문에 창의성이 뛰어난 인재육성에 공동체가 공을 들인다. 자유로운 토론문화로 세대 간 소통이 원활하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유대인공동체) 사이의 긴밀한 유대로 빠른 정보수집과 활용이 가능했던 것 역시 유대인들의 장점이었다. 이는《구약》시대부터의 전통으로, 현재도 가장 첨단 산업인 세계 IT 업계의 대부분이 유대계가 창업한 회사들이다.
이 책이 꼽은 마지막 요인은 바로 공동체 간 강력한 유대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민족적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도 하지만, 종교적 이유로도 그들은 늘 가난한 이웃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모에 익혔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공동체 간 결속력을 높이고 천문학적 액수의 기부금을 통해 전 세계 유대인들의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기존의 경제 관련 도서들은 미국이나 유럽, 중국이나 일본에 국한된 좁은 시야의 서술을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세계 경제의 현재와 밑바탕을 유대인과 유대인의 역사에서 찾고 이것이 세계는 물론,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앞으로 우리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21세기 경제 동력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법과 문제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글로벌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반드시 일독해야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616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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