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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서구신학의 틀을 의존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읽는 성서요, 유대 신화를 통해 인간의 보편을 읽어내려 한다. 기독교의 정형화된 교리적 시각을 벗어나 이야기가 갖는 참 의미를 탐색한다. 유기적영감설이나 축자영감설이 아닌, 이야기 그 자체가 갖는 힘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옛사람의 방식에서 인류의 지혜와 인간의 실존, 존재에 대한 무궁한 힌트가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에덴의 이야기는 옛사람이 전해주는 오늘 지금 여기의 인간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다.
히브리어 원문을 바탕으로 에덴 이야기를 풀이하였다. 기존 서구신학과 기독교 교리의 틀에서 해석하기보다는 도리어 에덴 이야기를 통해 기존 신학의 여러 개념을 과감히 해체한다. 에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과 팩트로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와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고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옛사람의 지혜에 집중한다.
히브리어 원문을 바탕으로 에덴 이야기를 풀이하였다. 기존 서구신학과 기독교 교리의 틀에서 해석하기보다는 도리어 에덴 이야기를 통해 기존 신학의 여러 개념을 과감히 해체한다. 에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과 팩트로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와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고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옛사람의 지혜에 집중한다.
목차
머리말 / 6
뮈토스에 대해 / 13
요한복음의 로고스 - 생각하기와 말하기 / 19
창세기 명칭과 에덴 이야기 / 33
창세기 1장과 2장은 / 42
엘로힘과 야웨 엘로힘 / 48
이야기의 원형(에덴) / 62
신화 속 그(HE)와 나(I) / 66
정신의 네 단계(네페쉬, 루아흐, 네샤마, 예흐예) / 72
창세기 2장
천지와 지천 / 85
비로소 사람(하아담 아파르) / 98
동방의 에덴 / 107
아담 / 114
강의 발원지 / 121
에덴의 네 강 / 129
1) 비손 2) 기혼 3) 힛데겔 4) 유브라데
경작과 지킴 / 143
동산 각종 나무 / 149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 159
돕는 배필 / 165
1)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
2)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하리라
3) 부모를 떠나
아담의 이름짓기 / 181
갈빗대로 / 189
알-켄의 용법과 부모를 떠나 / 198
벌거벗었으나 / 204
창세기 3장
뱀과 밈메누 / 215
여자의 후손 / 221
가시와 엉겅퀴 / 228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 233
그룹 / 243
창세기 4장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 251
아브라함의 이야기 구성 요소 / 258
에덴의 인물들과 생명의 계보 / 265
가인을 죽이는 자 / 272
가인과 라멕의 이야기 구조 / 278
그들의 이름은 사람 / 283
뮈토스에 대해 / 13
요한복음의 로고스 - 생각하기와 말하기 / 19
창세기 명칭과 에덴 이야기 / 33
창세기 1장과 2장은 / 42
엘로힘과 야웨 엘로힘 / 48
이야기의 원형(에덴) / 62
신화 속 그(HE)와 나(I) / 66
정신의 네 단계(네페쉬, 루아흐, 네샤마, 예흐예) / 72
창세기 2장
천지와 지천 / 85
비로소 사람(하아담 아파르) / 98
동방의 에덴 / 107
아담 / 114
강의 발원지 / 121
에덴의 네 강 / 129
1) 비손 2) 기혼 3) 힛데겔 4) 유브라데
경작과 지킴 / 143
동산 각종 나무 / 149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 159
돕는 배필 / 165
1)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
2)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하리라
3) 부모를 떠나
아담의 이름짓기 / 181
갈빗대로 / 189
알-켄의 용법과 부모를 떠나 / 198
벌거벗었으나 / 204
창세기 3장
뱀과 밈메누 / 215
여자의 후손 / 221
가시와 엉겅퀴 / 228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 233
그룹 / 243
창세기 4장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 251
아브라함의 이야기 구성 요소 / 258
에덴의 인물들과 생명의 계보 / 265
가인을 죽이는 자 / 272
가인과 라멕의 이야기 구조 / 278
그들의 이름은 사람 / 283
책 속으로
성서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한다(딤전 4:7). 성서는 온통 이야기로 기록되었다. 바울의 신화를 버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서는 공교히(궤변을 꾸며) 만든 이야기일까? 신화에 매몰되면, 그러니까 이야기에서 로고스를 읽어내지 못하면, 신화에 빠진 거고 그럴 때 망령되고 허탄한 게(딛 1:14) 되고 만다. 신화는 봉한 샘이고 덮힌 우물이고 로고스를 함장하고 있는 판도라 상자다. 인을 떼어 봉함이 풀릴 때마다, 우물의 덮개가 열릴 때마다 로고스는 홍수를 이루고 심판을 완성하고 생명의 꽃을 피운다.
