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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케임브리지대학의 대중을 위한 역사 입문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스페인사를 한 권으로 엮어내다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의 약사略史 시리즈 중 한 권인 이 책은 평생 스페인을 연구한 학자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쉽고 명쾌하게 쓰였으며, 광범위한 주제를 세심하게 아우른다. 또한 삽화와 지도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 더 읽을 만한 자료들도 풍부하게 소개해 스페인사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역동적인 스페인 역사의 윤곽을 잡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의 역사는 풍부한 다원성과 그로 인한 갈등 및 조화로 점철되어 있다. 로마 치하의 ‘히스파니아’ 시대를 거쳐 서고트족이 유럽 반대편에서 건너와 왕국을 세우더니, 서고트족을 몰아낸 무슬림이 몇 세기간 반도를 지배했다. 두 명의 걸출한 가톨릭 왕이 레콩키스타를 끝마쳐 반도를 되찾은 이후에는 신대륙과 동남아시아까지 세를 넓힌 스페인 제국이 성립했으며, 근세 들어서는 유럽의 이류 국가로 전락해 내전과 오랜 독재를 겪은 후 현대의 민주주의 입헌군주정이 들어섰다. 이 복잡한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변화무쌍한 기후 조건과 반도의 지리, 민족의 다양성, 외부와의 끊임없는 교류, 두 대륙과 두 바다를 잇는 교량으로서의 지정학적 중요성, 가톨릭과 이슬람의 상호작용 등 수많은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스페인사를 한 권으로 엮어내다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의 약사略史 시리즈 중 한 권인 이 책은 평생 스페인을 연구한 학자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쉽고 명쾌하게 쓰였으며, 광범위한 주제를 세심하게 아우른다. 또한 삽화와 지도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 더 읽을 만한 자료들도 풍부하게 소개해 스페인사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역동적인 스페인 역사의 윤곽을 잡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의 역사는 풍부한 다원성과 그로 인한 갈등 및 조화로 점철되어 있다. 로마 치하의 ‘히스파니아’ 시대를 거쳐 서고트족이 유럽 반대편에서 건너와 왕국을 세우더니, 서고트족을 몰아낸 무슬림이 몇 세기간 반도를 지배했다. 두 명의 걸출한 가톨릭 왕이 레콩키스타를 끝마쳐 반도를 되찾은 이후에는 신대륙과 동남아시아까지 세를 넓힌 스페인 제국이 성립했으며, 근세 들어서는 유럽의 이류 국가로 전락해 내전과 오랜 독재를 겪은 후 현대의 민주주의 입헌군주정이 들어섰다. 이 복잡한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변화무쌍한 기후 조건과 반도의 지리, 민족의 다양성, 외부와의 끊임없는 교류, 두 대륙과 두 바다를 잇는 교량으로서의 지정학적 중요성, 가톨릭과 이슬람의 상호작용 등 수많은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
목차
서문
CHAPTER 1 영토와 옛 주민
CHAPTER 2 고대의 유산
CHAPTER 3 중세 스페인의 다양성
CHAPTER 4 국제 강국으로의 발흥
CHAPTER 5 최초의 세계제국
CHAPTER 6 근대성을 향하여: 나폴레옹의 침입에서 알폰소 13세까지
CHAPTER 7 스페인 정신을 위한 투쟁: 공화국, 내전, 독재
CHAPTER 8 새로운 스페인, 새로운 스페인 사람: 유럽인, 민주주의, 다문화
연대표와 통치자
더 알아보기
CHAPTER 1 영토와 옛 주민
CHAPTER 2 고대의 유산
CHAPTER 3 중세 스페인의 다양성
CHAPTER 4 국제 강국으로의 발흥
CHAPTER 5 최초의 세계제국
CHAPTER 6 근대성을 향하여: 나폴레옹의 침입에서 알폰소 13세까지
CHAPTER 7 스페인 정신을 위한 투쟁: 공화국, 내전, 독재
CHAPTER 8 새로운 스페인, 새로운 스페인 사람: 유럽인, 민주주의, 다문화
연대표와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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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이곳의 지리적 용어는 모두 복잡한 역사를 지닌다. 그리스인은 이 반도를 이베리아Iberia라고, 로마인은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불렀다. 로마제국 말기부터 8세기까지 사용된 스페인Spain이라는 용어는 정치적 현실보다 편의에 따른 용어였다. 이곳의 영토와 민족들을 묘사한 다른 용어들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졌다. 무슬림이 스페인을 장악했던 시기에 그들은 반도에서 손에 넣은 지역을 알안달루스al-Andalus라고 불렀고, 이 단어가 이르는 지리적 범위는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 팽창하다가 종국에는 축소되었다. 중세 유대인들은 이곳을 세파라드Sefarad라고 불렀다.
