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1.한국근대사

내 안의 역사

동방박사님 2022. 1. 2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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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탁월한 한국사 파수꾼 전우용이 캐낸
당연한 것들의 뜻밖의 역사


지은이 전우용은 케케묵은 사료더미나 뒤지는 책상물림 역사학자가 아니다. 일상과 주변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고, 현실 문제에 관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오늘을 사는 역사가이다. 그는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첫 번째 책이었던 『우리 역사는 깊다』 등을 통해 ‘교과서’가 놓치고 있는 ‘오늘’의 뿌리를 찾아 성찰의 자료로 삼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내 안의 역사―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에서도, 지금은 희미해진 연탄, 도장, 침모에서 무심코 넘겼던 현모양처론, 접대문화의 기원까지 파고들어 우리의 일상과 의식에 깃든 뜻밖의 역사를 들려준다.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은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 진화의 결과물이며, 인간의 철학, 사상, 가치관뿐 아니라 개별 인간의 몸도 역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믿기 때문이다.

목차

책머리에

1부 개인

1_몸에 대한 시선의 역사
2_유리거울, 외모 지상주의 시대의 서막을 열다
3_한국 남성의 새로운 통과의례, 포경수술
4_기생충 박멸운동의 역사
5_가문에서 개인으로, 이름 석 자에 담긴 역사성과 사회성
6_태초에 도장이 있었다

2부 가족과 의식주

1_낯설어라 사랑, 낯뜨거워라 연애
2_현모양처론, 메이지 시대의 이데올로기
3_서자와 양자의 분쟁사
4_장보기, 남자들의 바깥일에서 여자들의 집안일로
5_가족을 ‘관객’으로 만든 TV
6_‘쌀밥에 고깃국’, 천년의 소원
7_담배 냄새가 ‘향香’이던 시절
8_가짜 양주에서 폭탄주까지
9_목숨과 바꾼 온기, 연탄
10_과거사가 된 ‘셋방살이 설움’
11_375칸짜리 ‘장안 제일가’와 옥인동 아방궁

3부 직업과 경제생활

1_천직? 평생직장? 그 아련한 추억
2_‘정경유착’과 ‘가족 같은 회사’의 민낯
3_위세의 상징, 가마에서 인력거로
4_몸 고생에 마음 고생
5_침모, 식모, 파출부, 가사도우미
6_‘구멍가게’에서 슈퍼마켓으로
7_외식시대를 개척한 음식, 탕수육과 짜장면
8_‘소 보험’에서 ‘암 보험’까지, 시대의 불안감
9_망한 나라의 99칸 대가大家, 여관이 되다

4부 공간과 정치

1_서울을 바꾼 ‘황제어극 40년 망육순 칭경 기념예식’
2_한양도성, 유물이 된 서울사람의 정체성
3_일제가 독립문을 보존한 이유
4_무방비 도시, 서울
5_영생불사의 동상으로 거듭난 위인들
6_교통신호기, 인간을 지휘하는 기계의 출현
7_불신받는 국가의 얼굴, 경찰
8_참언과 예언에 혹하다

5부 가치관과 문화

1_해방 직후 대입시험의 ‘국어 소동’
2_식민지 백성의 덕목, 온순과 착실·박력과 추진력
3_빼앗긴 문화재, 갖다 바친 문화재
4_번역을 포기한 단어, ‘가방’과 ‘구두’
5_한국의 역제, 음·양력의 공존 이유
6_광고와 기사의 ‘동거’가 끼친 영향
7_명월관 기생과 ‘접대문화’
8_외설의 상징, 복숭아
9_‘묵은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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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전우용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역사학자. SNS에 세상일에 대한 촌평을 쓰고 있다. 그의 쓴소리는 날카롭고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시대의 문제’를 함께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돕는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를 지냈다...
 

