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동양평화사 (2024~) [해설서]/3.중국근현대사 (1840~1945)

[웹북] 청일전쟁 (1894~1895)

동방박사님 2024. 9. 2.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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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전 판화 .  고레치카 작

청일 전쟁

날짜 1894725~ 1895417

장소

만주와 한반도, 대만, 황해 일대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상실

대만 및 펑후 제도가 일본의 영토로 병합

랴오둥반도를 일본이 할양받으려고 했으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영유권 포기

청 내부에서 변법자강운동 시작

교전국

청나라의 기 청나라 일본 제국의 기 일본 제국

지휘관

청나라 광서제

청나라 서태후

청나라 이홍장

청나라 정여창 †

청나라 등세창 †

청나라 유곤일

청나라 마건충

청나라 증국번

청나라 원세개

일본 제국 메이지 천황

일본 제국 야마가타 아리토모

일본 제국 이토 스케유키

일본 제국 노기 마레스케

일본 제국 이토 히로부미

일본 제국 고다마 겐타로

일본 제국 오야마 이와오

일본 제국 가와카미 소로쿠

일본 제국 오카모토 류노스케

병력

청나라 630,000 / 일본 240,616

피해 규모

청나라 사망자 50,000  / 일본사망자 12,000

청일 전쟁

청일 전쟁(한국 한자:淸日戰爭)1894724일부터 1895417일까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벌인 전쟁이다. 1894725일 일본 제국이 선전포고 없이 풍도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해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청일 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전쟁은 내내 일본 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895326일 펑후 제도 작전을 끝으로 청일 전쟁의 모든 전투는 종료되었고, 청나라와 일본 제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끝냈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는 1861년부터 청나라가 추진했던 양무운동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의미했으며,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근대화와 서구화의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는 조선과 류큐 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잃었으며, 이로 인해 동아시아의 열강이 기존의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고 일본 제국의 승리로 서구 열강은 일본을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로 여기게 되었다.

청일 전쟁은 청나라와 조선의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 내부에서 캉유웨이와 쑨원 같은 사상가들은 청일 전쟁의 패배로 청나라 사회 및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개혁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조선의 경우 1894년부터 시작되었던 갑오개혁이 1895년 일본 제국의 간섭과 친일파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갑오전쟁(중국어 간체자: 甲午战争, 정체자: 甲午戰爭, 병음: Jiǎwǔ Zhànzhēng 자우잔정), 일본에서는 일청전쟁(일본어: 日清戦争 닛신센소),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 전쟁(영어: 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불린다.

배경

국외적 배경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은 그 관심을 조선으로 돌렸다.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약체화를 목격하고, 만주를 비롯한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또한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을 병합, 식민지화하려고 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강경파는 정한론을 주장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주류의 반대로 좌절되었으며, 조선에 대해 포함외교를 통한 통상 요구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일본은 과거 미국이 자기에게 했던 방식을 모방하여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1876227(음력 23)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선에 부산, 원산, 인천 3개 항구를 개항시키며 경제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서양 열강에서 민중들이 왕조를 타도하는 흐름에 생기는 와중에 일본에서 막부가 타도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조선에서도 여러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청나라가 개입하여 대원군을 납치하고 난을 진압한 후 종주권을 구실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대청 관계와 개화 정책의 노선을 둘러싸고, 기성 관료를 중심으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받아들이고, 양무운동을 모델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려는 동도서기파와 소장 관료층을 중심으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거부하고,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려는 변법개화파 간 정치투쟁이 발발하였다.

변법개화파가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3일 만에 청나라 군사고문 원세개의 개입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 군대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패배한 변법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영국의 중재로 청나라와 일본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듬해 1885년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킨다.

조선의 군대를 훈련하기 위한 훈련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

조선에서 청일의 충돌

1894,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혁세력인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였다. 일본은 그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막고 청나라의 전함에 실어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에서 그를 다시 부관참시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였을 때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고, 엽지초 휘하 2,8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일본은 일본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원정군인 오시마 요시마사 휘하의 병력 8,000명을 조선으로 보냈다. 이들은 조선의 항의에도 189469일 이후 인천에 상륙, 723일 고종 임금이 거하는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조선군은 대항하였다. 고종이 직접 조선군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지시를 내려 해산한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조선의 내각을 김홍집, 박정양, 민영달 등의 친일 인사로 교체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청나라는 조선의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국 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은 대조선 정책의 일환으로 4가지 계획안을 준비했다. 각 계획은 다음과 같다.

()의 계획은 앞서 기술된 조선의 지식인들과 일본이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면서 내세우던 동양 평화론과 함께 조선의 자주성 이야기의 내용 그대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진정한 독립국으로 조선을 만들고 그 자주도 맡기며 일본도 간섭을 안 하고 타국의 간섭도 허용을 하지 않는 형태로 조선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맡긴다는 것.

()의 계획은 명의상의 독립국으로 공인하지만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그 독립에 부지하며 타국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고자 한다는 계획.

()의 계획은 조선 영토의 안전은 청일 양국이 담보한다는 청국과의 외교 교섭을 하는 것이 계획.

()의 계획은 일본이 서양 국가들과 청나라에 제의하여 조선을 유럽의 벨기에나 스위스 같은 영세 중립국으로 만든다는 계획.

그러나 무츠 무네미츠 외교 대신은 조선이 영구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봤을 뿐만 아니라 친일 내각을 집권시켜도 다시 친청 내각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 허사가 된다고 판단함과 동시에 전쟁 시에 일본이 얻는 문제들을 고려할 경우를 고려하여 을의 계획안을 기반으로 해서 차후 논의를 지속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내세우는 명분으로 활용하였다. 이것이 바로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대조선 정책의 기초적 발향으로서 1894817일 내각에서 결정하게 된다.

진행

18947,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약 3,000 ~ 3,500명 정도였으며,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일본의 목표는 우선 아산의 청국군을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이었다.

풍도 해전

1894년 풍도 해전, 판화

1894725,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済遠)과 군함 광을(広乙)과 마주쳤다. 이들은 아산으로 물자를 나르는 또 다른 청나라의 군함 조강호와 만나기 위해 아산을 떠나 있었다. 1시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여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탈출하였다.

청나라에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 선박회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 소유의 2,134톤급 영국 상선 가오슝호가 있었는데, 이 배는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으로, 골즈워디(T. R. Galsworthy) 선장과 64명의 승무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가오슝호는 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가 적재되어 있었으며, 조강호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고문인 독일의 포병장교 하네켄 소령(Major von Hanneken)도 승선하고 있었고, 7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도고 헤이하치로 선장이 지휘한 방호순양함 나니와가 두 배를 가로막았다. 군함은 결국 포획되었고, 일본은 가오슝호에 나니와호를 따를 것과 승선한 유럽인들은 나니와로 옮겨탈 것을 요구하였다. 어쨌거나, 승선한 1,200명의 중국인들은 다시 돌아갈 것을 원했고, 영국 선장과 선원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4시간의 협상 끝에, 도고 선장은 사격할 것을 명하였다. 유럽인들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중국인들은 이들을 사격했으며, 일본군은 승무원을 구조하였다. 가오슝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국 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법으로 처리되었다.

성환과 평양 전투

평양 전투 (1894).

조선인 병사와 중국인 포로
1894년 평양 전투, 미즈노 도시가타의 판화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3,500명의 일본군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성환(현재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한 4,0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1894728,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100여명에 불과했다.

81일에는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84일 이전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다. 15,000명의 수비군은 일본군을 저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대대적으로 전투에 대비하였다.

915, 일본군은 여러 경로로 평양에 모여들었다.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항복시켰다. 어쨌든, 폭우와 어둠을 이용하여 잔존 병력은 평양을 빠져나와 의주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는 사망자 1,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에 달했으며, 일본군은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916일 아침, 평양성에 입성하였다.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황해 해전

황해 해전 (1894)

압록강 전투 또는 황해 해전은 청일 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전으로, 1894917일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싸웠으며, 청나라 측은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선원들의 경험과 기동력의 열세로 참가한 10대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4척 파손에 사망자 90, 부상은 200명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4,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 부근에 상륙하였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피신하였다.

압록강 전투

평양에서의 격퇴로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북부를 떠나 압록강가의 요새에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은 병력을 보충한 후 18941010일 빠른 속도로 만주로 진격했다. 1024일 밤, 일본군은 몰래 압록강을 건너 부교를 띄웠다. 다음날 오후에는 단둥 동쪽 호산의 주둔기지를 공격하였다. 오후 1030, 청나라 군대는 방어 위치를 버리고, 다음날까지 단둥으로 후퇴하였다. 야마가타 장군이 지휘하는 제1(3,5사단으로 구성)은 단둥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여 사망 4, 부상 14명의 희생만으로 중국 영토에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가쓰라 다로의 3사단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청국군을 쫓아 요동반도의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오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육군 2사단은 요동반도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들을 점령하였고, 여순항은 일본군에 포위되었다.

여순 함락

18941121일까지,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여순에 거주했던 수천 또는 2만 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여순 대학살이라 한다. 18941210일까지 요동의 건양이 일본군 1사단에 점령되었다.

웨이하이 요새 함락

북양함대는 여순항을 거쳐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육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웨이하이 전투는 육군과 해군이 동원되어 1895120일부터 212일까지 23일간 진행되었고, 웨이하이 요새는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진격하여, 1895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35일에는 잉커우 외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동중국해 점령

1895326, 일본군은 타이완 부근의 펑후 제도를 희생자 없이 점령하였고, 같은 해 329일 가바야마 스케노리 지휘하에 타이완에 상륙,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동중국해는 사실상 일본의 영역처럼 변하였다.