--- pp.13-14
우리가 귀담아 새겨들어야 할 말씀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소리 곧 호 로고스다. 이를 통해 우리의 ‘존재하기’가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 ‘로고스’는 거기서 창조의 주체가 된다. 존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 로고스’와 ‘존재하기’는 상호 순환적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다고 하겠다. 존재하기에 의해 말하기가 이뤄지고 말하기에 의해 ‘존재하기’가 이뤄진다.
--- p.32
에덴의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다. 서구 문명의 밑뿌리에 있는 원형적 이야기다. 에덴의 이야기는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출애굽의 이야기, 신약의 수많은 이야기의 원형이다.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는 에덴 이야기의 변주(變奏)에 지나지 않는다.
--- p.38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담이 인류의 시조라고 해석하는 것은 마치 우리 민담 중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등장하는 호랑이가 호랑이의 시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야기를 이야기로, 메타포를 메타포로 읽지 않으면 빚어지는 현상이고 축자영감설이나 유기적영감설 등의 신학적 이론이 빚어내는 촌극이다.
--- p.44
히브리인들에게 드러난, 모세에게 드러난 ‘야웨’ 하나님의 정체성은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수렴된다.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엄중한 계명은 야웨를 또다시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과 다름이 없는데, 히브리인들은 야웨를 ‘아도나이’로 바꿔 부르고 만다. 기록은 ‘야웨 엘로힘’으로 되어있는데 읽기는 ‘아도나이 엘로힘’으로 읽는다. 아도나이 엘로힘은 ‘주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망령되이 부르지 않겠다는 그들의 충정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참으로 망령된 이름으로 바꿔 부르고 만다. 여기서 ‘야웨’는 히브리인들에게 활자로만 남아버렸고, 그들의 언어 속에서 망실(亡失) 되었다. 모세에게 계시된 야웨 하나님이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얘기다.
--- p.57
성서 이야기의 제 이 원형은 에덴 이야기다. 이 역시 모든 성서 이야기의 서사구조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어 있고 스며 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무의식에 투영되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이해하는 것은 성서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원형적 이야기를 이해하면 그것에 의한 변주된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이야기로 구성된 이야기 모음집이다. 내러티브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성서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인생들이 모여 있는 곳은 거기가 어디든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언어는 있되 문자와 종이가 없던 시절, 공동체의 전통을 유지하고 관습을 전승하는 가장 원형적인 방식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밌어야 전승 가능하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소멸되기 쉽상이다.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는 이야기의 생명력이 없다.
--- pp.62-63
히브리 사상의 핵심은 He was 와 He will be 라면 헬라 사상의 핵심은 I was요 I am이며 I will be(is coming)다. 성서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절묘한 조화의 책이다. 요한복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He is I 와 I am HE 가 성립되는 장면이 모노게네스(독생 혹은 유일한 존재)다. 거기서 신학과 인간학은 접점을 맞이한다. 모노게네스(독생)는 우뢰의 아들이다.
--- p.71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 하늘에서도
동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영어 공부할 때의 ABC Song으로도 유명한 곡이지만, 우리말 번안 가사는 참으로 아름답다. 저 하늘의 별만을 바라보며 노래하지 말자. 누구나 그대의 가슴에 비치는 반짝거리는 작은 별, 이를 무시하지 말자.
--- p.76
에덴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낳고 낳고’에 대한 계보 이야기다. 천지의 계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개역개정본은 톨도트를 ‘내력’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천지의 ‘낳고 낳고’ 의 족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내력’이라 번역한다. 하늘이 하늘을 낳고 땅이 또 땅을 낳는다는 말은 메타포로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성립 가능한 문장이 아니다. 하늘이 하늘을 낳는다거나 땅이 또 땅을 낳는다는 말을 이해하기란 상식적으로 어렵다. 해서일까? 번역자는 도저히 족보라거나 계보라고 번역해내지 못한다. 고심 끝에 찾아낸 답이 ‘내력’이리라. 현대인의 성경은 ‘대충’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최악의 번역이다.