책 속으로

1925년께부터는 우량아 선발대회가 열렸는데 …… 물론 무거울수록 좋은 몸이었다. 처음 외국 선교단체의 선교활동으로 시작된 우량아 선발대회는 분유회사의 판촉 활동으로 바뀌어 몸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바뀐 19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 무렵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장이나 장군 역할은 대개 뚱뚱한 배우가 맡았으며, 비만 아동들은 ‘장군감’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 p.17

우리나라에 ‘다이어트’라는 단어가 소개된 것은 1960년대 말이었다. 본래 ‘먹는 것을 줄이다’라는 뜻인 이 단어는 1970년대 말부터 ‘살을 빼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때부터 다이어트 식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88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불어 닥친 스포츠 열풍 속에서 헬스클럽, 수영장, 에어로빅 센터 등 몸 관리 업소들도 급증했다. --- p.18

미군 지휘부가 공식적으로 지시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일선 지휘관들은 단 1~2주 동안이라도 장병들의 성 접촉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포경수술이었다. 군 병원도 이 방법에 반대하지 않았다. 의료진에게 풍부한 수술 기회를 주는 것은, 유사시에 대비해서나 군의관 개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나 꼭 필요한 일이었다. 이 무렵부터 영등포의 121후송병원을 비롯한 미군 병원 군의관들이 다시 바빠졌다. 특히 다른 수술에서는 조수 노릇밖에 못하던 비뇨기과 의사들이 수술실의 주역이 됐다. --- p.31

사람들이 자기 이름에 표시된 가문과 항렬을 지워 버리고 그 대신 ‘일본인 닮았음’을 표시하는 글자를 새로 집어넣던 시절에, 느닷없이 족보 발간이 급증했다. 한편에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마지막으로 기록해 두자는 집단 심리가 있었을 테고, 다른 한편에는 막판 떨이로 한몫 챙기려는 ‘족보 있는 문중’의 장삿속도 있었을 것이다. …… 한국전쟁 이후까지 족보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난리 통에 잃어 버렸다”고 변명하곤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여태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족보실을 뒤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 p.47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한국인들이 설립한 담배회사들은 곡향谷香합자회사니 향연香煙합자회사니 해서 상호에 흔히 ‘향’자를 썼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 담배 냄새는 분명한 ‘향기’였다. 담배 ‘향기’의 마지막 쓸모는 냄새 나는 변소와 함께 사라졌다. 한국에서 재래식 변소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중화장실 흡연이 금지되었다. --- p.122

1956년 부산에 있던 국제양조장이 일본에서 수입한 위스키 향료와 색소, 주정을 배합하여 ‘국산 위스키’를 개발하고 ‘도리스’ 상표를 붙여 판매했다. …… 1960년 갑작스럽게 상표권 침해 문제가 크게 불거져 국산 도리스 위스키 제조사 사장이 구속되었다. …… 결국 국제양조장은 ‘도리스’를 발음이 비슷한 ‘도라지’로 바꾸어야 했다. --- p.124

대다수 직업에서 정년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40세를 조금 넘는 정도였고, 영유아기나 유소년기의 고비를 넘긴 사람이라도 환갑잔치를 치르면 “오래 살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니, “정년까지 일하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말과 비슷한 뉘앙스였다. 그것은 덕담보다는 오히려 욕에 가까웠다. …… 한국인들이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에 현실감을 갖게 된 것은 고도 경제성장이 본격화한 1960년대 이후였다. --- p.162

1883년 10월 21일, [한성순보]에 「회사설」이라는 논설이 실렸다. 우리 역사 무대에 회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논설은 “대저 회사란 여러 사람이 자본을 합하여 여러 명의 농업 공업 상업의 시무時務를 잘 아는 사람에게 맡겨 운영하는 것”이라 하여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회사의 첫 번째 특징으로 규정했다. 이어 정부가 회사와 계약하여 영업 기반을 마련해주거나 이익을 보증하는 외국의 예에 따라 조선 정부도 회사를 육성,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정경유착’의 필요성을 제기한 셈인데 …… 한성순보에 「회사설」이 실린지 얼마 되지 않아 의주 상인들이 의신회사義信會社를 창립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회사다. --- p.165