전쟁 종료 및 영향

시모노세키 조약 문서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4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조선에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 냥()을 일본에 지급하였으며, 랴오둥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할양하였으며,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여 필연적으로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요동 반도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반환되었다.

조선 정부는 18951, 대내로 일본의 압박으로 종전의 청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왕호를 대군주로, 왕비는 왕후로, 왕세자는 왕태자로 격상하여 호칭한다. 대외로 삼국 간섭 이후에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에 큰 위협을 느꼈고, 1895년 음력 820(양력 108)에는 주조선 일본 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2개 대대가 왕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시해하였다. 그 뒤 대군주에게 왕후의 폐출 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하였다. 대군주가 그것을 거부하자 왕태자(순종)에 칼을 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조선을 압박하여 을미개혁을 실행하였으나, 민중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8962,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조선 내에서 일본의 세력은 감소하였다. 이듬해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한편,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에 치명타를 주었다. 이러한 경향이 훗날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이후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의 치열한 대립을 펼친다.

또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출정한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이대로 곧장 중국으로 쳐들어가 성경과 길림과 흑룡강 3성을 점령하여 일본의 수중에 넣고, 북경까지 진공하여 보물과 고서적 같은 귀한 재보를 약탈하라는 내용을 담은 글을 연일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민중, ‘국민’이 되어 전쟁에 협력하다

청일전쟁 통사를 다룬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기존 청일전쟁 관련 책과 몇 가지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 국내에 출간된 책들은 주로 정치, 외교, 군사적 관점에서 청일전쟁을 다뤘지만, 이 책은 언론과 민중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국민’을 탄생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이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청일전쟁은 근대 일본이 치른 첫 대외 전쟁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경제의 근대화와 함께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청일전쟁은 왜 시작되었던 것일까? 당시 일본의 민간인이자 지식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전쟁을 가리켜 문명국인 일본과 야만국인 청의 전쟁, 즉 “문야文野의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언론을 통해 전쟁 지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스스로 군사 헌금 조직화의 선두에 서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국민도 이 주장들을 받아들였다. 곧 ‘문명 전쟁’론이나 ‘문야의 전쟁’론은 국민의 내셔널리즘과 전쟁 협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저자는 이처럼 정치인, 지식인, 민간인이 하나가 되어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민간인들은 ‘국민’이 되어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전장에서 병사·군부로서 전쟁을 체험했고, 후방 지역 사회에 남은 압도적 다수는 다양한 언론 매체가 전하는 정보를 통해 전쟁을 ‘체험’했다. 이들의 전쟁 ‘체험’과 전후의 전몰자 추도, 또한 전쟁 중에 친숙해진 ‘군인 천황’상에 대한 숭배를 통해 근대 일본의 ‘국민’이 형성되어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오타니 다다시 교수는 일본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미디어사를 전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 정부의 대외 언론 공작과 당대 일본 언론들의 모습, 국민들이 이런 언론을 어떻게 대하는지 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 당시 일본 정치를 책임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나 무쓰 무네미쓰를 다른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곧 이들이 당시 펼쳤던 정치와 외교가 어떤 것이었나를 살피면서, 과연 청일전쟁이 꼭 일어나야 했던 전쟁이었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정치인, 지식인, 민간인 등의 협력 관계를 살피면서 전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도 질문하고 있다.

당시 일본 군인들의 모습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전투를 하고, 중국 대륙에 진출한 상황, 그리고 대만을 점령한 상황들이 세세하게 나와 있다. 일본군이 저지른 ‘조선 왕궁 점령 사건’이나 ‘뤼순 학살 사건’을 다루면서 일본의 ‘역사 위조’를 지적한 점도 다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조선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구속했다. 이 사건을 일본의 역사에서는 먼저 사격을 가한 조선군에 일본군이 반격해서 왕궁을 점령한 자위적·우발적 사건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견해가 명백한 ‘위조’라고 말하면서 일본 공사관과 혼성 여단이 사전에 계획해서 실행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뤼순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도 일본 역사에서는 부정되거나 규모를 축소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상세히 다루면서 뤼순 학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문제는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목차

머리말
청일전쟁 관련 연표

제1장 | 전쟁 전야의 동아시아

1. 조선의 근대와 톈진조약 체제
‘속국’과 ‘자주국’ | 개화 정책과 임오군란 | 청일의 대응 | 갑신정변-급진 개화파의 쿠데타 실패 | 조슈파와 사쓰마파의 대립 | 톈진조약과 일본, 청, 영국의 협조 체제 | 극동 러시아-이미지와 실상

2. 일본과 청의 군비 확장
청의 군비 근대화-회군의 팽창 | 북양 해군의 근대화 |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군비 근대화 | 우선시된 해군의 군비 확장 | 육군, 7개 사단 체제로 | 육해군 연합 대연습 | 참모본부의 대청 전쟁 구상의 형성

제2장 | 출병에서 전쟁으로

1. 갑오농민전쟁과 청일 양국의 출병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성립 | 이토 내각의 고난-조약 개정과 대외경파 | 갑오농민전쟁-동학의 확대와 봉기 |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 | 청과 일본의 출병

2.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청일 정부
청일 양군의 조선 도착 | 이토 수상의 협조론, 무쓰 외상의 강경론 | 제1차 절교서와 영국·러시아의 간섭 | 청 정부 내의 주전론과 개전 회피론

3. 전쟁이 시작되다.
7월 19일의 개전 결정 | 풍도 해전 | 조선 왕궁 무력 점령 | 혼성 제9여단의 남진 | 성환 전투 | 선전 조서를 둘러싼 혼란-전쟁은 언제 시작되었나? | 개전에 대한 메이지 천황의 생각

제3장 | 한반도 점령

1. 평양 전투
전쟁 지도 체제 | 단기전에서 장기전으로 | 제5사단 본대, 조선으로 | 짐을 옮기는 병사의 부족-“수송의 한계” | 제3사단의 동원 | 노즈 제5사단장의 평양 공격 결의 | 청과 일본의 무기 차이 | 격전-혼성 제9여단의 정면 공격 | 평양 점령과 청군의 패주

2. 황해 해전과 일본 정세
9월 17일의 조우 | 승리-과도기의 군사 기술과 제해권 확보 | 메이지 천황과 히로시마 대본영 | 대본영 어전 회의 | 청일전쟁 와중의 총선거 |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7 임시 의회

3. 갑오개혁과 동학 농민군 섬멸
갑오개혁-친일 개화파 정권의 시험 |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부임과 조선의 보호국화 | 제2차 농민전쟁-반일·반개화파 | 동학 농민군에 대한 제노사이드

제4장 | 중국 침공

1. 일본군의 대륙 침공
제1군의 북진과 청군의 요격 체제 | 압록강 도하 작전 | 가쓰라 사단장과 다쓰미 여단장의 독주 | 제2군 편성-뤼순반도 공략으로 | 무모한 뤼순 공략 계획

2. ‘문명 전쟁’과 뤼순 학살 사건
구미의 눈과 전시 국제법 | 뤼순 요새 공략 작전 | 11월 21일, 어둠 속의 뤼순 점령 | 학살-서로 다른 사건의 모습 | 왜 일본군은 학살 행위를 벌인 것인가?-병사의 종군 일기를 읽다 | 서양 각국에 대한 변명 공작

3. 동계 전투와 강화 제기
제1군과 대본영의 대립 | 야마가타 제1군 사령관 경질 | 제1군의 하이청 공략 작전 | 랴오허 평원의 전투 | 산둥 작전과 대만 점령 작전 | 산둥 작전으로 북양 해군 궤멸

제5장 | 전쟁 체험과 ‘국민’의 형성

1. 언론과 전쟁-신문, 신기술, 종군 기자
조선으로 향하는 신문 기자들 | 강화되는 언론 통제 | 국민의 전쟁 지지와 정보 개시 | 신기술 도입과 《아사히신문》의 전략 | 《아사히신문》의 취재 체제 | 고급지 《시사신보》의 전쟁 보도 | 아사이 주와 ‘화보대’ | 《국민신문》과 일본화가 구보타 베이센 부자 | 사진과 회화의 차이 | 가와사키 사부로의 《일청전사》 전 7권

2. 지역과 전쟁
의용병과 군부 | 군부 모집 | 병사의 동원과 환송 | 전장과 지역을 연결한 지방지 | 《후소신문》 기자 스즈키 게이쿤 | 성황이었던 전황 보고회 | 개선, 귀국과 사람들의 환영 | 추도와 위령-‘선별’과 도호쿠의 사정 | 후쿠시마 현청 문서가 남긴 ‘지역과 전쟁’ | 동원과 전시 사무-정·촌장들의 ‘근무 평정’ | 청일전쟁과 오키나와 | 그 후의 오키나와

제6장 | 시모노세키 강화조약과 대만 침공

1. 강화조약 조인과 삼국 간섭
직례 결전 준비 | 정청 대총독부의 이동 | 강화 전권 사절에 취임한 이홍장 | 교섭 개시와 이홍장에 대한 테러 | 청의 고뇌와 조약 조인 | 삼국 간섭-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랴오둥반도 환부 요구 | 랴오둥반도 반환과 ‘와신상담’

2. 대만의 항일 투쟁, 조선의 의병 투쟁
대만총독부와 ‘대만민주국’ | 증파되는 일본군 | 남진 작전 수행에 대한 격렬한 저항 | ‘대만 평정 선언’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전투 | 민비 살해 사건 | 항일 의병 투쟁과 아관파천