--- p.88
성서의 ‘바라’는 낳다의 개념이다. ‘낳음(born)’은 곧 창조(create)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미는 젓을 물리며 양육한다. 사람의 꼴을 갖춰가도록 끊임없이 돌보며 무한 애정으로 아이를 아이답게 양육한다. 이를 ‘아사’(made)라 한다. 이미 태어난 아이는 사람이지만 더욱 사람답게 자라도록 돌본다. 창조의 연속성이다. 낳음의 연속성이다. 그런 점에서 양육도 낳음에 포괄된다는 말이다. 양육 또한 창조 행위에 속한다는 의미다. 사춘기가 되면 비로소 부모의 품으로부터 의식이 독립하려고 몸부림친다. 몸의 변화와 동시에 정신의 변혁기에 이르러 마침내 부모로부터 독립된 개체가 된다. 이것 역시 창조에 속하며 낳음에 속한다. 이때의 동사가 이를테면 히브리어로는 ‘야차르(form)’요, 조성됨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아사와 야차르도 바라에 포괄된다는 점이다. 그 모든 과정을 압축하면 바라로 표현할 수 있다. 나누어 말하면 바라, 아사, 야차르로 세분할 수 있다. 사춘기를 거쳐 몸과 정신이 독립하고 마침내 부모를 떠나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 부모의 창조 사역은 마무리된다.
--- p.100
동방의 에덴동산이란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자라는 각종 나무들 역시 물리적 나무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인간의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다. 미케뎀(동방으로부터)이라는 말은 성소가 지성소를 향하여 있듯 ‘네페쉬 하야’인 아담은 늘 지성소를 향하여(l]) 있는 존재임을 상징한다.
--- p.112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 역시 비록 그 이야기 구조가 신화적인 이야기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죄의 기원이나 인류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 아닌 인간에 대한 원형적 통찰이 담긴 기록이다. 거기서 인류의 ‘죄의 기원’을 읽으려 할 때, 변질된 신학 이론이 창출되고 수많은 사변적인 논리가 생성된다. 아담 이야기는 인류 타락의 기원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아담 이야기는 특정 아담을 통해 인간의 보편을 말한다. 그런데 특정 아담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모든 아담들에게 죄가 있게 되었다는 식의 성경 읽기가 수천 년 동안 되풀이되고 있다. 그것은 창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체 성경에 대한 읽기 방식이 그랬고 그 같은 인간관 아래에서 형성된 서구 문명의 역사가 왜곡의 역사요, 그러한 인간관에 의해 면면히 흘러온 종교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굴곡지게 했다. 인간을 해방하기는커녕 종교이데올로기로 족쇄를 채웠다.
--- pp.114-115
유대인들의 광야 이야기가 성서에서는 단순히 역사적 이야기로 채택된 것이 아니라, 영성의 순례기로 그려지고 있고,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바울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 논증의 이야기가 아닌 영성의 순례기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은 에덴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고 힌트인 셈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다. 역사적 팩트로 이야기를 읽으려 한다면 얼마나 이상해지는가. 내러티브는 내러티브로 읽어야 한다.
--- p.122
기억력을 통해 쌓아지는 표면적 지식의 세계에 생명의 지렛점이 작동하여 기억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정보 집적의 세계에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자신의 이기적 자아를 위해, 경쟁과 정보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집적된 기억의 지식이 활동하게 된다. 이것이 큰 강에서 물을 마시고 싶은 갈증이다.
--- p.142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는 각종 양식은 도외시한 채 타인에게서 먹을 양식을 취하려 한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후 기운을 빼앗아 취하려 한다. 흡혈귀가 달리 있을까. 그러나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땅이 새롭게 태어나고 하늘이 다시 열리고 난 이후에는 다시 타인의 밭에서 양식을 취하지 않는다. 에덴의 각종 나무로부터 반드시 먹으라는 것이 에덴의 이야기가 강조하는 바다.
--- p.156
정원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인생으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별처럼 아름다운 깨달음이 도리어 인생의 덫이고 무덤인 줄 알게하는 나무다. 마침내 생명 나무로 귀의하도록 안내하는 이정표라는 말이다. 지식의 껍질을 깨고 나면 거기 마음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이 솟아난다.
--- p.165
지식을 추구하고 율법에 머무는 것은 뼈다귀만 앙상한 에고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살도 없고 생기가 없는 그냥 마른 뼈다. 영지주의(그노티시즘)란 영적 지식, 영적 깨달음에 목매는 현상이다. 영적 지식과 깨달음에 사로잡히면 그 지식의 포로가 되고 만다. 영적 지식을 무기로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미혹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앙상한 뼈다귀만 남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살이 없고 근육이 없다. 그노티즘은 마른 뼈다귀에 불과 하지만 인생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서야 고토인 가나안을 다시 그리워하게 된다. 영적 지식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분리한다. 두로 왕의 형상을 하고 북극에 좌정하는 모습에 사로잡힌다. 북방의 포로가 되는 자화상이다.