‘중앙 권력이 보호하는 상인조직’이라는 성격은 한국 회사의 DNA에 각인되었다. 1890년대 말부터 합자회사, 합명회사, 주식회사 등 세련된 명칭을 가진 근대 기업들이 속속 출현했으나, 대개 정부와 깊은 관련을 맺은 것들이었다. 설립자도 고관이나 고관 출신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인 회사는 식민지 통치 권력의 후원을 받거나 최소한 양해를 얻지 않으면, 성장하기는커녕 존립하기도 어려웠다. 해방 후 경제 재건과 압축 성장 과정에서도 정경유착은 한국 경제의 근본 특징이었다. --- p.173

사대부가 부득이하게 돈을 만질 때에는 왼손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려면 돈을 오른쪽 소맷자락에 넣어 두는 것이 편했다. 도포 입은 양반의 오른쪽 소맷자락이 왼쪽보다 밑으로 쳐져 있는 것은, 백발백중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번잡한 거리에서 그런 양반을 발견한 무뢰배는, 짐짓 발을 헛디딘 척 하며 뒤에서 그의 오른쪽 소매를 친다. 그 충격에 양반의 팔은 위로 올라가고 소맷자락에 넣어 두었던 돈은 길바닥에 떨어진다. 소매를 친 무뢰배와 미리 약속해 둔 다른 무뢰배가 땅에 떨어진 돈을 주워 냅다 달아난다. 영어로는 pick pocket, 즉 ‘주머니 뽑기’라고 하는 것을 우리말로는 ‘소매치기’라고 하는 이유다. --- p.197

여성 가사 노동자를 부르는 호칭이 바느질하는 어미라는 뜻의 침모에서 밥 하는 어미라는 뜻의 식모로 바뀐 것은 대략 1930년께부터다. 그 전에도 식모라는 말이 있기는 했으나, 가사 노동자가 아니라 학교나 공장 기숙사 등의 요리사에게 붙이는 이름이었다. --- p.204

1791년 정조는 국역을 많이 부담하던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일괄 폐지했다. 이것이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상품의 종류가 늘어나고 이어 아무나 물건을 사고 팔 수 있게 되자, 기왕 종로에 있던 공랑公廊만으로는 상거래를 다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종로 큰길 좌우에 상업용 가건물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가건물을 당시 용어로 ‘가가假家’라 했는데, ‘가게’란 이 말이 변한 것이다. --- p.215

개항 이후 서울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이 비좁고 불결한 중심 대로에 눈살을 찌푸렸다. 1895년 4월 16일, 한성부는 ‘도로를 범하여 가옥을 건축하는 일’을 일체 금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듬해 9월 29일에는 종로와 남대문로의 가가를 모두 철거하고 도로의 원 너비를 회복하며 길가 건물의 외양을 통일한다는 내용을 담은 내부령 제9호가 공포되었다. …… 정부는 보상금을 지급하고 길가의 가가를 모두 헐었다. 가가 주인 일부에게는 안 쓰게 된 남대문 안의 선혜청 창고를 내 주었다. 이에 따라 1897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으로 남대문 시장이 문을 열었다. --- p.218

1905년 인천에 있던 청요릿집 공화춘共和春의 메뉴에 짜장면이 처음 올랐다. 한자로 작장면炸醬麵, 즉 중국 춘장을 튀겨 면 위에 올린 이 음식은 본래 산둥성의 향토음식이었다고 하는데 …… 1899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음식점을 하던 중국인 천핑순陳平順이 가난한 자국 유학생과 노동자들을 위해 개발한 신메뉴, 짬뽕에 상응한다. 짬뽕이라는 단어가 생긴 유래에 대해서는 밥 먹는다는 뜻의 중국어 ‘츠판吃飯’을 일본인들이 잘못 알아들어 붙은 이름이라는 설과, 장구이掌櫃의 ‘장’과 닛폰의 ‘폰’을 합쳐 만든 말이라는 설이 있다. --- p.224

홍콩에 거주한 영국인들은 ‘침략자답게’ 중국인을 하인으로 고용하여 주방 일을 맡겼는데, 맛뿐 아니라 식사 도구도 문제였다. 중국음식은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중국인 주방 하인들이 영국인 주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개발한 신메뉴가 탕수육이었다고 한다. 일본식 고기 덴푸라에 ‘함부로 만든’ 중국식 소스를 부은 이 음식은 …… 언제 한반도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짜장면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식사’가 아닌 ‘요리’ 중에서는 가장 싼 음식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한국인들이 청요릿집에서 큰맘 먹고 요리를 시킬 때는 으레 탕수육을 주문했다. --- p.224