종장 | 청일전쟁이란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규모 | 전쟁 상대국과 전쟁의 계속 기간 | 누가, 왜, 개전을 결단했는가? | 미숙한 전시 외교 | 곤란한 전쟁 지도 | 전비와 청일의 전후 경영

후기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
 
좋아요공감
 
 

'34.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1.한국근대사'의 다른글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8084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
130년 전 조선인들이 치러낸 ‘남의 나라 전쟁’

130년 전 전쟁을 지금 소환하는 이유

지금으로부터 꼭 130년 전인 1894년 7월 시작된 청일전쟁은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운명을 가른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청나라는 서양 열강이 아닌 ‘섬나라’에 참패한 것을 계기로 온갖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패망이 가속화되었다. 일본은 ‘늙은 대국’에 압승을 거두며 근대화의 선도국임을 입증하며 이후 러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까지 군사적 제국주의의 길을 달려나갔다.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기까지 하지만 타력에 의한 자주독립국의 한계에 부딪쳐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 러시아와 북한의 제휴, 중국과 대만의 갈등 등 한반도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은 만큼 청일 양국의 틈바구니에서 원치 않는 전장戰場이 되어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국가 운명도 비틀린 당시 조선의 역사를 들춰내는 것이 반면교사로서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목차

책을 내면서

서설-동아시아 삼국의 청일전쟁사
청일전쟁 주요 연표

[1부] 은폐와 진실: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보호국’ 구상

1. 일본군의 조선 왕궁(경복궁) 점령에 대한 재검토
1─조선 파병 결정과 전쟁으로 가는 과정
2─왕궁 점령 실행의 구체상
왕궁 점령계획과 세부 기획자들|왕궁 점령의 실제 상황|일본 측의 사후 조치
3─왕궁 수비병의 활동에 대한 재인식

2.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대한 반향
1─피란과 그 후유증
‘서울 엑소더스Seoul Exodus’|지방의 사례
2─민심 수습책과 서울 빈민 조사
3─인식론의 방향
왕실의 ‘이중외교’|정부 관료의 입장|재야유생과 의병의 논리|동학농민군의 인식과 대응

3. 청국군의 동향과 일본군의 출동
1─청국군의 출병과 동원
병력 편성과 출병|청국군의 요구사항과 영접 준비|영접관 편성과 영접 내용|동원 내용 분석|동학농민군 진압 준비
2─일본군의 조선 파병과 동원
대본영의 출병계획과 실행|혼성여단의 아산 출병|물자와 인부 징발|병참체계 구축

4. 일본의 조선정책: ‘보호국’ 구상과 실현 과정
1─전시 조약과 장정의 강제
〈조일잠정합동조관〉과 〈(조일)양국맹약〉|〈신식화폐 발행장정〉 시행
2─‘보호국화’의 내용과 결과
3─보호국 프로젝트의 연쇄

[2부] 야만의 전쟁과 휴머니즘: 풍도 해전·성환 전투

1.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
1─풍도 해전과 지역민
풍도 해전과 결과|지역민의 대응
2─성환 전투와 청국군의 ‘선승후패’
3─청국군의 패주
4─프랑스 신부 살해사건
5─조선인 피해 상황

2. 동원 시스템과 군표 발행계획
1─동원 시스템
일본인 인부 모집과 파견|조선인 인부 동원
2─대용증권(군표) 발행계획

3. ‘야만의 전쟁’과 선전
1─일본군 서울 개선식과 전리품 순회 전시
2─‘전쟁영웅’의 신화와 현실
3─‘황은皇恩’으로 은폐된 가족의 비극

4. 전쟁과 언론인의 윤리와 책임
1─종군기자: 전쟁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
2─일본 주요 언론에 보이는 ‘조선 이미지’
김옥균 암살 관련 보도|동학농민군 관련 보도|관군·청국군과 일본군에 대한 상반된 논조|정치·사회상의 왜곡 전달
3─한 일본인 종군기자가 본 청일전쟁과 조선: 니시무라 도키스케의 《갑오조선진》 분석
니시무라 도키스케의 행적|서울 사정과 민심 동향|주요 정치가와 ‘조선 개혁’|일본군과 청국군·조선 군인들|동학농민군의 동향

[3부] 반성 없는 역사의 반복: 평양 전투와 평안도의 현실

1. 평양 전투 직전 청·일군의 동향
1─후발 청국군의 인력 동원·징발과 민원
청국군의 평양 도착|물자 및 인력 징발|전쟁 준비와 동향
2─일본군의 인력 동원과 현지 징발
북상 행군|비협조 관리의 교체|인마 징발의 실상
3─중화 전투와 지역민의 반일운동
일본군 선발정찰대 파견과 전투|현지 주민의 저항

2. 평양 전투의 내용과 평가
1─선교리·모란대·현무문 전투
선교리 전투|평양성 전투|전투 결과
2─청국군 패주 후의 상황
‘평양 제노사이드Pyongyang Genocide’|량치차오와 청국 정부의 패인 분석|일본군 제1군 사령부 편성과 북상
3─전쟁특수와 모험상인

3. 평양과 평안도의 현실
1─‘전시 대징발’
물가 폭등과 한전 시가 앙등|징발의 여러 사례|되돌려받지 못한 군용수표
2─지역별 황폐상과 후유증
경기 북부·황해도·평안도 상황|패잔 청국군의 음행과 노략|일본군의 일탈과 지역민의 질고|병참부의 촌락 및 가택 수색
3─청국군 포로와 조선인 참살 사례
평양 전투 포로 참수|참살의 일상화

4. 북진 물자와 노동 인력
1─수송과 병참
인원 편성과 수송|병참지 상황
2─임금과 인력
임금 지급체계의 혼선|일본인 인부들의 패행
3─압록강 전투와 조선인 인부의 도강

맺음말을 대신하여- ‘유원지의’와 ‘내자불거’의 상생 네트워크

저자 소개 

저 : 조재곤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연구교수로 있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 근대 경제와 정치·사회 변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근대사회와 보부상』(혜안, 2001), 『보부상: 근대 격변기의 상인』(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그래서 나는 김옥균...

책 속으로

청일전쟁의 첫 단추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이 사건의 경위에 대해 일본군 보병 1개 연대와 포병, 공병이 조선 정궁인 경복궁에 입성하려 할 때 조선군이 발포했기에 일본군이 이를 추격하여 궁궐로 들어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메이지 27년 7월 23일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일본 참모본부도 이를 ‘한병韓兵의 폭거’라 하면서 우발적 사건으로 축소하여 기술하였다
--- p.38

일본군의 조선 출병의 가장 큰 명분은 일본인 ‘거류지 보호론’이었다. 일본은 동학농민군이 투쟁을 중단하면서 조선의 치안이 진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거류지 보호’를 들어 출병했다. …… 그러나 일본 조계는 인천 주재 영사 노세 다츠고로를 통해 혼성여단의 인천 진주에 대해 항의했다
--- p.46

7월 23일 당일 오토리 공사는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궁궐 부근에서 조선 병사가 “아무 이유 없이” 일본 호위병에게 발포하여 부득불 대응 차원에서 발포하게 되었으니, 조선 정부가 “부당한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조회했다. 이에 대해 7월 24일 조병직은 궁궐 밖이 아니라 궁궐 안으로 일본군이 “난입”함에 따라 총격전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일본군은 즉시 궁궐에서 철수하라고 주장했다
--- p.57

조일 양국 간 병력 교체는 왕궁을 점령한 지 한 달여 만인 8월 24일 오전 11시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궁궐에서 철수한 일본 군대는 광화문 바로 옆의 장위영으로 이동하여 일정 기간 주둔했다. …… 일본의 궁궐 내 경찰 파견에 대해 조선 정부는 반발했으나, 결국 일본이 무기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입궁하는 모든 사람은 일본군의 증명서를 받아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통행할 수 없었다
--- p.64

조선 왕궁 수비병은 7월 23일 하루에만 궁성 안과 밖에서 세 차례, 북악산에서 두 차례 등 총 다섯 차례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시간 순으로 궁성 내 평양 병사(징상 기영병徵上 箕營兵) 500명의 1차 교전에 이어 광화문 밖 서편 장위영 병사 300명의 2차 교전, 창경궁 흥화문 앞 통위영병 200명의 3차 교전 및 오전과 오후에 걸친 경복궁 북방 북악산(백악) 퇴주 조선 병사의 두 차례 교전(평양 병사와 장위영 병사의 연합공격)이 이어진 것이다
--- p.66

황현은 이렇듯 병사들의 항전 의지가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사격 중지 명령으로 “모두 통곡하면서 끝내 성을 버리고 흩어져 달아났다”고 썼다
--- p.69

왕궁 점령 한 달 전부터 일본군은 서울 사대문을 매일 오후 7시 반에 폐쇄해 자유로운 왕래를 차단했다. 서울에서 관리를 하던 김약제는 …… 요충지도 모두 일본 군대가 장악하자 인심이 점점 변하여 도성 사람들은 노인네를 부축하고 어린애를 이끌며, 꼬리를 이어 도성을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는 “도성 밖의 10분의 9가 비었고, 길 위에 사람들의 통행이 매우 드물었다. …… ”
--- p.77

일본군은 왕궁 점령 과정에서 500여 년에 걸쳐 내려온 조선 왕실의 보물 및 관청의 집기, 군영의 무기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일본과 가까웠던 개화 인사 김윤식마저 성안의 인가는 대부분 세간을 모두 버리고 떠나서 텅 비었고, 내별고內別庫에 쌓아 둔 돈·재화·잡물들은 모두 일본인이 약취했다고 지적했다
--- p.88