--- p.170
이전에 타자로부터 배운 언어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스스로 세운 언어가 누군가에게는 들려지지 않는 새로운 방언이다. 겸손을 버리고 새로 겸손을 세우는 것, 인내를 버리고 인내를 새로 세우는 것을 일컬어 새로운 언어, 새로운 나라의 방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어가 다르니 소통이 달라진다. 누군가에겐 겸손이 천사숭배와 같이 당위이지만, 새로 겸손을 세운 이들에게는 그것이 당위가 아니라 존재다. 율법에서 난 겸손은 무거운 짐이고 사망의 멍에요 도달할 수 없는 덕목이다.
--- p.186
정신의 새로운 요구를 맞이하게 된다. 본래 정신은 숨어 있고 은폐되어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야웨 하나님은 그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신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되게 하기 위한 결혼의 원리며 소통의 원리다. 그러나 번역하는 이들이나 신학자들이 흙을 사람을 만드는 재료로 오해하듯 갈빗대 역시 여자를 만드는 재료로 오해한다. 에덴 이야기에서 갈빗대는 여자를 만드는 재료가 아니다. 도리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는 휘장이고 여자를 향해 세워야 할 제단이고 제물이다.
--- p.196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고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났듯 아담도 떠나는 곳이 있었다. 여기서 아담은 아파르(흙가루) 아담이다. 아담 아파르는 하아다마에서 떠나온 존재(민하아다마)다. ‘민’은 전치사 from이고, ‘하’는 정관사이며, ‘아다마’는 earth 혹은 ground다. 안개만 올라오던 그 땅으로부터 떠나서 아담 아파르가 된다는 것이 에덴 이야기에 나오는 떠남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는 하아다마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이고 부모인 셈이다.
--- pp.202-203
에덴의 벌거벗음과 광인의 벌거벗음은 물론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겠다.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에덴의 이야기나 거사라 광인의 이야기나 옷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를 게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무덤가에 머물고 있는 것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더니 결국 뱀과 대화를 하는 것이나 그 구조가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 군대 귀신을 쫓아낸 것처럼, 에덴 이야기에서는 뱀의 씨를 쫓아내는 대하드라마가 전개된다. 마침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거라사 광인은 옷을 입게 된다. 마침내 부끄러움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을 입지만, 결국 서늘한 바람에 옷은 벗겨지고 만다. 가죽 옷으로 다시 옷입는다.
--- pp.206-207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속에는 하나님은 선악의 신이라는 전제가 담겨 있다. 즉,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 신에 대한 뱀의 신관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신에 대한 뱀의 규정, 뱀의 신론(神論)이다. 이러한 뱀의 신론에 온 인류, 성서를 읽는 수많은 사람이 현혹되어 있다. 한 걸음도 뱀이 규정한 신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뱀이 규정한 신은 결국 뱀이다. 따라서 엘로힘으로 옷입고 아름다운 치장을 하고 나타난다 해도 붙어 있는 이름과 상관없이 뱀신이다. 옛뱀이요, 용이라는 말이다.
--- p.220
아벨은 여자의 후손이다. 동정녀 탄생 신화는 육체의 이야기로는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얘기나 정신의 세계에서는 허구일 수 없다. 정신의 세계에서는 결코 터무니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동정녀 탄생 설화는 남자를 알지 못하나 아들을 낳는다는 메타포다. 이때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은 비록 남편 다섯이 있었더라도, 지금의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는 의미일 뿐 육체의 순결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즉, 남편이 있지만 동침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생명을 주는 자’의 의미로 산자의 어미 하와( ???? ??????????)의 이름이 부여된다.
--- p.225
에덴 이야기에서 “아파르(흙)가 되리라”는 예언은 순례의 고단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다. 아파르는 성서의 알파요 오메가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기 위해서는 아파르가 있어야 한다. 아파르는 누구든 각자의 자기 됨이 시작되는 비밀이다. 비로소 야웨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파르에 숨겨 있다.