--- p.13
탕헤르의 총독 타리끄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7000명에서 1만2000명에 이르는 베르베르족 군대가 해협을 건너 오늘날 타리끄의 언덕, 즉 지브롤터라는 이름이 붙은 칼페산 기슭에 군영을 설치했다. 로데리쿠스가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북방에서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전투에서 패하고 목숨을 잃었으며 이슬람 침략에 맞선 실전적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서고트왕국과 함께 이베리아반도의 고대사는 갑작스러운 최후를 맞이했다.
--- p.72
778년에 카를 대제는 이슬람 총독의 사라고사 탈환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의 서쪽 통로를 통해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 론세스바예스에서 주민들이 카를 대제의 후위 부대를 매복 습격했고, 그 결과 영웅 흐로딜란드(롤랑)와 안셀무스를 비롯해 많은 이가 죽었다. 이 사건으로 카를 대제는 몇 년 동안 스페인 습격을 단념했다. 수 세기가 지난 뒤, 11세기 후반을 시작으로 그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고 마침내 프랑스 중세의 위대한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를 낳았다.
--- p.92
콜럼버스가 가톨릭 공동왕에게 제안한 내용을 자세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는 1480년대 중반 공동왕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세계의 모습을 상상한 뒤 아시아로 가는 전체 항로를 짰거나, 아니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처음 두 차례의 항해 이후에 예상을 수정하고 개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구 둘레가 실제보다 약 25퍼센트 짧고 일본이 중국 해안에서 약 24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믿은 듯하다.
--- p.173
같은 시기에 고야는 어쩌면 그의 최고 작품에 해당할, 굉장히 인상적인 초상화 「카를로스 4세의 가족La familia de Carlos IV」을 통해 카를로스 4세와 왕비, 자식 그리고 여러 친척을 그렸다. (...)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을 그린 초상화에서는 왕권의 과시적 요소도 그들에 대한 고야의 멸시를 숨길 수 없었다. 카를로스 4세, 왕비 마리아 루이사, 장남 페르난도는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으며 다른 가족도 대부분 비슷하게 특색 없는 모습이다. 왕의 예전 위풍당당함은 사라지고 혼란스러운 아둔함이 대신하고 있다. 고야가 한때 어여쁘고 쾌활한 이로 묘사했던 왕비는 거칠고 천박한 모습이다.
--- p.273
다른 곳의 내전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내전은 가족과 공동체를 산산이 부숴놓았다. 강한 신념, 공포, 개인적 반감, 야심, 비겁함, 혹은 온갖 수많은 다른 동기로, 이웃들은 서로를 공격했다. 내전은 억압된 분노와 과거의 증오 곁에 참상에 대한 기억을 새로이 만들어냈다.
--- p.341
일부 역사가는 프랑코가 무솔리니와 히틀러 못지않은 파시스트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분명 주변에 개인숭배의 분위기를 구축하기에는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그러기를 바랐을 테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그는 군 장교이자 반공산주의자였고, 훗날 본인의 주장대로라면 군주제 지지자였다. 그는 자신의 통치 체제를 전통적인 용어로 ‘유기적 민주국가’라고 묘사하곤 했지만, 그 용어가 지닌 전통적인 의미는 제거해버렸다. (…) 1964년에 정치학자 후안 린츠는 스페인을 특징짓기 위해 권위주의 정권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규정했다.