일본영사관에서는 일본에서 보낸 3만 엔으로 인천에서 백미 367석을 구입하여 마포 현석(현 서울 마포구 신수동 일대)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조선의 신화폐와 미곡을 반반씩 제공하기로 하고 …… 총 2,613호에 총지급액이 백미 391석 9두 5승, 금전 7,678원 75전이었다. 이는 일본 당국이 서울 상황 전반을 조사하여 통치 전반에 활용하는 한편 피란 과정에서 이반된 민심을 일시적이나마 수습하고자 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조치였다
--- p.95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전후로 한 청·일군의 동향을 살펴보면, 먼저 청국군 다수는 평양을 중심으로 조선 북부 지역에 포진하였다. 충청도에서는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각처로 파견되었던 청군의 일부가 아산으로 귀환하였다. 240 반면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곧바로 교전을 위해 청국군 주력이 주둔하던 아산 지역으로 전함을 대거 급파하는 형국이었다. 7월 25일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는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청국군을 축출하는 데 일본군의 협조를 요청한다는 형식적 절차를 마련하였다. 이날 일본 해군은 아산 앞바다 풍도 일원에 있던 청국 함대를 기습적으로 선제 공격했다
--- p.122

7월 25일 오전 7시와 8시 사이에 북양해군 소속 순양함 제원호와 남양수사 포함 광을호로 구성된 청국 함대가 요시노·아키츠시마·나니와 등 3척으로 구성된 일본 함대와 남양만 앞바다에서 맞닥뜨렸다. …… 요시노호는 오전 7시 25분 사정거리 3,000미터에서 청국 함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 광을호는 달아나다가 충청도 서산군 해안에서 암초를 만나 좌초되자 군인들을 상륙시킨 후 폭파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청국군은 10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 p.235

고승호에 승선한 1,116명의 중국 군인 중 871명은 사망했고 나머지 245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이 배 …… 선장 골즈워디 이하 18명은 구조되었지만 나머지 5명의 영국 선원, 필리핀과 중국 선원 56명은 수장되었다. 살아남은 일부 병사들은 고승호 침몰 후 프랑스함과 독일함·영국함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사람도 있었고 섬이나 육지로 헤엄쳐서 겨우 목숨을 구한 사람들도 있었다. …… 이 배에 동승했던 청국 북양해군 고문 독일인 콘스탄틴 폰 한네켄은 그해 7월 28일 자 증언에서, 물에 빠져 익사 위기에 있던 청국 군인에게 총격을 가해서 겨우 170여 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 p.238

청국 군함을 궤멸시킨 일본은 곧바로 아산만의 백석포에 군대를 상륙시켜 평택을 거쳐 성환의 직산에서 청국군과 대회전을 펼쳤다. 조선은 본격적으로 청일전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 일본군은 성환에서도 청군을 대파하면서 조선의 중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고, 패잔 청군은 관동과 관북을 거쳐 평양으로 퇴주했다
--- p.244

당시 서산·해미·홍주·덕산·예산 지역은 태안에서 온 청국 병사와 7월 29일의 성환 전투에서 패배하여 흩어진 병사들이 들어와 마을을 약탈하자 주민들이 놀라 달아나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은 그 와중에서도 전리품 획득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 p.247

성환 전투는 갑오년 전쟁 기간 중 청일 쌍방 간 제1차 지상전으로 비록 규모가 작은 전투였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스기무라에 따르면, 성환의 승전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인심은 평온을 되찾아 종로의 큰 상점들도 7월 30일부터 문을 열었고, 8월 1일부터 시내는 점차 인적이 많아져 거의 이전 모습을 회복했다고 한다. ……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아산 전첩의 결과, 경성 부근은 이미 중국 군대의 형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조선 정부는 완전히 우리 제국이 장악하는 가운데 기쁜 소식이 곧바로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 p.257

8월 1일 일본 천황 메이지는 〈선전조칙〉을 공식 발포했고 같은 날 청국 황제도 〈개전조칙〉을 발포함으로써 전쟁을 공식화했다. 원래 일본의 선전포고 초안에는 ‘청국 및 조선국에 대한 전투를 선언’한다는 것이 들어있었는데, 최종안에서는 ‘조선국’이 삭제되었다. 조서에서 메이지는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광서제는 ‘중국의 번속’임을 강조했다. 전쟁에 임하면서 청국과 일본은 각각 조공을 매개로 하는 화이질서와 국제법을 명분으로 하는 공법질서를 조선에 제시했다
--- p.262

각읍의 연이은 보고에 의하면 서산·해미·홍주·덕산·예산 등지에서는 태안에서 온 병사와 성환 방면에서 흩어진 병사들이 퇴로를 찾지 못하고 마을로 들어와 약탈하여 놀란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고 한다. …… 청국군이 물러나자 7월 29일부터 일본군이 백석포를 거쳐 아산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객사와 산비탈 등에 주둔하는 한편 민가와 관청 건물에 들어가 남아 있는 전곡과 집기 등을 빼앗고 사직단과 관청의 장부를 불태웠다
--- p.269

청국군이 강원도 춘천에 도착한 것은 8월 22일 무렵이었다. 이곳에서도 청국군은 “가는 곳마다 횡포가 무쌍하여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젊은 부녀들은 만나는 대로 능욕 강간하며 길가의 집에 있는 개와 닭·소·도야지 등속은 있는 대로 다 잡아먹거나 끌고 가며 골골마다 조선 관가(즉, 관청)에서 주민을 강제로 부역을 시켜 짐도 지게 하고 부상병을 업게 하고 가마도 메게 하는데 …… 섭 대인(예지차오)·마 대인·왕 대인 등을 멘 십여 명의 교꾼들이 까딱 잘못하면 칼이나 총개머리로 사람을 막 때린다고 합니다”라 기록되어 있다
--- p.273

8월 18일 일본군은 짐꾼 중 짐을 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품삯을 주지 않았고, …… 이에 짐꾼으로 동원되는 것을 피해 조령에서 충주에 이르기까지 50리 근처 5개 동 백성들이 모두 피란하는 바람에 마을들은 텅 비게 되었다. …… 이 기간 병사와 유민 등의 피란은 섬까지 이어졌고 또는 나라 밖인 중국 지린 변강 및 산둥 지역 덩저우까지 이어졌고, 각종 유언비어도 난무했다
--- p.277

청일전쟁 기간 군표 발행을 결정하게 된 것은 개전 후 4개월 만인 1894년 11월부터였다. …… 군용수표는 군대 이동, 군수품의 대가, 차마 인부의 임금 지불을 위해 발행하며 …… 일본공사 오토리는 북진 일본군이 일본 지폐와 은화를 한전과 교환하여 사용토록 할 계획이었는데, …… 조선 정부에 증권 30만 원을 교부해 일본 백동화나 지폐를 교환자금으로 삼되 …… 그러나 예산 문제로 현금과 교환을 위한 지불준비금으로 총액의 3분의 1인 10만 원만 보내도록 했기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증권이었다. 따라서 대다수 조선인은 증권 받기를 거절했고 …… 이 기간 일본 외무대신은 노무자에 대한 임금 지불의 지연이 민중봉기의 한 원인이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 p.298

일본군 개선부대는 50~60명의 조선인 인부가 전리품인 깃발과 나팔, 종, 큰북 등을 들고 선두에 섰고, 보·기·포병, 공병대·치중대·위생대 등 각 부대가 차례로 정렬했다. 오전 5시, 개선부대가 일본군 막영지 동남방에 세운 개선문 밖에 집합하자 고종이 파견한 이완용이 오전 7시경 용산 근방에서 일본 군대를 맞이했다 …… 당일 오토리 공사와 오시마 혼성여단장은 경복궁에 입궐하여 고종을 알현했고, 오후 5시 친군 장위영 내에서 군부대신 조희연이 일본군 장교들을 초청하여 축하연을 거행했다
--- p.302

일본군이 서흥부사 홍종연에게 나무칼을 씌우고 조사하는 모습을 묘사한 종군화가의 그림, 평양 공격의 상세한 전투지도, 일본군이 청국 간첩에게 칼을 씌어 금천군수를 비롯한 조선인 관리에게 인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게재했다. 동학당과의 전투 과정에서 생포한 농민군 부상자를 일본 군의가 붕대를 매주고, 부사가 친척 등에게 넘겨 준 사실뿐 아니라, 수령 등 91명을 포획하고, 청풍에서 수령 등 130명을 죽인 사실도 게재했다
--- p.369

그가 본 서울의 일반민들은 수시로 모여서 무엇인가를 우왕좌왕 논의하고 소문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 대다수는 청일 간의 전투에서 일본의 승리를 믿지 않았다. 도키스케는 이에 대해 “하등 감각 없이 이를 관망한다”고 개탄했다. …… 전쟁의 풍문을 계층별로 느끼는 감이 달랐다고 했는데 ‘하등 인민’들은 허황된 말이라 하고, ‘중등 인민’은 승패의 사실이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오직 ‘상등 사회’의 몇몇만이 믿는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은 청국이 일본을 어린아이처럼 우습게 본다고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평양 대승의 보도를 접한 일본 거류민들은 집집마다 국기를 걸고 축배를 들었고,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가 서울 주둔 일본 군인을 초대해 축하연을 연 사실을 기록했다
--- p.388