--- pp.243-244
그룹(케루빔)이란 휘장을 걷어내고 지성소에 들어갔더라도 다시 마주치게 되는 법궤의 뚜껑에 조각된 두 천사다. 선악의 세계를 벗어나야 비로소 인생은 죄라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룹을 마주하며 죄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왜냐면 선악의 세계가 아니기에 거기에는 옳음도 그름도 없기 때문이다. 하여 이곳을 구약성서는 속죄소라 부르는 것이다.
--- p.248
에덴 이야기에서 이 두 자아의식 곧 가인과 아벨이라는 정체성이 비로소 창세기 4장에 가서야 뚜렷하고 선명하게 싹 튼다고 보면 된다. 처음 사람이 가인이라는 뜻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오로지 소유(재물, 지식, 명예, 기타 인간이 탐닉하는 무엇이든)를 통해 강력한 자아의 상을 갖게 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사람이 오랫동안 자신을 가인의 이미지로 인식하며 살았더라도 가인으로 만족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인의 형상으로 구축된 자아 인식에 대해 회의하게 되고 가인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눈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헛되다는 인식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자아가 태어난다. 이 존재가 바로 아벨이다. 하여 아벨은 ‘헛됨, 텅빔, 공(空)’이라는 의미를 그 이름에 담고 있다.
--- p.257
각자의 이야기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로지 ‘야웨’며 ‘자기 자신’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하갈과 사래와 사라는 나를 둘러싼 수많은 또 다른 나의 이야기다. 바울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에덴의 이야기를 읽어보자는 거다. 나를 둘러싼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내 이야기에서는 적어도 조연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 그대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그대 자신이요, 신성으로 드러난 ‘야웨’만이 주인공이라 하겠다.
--- p.266
셋은 사람의 아들이며 인자, 곧 ‘벤 하아담(??? ????), 그 사람의 그 아들, (? υ??? το? ?νθρ?που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이 된다. ‘그 사람의 그 아들’은 곧 가인도 아니고 아벨도 아니고 ‘셋’이어야 하는 게 거기에 있다. 에덴 이야기에 담겨 있는 사람 창조 이야기. 창조 신화(창세기 1장 창조설화)의 에덴 버전이다.
--- p.273
이것이 계보요 족보라는 말이다. 하늘과 땅의 계보는 결국 사람의 계보라는 걸, 그리고 사람의 아들의 계보라는 걸 창세기 5장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도 땅의 ‘낳고 낳고’요, 하늘의 ‘낳고 낳음’이다.
--- pp.13-14
우리가 귀담아 새겨들어야 할 말씀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소리 곧 호 로고스다. 이를 통해 우리의 ‘존재하기’가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 ‘로고스’는 거기서 창조의 주체가 된다. 존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 로고스’와 ‘존재하기’는 상호 순환적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다고 하겠다. 존재하기에 의해 말하기가 이뤄지고 말하기에 의해 ‘존재하기’가 이뤄진다.
--- p.32
에덴의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다. 서구 문명의 밑뿌리에 있는 원형적 이야기다. 에덴의 이야기는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출애굽의 이야기, 신약의 수많은 이야기의 원형이다.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는 에덴 이야기의 변주(變奏)에 지나지 않는다.
--- p.38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담이 인류의 시조라고 해석하는 것은 마치 우리 민담 중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등장하는 호랑이가 호랑이의 시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야기를 이야기로, 메타포를 메타포로 읽지 않으면 빚어지는 현상이고 축자영감설이나 유기적영감설 등의 신학적 이론이 빚어내는 촌극이다.
--- p.44
히브리인들에게 드러난, 모세에게 드러난 ‘야웨’ 하나님의 정체성은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수렴된다.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엄중한 계명은 야웨를 또다시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과 다름이 없는데, 히브리인들은 야웨를 ‘아도나이’로 바꿔 부르고 만다. 기록은 ‘야웨 엘로힘’으로 되어있는데 읽기는 ‘아도나이 엘로힘’으로 읽는다. 아도나이 엘로힘은 ‘주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망령되이 부르지 않겠다는 그들의 충정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참으로 망령된 이름으로 바꿔 부르고 만다. 여기서 ‘야웨’는 히브리인들에게 활자로만 남아버렸고, 그들의 언어 속에서 망실(亡失) 되었다. 모세에게 계시된 야웨 하나님이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얘기다.