--- p.353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Cuentame como paso」라는 제목의 주말 드라마는 가공의 알칸타라 가족 이야기를 몇 세대에 걸쳐 풀어놓는다. 이야기는 프랑코 정권 말기인 1968년부터 그들을 따라가면서 현재로 이어진다. 드라마 방영이 시작된 이후 매주 목요일, 스페인의 저녁 식사 시간인 밤 10시, 자신들의 삶과 조국의 최근 역사를 다룬 이야기가 펼쳐지면 수백만 명의 스페인 사람이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꼼짝 않고 앉는다. 노련한 작가, 프로듀서, 배우로 이루어진 팀이 얽히고설킨 역사를 인간애와 더불어 균형 있게 묘사하는 이 시리즈는 압도적인 성공작으로서 그 자체로 사회적·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 p.13
탕헤르의 총독 타리끄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7000명에서 1만2000명에 이르는 베르베르족 군대가 해협을 건너 오늘날 타리끄의 언덕, 즉 지브롤터라는 이름이 붙은 칼페산 기슭에 군영을 설치했다. 로데리쿠스가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북방에서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전투에서 패하고 목숨을 잃었으며 이슬람 침략에 맞선 실전적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서고트왕국과 함께 이베리아반도의 고대사는 갑작스러운 최후를 맞이했다.
--- p.72
778년에 카를 대제는 이슬람 총독의 사라고사 탈환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의 서쪽 통로를 통해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 론세스바예스에서 주민들이 카를 대제의 후위 부대를 매복 습격했고, 그 결과 영웅 흐로딜란드(롤랑)와 안셀무스를 비롯해 많은 이가 죽었다. 이 사건으로 카를 대제는 몇 년 동안 스페인 습격을 단념했다. 수 세기가 지난 뒤, 11세기 후반을 시작으로 그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고 마침내 프랑스 중세의 위대한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를 낳았다.
--- p.92
콜럼버스가 가톨릭 공동왕에게 제안한 내용을 자세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는 1480년대 중반 공동왕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세계의 모습을 상상한 뒤 아시아로 가는 전체 항로를 짰거나, 아니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처음 두 차례의 항해 이후에 예상을 수정하고 개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구 둘레가 실제보다 약 25퍼센트 짧고 일본이 중국 해안에서 약 24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믿은 듯하다.
--- p.173
같은 시기에 고야는 어쩌면 그의 최고 작품에 해당할, 굉장히 인상적인 초상화 「카를로스 4세의 가족La familia de Carlos IV」을 통해 카를로스 4세와 왕비, 자식 그리고 여러 친척을 그렸다. (...)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을 그린 초상화에서는 왕권의 과시적 요소도 그들에 대한 고야의 멸시를 숨길 수 없었다. 카를로스 4세, 왕비 마리아 루이사, 장남 페르난도는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으며 다른 가족도 대부분 비슷하게 특색 없는 모습이다. 왕의 예전 위풍당당함은 사라지고 혼란스러운 아둔함이 대신하고 있다. 고야가 한때 어여쁘고 쾌활한 이로 묘사했던 왕비는 거칠고 천박한 모습이다.
--- p.273
다른 곳의 내전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내전은 가족과 공동체를 산산이 부숴놓았다. 강한 신념, 공포, 개인적 반감, 야심, 비겁함, 혹은 온갖 수많은 다른 동기로, 이웃들은 서로를 공격했다. 내전은 억압된 분노와 과거의 증오 곁에 참상에 대한 기억을 새로이 만들어냈다.
--- p.341
일부 역사가는 프랑코가 무솔리니와 히틀러 못지않은 파시스트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분명 주변에 개인숭배의 분위기를 구축하기에는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그러기를 바랐을 테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그는 군 장교이자 반공산주의자였고, 훗날 본인의 주장대로라면 군주제 지지자였다. 그는 자신의 통치 체제를 전통적인 용어로 ‘유기적 민주국가’라고 묘사하곤 했지만, 그 용어가 지닌 전통적인 의미는 제거해버렸다. (…) 1964년에 정치학자 후안 린츠는 스페인을 특징짓기 위해 권위주의 정권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규정했다.