성환과 아산의 전투에서 패한 예지차오 등은 관동과 관북으로 우회, 퇴주하여 평양에서 합류했다. 경복궁에서 왕실 호위를 하다가 일본군에 무장해제당하고 쫓겨난 평양의 기영箕營 징상병徵上兵도 합류했다. …… 고종은 자신이 발표한 정령은 왜인의 협박과 핍박에 말미암은 것으로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뜻을 외무참의 민상호를 통해 청국에 전달한 바 있다
--- p.412

당시 청국 측 기록에서도 압록강 변 의주부터 평양까지 이어지는 “연도의 시가에서는 한 사람의 흔적도 찾을 수 없고, 밭 가운데 수수와 조도 각 군대의 말먹이로 다했고, 옷 궤짝과 가구·솥이 도로에 널려있다”면서 가을 수확을 거둘 수 없게 되어 이들을 진휼하지 않으면 민심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며 8월 중순 평양 이북의 심각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p.420

북상하는 일본군은 개성의 전신국을 점령하고, 평양 방면으로 가는 전신도 차단하면서 전진했다. 일본 군대의 북진에 조선 정부는 미리 각 연도의 지방관에게 가급적 일본 군대에 편의를 제공할 것을 명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관내 각 군현의 지방관에 대한 인사권에 간여하여 교체하기도 했다. 9월 4일 혼성여단은 황해도 서흥부에 도착했다. 이때 청국군과 내통하면서 일본군의 징발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것을 독려한 혐의로 서흥부사 홍종연을 가두고 참모 나가오카 가이시가 직접 취조했다
--- p.435

성환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인의 반일 감정과 동원된 인부들의 도망은 계속되었다. 일본군 부대가 황해도 강령을 왕복하면서 해주 서쪽 취야장에 머물던 때 최윤학이라는 자가 일본군들에게 취사를 제공한 일로 동학농민군에게 살해당하고 가산도 모두 빼앗긴 일이 있었다. 8월 경기도 장단에서는 일본군 군량 수송 명목으로 군의 좌수 남형철이 ‘군량을 실어 보내는 수레를 대신하는 돈’이라 가칭하고 각 동 집강執綱을 비롯한 촌민을 수탈하고 각 면과 각 동에 강제로 징수하는 등 폐해를 일으켜 동민들이 원정原情을 올렸고, 그 결과 그는 다음 해 4월 경기감영을 거쳐 법부 고등재판소로 압송되었다
--- p.447

8월 말 오토리 공사가 평양에 밀정으로 밀파한 이규진의 보고에 따르면, “서흥부 이북의 조선인은 모두 청군에 가담했고, 일본인을 잡아들이는 자에게는 한 사람당 2,500관의 상금을 내걸어 수렵인은 소총을 손에 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작업을 폐하고 각자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길을 막고 있어, 마치 청군에게 일본인을 끌고 가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것과 같다”라면서, “청군보다 중화·황주 부근의 조선인이 더 위험하다”고 부연했다
--- p.462

청국 병사들은 안주·병현·창광산 등 세 갈래 길로 나뉘어 모두 군장·기계·치중 및 금은전백金銀錢帛을 버리고 맨손으로 도주했다. 마침 큰비가 내려 습한 숲에서 진흙탕을 밟아 넘어지는 등 아비규환의 상황이었고, 강을 건너다가 익사한 자가 10명 중 5~6명이었다 한다
--- p.473

평양 전투 당시 참혹한 병란으로 평양성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고, 선화당 밑에 시체가 즐비했는데 일본군을 피해 있다가 포격으로 희생된 이들이었다. 그 시체들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모두 불에 태웠으나 열흘 동안 태워도 다 타지 않았다 한다. 서양인 선교사의 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평양의 여러 전쟁터에서 청국군 시체 일부는 땅 위에 노출되어 있거나 흙을 약간 그 위에 뿌린 정도여서 지독한 악취가 나는 등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 p.480

당시 평양은 인구 2만여 명의 도시였다. 그러니 청국군 1만 5,000여 명의 군량과 군수 등을 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에도 평양 전투의 피란 상황 묘사가 매우 생생하다. …… 이인직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싸움에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는가. …… 무죄히 죄를 받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이요, 무죄히 목숨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이라, 이것은 하늘이 지으신 일이런가, 사람이 지은 일이런가”라고 부연했다
--- p.490

평양 전투 당시의 상황을 반추해 보면, 평양성의 담장은 높고 넓으며 형세도 험하여 방어하기에 좋고 청국군의 양식은 족히 한 달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며 무기와 탄약도 부족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군을 방어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적과 싸우려는 의지가 없이 겁을 먹고 황급하게 철퇴를 감행했고 결국 전투는 완패했다. 반면 일본군의 경우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평양 출병 부대 전원이 보급과 병참의 미비로 크게 곤경을 겪고 있었다. …… 만약 전투가 이틀 이상 계속되었더라면 일본군은 탄약과 양식 공급이 어려워 포위공격전은 실패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p.494

평양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일본군 북진에 갑오개화파 정부는 적극 협조했고, 선유사 권형진을 평안도 지역에 파견하여 전쟁 수행 협조와 민심 수습을 도모했다. 평양에 도착한 권형진은 …… 청국의 수백 년 압제를 벗어나게 해준 일본군에게 현지 주민들은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야 하며, 일본군은 주민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포고문이었다. 권형진은 이후 평양을 출발하여 북진하는 일본군의 인마와 미곡 징발에 협조했다
--- p.502

평양 북부의 정주는 집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졌고, 의주는 청국군의 약탈과 방화로 3,000호 가옥 중 2,000호 이하만 남게 되었다 한다. 평양은 6만여 명의 주민이 전쟁 시 1만 5천 명으로, 안주는 3,000호가 300호로 10분의 1 규모로 줄어들었다. 성천은 650호의 가옥이 250호로, 순안은 600호의 가옥이 60호로, 황해도 황주의 주민은 3만 명이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 p.536

신천은 촌락이 불타고 인민의 7할이 피란 후 돌아오지 않아 10분의 7은 경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다. 도로의 인민은 모두 물건을 지고 멀리 외곽으로 몸을 숨겼고 특히 부녀자들은 산중 또는 벽촌에 무리를 이루어 피란 가는 모양이었다. 오키는 그중에서도 평양·황주·순안·중화 부근의 피해가 가장 심해, 이 지역 사방 7~8리[조선 리 70~80리]는 모든 물건을 약탈당해 실로 닭과 개 하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 p.539

웨이루쿠이 군은 조선에 들어와 이르는 곳마다 노략·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조선을 구호하는 군으로서 도리어 조선을 유린했기에 이것이 곧 조선 사람들을 격하게 해서 왜에게 이용되는 바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의주로 도주했는데, 의주 사람들이 성을 막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두려움이 심했고 또한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p.544

출판사 리뷰

한국인의 시각에서 본 이 땅의 ‘고래 싸움’

그 역사적 의미에 비해 지금까지 우리는 청일전쟁에 관해 다소 무관심한 편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청일전쟁을 다룬 글은 길어야 한 쪽을 넘지 못한다. 조선 정부가 동학농민군 토벌을 요청하자 정나라 군이 진주했고, 일본군이 톈진조약에 따라 거류민 보호를 빌미로 출병했다가 전투가 벌어졌으며 그 결과 조선의 ‘보호국화’가 가속화되었다는 설명에 그치는 정도다. 게다가 당장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관련서도 많지 않을 뿐더러 그나마 일본과 중국 번역서가 주류다. 중국 출신의 작가 진순신이 쓴《청일전쟁》이 많이 읽히는 편이지만 이는 군담류의 ‘소설’이고, 진지한 연구서로는 하라 아키라나 하라다 게이이치 등 일본 학자들의 저술이 나왔지만 묵기도 했거니와 어디까지나 일본의 시각에서 다뤘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당시 조선인들의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봤고, 어떤 피해를 겪었으며,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의 학술연구교수로 한국 근대사를 꾸준히 천착해온 지은이가 “남의 나라끼리의 전쟁이되 조선인들이 치러야 했던” 청일전쟁을 꼼꼼하고도 치밀하게 짚은 이번 책은 그 이유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한중일의 다양한 자료를 망라한 실증적 분석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청일전쟁의 역사를 온전히 담아낸 것은 아니다. 역사교과서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을 청일전쟁의 단초로 해서 압록강 전투까지만 다루고, 중국 본토에서의 전투와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시모노세키조약까지는 소략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그나마 ‘황해해전’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고 치밀한 사료 수집과 중국·일본의 연구성과를 섭렵해 청일전쟁을 온전히 그려낸 점은 일반 독자든 연구자든 놓칠 수 없는 미덕이다. 이를테면 청나라 제당파帝黨派와 후당파后黨派 간의 갈등, 평양전투의 전과를 허위보고한 예지차오의 말로 등이 중국 측 자료 덕분이라면 경복궁을 점령했던 일본이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실시한 빈민구호사업의 선정기준과 지원금액이나 일본군의 북상경로를 상세히 전하면서 동원했던 조선인 인부의 임금까지 적시한 것 등은 일본 자료에 힘입은 것이다. 공문서는 물론 사적인 일기, 참전병 기록, 당시 신문기사 등 등 책에 인용된 다양한 자료를 접하다 보면 ‘과연 이 정도까지’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새삼 드러난 일본 군국주의의 민낯