--- p.57
성서 이야기의 제 이 원형은 에덴 이야기다. 이 역시 모든 성서 이야기의 서사구조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어 있고 스며 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무의식에 투영되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이해하는 것은 성서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원형적 이야기를 이해하면 그것에 의한 변주된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이야기로 구성된 이야기 모음집이다. 내러티브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성서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인생들이 모여 있는 곳은 거기가 어디든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언어는 있되 문자와 종이가 없던 시절, 공동체의 전통을 유지하고 관습을 전승하는 가장 원형적인 방식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밌어야 전승 가능하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소멸되기 쉽상이다.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는 이야기의 생명력이 없다.
--- pp.62-63
히브리 사상의 핵심은 He was 와 He will be 라면 헬라 사상의 핵심은 I was요 I am이며 I will be(is coming)다. 성서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절묘한 조화의 책이다. 요한복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He is I 와 I am HE 가 성립되는 장면이 모노게네스(독생 혹은 유일한 존재)다. 거기서 신학과 인간학은 접점을 맞이한다. 모노게네스(독생)는 우뢰의 아들이다.
--- p.71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 하늘에서도
동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영어 공부할 때의 ABC Song으로도 유명한 곡이지만, 우리말 번안 가사는 참으로 아름답다. 저 하늘의 별만을 바라보며 노래하지 말자. 누구나 그대의 가슴에 비치는 반짝거리는 작은 별, 이를 무시하지 말자.
--- p.76
에덴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낳고 낳고’에 대한 계보 이야기다. 천지의 계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개역개정본은 톨도트를 ‘내력’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천지의 ‘낳고 낳고’ 의 족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내력’이라 번역한다. 하늘이 하늘을 낳고 땅이 또 땅을 낳는다는 말은 메타포로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성립 가능한 문장이 아니다. 하늘이 하늘을 낳는다거나 땅이 또 땅을 낳는다는 말을 이해하기란 상식적으로 어렵다. 해서일까? 번역자는 도저히 족보라거나 계보라고 번역해내지 못한다. 고심 끝에 찾아낸 답이 ‘내력’이리라. 현대인의 성경은 ‘대충’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최악의 번역이다.
--- p.88
성서의 ‘바라’는 낳다의 개념이다. ‘낳음(born)’은 곧 창조(create)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미는 젓을 물리며 양육한다. 사람의 꼴을 갖춰가도록 끊임없이 돌보며 무한 애정으로 아이를 아이답게 양육한다. 이를 ‘아사’(made)라 한다. 이미 태어난 아이는 사람이지만 더욱 사람답게 자라도록 돌본다. 창조의 연속성이다. 낳음의 연속성이다. 그런 점에서 양육도 낳음에 포괄된다는 말이다. 양육 또한 창조 행위에 속한다는 의미다. 사춘기가 되면 비로소 부모의 품으로부터 의식이 독립하려고 몸부림친다. 몸의 변화와 동시에 정신의 변혁기에 이르러 마침내 부모로부터 독립된 개체가 된다. 이것 역시 창조에 속하며 낳음에 속한다. 이때의 동사가 이를테면 히브리어로는 ‘야차르(form)’요, 조성됨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아사와 야차르도 바라에 포괄된다는 점이다. 그 모든 과정을 압축하면 바라로 표현할 수 있다. 나누어 말하면 바라, 아사, 야차르로 세분할 수 있다. 사춘기를 거쳐 몸과 정신이 독립하고 마침내 부모를 떠나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 부모의 창조 사역은 마무리된다.
--- p.100
동방의 에덴동산이란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자라는 각종 나무들 역시 물리적 나무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인간의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다. 미케뎀(동방으로부터)이라는 말은 성소가 지성소를 향하여 있듯 ‘네페쉬 하야’인 아담은 늘 지성소를 향하여(l]) 있는 존재임을 상징한다.
--- p.112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 역시 비록 그 이야기 구조가 신화적인 이야기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죄의 기원이나 인류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 아닌 인간에 대한 원형적 통찰이 담긴 기록이다. 거기서 인류의 ‘죄의 기원’을 읽으려 할 때, 변질된 신학 이론이 창출되고 수많은 사변적인 논리가 생성된다. 아담 이야기는 인류 타락의 기원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아담 이야기는 특정 아담을 통해 인간의 보편을 말한다. 그런데 특정 아담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모든 아담들에게 죄가 있게 되었다는 식의 성경 읽기가 수천 년 동안 되풀이되고 있다. 그것은 창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체 성경에 대한 읽기 방식이 그랬고 그 같은 인간관 아래에서 형성된 서구 문명의 역사가 왜곡의 역사요, 그러한 인간관에 의해 면면히 흘러온 종교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굴곡지게 했다. 인간을 해방하기는커녕 종교이데올로기로 족쇄를 채웠다.