--- p.353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Cuentame como paso」라는 제목의 주말 드라마는 가공의 알칸타라 가족 이야기를 몇 세대에 걸쳐 풀어놓는다. 이야기는 프랑코 정권 말기인 1968년부터 그들을 따라가면서 현재로 이어진다. 드라마 방영이 시작된 이후 매주 목요일, 스페인의 저녁 식사 시간인 밤 10시, 자신들의 삶과 조국의 최근 역사를 다룬 이야기가 펼쳐지면 수백만 명의 스페인 사람이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꼼짝 않고 앉는다. 노련한 작가, 프로듀서, 배우로 이루어진 팀이 얽히고설킨 역사를 인간애와 더불어 균형 있게 묘사하는 이 시리즈는 압도적인 성공작으로서 그 자체로 사회적·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 p.393
출판사 리뷰
스페인의 고대사를 써내려간 다양한 민족
이베리아반도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하며, 고대부터 인구 이동의 통로 역할을 했다. 특히 시에라데아타푸에르카의 초기 유럽인 화석은 최소 78만 년 전의 것으로, 인류의 조상이 길게는 100만 년 동안 이베리아반도에 거주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지중해 문화권의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이 스페인에 관심을 갖기 전에는 북부에서 온 켈트인과 북아프리카에서 올라온 이베리아인이 선주민과 섞여 독자적인 농업, 상업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무역에 유리한 입지를 갖추고 있었기에 기원전 800년경 페니키아인을 시작으로 그리스인, 카르타고인이 반도에 진출해 정착지를 건설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베리아반도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이곳은 카르타고와 로마가 충돌하는 장이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카르타고를 스페인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로마가 비로소 스페인 역사의 첫 결정적인 시기를 좌우하게 된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스페인에 첫 왕국을 세운 것은 흥미롭게도 유럽의 반대편 동북쪽에서 나타난 서고트족이었다. 서고트족은 로마의 연방으로 편입되었다가 제국의 통합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했고, 410년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부족의 정착과 존속을 위해 로마의 편에 다시 선 서고트족은 이베리아에서 다른 게르만 부족을 몰아내는 역할을 맡게 된다. 유럽의 동쪽에서 서쪽 끝으로 이주해 이베리아반도를 성공적으로 재정복한 서고트족은 남부 갈리아의 통치권을 인정받고 이베리아를 로마에 반환했지만, 456년부터 독단적으로 이베리아반도를 손에 넣어 서고트왕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8세기에 이르러 타리끄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베르베르족 군대가 지브롤터해협을 건넜고, 서고트왕국은 이슬람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찬란하지만 혼란스러웠던 스페인제국의 황금기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슬림이 이베리아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그들의 오랜 존속은 스페인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이 남부 알안달루스를 지배하는 동안 북부에서는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 등 여러 기독교 왕국이 등장했다.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은 단순히 서로 반목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손을 잡고 뿌리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걸출한 ‘가톨릭 공동왕’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등장해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을 세우고 그라나다에서 최후의 이슬람 왕을 몰아내게 된다.
두 왕은 이베리아반도를 안정시키고 국제사회에서 스페인의 입지를 다지는 데 힘썼다. 콜럼버스를 앞세워 스페인령 아메리카제국의 첫 장을 열고, 교황청으로부터 종교재판의 권리를 얻어내고, 각종 의회를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등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시대에 이르러 ‘스페인’이라는 근대 국가의 상이 갖춰지게 된다. 특히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기 위해 유럽 동맹국들과 혼인관계를 맺는다는 야심찬 외교 전략을 펼쳤는데, 그 일환으로 합스부르크왕가가 스페인 왕조에 합류한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다음 왕으로 합스부르크왕가의 카를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하면서 스페인은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후 스페인은 거대한 제국으로서 황금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유럽의 복잡한 외교 정세에 휘말리기도 했다. 스페인을 통치하는 합스부르크왕가가 유럽의 수많은 지배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을 휩쓴 종교혁명,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유럽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 부르봉왕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스페인-프랑스 제국이라는 거대 세력의 탄생을 견제하기 위해 벌어진 왕위 계승 전쟁, 잉글랜드와의 해상 패권 다툼 등등, 수많은 전쟁 속에서 스페인은 ‘황금 함대’로 상징되는 짧은 전성기를 떠나보내게 된다. 결국 유럽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의 불길에 휩쓸리고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나라를 넘겨주면서 스페인의 찬란했던 중세는 끝을 맺는다.