상세하다 보니 읽을거리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일본 군국주의의 민낯을 보여주는 ‘전쟁영웅’을 둘러싼 가짜 신화 만들기가 그렇다. 성환 전투에서 총탄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부대 선두에 서서 진군나팔을 입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는 ‘안성 진격의 나팔 병졸’ 시라카미 겐지로가 실은 안성천을 건너다 익사했을 가능성이 크며 게다가 실제 나팔 병졸은 기구치 고헤이였음에도 국정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신화화됐단다. 평양 전투 시 평양성의 현무문을 열었다는 일등졸 하라다 주키치는 그에 관한 군가가 여러 나올 정도로 ‘군신軍神’으로 대우받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술에 빠져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훈장도 박탈당하고 ‘비국민’으로 잊혀졌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지역할당제에 따른 징집 명령서를 받은 홀아비가 마을대표의 입영 독촉을 견디다 못해 아들을 죽이고 종군했다는 기사도 미쳐 돌아가는 일본 군국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이 책은 한마디로, 한국 사학자가 한중일의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낸 청일전쟁 조감도라 할 수 있다. 워낙 다양한 자료를 동원한 덕분에 관련 연구자들에게도 자신의 연구에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줄 노작勞作이라 할 수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931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한국은 청 제국 시기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의 일부였는가?
왕위안충이 던지는 새로운 질문에 대해 깊이 읽고, 토론하며
한중 관계와 한반도의 미래를 성찰하자

1894년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세계의 오랜 중국적 질서의 와해와 근대 국가를 향한 갈림길이었다. 이듬해 청일 사이에 체결된「시모노세키」조약 1조는 “중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주를 확실히 인정한다.”라고 명시했다. 조선이 그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것인가? 비록 생존을 위해 중국에‘사대’를 했을지는 몰라도,‘중국의 일부’였다는 조약의 첫 문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중국에게 한국은 무엇이었고, 한국에게 중국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은 청 제국에 무엇이었나_1616~1911 한중 관계와 조선 모델』(원제: Remaking the Chinese Empire: Manchu-Korea Relations, 1616~1911)은 17세기 초에서 20세기 초까지 정치와 외교사를 들여다보며 청이 중화제국을 다시 만드는데 조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핵심 개념으로‘조공’이란 용어를 대신하여 다소 생소한 ‘종번’과 그 체제를 있게 한‘조선 모델’을 제기하며, 양국이 종번이라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어떤 중대한 변화를 어떻게 겪었는지 밝힌다. 청과 조선의 관계사라는 미시사를 토대로 3세기 동안 이루어진 중화제국의 부상과 붕괴, 대외관계 시스템과 서양의 충돌, 동아시아에서 근대 주권 국가의 탄생 등 중국과 동아시아의 전환에 대한 거시사를 들려준다. 김종학 교수(서울대 외교학과)는 “이 책의 핵심개념인 ‘종번주의’는 한국사 내러티브에 익숙한 독자에겐 다소 불편한 것이지만,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한 조청 관계의 중요한 일면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이전의 한중 관계를 다룬 논저들이 하나같이 양국 관계에 중점을 둔 것과 달리, 이 책은 양국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수 세기 동안 중국과 세계의 변화와 그로 인한 주변 국가와 지역에 미친 영향을 입체적으로 다룬다는 점이 특징이다. 계승범 교수(서강대 사학과)가 “제국 질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가 있고, 토론 거리가 넘치는 책”이라 평한 이유이다.

왕위안충(미국 델라웨어대 역사학과 교수)은 쑹녠선(중국 칭화대 역사학과 교수) 등과 함께 서구에서 글로벌 히스토리 방법론을 흡수하고 동아시아 역사담론의 세련된 수사를 구사하며 떠오른 역사학자이다. 이 책은 한중 관계에 관한 미국학계의 주목할 만한 최신 연구로 꼽힌다. 왕위안충이 던지는 새로운 질문‘한국은 중국에 무엇인가?’는 ‘중국은 한국에 무엇인가?’에 매몰된 우리에게 그 이면을 생각해보고 한중 관계와 한반도의 미래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며

1부 위대한 황제에게 고두하기

1장 조선을 정복하다: 1616∼1643년 ‘중국’으로서 만주 정권
오랑캐, 반란, 전쟁
후금 중심의 준종번체제 구축: 후금의 새로운 위상
형에서 아버지로: 제2차 만주족 침공[병자호란]
소국을 소중히 여기기: 중국으로서 정체성을 구축한 청

2장 조선을 오랑캐로 만들다: 조선 모델과 중화제국, 1644∼1761
이중 정체성의 확립: 중국과 천조로서 청
중화제국 다시 만들기: 조선 모델의 부상
중화로 문명화하기: 조선 모델의 실천
관계 기념하기: 종번체제에서 청 황제의 역할
주변의 오랑캐화: 청나라의 제도적 종번 담론

3장 중화로 정당화하다: 청과 조선·안남·영국의 교류, 1762∼1861
중화의 역사적 기억: 조선의 반만 사고방식
북학: 청을 향한 조선인 방문객의 새로운 어조
천조의 도: 청과 1790년, 1793년 조공 사신
1840년대 반항적인 서양 오랑캐와 충성스러운 동쪽 오랑캐
공사와 사신: 1860년과 1861년 북경에 온 영국과 조선의 사절단

2부 조선 구하기

4장 조선을 정의하다: 조선의 지위에 대한 청의 묘사, 1862∼1876
중국의 속국으로서 조선: 1866년 중국과 프랑스의 갈등
자주와 독립 사이의 속국: 조선의 지위에 대한 미국의 관점, 1866~1871
중국의 정통성과 국제법 사이의 속국: 중국과 일본의 첫 논쟁
조선의 ‘주권’ 탄생: 제2차 중일 논쟁과 「강화도조약」

5장 조선을 권도하다: 조선에서 청 중국의 가부장적 역할, 1877∼1884
서양에 조선을 개방하다: 중국과 조선-미국 협상
가장으로서 조선을 보호하다: 1882년 중국의 군사 개입
조약으로 조선 정의하기: 청과 조선의 장정과 그 결과
조선의 대외 네트워크 합류: 중국 위원과 중국인 거류지

6장 조선을 상실하다: 중국 근대국가의 부상, 1885~1911
종번 관례의 발동: 조선 주재 대청 흠명 주차관
종번질서의 대이행: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 마지막 칙사
‘우리 조선’ 구하기: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대응
조선과 중국 관계의 재정립: 1899년 대청국·대한국통상조약과 그 여파

결론
 

저자 소개 

저 : 왕위안충 (Yuanchong Wang)
중국 산둥성 옌타이 출생. 산둥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대 역사학과에서 중한관계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미국 코넬대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201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델라웨어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베이징대에서 시작한 중한관계사 연구를 20여 년째 하고 있다. 2022년 중문으로 된 청대 중한관계사 ‘상권’을 탈고하였고, 지금은‘하권’을 집필 중이다.
 
역 : 손성욱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 대학원에서 중국근현대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산둥대학 역사문화학원 부교수를 지냈고, 현재 창원대 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17세기 이래 한중관계사와 중국의 역사 담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사신을 따라 청나라를 가다』 (푸른역사, 2020), 『百年回看五四運動』 (공저,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20), 『중국 시진핑시대 교과서 국....

책 속으로

산해관을 지키는 오 장군의 군대에도 조선 출신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조선의 젊은 관원 최효일(崔孝一)이었다. 그는 만주족이 처음 조선을 침략한 1627년[정묘호란] 이후에 오 장군의 반만주 전투에 가담했다. 그는 오래 살지 못했지만 만주족 정복자들의 손에 죽지는 않았다. 1644년 6월 6일, 만주족은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없이 북경을 점령했다. 도르곤은 반란군에게 불탄 자금성의 잔해가 쌓여 있는 황궁에서 조선 왕세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명나라 관원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최효일은 오랑캐라 여긴 만주족 황자 앞에 엎드리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에 그는 명나라 형식의 의복을 입고 문명국인 ‘중국(MiddleKingdom)’ 혹은 중국어로 중국(中國)이라 불린 명을 추도하려고 숭정제의 묘로 갔다. 최효일은 일주일간 단식한 끝에 묘 근처에서 죽었다. 오 장군은 그의 시신을 안장하고 비가(悲歌)를 지어 추모했다.
--- p.19

이러한 준종번 담론의 구축은 주로 후금 국경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후금은 조선을 담론의 변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최고의 외부 자원으로 여겼다. 양국 관계에서 후금은 최고 권력의 역할을 맡았고, 조선을 동생에서 속국 또는 외번으로 전환했다. 한중관계 연구자들은 만주족이 조선에 명확한 종번 조건을 부과한 1637년 제2차 만주족 침공[병자호란] 이후 위계 담론을 채택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 그 과정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1630년대, 후금 학자들은 후금의 중화성을 확립하려고 중국 역사에서 화이지변을 조작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을 발굴하였다
--- p.61

1637년 첫 칙사 잉굴다이부터 1890년 마지막 칙사 속창(續昌, 1838∼1892)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파견된 모든 칙사는 만주인 관원이었다. 몽골과 한족 팔기가 일부 포함되었지만, 팔기가 아닌 한족이 포함된 적은 없었다. 반면 안남과 유구에 파견된 칙사는 주로 만주족도, 팔기도 아닌 한족이었다. 적어도 1760년대까지 한족 문인들은 이러한 민족적 차이를 충분히 인식했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일부 조선 문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족이 조선 칙행에 참여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러한 배제는 화이지변의 암묵적 요구와 1644년 이전 만주-조선 관계를 뛰어넘으려는 청의 필요성, 즉 만주 조정이 천명의 인간적·제도적 대리인으로서 그 정당성을 입증·유지하고 공고히 하여 위계 관계를 바탕으로 문명화된 중심성과 중화성에 관한 주장을 강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뿌리를 두었을 것이다.
--- p.100~101