--- pp.114-115
유대인들의 광야 이야기가 성서에서는 단순히 역사적 이야기로 채택된 것이 아니라, 영성의 순례기로 그려지고 있고,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바울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 논증의 이야기가 아닌 영성의 순례기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은 에덴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고 힌트인 셈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다. 역사적 팩트로 이야기를 읽으려 한다면 얼마나 이상해지는가. 내러티브는 내러티브로 읽어야 한다.
--- p.122
기억력을 통해 쌓아지는 표면적 지식의 세계에 생명의 지렛점이 작동하여 기억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정보 집적의 세계에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자신의 이기적 자아를 위해, 경쟁과 정보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집적된 기억의 지식이 활동하게 된다. 이것이 큰 강에서 물을 마시고 싶은 갈증이다.
--- p.142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는 각종 양식은 도외시한 채 타인에게서 먹을 양식을 취하려 한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후 기운을 빼앗아 취하려 한다. 흡혈귀가 달리 있을까. 그러나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땅이 새롭게 태어나고 하늘이 다시 열리고 난 이후에는 다시 타인의 밭에서 양식을 취하지 않는다. 에덴의 각종 나무로부터 반드시 먹으라는 것이 에덴의 이야기가 강조하는 바다.
--- p.156
정원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인생으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별처럼 아름다운 깨달음이 도리어 인생의 덫이고 무덤인 줄 알게하는 나무다. 마침내 생명 나무로 귀의하도록 안내하는 이정표라는 말이다. 지식의 껍질을 깨고 나면 거기 마음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이 솟아난다.
--- p.165
지식을 추구하고 율법에 머무는 것은 뼈다귀만 앙상한 에고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살도 없고 생기가 없는 그냥 마른 뼈다. 영지주의(그노티시즘)란 영적 지식, 영적 깨달음에 목매는 현상이다. 영적 지식과 깨달음에 사로잡히면 그 지식의 포로가 되고 만다. 영적 지식을 무기로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미혹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앙상한 뼈다귀만 남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살이 없고 근육이 없다. 그노티즘은 마른 뼈다귀에 불과 하지만 인생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서야 고토인 가나안을 다시 그리워하게 된다. 영적 지식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분리한다. 두로 왕의 형상을 하고 북극에 좌정하는 모습에 사로잡힌다. 북방의 포로가 되는 자화상이다.
--- p.170
이전에 타자로부터 배운 언어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스스로 세운 언어가 누군가에게는 들려지지 않는 새로운 방언이다. 겸손을 버리고 새로 겸손을 세우는 것, 인내를 버리고 인내를 새로 세우는 것을 일컬어 새로운 언어, 새로운 나라의 방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어가 다르니 소통이 달라진다. 누군가에겐 겸손이 천사숭배와 같이 당위이지만, 새로 겸손을 세운 이들에게는 그것이 당위가 아니라 존재다. 율법에서 난 겸손은 무거운 짐이고 사망의 멍에요 도달할 수 없는 덕목이다.
--- p.186
정신의 새로운 요구를 맞이하게 된다. 본래 정신은 숨어 있고 은폐되어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야웨 하나님은 그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신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되게 하기 위한 결혼의 원리며 소통의 원리다. 그러나 번역하는 이들이나 신학자들이 흙을 사람을 만드는 재료로 오해하듯 갈빗대 역시 여자를 만드는 재료로 오해한다. 에덴 이야기에서 갈빗대는 여자를 만드는 재료가 아니다. 도리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는 휘장이고 여자를 향해 세워야 할 제단이고 제물이다.
--- p.196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고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났듯 아담도 떠나는 곳이 있었다. 여기서 아담은 아파르(흙가루) 아담이다. 아담 아파르는 하아다마에서 떠나온 존재(민하아다마)다. ‘민’은 전치사 from이고, ‘하’는 정관사이며, ‘아다마’는 earth 혹은 ground다. 안개만 올라오던 그 땅으로부터 떠나서 아담 아파르가 된다는 것이 에덴 이야기에 나오는 떠남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는 하아다마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이고 부모인 셈이다.
--- pp.202-203
에덴의 벌거벗음과 광인의 벌거벗음은 물론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겠다.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에덴의 이야기나 거사라 광인의 이야기나 옷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를 게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무덤가에 머물고 있는 것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더니 결국 뱀과 대화를 하는 것이나 그 구조가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 군대 귀신을 쫓아낸 것처럼, 에덴 이야기에서는 뱀의 씨를 쫓아내는 대하드라마가 전개된다. 마침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거라사 광인은 옷을 입게 된다. 마침내 부끄러움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을 입지만, 결국 서늘한 바람에 옷은 벗겨지고 만다. 가죽 옷으로 다시 옷입는다.