스페인내전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
독립전쟁을 통해 나폴레옹을 몰아내고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왕정은 더 이상 근대 사회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페르난도의 무능한 통치와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 군부의 쿠데타, 의회의 혼란이 이어졌고, 심지어 왕위 계승 전쟁까지 세 차례나 더 발생했다. 공화주의자와 입헌군주제 지지자, 왕당파들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권력만을 좇았으며 카탈루냐인과 연방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내란과 테러를 일으키기도 했다. 군부와 왕과 의회 그리고 몇몇 독재자가 차례로 권력을 잡고 줄다리기를 하며 제1차 세계대전 시기를 넘겼지만 국내는 안정되지 못했고, 결국 1936년에 근대 스페인을 규정짓는 스페인내전이 발발하고야 말았다.
모든 분노, 좌절, 계층 간 적대감이 뒤섞이고 스페인을 좀먹고 있던 여러 세력이 분쟁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스페인내전은 유럽 역사상 최악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대부분의 시민은 자기가 지지하는 쪽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자기네 지역을 장악한 진영에 적응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공동체가 부숴졌고, 이웃끼리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3년에 걸친 국민군과 공화군의 전쟁 끝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군이 승리를 거머쥐었고, 1975년에 그가 사망하기까지 스페인에는 오랜 독재의 그늘이 드리웠다.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으로 즉위함으로써 부르봉왕가 입헌군주정이 부활했다.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삼은 새 정부가 출범했고, 독재의 그늘 아래 비밀스럽게 활동하던 정당들이 의회에 입성했다. 단 한 달 만에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불발로 끝났고, 스페인은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바스크와 카탈루냐가 정서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주의 운동을 이어나가는 등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혼란이 아직 스페인에 버젓이 남아 있다. 프랑코 독재 시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청산할 것인지도 또 다른 미해결 과제다. 그럼에도 저자는 스페인 국민이 더 이상 미래도, 과거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 시민이 되었다고 평가하며 책을 끝맺는다.
이베리아반도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하며, 고대부터 인구 이동의 통로 역할을 했다. 특히 시에라데아타푸에르카의 초기 유럽인 화석은 최소 78만 년 전의 것으로, 인류의 조상이 길게는 100만 년 동안 이베리아반도에 거주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지중해 문화권의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이 스페인에 관심을 갖기 전에는 북부에서 온 켈트인과 북아프리카에서 올라온 이베리아인이 선주민과 섞여 독자적인 농업, 상업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무역에 유리한 입지를 갖추고 있었기에 기원전 800년경 페니키아인을 시작으로 그리스인, 카르타고인이 반도에 진출해 정착지를 건설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베리아반도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이곳은 카르타고와 로마가 충돌하는 장이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카르타고를 스페인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로마가 비로소 스페인 역사의 첫 결정적인 시기를 좌우하게 된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스페인에 첫 왕국을 세운 것은 흥미롭게도 유럽의 반대편 동북쪽에서 나타난 서고트족이었다. 서고트족은 로마의 연방으로 편입되었다가 제국의 통합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했고, 410년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부족의 정착과 존속을 위해 로마의 편에 다시 선 서고트족은 이베리아에서 다른 게르만 부족을 몰아내는 역할을 맡게 된다. 유럽의 동쪽에서 서쪽 끝으로 이주해 이베리아반도를 성공적으로 재정복한 서고트족은 남부 갈리아의 통치권을 인정받고 이베리아를 로마에 반환했지만, 456년부터 독단적으로 이베리아반도를 손에 넣어 서고트왕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8세기에 이르러 타리끄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베르베르족 군대가 지브롤터해협을 건넜고, 서고트왕국은 이슬람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찬란하지만 혼란스러웠던 스페인제국의 황금기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슬림이 이베리아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그들의 오랜 존속은 스페인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이 남부 알안달루스를 지배하는 동안 북부에서는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 등 여러 기독교 왕국이 등장했다.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은 단순히 서로 반목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손을 잡고 뿌리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걸출한 ‘가톨릭 공동왕’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등장해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을 세우고 그라나다에서 최후의 이슬람 왕을 몰아내게 된다.