사실 1858년 11월과 1861년 5월 사이에 중국이 전쟁 중임에도 조선은 북경에 다섯 차례나 사신을 보냈다. 1790년대 초 조선과 영국의 사절단은 청의 눈에 오랑캐 나라였던 두 외번을 대표해 열하와 북경에 모였다. 그러나 영국 사절단이 1860년대 초 대포를 앞세워 북경에 입성하여 중화 세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격변시켰다면, 조선 사신은 표문과 공물로 제국의 수도에 다가갔다. 비록 조선 사신은 중국의 상황을 조선 조정이 파악하도록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지만, 북경에 자주 머물면서 청이 전통적 의례 규범, 정치-문화적 위계질서, 제국 규범을 유지하도록 자원을 꾸준히 제공했다. 그러나 조선 사신은 8월 열하에서 사망한 함풍제를 다시는 보지 못했고, 함풍제는 서양 오랑캐가 고두하지 않고 자신 앞에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 p.175~176

일문판의 첫 문장은 “朝鮮國ハ 自主ノ邦ニシテ日本國ト平等ノ權ヲ保有セリ”(문자 그대로, 조선국은 자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이 문장의 한문판은 “朝鮮國自主之邦, 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으로 같은 의미이다. 외무성이 의도적으로 자주를 ‘독립’으로, 자주지방을 ‘독립국’으로 번역한 것이 분명하다. 더 중요한 점은 영어 번역이 한자 ‘권(權)’을 단순히 권리가 아닌 ‘주권’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문자 그대로 조선이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기술된 문장의 뒷부분을 조선이 “일본과 동일한 주권을 가진다”로 주장한 것이다. 이 조항 뒷부분에서 외무성은 문자 그대로 ‘동등한 의례’ 또는 ‘동등한 예의’라는 뜻의 ‘동등지례(同等之禮)’를 ‘평등과 예의’로 번역했다. 외무성은 ‘동등’이라는 용어를 형용사에서 명사로 바꿔 첫 문장의 번역에 내포된 주장을 강화했다.
--- p.210

1880년대 격동의 시기에 중국이 신강을 중국의 성으로 바꾸면서 북서쪽 국경 정책을 극적으로 전환했을 때 북동부 국경 역시 청에 큰 도전이 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영국에 미얀마를, 일본에 유구를, 프랑스에 베트남을 잃은 청은 이후 가장 모범적 외번인 조선을 잃지 않으려고 한 발 물러나 고위 관료를 파견하여 조선을 권도하고 보호하는 간접적 방식을 택할지, 아니면 조선을 청의 군현으로 중국 영토에 편입하는 것이 더 나을지 결정해야 하는 역사적 갈림길에 서 있었다. 두 가지 방식 모두 한과 원에 선례가 있었으므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두 가지 모두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과 다를 바 없는 식민지 접근법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은 극복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 p.267

조약문은 한문, 일문, 영문으로 작성되었다. 일본이 작성한 초안의 제1조는 “중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주(完全無缺之獨立自主)를 확실히 인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독립과 자주를 훼손하는 중국에 대한 조선의 조공, 의례 등은 완전히 중단한다”라고 명시했다. 한문과 일문만으로 작성된 1876년 「강화도조약」과 달리 영문판 「시모노세키조약」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치”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한문판이나 일문판에서 조선의 지위에 대한 모호함을 제거했다. 또한 조약 용어는 지난 2세기 동안 청의 변화를 반영했다. 조약에서 ‘대청’은 ‘China’와 ‘중국(中國)’과 온전히 동일하지만, 일문판과 중문판의 서문 말미에는 청을 ‘대일본제국에’ 대응하는 한자인 ‘대청제국’으로 표기했다. 일문판에서는 청을 ‘청국(淸國)’이라고 불렀지만, 중문판에서는 ‘중국(中國)’으로, 영문판에서는 ‘China’로 칭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조약으로 종결된 것은 1637년부터 이어져 온 청-조선 조공관계뿐만 아니라 기자(箕子)에서 시작된 일반적인 중한 종번관계도 종언한 것이다.
--- p.294~295

출판사 리뷰

핵심개념 ‘종번 체제’와 ‘조선 모델’을 제기하다

이 책은 정치와 외교의 시각에서 청대 중국사에서 조선왕조의 중요한 역할을 분석한다. 책의 전반부는 입관 전 청이 조선과 종번 관계를 맺어 자국의 ‘중국’인식을 구축하는 과정과 입관 이후 ‘조선 모델’을 광범위하게 운용하여 다원적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고찰했다. 후반부는 19세기 후반, 청대 중국이 조선왕조와 관계를 조정하여 점차 서구 국제법의 정의에 따라 명확한 영토 경계를 갖춘 주권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일반적으로 명청 교체는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한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왕위안충은 1637년 청-조선 종번 관계의 수립을 청 제국사에서 전환점이 된 중대한 사건으로 본다.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청은, 1637년 초, 명의 가부장적 지위를 대신하여 조선과 종번 관계를 맺었다. 조선에 무력행사를 한 뒤 북경에 들어가기까지 10년이 향후 청이 중화제국을 다시 만드는데 가장 결정적 순간이었다며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개념인 ‘종번 체제’와 ‘조선 모델’을 제기한다.

종번 체제는 동아시아에서 ‘천하’라는 아주 오래된 세계질서를 뜻하는 것으로, 전근대 시기 한중 관계의 근간을 이뤘으며, 조공과 책봉의 수단과 ‘사대’와 ‘자소’의 언설로 구축되었다. 한반도의 왕조는 중원왕조와 유교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독특한 문화적 동질성을 형성해 왔는데, 이 종번 관계는 명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저자가 만주족의 청이 명-조선 관계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의 변방에서 흥기한 오랑캐 청은 ‘화이지변’이라는 정치-문화적 환경 속에서 정통성을 입증해야 하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청의 만주 정권은 입관 전 10년 동안 종번 구조에 내재된 정치-문화적 담론을 활용하여 ‘중국’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1637년 5월 13일, 조선이 성경에 첫 사행단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1643년까지 조선은 56차례, 청은 12차례 사신을 보냈다. 이 집중적인 사신 왕래는 청의 지위 변화를 일으키며 양자 간 새로운 정치 제도를 강화하고, 또 새로 정복하거나 예속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관리할 성숙한 모델 개발로 이어졌다. 왕위안충은 이를 ‘조선 모델’로 정의한다. 이 모델은 다른 국가나 정치체가 조선을 따라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청의 연호와 역법을 채택하며, 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면서 청 중심의 종번체제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이 모델의 이면에는 조선을 통해 청이 문명국인 ‘중국’이자 천하의 중심인 ‘천조’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청의 중화제국은 ‘영토적 제국’이 아닌
조선 모델을 통해 새로이 구축된 ‘정치-문화적 제국’

1644년 이후 서쪽으로 진격한 청은 18세기까지 몽골, 티베트, 신장 위구르를 내번화하고, 외지의 안남, 유구, 남장, 섬라, 소록, 면전을 외번화 하는 등 유라시아 제국 내외부에 새로운 제국 질서를 구축했다. 저자는 이 대외 관계의 모델을 청과 조선과의 관계, ‘조선 모델’이라고 칭한다.

‘조선 모델’은 의례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공물은 정치적 종속의 상징에 불과했다. 실제 1730년대 말 조선의 공물은 1630년대 말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청은 원의 공격적인 식민 정책 대신 명의 종번 기제를 배워 정교하고 뚜렷한 유교적 조선 모델을 활용해 국경의 안정을 유지하고 국경을 넘어 새로운 중화제국을 건설했다.

조선이 청에 사신을 파견한 빈도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 높았다. 1637년부터 1894년까지 조선은 26가지 다른 목적을 위해 698회 사신단을 보냈다. 이는 연평균 2.71회로, 격년(유구), 3년(섬라), 4년(안남), 5년(소록), 10년(남장, 면전)에 1회 파견한 다른 조공국에 비교가 안 되는 수치였다. 연회에서 최고 수준의 ‘고두’는 세세하게 규정되고 엄격하게 실시되었고, 모든 의례는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일조했다. 1675년 2월 9일 원소절 때 조선 사신이 러시아, 칼카, 오이라트 사신보다 앞서 강희제에게 하례를 올린 것처럼 황제에게 올리는 의식 거행에서 조선은 외번의 대표였다. 전형으로서 조선의 역할은 18세기 후반 건륭 연간에 두드러졌는데 이때 제작된 『황청직동도』에서 조선은 다시 한번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어 조선 관원 그림이 첫 번째 실렸다.