한성전기회사의 전기사업은 1898년 9월 15일 경희문 흥화문 앞에서 전차 궤도 기공식을 거행하면서 급진전되었다. 이듬해 5월 17일에는 전차 개통식을 치렀고 같은 달 26일에는 주경駐京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별도의 시승식을 거행했다. …… 이어 전차 선로를 용산, 마포로 계속 확대하는 한편, 같은 해 9월에는 한성-개성 간 경편철도 부설 계획을 세웠다. 1901년 6월에는 경운궁에 전등을 가설하고 8월부터는 민간 상대 전등 영업을 개시했다. 그 직후인 10월, 보신각 맞은편에 시계탑이 달린 2층의 서양식 전기회사 사옥이 준공되어 종로의 새 랜드마크가 되었다. --- p.274

일제가 독립문을 ‘특별대우’한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추론은 이 문에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뜻도 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사’ 교과서는 일본의 한국 강점 경위에 대해 ‘조선은 일본이 승리한 덕에 청나라의 속국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했으나,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와 낮은 민도 때문에 도저히 독립을 유지할 형편이 되지 못해 결국 일본에 합병되었다’고 주장했다. 독립문은 이 주장의 증거물이었다. --- p.298

한국 땅에서 동상이 될 뻔했던 두 번째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척살 당하자, 일본에 빌붙어 일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한국인들이 앞 다투어 추모와 사죄의 뜻을 밝혔다. …… 안중근 의거 10일 후, 장석주, 민경호, 민영우, 이민영 등 20여 명이 동아찬영회東亞贊英會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 이들은 북부 순화방(현재의 통인동 일대)에 이토 동상과 송덕비, 비각碑閣을 세우되, 동상은 일본에 주문하여 제작하기로 계획했다. 이들이 계획한 비각의 규모는 80여 칸, 현재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 있는 ‘황제어극40년 망육순 칭경기념비전’보다 훨씬 컸다. 건립비는 전국 13도에서 집집마다 10전씩을 거둬 충당하기로 했다. --- p.321

1934년 말, 남대문로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교통신호기가 등장했다. 이듬해 봄에는 종로와 을지로에도 설치됐다. 교통 순사나 이 물건이나 일본산인 건 매일반이었으나, 이 물건에게 달려가 “네까짓 게 뭔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명령하느냐?”고 대드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인격체의 지시를 받는 데 굴욕감을 느꼈던 사람들도 기계의 지시를 받는 데에는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 p.336

1946년 6월 17일, 해방 뒤 처음으로 치르게 된 입학시험을 앞두고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회에서 입시 과목 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 전에 열린 교수회에서 국어와 한문 과목을 제외하기로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는 국어 시험이 포함된 것으로 발표되자 교수들이 한 목소리로 학장의 독단적 처사를 성토했다. 국문학자인 조윤제 학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그 길로 총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 p.351

18세기 말부터 기방妓房이 소규모 유흥장 구실을 했으나, 문자 그대로 ‘방房’이었다. 수백 명, 또는 1,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 요릿집이 생겨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고 돈 있는 사람은 아무나 출입시키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벽두부터의 일이었다. 이런 요릿집의 대표가 명월관明月館이다. 3·1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한 태화관은 명월관 인사동 분점이었다. --- p.392

1930년대의 명월관은 장구 소리 가야금 소리보다 서양식 댄스에 더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 1925년 전조선도시문제연구회를 앞두고 조선인 위원들은 행사의 여흥을 반드시 명월관에서 열어야 한다며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조선의 도시문제를 토의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조선기생’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해방 이후 한국인 정치가와 모리배들은 군정청 장교들을 주로 명월관에서 접대했다. 군정청 장교들도 명월관 기생에게서 ‘한국’을 발견했을 것이다. --- p.411