--- pp.206-207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속에는 하나님은 선악의 신이라는 전제가 담겨 있다. 즉,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 신에 대한 뱀의 신관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신에 대한 뱀의 규정, 뱀의 신론(神論)이다. 이러한 뱀의 신론에 온 인류, 성서를 읽는 수많은 사람이 현혹되어 있다. 한 걸음도 뱀이 규정한 신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뱀이 규정한 신은 결국 뱀이다. 따라서 엘로힘으로 옷입고 아름다운 치장을 하고 나타난다 해도 붙어 있는 이름과 상관없이 뱀신이다. 옛뱀이요, 용이라는 말이다.
--- p.220
아벨은 여자의 후손이다. 동정녀 탄생 신화는 육체의 이야기로는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얘기나 정신의 세계에서는 허구일 수 없다. 정신의 세계에서는 결코 터무니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동정녀 탄생 설화는 남자를 알지 못하나 아들을 낳는다는 메타포다. 이때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은 비록 남편 다섯이 있었더라도, 지금의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는 의미일 뿐 육체의 순결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즉, 남편이 있지만 동침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생명을 주는 자’의 의미로 산자의 어미 하와( ???? ??????????)의 이름이 부여된다.
--- p.225
에덴 이야기에서 “아파르(흙)가 되리라”는 예언은 순례의 고단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다. 아파르는 성서의 알파요 오메가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기 위해서는 아파르가 있어야 한다. 아파르는 누구든 각자의 자기 됨이 시작되는 비밀이다. 비로소 야웨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파르에 숨겨 있다.
--- pp.243-244
그룹(케루빔)이란 휘장을 걷어내고 지성소에 들어갔더라도 다시 마주치게 되는 법궤의 뚜껑에 조각된 두 천사다. 선악의 세계를 벗어나야 비로소 인생은 죄라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룹을 마주하며 죄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왜냐면 선악의 세계가 아니기에 거기에는 옳음도 그름도 없기 때문이다. 하여 이곳을 구약성서는 속죄소라 부르는 것이다.
--- p.248
에덴 이야기에서 이 두 자아의식 곧 가인과 아벨이라는 정체성이 비로소 창세기 4장에 가서야 뚜렷하고 선명하게 싹 튼다고 보면 된다. 처음 사람이 가인이라는 뜻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오로지 소유(재물, 지식, 명예, 기타 인간이 탐닉하는 무엇이든)를 통해 강력한 자아의 상을 갖게 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사람이 오랫동안 자신을 가인의 이미지로 인식하며 살았더라도 가인으로 만족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인의 형상으로 구축된 자아 인식에 대해 회의하게 되고 가인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눈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헛되다는 인식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자아가 태어난다. 이 존재가 바로 아벨이다. 하여 아벨은 ‘헛됨, 텅빔, 공(空)’이라는 의미를 그 이름에 담고 있다.
--- p.257
각자의 이야기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로지 ‘야웨’며 ‘자기 자신’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하갈과 사래와 사라는 나를 둘러싼 수많은 또 다른 나의 이야기다. 바울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에덴의 이야기를 읽어보자는 거다. 나를 둘러싼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내 이야기에서는 적어도 조연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 그대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그대 자신이요, 신성으로 드러난 ‘야웨’만이 주인공이라 하겠다.
--- p.266
셋은 사람의 아들이며 인자, 곧 ‘벤 하아담(??? ????), 그 사람의 그 아들, (? υ??? το? ?νθρ?που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이 된다. ‘그 사람의 그 아들’은 곧 가인도 아니고 아벨도 아니고 ‘셋’이어야 하는 게 거기에 있다. 에덴 이야기에 담겨 있는 사람 창조 이야기. 창조 신화(창세기 1장 창조설화)의 에덴 버전이다.
--- p.273
이것이 계보요 족보라는 말이다. 하늘과 땅의 계보는 결국 사람의 계보라는 걸, 그리고 사람의 아들의 계보라는 걸 창세기 5장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도 땅의 ‘낳고 낳고’요, 하늘의 ‘낳고 낳음’이다.
--- p.285
'46.기독교 신학연구 (독학>책소개) > 8.목회신학(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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