18세기 말, 주변국과 만주, 몽골초원에서 투르키스탄과 히말라야에 이르는 청의 팽창을 제국주의로 보는 서구 학계의 ‘신청사’ 연구를 반박하며 왕위안충은 청은‘영토적 제국’이 아니라 조선 모델을 통해 새로이 구축된‘정치-문화적 제국’이라 주장한다. 다시 말해 청의 행위는 제국주의가 아닌 종번주의에 의한 것이라며 청 초에 형성된 청-조선 관계의 지속성을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의 중요한 개념인 ‘종번주의’란 배타적인 문화 중심인 정치체와 덜 문명화되었거나 야만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주변이 정치, 외교 교섭 및 교류를 하는 중국적 시스템으로 종은 번에 대해 절대적인 가부장적 권위를 지니며, 그 권위의 행사는 양자가 공유하는 정치-문화적 규범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다. 현대 외교에서 이해하듯이 군사력이나 지정학적 중요성 혹은 종주권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9세기 국제법을 앞세운 서양 열강의 등장은 종번체제를 흔들며 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책의 후반부가 보여주듯이 중국과 ‘외번’으로 연결된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은 청일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변함는 체제를 유지했다. 국제법은 청제국과 내외번 양측에 필요한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1883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벌인 청프전쟁, 1894 조선에서 일본과 벌인 청일전쟁에 중국이 끌어들인 것은 ‘영토적 제국’이 아닌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이란 정통성 때문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청과 일본, 그리고 서구 사이의 격렬했던 논쟁

18세기 말부터 슬그머니 찾아들기 시작한 영국은 1842년부터 1860년까지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청은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들과 국제법에 따른 조약을 체결했다. 청 제국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조약항 네트워크와 오랜 전통인 종번제도가 공존하는 이중 체제를 형성했다. 이 책은 ‘이중 체제’에 따른 19세기 후반의 복잡성을 방대한 문헌에 기초한 치밀한 서술로 드러낸다. 난제는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것이었다. 청과 조선 양국은 모두 조선을 자주의 권리가 있는 중국의 속국, 또는 속방이라고 한목소리를 냈지만, 서양 국가들은 조선을 중국과 단순한 의례적 관계를 유지하는 독립적 주권 국가로 다뤘다. 특히 서구화 개혁을 단행한 일본이 동아시아 사회 내부자의 위치에서 한중 관계 사이를 파고들면서 중국의 정통성과 국제법 사이에서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청과 일본, 그리고 서구의 격렬했던 논쟁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1780년 8월에 건륭제가 조선 사신에게 티베트의 라마를 만나볼 것을 권했을 때 “라마는 서역 사람인데 어떻게 우리 사신이 감히 그를 예방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는 외교를 할 수 없습니다(人臣無外交)”(박지원의 열하일기 중)는 조선이 중국의 번이자 속국으로 충성심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1830년대에서 1870년대까지 조선은 공고한 종번 원칙에 따라‘번신무외교(藩臣無外交, 신하 된 자인 번은 ‘외교’를 할 수 없다)’를 이유로 서양과 교섭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서양 제국과 일본이 침투해올수록 조선은 그 어디에도 은신처가 없었고 그럴수록 더 청에 밀착해갔다.

1870년대 말과 1880년대 초 조선은 청의 적극적인 권고로 국내 개혁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청은 그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조선을 ‘국제사회’에 소개했다. 일본과 서구 국가가 볼 때 청의 개입은 명목적 관계에서 실질적 지배로의 변화를 의미했고, 한반도에서 다양한 세력 간 격렬한 정치적, 외교적 갈등을 촉발했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려고 청과 조선은 상호 관계를 유지하고 조정하는 여러 상업 협정을 체결했다. 19세기 후반 청이 실시한 대조선 정책이 서구 제국주의와 유사한 제국주의 지배라는‘청 후기 제국주의론’에 대해 왕위안충은 제국주의가 아닌 종번주의에 의한 것이라 주장한다. 박민희 한겨레신문 선임기자는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반론으로 읽힌다며 “중국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 하는 지금, 한중 역사에 대한 해석은 민감하고 뜨거운 쟁점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관점에서 깊이 일고, 논쟁해야 할 필독서”라 했다.

종번관계의 종식과 근대 국민국가의 부상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정치적, 외교적 난제는 청과 조선을 법적으로 곤경에 빠뜨렸다. 1880년대 혼란스럽던 10년 동안 양측 관계는 다양하게 조정되었으나, 종번의 근간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바, 양측 모두 유교 세계의 높은 정치 수준에서 상호구성적 정통성으로 야기된 이념적 딜레마를 극복할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에 청은 영국에 미얀마를, 일본에 유구를, 프랑스에 베트남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중화제국이 되는 데 정통성과 기제를 제공해 주었고 만주, 몽골, 신강, 티베트, 대만과의 연결고리인 조선을 잃는다는 것은 정치-문화적 제국의 와해를 의미했다. 하여 청은 서세동점의 위기에도 전통적인 청-조선 관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담론을 강화했다. 바로 그 이유에서 1894년 청일전쟁의 결과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중화제국 질서의 핵심 국가인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중화제국의 존재 의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고, 중국, 한국, 일본, 서양 국가들 사이에 한국의 지위를 둘러싼 격렬했던 논쟁은 1895년 한중 종번관계의 종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쟁 후 중국과 한국은 대등한 국가 대 국가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새로운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조선왕조와 청조는 각각 1910년과 1911년에 멸망했다. 이 책은 이런 다양한 관계의 궤적을 설명하고 근대 중국과 한국, 그리도 동아시아의 발전에서 그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한국이 청 제국 시기에 정치-문화적 의미에서 중화제국의 일부를 형성했으며, 1895년 이후 그 관계가 급격히 약화되고 끝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음을 논증한다. 이후 청 제국이 무너지고 근대국가 체제가 새롭게 등장했지만, 여전히 중국의 관념에서 한국은 중국이 지켜주어야 할 가부장적 책임감의 대상이었다. 이는 조선 독립운동을 향한 지원과 한국전쟁에 개입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특히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절대적 독립과 주권을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근대 국민국가가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를 전망하는 예리한 미래서”

한국이 청 제국 시기에 정치-문화적 의미에서 중화제국의 일부였다는 왕위안충의 주장은 기존 연구와 차별되는 지점이 분명하지만 논쟁적이다. 짧았던 대한제국 이후 식민지와 분단을 거치며 가까스로 얻어낸 ‘자주, 독립’이기에 이 세계관 안에서 살아온 우리가 제국 옆에서 생존을 도모해온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중국과 관련된 문제는 ‘사대주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단순히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단순한 국가 대 국가 관계는 과거에는 더욱 아니다. 옮긴이 손성욱(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후기에서 이 책의 관점과 논쟁점을 짚어주었다. 옥창준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17세기 초에서 20세기까지 왕위안충이 관찰하며 일국사를 넘어서 쓴 이 책이 “‘중화’를 중국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공동유산으로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고금을 넘나드는 역사적 시야가 필수적”이라며 “과거를 다루는 치밀한 역사서인 동시에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를 전망하는 예리한 미래서”라 평했다.

지은이의 말

종번주의는 전근대와 근대 중국 역사 사이에 고착된 간극을 초월한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1839∼1842년 아편전쟁을 전근대 중국의 황혼과 근대 중국의 여명으로 규정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에 대한 주류 서사는 전근대 중국의 대외관계 시스템과 결국 이를 대체한 근대적 조약체제는 양립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패러다임의 주요 문제점은 유럽 중심주의 (실제로 ‘근대’는 유럽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저한 변화 없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어진 중국의 대외정책에서 지속된 요소를 간과한 데 있다. 다시 말해, 역사가들이 널리 밝힌 산업화한 서양을 만나기 이전 중국의 ‘정체’ 요인들이야말로 후기 중화제국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다. 중화제국은 수입된 것이 아니라 고유의 규범으로 유지됐다.

옮긴이의 말

「들어가며」에서 저자가 제시한 지향점은 명확하다. 종번 개념의 재활성화(revitalizing), 중국 근대국가 형성의 재해석(reinterpreting), 청대 중화제국 재론(revisiting), 청 제국주의 재고(renegoating), 즉 네 가지 ‘다시(re)’를 제시한다. 기존의 청 제국과 청-조선 관계를 보는 시각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겠다는 야심 찬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추천평

한중 관계와 중한 관계는 다르다. 시선의 주체가 다르고, 시야의 차이도 현저하다. 전자가 ‘한’을 중심으로 제국의 단면을 본다면, 후자는 x 변수인 제국 질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가 있다. 국내 조선시대 전공자들의 시각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오히려 좋다. 학문이란 열린 토론이 생명이기에, 토론 거리가 넘치는 이 책이 값지다.
-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조선과 청나라의 오랜 관계를 통시적으로 검토한 역작이다. 조선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중화제국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왕위안충의 시각이 한국 독자들에게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책은 한국에서 널리 읽히고 토론되어야 한다. 왕 교수의 저서가 한중관계사에 대한 관심과 시각을 새롭게 확장시키리라 기대한다.
- 김선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한중관계사에 관한 미국학계의 주목할 만한 최신 연구 중 하나로, 청 제국의 성립·유지·붕괴 과정에서 조선이 가졌던 독특한 위상을 분석한 역작이다. 이 책의 핵심개념인 ‘종번주의’는 한국사 내러티브에 익숙한 독자에겐 다소 불편한 것이지만, 풍부한 역사적 사례와 방대한 문헌에 기초한 치밀한 서술은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한 조청 관계의 중요한 일면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 김종학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청의 만주족 정체성을 강조하는 ‘신청사’에 대한 반론이자,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던 청이 조선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적 지배를 시도했다는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반론으로도 읽힌다. 중국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 하는 지금, 한중 역사에 대한 해석은 민감하고 뜨거운 쟁점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관점에서 깊이 읽고, 논쟁해야 할 필독서다.
- 박민희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지금 중국은 대국굴기를 거치면서 제국형 국가와 개방형 제국의 갈림길 위에 서 있다. 만주족의 청이 그리고 조선이 그러했듯이 ‘중화’를 중국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공동유산으로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고금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역사적 시야가 필수적이다. 이 책은 과거를 다루는 치밀한 역사서인 동시에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를 전망하는 예리한 미래서이기도 하다.
-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091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