대한제국 시기에 처음 한국인 모델을 찍은 포르노 사진이 제작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외국에서 제작된 포르노 사진들이 부유층과 신지식층 사이에서 은밀하게 돌아다녔다. 여성의 성性을 표상하던 복숭아에서 ‘귀신 쫓는 힘’이 사라지고 포르노그라피의 이미지만 남은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 p.419

1933년 6월, 대전의 모 보통학교에서 교사가 어린 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대전 도색桃色 교원 사건’으로 명명했다. 이 뒤로 음란성과 변태성을 주조主調로 한 인쇄물이나 영상물 앞에 도색, 즉 복숭아 색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관행이 급속히 일반화했다. 도색영화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46년 10월 초 서울의 명월관, 국일관, 청향원, 난정의 네 요정에서 ‘모리배, 기생, 유한마담’을 모아 놓고 미국 포르노 영화를 상영했을 때다.
--- p.419
 

출판사 리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시간을 이기는 것은 없다. 세월이 흐르면 망가지고, 변하는 것이 비단 물질만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옳고 그름은 물론 미추美醜와 미덕의 기준마저 바뀌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 몸을 보는 시선도 지금이야 날씬함과 구릿빛 피부를 이상형으로 치지만 뚱뚱한 몸, 햇볕에 그을지 않은 허여멀건 피부가 귀족의 표상인 적도 있었다.

한때 우리가 미덕으로 꼽았던 ‘현모양처론’이나 박력·추진력은 일제가 필요해 의해 주입한 것이었다. 현모양처론은 중세 유교의 덕목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창안된 천황제 국민국가의 여성관이다. 남성이 나라에만 충성할 수 있도록 뒤에서 가정을 맡아 꾸리며 자식을 충성스런 신민으로 키우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내세운 것이 ‘현모양처론’의 실체다(77쪽).

세월호 사고에서도 드러났듯 1970년대까지 모범생의 조건이었던 온순·착실과 이에 대비되는 박력·추진력도 일제가 남긴 의식 조작의 흔적이다. 남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게 온순, 천하의 대세나 인간의 도리 같은 ‘허황한’ 생각은 하지 않고 실용과 실리에만 집착하는 게 착실이기 때문이다. 또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던 1930년대 초반 명령에 따라 물불 안 가리고 진격해야 하는 졸병에게나 어울리는 박력迫力·추진력이 남성적 가치로 자리 잡은 것도 마찬가지다(362쪽).

우리 안에 새겨진 어제

우리 곁의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고, 우리가 겪는 모든 현상에는 까닭이 있기 마련이다. 어제가 없는 오늘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 남성들의 통과의계처럼 되어버린 ‘포경수술’이 한국전쟁 당시 성병 예방과 미 군의관의 수련 필요성이 겹쳐 대거 시술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는지.

1968년 세종대왕과 충무공 동상이 동시에 완성되었을 때, 멸사봉공과 위국충정의 정신으로 무장한 군인이 나라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는 당시 집권자의 지론에 따라 뜬금없이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이 들어섰다. 세종대왕상은 덕수궁 한 구석으로 밀려나고(327쪽).

이는 훗날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지만 서울교육대학교 앞길에 사임당 당호가 새겨진 이유, 포은 정몽주 동상이 양화대교 북단에 세워진 까닭은 그저 춤추는 ‘공간정치’로 치부하기엔 아리송하다(331쪽).

종로에 최신 서양식 건축물과 전통 양식의 건조물들이 들어서는 등 제왕남면의 전통적 도성 조영 원칙에서 이탈하여 종로와 신문로를 잇는 동서축으로 서울이 근대적 도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망육순을 기념하는 칭경예식 준비가 계기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알려졌을까(275쪽).