두 왕은 이베리아반도를 안정시키고 국제사회에서 스페인의 입지를 다지는 데 힘썼다. 콜럼버스를 앞세워 스페인령 아메리카제국의 첫 장을 열고, 교황청으로부터 종교재판의 권리를 얻어내고, 각종 의회를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등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시대에 이르러 ‘스페인’이라는 근대 국가의 상이 갖춰지게 된다. 특히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기 위해 유럽 동맹국들과 혼인관계를 맺는다는 야심찬 외교 전략을 펼쳤는데, 그 일환으로 합스부르크왕가가 스페인 왕조에 합류한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다음 왕으로 합스부르크왕가의 카를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하면서 스페인은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후 스페인은 거대한 제국으로서 황금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유럽의 복잡한 외교 정세에 휘말리기도 했다. 스페인을 통치하는 합스부르크왕가가 유럽의 수많은 지배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을 휩쓴 종교혁명,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유럽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 부르봉왕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스페인-프랑스 제국이라는 거대 세력의 탄생을 견제하기 위해 벌어진 왕위 계승 전쟁, 잉글랜드와의 해상 패권 다툼 등등, 수많은 전쟁 속에서 스페인은 ‘황금 함대’로 상징되는 짧은 전성기를 떠나보내게 된다. 결국 유럽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의 불길에 휩쓸리고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나라를 넘겨주면서 스페인의 찬란했던 중세는 끝을 맺는다.
스페인내전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
독립전쟁을 통해 나폴레옹을 몰아내고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왕정은 더 이상 근대 사회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페르난도의 무능한 통치와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 군부의 쿠데타, 의회의 혼란이 이어졌고, 심지어 왕위 계승 전쟁까지 세 차례나 더 발생했다. 공화주의자와 입헌군주제 지지자, 왕당파들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권력만을 좇았으며 카탈루냐인과 연방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내란과 테러를 일으키기도 했다. 군부와 왕과 의회 그리고 몇몇 독재자가 차례로 권력을 잡고 줄다리기를 하며 제1차 세계대전 시기를 넘겼지만 국내는 안정되지 못했고, 결국 1936년에 근대 스페인을 규정짓는 스페인내전이 발발하고야 말았다.
모든 분노, 좌절, 계층 간 적대감이 뒤섞이고 스페인을 좀먹고 있던 여러 세력이 분쟁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스페인내전은 유럽 역사상 최악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대부분의 시민은 자기가 지지하는 쪽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자기네 지역을 장악한 진영에 적응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공동체가 부숴졌고, 이웃끼리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3년에 걸친 국민군과 공화군의 전쟁 끝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군이 승리를 거머쥐었고, 1975년에 그가 사망하기까지 스페인에는 오랜 독재의 그늘이 드리웠다.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으로 즉위함으로써 부르봉왕가 입헌군주정이 부활했다.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삼은 새 정부가 출범했고, 독재의 그늘 아래 비밀스럽게 활동하던 정당들이 의회에 입성했다. 단 한 달 만에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불발로 끝났고, 스페인은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바스크와 카탈루냐가 정서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주의 운동을 이어나가는 등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혼란이 아직 스페인에 버젓이 남아 있다. 프랑코 독재 시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청산할 것인지도 또 다른 미해결 과제다. 그럼에도 저자는 스페인 국민이 더 이상 미래도, 과거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 시민이 되었다고 평가하며 책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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