달라진 시대, 낯선 풍경

시대에 따라 풍속도 바뀐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청춘남녀의 데이트, 부부가 대형 마트에서 나란히 쇼핑 카트를 끄는 모습도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근대 이전의 사랑은 결혼의 전제도 아니었고, 결혼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필수 구성요소도 아니었다. 조선시대는 물론 개화기에조차도 기생들이나 사랑을 표현하고 순간이나마 실현할 수 있었다. 1913년 5월 13일, [매일신보]에 소설「장한몽」이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이수일과 심순애의 비극적 행로를 그린 이 소설은 장안의 선풍적 인기를 모았지만 두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미혼 남녀는 거의 없었다.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할 나이가 된 사람들은 대개 기혼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사랑 없는 결혼은 비극’이요 ‘결혼은 연애의 완성’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소설, 연극, 영화, 대중가요들이 쏟아져 나왔고 혼인 연령도 차츰 높아졌다(69쪽).

여성들의 장보기 또한 낯설었다. 내외 구별이 엄격하던 시대, 집 바깥에 있던 장은 ‘남성들의 공간’이었다. 여성들이 모르는 남정네들과 말을 섞는 것은 남 입에 오르내릴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개항 이후 전차, 기차, 극장 등의 등장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키기 어렵게 되면서, 1905년 이준 열사의 소실이 안국동에 연 ‘여인상점’과 1920년 종로에 문을 연 여성전용 상점 ‘동아부인상회’ 등을 거쳐 한국전쟁 이후엔 시장은 아예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시장에서 생선이나 콩나물을 팔아 자식 대학 보낸 여성들에 관한 신화가 널리 유포되는 사이에, 시장에서 물건 값 흥정하는 것은 남자 체면을 구기는 일이라는 생각도 함께 퍼졌다(103쪽).

스러져가는 것들을 돌아보다

눈에 덜 띈다고 해서 그저 잊힐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 역시 우리 삶의 일부였고, 우리 역사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연탄이나 식모가 대표적인데 이 또한 묻어두기만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인천상륙작전 일주일 뒤인 1950년 9월 22일, 부산에서 농림부 장관 윤영선은 난데없이 산림녹화를 위해 향후 신탄薪炭 채벌을 엄금하며, 그 대신 연탄을 공급할 터이니 집집마다 아궁이를 개량하라는 겨울철 연료대책을 발효했다. 인명조차 돌보기 어렵던 전시에, 뜬금없이 나무를 보호하자는 얘기가 나온 데에는 미군의 조언이 작용했던 듯하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치르면서, 미군은 한국의 야산에 나무가 없어 엄폐물이 없는 탓에 병사들의 공포감은 극에 달했고, 미군 3명 중 1명꼴로 정신과적 문제를 겪었다는 것이다. 이 직후 연탄 화로를 넣었다 뺐다 하며 취사와 난방을 겸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개량’하는 사업이 전쟁 중에 시작되어 휴전 후까지 계속됐다(136쪽).

지금은 잊힌 이름 ‘식모’에 얽힌 역사도 애틋하다. 1970년대에는 공장 노동자, 버스 안내원과 식모를 묶어 ‘삼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각각을 구분해 부르는 이름은 공순이, 차순이, 식순이였다. 식모에게는 유년노동 금지도 최저임금도 해당되지 않았다. 먹이고 입히고 일 가르치고 부리다가 때맞춰 시집보내는 사람은 맘씨 좋은 주인이었다(206쪽).

1980년대 초, 5공 정부가 ‘귀천貴賤 의식’을 지운다는 취지로 직업 이름을 개조할 때, 식모는 ‘가사보조원’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가 86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도우미’라는 이름이 생긴 뒤에는 다시 ‘가사도우미’가 됐다. 그러나 이런 공식적 명칭 보다는 ‘파출부’라는 비공식 명칭이 훨씬 더 널리 쓰였다(207쪽).

전우용이 차린 ‘보통사람들을 위한 보통사람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의외로 흥미로운 이야기와 생생한 생각거리를 풍성하게 만날 수 있다. 글은 모두 52꼭지지만 주 소재 이외에도 ‘소매치기’나 ‘하마평’의 기원, 경성대(현재의 서울대) 입학시험에 한국어 과목을 넣자 교수들이 들고 일어난 일 등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덕분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저 재미로만 읽기엔 아깝다. “현재의 자기 삶이 어떤 역사적 계기들에 의해 구성되었는지 알아야.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 어떤 계기들을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는 지은이의 생각에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